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은영은 유감스럽게도 평범한 보건교사가 아니었다. 은영의 핸드백 속에는 항상 비비탄 총과 무지개 색 늘어나는 깔대기 형 장난감 칼이 들어있다'
이렇게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9번 째 책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은 시작된다. '보건교사'라는 정상적인 직업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키치적' 소품인 비비탄 총과 무지개 색 장난감 칼은 바로 <해리 포터>에서 판크라스 역 9와 3/4 승강장을 통해 호그와트 행 기차를 타고 '마법'의 세계로 빠져들어가듯 '죽은 영혼'들이 만연한 세계로의 '입장권' 같은 것이다. 평범한 소년 해리와 함께 기차를 타고 떠나 호그와트의 마법사들이 빗자루를 타고 둥둥 떠다니며 마법 지팡이를 휘두르는 세계를 '수용'해야 <해리 포터> 속 세계관에 심취할 수 있듯 <보건교사 안은영>은 보건교사인 안은영(정유미 분)이 죽은 자들이 남긴 욕망의 찌꺼기를 향해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이 엉뚱한 상상력의 세계를 '인정'해야만 키치 감성 충만한 <보건교사 안은영>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이경미 감독이 극대화시킨 소설의 상상력
독특한 상상력의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은 9월 25일 넷플릭스를 통해 6편의 시즌으로 돌아왔다. 이 시즌의 감독은 이경미 감독, <미쓰 홍당무(20008)>라는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를 탄생시켰던 감독답게 <보건교사 안은영>이 가지고 있는 키치적 환타지의 세계를 목련 고등학교라는 고등학생들, 그 중에서도 비주류적 삶에 보다 방점을 찍으며 B급 감성이 넘치는 영상으로 극대화시킨다.
그러기에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면 과연 정세랑 작가의 세계를 이경미 감독만큼 재치있게 구축해 낼 수 있는 감독이 또 누가 있을까라는 싶지만, 동시에 이는 홍조 띤 얼굴로 삽질을 하던 <미쓰 홍당무>와 신들린 듯 방언에 가까운 몸부림을 보여주던 <비밀은 없다>의 연홍의 캐릭터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듯 이경미 감독이 '에스컬레이션'시킨 원작 속 세계관에 대한 시청자의 기호 역시 분명하게 갈릴 것이다.
안은영, 죽음에 맞서다
드라마는 안은영의 어린 시절을 통해 '젤리'의 세계로 시청자들을 인도한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어린 시절의 은영은 그런 남들과 다른 '능력'으로 인해 '심리 치료'를 받는 중이다, 그런 그녀의 옆에 엄마가 앉아있다. 당연한 듯 했던 모녀 관계, 하지만 다음 장면 은영의 눈 앞에서 녹아내리는 엄마를 통해 은영이 보는 '죽음'의 세계가 열린다.
드라마로 와서 '문어 젤리', 옴벌레 젤리, 대왕 두꺼비 젤리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 '퇴치 대상'은 바로 죽은 자들이 남긴 안은영의 눈에만 보이는 '욕망'의 기운이다. 목련 고등학교 지하실 흔적만 남긴 연못에는 사랑을 이루지 못해 몸을 던진 슬픈 연인들의 '마음'들이 짖눌러져 있다. 은영이 학교 창립자의 아들 홍인표(남주혁 분)와 함께 그곳을 누른 '압지석'을 열자, 그 이루지 못한 사랑의 '원혼'들은 거대한 대왕 두꺼비 젤리가 되어 튀어오르고 그 '기운'에 '전염'된 학생들은 소리를 지르며 옥상난간 철망에 미친듯 매달린다는 식이다.
물론 은영이 처음부터 '젤리'를 상대로 칼을 휘둘렀던 건 아니다. 지금의 은영은 극중 죽은 자의 모습으로 그녀를 찾아온 어릴 적 친구 강선의 설정이다. '귀신'을 본다는 사실이 알려져 반 친구들에게 기피대상이었던 은영은 역시나 조폭 아버지를 두었다는 이유로 기피 대상이 된 강선과 짝을 하게 된다. 남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한껏 위축된 은영에게 강선은 '그림'을 통해 은영의 캐릭터를 구축해 준다. 그리고 그건 바로 귀신을 본다는 남들과 다른 모습을 약점이 아닌 기꺼이 그걸 수용하여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든 '퇴마 히어로'로써의 거듭남이었다.
은영은 그런 강선의 독려에 힘입어 남들을 돕고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소명'은 받아들였지만 '*팔' 소리를 입에 달고 살듯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삶이 고달프고 버겁기도 하다. 그런 그녀의 '멘토'가 되어준 건 침술원 원장 화수(문소리 분)요, 그녀에게 에너지를 통해 힘을 준건 같은 학교 한문 선생인 홍인표(남주혁 분)이다. 젤리들과 싸우다 '방전'하면 남산에 올라가 연인들의 기를 받고, 절은 전전하던 은영은 인표를 둘러싼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의 손을 잡는 것을 통해 기를 충전한다.
이경미 감독이 B급 감성의 향연처럼 펼쳐놓은 목련 고등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통해 은영과 젤리와의 대결을 풀어가던 <보건교사 안은영>은 매켄지, 어릴 적 친구 김강선, 그리고 옴잡이 혜민을 등장시키며 그저 이 드라마가 해괴한 명랑 판타지만이 아님을 말하기 시작한다.
여린 존재들의 아름다운 싸움
은영과 같은 능력을 가진 매켄지는 자신을 둘러싼 에너지를 가진 인표에게 접근하고 그런 그의 '음모'를 알아챈 은영은 매켄지와 '대립'한다. 여기서 매켄지는 은영에게 일말의 경제적 이득도 없이 '사명감'만으로 '죽은 자들의 욕망'과 맞서는 은영에 대해 어리석다고 비웃는다.
결국 드라마는 매켄지 나아가 '숨구멍을 다스려 대운을 바꾸겠다'는 욕망으로 학교를 지을 자리가 아닌 곳에 목련 고등학교를 지은 인표의 할아버지를 비롯한 자신의 능력을 통해 '이해 관계'를 관철하려는 안전한 행복(HSP)이라는 일군의 무리들, 결국 은영의 멘토인 줄 알았지만 은영을 이용했던 화소와 같은 자들의 '욕망'이 목련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사건'들을 자초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런 욕망의 맞은 편에 은영, 혜민과 같은 '여린 자'들의 싸움이 있다. 귀신을 본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던 은영이나, 교통사고로 인해 다리를 저는 인표는 세상에 주목받지 못하거나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당위적 사명감'에 자신을 맡긴다.
이러한 여린 존재의 당위적 사명감은 특히 옴잡이 혜민의 에피소드를 통해 절정은 이룬다. 백제 시대부터 목련 고등학교 근처 5.38KM 반경 내에서 '재수 옴붙게' 만드는 옴 젤리들을 잡아먹어왔던 옴잡이 혜민은 몇 수십 차례 인생을 거듭 살고 있다. 빈 속에 옴을 먹으면 속이 쓰려 연신 음식을 쑤셔넣다시피하고 은영에게 와서 제산제를 통째로 받아가는 혜민, 그런 혜민이 친구들을 사귀며 스무 살 넘게 살고싶다는 '소망'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그런 소박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혜민은 그를 돕겠다는 은영 앞에서 주저한다. 자신이 자신의 행복을 따라 사는 것이 곧 친구들에게 '재수를 옴붙게'만드는 결과를 초래할까봐, 이를 원작자 정혜랑은 '여린 존재들의 아름다운 싸움'이라 정의한다.
아름답다고 했지만 싸움은 처절하다. 제 아무리 인표가 손을 잡아줘도 버거운 싸움에서 은영조차 도망치고 싶다. 오랫동안 옴잡이로 살아온 혜민에게 이제 자신의 생을 찾아주듯 은영 역시 평범한 삶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히어로물의 정석처럼 결국 은영은 목련고등학교로 돌아온다. 여전히 '*팔'을 외치지만 이제 은영은 불안하면 화수에게 달려가던 그때의 은영이 아니다. 기괴한 명랑 판타지의 끝에 만난건 결국 '아름다운 인간'의 진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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