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월화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종영했다. 송아(박은빈 분)와 준영(김민재 분)는 손을 맞잡고 활짝 웃었다. 로맨스 멜로 드라마의 정석에 따른 엔딩이라 할 수 있겠지만 16부를 그들과 함께 웃고 울었던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반가운 엔딩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맞잡고 웃는 그들에게 상이라도 내리고 싶다. 왜냐하면 지난 16부동안 이 두 젊은이는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자신의 삶에 던져진 문제에 대해 답을 얻으려 애써왔으니까. 그저 사랑만이 아니다. 스물 아홉, 자신들에게 던져진 삶이 준 화두에 대해 진지하게 천착한 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사랑 이야기 이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암송되는 프로스트의 시처럼 '두 갈래' 길에 대한 '화답'을 한다. 

 

 

송아가 포기한 길 
마지막 회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자신의 근황을 전한다. 송아는 대학원에 합격했노라고. 준영이 축하한다고 하자, 송아는 하지만 대학원에 가지 않을 거라고 답한다. 송아에게는 오래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바이올린에 대한 '화두'가 던져졌다. 대학에 들어가 취미로 만난 바이올린이 너무나 좋아 4수를 하면서까지 선택했던 바이올린,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바이올린은 늘 송아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리고 이제 송아는 전문 연주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16부는 음악도로서 송아가 고민했던 시간이다. 좋아하지만 늘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해왔던 동기들에게 미치지 못한 자신의 실력에 고민해 왔던 송아, 여전히 좋아하는 것과 자신이 해나가야 할 길에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답답할 정도로 주저했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 사이 송아에게는 계속 다른 기회가 왔다. 연주자의 처지를 헤아려 기꺼이 자신의 구두를 벗어주는 송아의 자세가 송아에게 기회가 되었다. 이제 송아는 송아에게 온 다른 기회를, 다른 길을 가려고 한다. 드라마의 16부 내내 이수경 교수의 체임버 오케스트라 실무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고민해 왔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송아의 발걸음은 무겁지만 가볍다. 가보았기에 돌아설 수 있는 것이다. 16를 통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건, 결국 '포기'가 아니다. 때로는 가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준영이 포기한 길 
그런가 하면 준영은 차이콥스키 콩쿨을 포기하겠다고 전한다. 준영의 삶은 늘 방점이 자신의 바깥에 찍혀 있었다. 친구인 정경(박지현 분)이 부러워하다 못해 시샘할 만큼의 쇼팽 콩쿨에서 2등을 할 만큼의 재능이 있었지만 그 재능은 사고치는 아버지의 뒤치닥거리로 허덕였다. 그리고 허덕거리는 자신을 도와주는 경후 재단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렸다. 스스로 '달란트'가 아니라 '저주'라고도 생각할 만큼.

재능을 가졌지만 그 재능의 '주체'로서 살아오지 못했던 준영은 송아와 '사랑의 열병'을 앓고나서 '피아노'를 포기할 마음마저 가진다. 자신의 밖에 찍혔던 '삶의 방점'을 거두어 자신에게로 오는 '통과 의례'이다. 그렇게 피아노마저 포기하려 했던 준영이 송아의 졸업 연주회에 반주자로 자처한다. 송아와 눈을 맞추며 연주를 '완성'한 후 준영은 행복하라는 송아의 말에 '사랑해요'라고 고백한다. 늘 송아와의 관계에서도 '미안해요'라는 말만 되풀이 하던 준영이 행복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주체로 나서기 위해 선택한 첫 번째 말이다. 

그리고 이제 차이콥스키 콩굴을 포기했다. 그에게 콩쿨은 위기에 선 연주자 박준영이 선택했던 배수진같은 것이었다. 다시 줄을 세운 그 자리에서 우뚝 서서 자신이 당면한 경제적 위기를, 명망성의 위기를 돌파해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늘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콩쿨 심사위원을 위한 연주를 해야 하는 건 여태 그가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를 위해 피아노를 쳐왔던 방식의 답습일 뿐이었다. 행복하기 위해서 송아에게 다시 사랑해요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 준영은, 그렇게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슈만을 치고, 브람스를 치고, 준영의 결을 살린 '피아노'를 완성해 간다. 자기 삶에 방점이 찍히는 순간이다. 

 

 


준영과 송아가 선택한 길
14회 준영을 찾아간 송아는 준영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더는 준영 씨를 사랑하는 게 행복하지 않다고. 

'행복'이라는 이 피상적인 단어는 오늘날 현대인들을 가장 갈등에 빠뜨리는 단어이다. 실제 한 사람이 일생에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아마 '데이터'로 따지면 '쥐꼬리'만큼도 안될 것이다. 그래서 삶에서 '행복'을 지우라고도 말한다. 행복을 향하는 것자체가 무의미하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행복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일상은 고통스럽고 무의미하더라도 그그 시간을 의미있도록 만드는 것이 '행복'을 향한 방향성이 아닐까 싶다. 마치 꽃들이 해를 향해 방향을 트는 것처럼. 

송아가 행복하지 않기에 준영에게 이별을 통보한 것은 16부작 드라마 절정에 등장한 편의적인 갈등만이 아니다. 준영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고통받음에 대해 송아는 돌아볼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런 송아에게 준영이 화답한다. 행복하기 위해 사랑한다고. 16부의 엔딩은 그래서 상처받고 상처받고 또 상처받아도, 사랑으로 인해 받은 행복이 더 크기에 사랑한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드라마는 행복은 상처받지 않음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상처받음에도 기꺼이 그걸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 말한다. 사랑만이 아니다. 준영과 송아는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각자 포기하는 상처의 시간을 가졌다. 송아는 오랫동안 좋아했던 바이올린을 포기했고, 준영은 피아니스트로서 명예를 업그레이드시켜줄 콩쿨을 포기했다. 행복은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두 갈래 길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말하고 있다.

마치 그건 극중 등장한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와도 같다. 브람스 소나타의 부제는 '자유롭고 고독하게'라고 알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송아는 나레이션으로 덧붙인다. 실은 브람스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연주하라고 표기했다고. 같은 곡인데, 고독하게와 행복하게의 간극, 그건 '선택'이다, 결국. 아니면 고독이라고 보여지지만 실은 행복일 수도 있는 삶의 양면성에 대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아 사랑을 포기할 수도, 명망을 위해 콩쿨을 고집할 수도, 좋아했던 것이니 계속 부등켜 안고 갈 수도. 그 모든 주어진 선택지에서 송아와 준영은 보다 자신들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길을 택했다. 그 길이 앞으로 상처를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처받아도 기꺼이 그 상처를 감수하는 것이 자신들이 행복할 거라 생각하며. 상처라 생각하면 상처지만 행복이라 명명하면 행복이 되는 것들이라 드라마는 상처에 주춤거리는 청춘들에게 전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는 잔잔하고 느리게 흘러갔지만 그 어떤 청춘 드라마보다 '청춘의 고민'에 진진하고 열정적으로 천착했다. 젊음의 시간, 아니 젊음의 시간 만이 아니라 살아가며 늘 다가오는 '행복'에 대해, 그리고 그 삶의 행복을 추구하려 다가갈 때 다가오는 아픔들에 대해, 그리고 그런 삶의 고민들에 대해 두 주인공, 아니 두 주인공만이 아니라 극중 모든 인물들은 최선을 다해 고뇌하고, 성장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다 행복할 수 있는 길에 선다. 

by meditator 2020. 10. 21. 17:48

다바다바다'하고 시작되는 Un Homme et Une Femme, 1966년 개봉된 영화 <남과 여>의 메인 테마곡이 54년만에 다시 스크린 위에 울린다. 흑백의 화면이 펼쳐지고 젊은 아누크 에메와 장 루이스 트레티냥이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한가로운 파리의 거리를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누비고, 호젓한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메임 테마곡만으로도 연상되는 영화의 장면들, 하지만 그건 요양원의 노인 장-루이의 기억 속 한 장면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노인이 된 장-루이는 그가 알았던 모든 것을 잊어간다. 한때는 스포츠카를 몰았던 레이서지만 이젠 휠체어에 의지하여 하루 종일 요양원 마당에서 햇빛을 받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기다린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안느',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다. 

아들인 자신마저도 기억을 못하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앙트완(앙트완 사이어 분)은 아버지가 유일한 기억 안느를 수소문하여 찾아간다. 1966년 <남과 여>는 죽은 전남편을 잊지 못했던 안느가 떠나고 그녀를 잊지 못했던 장-루이가 그 유명한 기차역 360도 포옹을 하며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2020년 다시 돌아온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은 1966년 <남과 여>의 영화 밖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다시 찾은 옛사랑 
앙트완을 만난 안느,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앙트완의 부탁에 안느는 우리가 그리 좋게 헤어진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 어떻게 하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며 고민을 하다 기차역으로 달려간 로맨틱했던 영화와 달리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결국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안느를 못견딘 장-루이가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고 다니면서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안느의 입장에서는 장-루이에 대한 기억이 좋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 거리를 휘날리며 달리던 팔팔하던 레이서 장-루이가 죽음을 앞두고 기억마저 잃어간다는 처지에 안느는 연민을 느낀다. 다른 여자를 만나 자신과 헤어지게 되었는데 죽음을 앞둔 순간에 자신만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안느의 발걸음을 장-루이가 있는 요양원으로 향하게 만든다.

설레임을 가지고 장-루이 앞에 앉은 안느, 그런데 장-루이는 안느를 알아보지 못한다. 누구냐고 안느에게 물어본 장-루이는 그녀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안느에게 자신이 과거 사랑했던 '안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루이로부터 자신을 사랑했던 이야기를 듣는 '아이러니한 상황', 2020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의 '미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부터 발휘된다. 

자신만을 기억한다는 옛사랑, 하지만 정작 찾아가보니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옛사랑 앞에서 이제 자신조차도 나이가 들어 걸음걸이가 편안치 않은 안느는 돌아서지 않는다. 대신 장-루이의 맞은 편에 앉아 그의 늦은 사랑 고백을 듣는다.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를 찾았던 그가, 그랬던 이유가 여전히 자신이 벗어나지 못했던 전 남편이었음을, 그럼에도 이제 아들조차도 기억을 못하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장-루이의 '고해성사'를 안느는 편안한 미소를 띠고 들어준다. 

 

   

 

여전히 찬란한 
54년만에 다시 돌아온 <남과여>의 부제는 '여전히 찬란한'이다. 왜 여전히 찬란할까? 거기엔 '여전히 찬란한' 노년이 있기 때문이다. 

장-루이는 기억을 잃어간다. 사라져가는 뇌세포만큼 그에게 남은 날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 그가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건 '추억'이다. 1966년작 영화의 장면 장면이 그의 기억으로 되살아 난다. 자신을 찾아온 '안느'에게 요양원 탈출을 제안하는 장-루이, 잠시 후 그와 그녀는 그 예전처럼 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고, 바다를 향한다. 자신들을 가로막는 경찰에게 총을 쏘아가며, 혹은 총으로 위협하며, 그리고 깨어나면 여전히 요양원 마당이다. 

요양원 마당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장-루이의 웃픈 상황, 하지만 그런 장-루이에게 '안느'만큼이나 연민의 시선이 간다. 인생의 종착역, 과연 그 시간은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육신의 고통과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살아가는 나날들의 무기력으로 힘들어 한다. 하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시간이지만 장-루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으로 충만하다. 심지어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 앞에 앉아있지만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가장 뜨거웠던 순간의 기억으로 충만한 노인, 장-루이, 어쩌면 기억을 잃어가고 스스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찾기'가 아닐까. 그 무엇도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추억'은 그 마저도 잃어버리는 순간까지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니까. 안도현의 시 한 구절, '당신은 누구에게 얼마나 뜨거운 사람이었는가'가 떠올려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그라드는 그 순간에서도 여전히 '사랑'으로 충만한 그를 지켜봐주는 옛 연인 '안느'가 있다. 눈 앞의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으로 알아봐주지 못함에도 여전히 그를 찾아가, 매번 '사랑하는 여인과 참 닮았다'라는 말에 미소로 응답하며 그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들어주는 '안느'에게선 비로소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품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너그러운 안느의 아량은 이제 안느에게 씁쓸했던 지난 날의 기억을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으로 다시 채색할 것이다. 

한때 바닷가를 함께 누비던 장-루이와 안느, 하지만 이제 그 바닷가에는 그들을 만나게 해주었던 사립학교를 다니던 자녀 앙트완과 프랑스와즈가 서있다. 어렸던 앙트완과 프랑스와즈가 중년의 사랑을 나누게 될 만큼의 시간, 그 시간이 흘러 장-루이와 안느는 조우한다. 안느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뒤늦은 시간,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예전의 사랑으로 '연결'되고 오랫동안 풀렸던 인연의 끈을 다시 묶는다. 

사랑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까? 이런 '우문'에 과학은 3년이라던가 하는 '정답'을 내어놓는다. 하지만 그런 '과학'의 증거마저도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에서는 무기력하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죽어가는 순간에조차 가장 '충만한 기억'인 사랑에 대해 과학으로서는 더할 답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그 '충만한 기억'을 가진  것만으로도 인생은 참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닌가, 오후의 볕 아래에 앉아 '옛 사랑'의 추억을 나누는 두 '노인'들을 보며 다시 한번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by meditator 2020. 10. 21.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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