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정도 과장님(김기천 분)은 가끔씩 가다서다 하는 취업 기념으로 회사에서 받은 그의 시계와 같습니다. 아니죠, 오히려 고정도 과장님이란 시계는 과장님의 말씀처럼 고장난 지가 한참된 것이 맞습니다. 디지털 세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회사에서 왕년의 재래 시장을 종회무진하던 영업왕이던 고과장님이 할 일은 없습니다. 신문을 보거나, 잡담을 늘어놓거나, 코를 골며 낮잠을 자거나, 어찌보면 고과장님에게 닥친 정리해고는 효율성면으로만 보자면 오히려 늦게 찾아온 불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직장의 신>은 그런 고장난 시계 고정도 과장님의 시계를 다시 돌려놓았습니다. 눈물, 콧물 찍어내며 고정도 과장님의 사연에 홀려 보는 것도 잠시, 21세기의 여러분, 진정 당신은 고정도 과장님의 시계를 돌려놓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황갑득 부장(김응수 분)이 마케팅 영업 지원부 직원들을 불러놓고 고과장님의 평가를 물었을 때 미스 김은 '짐짝'같은 분이라고 냉혹하게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컴퓨터와 외국어 능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고과장님은 영어 근무 평가서 답안을 구걸해야 할 정도로 무능력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때는 지하철노선도는 몰라도 재래시장 골목길을 훤히 아는 하루에 몇 건의 거래를 성사시켰던 영업왕이었었죠. 4월 30일, <직장의 신>은 정리 해고 위기에 봉착한 고과장님이 과거 그의 영업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그 위기를 넘기며, 막내 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직장에 머무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에피소드가 방영되었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였지만, 고과장님의 복귀는 그저 드라마 속 이야기로 끝내버리기엔, 눈물을 흘리고 말 감동으로 끝내버리기엔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이제는 쓸모없어져버린 수기와 스크랩에 의존한 과거의 능력이 정말 쓸모가 있을까요? 그리고 <직장의 신>의 후배 직원들처럼 선배의 28년을 소중하게 감싸안을 만큼 우리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있을까요? 추억은 아름답지만, 그 추억을 흘려버리지 않고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것으로 품을 만큼 넉넉한 세상인가요?
재래시장의 골목 골목을 훤히 꿰는 고과장님의 생존은 마치 엄청난 자본을 앞세운 대기업의 무차별적 공격 앞에서 바람 앞의 촛불같은 재래시장의 생존 전쟁을 보는 듯합니다. 도시화의 명목 아래 아파트 건축으로 사라져가는 골목골목이 꼬부라진 오래된 동네를 보는 듯도 하구요. 어쩌면 지금의 흐름, 혹은 앞으로의 발전에는 역행하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더 갚어치있는 그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갈 수 있냐고 드라마는 질문을 하는 듯합니다.
<직장의 신>은 묘한 드라마입니다. 도식적으로 비정규직의 고통을 들이대는 것만 같았는데, 회를 거듭할 수록 '인간'의 이름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자꾸 자꾸 질문을 던집니다. 능률과 발전이름으로 누군가를 거세시키지 않고,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 조금씩 물러나 손을 잡고 갈 수 있겠냐고 야곰야곰 또 다른 질문을 던져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보면 다함께 갈 수도 있지 않냐고 살그머니 해답도 던져보기도 합니다. <직장의 신>이 제시하는 해법에 동의하십니까?
하지만 답은 간단치 않습니다. 미스 김을 찾아온 무정한 대리에게 한 미스 김의 질문처럼 고과장님이 비정규직의 네 배에 달하는 임금을 받으며 한량처럼 시간을 다시 보내는 동안, 고과장님은 좋은 분이라고 말한 정규리 씨는 몇 번의 해고 위기를 맞을테니까요. 그래도 고과장님은 선배라고, 장기 근속이라고 박수를 받으며 두둑한 퇴직금을 챙길 때, 수많은 미스 김들은 하루 아침에 그저 '통보'만으로 일자리를 잃을 테니까요. 고과장님의 행복을 기뻐하기 위해서는, 미스 김들의 행복도 함께 도모되어야만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요?
기업의 정년이 60세로 연장되는 법이 조만간 통과된다고 합니다. 그 법의 통과를 다같이 기뻐하며 박수를 치기 위해서는 거리로 내몰려 노숙자까지 되어가는 2,30대의 비정규직 젊은이들의 여건에도 햇빛이 들어와야 하는 겁니다.
고과장님도, 미스 김도, 정주리 씨도 모두 행복해 질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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