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월화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종영했다. 송아(박은빈 분)와 준영(김민재 분)는 손을 맞잡고 활짝 웃었다. 로맨스 멜로 드라마의 정석에 따른 엔딩이라 할 수 있겠지만 16부를 그들과 함께 웃고 울었던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반가운 엔딩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맞잡고 웃는 그들에게 상이라도 내리고 싶다. 왜냐하면 지난 16부동안 이 두 젊은이는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자신의 삶에 던져진 문제에 대해 답을 얻으려 애써왔으니까. 그저 사랑만이 아니다. 스물 아홉, 자신들에게 던져진 삶이 준 화두에 대해 진지하게 천착한 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사랑 이야기 이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암송되는 프로스트의 시처럼 '두 갈래' 길에 대한 '화답'을 한다. 

 

 

송아가 포기한 길 
마지막 회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자신의 근황을 전한다. 송아는 대학원에 합격했노라고. 준영이 축하한다고 하자, 송아는 하지만 대학원에 가지 않을 거라고 답한다. 송아에게는 오래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바이올린에 대한 '화두'가 던져졌다. 대학에 들어가 취미로 만난 바이올린이 너무나 좋아 4수를 하면서까지 선택했던 바이올린,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바이올린은 늘 송아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리고 이제 송아는 전문 연주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16부는 음악도로서 송아가 고민했던 시간이다. 좋아하지만 늘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해왔던 동기들에게 미치지 못한 자신의 실력에 고민해 왔던 송아, 여전히 좋아하는 것과 자신이 해나가야 할 길에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답답할 정도로 주저했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 사이 송아에게는 계속 다른 기회가 왔다. 연주자의 처지를 헤아려 기꺼이 자신의 구두를 벗어주는 송아의 자세가 송아에게 기회가 되었다. 이제 송아는 송아에게 온 다른 기회를, 다른 길을 가려고 한다. 드라마의 16부 내내 이수경 교수의 체임버 오케스트라 실무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고민해 왔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송아의 발걸음은 무겁지만 가볍다. 가보았기에 돌아설 수 있는 것이다. 16를 통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건, 결국 '포기'가 아니다. 때로는 가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준영이 포기한 길 
그런가 하면 준영은 차이콥스키 콩쿨을 포기하겠다고 전한다. 준영의 삶은 늘 방점이 자신의 바깥에 찍혀 있었다. 친구인 정경(박지현 분)이 부러워하다 못해 시샘할 만큼의 쇼팽 콩쿨에서 2등을 할 만큼의 재능이 있었지만 그 재능은 사고치는 아버지의 뒤치닥거리로 허덕였다. 그리고 허덕거리는 자신을 도와주는 경후 재단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렸다. 스스로 '달란트'가 아니라 '저주'라고도 생각할 만큼.

재능을 가졌지만 그 재능의 '주체'로서 살아오지 못했던 준영은 송아와 '사랑의 열병'을 앓고나서 '피아노'를 포기할 마음마저 가진다. 자신의 밖에 찍혔던 '삶의 방점'을 거두어 자신에게로 오는 '통과 의례'이다. 그렇게 피아노마저 포기하려 했던 준영이 송아의 졸업 연주회에 반주자로 자처한다. 송아와 눈을 맞추며 연주를 '완성'한 후 준영은 행복하라는 송아의 말에 '사랑해요'라고 고백한다. 늘 송아와의 관계에서도 '미안해요'라는 말만 되풀이 하던 준영이 행복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주체로 나서기 위해 선택한 첫 번째 말이다. 

그리고 이제 차이콥스키 콩굴을 포기했다. 그에게 콩쿨은 위기에 선 연주자 박준영이 선택했던 배수진같은 것이었다. 다시 줄을 세운 그 자리에서 우뚝 서서 자신이 당면한 경제적 위기를, 명망성의 위기를 돌파해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늘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콩쿨 심사위원을 위한 연주를 해야 하는 건 여태 그가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를 위해 피아노를 쳐왔던 방식의 답습일 뿐이었다. 행복하기 위해서 송아에게 다시 사랑해요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 준영은, 그렇게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슈만을 치고, 브람스를 치고, 준영의 결을 살린 '피아노'를 완성해 간다. 자기 삶에 방점이 찍히는 순간이다. 

 

 


준영과 송아가 선택한 길
14회 준영을 찾아간 송아는 준영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더는 준영 씨를 사랑하는 게 행복하지 않다고. 

'행복'이라는 이 피상적인 단어는 오늘날 현대인들을 가장 갈등에 빠뜨리는 단어이다. 실제 한 사람이 일생에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아마 '데이터'로 따지면 '쥐꼬리'만큼도 안될 것이다. 그래서 삶에서 '행복'을 지우라고도 말한다. 행복을 향하는 것자체가 무의미하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행복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일상은 고통스럽고 무의미하더라도 그그 시간을 의미있도록 만드는 것이 '행복'을 향한 방향성이 아닐까 싶다. 마치 꽃들이 해를 향해 방향을 트는 것처럼. 

송아가 행복하지 않기에 준영에게 이별을 통보한 것은 16부작 드라마 절정에 등장한 편의적인 갈등만이 아니다. 준영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고통받음에 대해 송아는 돌아볼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런 송아에게 준영이 화답한다. 행복하기 위해 사랑한다고. 16부의 엔딩은 그래서 상처받고 상처받고 또 상처받아도, 사랑으로 인해 받은 행복이 더 크기에 사랑한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드라마는 행복은 상처받지 않음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상처받음에도 기꺼이 그걸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 말한다. 사랑만이 아니다. 준영과 송아는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각자 포기하는 상처의 시간을 가졌다. 송아는 오랫동안 좋아했던 바이올린을 포기했고, 준영은 피아니스트로서 명예를 업그레이드시켜줄 콩쿨을 포기했다. 행복은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두 갈래 길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말하고 있다.

마치 그건 극중 등장한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와도 같다. 브람스 소나타의 부제는 '자유롭고 고독하게'라고 알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송아는 나레이션으로 덧붙인다. 실은 브람스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연주하라고 표기했다고. 같은 곡인데, 고독하게와 행복하게의 간극, 그건 '선택'이다, 결국. 아니면 고독이라고 보여지지만 실은 행복일 수도 있는 삶의 양면성에 대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아 사랑을 포기할 수도, 명망을 위해 콩쿨을 고집할 수도, 좋아했던 것이니 계속 부등켜 안고 갈 수도. 그 모든 주어진 선택지에서 송아와 준영은 보다 자신들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길을 택했다. 그 길이 앞으로 상처를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처받아도 기꺼이 그 상처를 감수하는 것이 자신들이 행복할 거라 생각하며. 상처라 생각하면 상처지만 행복이라 명명하면 행복이 되는 것들이라 드라마는 상처에 주춤거리는 청춘들에게 전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는 잔잔하고 느리게 흘러갔지만 그 어떤 청춘 드라마보다 '청춘의 고민'에 진진하고 열정적으로 천착했다. 젊음의 시간, 아니 젊음의 시간 만이 아니라 살아가며 늘 다가오는 '행복'에 대해, 그리고 그 삶의 행복을 추구하려 다가갈 때 다가오는 아픔들에 대해, 그리고 그런 삶의 고민들에 대해 두 주인공, 아니 두 주인공만이 아니라 극중 모든 인물들은 최선을 다해 고뇌하고, 성장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다 행복할 수 있는 길에 선다. 

by meditator 2020. 10. 21. 17:48

다바다바다'하고 시작되는 Un Homme et Une Femme, 1966년 개봉된 영화 <남과 여>의 메인 테마곡이 54년만에 다시 스크린 위에 울린다. 흑백의 화면이 펼쳐지고 젊은 아누크 에메와 장 루이스 트레티냥이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한가로운 파리의 거리를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누비고, 호젓한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메임 테마곡만으로도 연상되는 영화의 장면들, 하지만 그건 요양원의 노인 장-루이의 기억 속 한 장면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노인이 된 장-루이는 그가 알았던 모든 것을 잊어간다. 한때는 스포츠카를 몰았던 레이서지만 이젠 휠체어에 의지하여 하루 종일 요양원 마당에서 햇빛을 받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기다린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안느',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다. 

아들인 자신마저도 기억을 못하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앙트완(앙트완 사이어 분)은 아버지가 유일한 기억 안느를 수소문하여 찾아간다. 1966년 <남과 여>는 죽은 전남편을 잊지 못했던 안느가 떠나고 그녀를 잊지 못했던 장-루이가 그 유명한 기차역 360도 포옹을 하며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2020년 다시 돌아온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은 1966년 <남과 여>의 영화 밖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다시 찾은 옛사랑 
앙트완을 만난 안느,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앙트완의 부탁에 안느는 우리가 그리 좋게 헤어진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 어떻게 하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며 고민을 하다 기차역으로 달려간 로맨틱했던 영화와 달리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결국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안느를 못견딘 장-루이가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고 다니면서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안느의 입장에서는 장-루이에 대한 기억이 좋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 거리를 휘날리며 달리던 팔팔하던 레이서 장-루이가 죽음을 앞두고 기억마저 잃어간다는 처지에 안느는 연민을 느낀다. 다른 여자를 만나 자신과 헤어지게 되었는데 죽음을 앞둔 순간에 자신만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안느의 발걸음을 장-루이가 있는 요양원으로 향하게 만든다.

설레임을 가지고 장-루이 앞에 앉은 안느, 그런데 장-루이는 안느를 알아보지 못한다. 누구냐고 안느에게 물어본 장-루이는 그녀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안느에게 자신이 과거 사랑했던 '안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루이로부터 자신을 사랑했던 이야기를 듣는 '아이러니한 상황', 2020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의 '미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부터 발휘된다. 

자신만을 기억한다는 옛사랑, 하지만 정작 찾아가보니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옛사랑 앞에서 이제 자신조차도 나이가 들어 걸음걸이가 편안치 않은 안느는 돌아서지 않는다. 대신 장-루이의 맞은 편에 앉아 그의 늦은 사랑 고백을 듣는다.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를 찾았던 그가, 그랬던 이유가 여전히 자신이 벗어나지 못했던 전 남편이었음을, 그럼에도 이제 아들조차도 기억을 못하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장-루이의 '고해성사'를 안느는 편안한 미소를 띠고 들어준다. 

 

   

 

여전히 찬란한 
54년만에 다시 돌아온 <남과여>의 부제는 '여전히 찬란한'이다. 왜 여전히 찬란할까? 거기엔 '여전히 찬란한' 노년이 있기 때문이다. 

장-루이는 기억을 잃어간다. 사라져가는 뇌세포만큼 그에게 남은 날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 그가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건 '추억'이다. 1966년작 영화의 장면 장면이 그의 기억으로 되살아 난다. 자신을 찾아온 '안느'에게 요양원 탈출을 제안하는 장-루이, 잠시 후 그와 그녀는 그 예전처럼 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고, 바다를 향한다. 자신들을 가로막는 경찰에게 총을 쏘아가며, 혹은 총으로 위협하며, 그리고 깨어나면 여전히 요양원 마당이다. 

요양원 마당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장-루이의 웃픈 상황, 하지만 그런 장-루이에게 '안느'만큼이나 연민의 시선이 간다. 인생의 종착역, 과연 그 시간은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육신의 고통과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살아가는 나날들의 무기력으로 힘들어 한다. 하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시간이지만 장-루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으로 충만하다. 심지어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 앞에 앉아있지만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가장 뜨거웠던 순간의 기억으로 충만한 노인, 장-루이, 어쩌면 기억을 잃어가고 스스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찾기'가 아닐까. 그 무엇도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추억'은 그 마저도 잃어버리는 순간까지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니까. 안도현의 시 한 구절, '당신은 누구에게 얼마나 뜨거운 사람이었는가'가 떠올려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그라드는 그 순간에서도 여전히 '사랑'으로 충만한 그를 지켜봐주는 옛 연인 '안느'가 있다. 눈 앞의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으로 알아봐주지 못함에도 여전히 그를 찾아가, 매번 '사랑하는 여인과 참 닮았다'라는 말에 미소로 응답하며 그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들어주는 '안느'에게선 비로소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품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너그러운 안느의 아량은 이제 안느에게 씁쓸했던 지난 날의 기억을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으로 다시 채색할 것이다. 

한때 바닷가를 함께 누비던 장-루이와 안느, 하지만 이제 그 바닷가에는 그들을 만나게 해주었던 사립학교를 다니던 자녀 앙트완과 프랑스와즈가 서있다. 어렸던 앙트완과 프랑스와즈가 중년의 사랑을 나누게 될 만큼의 시간, 그 시간이 흘러 장-루이와 안느는 조우한다. 안느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뒤늦은 시간,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예전의 사랑으로 '연결'되고 오랫동안 풀렸던 인연의 끈을 다시 묶는다. 

사랑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까? 이런 '우문'에 과학은 3년이라던가 하는 '정답'을 내어놓는다. 하지만 그런 '과학'의 증거마저도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에서는 무기력하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죽어가는 순간에조차 가장 '충만한 기억'인 사랑에 대해 과학으로서는 더할 답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그 '충만한 기억'을 가진  것만으로도 인생은 참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닌가, 오후의 볕 아래에 앉아 '옛 사랑'의 추억을 나누는 두 '노인'들을 보며 다시 한번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by meditator 2020. 10. 21. 02:14

또 한 편의 시네마틱 드라마가 찾아왔다. 바로 10월 17일 첫 선을 보인 10부작 OCN드라마 <써치>이다. 

<트랩>, <타인은 지옥이다>, <번외 수사>에 이은  영화와 드라마의 콜라보, 4번째 시네마틱 드라마답게 영화 <무수단>의 제작 극본을 맡은 구모 작가와 <스승의 은혜>, <시간 위의 집>의 임대웅 감독이 밀리터리 스릴러로 만났다. 

 

 

비무장지대(DMZ)에서 나타난 괴생명체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구모 작가의 전작 무수단처럼 <써치> 역시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괴이한' 사건으로 시작된다. 흘러들어간 공을 찾으러 들어갔다 실종된 오진택 상병과 동료 병사, 이들의 수색 작전으로 드라마는 시작된다. 군견병으로 차출된 옹동진 병장(장동윤 분)과 화생방 방위 사령부 특임대 손예림 중위(정수정 분) 등이 수색작전에 투입된다. 사람의 짓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 오진택 상병, 그 손에서는 '공수병'으로 의심되는 수포가 동시에 발견된다. 또한 수색 과정에서 들개떼의 습격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옹동진 병장의 둘도 없는 전우인 군견병이 의문의 생명체로 인해 죽임을 당한다. 

비무장 지대 사망 사건이 소환한 '23년전 총격' 
드라마는 이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사망 사건을 두 개의 가지로 뻗어나간다. 그 중 하나는 바로 같은 장소에서 23년 전에 발생한 북한군 총격 사건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북한'이다. 강가에서 아이를 안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성 장교, 그녀를 향해 가는 듯한 차 한대, 그런데 차 안에 탄 북한군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이상'하다. 그의 얼굴은 수포 등으로 급격하게 병증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좀비'와 같이 자신에 대한 통제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결국 차는 나무에 부딪치고, 괴력으로 차문을 부순 의문의 북한군 장교는 '핵물질'로 추정되는 박스를 든 채 사라진다. 그리고 수포에 뒤덮힌 채 사라진 북한군 장교가 바로 미스터리의 시작이다. 

그로 부터 얼마 후 작전에 투입된 남한의 수색조는 강가에서 바로 그 아이를 안은 여성 장교를 발견한다. '귀순'을 하겠다는 여성 장교를 보호 하에 데리고 가려는 순간, 등장한 북한군들, 그들은 그녀에게 사라진 북한 장교의 행방을 묻고, 그녀 또한 데려가려 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남과 북의 대치 상황, 한대식의 우발적인 발포로 결국 남한군과 북한군의 교전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지금, 당시에 발포를 했던 그 남한군 병사는 국군 사령관이 되어있다. 그런 그에게 보고된 당시 사건이 벌어진 21섹터에서 다시 한번 발생한 의문의 사건, 그는 다시 한번 당시의 사건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떤다. 그리고 DMZ의 영웅이라 추앙받는 국회의원 이혁에게 보고를 한다. 

무엇이 한대식 사령관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걸까? 왜 여유를 부리면서도 이혁은 직접 21섹터에서 벌어진 의문의 사건 보고 현장에 등장한 것일까? 그건 아직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혁을 '영웅'으로 만든 23년전 북한국 총격 사건의 진실이 드러난 것과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누군가가 범죄자에서 영웅이 되는 과정에 애꿏은 전우의 희생이 치뤄졌을 지도 모른다는 '비밀'이 이제 다시 한대식과 이혁으로 하여금 21섹터의 사건의 '1주일' 안에 조기 해결을 다그치도록 만든다. 

그래서 만들어지게 된 북극성 특임대, 자신의 군견을 잃은 옹동진 병장과 함께, 그와 불미스럽게 조우했던 의문의 인물이었던 송민규 대위(윤박 분), 이준성 중위 등이 합류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21섹터에서 발생한 사건 조사와, 그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등장한 의문의 인물 수색이지만, 그 드러난 임무 뒤에 한대식 사령관이 송민규 대위에게 은밀하게 지시한 또 다른 '비밀' 임무가 있음이 암시된다. 

 

 

좀비 미스터리 스릴러? 
<써치>는 이렇게 사망 사건으로 부터 소환된 23년전 사건의 진실 규명이 특임대 구성까지 이어지며 밀리터리 스릴러의 갈래를 펼침과 동시에 저항 한번 하지 않은 채 사망한 오상병의 손에서 나타난 수포로 부터 의심된 '공수병'으로 추정되는 의심의 증상으로  좀비 미스터리물의 방향을 더한다. 

앞서 오상병이 동료와 함께 공을 찾으러 들어간 DMZ 21 섹터 부근에서 '사람'의 형상을 하지만,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의문의 생명체의 움직임을 드러내 보인다. 또한 사망한 오상병의 혈액은 급격한 변이를 보이기 시작하고, 그와 동시에 이제 '사망자'로 처리되어 영안실에 안치된 오상병이 되살아난다. 영안실에서 이상한 움직임과 소리를 듣고 문을 연 손예림 중위를 공격한 '살아난 시체'가 된 오상병, 번뜩이는 두 눈과 괴수와 같은 행동으로 손중위를 공격하며 2회를 마무리한다. 

 

 

2회까지의 <써치>는 이미 장르물에서 입지를 다진 임대웅 감독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한다. 여름에 방영되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로, 가을의 선선함이 오싹함으로 이어지는 비무장지대를 배경으로 한 괴생명체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르물로써 한껏 기대를 모은다. 거기에 얽혀진 23년전 음모, 그리고 그 23년전에 '결자해지' 되지 못한 '진실'이 23년이 지난 오늘에서 다시 '해원'으로 나타난다는 설정은 장르물의 깊이를 더한다.  앞서 <트랩>, <타인은 지옥이다>를 통해 시네마틱 드라마의 묘미를 선사했던 바, 과연 그 명성을 <써치>가 다시 한번 이어갈 지 기대가 된다. 

by meditator 2020. 10. 19. 01:52

우주복을 입은 누군가가 어떤 행성의 이곳 저곳을 살피며 다니며 '탐험'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탐험하는 행성의 모양새가 익숙하다. 여기저기 쌓인 부식된 쓰레기 더미, 흡사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쓰레기 적치장과도 같다. 그 쓰레기 적치장과도 같은 '행성'의 잔해에서 찾아낸 것은 '뼈', '닭뼈'이다. 우주복을 입은 그 누군가는 '미래'의 사람이다. 그가 과거의 잔해 더미에서 가장 많이 찾아낸 것은 '닭뼈'이다. 그렇다면 그는 '과거'의 지구를 어떻게 정의내릴까? 혹 우리가 백악기를 '공룡의 시대'라 명명하듯, 닭들의 행성이라 이름붙이지 않을까? 

2020년 방송대상을 수상한 ebs다큐프라임 <인류세> 1부 닭들의 행성은 이렇게 시작된다. 왜 닭들의 행성이 되었을까? 전세계 230억 마리, 인류 한 사람 당 3마리에 해당하는 개체수이다. 개체수로만 보면, 지구는 닭들의 행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가 닭들의 행성이 된 까닭은 '닭'의 적극적 생존 의지가 아니다. 

 

 

닭들의 행성, (feat 인간 )
갈루스 갈루스 도메티쿠스(Gallus gallus domesticus) , 들에서 살던 붉은 들닭은 5000년 전부터 인간의 가축이 된 이후 인류를 따라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강한 다리, 넓은 가슴, 질량으로만 보면 전체 조류를 압도하게 된 닭, 미래의 후손들이 지구를 '탐험'하고 그 압도적인 개체수로 인해 '닭들의 행성'이라는 결론을 내릴 지도 모르는 닭의 번성을 '주도'한 건 '인간'이다. 

인간에 의해 '변형'되어진 닭은 1950년대에 비해 무려 5배나 빨리, 더 크게 성장한다.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5,6주 무렵 도사로딘다. 한 해 도살되는 개체수만 해도 650억 마리이다. 닭들의 행성이라 명명될 수 있을 정도로 번성하지만, 그 '번성'은 닭의 '고난'이다. 심지어 2008년 한 해에만 천 만 마리가 도살되는 일이 벌어지듯, AI, 조류 독감은 인간과 함께 하여 겪게 된 '고난'의 또 다른 면이다. 그렇게 이르게 도살되어 사라진 청소년 닭들은 전세계 쓰레기 장에서 화석이 되어가는 중이다. 

2018년 유엔 생명 다양성 회의에서 등장한 '핑크 프로젝트', 닭을 '핑크'색으로 상징시킨 이 프로젝트에 따르면 먼 훗날 우리 시대의 지질층이 '핑크'색이 될 거라 '예언'한다. 우리나라에서만 하루 250만 마리가 '소비'되는 닭, 인류 문명과 함께 번성하고, 번성한 만큼 사라져가고 있는 닭을 상징하는 핑크색 지질층의 시대, 다큐가 말하고 있는 '인류세'이다. 

지금까지 지구는 다섯 번의 '생물' 멸종을 겪었다. 빙하기로 인한 고생대의 멸종, 이은 데본기의 멸종, 가장 피해가 컸던 페룸기 대멸종, 파충류의 대부분이 멸종했떤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백악기의 공룡 멸종, 그리고 이제 6번 째 멸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학자들은 경고한다. 그 여섯 번 째 멸종은 인류의 번성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지금까지와의 멸종과 달리, 한 종, 지구 역사상 존재했던 가장 강력한 종이 지구 환경 전체를 바꾸는 시대이다. 그래서 최근 1만여년전부터의 '홀로세'와 구분하여 '인류세'라 명명되어야 한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멸종의 시대, 인류세 
'인류세'를 처음 '발의'한 사람은 폴 크리천이다. 대기학자였던 그는 '이산화탄소'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지구의 변화에 주목했다. 인간이 스스로 명명한 시대, '인류세, 인류세의 시작을 학자들은 1950년 원자 폭탄 폭발 이후부터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불과 70년, 지질학적 관점에서 보면 번개가 치듯 짧은 순간이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인류는 그 이전의 지구 멸종기에 맞먹는 '멸종'의 시대를 펼쳐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 이래 지구 생물 중 97%가 인간과 가축이 되었다. 야생의 생물들은 불과 3%에 불과하다. 자이언트 펜더, 침팬지, 아시아 코끼리, 기린, 얼룩말, 안테스 플라밍고, 펠리칸이 대멸종의 '길'에 들어섰다. 멀리갈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강치, 늑대, 표범, 크낙새 등이 이미 멸종했다. 학자들은 금세기 말에 지구에 있는 종의 반이 멸종될 거라 경고한다. 맘모스, 스테누루돈 ,디프로토돈, 일본 늑대 등 대형 척추 동물의 멸종이 인류세의 '시그널'이다. 

동물들은 어떤 식으로 사라져가는 걸까? 말레이시아 팜오일 농장, 25년 정도된 나무들을 자르고 새 묘목을 심는다.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기존의 숲이 사라진다. 그 숲의 자리에 팜유 농장이 들어선다. 그 과정에서 오랑우탄이 서식지를 잃는다. 인간과 생존권을 놓고 갈등하는 악어라고 해서 '멸종'의 파고를 피할 길이 없다. 한약재로 인기가 높은 비단뱀이라고 다를까. 제 아무리 멸종 위기 동물들의 유전자를 '보관'하여 보존하려 해도, '인간'의 '본성'과도 같은 번성을 위한 자연 파괴는 멈춰지지 않는다. 

 

 

인도 델리, 빛의 축제 디왈리 디왈리가 한창이다. 어둠을 밝히며 인류가 시작되었음을 '자축'하기 위해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500만 kg의 불꽃들을 쏘아댄다. 그 다음날, 대기 오염은 AQI(Air Quality Index ) 2000을 넘어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폭죽을 쓰지못하게 하지만 이 디왈리 축제 기간 동안 경기가 활발해지고, 매출이 올라가자 멈출 수 없었다. 

다큐는 이 멈출 수 없는, 아니 멈추려 하지 않는 인도 디왈리 축제가 여섯 번째 멸종을 향해 질주하는 인류세의 인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라 한다. 자책하지만, 멈출 수 없는 강력하고도 큰 영향력을 가진 인류, 그들에 의해 다가올 멸종의 시대, '인류세'는 그저 인류가 번성하고 압도적인 '시대'가 아니다. 다큐는 '인류세'를 통해 '인류'가 자행하는 '멸종'을 엄중하게 경고한다. 6번 째 멸종의 시대, 그렇다면 과연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by meditator 2020. 10. 17. 02:30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마치 사랑학 교과서와도 같다. 매회 전개되는 상황은 '음악'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단계'를 밟아 풀어내고 있다. 혹자는 그래서 14회에 이르도록 도돌이표같은 지지부진한 전래라 답답해 하지만, 세상에 던져진 자신과 자신의 사랑을 겪어본 이들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리얼'하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빠져들어간다. 

'사랑'은 두 사람의 '관계'다. 그게 남녀가 되었든, 남남이 되었든, 여여가 되었든. 그런데 사랑을 하는 주체인 두 사람이 '사회'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 존재인 두 사람이 하는 사랑은 언제나 '주변'의 환경과 조건, 그리고 사람들로 인해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온전히 두 사람에게 '사랑'만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별 선언 
결국 송아(박은빈 분)는 준영(김민재 분)을 찾아가 이별을 알린다. '그만 만나요. 사랑을 생각하느라 내 마음에 상처를 너무 많이 냈어요' 라고. 좋아해서 만났고, 사랑해서 조금 더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했던 마음들이 자꾸만 상처가 됐다. '행복한 쪽으로 결정하면 돼'라고 위로를 건네는 언니의 말을 들은 송아가 내린 결정은 '상처'가 되는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놓아주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사랑하는 송아와 준영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사이가 되었을까? 

두 사람의 관계로만 보면 매번 송아를 만나면 '미안하다'고 말하게 되는 준영이 있다. 송아는 조금 더 '준영'과 함께 하고 싶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준영은 매번 송아를 밀어내는 것같다. 송아를 좌절시키는 '미안하다', 그 '사과'의 단어 안에 숨겨진 뜻은 네가 원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서, 그런 상황에 놓여서, 다시 한번 너로 하여금 상처를 받게 해서 미안하다이다. 준영은 왜 자꾸 원치않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걸까? 

안식년을 가지고 모처럼 고국에 돌아온 준영, 하지만 그 일년의 안식년이 말 그대로 휴식같은 사랑 '송아'를 만나게 만들었지만, 송아를 제외한 모든 것이 준영을 쉴 수 없도록 만든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준영을 ATM으로 만들어 버리는 부모님이다. '차라리 외국에서 계속 연주나 하며 돈이나 보낼 것을'이라고 절규하게 만들도록 끊임없이 사업을 빙자하여 '돈사고'를 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상황에 무력한 어머니가 준영이 짊어진 짐이다. 

드라마를 본 누군가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보고나서 남은 것 중 하나가 우리나라에서 음악을 하는데 많은 돈이 든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처럼 가진 것없이 '피아노 잘 치는' 재능만으로 오늘의 지위에 이르른 준영은 그래서 이제 자신의 '피아노 치는 재능'을 더 이상 '하늘이 내려준 소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무엇이 이들을 사랑만 할 수 없게 만드는가 
그런데 '피아노를 잘 치는 능력'만으로도 음악을 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부모님이라는 '짐'을 떠안은 준영, 결국 그는 오랫동안 '경후'재단의 도움을 받아왔을 수 밖에 없었다.  나문숙 이사장(예수정 분)은 준영이 자신이 좋아하는 피아노를 잘 치게 해주고 싶다는 도움은 이제와 준영에게 마음이 접지 못하는 이사장의 손녀 정경(박지형 분)에게 준영의 사랑을 차지하려는 '무기'가 된다. 도움을 요청한 준영의 아버지에게 돈을 건네고, 경후의 도움을 받았던 시간의 빛에서 자유롭지 못한 준영에게 자신의 피아노 반주를 요청하는 식이다. 준영이 원하는 것을 주고 싶었다던 나문숙 이사장조차 정경이 준영을 원하자 준영에게 정경의 배필이 되어줄 것을 요청한다. 

준영이 매번 이제는 아니라고 하지만, 점점 '집착'이 되어가는 정경의 사랑은 매번 준영의 발목을 잡는다. 이제 유투브까지 올려진 '트로이메라이' 처럼. 

그 시작은 차이콥스키 콩쿨에 나가는 준영을 다시 '사사'하기 시작한 유태진 교수(주석태 분)의 욕심이다. 자신의 앨범을 발매했지만 그 반응이 신통치 않다 못해 혹평 투성이이자, 자신의 연구실에 새로 들여온 연주를 기억하는 피아노에 '녹음'되었던 준영의 '트로이메라이'를 자신의 연주인 양 보낸다. '살리에르'처럼 준영에 대한 애증으로 술잔을 기울이던 그가 결국 저질러버린 '범죄'적 행동, 하지만 준영은 가급적 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려 한다. 

그 이유는 '송아', 트로이메라이가 지난 15년 동안 자신이 정격에게 들려주었던 음악임을 아는 송아에게 그걸 다시 쳤다는 사실 자체가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에서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더 이상 '미안한 일'을 만들고싶지 않다는 '사랑'에 빠진 준영의 마음, 하지만 그 준영의 진심을 세상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자신의 '피아노' 한 대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연습을 해야 하는 가난한 음악가, 그런 음악가의 상황을 이용하는 재단과 교수라는 '기득권'. 정경의 마음은 그 자체로는 '사랑'이지만, 정경이 '자신이 가진 부'를 사랑에 이용하는 순간, 그 역시 또 다른 '기득권'일 뿐이다. 

'기득권의 횡포'로 치자면 송아가 당하고 있는 것 역시 만만치 않다. 송아가 힘든 건 준영과의 관계에서 준영의 석연치않은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 역시 '사랑'에만 집중할 수 없는 인생의 기로에 놓였기 때문이다. 

준영의 새 매니저 박과장이 얄밉게 정의내렸던 '너무 늦은 출발', 4년을 재수를 해서야 들어간 음대에서 송아는 4학년을 마치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세상의 인정에 목마르다. 그런 송아에게 냉큼 이수경 교수(백지원 분)가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알아봐주었다는 기쁨도 잠시, 이수경 교수가 송아에게 대학원을 권한 이유가 송아가 대학원을 갈 만해서가 아니라, 경영학과를 다녔던 그녀의 똑뿌러지는 일처리가 자신에게, 자신이 이제 막 만든 오케스트라에 '실무'로서 필요해서였다는 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결국 교수라는 직위로 '송아'의 재능을 볼모로 삼아, 송아를 이용하는 이교수로 인해 송아는 잠시 유보되었던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의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다시 꺼내들게 된다. 

드라마는 두 젊은이 준영과 송아,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통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든 '화두', 그를 둘러싼 '세상'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두 사람은 사랑을,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꿈을 고민하지만, 결국 그 '사랑'도, 꿈마저도 '세상', 특히 '기득권'처럼 틀이 짜여진 세상 속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드라마는 '음악'을 매개로 풀어내고 있다. 풀어내는 이야기를 러브스토리이지만 웬만한 청춘 리얼리티못지 않다. 

이제 송아는 그런 자신에게 자꾸만 '상처'를 주는 세상을, 준영과의 사랑 때문이라 생각하며 '사랑'을 놓겠다 선언했다. 그런데 '상처'를 주는 건 사랑일까? 자신의 재능조차 ATM이 되는 세상에서 늘 주춤거리던 준영이, 그 준영이 유일하게 욕심냈던  '사랑', 과연 '세상'에 상처를 받는 '사랑'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by meditator 2020. 10. 14. 05:55

넷플릭스 영화 <에놀라 홈즈>는 낸시 스프링어의 청소년 소설 <사라진 후작>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낸시 스프링어는 스테디 셀러인 <셜록 홈즈>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이라는 질문으로 소설을 연다. 여전히 다른 버전으로 각색되어 21세기에도 회자되는 명탐정 셜록 홈즈, 그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그녀도 셜록처럼 '탐정'의 능력을 지녔을까?

셜록 홈즈의 21세기 버전 <셜록>에서 이미 여동생으로 유로스가 등장한 바 있다. 셜록만큼의 '지적 능력'을 가졌으면서, 또한 셜록보다 더 '사이코패스'적인 유로스의 등장은 그 자체로 극적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렇다면 원작인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한 셜록의 동생은 어떤 모습일까? 

 

 

셜록의 동생, 홀로 엄마를 찾아 떠나다 
에놀라(밀리 바비 브라운 분)는  '학자며, 화학자이자,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사격의 명수, 검술사, 권투선수, 명석한 연역적 사상가'로 자신의 오빠 셜록(헨리 카빌 분)을 소개한다. 그런 오빠의 동생 에놀라는 어떨까?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고, 산수도 잘 하'며, '새 둥지도 찾을 수 있고, 지렁이도 파낼 수 있고, 고기도 잡을 수 있고, 자전거도 탈 수'있다고 영화의 초반 자신을 소개한다. 

그런데 이런 에놀라의 정체성은 에놀라가 살던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의 정체성에 '위배'된다. 여왕 빅토리아가 지배하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하지만 '신사'라는 남성들이 사회적 주도권을 가지고 발빠르게 세상을 '점령'하던 시절에, 여성들은 영화 속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두 오빠가 에놀라를 보고 질색을 하듯,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후견인을 자처한 큰 오빠가 에놀라를 '기숙학교'에 보내 강제적인 교육을 시키려고 하듯 '남편의 정숙한 아내'로서 존재가 여성의 '전부'라 인식되던 시절이다. 

대나무 광주리같은 걸로 엉덩이를 부풀이고 물고기 뼈로 만든 갑옷같은 보정물로 허리를 잔뜩 조인 옷을 입고, 정숙하게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배우고 바느질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 시절의 여성들에게 요구되던 것들, 그걸 에놀라는 하나도 배우지 않은 대신, 읽고 쓰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누구에게서? 바로 에놀라의 엄마 유도리아에게서이다. 

엄마는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에놀라에게 낱말 맞추기를,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호신술을 가르쳤다. 일찌기 집을 떠난 두 오빠들, 엄마와 홀로 남은 에놀라는 엄마 유도리아를 통해 당시의 여성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적 보호자이자, 유일한 스승이었던 어머니가 에놀라가 16살 되던 생일에 사라졌다. 돌아온 오빠들은 엄마를 찾는 한편, 그들이 보기에 천방지축인 에놀라를 '기숙학교'로 보내려 한다. 하지만 에놀라는 오빠들의 그런 결정과 달리 '스스로'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다. 에놀라의 이름 에놀라를 거꾸로 하면 'alone', '홀로' 남겨진 소녀 에놀라는 '홀로' 엄마를 찾는 여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 

 

 

사라진 엄마, 사라진 후작
영화는 원작의 제목처럼 <사라진 후작>, 에놀라가 기차에서 만난 소년 튜크스베리 자작이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후작의 지위까지 이어받은 '소년'의 실종 사건과 에놀라의 엄마 찾기가 엇물리며 셜록 홈즈의 원작보다 더 '시대적 배경'이 생생한 한 편의 추리극으로 탄생되었다. 

영화의 배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극중에서도 등장하는 참정권 운동이다. 영화에서 에놀라가 읽었다던 울스턴크래프트의 책, 1792년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의 책 <여성의 권리 옹호>를 통해 여성의 인권과 운동을 주장했고, 이 책이 여성 참정권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날 너무도 당연한 남녀를 막론한 '한 표의 행사', 하지만 참정권 운동의 역사는 그 자체 '여성 해방 운동'의 지난한 투쟁의 역사가 된다. 1865년 런던에서 여성 참정권 위원회가 결성되었지만 1967년 제출된 선거법 수정안은 부결되었다. 하지만 이 부결은 외려 전국 각지에서 참정권 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왜 같은 '인간'임에도 여성들의 권리는 외면당했을까? 대부분 가정에 머물렀던 여성들은 '납세'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여겨졌으며, 심지어 남편에게 아내의 재산을 통제할 권리마저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기에 번번히 여성들의 주장은 의회에서 거부되었다. 자신들의 권리가 거부되자 여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개진하려 했다. 영화 속 에놀라가 찾아간 창고 속에서 등장한 '다이너마이트' 등이 그런 여성들의 '간절하고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단편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나 뿐인 딸 에놀라에게 당대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모습 대신 당당하고 주체적인 교육을 시켰던 어머니 유도리아, 그런 어머니가 에놀라마저 들어오지 못하게 한 채 늦은 밤 회합을 가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 에놀라를 홀로 놔둔 채 집을 떠났다. 후에 만난 어머니는 외려 그게 사랑하는 딸을 지키려는 어머니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토로한다. 

딸을 홀로 놔둔 채 실종이라는 극단적 설정, 하지만 이를 여성 참정권 운동이 격화되어가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사랑하는 딸을 놔둔 채 집을 떠나야 했던 어머니의 '결단'으로,  어머니가 '사회적 운동'의 일원이 되어  운명적인 선택을 했음을 드러내며 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펼쳐진다.

그리고 이런 엄마의 선택은 영화 속에서 에놀라가 '정의감'으로 개입한 후작의 실종 사건이 그 실체가 드러나며 서로 다른 길로 달렸던 열차의 궤도가 하나로 만나듯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진다. 의회에서 통과되어야 할 '참정권 법안',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작이 되어 상원에서 한 표를 행사하게 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역시나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튜크스베리가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보수적'인 입장의 그 누군가, 그리고 '참정권'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야했던 엄마의 실종 사건이 '에놀라'라는 이제 막 세상에 자신을 던진 '소녀 탐정'을 통해 '하나의 사건'으로 '해결'되게 된 것이다. 

처음 기차에서 해프닝처럼 조우한 에놀라와 튜크스베리, 기존 남녀의 역할을 전복적으로 '해석'한  해결사 여주인공, 연약한 남성 캐릭터의 로맨틱 코미디버전인가 싶었던 영화는, 여전히 에놀라의 전복적 캐릭터의 강점을 발산시키면서도 남주인공의 '반전' 매력을 통해 사건 해결의 열쇠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여주인공이 '연애 감정'이 아니라, '정의감'으로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상황은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의 흐름에 걸맞고, 어딘선가 셜록이 튀어나올 것같은 국면에서조차, 아니 심지어 셜록보다 한 발 빠르게 '홀로' 사건을 파헤치고, 해결해 나가는 상황은 그 자체로 새로운 여성 히어로의 탄생을 알린다. 

 

 

결국 에놀라는 그 도전적인 탐정 데뷔전을 통해 튜크스베리 후작 실종 사건을 해결함은 물론, 사라질 뻔한 튜크스베리가 당당하게 의회에 입성하여 한 표를 행사하게 함으로써  엄마로 하여금 사랑하는 딸마저 두고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참정권 운동의 '물꼬'를 틔어준다. 자전거도 잘 탈 수 있다 말하던 시골 소녀 에놀라는 사라진 후작 사건을 통해 이제 당당하게 '런던'에서 탐정으로 자신의 삶을 연다. 처음 드러났을 때 무관해 보이던 두 명의 실종이 결국 '참정권 운동'이라는 물결 속에서 선택한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였음을 보이며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가던 '진보적인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2018년작 다큐 <우먼 인 할리우드>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여배우를 비롯한 주요 여성 96명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 다큐는 '원더 우먼'이 등장하고, tv 수사 시리즈에서 여성 법의관이 등장하며, 그걸 보고 자란 여성들의 선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에놀라가 탐정 에놀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딸을 홀로 남겨두고 여성 참정권 운동을 위해 집을 떠날 수 있었던, 아니 딸을 홀로 남겨두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탐정으로 자신의 몫을 해낼 수 있도록 주체적인 여성으로 키워낸 '유도리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엄마가 있었기에, 주체적으로 성장한 딸이 '참정권' 운동의 물꼬를 틔어주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영어덜트물로서 '에놀라 홈즈'를 보고 자란 이 시대의 영어덜트 누군가에는 '탐정'은 고전의 '셜록'이 아닌 '에놀라'로 기억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된 탐정 에놀라는 그 미래의 선택지를 또 다르게 열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by meditator 2020. 10. 13. 15:44

코로나 시대, 본의 아닌 언택트한 삶이 이어지는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적 혼란'을 불러온다고 한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여러 가지 일들, 그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평소와는 다르게 이끌어 낸다. 아마도 미래의 누군가가 이 시대를 '우울의 시대'라 정의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없이 마음이 가라앉고, 그로 인해 행동마저 위축되는 증상,  '코로나'가 사라지면 없어질까? 어쩌면 코로나 그 이전, 이미 우리의 삶으로 부터 '우울'은 배태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 남편과 주변으로 부터 '정신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낙인찍힌, 그래서 정신병동으로 강제 이송될 위기에 처한 한 여성으로 부터 그 답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바로 <어디갔어 버나뎃>의 버나뎃 폭스이다. 


 

사회 부적응 주부 버나뎃 
한적한 시카고의 교외 주택가, 정갈하게 손질된  단독 주택들이 이어진 이곳에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블랙베리 덩굴을 뒤집어 쓴 집 한 채가 있다. 옆 집에 사는 오드리가 정원사를 앞세우고 찾아와 이 덩굴을 쳐낼 것을 요구하는 처지에 몰린 이 집에는 버나뎃 폭스(케이트 블란쳇 분)가 그의 남편 빌리(빌리 크루덥 분),  딸 비(엠마 넬슨 분)와  함께 살고 있다. 

버나뎃 폭스가 '문제 인물'로 취급당하는 건 집을 손보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다. 마치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도 가진 것처럼 이웃은 물론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그녀, 교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딸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 사회에서 그녀는 '은둔형 외톨이'이다. 그런데 그저 '은둔'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하교하는 딸을 데리러 간 버나뎃의 과격한 행동이 동네 주민의 '가해자'로 '소문'의 주인공이 되게 만든다. 

'소문'을 불평할 것도 아니다. 오드리 등을 비롯하여 주변 엄마들을 '각다귀'라 부르며 '적대적'으로 대하다 못해 '각다귀' 운운하는 플랜카드까지 내건 버다뎃의 태도는 충분히 주변 사람은 물론, 남편에게 조차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게 온라인 비서 '만줄라'에만 의지해 극단적으로 세상과 '단절'을 적극적으로 해왔던 버나뎃, 그런 그녀의 삶에 '변화'가 들이닥쳤다.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 이 집을 떠나 기숙학교로 갈 딸이 졸업 기념으로 엄마, 아빠와 함께 남극 여행을 제안한다. 바쁜 남편이 거절하기를 원했지만 하나 밖에 없는 딸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수 없었던 남편이 얼버무리고, 결국 결정된 가족 남극 여행은 그 자체로 자신을 '사회'로 부터 격리시킨 버나뎃에게는 '멘붕'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가같은 블랙 베리 덩굴 지지대를 잃은 버나뎃 쪽의 언덕이 폭우에 한참 학부모 모임으로 들썩이던 오드리네 집으로 쏟아져 내렸다. 

거기다 그간 버나뎃이 유일하게 의지해 왔던 온라인 비서 만줄라가 러시아를 기지로 한 국제 범죄 집단이라며 FBI가 들이닥치자 안그래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버나뎃과 관련한 '사건'들을 전해들으며 우려가 깊어졌던 남편 빌리는 이제 버나뎃에게 정신과 강제 입원 같은 조치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FBI,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대신 정신과 치료진을 앞세운 남편, 버나뎃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그런데 버나뎃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은 듯, 땅으로 꺼진 듯 버나뎃의 자취가 없어졌다. 버나뎃은 어디로 간 것일까? 


 

사라진 버나뎃 
드러난 사건 자체로만 보면 사회 부적응에 우울증이 심해 '자살' 우려가 있는 주부의 실종이지만, 그 속내에는 '좌절한 건축가이자, 독박 육아로 지친 주부' 버나뎃이 있다. 

지금은 흉물같은 시애틀 교외의 집에 사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사람과의 접촉을 꺼리는 이상한 사람이지만, 한때 버나뎃은 이미 20대의 나이에 건축계의 아이콘이 되었던 천재적인 건축가였다. 그녀가 건축한 집이 곧 '이슈'가 되었던 시절, 그래서 당대 내노라하는 중견의 남성 건축가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젊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야심찼던 젊은 건축가 버나뎃의 열정은 그녀가 건축한 집이 단 몇 달 만에 '철거'되는 '사건'과 함께 주저앉아 버렸다. 

남편과 함께 LA를 떠나 시애틀로 삶의 근거지를 옮겨온 버나뎃, 하지만 새로운 곳에서 건축가로 새로이 시작해보려 하기도 전에 그녀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고 싶었던 버나뎃, 하지만 거듭된 몇 번의 유산, 겨우 태어난 아기는 생사조차 불투명했다. 자신의 일은 전폐하고 오로지 아이를 키우는데만 전력하는 과정에서 성공을 거두느라 가정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떤 남편과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안팎으로 상처를 받은 버나뎃이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단절'이었다. 하나 뿐인 딸 '비'에게는 세상 둘도 없는 엄마였지만, 딸을 제외한 모두에게 버나뎃은 '철벽'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간은 동시에 불면과 불안과의 싸움이었다. 


 

버나뎃, 자신을 넘다 
서점에 가면  '우울'을 주제로 한 서적들이 넘쳐난다. 안그래도 집단에서 고립된 원자화된 개인의 우울이 20세기의 대표적인 병리 현상이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사회적 경향성에 '가속 패달'을 밟았다. 우울증이라 대변되는 '불면'과 '불안'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대표적  '방어 기제'이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상실감에 빠진 한 여성의 상황으로 우리 사회 보편의 '아픔'을 길어낸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픔에 천착하는 대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말하듯 버나뎃의 인생 역전을 통해 아픔을 승화시킨다. 우연히 식당에서 예전 동료를 만났던 버나뎃, 그 동료에게 두서없이 그리고 장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하자, 동료는 명쾌하게 '진단'을 내렸다. '버나뎃, 너는 다시 건축을 해야 해. 너같은 예술가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고통스럽지.'

그렇다면 사라진 버나뎃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저 처음에는 정신 병원 입원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버나뎃, 딸과의 약속했던 남극 여행선에 우선 몸을 싣는다. 사람과 부딪치기조차 힘든 버나뎃에게 심지어 해류에 따라 요동치는 남극행 여행선은 그 자체로 '지옥행'이었다. 

하지만, 토해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다시피 했던 배의 창문을 통해 그녀의 눈에 띈 남극의 빙산, 그 순백의 세계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끌리듯 다가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게 된 남극 연구원을 통해 전해들은 '남극 기지 재건축'의 소식이 오랫동안 침잠했던 건축가로서의 버나뎃을 깨운다. 

오랫동안 버나뎃이 외면해 왔던 건 건축가로서의 정체성이었다. 자신의 실패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한 발자국도 나설 자신이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연속되는 유산은 그녀에게 자존감마저 앗아가 버렸다. 오로지 아이를 지킨다는 맹목적인 모성만으로 버텨왔던 버나뎃, 자신을 괴롭히는 정신병적 징후조차도 외면했던 버나뎃이 남극의 빙산 앞에서 비로소 '자신'을 직면한다. 

뉴욕 타임즈 84주 연속 베스트 셀러를 차지했던 마리아 샘플의 동명의 원작은 영화와 달리 편지, 이메일, 문자 메시지, FBI서류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이 색다른 구성의 원작을 <비포 선 라이즈> 시리즈와 <보이 후드>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버나뎃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물론 건축가로서의 좌절과 모성으로서의 상처를 '사회 부적응'에 우울증 주부로, 그리고 다시 건축가로서의 열정을 되살려낸 인간 승리의 '강약'을 매력적으로 표현해 내는데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의 역할이 지배적이다. 

남극 바다에서 대번에 자신의 열정을 되살렸다는 상황은 '코미디'라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우연적'이거나, '작위적'이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거기서 '방점'이 찍혀야 하는 건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라는 지점이다. 영화는 그런 '나와의 직면'을 위해 남극이라는 장치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활용하며 보는 이들에게 스스로 자신을 가둔 울타리를 벗어나라 독려한다.  

by meditator 2020. 10. 12. 00:46

2020년 방송 통신위원회는 올해의 방송 대상으로 ebs다큐 프라임 <인류세> 3부작을 선정했다. 260편이 넘는 응모작 중  '인류세라는 재난적 상황에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인간 역시 멸종을 피할 수 없다 사회적 메시지'가 대상 선정의 이유로 꼽았다.

<인류세 > 3부작은 이미 앞서 프랑스 스크리닝 마켓에서 20,000 개 이상 스크리닝 작품 중 가장 많이 본 9번 째 작품으로 뽑혔고, 바르셀로나 플래닛 영화제 사르라다파밀리아 상, 한국 기독 언론 대상 생명사랑 부문 최우수상, 미국 임팩트 다큐 어워즈 장편 다큐멘터리 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이에 ebs는 수상 기념으로 10월 5일부터 3부작을 다시 방영했다. 

그렇다면 용어조차 생소한 '인류세'란 무엇일까? 지구가 형성된 이후 현재까지의 단계인 '지질시대' 중 약 1만년 전 부터 현재까지를 '홀로세'로 구분한다. 2001년 화학자 파울 크루첸은 '인류가 화석 연료를 대규모로 사용하면서 그로 인해 배출된 온실 가스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가 시작되었음에 주목하여 '인류세'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즉, 공식적인 지질 시대명은 아니지만 너무도 강력해진 나머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지구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된 생물종, 인류가 지배하는 시대라는 개념이다. 3부작 특집 다큐멘터리 <인류세>는 '닭뼈', '플라스틱', '과잉 인구'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인간이 지구에 미친 영향을 풀어내고자 한다. 

 

   

 

인구 폭발, 붕인섬 
꾸르니 아완 안드레, 물고기 잡는 걸 좋아하는 14살 소년이다. 아직은 길어야 2분 정도 물 속에서 숨을 참고 작살질을 하는 소년은 한번 물에 들어가면 4~5분 숨을 참을 수 있는 어부인 아버지처럼 물고기를 잘 잡는 게 희망이다. 

안드레는 바자우 족이다. 1만 7천 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도서국가 인도네시아, 그곳에 사는 바자우 족은 원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바다의 집시들이다. 그런데, 2002년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가 놓이며 세상에 알려진 붕인 섬, 이곳 바자우 족들은 독특하게도 200여 명의 섬 주민에 정착 생활을 하고 있다. 다큐는 정작 생활을 하는 붕인 섬의 바자우족들을 통해 '인구 과밀'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고자 한다. 

다리를 통해 세상과 이어진 붕인 섬, 그 다리를 통해 세상의 문물 역시 붕인 섬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붕인 섬에는 쓰레기 통이 없다. 지금까지는 쓰레기가 생기면 키우는 염소들이 다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쓰레기라 봐야 대부분 먹고 남은 음식 쓰레기였으니 가능했다. 그런데 바깥 세상에서 비닐과 플라스틱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쓰레기통이 없는 붕인 섬에서 쓰고 버린 비닐과 쓰레기들이 점점 섬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섬 주변을 채우고도 남은 쓰레기는 바다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염소는 비닐을 먹고 병이 들기 시작했고, 바다에 둥둥 떠다디는 쓰레기로 인해 물고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화산 폭발로 이곳에 모여든 바자우 족은 이곳 붕인섬에서 살아가는 것을 자신들 삶의 숙명이라 여긴다. 그런데 처음 100 여 명에서 시작된 바자우 족은 해마다 늘어나 이제 4000 여 명에 이른다. 

왜 이렇게 인구가 늘어나고 있을까? 조절은 안되고 있는 것일까? 1년에 100 여 명의 신생아가 태어난다. 반면에 죽는 사람들은 34명 정도이다. 당연히 인구는 급격하게 늘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에서는 2명을 낳으라하지만, 그 정부의 정책이 사람들에게 '수용'되지 않는다. 여전히 많이 낳는 것이 바자우 족의 '관습'이다. 4명, 5명, 6명, 7명까지도 낳는다. 붕인 섬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습을 고집하는 한 인구는 더 늘어날 것이다. 

늘어나는 인구는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매년 서른 쌍 정도가 결혼하는 바자우 족, 새로 결혼하는 부부에게는 '새 집'이 필요하다. 하지만 새 집을 지을 땅이 부족한 바자우 족은 바다에서 죽은 산호를 캐내 집을 지을 '땅'을 넓힌다. 그리고 넓힌 산호 땅에는 육지에서 들여온 자재로 집을 짓는다. 해마다 새로 필요한 산호 땅을 위해 바다에서 산호를 캐내는 마지노이는 점점 더 깊은 바다로 향한다. 그의 보트 수 백대를 채워야 집 한 채가 만들어지는 붕인 섬의 집들, 바다가 섬을 감당해야 하는 '짐'이 그만큼 커지고 있다. 

어디 집을 짓는 산호 뿐인가. 육지의 사람들이 차를 가지듯 붕인 섬의 사람들은 차처럼 배를 가진다. 한 대는 기본, 재력에 따라 두 대, 세 대를 가지기도 한다. 늘어나는 배와 함께 어획량도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물고기 개체 수는 그대로이다. 늘어나는 배만큼 경쟁도 심해지고, 배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바다로 향한다. 바다는 위협당할 수 밖에 없다. 

마을 사람들은 생선은 매일 즐기지만 육지나 도회지의 사람들처럼 인스턴트나 육류를 즐기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친환경적일까? 붕인 섬에서는 채소가 나지 않는다. 키울 땅이 없다. 채소 뿐인가. 전기, 수도, 플라스틱 등의 공산품, 식료품 등 생활의 대부분을 섬 외부로 부터 조달한다. 재생 에너지? 붕인 섬 사람들은 재생 에너지가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 자동차와 비행기는 이용하지 않지만 붕인 섬 사람들처럼 살려면 2.7개의 지구가 필요하다. 

 

 

지구의 한 귀퉁이에 불과한 붕인 섬, 하지만 붕인 섬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곧 지구의 축약본이다. 지구를 1억 분의 1로 줄이면 붕인 섬이다. 아버지처럼 어부가 되고 싶은 안드레, 하지만 청년 정치가 티손 사하부딘은 붕인 섬의 어부는 조만간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안타까워한다. 물고기가 살기 좋은 환경을 위해 지난 10년간 노력했다. 그 결과 절반 가까이 훼손되었던 산호에 새 살이 돋는 중이다. 하지만 안드레가 느끼게 될 바다는 그 이전 세대가 느끼게 될 바다와는 다를 것이다. 

1950년대를 기점으로 에너지 사용과 기온 상승 오존 파괴 등 지구 시스템의 가파른 상승세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가속은 지구 시스템의 변화 비율을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밀어붙였고, ㄱ결국 지구 시스템은 홀로세의 안정적인 상태를 벗어났다. 그 결과 호주 들불과 같은 기후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더 이상 우리는 홀로세에 살고 있지 않다. '(책 <인류세>  중)

인류세, 인류가 소행성 충돌, 지각판 충돌처럼 지구의 지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붕인섬은 바로 인류세의 현장이다. 




by meditator 2020. 10. 10. 22:33

2020년 7월 10일부터 wave 오리지널을 통해 선공개되고 매주 금요일 mbc를 통해 방영되었던 시네마틱 드라마 SF8이 10월 9일 <인간 증명>을 끝으로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민규동 감독을 비롯하여 노덕, 이윤정, 한가람, 안국진, 오기환, 장철수, 김의석 감독까지 한국 영화 감독 조합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OTT) 웨이브의 조합으로 주목받았던 이 시리즈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의 대항마로서 야심찬 출발을 선언했지만, 첫 방송 <간호중>의 1.6%가 자체 최고 시청률로 1%도 못미치는 안타까운 성과를 보이며 조용히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기술 발전을 통해 완전한 사회를 꿈꾸는 인간들의 이야기란 모토 아래, 좀비에 이은 SF 장르에 대한 선도적 '도전'을 선언했던 SF8, 그러나 40분이란 짧은 시간에 펼쳐낸 영화 감독들의 포부는 '실험', 그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마지막 작품으로 선보인 김의석 감독의  <인간 증명>은 SF8이 시도한 실험 정신과 한계를 다시 한번 명확하게  보여준다. 

 

 

아들을 죽인 아들 
<인간 증명>은 <곡성>의 연출부를 거쳐, <죄많은 소녀>로 백상 예술대상, 대종상 신인 감독상을 휩쓴 김의석 감독의 작품으로 죽은 아들의 뇌와 결합된 안드로이드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고발한 엄마(문소리 분)의 이야기를 다룬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들(장유상 분), 엄마는 차마 그 아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과학의 도움을 얻어 아들을 회생시킨다. 아들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기쁨도 잠시, 어느날인가 부터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라 생각했던 안드로이드의 '눈이 비어있음'을 느낀다. 분명 모습은 자신의 아들인데 거기서 아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법정에 아들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를 세운다. 

엄마의 의심은 틀리지 않았다. 여전히 어머니의 아들이라 주장하던 안드로이드는 결국 변호사의 집요한 설득에 자신이 영인을 죽였음을 고백한다. 정확하게는 영인과의 뇌회로를 단절시켰다고. 그런데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안드로이드는 영인은 살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귀에 자신을 죽여달라 하던 그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주었다고 하는 안드로이드, 그리고 그렇게 살 의지가 없었던 영인과 달리 자신을 살고싶다는 삶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피력한다. 

여기서 문제는 과거로 회귀한다. 이 사건을 맡은 조사관은 이제 엄마에게 다시 묻는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교통 사고의 원인을. 엄마는 차량 문제로 인한 사고라고 하지만, 그 표정이 석연치 않다. 안드로이드는 영인을 대신해 말한다. 삶에 대한 오랜 고통과 고뇌를 거쳐 겨우 공포와도 같은 죽음의 터널을 지났는가 싶었는데, 한숨 자고 깨어난 듯 다시 삶에 던져진 고통에 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자를 엄마가 과학 기술의 도움을 얻어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선(善)'인가? 그게 아니면 엄마의 '과욕'인가? 그렇다면 세상에 머물고 싶지 않은 영인의 뇌와의 접속을 끊어, 다시 한번 영인에게 '자살 아닌 자살'을 방조한 안드로이드에게는 '살인'의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인가? 여전히 영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삶의 의지를 주장하는 안드로이드의 권리는? 

그렇게 <인간 증명>은 과학이 발달한 세상에서 인간에게 닥친 삶과 죽음의 딜레마를 '철학적' 화두로 묻는다. 

결국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과학의 도움을 얻었지만 다시 한번 아들을 잃게된 엄마는 뒤늦게 오열한다. 아들을 안드로이드로 만드는 바람에, 아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추모'할 시간조차 놓쳤음을. 

그런데 여전히 아들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는 남아있다. 결국 안드로이드를 법정에 세웠던 엄마는 아들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안드로이드는 묻는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엄마를 대했으면 좋겠냐고. 영인의 모습으로? 아니면 다른 모습으로? 하지만 영인과 같은 안드로이드의 모습을 견딜 수 없는 엄마는 안드로이드에게 기억 삭제와 '성형'을 권한다. 하지만 기억마저 자신의 정체성이라 주장하고. 아들은 갔지만 아들의 기억과 남겨진 모습 사이에 안드로이드와 엄마는 고뇌한다. 

 

 

아들인 줄 알았는데 아들과 연결된 뇌의 접속 장치를 차단하여 아들을 죽인 안드로이드, 이야기의 얼개는 신선하다. 엄마인 문소리와 아들 장유상의 연기도 절절하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금요일 밤 10시 공중파의 시청자들을 흡인하기에는 '난해'하다. 풀어가는 과정 역시 '죽음'과 '삶'에 대한 담론적 대사로 이어진다. 공중파 드라마가 가지는 '사건'보다는 두 모자 사이에서 이어진 '존재론적' 질문들이 채운 행간이 넓다. 의미는 있지만 대중적이지는 않다. 대부분의 SF8 작품들이 가진 한계다.  이렇게 '매니악'한 접근이라면 SF 장르에 대한 장벽을 낮추는 것조차 무리가 아닐까. 이미 '넷플릭스' 등을 통해 '담론적' 주제를 가졌음에도 재미와 대중성을 담보한 작품들에 눈이 높아진 시청자들에게 '실험적 양식'과 '난해한 주제 의식'만을 앞세운 이들 작품들이 호평을 떠난 관심을 받기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by meditator 2020. 10. 10. 01:44

추석이 지났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일환으로 가급적이면 고향 방문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권고와 상관없이 가족들이 몇날 며칠을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 명절은 언제나 주부의 입장에서는 고달픈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어디 안가고 집에만 있었는데, 명절이 지나고 나서 서로 만나 하는 인사치레에 꼭 '살'이 들어간다. 겨우 며칠 새에 살이 쪘다더라는 식이다. 왜 주부들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살이 찔까? 그 이유를 '사랑스럽게' 풀어낸 단편 영화 <내 아내가 살이 쪘다> 가 10월 2일 유투브를 통해 공개됐다. 

<내 아내가 살이 쪘다>는 12분 분량의 단편 영화이다. 그리고 이 단편 영화는 우리에게는 배우 류덕환으로 더 친숙한 감독 류덕환의 연출작이다. 낯선 감독 류덕환, 하지만 이미 류덕환 감독은 2012년 <장준환을 기다리며>, 2015년 <비공식 개강 총회> 등을 연출한 바 있다. 

 

 

자꾸만 먹는 엄마 
영화는 체중계에 올라 늘어난 자신의 몸무게를 확인하고 비명을 지르는 아내(장영남 분)로 시작된다. 목욕탕에서 잰 몸무게와 다르다며 늘어난 몸무게를 잘못된 체중계 탓으로 돌린 아내, 그도 잠시 밥 먹자며 부엌으로 향한다. 

식구들의 저녁을 준비하는 중, 아내는 칼질을 하다 연신 입으로 무언가를 넣는다. 거기서 끝일까? 찌개를 끓이던 아내는 맛을 본다며, 찌개 국물이며, 건더기를 먹어댄다. 간이 안맞아서 물을 더 부으니, 다시 또 간을 봐야 한다. 이미 찌개가 상에 올라가기 전에 엄마의 배가 찰 정도로. 거기서 끝일까? 

온가족이 함께 한 외식에서 남은 등갈비를 알뜰하게 싸가지고 온 아내, 다시 덥혀서 식구들에게 권한다. 하지만 '집에서 먹으면 맛이 없다'는 둥, '시간이 없다'며 식구들은 내빼기 바쁘고, 결국 그 '남은'것들은 그걸 남길 수 없는 아내의 입으로 들어간다. 

어느 집안에서도 너무나 익숙한 상황, 그 상황에 류덕환 감독은 '아내의 살'에 대한 개연성을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여기까지만 봐도 아내가 살이 안찌는게 이상하다. 집집마다 한 입 더 먹으라는 엄마와, 먹기 싫다는 식구들, 버리는 게 아깝다는 엄마와 그냥 버리라는 식구들의 실랑이야 너무도 익숙한 구도이니까. 심지어 영화 속 엄마는 강아지가 저지레한 초콜릿 수거까지 엄마의 입으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류덕환 감독은 주부 '살'의 개연성에 한 술을 더 보탠다. 거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족, 과자 봉지를 쥔 막내가 장난을 치다 과자를 온 바닥에 쏟아버린다. 빨래를 개던 엄마는 아연실색 장난을 친 막내를 야단치지만 결국 애정어린 포옹으로 마무리된다. 화해의 기념으로 엄마에게 과자 하나를 건네는 막내, 하지만 엄마는 '엄마 살쪄'라며 거절하자, 재치넘치게도 막내는 과자 끄트머리를 조금 잘라 엄마의 입에 넣어준다. 

과자를 먹어본 사람은 아마도 알 터이다. 그 손톱만한 조각이 입에 들어와 녹는 순간의 달콤함이 주는 유혹을,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간 엄마는 '이거 맛있는데 더 주지'라며 바닥에 떨어진 과자를 입에 넣는다. 

 

 

엄마의 살은 사랑이다 
류덕환 감독이 <내 아내가 살이 쪘다>를 통해 '정의'내린 엄마의 '살'은 '사랑'이다. 식구들을 위해 애써 음식을 준비하고,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과정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입에 넣는 것들이 결국 엄마의 살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추석과 같은 명절을 지내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몸무게의 뒷자리가 달라지는 '비밀'이다. 

엄마는 연신 살이 찐다고 되놰이지만 음식으로부터의 '거리 두기'가 되지 않는다. 늘 엄마의 주변을 둘러싼 음식들, 그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류덕환 감독은 '주부의 살'에 대해 애정어린 고찰을 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을까? 감독이 선택한 해답 역시 '사랑'이다. 영화는 줄곧 남편(김태훈 분)의 시선으로 엄마를 지켜본다. 그간 많은 드라마에서 '서늘한 캐릭터'를 연기해 온 아빠 김태훈, 하지만 <내 아내가 살이 쪘다> 속 아빠는 다르다. 살이 쪘다며 혼비백산하는 아내에게 그대론데 라고 하는 남편, 그리고 음식을 하다 집어먹고, 남긴 음식을 아깝다며 먹고, 심지어 개가 저지레한 음식까지 먹는 아내를 줄곧 애정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던 남편은 결심한다. '안되겠다! 나도 노력해야겠다'

 

 

남편의 노력은 무엇이었을까? 찌개를 끓이다 간을 보려는 아내 대신 남편이 뛰어가 간을 본다. 엄마가 차려놓은 음식을 안먹고 내빼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너네가 안먹으면 엄마가 먹게 된다며 먹인다. 아들이 엄마 입에 넣어주는 과자를 대신 먹기 위해 아빠는 슬라이딩을 한다. 그 결과? '아빠가 살이쪘다'

영화는 우리네 생활 속 '주부의 살'이라는 사소한 사건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따라간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그냥 '살'에 대한 보고서가 될 뻔한 영화는 아빠가 살이 쪘다라는 반전 아닌 반전을 통해, '주부'라는 짐에 대한 '혜안'을 제시한다. 영화는 엄마가 살이 찔 음식을 나눠먹는 아빠이지만, 결국 그 속에 담긴 건, 주부라는 역할을 나누어 짊어짐이다. 

아무리 주부의 역할을 덜어낸다 해도 각자 저마다의 생활이 뚜렷해져가는 상황 속에서 그 역할의 나눔이라는게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아내가 살이 쪘다> 속 아내를 대신해서 기꺼이 살이 찔 각오가 될 남편의 자세라면 주부의 짐도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나누어지는 '살'이 아니라, '짐'이다. 

by meditator 2020. 10. 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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