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가족', '국민 아빠', 국민 할아버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종편 드라마임에도 10%를 상회하고, 공중파 드라마를 '제낀' <무자식 상팔자>가 대단원의 막을 내려간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잘 날 없다'는 속담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안호식 하아버지네 아들 삼형제와 그 가족들은 종영을 하루 앞둔 회차에서까지 아롱이 다롱이 저마다의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다. 그래도 보는 시청들은 '사는 게 다 저렇지, 저 정도면 행복한 거야' 하며 푸근한 미소로 그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가 끝나고 리모컨의 꺼짐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마법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섬뜩하다. '아, 우리에겐 저런 가족이 없구나!'
김수현 작가에겐 '대가'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다. 전성기의 작가들조차 일주일에 두 번 방영되는 피 말리는 방송 스케줄에 눌려 등산복을 자주 입었다 벗었다 하는데도 일흔이 넘은 김수현 작가에게 '드라마가 산을 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드라마에 '출연' 하는 밥상의 반찬 하나하나 까지도 섬세하게 '팁'을 제시한다는 무시무시한 '전설'까지 전해질 정도로 김수현 작가의 작품의 완성도는 이른바 '수미일관'의 모범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는 '트렌디'하다. 그저 인기를 끄는 젊은 배우들이 젊은이들의 삶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찌기 70년대부터 시대를 앞서가는 혹은 그 시대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 이혼, 성공, 사랑, 그리고 이제는 동성애, 미혼모 문제까지- 담론들을 드라마를 통해 용기있게 제기하고 해결방향까지 제시하는 시의성을 담보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공중파의 많은 드라마들이 '재벌'과 그의 재산, 그리고 그에 얽힌 인간 관계와 사랑이라는 진부한 주제를 붙잡고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반해, 김수현 작가는 '노익장'이라는 호의적 표현이 무색하게 당대성을 담보해 내는데 있어 그 어떤 젊은 작가보다도 '트렌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는 'OLD'하다. 그것은 김수현 작가 드라마에서 제기된 모든 사회적 문제들이 가족을 통해 해소되는 '가족 화해주의' 혹은 '가족 제일주의'로 회기되기 때문이다. <무자식 상팔자>에서 의지가지 갈 곳조차 없던 알바생 수미는 마치 '민며느리'처럼 안호식 할아버지네 가족의 일원으로 어우러져 들어간다. 심지어 그녀를 잘 본 누나는 그녀에게 방통대를 가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장학금을 하사하신다. 엄마는 도망가고, 외숙모한테 눈칫밥을 얻어먹던 고아나 다름없는 수미는 그녀 특유의 싹싹하고 밝은 성격으로 그녀에 대한 선입관을 눈 녹듯 논게 만들고 가족의 일원으로 당당히 입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뭐 나쁘냐고? 아름다운 가족애 아니냐고?
그런데 상상해 보자. 만약 수미가 싹싹하지도 밝지도 이쁘지도 않았다면? 그녀에게 그런 행운이 데굴데굴 굴러 왔을까? 언뜻 보면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속 사회 문제들은, 가족이란 속에서 용해되고 화해의 길을 걷곤 한다. 하지만 한편에서 보면, '잘난' 수미처럼 결국 '지 할 탓', ' 지 복 탓'이 되고 마는 것이다.
미혼모가 된 소영을 받아들이고 울타리가 되주는 가족이 없다면, 아니 애초에 소영이 대법원 판사까지 지낸 고학력의 미혼모가 아니라면? 대기업 이사까지 지낸 희명의 노년은 씁쓸하지만, 그가 아내에게 1억을 타내기 위해 넥타이까지 들먹이며 하는 자살 소동은 해프닝에 불과할 뿐이다. 퇴직금 남은 걸로 사업하다 들어먹고 진짜 한강 대교를 걷는 그 절박함은 안호식씨네 가족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에서는 무슨 문제가 생겨도 비밀이 없이 모두가 알 듯, 결국 '가족'들이 나서서 걱정해 주고 해결까지 해주니까. 그리곤 말한다. '뭐니뭐니 해도 가족이 최고야!'라고 . 그런데 어쩐다. 텔레비젼을 꺼진 우리 사회에는 그런 가족이 없다. 2년이 넘도록 '왕따'를 당해도 의논할 수 있는 가족이 없고, 혼자 아이를 낳아도 거둬줄 가족은 더더욱 없다. 1인 가구수는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한 집에 살아도 가족들은 하루에 한 마디를 하기도 힘든데, 여전히 텔레비젼 드라마는 '가족'이 최고란다. 모든 문제는 '가족'이라면 풀 수 있단다.
얼마 전 우리 지식 사회에 '피로 사회' 신드롬이 불었었다. '피로사회'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책 제목으로,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는 한 개인, 한 개인을 원자화시키고, 그 각자의 성과로만 한 인간을 판단함으로써, 사회적 피로가 누적되다 못해, 우울증과 공황 장애등이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얇은 팜플렛에 가까운 이 책자가 신드롬이 될 정도라는 건, 그만큼 그 내용이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젠 연예인들이 '공황 장애'를 앓고 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더는 수치나 낙인이 아닌, 공감의 대상의 대상이 될 정도로.
그래서일까? 최근 인기를 끌었던, 혹은 인기리에 방영되는, 영국 드라마 <셜록> 그리고, 그것을 미국판으로 옮긴 <엘리멘트리>를 보면, 주인공이 사회적 부적응자(소시오패스)이거나, 그로 인한 병리적 현상(약물 중독자)을 겪는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그를 옆에서 돕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동거인'이거나, '약물 중독 치유사'이다. 그건 비단 드라마 뿐만이 안다. 베스트 셀러 [빅픽쳐] 저자의 또 다른 책 [위험한 관계]를 보면 위험에 빠진 미혼모를 도와주는 것은, 사회적 시스템에 따른 아동 보호사요, 변호사지, 가족이 아니었다. 이렇게 저쪽의 드라마 혹은 문화에서는 개인에게 문제가 생기면 사회적 제도를 통해, 혹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는데, 우리 나라 문화,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사회적으로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가족'을 붙잡고 늘어진다. 한때는 '엄마를 부탁'하더니, 이젠 그것도 모자라, '아빠'가 최고에, '가족'만이 최선이란다. 이혼율을 들먹일 것도 없이 우리 주변의 가족들은 급격하게 해체되어 가는데, 여전히 우리는, 우리 사회는 무슨 문제만 생기면 '가족'을 붙잡고 늘어진다.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문닫고 컴퓨터 하느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혹는 저마다 바뻐서 늦은 저녁까지 누구하나 돌아오지 않은 거실에 엄마 혼자 앉아서 '무자식 상팔자'를 보며 행복해 하는 풍경. 굳이 매주 연재되는 한겨레의 쓸쓸한 '가족' 시리즈를 들먹일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가족은 더 이상 사회의 방탄조끼가 아니다.
'가족' 나쁘지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가족이 우리 사회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원천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젠 사회적 시스템이 갖춰져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가야 하는데, 여전히 우리 텔레비젼은 '가족'을 붙잡고 오매불망이다. 문제는 존재치 않는 이상적 가족이 아니다. 그런 과거 회귀적 문제 해결 양식에 매료되는 사람들의 취향이, 투표 같은 사회적 행위에서의 '퇴행성'으로 이어지고, 사회적 발전의 퇴행까지 낳게 되니,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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