공중파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케이블에서는 가능한 것들은?

SNL같은 노골적인 19금 프로나, 이런 걸 텔레비젼에서 할 수 있어란 생각이 드는 <세 얼간이>나 <더 지니어스>처럼 독특한 오락 프로그램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로 들 수 있는 것은 이제는 엄연하게 시즌제로 자리잡아가는 장르물 들이다.

공중파의 <아이리스>가 배우들의 출연 고사로 말미암아 시즌은 커녕, 속편 제작조차도 용두사미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법의학자를 다룬 <신의 퀴즈>가 시즌 3를 순조롭게 끝냈고, <뱀파이어 검사>도 시즌 2를 마쳤으며, 이제 <특수사건 전담반 TEN>도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시즌 2에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다른 작품들도 시즌제를 소화해 낼 정도로 스토리와 연출에 있어서 안정적 질을 담보해 내고 있지만, 4월 14일부터 방영시작한 <특수사건 점담반 TEN2>는 주요 캐릭별 발전은 물론, 텔레비젼 화면으로 보기엔 아까울 정도의 연출력과 카메라 웍으로 주인공 여지훈(주상욱 분)의 별명처럼 '괴물'같은 작품이 되어 돌아왔다.

 

 

<TEN>은 미드 멘탈리스트와 유사한 스토리 구성을 가진다.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연쇄 살인범에게 잃은 주인공, <멘탈리스>의 제인이나, <TEN>의 여지훈은 모두 그 수사의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뿐만 아니라, 여지훈의 별명이 괴물이듯이, 태평양이 사이를 가른 두 드라마의 주인공은 모두 살인범을 잡기 위해 그 스스로 무엇도 거침이 없는 괴물이 되어간다. 멘탈리스트의 주인공이 연쇄 살인범이 누구인가를 알았을 때 법적 정의 대신 자신의 총으로 그를 처단하고자 했듯이, 광역 수사대 팀장이던 여지훈도 범인이 누구인가 알자 그녀의 아버지가 건네준 총으로 처단을 하려고 나선다. 단지, 멘탈리스트의 제인이 죽인 사람은 범인이 아니었고, 여지훈은 죽이려고 했지만, 그녀를 죽인 당사자가 애초의 연쇄 살인범은 아니었다는 또 다른 여지를 남길 뿐이다.

이렇게 특정한 연쇄 살인범을 쫓는 시리즈는 집요한 그 주제로 말미암아 긴장감을 이어가기 좋은 반면, 역으로, 그로 인해 쉬 피로감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종종 유사한 다른 사건을 넣는다 해도, 기본적 프롯이 가져오는 싫증은 어쩔 수 없다. 더구나, 일과된 적을 가진 시리즈의 속편은 더더욱 그 피로도의 하중이 배가되니까. 그래서, 멘탈리스트는 제인의 주변 인물 중 경악할 만한 대상을 레드존의 측근으로 만들어 그와의 숨막히는 대결을 시리즈별 주요 동인으로 삼고 있다.

<특수사건 전담반 TEN>은 그 고민의 시선을 내부로 돌렸다. 아마도 많은 시리즈가 있었지만, <도망자>를 제외하고 주인공이, 그것도 사건 수산의 핵이었던 팀장이 속편이 되면서 졸지에 사정이 뒤바뀌어, 그가 바로 연쇄 살인범일지도 모르는 설정은 <TEN>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설정이 너무도 그럴 듯하여, 시청자들은 그럼 내가 시즌 1에서 고스란히 속은 거였어?라는 생각이 들면서, 주인공 여지훈이 진짜 괴물같이 여겨지게 <TEN2>의 도입부는 무시무시했다.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괴물같은 여지훈의 존재감을 배가시키는 시즌 2라니! 배우 주상욱이 모든 작품을 차치하고 학수고대할 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여지훈을 팀장의 자리로 돌려 놓더니, 이젠 여지훈 못지 않은 존재감을 뽐내던 백도식 형사가 없네? 그러더니 대뜸 카지노촌 동네 학교 수위을 하는 백형사를 보이는가 싶더니, 그가 한때 인정에 못이겨 봐준 범죄자가 일가족 살인자가 되어 나타나는 바람에 백형사는 다시 물불을 안가리고 범인을 쫓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냉정하게 사건을 바라보려는 여지훈 팀장과 부딪치게 되고. 한때 모든 것을 던져 범인을 잡으려던 여지훈을 눈물로 읍소하며 발목을 잡던 백형사가 바로 그 여지훈과 가장 첨예한 갈등의 각을 세우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괴물 VS. 독사.

 

이렇게 <특수사건 전담반 TEN2>의 시즌 2는 단선적으로 그려지던 시즌 1의 캐릭터들을 보다 깊게, 보다 풍부하게 하면서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볼 거리를 전달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즌 1보다 더 영화같은 연출과 깊이가 느껴지는 화면 구성은 캐릭터의 발전을 뒷받침해 주고. 시즌 2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처럼.

<개그 콘서트>의 한 코너 '시청률의 제왕'을 보면 시청률이 떨어지자 대뜸 신혼여행에게 돌아온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이혼을 요구하고, 졸지에 마마보이로 변한 아들은 그런 엄마말을 듣겠다며 몸을 꼬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이 웃픈 건, 그 장면이 웃기자고 만든 코미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실제 우리가 공중파 드라마에서 종종 조우하게 되는 말도 안되는 극의 전개를 그대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장년층이 리모컨을 쥐고 있다고, 그들의 취향에 맞춰, 시청률의 오르내림에 따라 막장식 전개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행하는 공중파 드라마를 보다, <TEN>과 같은 드라마를 보면, 이게 우리나라 드라마 맞나 싶다. 시청률을 담보한다 큰 소리치다, 시청률의 노예가 되어 퇴보하는 공중파와 달리, 시청률의 사각지대에서 자유로이 선전하고 있는 시즌제 장르 드라마의 선전에 박수를 보낸다.

by meditator 2013. 5. 6. 10:08

전에도 지적했지만 <인간의 조건>은 '~없이 살기'를 하는 미션 프로그램이 아니다. 하지만 그간 핸드폰, 자동차, 돈 등을 없이 사는 미션이 부각되면서, <인간의 조건>을 찾아가는 본연의 과제 보다도, 미션 수행을 위한 모습들이 위주가 되는 '본말전도'의 상황이 종종 빚어지기도 했었다. 또한, '~없이 살기'란 미션 소재 자체의 한계도 분명했었고.

그래서 이제 <인간의 조건>은 '~없이 살기'를 넘어 '~하기' 도전에 나섰다. 그 첫 과제는 바로 '원산지 알고 먹기' 하지만, ~없이 살기나, '~하기'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미션이 무모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정적 과제를 넘어 긍정의 열매를 먹어서일까? '원산지 알고 먹기' 첫 방송은 생각 외로, 푸짐한 먹거리의 '먹방'이 되었다.

아침을 먹고 오라니까 허겁지겁 두 그릇을 비운 김준현처럼 늘 무언가가 없어서 쪼달리다 부엌식탁 가득한 8판의 계란처럼, '~없이 살기'에 길들여 졌는지, 그들의 풍족함이 어색하기도 하고, 또 한편에선, 좋은 음식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 그들과 함께 이렇게 인간의 조건을 찾아갈 수도 있구나하며 푸근해지기도 한다.

 

(사진; 유니온 프레스)

 

웬 뜬금없는 '원산지 알고 먹기'인가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바로 이 '원산지' 문제는 환경 문제, 그 중에서도 먹거리의 환경 문제로 들어갔을 때 가장 원론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심각한 과제이다. 그걸 위해서는 프로그램에서도 언급되고, 멤버들이 식재료를 사러 갈 때마다 옆에 수치로 표기되었던 '푸드 마일리지'를 알아야 한다.

'푸드 마일리지'는 인간의 여행이 아닌, 우리가 먹는 먹거리가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걸린 수송 행로와 거리를 말한다. 사람들이 비행기를 이용해 여행을 많이 다니면 마일리지가 많이 쌓여 여러 혜택을 얻을 수 있다지만, 반대로, 우리의 간사한 입맛과 편의를 위해 먹거리가 수만킬로미터의 여행을 하고나서 얻어지는 건, 그 운송 과정에 씌여지는 엄청난 이동 비용과 거기에 드는 엄청난 에너지원의 소모, 그리고 장기간 보존을 위한 무차별 농약과 보존제의 살포뿐이다.

하지만, 이미 우린 귤이 들어가고 아직 봄철 과일이 무르익지 않는 그 계절의 헛헛한 입맛을 달래기 위해 먹는 캘리포니아산 오렌지와 칠레산 포도에, 무한대로 늘어난 육식에의 갈망을 처리해줄 미국과 호주산 쇠고기에, 이제는 없으면 우리의 밥상이 존립하는 거 자체가 힘들 정도의 중국산 식재료들에 무감각하게 길들여져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을 <인간의 조건>은 찾아들어가 원산지를 아는 음식만 먹는 미션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힘들 것이라며 꾸역꾸역 미리 못먹을까봐 챙겨먹은 아침 식사와 달리, 막상 원산지를 찾아보니 생각 외로 먹을 것들이 많았다. 쌀만 해도 김포, 이천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고, 계란에, 푸성귀는 구하기만 하면 방사하여 낳은 유정난에, 농약을 치지 않은 무농약 유기농 먹거리들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잔뜩 쫄았던 멤버들은 첫 날의 저녁을 장어까지 구워가며 푸짐한 '먹방'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식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산지를 알아야 먹을 수 있다하니, 제일 먼저 원산지를 알기 힘든 수많은 재료들의 범벅인 라면이 그 식탁에서 탈락했다. 필리핀산 바나나나 즐겨마시던 커피도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가장 원론적인 밥상, 된장, 고추장에 쌈채소에 계란 후라이, 장어 구이의 질박한 요리 방식만이 우선 그들이 만들 수 있는 최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조금 더 맛난 먹거리를 향해 그들의 나아가면 거리로 환산되는 환경의 문제 푸드 마일리지만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먹거리가 가진 보다 심오한 문제를 또 조우하게 되리라.

또한 '~없이 살기'에서 '~로 살기'로 버전 업된 <인간의 조건>의 존립 기한 여부도 판가름나지 않을까.

by meditator 2013. 5. 5. 10:34

묘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두 편의 드라마가 연이어 시작되었었다. jtbc의 <세계의 끝>과 ocn의 <더 바이러스>. 하지만 든든한 원작에 회를 거듭할 수록 손에 땀을 쥐게 한다는 시청자와 평론가들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낮은 관심도는 애초에 20부작으로 예정되었던 <세계의 끝>은 제대로 세계의 끝을 보여주지도 못한 채 12부작으로 조기 종영되고 말았다. 반면 5월3일 <더 바이러스>는 무사히 그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막회 반전까지 드러내며 애당초 기획했던 바 10부작의 종영을 맞이했다.

 

종편 jtbc의 <세계의 끝> 조기종영은 많은 것을 짚고 넘어가게 만든다. 과연 재난 드라마를 20부작으로 만들기엔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란 효율성면에서의 지적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jtbc란 종편 체제의 지향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해줬다는 점이다.

<세계의 끝>이나 <더 바이러스>는 장르적으로 재난을 다룬 드라마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시도되는 것들이다. 미드에서 '워킹 데드' 시리즈가 회를 거듭하며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 인기 있다는 시리즈물 조차 우리나라에서 그걸 향유하는 층은 일부 젊은층에 국한되어 있으니까. jtbc가 <세계의 끝>을 제작한다고 했을 때 중노년층을 상대로 한 종편이 작품성을 담보로, 젊은층조차 '포섭'하고 가고자한 포석으로 보여졌었다. 하지만, 역시나, jtbc는 지금이 종편에 규정되어진 정체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세계의 끝>을 조기 종영시켰다. 이것은 단지 드라마 한 편의 조기 종영이 아니라, 상업방송 jtbc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의 재정립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웃긴 일인게, 어쩌다 <무자식 상팔자>가 인기를 끌어서 그렇지, 현재 jtbc 입장에서 시청률 운운할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시청률과 상관없을 위치에서 명작을 만들어 그저 그런 종편의 하나로 인식되어온 세간의 편견(?)을 불식시킬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만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 면에서 <세계의 끝>이 높은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중도 탈락함으로써, <더 바이러스>는 한국형 재난 드라마의 효시로 인정받게 되었다. 미드인 '워킹 데드'가 좀비라는 그 문화의 익숙한 소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면, 세계 수위의 인구 밀집도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그리고 5월 들어 중국 관광객이 늘자 중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조류 독감의 유포 비상에 걸린, 이제는 '바이러스'성 질병이 익숙하게 우리 곁에 자리잡은 대한민국에서 '바이러스' 전염을 소재로 한 <더 바이러스>는 아주 시의적절한 재난 드라마의 소재였다. 그런 면에서 시청률과 무관하게 우직하게 다양한 장르 드라마를 개척해 나가고 있는 ocn에게 박수를 보낼 만하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바이러스>는 그저 재난 드라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질병들이 어쩌면 권력의 비리, 나아가, 그 조차도 드라마에서 대사로 전해듯이 '뱀의 꼬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다국적 제약 회사의 '음모론'을 제기하고 나선다.

하지만 그런 마지막 회의 음모론이 보는 사람에게는 전혀 이물감이 없이 그간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던 바이러스성 질환보다도 더 전율을 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노니는 손오공처럼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경험들을 일상에서 접하기 때문인 것이다.

에이즈를 비롯해서 수많은 희귀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안다. 그것이 만들어 질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 약을 만들기 까지의 과정에서의 엄청난 비용으로 인해 만들어 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그 약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소수이거나, 사회적 약자인 사람들을 위한 약은 쉽게 만들어 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설사 효용이 비슷하거나 똑같은 약이 만들어지더라도 거대 제약회사 카르텔의 입김으로 일반 대중들이 보다 싼값에 그 약을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쉽게 알 수 있는 무시무시한 이 세계의 진실들로 인해 <더 바이러스>의 음모론은 그저 음모에 그치지 않은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5. 4. 10:33

수목 드라마 kbs2의 <천명>과 mbc의 <남자가 사랑할 때>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청률 1등을 다툰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두 작품 모두, 겨우 10%대이거나, 10%에 못미치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요즘 시대의 화두가 '아버지'라고, 그래서 아픈 딸 '랑이'를 위해 감옥을 탈주하고, 또 그 딸을 살리기 위해 딸을 놔두고 돌아서야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아역 김유빈의 연기와 맞물려 충분히 이목을 끌어낼 수 있는데, 어쩐 일인지 <천명>의 반응은 영 거북이 걸음과 같다. 그런데 막상 <천명>을 보고 있노라면 거북이 뒷걸음질 같은 시청률이 종종 이해가 간다. 아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니까.

 

최원이 추노의 대길이였어?

방영하기 전부터 '조선판 도망자'라고 흐드드하게 알렸듯이, 4회에 접어든 <천명>의 주인공 최원(이동욱 분)은 도망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최원의 도망자 내공은 무술 실력이 출중한 조선의 추노꾼 대길이 저리가라잖아! 저 사람 헐랭한 내의원 의관 아니었어?

게다가 최원은 동료 의원 민도생(최필립 분)의 살해 혐의를 받고 의정부 앞 마당에서 갖은 추국을 받던 죄인이었다. 조선시대 추국이 어떤 것이었나? 실제 많은 추국 당사자들이 그 과정에서 형장에 이르지도 못한 채 추국의 고통 그 자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종종 있던 바로 그 무시무시한 고문 아니었나 말이다. 도망을 가는 최원의 옷 허벅지 부분이 피에 물들어 있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드라마 상에서 최원은 '주리틀기'를 당한 것으로 나온다. 주리틀기는 다리를 묶어 놓고 그 방향과 반대로 힘을 주는 것으로 심할 경우에는 다리뼈가 으스러진다는 무시무시한 고신 방법인 것이다. 심지어 나중에 의금부 도사 이정환이 증명해 주듯 감옥에 갇힌 최원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여 먹은 것이 없다는데, 제 아무리 딸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갑자기 도망자 신분이 되자, 능력치가 너무 올라가 보이니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씁쓸해 보인달까. 심지어 조금 전에 물에 빠져 죽어가던 최원이 금세 도망간 길을 순식간에 역주행해서, 관원들이 오기 전에 딸이 숨어 있던 곳까지 돌아온 모습은 해도 해도 너무 했달까?

최원의 도망 과정은 화려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빼어난 연출로 그림같은 장면을 완성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개연성에서 접고 들어가서 봐줘야 하니 몰입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문정왕후와 왕세자 사이의 긴장감이 아쉬워

아마도 이 드라마 제목이 천명인 이유 중 하나는 중종의 뒤를 이를 후계자로써의 '천명'이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는가라는, 중종의 큰 아들이 왕세자여야 하는가, 당시 조정의 중심 세력이던 문정왕후의 아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가라는 권력 간의 생사가 달린 쟁투를 극의 배경으로 깔고 가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지금은 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도망을 다니는 최원이 개인의 목적을 넘어, 왕세자의 구명,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왕으로의 등극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극 중에서 왕세자가 왕의 큰 아들이라는 적통으로의 정당성 이상의 존재감이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천명>이란 드라마에서 이미 문정황후나 그 세력의 존재감은 너무나 크다. 반면, 그에 비해 왕세자의 존재는 너무나 미미하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문정 왕후를 연기하는 중견 연기자 박지영과 왕세자 이호를 연기하는 아이돌 출신의 임슬옹의 연기에서 너무나 비교가 된다.

임슬옹의 연기를 발연기라고 낙인 찍을 수는 없지만, 왕후와의 대치씬이나, 최원과의 조우하는 씬에서, 오랜 세월 의붓 모후의 그늘에서 숨죽여 온, 하지만 자신의 사상이 확고한 미래의 젊은 왕을 조금 더 풍부하게 표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이돌을 기용하는 건 상관없지만, 그의 연기력으로 담을 수 없는 배역으로 인해 드라마의 흐름이 깨어지는 건 고스란히 시청자들에 대한 민폐로 남는 것이 아닌지. kbs2 수목 드라마는 지난 번 <아이리스>에서도 같은 실수를 범하더니, 이번에도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장담컨대, 아직 사극에 익숙치 않은 이동욱의 최원이 캐릭터를 잡기 이전에, 왕세자 역의 배우가 조금 더 노련한 연기로 문정왕후와의 대립적 각을 보였다면 지금처럼 <천명>이 10%를 넘지 못하는 시청률로 고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천명>을 버티어 가기에는 취약하다. 문정왕후와 왕세자 간의 권력 투쟁이 좀더 실감나게 다가오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럴 듯한 도망씬으로 시청자의 눈을 호리는 건 <추노>로 족했다. 그리고 되돌아 보면, 추노도 도망씬으로만 시청자를 호린 건 아니었다.

 

한 마디 말 밖에는 하지 않는 단선적 캐릭터들

문정왕후 역의 배우와, 왕세자 역의 배우가 가지는 내공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천명>이란 드라마가 사건 전개가 빠르고, 도망씬등이 박진감 넘치게 전개 됨에도 불구하고 종종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결정적으로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가 너무 단조롭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몹시도 노회하게 나오지만, 줄곧 그녀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왕세자 너는 죽고, 내 아들이 왕위에 올라가야 해'이다. 이건 최원의 '내 딸을 살려야 해'라는 도돌이표 대사랑 똑같다.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홍다인도 다르지 않다. 1,2회에서는 자기랑 별 이해 관계도 없는 최원을 나쁜 놈이람 몰아 붙이더니, 이젠 그가 은인이라며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하겠다고 나선다. 캐릭터의 변화가 아니냐고? 그를 나쁜 놈이라고 몰아 붙일 때나, 목숨을 구하겠다고 나설 때나, 홍다인의 태도는 다르지 않다. 마치 단세포 동물처럼 그거 하나만 생각하며 달린다. 도망자로 달리는 건 최원만이 아니다. 홍다인도 종횡무진 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사건은 장황하지만, 모든 캐릭터들이 등장할 때마다,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문정왕후가 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릴려고 하는지, 그녀가 왕세자가 착해보이는데도 그를 꼭 죽이려고 하는지 중간 과정은 없이 물불을 안가리고 왕세자의 죽음을 향해 달리는 건, 홍다인이나 마찬가지다. 최원을 잡으려고 애를 쓰는 이정환(송종호 분)이나, 도망가는 최원이나, 상황만 다를 뿐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목표를 향해 달리는 그 캐릭터에서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사람만 다를뿐.

그나마 그의 속내가 미묘하고 복잡해 보이는 캐릭터는 왕세자이지만, 안타깝게도 배우의 연기력이 캐릭터의 다층성을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천명>을 보다보면 종종 지루해 진다. 사건은 궁금하되, 인물은 궁금하지 않다. 도망가겠지, 구하려고 애쓰겠지, 죽이려고 하겠지 라며 지켜보는 드라마는 매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음에도, 도돌이표처럼 같은 노래만 반복하고 있는 천명이 아쉬운 이유다.

by meditator 2013. 5. 3. 09:44

'가학성은 인간의 본능인가?'

<라디오 스타>를 보며 뿔 두개 달리고 빨간 날개가 돋은 악마같은 mc들처럼 게스트를 마구 물어뜯는 것을 하염없이 즐겼다. 그러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전태관의 한 마디 정의, '이 프로 이런 프로였군요. 뭐 하나만 걸리면 마구 뜯어먹는, ........잔인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에 서늘해진다. 아무 생각없이 즐기다 보니, 하이에나처럼 누군가를 뜯어먹는 것이 너무 일상화된 즐거움이 되어버린 건 아닌가 하고, 아니 하이에나는 배라도 채우지, 난, 그리고 우리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정신적(?)' 즐거움을 위해 '공인'이란 이름으로 연예인들을 씹고 뜯고 맛보는 데 너무 이골이 난 건 아닐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라디오 스타> 1,2년 보냐? 새삼스럽게 왜 그러느냐? 라는 답이 올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첫 출연 때 <라디오 스타>를 몹시도 정겹다고 생각하며 지난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놓았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두번 째 출연에, 이 프로 이런 프로였어?라는 반문을 던지게 되는 건, 단지 그들이 <라디오 스타>를 몰라서였을까? 아니면 <라디오 스타>란 프로그램이 수많은 정의 중,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어떤 부분들이 특화 내지는 강화되면서 이제는 종종 출연자들조차 당혹스럽게 만드는 일이 잣아지는 경향 때문일까. 이 글을 쓰는 사람 개인적 생각으론 후자에 속한다. 이상하게 그 예전 신정환이나, 김구라가 함께 하던 시절, 철없던 신정환의 막돼먹은 행동 때문에, 혹은 김구라의 돌직구 때문에 낯뜨거워지거나, 낯붉히는 일이 있던 시절엔 오히려 <라디오 스타>니까 라며 두둔하게 되던 일들이, 요즘은 종종 보면서 불편해지게 된다. 나이탓일까?

 

(사진 출처; 아주 경제)

 

<라디오 스타>의 출연자가 근황 토크를 할 때 선행을 했다거나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면 언제나 mc들은 이구동성으로 '에이~' 그랬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딴 데 가서 하라고 애저녁에 담을 쌓아버리곤 했다. 그런 지금이나 예나 변함이 없다. 그런데 무엇이 달라졌을까?

 

 

5일 출연자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라디오 스타>의 네 mc가 호흡이 아주 짝짝 맞는다고 했다. 그렇다. 지금의 네 mc는 마치 스머프 만화에 나오는 '가가멜'일당처럼, 손발을 짝짝 맞추며 게스트 뜯어먹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그리고 뭐 하나가 던져지기라도 하면, 네 명이서 먹잇감에 달려들듯 달려들어 저마다 한 마디씩 얹으며 출연자를 우습게 만든다.

하지만 전에는 안그랬다. 신정환이 덤벼든 사안에, 김구라에 무슨 그런 걸 걸고 넘어지냐고 했고, 김구라가 뜯어먹으려고 덤비면 신정환은 옆에서 그걸 '초를 쳐대기도' 했었다. 그래서 딱히 mc라기도, 게스트라기도 그런 전선이 형성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마치 재판장처럼 mc들이 일사불란하게 뭐 하나가 던져지면, 윤종신은 그걸 한번 틀어 웃기려고 하고, 유세윤은 그걸 우스꽝스럽게 흉내내서 웃기려고 하고, 규현은 나름 돌직구라며 번번히 선배인 상대방의 얼굴이 붉어지는 비수를 꼿는 한 마디를 던지고, 김국진까지 야유를 얹으며 호흡을 맞춘다. 그 예전에 김구라나 신정환이 물어 뜯으면 윤종신이 그걸 받아서 한 발 더 나아가는 정도라면, 이제는 거기서 두 발, 세 발을 더 나아간달까. 그 예전엔, 윤종신이 좀 나아간다 싶으면 김구라가 '이젠 그만 하지' 하며 마땅찮게 저지라도 했었는데, 이제는 가장 점잖은 김국진초자 신이 나서 함께 한다.

이러다 보니, 말이 좋아 '잔인하지만 재밌었다'라지만, 그 소감은 마치 출연자들은 마치 더 잃을 게 없어 행복해요 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내용들은 '바이브' 윤민수의 말처럼 '뭐 이런 게 다 궁금할까' 싶은 시시콜콜한 개인의 뒷사정들이다. 언제부터인가, <라디오 스타>는 작가들의 csi급 정보력에 기댄 개인의 신상털기, 그에 이은 조롱하기 프로그램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지난 번에 나와, '참 좋았던' 봄여름가을겨울이 '이런 프로그램이었어?'라며 반문하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김구라와 신정환이라는 캐릭터에 기대던 방송이 작가진의 기획력, 그리고 거기에 기댄 mc들의 일사불란한 시스템으로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다 보니, 좌충우돌 변칙 파이터이던 성격 대신에 일관되게 '벌처럼 날아서 쏘기만'하는 기계처럼 되어버렸달까.

더구나, 게스트의 자리에 대부분 mc인 규현보다 나이많은 선배들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욕이 과잉인 규현의 돌직구는 게스트는 물론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는 하지만, 보는 사람조차 얼굴이 붉어지는 경우가 많다. 굳이 선배가 어린 아이돌 후배에게 저런 질문까지 당해야 할까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될 정도로.

물론 그런 과정을 겪으며 1일 방송에서 <라디오 스타>가 가망없던 '샘 해밍턴'조차 띄웠다고 자부하듯이 시청자들은 몰랐던 출연자들의 새로운 면모를 깨닫게 되면서 그를 새롭게 조몀하는 과정을 되기도 한다. 여전히 <라디오 스타>의 매력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솔직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솔직함이, 원죄를 공유한 듯한 김구라나, 신정환이 '너나 나나 뭐 달라, 사람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냐' 라는 소탈함이 아니라, '용용 주겠지' 식으로 단체로 달려들어 뜯어먹는 식의 '가학성'으로 점점 가속화되어가는 건 아닌지. <라디오 스타>를 볼 때마다 애정하는 사람의 노파심이 스멀스멀 솟는다.

by meditator 2013. 5. 2. 09:42

고정도 과장님(김기천 분)은 가끔씩 가다서다 하는 취업 기념으로 회사에서 받은 그의 시계와 같습니다. 아니죠, 오히려 고정도 과장님이란 시계는 과장님의 말씀처럼 고장난 지가 한참된 것이 맞습니다. 디지털 세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회사에서 왕년의 재래 시장을 종회무진하던 영업왕이던 고과장님이 할 일은 없습니다. 신문을 보거나, 잡담을 늘어놓거나, 코를 골며 낮잠을 자거나, 어찌보면 고과장님에게 닥친 정리해고는 효율성면으로만 보자면 오히려 늦게 찾아온 불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직장의 신>은 그런 고장난 시계 고정도 과장님의 시계를 다시 돌려놓았습니다. 눈물, 콧물 찍어내며 고정도 과장님의 사연에 홀려 보는 것도 잠시, 21세기의 여러분, 진정 당신은 고정도 과장님의 시계를 돌려놓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황갑득 부장(김응수 분)이 마케팅 영업 지원부 직원들을 불러놓고 고과장님의 평가를 물었을 때 미스 김은 '짐짝'같은 분이라고 냉혹하게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컴퓨터와 외국어 능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고과장님은 영어 근무 평가서 답안을 구걸해야 할 정도로 무능력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때는 지하철노선도는 몰라도 재래시장 골목길을 훤히 아는 하루에 몇 건의 거래를 성사시켰던 영업왕이었었죠. 4월 30일, <직장의 신>은 정리 해고 위기에 봉착한 고과장님이 과거 그의 영업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그 위기를 넘기며, 막내 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직장에 머무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에피소드가 방영되었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였지만, 고과장님의 복귀는 그저 드라마 속 이야기로 끝내버리기엔, 눈물을 흘리고 말 감동으로 끝내버리기엔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이제는 쓸모없어져버린 수기와 스크랩에 의존한 과거의 능력이 정말 쓸모가 있을까요? 그리고 <직장의 신>의 후배 직원들처럼 선배의 28년을 소중하게 감싸안을 만큼 우리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있을까요? 추억은 아름답지만, 그 추억을 흘려버리지 않고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것으로 품을 만큼 넉넉한 세상인가요?

 

 

재래시장의 골목 골목을 훤히 꿰는 고과장님의 생존은 마치 엄청난 자본을 앞세운 대기업의 무차별적 공격 앞에서 바람 앞의 촛불같은 재래시장의 생존 전쟁을 보는 듯합니다. 도시화의 명목 아래 아파트 건축으로 사라져가는 골목골목이 꼬부라진 오래된 동네를 보는 듯도 하구요. 어쩌면 지금의 흐름, 혹은 앞으로의 발전에는 역행하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더 갚어치있는 그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갈 수 있냐고 드라마는 질문을 하는 듯합니다.

<직장의 신>은 묘한 드라마입니다. 도식적으로 비정규직의 고통을 들이대는 것만 같았는데, 회를 거듭할 수록 '인간'의 이름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자꾸 자꾸 질문을 던집니다. 능률과 발전이름으로 누군가를 거세시키지 않고,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 조금씩 물러나 손을 잡고 갈 수 있겠냐고 야곰야곰 또 다른 질문을 던져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보면 다함께 갈 수도 있지 않냐고 살그머니 해답도 던져보기도 합니다. <직장의 신>이 제시하는 해법에 동의하십니까?

 

하지만 답은 간단치 않습니다. 미스 김을 찾아온 무정한 대리에게 한 미스 김의 질문처럼 고과장님이 비정규직의 네 배에 달하는 임금을 받으며 한량처럼 시간을 다시 보내는 동안, 고과장님은 좋은 분이라고 말한 정규리 씨는 몇 번의 해고 위기를 맞을테니까요. 그래도 고과장님은 선배라고, 장기 근속이라고 박수를 받으며 두둑한 퇴직금을 챙길 때, 수많은 미스 김들은 하루 아침에 그저 '통보'만으로 일자리를 잃을 테니까요. 고과장님의 행복을 기뻐하기 위해서는, 미스 김들의 행복도 함께 도모되어야만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요?

기업의 정년이 60세로 연장되는 법이 조만간 통과된다고 합니다. 그 법의 통과를 다같이 기뻐하며 박수를 치기 위해서는 거리로 내몰려 노숙자까지 되어가는 2,30대의 비정규직 젊은이들의 여건에도 햇빛이 들어와야 하는 겁니다.

고과장님도, 미스 김도, 정주리 씨도 모두 행복해 질 수는 없을까요?

by meditator 2013. 5. 1. 09:08

파일럿 프로그램까지 합쳐서 네 번째 미션이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오해는 없어야 하겠다. 단기별로 주어지는 과제가 '~없이 살기'라고 해서, <인간의 조건>이 미션 수행 프로그램이 아니다. 즉, ~없이 잘 살아내기가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삶의 일부분이 부재한 그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이 너무 풍족하고 충만한 삶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들 삶에서 중요한 하나를 빼어봄으로써, 즉 문명의 단식을 통해 본연의 자신을 되돌아 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프로그램 제목을 '~없이 살기'로 지었겠지 왜 '인간의 조건'이라고 했겠는가.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돈없이 살기'의 미션을 부여받은 여섯 명의 개그맨들은 좌충우돌 일주일을 보내며 또 한 번 자신을 되돌아보는 화두로 되돌아 갔다.

 

 

'돈없이 살기'가 '돈벌이 체험하기'로?

체험 마지막 허경환은 말한다. 미션은 '돈없이 살기'인데, 그 미션의 본래의 취지에 천착하지 못한 채 너무 돈벌기에 급급했던 거같다고. 그렇다. 대부분의 멤버들이 지갑을 빼앗기자, 특히나 허경환이 당장 부산을 다녀와야 할 상황에 맞닦뜨리자 허겁지겁 돈을 벌어야 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그 상황은, 미션이 마무리 될 때까지 상당부분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광경들이 섣부르게 '~없이 살기' 미션의 한계를 지적하는 여론으로까지 이어졌다. 당장 기름값이 필요하고, 당장 한 끼를 때워야 하는데 호주머니는 비었을 때 다급해 질 수 밖에 없다. 아니,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엉터리 도인으로 변한 김준호의 '인생은 돈'이라는 한 마디처럼 오직 '돈'을 위해, '돈'의 논리로, '돈'을 벌며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그것을 빼앗긴 사람들이 막힌 출구 앞에서 당황해 하며 쩔쩔매는 실험실 생쥐처럼 구는 건 어찌보면 당연지사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조건>의 미션에는 한편의 이야기처럼 '기승전결'이 있다. 물론 처음에는 가장 의지하던 무언가를 빼앗겨 당황한다. 그리고 그것의 부재를 채우려 쩔쩔매며 다양한 모색을 한다. 하지만 그런 좌충우돌이, 미션 중반을 넘어가면서, 그 무엇인가가 부재한 삶이 익숙해 질 즈음부터는 전혀 다른 각도로 미션을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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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왜 벌어야 하지?

물론 자신의 분야가 아닌 일들을 하면서 개그맨 여섯 명들이 뼈저기게 느낀 것은 그래도 자신들의 직업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쉽다는 것이었다. 장동건이 와도, 얼굴을 가리면 물건을 팔 수 없을거라는 박성호의 말은, 그 어떤 직업에의 헌사보다 감동적이었다.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던 아르바이트 자리도, 혹은 만만하게 벌 수 있을거라 여겼던 단 돈 만원도, 막상 해보니 그 어떤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여섯 명의 개그맨들은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했던 시청자들은 공감했을 것이다.

또한 한시적으로 돈을 벌어 자급자족해야 하는 생활은 역설적으로 쳇바퀴처럼 돈의 노예가 되었던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왜 애써 돈을 벌어야 하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려는 거지?' 그리고 반성도 해본다. 돈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 당황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데 너무 급급했다고.

물론 그 과정에서 일관되게 꼭 돈이 없어도 된다며 꼭 필요한 돈만 벌려고 했던 김준현의 '안빈낙도'형 선택도 아르바이트로 정신없던 여섯 명의 선택 중 하나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여유로운 김준현도 결국은 사자 탈을 쓰고 땀 범벅이 될 수 밖에 없듯이 '돈'이 없으면 당장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먹고 사는 걸 때우기만 한다면, 그 다음에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혹은 그 이상 굳이 벌 필요가 있을까? 라는 질문은,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에 휘말린 우리들에게는 많은 시사점을 남기는 지점이다. 그래서, 애써 돈을 벌어 멤버들을 위한 만찬을 즐겁게 차리고, 생일 케잌과 선물을 사는 마지막의 결론은, 어찌 보면 미담을 위한 상투적 해피엔딩일수 있지만, 우리가 돈을 쫒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차별이 고착화되어 그 문제가 사회적으로 곪아가고 있는 이즈음, '돈없이 살기'란 미션을 통해 '왜 돈을 벌어야 하지' 따위의 질문을 던지는 자체가 너무 낭만적이거나, 사치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건강한 의식을 담보하지 않은 사회 성원에게선, 제도의 변화나, 사회의 개혁 자체가 아예 꿈도 꿔볼 수 조차 없으니, 낭만적이라도, 때론 무엇을 위해 돈을 버나?라는 원론적 질문 정도는 한번쯤 던져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게 너무 소박해 보여도 <인간의 조건>의 묘미이다.

by meditator 2013. 4. 28. 09:48

요즘 고등학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은? (물론 이것은 이 글을 쓰는 사람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 학생들이라는 자의적 기준의 한계가 있다) 생뚱맞게도 TVN의 <강용석의 고소한 19>란다. 몇 십년 전 '기네스 북'를 들척이던, 혹은 '시사 상식 사전'을 들척이던 청소년의 호기심은 시대를 건너뛰어 프로그램판 잡학 상식 사전으로 통하는 듯 하다. 그런가 하면 고등학생 딸내미를 둔 친구는 그 집 텔레비젼 리모컨은 TVN에 고정이라며, 딸과 함께 보는 <이웃집 꽃미남>을 비롯해서, <SNL코리아>, <코미디 빅리그>등을 줄줄이 꿰며, <개그콘서트>나 보는 나를 고루하다는 듯 비웃는다. 어디 그뿐인가, 요즘 <푸른 거탑>을 모르고서는 어디 가서 화제에 끼어들기가 힘들다.

시청률의 사각지대라 여겨지던, 그리하여 변방에서 울리던 북소리 같았던 케이블들이 야곰야곰 타켓 시청층을 형성하며 자신들만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 가는 중이다. TVN만이 아니다. CJ 계열의 OCN, 올리브TV등 각 채널은 각자의 고유한 영역을 기반으로 각개 약진 중이다. 드러난 전체 시청률 파이는 약소할 지 모르지만, 각 채널 별 충성도로 치자면 공중파 부러울 것이 없는 케이블이다. 종종 피크 시간대 공중파 시청률 파이가 20%대 중반을 겨우 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26일 밤 11시에 새롭게 선을 보인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은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TVN의 편성 방식에 충실한, 그리고 거기서 진일보한 프로그램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로그램은 대통령 선거로 유명해진 이준석, 올인의 실제 인물차민수, 전설의 프로게이머 홍진호에 서울대 천재 소녀, 고대 출신의 연기자에 당구 천재 차유람, 만화가 김풍, 심지어 아이돌이라도 한때 공부 좀 했다는 성규까지,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천재형 인물들을 모아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출연진들이 한정된 시간 안에 게임을 벌이며, 회를 거듭하면서 한 명씩 탈락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게임의 방식은 카드를 두 장 내고 숫자가 큰 편이 이긴다던가, 가위, 바위, 보 내기를 한다던가 단순한 방식이지만, 문제는 마지막에 누군가가 탈락을 해야 하고, 승리자가 되면 어드벤티지를 얻는 것이기에,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합집산과 엄청난 두뇌 싸움, 그리고 그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 관계가 고스란히 보여지는 것이다.

 

아마도 <세바퀴>나 <가족의 탄생>, <안녕하세요> 혹은 그와 유사한 종편의 프로그램을 즐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 시간이 넘게 갖은 애를 쓰며 서로 속고 속이고, 누가 나를 이용하는가, 이용해야 하나로 골머리를 썩이는 <더 지니엇>란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개그 콘서트>와 <SNL코리아>의 웃음 포인트가 차이 나듯이.

하지만, 어려서부터 게임을 내 몸과 같이 하며 살아오던 세대라면? 특히나 최근 유행하고 있는 '소셜게임'을 즐겨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 마치 <더 지니어스>란 게임의 '유저'가 된듯, 출연자들이, 자신들이 키우는 '아이템'이라도 된 듯, 그들의 선택 하나하나에 마음 졸이며 희비가 오고가지 않았을까?

이렇듯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은 젊은이들이 즐겨하는 '소셜 게임'의 텔레비젼 확장판과도 같다. 그러니 당연히 이 프로그램의 성패는 얼마나 게임의 박진감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1회, 처음 가장 어수룩하게 보였던 성규가 배신을 거듭하며 1등을 달성하고,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던 막후의 반전으로 이준석을 떨어뜨리며 살아남았을 때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은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공중파 예능에서 '힐링'을 내걸고, 너도 잘 살고, 나도 함께 잘 살자는 것과 달리,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속 인간 관계는 녹록치 않다. 말로 맺은 언약은 봄날 꽃처럼 시간이 흐르고 나면 유명무실해 질 뿐이다. 하지만, 가장 똑똑한, 그래서 사람들에게 가장 긴장감을 준 이준석의 탈락은, '배신'이란 단어만으론 설명하지 못할 또 다른 인간 관계의 속사정을 보여주니, '힐링'과는 또 다른 솔직담백한 인간학의 매력이 보인다.

 

더 지니어스:게임의 법칙 1회-1,2,3게임

by meditator 2013. 4. 27. 10:17

이게 다 이병훈 감독 때문이다, 라고 해야 할까? 사극에서 '하오체'를 버리고, 현대극과 똑같은 말투를 쓰게 만든게 바로 이병훈 감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뜬금없는 개그 코드도, 주인공 커플의 '로맨틱 코미디'같은 러브씬도 다 이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욕은 이분께 돌아가야 할까? 하지만 '청출어람'이라고, 제 아무리 스승이 '바담 풍'이라 한들, 제자들은 제대로 스승의 뜻을 이해했다면, '바람풍' 했어야 하거늘, 요즘은 제자들이 한 술 더 뜬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바로 새롭게 등장한 퓨전 사극들이야기이다.

 

얼마 전 종영한 이병훈 감독 '마의'에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 중 가사 일부- '낮에는 정숙하지만, 밤에는 놀줄아는 여자'-가 대사로 등장한다. 그러더니, 얼마 전 시작한 <장옥정>은 장희빈을 새롭게 조명하겠다며 그녀를 졸지에 조선판 패션 디자이너로 만들어 버렸다. <마의>때 저 대사는 대사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라며 화제가 되었지만, <장옥정>의 패션 디자이너 설정은 대중들의 차가운 반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말 그대로 , '퓨전'이란 서로 다른 두 장르를 뒤섞어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의>와 <장옥정>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마의>의 퓨전은 애교 수준이었다면, <장옥정>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혹은 실재하는 역사를 전복시킨 이질감이 도를 넘었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낯설었달까.

 

'낯설게 하기'는 실제 존재하는 미학 용어이다. 어떤 상황, 혹은 조건을 뒤틀어 냄으로써, 그 주제에 대한 환기를 시키고, 오히려 주제를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를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냥 낯설어 버린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되어버린다. <장옥정>은 퓨전이라는 장르의 역사 해석을 넘어, 역사 왜곡이란 생각을 시청자들이 해버리게 되니, 깜짝쑈를 넘어 외면을 받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천명>이란 드라마 역시 어쩌면 <장옥정>으로 갈 것이냐, <마의>로 갈 것이냐의 기로에 놓인 듯하다. 드라마의 제작진은 <천명>의 퓨전적 설정들, 주인공 최원의 헐랭한 캐릭터라던가, 여주인공인 의녀 홍다인과의 로맨틱 코미디같은 아웅다웅을 <마의>의 애교로 받아들이길 원하는 듯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장옥정>의 패션 디자이너급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를 어쩌나?

 

 

사극을 임하는 시청자의 태도 이러면 너무 거창하지만, 사극을 보려고 마음 먹은 사람들에겐 기본적으로 그 시대에 대한 다른 기대감이 있다. 오늘날과 다른 옷, 말투, 다른 행동거지, 그리고 다른 세계관, 무엇보다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가 부각되는 현재와 달리, 엄격한 신분체제 하의 그 시대 사람들이 살며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자 해서, 사극을 보는데, 현대극과 다를바 없는 인물들이, 현대극과 다르지 않는 대사를 치며, 현대극에서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며 사건을 만드는데, 굳이 사극을 볼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극이란 이름을 내걸고 오늘날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은 말투를 쓰며, 오늘날과 비슷한 고민을 하며 비슷한 패턴의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고답적인 사극의 숨통을 튀어주는 정도를 넘어선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천명>은 중종 연간 후계 구도를 둘러싼 문정왕후와, 세자 시절의 인종간의 피튀기는 세력 싸움을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구도를 배경으로 한다. 거기에, 그의 할아버지가 세자를 지키려다 팔목을 잃고, 이제는 병든 어린 딸을 보살펴야 하는 내의원 최원의 이야기가 곁들여져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이미 첫 회에서 충분히 극적인 스토리들이, 번번이 주인공 최원의 허허실실을 넘어 로맨틱 코미디의 백수 스타일의 느슨한 캐릭터로 인해 충돌을 일으킨다. 주인공이 오히려 극의 긴장감을 잃게 만든달까?

 

jtbc의 <꽃들의 전쟁>이 청나라에 굴복하는 인조의 이야기로 첫 회를 이끌어 전체적인 배경을 보여주며 긴장감을 고조시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와 달리 <천명>은 첫 회부터, 시청자들은 모후와 세자 세력간의 숨막히는 긴장감에 집중하려다가, 자꾸 주인공만 나오면 흐름이 깨지니 극의 재미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저 권력에 무심한 지고지순한 딸바보로만 그려내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천재임에도 그 능력을 숨기기 위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나치게 주인공을 '나이브'하게 그려내다 보니 오히려 극적 몰입감을 저해하게 만들어 버렸다. 천재가 범인인 척 하는 주인공은 이미 현대극에서도 유행이 좀 지난 캐릭터가 아닌가. 제 아무리 '딸 바보'라도, 조선시대의 '딸 바보'랑 오늘날의 '딸 바보'는 달라야 한다. 굳이 '뽀뽀'를 연발하지 않아도, 주인공의 측은한 눈빛에, 딸을 구할 수 있는 의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시청자들은 공감할 수 있다. 현대의 아빠 코스프레는 과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가장 연기를 잘 한 사람이 아역과 문정황후란 이야기가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사람만이 가장 사극답게, 사극톤으로 연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천명>이란 사극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그 흐름을 깨는 과도한 퓨전 스타일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최원 역의 이동욱이나, 홍다인 역의 송지효가 역량이 안되는 것도 아니고, 조금 더 <천명>의 색채에 맞는 톤의 연기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by meditator 2013. 4. 26. 09:30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나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친구이다. 그 친구와 함께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젊은 시절 이야기만 한 시간 넘게 하다 헤어졌다. '

이럴 때 당신이 그 당사자라면 돌아가는 기분이 어떨까? 여전히 그 젊은 시절의 기억에 빠져 가슴이 뛸까? 아니 그 보다는 지금 나이가 몇 인데 지난 이야기가 하고 있었는가 싶어 십중팔구 입맛이 쓰지 않을까?

흔히 젊음을 봄에 비교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꽃피는 봄은 길지 않다. 그런데도 늘 우리의 기억속 계절의 여왕은 봄이다. 하지만, 사람은 꽃이 아니라, 꽃도 사실은 꽃이 다가 아니듯이, 봄만을 살지 않는다. 비바람 한번 치고 나면 떨어져버리는 꽃처럼, 청춘의 봄날은 그저 잠시 머무를 뿐이다.

 

최근 들어 90년대 아이돌 그룹 특집, 왕년의 학교 스타 특집처럼 <라디오 스타>는 한때 잘 나가던 가수나 배우들을 특정한 주제아래 모아놓곤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들이 주로 활동했던 과거 시점의 이야기들에 집중이 되고 만다. 90년대 아이돌 특집의 경우, 그 팀에서 가장 못나가던 멤버라는 특정한 주제를 끄집어 내서 이야기 주제로 삼다보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식이 되어 생각지도 못한 숨은 이야기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그래봐야 이제 겨우 삼십대 중반이 그들이 한때 '아이돌'이라는 영광 뒤에 초라해진 모습을 오히려 확인 한 것 같아 마음이 쓸쓸했었다.

 

그런데, 24일자 방송은 김정현, 홍경인, 이민우를 데려다 놓고, 그들을 한때 잘 나가던 아역이란 주제 아래 똑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줄곧 김정현 자신도 기억하기 힘든 데뷔 시절의 '모래 시계' 출연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다룬다던가 하는 식으로.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이 세 사람이 물론 한 때 잘 나가던 아역이기도 했지만, 지금도 중견 연기자로서 각자 뚜렷한 캐릭터로써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는 상황에서, 기억 조차 가물가물한 과거 만을 들춰버리니, 그들의 삶조차 과거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스치듯 지나가 버린 '공주의 남자'에서 이민우의 연기는 여전히 존재감이 뚜렷했고, 김수현 작품마다의 김정현의 연기는 여전히 '모래시계'를 기억나지 않게 할 만큼 탁월하다. 차라리, 홍경인에게 구구절절 '전태일'의 분신 장면을 설명케 하기 보다는, 그가 출연했다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무엇보다, 이 세사람들은 다른 아역들과 달리, 그나마 아역의 연기에서 성인의 연기로 성공적(?)으로 넘어온 사람들인데, 그 과정의 어려움을 들려주는게 유익하지 않았을까?

물론 <라디오 스타>가 유익하다고 보는 방송은 아니고, 예능으로서 사람들이 공감할 지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모두가 가장 잘 공감할 그 지점에서 공명을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겠지만, 세상 그 누구도 모를 것같은 출연자를 데려다가도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만한 능력을 가진 <라디오 스타>이기에, 어렸던 그들의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의 그들이 더 궁금했던 시청자는 아역 탈렌트였던 그들을 다루는 방식에 아쉬움이 남는다.

 

 

(사진은 일간 스포츠에서)

 

허긴, 이제는 어엿한 수요일 밤의 안방을 차지했지만, 여전히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제발~'하던 라디오 스타는 여전히 그 시절의 정서를 이어받으며, 한때는 잘 나갔으나, 지금은 사는 게 아슬아슬한 mc들에, 그들과 급이 맞는 출연자들의 만담 퍼레이드가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긴 하다.

하지만, 수요일의 메인 요리가 된 <라디오 스타>가 그 시절의 라디오 스타가 아니듯, 네 mc 역시 이젠 그 시절의 다음 시간이 불투명했던 B급 mc들이 아니다. 그러니, 뒷골목 술집에 앉아 누구 하나 뜯어 먹을 듯이 굴던 그 진행 방식에도 이제는 조금은 제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당대 최고의 아이돌 그룹이라 늘 스스로 자부하는 규현의 '김구라 코스프레'는 종종 위아래도 없는 무례함의 경계선을 넘나드는데, 그걸 <라디오 스타>는 매번 재미라는 듯 cg처리까지 하며 내보내고 있다. 하지만 김구라니까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신정환이니까 넘어 갈 수 있는 말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니까, '이건 뭐~' 하며 웃자고 넘어 갈 수 있는 말도 규현이 하면 뻔히 출연자의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데 그걸 재미 포인트로 꼭꼭 짚는 <라디오 스타>가 언제부터인가 좀 불편하다. 규현 보다 나이 많은 유세윤 조차 자기 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드러나는 상황에서, 대부분 출연자가 규현보다 나이가 많거나, 심지어 규현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시기에 활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그 자리를 꼭 sm아이돌 배려석 처럼 어린 친구들에게 맡겨야 할까? 마치 어른들 술자리에 끼인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 아이가 한 명 끼어앉았는데, 점잖은 어른들이 꾹 참아주는 것같은 느낌이랄까? 막말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by meditator 2013. 4. 25. 0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