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로 갈 수는 있어도 느낄 수는 없다' 이 말을 자동차없이 살기 1주일에 대한 소회를 김준호가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휴대폰, 쓰레기, 그리고 이제 자동차까지 세 번째 미션을 완료하게 되면서 <인간의 조건> 멤버들은 서로를 '가족'이라 부르는 걸 서슴치 않게 될 만큼 친밀해지고 인간적(?)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런 훈훈한 면모가 <인간의 조건>이란 프로그램의 성격이 다가 아니다. 오히려, 자동차 없이 살기 미션의 마지막회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듯이 <인간의 조건>은 지금 당장 현장에서 투입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그 어느 교육 프로그램보다 훌륭한 환경에 대한 교재로 쓰일만한 '에듀테인먼트' 프로그램이다. '환경'교육에 삶을 돌아보는 '철학'까지 덧붙이니, 이만한 '양수겹장' 교재가 어디있을까?

 

아침 식탁에서 우연히 영화 <일 포스티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들 왈, '일 포스티노는 얼마 전 본 <파이 이야기>같아, 뭔가 분명하게 이거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란다. 물론 거기에 엄마란 사람은 '그런 게 좋은 영화야' 라며 호들갑을 떨면서 맞장구를 쳤다.

과연 '~ 없이 살기'란 계몽성 주제를 가진 버라이어티가 제 목소리를 내면서 재미를 찾아갈 수 있을까? 란 의구심을 <인간의 조건> 파일럿 때부터 가졌었는데, 이제 세 번째 미션을 마친 <인간의 조건>은 제법 그 과제에 대한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건 바로 좋은 영화가 우리 삶에 많은 의문부호를 던져주듯이, <인간의 조건>이 선택한 방식이 바로 단정적으로 '이거다. 이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우리가 무심코 익숙해진 '문명의 생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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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수소이든, 전기이든 거의 1주일만에 차를 탄 멤버들은 그 편리함에 저절로 '참 좋다'란 소리를 연발한다. 더구나 비까지 내리니 오죽하겠는가? <인간의 조건>제작진들은 그런 상황을 그저 바라본다. 김준호가 다른 멤버들과 달리 약삭빠르게 왕발통을 이용해서 오르막길을 손쉽게 드나들어도, 박성호의 제지 해프닝 말고는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제작진이 나서서 개입하지 않아도, 제작진이 기후제를 지낸게 아니냐는 멤버들의 씁쓸한 우스개처럼, 기상 상황이 비가 눈으로 바뀌자 그토록 편리하던 차들은 고스란히 애물단지로 변하고 만다. 그저 두 발이면 춥기는 해도 홀가분해졌을 퇴근 길인데, 차를 이용한 멤버들은 눈길에 미끄러질까 노심초사, 억덕길을 올라가기 위해 미는 건 당연지사, 심지어 주차를 위해 눈 치우기 봉사까지, 편하다고 좋아한 게 무색할 정도로 고생을 사서 하게 된다. 물론 차 때문에 늦게 끝나는 허경환을 데리고 올 수 있는 편리함은 있지만, 거리를 가득 메운 차들이나 기상상황으로 인해 애물단지가 되어버리는 차의 이중적 면모를 카메라는 그저 묵묵히 보여준다. 마지막 회에 가서야 김준호가 스스로 자신이 왕발통을 이용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스스로 시인하게 만들듯이.

 

<인간의 조건>을 보노라면 우리 사회가 거창하게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환경 오염' 문제의 절박함을 우선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생활에서 우리가 그 문제를 실천하려고 했을 때 불법 주차된 자전거 도로나, 대체 에너지를 이용하고 싶어도 막상 찾기 힘든 것처럼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또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실천이지만 막상 우리가 문명의 이기들에서 벗어났을 때 자동차를 탔을 때는 지옥이지만, 걸으면서 바라본 동네의 설경은 아름다운 풍경화인 것처럼 조금은 불편하지만 다른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김준호가 마지막 회에서 후배들과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비로소 자신이 코가 얼어가면서 집착했던 왕발통으로 인해 잃은 것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음을 깨달아 가듯이.

 

이처럼 <인간의 조건>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 밖에 없는 '문명'과 '인간'의 딜레마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서 섣부르게 앞서 예단하지 않는다. '편리함'과 '여유' 사이의 고민을 그저 안겨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보고 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영화처럼.

by meditator 2013. 3. 31. 09:20

다음 주면 <그 겨울 바람이 분다>가 연장없이 종영한다. 20회로 그 보다 몇 회가 더 남은 <아이리스2>로서는 200억 대작이라는 홍보가 무색하게 한 자릿대까지 떨어졌던 시청률의 반등을 노려 볼 좋은 기회이다. 그런데 <아이리스2>의 진행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럴 일이 있을까 싶게 답답하다. 장혁의 절권도가 돋보인 정유건과 레이의 대결처럼 분명 시선을 끄는 액션 장면은 있고, 남자 주인공 엄마의 죽음에 이어, 여주인공 오빠의 죽음이 이어지며 극적인 사건들이 줄을 지어 발생하는데 보고 있으면 지루하다. 사건만 있고 사건의 행간을 메워갈 캐릭터와 스토리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다 아는데 제작진만 모른 채 연일 사건만 터뜨린다.

 

 

멜로 드라마의 귀재 표민수 피디의 작품이 맞나?

<아이리스2>를 보다보면 종종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상황에 맞닦뜨린다. 27일 방영분에서 집으로 돌아온 정유건(장혁 분)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였다고 알고있는 백산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한다. 그 놀라움도 잠시, 어머니로부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아버지가 바로 백산(김영철분)이었음을 알고 믿기지 않아 한다. 어머니는 부자의 화해를 종용하지만 굳어버린 유건의 눈빛은 좀처럼 백산의 애틋한 눈길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상황도 잠시 백산을 찾아든 유중원(이범수 분)에 의해 정유건은 어머니를 잃는다. 부자의 손을 마주 잡아 준채 어머니는 아버지 백산의 품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드라마라면 어머니의 죽음 앞에 남겨준 두 부자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런데 <아이리스2>는 마치 우리는 액션 드라마야 그딴 인물의 감정 따위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라고 마음 먹기라도한 듯 정유건은 어머니를 죽인 유중원을 눈이 벌개져서 찾아다니고, 아버지인 백산은 도망치듯 사라져 아이리스를 상대로 한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킨다. 그렇게 공을 들여 두 사람이 부자인 걸 밝히더니,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실종되어 버린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생각처럼 나오지 않는 드라마들은 뭔가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것에 대한 강박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래서 연달아 주인공의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희생시키며 사건을 만들기에 급급하다. 백산에게서 핵무기가 어디 있는가를 알아내야 하는 유중원이 백산을 저격하는 자체가 넌센스인 건 넘어간다치고, 처음 만난 아비와 아들은 어머니가 죽자 마자 다시 남남인 듯 돌아서서 자기 할 일에 바쁘다니!

허긴 <아이리스2>는 부자 관계 만이 아니다. 연인인 정유건과 지수연 역시 한 회에 애틋한 눈길 한번 주고 받기가 바쁘다. 오히려 서현우의 복잡한 표정이 항상 두 사람의 감정보다도 앞선다.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왜 우리나라에서 맥을 못추는가? 제 아무리 돈을 들여 규모를 크게 만들어도 <7번방의 선물>같은 작품이 주는 공감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리스2>엔 공감하며 따라갈 스토리가 없다. 누구보다 인간의 감정에 천착했던 표민수 피디의 작품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주인공 레이가 죽었다?

인터넷 게시판에 등장하는 <아이리스2>의 댓글 중에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레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그런데 그 글에 한번 웃고 지나가기엔 너무 정곡을 찌르지 않았나?

<아이리스2>를 보다보면 등장인물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불쌍하단 생각이 든다. 주인공 장혁은 손톱이 시커매질 정도로 나오는 장면에서 혼신의 연기를 하지만 드라마에서 언제나 그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건 무시무시한 무표정 한 장면이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오열하는 것도 잠깐, 심지어 사랑하는 여인의 오빠가 죽었을 때 조차 그 표정을 풀지 않는 목석이다. 그가 머리를 다쳐 폭력적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설정도 다른 사람의 대사를 통해 들려주고, 아이리스로 1년을 몸담았기에 다시 nss팀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소회도 대사를 통해 흘려 보낸다. 아이리스였을 때도, 다시 돌아왔을 때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드라마에서는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언제나 무표정한 킬러이다.

하물며 주인공이 이런대, 다른 출연자들은 오죽하겠는가? 애초에 드라마를 홍보할 때에 정유건에 대적하는 악의 축으로 유중원이라고 소개 되었었다. 하지만 드라마가 중반을 넘어선 지금까지 nss에 대한, 그리고 정유건에 대한 악의 축은 유중원이 아니라 레이였었다. 유중원은 처음 탈북자로 등장하다가, 스파이였다며 북한에 등장하더니, 남측 수행원으로 남한에 내려와서는 아이리스라며 미스터 블랙의 심복이 되고자 애쓴다. 나열하고 보면 그의 행보는 화려하지만 정작 드라마에서 유중원 역의 이범수가 하는 거라곤 어색한 북한 사투리 몇 마디에, 인상쓴 얼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의 다양한 변신으로 인한 극적 재미를 노려보았겠지만, 28일 연화가 유중원에게 말했듯이 '어떤 사람일까'라는 정체성에서 혼란만 가중시켜왔다. 그러다 보니 일관되게 아이리스의 행동대장이었던 레이가 악의 축으로 각인될 정도로.

그래도 유중원 역의 이범수는 낫다. 김연화로 출연하는 임수향은 더하다. 가끔 몸매를 부각시키는 장면 외에는 늘 꼬나보는 표정으로 복수만 일갈하는 그녀는 외국에서의 활약 이후로 왜 등장하는지 모를 정도다. 얼마 전 등장한 박태희도 비슷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아이리스2>의 출연진들은 등장은 화려하게 한다. 하지만 그뿐, 이후 전개 속에서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시너지를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보다 일관되게 눈에 힘이 들어간 그래서 굳이 이제 와 밝히지 않아도 그가 배신자라는게 다 드러나 이준의 연기에 더 힘이 실린다.

<아이리스2>엔 다른 드라마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해낼 배우들이 포진되어 있다. 하지만 그 배우들이 <아이리스2>에선 기계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혹은 한 가지 표정으로 주어진 분량만을 채우고 퇴장한다. 각 캐릭터가,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없으니 항상 <아이리스2> 는 맹숭맹숭하다.

by meditator 2013. 3. 29. 09:30

요즘 한참 tvn의 군대를 배경으로 한 이른바 군디컬 드라마 <푸른 거탑>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들었다. 채널을 돌리다 몇 장면과 조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화제성있다는 <푸른 거탑>을 한참 전부터 볼 수 없었다. 그건 내 자식이 바로 그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지금은 이제 다가올 첫 휴가를 기다리고 있는 꼬래비 신병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굳이 아픈엄마의 이야기를 다룬 슬픈 에피소드가 아니더라도 새가슴 엄마에겐 그저 군대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 그게 고생이든, 해프닝이든- 그 자체만으로도, 저러고 지내겠지 하는 마음에 어느새 눈물이 주르륵한다.

 

현직의 의사들은 메디컬 드라마를 안보고, 국정원 직원들은 <7급 공무원>을 안본다고 한다. 가장 설득력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맞닦뜨리는 현실이 드라마 속 그 내용과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언제나 의학 드라마가 방영되면 그 드라마가 병원 현실을 얼마나 리얼하게 반영해 내었는가 라는 기사가 올라오곤 한다. 실제 <골든 타임>처럼 그 리얼함을 잘 담아낸 드라마로써 사람들 사이에 화제성을 끌기 시작한 경우도 있다.

마치 그렇게 의학 드라마의 현장성이 그 드라마의 관건이 되는 것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군대를 배경으로 한 <푸른 거탑>은 군디컬 드라마라는 이색 장르(?)를 내걸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담보해낸 현장성은 <골든 타임>에 못지 않게 화제성을 끌고 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 마치 술자리에서 여자가 애낳은 이야기를 후일담으로 하듯 소비했던 자신의 군대 이야기를 <푸른 거탑>을 통해 복기하며 즐기고 있다고 한다. 마치 없었던 시절의 고생하던 이야기지만 이제는 뭉클한 미소를 띠고 보게되는 <검정 고무신>이 인기를 끌었듯이. 현직 군인들은 어떠냐고? 그 시간에 군인들은 취침중이다!

<푸른 거탑>의 현장성은 드라마 중간에 나왔던 '밀리터리블'의 무한 삽질 등 리얼한 현실에만 있지 않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오히려 더 <푸른 거탑>이 '현실'스러운 것은 드라마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 그리고 그들의 웃지 못할 물고 물리는 역학 관계에 있다. 흔히들 군대 다녀오면 사람된다는 속설은 바로 그 계급에 따라 철저히 가려지는 강자와 약자의 먹이 사슬을 제대로 체험하고 깨닫게 됨으로써, 우리 사회의 본질에 순응할 수 있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들을 남고에 이어, 군대에 보내 본 어미로써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남성들만의 조직 사회에 몸 담는다는 의미는 엎어질 때 엎어지고 구를 때 구를 줄을 아는 걸 배워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뭔지가 궁금하면 <푸른 거탑>을 보면 된다.

 

 

 

거기에 또 하나, 철저하게 본능에의 충실이랄까? 집에선 남자라도 의상의 핏을 살리기 위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하던 아들이 첫 면회에서 과자가 그렇게 맛있는 건줄 몰랐다고 토로한다. 태어나서 한번도 종교적 의식을 경험하지 못한 아들이 자랑스럽게 교회에 가서 초코 파이도 받고 여고생들의 연주도 보았다고 편지를 쓴다. 담배를 피지 않는 아들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 배치를 받게 된 '멘붕'을 풀수 있는 건 PX뿐이었다. 그런 아들을 위해 엄마는 주섬주섬 신문에 나온 걸그룹의 광고 사진을 오려다 주고.

그런 이야기들이 <푸른 거탑>이란 드라마의 정서로 그대로 실려있다. 고참이 후임들을 데리고 하는 게임 시뮬레이션이나, 후임을 위한답시고 하는 만화 패러디는 각시탈이 유행이던 고등학교 교실에서 다 큰 남자아이들의 '나는 각시탈이다~'하며 책상에서 뛰어내리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유아적 마인드'이다. 그리고 그 유아적 마인드를 불러온 것은 자신이 마음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 대한 반작용이다. 개성 따위, 하고픈 일 따위는 다 개에게나 주어 버리고, 대학 입시를 향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탈색시킨 남자들에게 남은 것은 어느 소설에서 등장한 그 문구, '내가 짐승이었던 그 시간'이다. 거기서 그들에게 남은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건 먹는 거나, 사회에서 즐기던 것을 재현하거나, 다가서지 못할 이성의 대리인이라도 좋아하는 것 외엔 없다. 그리고 그런 짐승(?)들의 이야기를 <푸른 거탑>은 빼곡하게 복기한다.

그리고 이제는 사회에 나와 멀쩡하게 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인 척 살아가는 남자들은 <푸른 거탑>을보면서 한때 본능에 충실하며 살아가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한다. 은근히 그리워하면서.

by meditator 2013. 3. 28. 09:25

3월 26일 <화신>에는 지드래곤, 대성, 김경호, 가희, 노사연 등이 출연하여, 남녀대첩이란 주제로 만남과 이별에 있어서의 출연자 각자의 노하우(?) 혹은 사연을 나눴다. 그런데, 이날 출연한 출연자들중 노사연을 제외하고, 전세계 솔로 투어를 앞둔 지드래곤, 일본 투어를 앞둔 대성, 솔로 앨범을 낸 김경호와 가희 등 모든 출연자가 자신의 개인 스케줄과 관련된 홍보 일정이 있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따로 시간을 내서(물론 '이 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명목하에) 이들의 개인 홍보 시간까지 주어질 정도로. 이제 와 새삼스레 홍보를 목적으로 한 연예인들의 방송 출연을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상황이지만, 과연 <화신>이란 프로에 지드래곤과 대성의 출연이 시의적절했는가, 혹은 곧 결혼할 약혼자가 있는 김경호의 출연이 적절했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지드래곤은 최초로 솔로 월드 투어를 앞두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부쩍 요즘들어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이 잦다. 3월15일과 22일에는 <땡큐>의 게스트로 나왔고, 26일에는 <화신>에 출연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드래곤 자신으 예상하지 못했을 지 모르겠지만 두 프로그램을 다 시청한 팬이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 지드래곤이란 사람에 대해 이미지 분열을 일으킬 만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땡큐>에서의 지드래곤 모습이 새삼 감동적이었던 것은, 자신 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 앞에서 손을 떨며 음식을 하는 수즙은 젊은이의 모습, 그리고 한때 양현석 사장이 '악의 근원'이라 지칭했다고 하는 빅뱅의 많은 사건 사고의 꽤많은 지분을 차지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오만과 만용이라 반성하면서 젊은 나이임에도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자신을 반추할 줄 아는 원숙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무이다. 그래서 많은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지드래곤이란 사람을 음악을 사랑하는, 무대에서 완벽하지 않을 때 거침없이 그곳을 떠날 '뮤지션'의 모습으로 그를 되새김할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런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마음을 지배하는 자'란 미명 하에 노골적으로 남녀 관계를 도마 위에 올리고, 19금은 아니지만, 거의 노골적으로 19금을 지향하는, <화신>에 나온 지드래곤의 모습은 지난 주 그에게 새로 품었던 '순수한' 지드래곤 이란 이미지를 확 깨게 만들었다. 그 나이의 남정네가 연애 고수인 것 쯤이 무슨 문제이겠는가마는 타 프로에 나가 자신의 지난 날을 참회하던 사람 혹은 그런 이미지를 만들고 싶던 사람에게, 연애 고수인 양 자신의 연애 스킬을 다종다양하게 설파하는 이 프로그램은 물의를 일으켰던 지드래곤을 떠올리게 해 애써 돌려논 기억의 시계는 과거로 다시 향해지는 듯 했다.

더구나, 물론 법적으로야 아무 문제가 없지만, 지드래곤이나, 대성이나 대중들에게 심리적 사면을 받은 게 애매한 상황에서 (아직도 그들을 보면 어떤 사건이 떠오르는) 과연 <화신>이란 프로에 나와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자신들의 연애 이야기를 '웃고 까발리는' 상황이 적절했을까? 물론 많은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일정을 홍보하는게 연예인들에겐 중요한 일이지만, 그가 지향하고자 혹은 개선하고자 하는 이미지와 프로그램의 성격이 맞는가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볼 필요를 지드래곤 편 <화신>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김경호는 <화신>에 나와 결혼까지 생각하는 약혼녀가 있음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화신>은 그의 지나간 연애 경험을 들춘다. 그런 프로그램에 취지에 맞춰 김경호는 8번의 연애 경험과, 양다리를 걸쳤던 사실, 심지어 돈을 뜯기기도 했던 과거의 연애사를 풀어 놓게 되고. 한번은 지금 결혼할 사람에게 영상 편지를 보내더니, 다음엔 지난간 연인에게 영상 편지를 쓰고, 웃자고 보는 프로그램이지만, 술 먹는 사석에서도 하지 않을 '연애의 상도덕'을 <화신>은 마구 넘나든다. 출연자의 이미지따위는 상관없이.

 

<화신>을 보다 보면 몇 년 전 <야심만만>을 보는 듯한 기시감에 빠져드는 건 누구나 예외가 아닐 것이다. 아니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종영까지 <놀러와>에서도 남녀의 심리 탐구 이런 걸 했었다. 거기에 상황극을 더 얹는다고 해서 '탱자'가 '귤'이 되지 않듯이, <화신>은 그저 어디선가 보던 프로그램이다. 단지 신동엽, 윤종신이라는 조금 더 성인용 토크를 통해 프로그램의 차별성을 가져가려는 MC와 그 화사함으로 프로그램을 덮으려는 김희선에, <야심만만>에서 이미 한번 쯤은 본, 하지만 <야심만만>보다도 신선하지 않은 토크 주제에, <강심장>보다 적은 출연자로 인해 속속들이 까발려지지만 이상하게도 지루한 시간까지, 굳이 <강심장>을 없애면서까지, 아니 굳이 이 시간에 저 연예인들의 신변잡기를 장황하게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게 자꾸 떠올려지는 시간이다. 그러느니 <김국진의 현장 박치기>를 보던가, <엄지의 제왕>이 낫단 생각이 들지 않을까?

by meditator 2013. 3. 27. 09:21

설경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영화배우입니다. 1000만이 넘긴 영화는 물론, 수치로 가늠할 수 없는 <박하사탕>등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영화들의 주인공을 했던 배우입니다. 그런 그가 20여 년만에 처음으로 <힐링 캠프>에 출연했습니다. 그런데, <힐링 캠프> 게시판은 설경구 출연 반대 댓글로 도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를 섭외한 걸로 알려진 김제동까지 더불어 욕을 먹고 있습니다. 포털 사이트의 이슈가 될 만큼. 그리고 예능에서 보기 힘든 설경구가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힐링 캠프>의 시청률은 떨어졌습니다. 마치 사람들의 <힐리 캠프> 설경구 편 시청 거부 운동을 벌이는 게 먹혀들어가기라도 했다는 듯.

 

이른바 사회적 왕따에 대한 진화론의 입장에는 전염병론이 있습니다. 마치 전염병을 가진 사람이 한 집단에 스며들면 그로 인해 그 집단 전체가 절멸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소인을 혹은 가능성을 가진 집단 외의 사람을 배척하기 시작한 게 이른바 사회적 왕따의 근원이란 것이죠.

 

사람들이 설경구에 대해 반응하는 양상은 마치 전염병 보균자를 대하는 태도와 흡사합니다. 그가, 그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제대로 퍼져서는 안되는 것처럼. 그저 언젠가 '아고라'를 통해 알려진 확인 되지도 않았던 사실에 얹혀진 네티즌들의 추측이 덧붙여 설경구와 그의 아내 송윤아의 사랑과 결혼 과정의 사연은 불륜이 되었고, 신성한 가족 제도를 더럽힌 주범이 되었습니다.

무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까지 했고, 그래서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돌을 훨씬 지난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람들의 그들에 대한 분노는 식을 줄 모릅니다.

 

 

 

지난 주 <썰전>에서 한 앙케이트 중 하나가 그간 물의를 빚은 연예인들에 대한 반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승준, mc몽등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이 어떠한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 그 자리에 있던 패널들이 '설마'라며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적당하다거나, 미흡하다는 것이 여론의 향방이었습니다. 같은 연예인이거나, 동종 업계 종사자인 사람들이 보기엔 이제 그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물의를 빚은 연예인들에 대한 분노의 온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여론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많은 시간이 흐를만큼 흘렀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설경구 커플에 대해 냉랭하다 못해 분노를 터트립니다. 그건 군대를 가지 않은 연예인들에 대해 남자들이 갖은 상소리를 다해대듯이 그들은 이 사회에서 살면서 감수해야 할 부분을 누군가가 무사통행을 한 것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싸이처럼 군대를 두 번 갔다 오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지요. 그렇듯이 설경구 부부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걸 유지해 가는 게 버거운,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무너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 '정'과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가족 제도를 붕괴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군대라는게 남자들에게 지옥이듯이,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현주소를 설경구 부부에 대한 반응을 통해 역설적으로 알아볼 수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전염병에 대한 한 집단의 피해의식은 사실 닫혀진 사회를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한 사회가 폐쇄적이면 폐쇄적일 수록, 그 사회 자체의 자정 능력이 떨어지면 떨어질 수록 외부적 침입자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설경구가 출연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분노의 댓글들이 넘쳐나는 게시판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타인의 삶에 대해 여유롭지 못한, 그리고 사실은 자신이 사는 삶에 넉넉하지 못한 현실을 반영한 것에 다름아는 듯합니다. 중세의 마녀 사냥이 그 당시 사회적 불안을 피해가기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역사적 해석입니다. 들어보지도 않고 마녀 사냥식의 폄하를 떠나 까짓거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쿨하게 인정하면 편할 것을 미워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구요. 그런다구 우리 사회 가족 제도가 당장 무너지진 않으니까.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만약 설경구가 tvn의 <택시>같은 프로에 나와도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 반응은 지금과 달랐을 것입니다. 그건 <힐링 캠프>가 가지는 프로그램의 성격에도 기인합니다. '힐링'을 내걸면서 , 어찌보면 출연자들의 과거를 세탁하는 과정이 되기도 하는 <힐링 캠프>의 그간의 과정이 더더욱 설경구 출연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우려에 어울리듯이 설경구 첫 편 <힐링 캠프>는 설경구란 배우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굳이 다음 회의 부부의 이야기를 듣지 않더라도 그래 저런 사람이라면 무슨 사연이 있겠지라는 공감을 피어오르게 할 만큼. 그래서 사람들이 보면 홀리니까, 애시당초 보지 말자고 시청 거부를 벌였던 거구요. 이건 <힐링 캠프> 제작진에게 남겨진 과제이겠지요. 출연자의 힐링을 넘어 시청자의 공감을 진짜로 얻어 내는 것.

by meditator 2013. 3. 26. 08:58

이번 주 <썰전>에서는 각종 공기업에 대한 낙하산 인사에 대한 구설을 다뤘다. 대통령이 선거 후에 선거 과저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인물에게 왜 공기업이라는 낙하산을 하사(?) 하는가의 이유가 밝혀졌다. 그건 바로 돈! 은행 관련 공기업의 경우 한 달 월급과 기타 경비를 합하니 받는 돈이 거의 1억에 가까웠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고 지난 정권에서 낙하산으로 감투를 받았던 인사들이 버티고 물러나지 않는 이유가 단 몇 달을 버티더라도 몇 억을 더 손에 쥐니 그럴 만도 하다는 우스꽝스럽지만 웃을 수도 없는 결론을 내렸다. 도대체 그 많은 돈을 다 어디다 쓰려고? 하지만 날마다 뉴스에 올라오는 낙마하는 관가의 후보자들을 보면 그들에게 돈이란 진짜 '다다익선'이 딱인 듯하다. 돈을 위해서는 국익이고 나발이고 영혼 정도는 가볍게 팔아넘길 기세다. 그리고 그런 나으리들의 실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돈의 화신>의 나으리들도 돈 앞에선 의리고 동지고가 없다.

 

<돈의 화신> 속 검사 지세광(박상민 분)을 비롯한 5인의 제휴의 근간은 이중만 회장의 죽음과 그 일가의 몰락을 눈 감아주는 댓가로 이중만의 돈을 나눠가진데서 비롯된 공범 의식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돈을 근간으로 이제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이차돈, 아니 이강성과 조우한 지세광 검사는 그가 여전히 자신의 눈에는 '슈달'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슈달은 초보 검사시절 여러 기업체에서 떡밥을 받아챙겨 검사직을 물러나게 된 이차돈의 별명이다. 뿐만 아니라 지세광은 이차돈이 이강석일 거라는 의심의 끈을 늦추지 않고 그를 추적한다. 그런 지세광의 기억을 사로잡는 것은 감방에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아들이 사가지고 간 호두도 먹어보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아비이다.

지세광의 뇌는 편리하게 재구성되어 있거나, 일종의 정신 분열이다. 그 자신이 안젤리나와 함께 저지른 저축 은행 인수와 관련된 자신의 비리는 안중에 없고 후배 검사가 떡값을 받은 것에는 분노하거나, 한 가족을 죽음과 불행으로 몰아넣은 자신의 행동에는 눈꼽만치의 반성도 없으면서, 이미 복수로 되갚고도 남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한 분노를 삼킨다. 자신의 이익, 자신의 불이익에 대해서는 맹수보다도 더한 포효를 하면서,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비리엔 무감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돈의 화신>이 재미를 주는 것은 이강석의 허를 찌르는 복수극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른바 사회지도층으로 성장한 5인방의 자기 합리화를 넘어선 안위의 철학,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신 분열 과정을 보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다. 그 재미를 더하는 것은 엄청난 재산을 눈 가리고 아웅하고도 그동안 바뻐서 몰랐다거나, 이 정도쯤이야 괜찮겠지 하면서 공인의 자리에 눈도 깜짝 안하고 오르려는 화제의 인물들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하면 사랑이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그들의 심리를 복습하기엔 <돈의 화신>만큼 적절한 드라마도 없는 것이다.

모 장관 후보자가 외국 국적을 포기하자니 수많은 재산이 날라갈 걸 우려해 장관직을 포기하는 해프닝처럼, <돈의 화신> 속 악인들이 귀결되는 곳은 결국 또 돈이다. 이미 이중만의 죽음을 통해 많은 돈을 치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하기 위해, 아니 무조건 더 많은 돈이 필요해 검찰 총장 정도의 인물 등이 한때는 동지라 여겨지던 인물을 배신하거나, 혹은 다른 인물의 불이익을 통해 자신의 지분을 더 챙기려고 한다. 돈 앞에 장사없다는 옛말 하나도 그른 거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리고 오직 눈 앞의 돈에만 혈안이 된 그 인물들은 이강석이 채팅 창에서 예언하듯, 칼로 흥하는 자 칼로 망하듯, 돈으로 얽힌 이 카르텔은 돈으로 인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시청자들은 뉴스 속의 장관 후보자 낙마 소식을 <돈의 화신>으로 복기하며 이 시대의 가치관을 헤아려 본다.

by meditator 2013. 3. 25. 09:13

종편 최고의 시청률를 기록하며 종영한 <무자식 상팔자>의 뒤를 이은 것은 <궁중 핏빛 잔혹사-꽃들의 전쟁>이라는 사극이다. 이전에 <인수대비>를 통해 종편 첫 드라마치고는 괜찮은 반응을 얻어냈던 정하연-노종찬 콤비가 다시 뭉쳐 만든 이 사극은, 그간 조선시대의 소재 중 터부시되어 오던 소현세자의 독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첫 회, CG를 활용한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장대한 스케일로 다루다, 뜬금없이 여인의 상반신 노출까지 감행하는 선전성을 내보인 이 드라마는 비록 3%를 갓 넘었지만<무자식 상팔자>의 첫 방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순조롭게 출발하고 있다.

 

 

<마의>를 연출하고 있는 이병훈 감독이 은퇴 전에 꼭 해보고 싶어하는 역사적 소재가 바로 인조 연간의 소현 세자 이야기이다. 하지만 소현 세자 이야기를 드라마의 소재로 쓰기엔 사도 세자 이상으로 아비에 의해 아들이 죽임을 당한 비극적 내용이기에 그간 역사를 소재로 했던 드라마들이 감히 이 제재를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소현 세자는 병자호란에 패배한 조선의 볼모로 청의 심양으로 잡혀갔지만 거기서 조우한 서양의 문물로 인해 개명(?)을 하고 그로 인해 조선으로 돌아와 아버지인 인조와 수구 권신들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역사의 희생양이 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중기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 다시 한번 역사의 수레바퀴를 발전적으로 되돌릴 몇 번의 기회 중 하나가, 바로 소현 세자의 등장이었는데, 그는 사대주의와 수구 권력의 이기심으로 성리학에 찌들지 않은, 당시에 변화하는 세계 정세까지 바라보는 시야를 가진 실용주의적 정책의 뜻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아내 세자빈 강씨는 물론, 세손들까지 일가족 몰살의 주인공으로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도 세자의 비극적 죽음이 번번히 사극의 소재로 쓰인 것과 달리 소현세자의 이야기가 사극에서 기피 소재가 되었던 것은, 사도 세자의 죽음에는 영조라는 걸출한 아비와, 그 뜻을 되살리려고 했던 똑똑한 아들 정조라는 긍정적 포장이라도 있는 반면, 인조 연간의 소현 세자 독살은 말 그대로 정쟁 속에 사라져 간 세자라는 비상식적인 역사적 학살만이 있기에 누구도 감히 그걸 꺼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중파 사극의 저조한 시청률에서 보듯이, <대장금> 이래 붐을 이루던 이른바 '퓨전 사극'이 이제는 그 인기가 한 풀 꺾이는 듯한 기세를 보이고, 로맨스 사극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궁중 암투를 벗어나지 못했던 <해를 품은 달>의 높은 시청률에서 보여지듯 여전히 <조선 왕조 오백년>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취향은 소현 세자 독살 사건이라는 기피 소재를 드라마로 불러 올린다. <꽃들의 전쟁>에 이어, KBS2 TV <아이리스> 후속으로 방영될 예정인 <천명>도 소현 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이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꽃들의 전쟁>은 소현 세자가 주인공이 아니다. 노골적으로 왕의 무소불위의 권력의 그늘에서 살아야 하는 본능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욕망의 덩어리로써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기획의도는 밝히고 있다. 즉, 그의 비극사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세력, 그것도 왕의 후궁의 입장에서 풀어냄으로써, 비극적 역사를 뒤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도 세자의 죽음을 그간 많은 드라마에서 영조 후궁들과 딸들의 음로로 그려내듯이.

여기서 우려가 되는 것은, 소현 세자 죽음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진실이 그저, 한낱 궁중 세력의 암투라는 흔하디 흔한 소재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회에 벌써 굴욕을 겪고 돌아가는 길에도 아들 걱정에 앞서는 아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그 자신보다 아내 강씨가 더 부각되어 보이는 설정에서, 소현 세자라는 인물은 드라마를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되, 그가 담보해 내었던 조선 역사에서의 진보성이나, 발전성은 그저 정쟁 속의 나약한 인물에 휘말려 연소될 가능성이 커보이기에 우려가 된다.

 

(사진 출처; jtbc)

by meditator 2013. 3. 24. 09:32

금요일 밤 광화문 네 거리를 가보면 딴 세상에 온 거 같다. 불야성의 도시에, 술집마다 사람들로 넘쳐나고, 늦은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거리는 이상한 열기에 휘감겨 있다. 토, 일요일이 휴무가 된 시점부터 사람들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을 '불타는 금요일'이라 지칭하며 한 주간의 피로를 날릴 '껀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맨다. 하지만 오히려 늦은 밤 찾아든 두 예능, <땡큐>와 <나 혼자 산다>는 그 열기에 휩싸이기 보다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남자의 자격>의 대체재? <나 혼자 산다>

설 특집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던 <남자가 혼자 살 때>가 좋은 반응을 얻자 정규로 편성되어 돌아왔다. 물론 남자가 혼자 사는 모습을 리얼리티로 담아낸 그 착상 자체가 기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돌파구를 연 신선한 기획이지만, 그런 설정이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기러기 아빠, 독신자 가정 등 1인 가구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격세지감이다.

노홍철의 나레이션을 얹은 김태원, 이성재, 서인국, 데프콘, 김광규의 일상은 '불타는 금요일'이라는 세간의 풍습과는 거기가 멀다. 항상 켜져있는 텔레비젼, 심지어 곰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 기껏해야 단체 채팅으로(그조차도 누군가는 따라가기에 버벅거리는) 금요일 밤의 외로움을 달래는 모습은 '혼자'라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각인시킨다.

하지만 '혼자'가 곧 '고독'은 아니다. 누군가는 잠자리에 든 다른 사람에게 끝까지 문자를보내며 '자냐?'며 붙들거나, 늦은 밤 매니저에게 생뚱맞게 우동 한 그릇을 먹자며 전화를 하지만, 대부분은 '혼자'의 삶에 익숙하게 스며들어 간다. 심지어 일요일에 급격하게 이루어진 '번개' 모임이 번거러워 버둥거릴 정도로.

<나 혼자 산다>는 말 그대로 혼자 사는 남자들의 모습을 충실히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단체 채팅이나, 번개에 '~님'이라는 호칭까지, 이 시대의 사람들이 관계을 맺어가는 방식까지 철저히 답습해 낸다. 그래서 어느 프로그램보다도 '동시대적'이다. 마치 시대를 거스르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아저씨 예능 <남자의 자격>이 2013년 버전으로 새롭게 탄생된 듯하다.

하지만 이미 첫 회인데도, <나 혼자 산다>는 묘한 익숙함 혹은 진부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노홍철 특유의 설레발이나 그의 사는 스타일은 이미 <무한도전>을 통해 충분히 전달되었고, 국민할매라는 호칭까지 안겨준 <남자의 자격>에서의 김태원의 홀로 사는 모습 역시 익숙하다 못해 진부할 지경이니까. 노홍철이나 김태원의 합류는 프로그램을 친숙하게는 만들면서 동시에 새롭지 않게 보이게도 하고 있다.

또 하나, 최근 프로그램들이 '힐링' 등 분명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론칭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나 혼자 산다>는 혼자 사는 모습 이상의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도 앞으로 이 프로그램이 지속할 수 있는가의 관건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번개에서 토로된 다양한 혼자 사는 남자들의 고민은 이 프로그램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능성만으로 <나 혼자 산다>의 발전을 예상해 보기는 쉽지 않다.

 

 

 

여행을 떠난 <힐링 캠프>? <땡큐>

금요일 밤 늦은 시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듯 여유롭게 한 시간여를 보내는 듯한 <땡큐>는 동시간대 <나 혼자 산다>라는 경쟁 프로가 등장함으로써, 또한 이제 서너 번의 출연진을 거듭해 가면서 예능으로서의 자신의 성격과 특징을 분명히 해야 할 과제를 떠앉게 되었다.

<땡큐>의 가장 큰 장점은 시너지이다. 서로 다른 분야의, 서로 다른 연배의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의 관계가 집을 떠나온 그 분위기로 인해 응집하고 그를 통해 그들 한 사람이 가지는 속내 이상의 승화된 사연들이 시간을 흐르며 더 진하게 풀어내어지는는 마력, 그것이 바로 <땡큐>이다.

여행을 오면서 어른들과 어떻게 어울리나 걱정을 했던 지드래곤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를 외칠 수 있게 되었듯이 주제를 가지고 흐르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서로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고민이었음을 알아가게 되는시간은 끄덕임과 심지어 눈시울을 적시는 공감에 이르게 만드는 시간을 마련한다.

하지만, <힐링 캠프>와 마찬가지로 <땡큐> 역시 시청자들은 함께 여행을 떠난 옆 자리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줄 수 밖에 없듯이, 그리고 나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그 이야기들이 여행지의 들뜬 분위기에 한껏 업된 자기 감상이었음을 깨닫고 씁쓸해 지듯이,<땡큐> 역시 출연진의 자기 속내에 집중을 할 수 밖에 없는데서 오는 아쉬움이 있다. 지드래곤이란 뮤지션의 고민은 진솔했지만, 그가 우리 사회에 끼친 파장의 여운이 아직 다 가셔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토로가 때론 해명이나 변명 혹은 포장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더구나, 그 다음을 이어가는 오상진 아나운서와 은지원의 출연은 더더욱 <땡큐>라는 프로그램의 위험성을 배가시킨다. 인터뷰이의 자기 해석과 객관적 진실 사이의 줄타기, 이것이 이제 초반을 넘어서고 있는 <땡큐>에게 주어진 과제다.

by meditator 2013. 3. 23. 09:17

0%에 가까운 시청률로 고전하던 종편을 구원한 건 대통령 선거였다. 종편 각 방송국마다 주야장창 쏟아내는 각종 정치 관련 프로그램들에 중장년층들은 귀를 기울이면서 종편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종편 정치 프로그램들의 부작용은 만만치 않았다. 이제는 청와대의 입으로 등장한 사람이 종편 프로그램에 등장해 걸러지지 않은 표현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이용해 정치적 반대편을 저격했듯이, 종편은 그 태생적 보수성으로 말미암아 객관적 공정성을 잃기가 십상이었고 그것은 상당 부분 선거 결과에 반영되었다. 그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아진 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그 중에서도 중장년층들에겐 '정치'란 그 어느 것보다도 흥미진진한 오락거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취향을 재빠르게 반영해, jtbc는 <썰전>을 런칭하였다.

 

 

'성역과 금기없는 각계 각층의 입담가들의 하이퀄리티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이라는 취지를 가지고 만들어진 <썰전>은 김구라를 mc로 두 파트로 나뉘어져 진행된다.

 

우선 말 그대로 '썰전'으로, 야권 성향의 시사평론가 이철희와 한때 여당의 저격수로 활동하다 구설수로 국회의원직까지 잃고 이제는 오락프로 mc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여당 성향의 강용석이 김구라와 함께 트라이앵글을 이루어, 한주간 핫한 정치적 이슈들에 대한 이른바 '뒷담화'를 나눈다. 그 내용은 박근혜 대통령의 완판녀 스토리 같은 가쉽성 소재부터, 낙하산 인사 등의 민감한 이슈까지 다양한 뉴스꺼리들을 이철희와 강용석이 각각 자신의 당파적 입장에 맞춰 해석하고 갑론을박 토론을 벌이고 한 줄 논평을 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또한 한 회마다 마지막에 그날의 상대방의 토크 점수를 매겨 불리한 쪽이 박을 맞은 오락적 요소까지 갖추면서.

썰전 코너의 의의는 jtbc가 종편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타 종편 프로그램이 노골적 정치적 성향을 추구한 것과 달리 여, 야의 입장을 충분히 소명할 수 있는 정치적 오락프로그램을 만든 것이다. 낙하산 인사를 돈 문제로 해석해 내듯 종종 김구라 특유의 음모론적 설정에, 강용석의 세속적 해석이 덧붙여져 화두가 폄하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밥상머리나, 게시판을 통해 설왕설래되던 이슈들을 노골적으로 끄집어 내어 각자의 잣대로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굳이 박으로 머리 맞추기란 평가를 하지 않더라도 시청자들에게 풍부한 판단을 할 기회를제공해 주는 것이다.

 

 

두번 째는, '예능 심판자'란 코너로 '영화, 드라마, 공연, 음반은 물론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떡밥을 에능계의 아나키스트들, 이윤석, 허지웅, 강용석, 박지윤 등이 그들만의 잣대로 주물러 보는 코너이다. 지난 주에 종편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에 이어, 이번 주에 박시후 사건에 대한 정리에서 보듯이, 연예계의 가장 핫한 이슈들에 대해 논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프로그램에서도 말해지듯이 '박시후'란 연예인의 사건이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적나라하게 논의되고 있는 시점에서 연예 프로의 입장이 아니라, 거기서 드러나는 인터넷 찌라시 언론의 폭로성 기사와 대중의 호기심에 대한 논의라던가, 그를 통해 이른바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에 대한 대중의 시선에 대한 통계까지, 가장 핫하면서도 사실은 꼭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공중파 예능들이 여전히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그저 그런 토크 프로그램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갑론을박 되는 소재들을 끄집어내 과감히 수용한 <썰전>의 기획은 신선하고 획기적이다. 또한 비평이란 어찌보면 '순수한' 영역 하지만 이제는 영화 평론가들보다, 리뷰어들의 평이 더 공감을 얻는 세상에서 과감히 그걸 함께 즐길 수 있는 영역화한 것 또한 제대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본다.

단지 아직, <썰전>이나, <예능 심판자>나 많은 주제들을 소화해 내려다 보니, 때론 예능 프로그램 폐지에 대한 토론에서 보여지듯이 겉훑기식으로 그냥 한번 짚어보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어 아쉽다.

 

중구난방으로 떠들기 보다, 단 한 마디라도 '촌철살인'이 되도록, 그것이 바로 <썰전>이 비평 오락 프로그램으로 개척해 나갈 과제라 할 수 있겠다.

by meditator 2013. 3. 22. 12:03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종 바이러스로 인한 무차별 피해를 다룬 드라마 두 편이 등장했다. ocn의 <더 바이러스>와 jtbc의 <세계의 끝>이다.<더 바이러스>는 그간 ocn을 통해 방영되었던 <신의 퀴즈> 등을 잇는 오리지날 시리즈 이며, <세계의 끝>은 배영익 작가의 [전염병]이라는 작품을 <아내의 자격>의 안판석 피디가 드라마화한 것이다.

 

 

장티푸스 메리

1900년대 뉴욕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메리 말론은 그녀 자신은 건강했지만 그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장티푸스에 걸리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결국 잡혀서 사람들과 괴리되어 생을 마감하게 된 그녀를 따서, 건강한 보균자, 하지만 돌아다니면 전염병을 퍼뜨리는 사람을 '장티푸스 메리'라고 지칭한다.

공교롭게도 <더 바이러스>와 <세계의 끝>은 '장티푸스 메리'의 출현으로 인한 급격한 바이러스성 전염병의 전파로 드라마의 시작을 알린다. 뿐만 아니라 눈을 비롯한 온몸에서 피가 나거나, 피를 토하거나, 결국은 괴사에 이를 정도의 흉측한 몰골로 급격하게 죽음에 이르는 양상도 비슷하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여 '전염병 대책반', 혹은 질병 관리 본부'가 사건의 주체로 등장하며 주인공인 듯한 인물들의 주변이 바이러스로 감염되면서 사연을 만들고 감정을 이입시켜 가는 것조차 비슷하다.

즉 두 드라마 모두 이미 우리가 '사스'나 '신종 플루' 등을 통해 경험한 바 있던 '바이러스성 질병'으로 인한 공포를 드라마의 주된 소재로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재앙과도 같은 '바이러스'의 습격은 마치 헐리웃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외계인의 습격이나 천재지변의 습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의 끝>에서 윤규진 교수는 강의실에서 '장티푸스 메리'가 그 자신이 사람들을 죽이는 보균자임에도 사람들에게 쫓기거나 격리당해야 하는 것때문에 오히려 그 자신이 피해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두 드라마 속 장티푸스 메리들은 범죄자와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드라마의 초반은 그런 '장티푸스 메리'에 대한 무지로 인한 피해자들과 그를 발견하고 추적하는 과정에 드라마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이미 많이 알려지다시피 '바이러스'의 대부분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밀림 등에 기생하며 살아왔던 병원체이다. 그런 바이러스들이 인간들이 무차별적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침범해 가면서 기존의 숙주를 인간으로 변형해 가면서 인간의 재앙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바이러스'이 주체적 입장과 상관없이, 현대 사회에서 '바이러스'는 미국판 좀비 영화의 '좀비'에 버금간다. 실질적으로 죽음, 혹은 죽음에 버금가는 '삶'의 강탈을 초래하는 이 객체의 등장은 단지 현실적으로 유행했던 '바이러스성' 질병으로 인한 공포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서로가 조직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한 인간은 지극히 원자화되어 사회로 인한 피해를 마치 전염병처럼 고스란히 감내할 수 밖에 없는 현대 사회의 인간을 상징화하기 때문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는 느닷없이 한 도시를 침범한 바이러스로 인해 무너져 가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묵시록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하지만 아직 두 드라마에서 현대판 묵시록은 보여지지 않고, 그보다는 헐리우드 재난 영화의 내음이 더 진하게 맡아진다.

 

 

이명현 vs. 강주헌

이명현과 강주헌은 <더 바이러스>와 <세계의 끝>에서 각 특수 감염병 위기 대책반과 질병 관리 본부의 책임자로 등장한다.

몇 년 전에 사랑하는 딸 아이를 감염으로 잃고 이제 아내까지 이름모를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어가는 이명현은 그로 인해 보다 감정적으로 '바이러스성 질병'에 반응한다. 그의 안타까운 심정은 그대로 화면에 옮겨져, 김인철을 쫓는 숨막히는 추격전으로 <더 바이러스>의 리듬을 이끌어 간다.

반면, 홈즈라는 별명처럼 냉정하게 사건을 분석하기로 이름난 강주헌은 역시 바이러스성 질병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도망가는 바이러스 보균자를 죽이지 못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던 아픈 기억을 가진 그는 늘 보다 차분하게 분석적으로 대상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로 인해, <세계의 끝>이 가지는 드라마적 색깔은 바이러스로 인한 재난이 곳곳에서 터져나감에도 불구하고 탐색적이다.

<더 바이러스>는 바이러스 vs 인간이라는 구도 외에도, 인간 vs. 인간의 구도를 더해간다. 바이러스 질병의 위험성을 알리려는 이명현 팀과 그에 대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까 두려워 쉬쉬하는 관료들의 갈등으로 인해 바이러스 보균자의 체포는 번번히 비껴간다. 아직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보균자 김인철이 병원에서 생체 실험을 당한 결과 바이러스 보균자가 된 것처럼 이 드라마는 결국 의도적으로 바이러스를 생산한 누군가와 그것을 밝히고 해결하려는 누군가의 구도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단지 지극히 감성적인 이명현의 리듬과 그로 인해 전개되는 도심 추격전은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과연 이것이 '바이러스성 질환'을 다루는 드라마에 공감하게 만드는데 적절한 방식이었는가는 재고해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작위적으로 보이는 관과의 갈등 등의 설정, 어설픈 등장인물들의 연기 등이 음모론으로 끌고가고 있는 <더 바이러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또한 무시못할 일면이기도 하다.

반면, <세계의 끝>에서 정부는 오히려 신속하게 바이러스의 전파에 대응하고 있는 편이다 대책 연구팀의 팀장을 두고 말은 오가지만, 그게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전개로 보았을 때, 바이러스 vs. 인간의 구도로 펼쳐질 가능성이 더 크게 보여진다. <세계의 끝>은 이미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무시무시한 연기력을 인정받은 윤제문이 차분하면서도 예리한 팀장으로 등장하며 이미 극의 분위기를 끌고 가는데다, 기존 <아내의 자격>에서 믿고 쓰는 배우가 된 장현성에, 조만간 등장할 김창완까지 등장인물들의 비중있는 존재감만으로도 압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틈을 메우고 있는 조연들의 연기도 만만치 않다. 지나치게 어두운 듯하지만, 극의 전반적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드라마의 색조는 묵시론적으로 바이러스에 물들 도시를 상징하는 것같아 세련돼 보이기까지 한다. 그간 중장년층 입맛에 맞는 드라마만을 생산해 온 jtbc의 진일보한 성과다.

by meditator 2013. 3. 21. 1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