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방송 통신위원회는 올해의 방송 대상으로 ebs다큐 프라임 <인류세> 3부작을 선정했다. 260편이 넘는 응모작 중  '인류세라는 재난적 상황에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인간 역시 멸종을 피할 수 없다 사회적 메시지'가 대상 선정의 이유로 꼽았다.

<인류세 > 3부작은 이미 앞서 프랑스 스크리닝 마켓에서 20,000 개 이상 스크리닝 작품 중 가장 많이 본 9번 째 작품으로 뽑혔고, 바르셀로나 플래닛 영화제 사르라다파밀리아 상, 한국 기독 언론 대상 생명사랑 부문 최우수상, 미국 임팩트 다큐 어워즈 장편 다큐멘터리 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이에 ebs는 수상 기념으로 10월 5일부터 3부작을 다시 방영했다. 

그렇다면 용어조차 생소한 '인류세'란 무엇일까? 지구가 형성된 이후 현재까지의 단계인 '지질시대' 중 약 1만년 전 부터 현재까지를 '홀로세'로 구분한다. 2001년 화학자 파울 크루첸은 '인류가 화석 연료를 대규모로 사용하면서 그로 인해 배출된 온실 가스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가 시작되었음에 주목하여 '인류세'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즉, 공식적인 지질 시대명은 아니지만 너무도 강력해진 나머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지구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된 생물종, 인류가 지배하는 시대라는 개념이다. 3부작 특집 다큐멘터리 <인류세>는 '닭뼈', '플라스틱', '과잉 인구'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인간이 지구에 미친 영향을 풀어내고자 한다. 

 

   

 

인구 폭발, 붕인섬 
꾸르니 아완 안드레, 물고기 잡는 걸 좋아하는 14살 소년이다. 아직은 길어야 2분 정도 물 속에서 숨을 참고 작살질을 하는 소년은 한번 물에 들어가면 4~5분 숨을 참을 수 있는 어부인 아버지처럼 물고기를 잘 잡는 게 희망이다. 

안드레는 바자우 족이다. 1만 7천 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도서국가 인도네시아, 그곳에 사는 바자우 족은 원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바다의 집시들이다. 그런데, 2002년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가 놓이며 세상에 알려진 붕인 섬, 이곳 바자우 족들은 독특하게도 200여 명의 섬 주민에 정착 생활을 하고 있다. 다큐는 정작 생활을 하는 붕인 섬의 바자우족들을 통해 '인구 과밀'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고자 한다. 

다리를 통해 세상과 이어진 붕인 섬, 그 다리를 통해 세상의 문물 역시 붕인 섬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붕인 섬에는 쓰레기 통이 없다. 지금까지는 쓰레기가 생기면 키우는 염소들이 다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쓰레기라 봐야 대부분 먹고 남은 음식 쓰레기였으니 가능했다. 그런데 바깥 세상에서 비닐과 플라스틱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쓰레기통이 없는 붕인 섬에서 쓰고 버린 비닐과 쓰레기들이 점점 섬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섬 주변을 채우고도 남은 쓰레기는 바다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염소는 비닐을 먹고 병이 들기 시작했고, 바다에 둥둥 떠다디는 쓰레기로 인해 물고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화산 폭발로 이곳에 모여든 바자우 족은 이곳 붕인섬에서 살아가는 것을 자신들 삶의 숙명이라 여긴다. 그런데 처음 100 여 명에서 시작된 바자우 족은 해마다 늘어나 이제 4000 여 명에 이른다. 

왜 이렇게 인구가 늘어나고 있을까? 조절은 안되고 있는 것일까? 1년에 100 여 명의 신생아가 태어난다. 반면에 죽는 사람들은 34명 정도이다. 당연히 인구는 급격하게 늘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에서는 2명을 낳으라하지만, 그 정부의 정책이 사람들에게 '수용'되지 않는다. 여전히 많이 낳는 것이 바자우 족의 '관습'이다. 4명, 5명, 6명, 7명까지도 낳는다. 붕인 섬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습을 고집하는 한 인구는 더 늘어날 것이다. 

늘어나는 인구는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매년 서른 쌍 정도가 결혼하는 바자우 족, 새로 결혼하는 부부에게는 '새 집'이 필요하다. 하지만 새 집을 지을 땅이 부족한 바자우 족은 바다에서 죽은 산호를 캐내 집을 지을 '땅'을 넓힌다. 그리고 넓힌 산호 땅에는 육지에서 들여온 자재로 집을 짓는다. 해마다 새로 필요한 산호 땅을 위해 바다에서 산호를 캐내는 마지노이는 점점 더 깊은 바다로 향한다. 그의 보트 수 백대를 채워야 집 한 채가 만들어지는 붕인 섬의 집들, 바다가 섬을 감당해야 하는 '짐'이 그만큼 커지고 있다. 

어디 집을 짓는 산호 뿐인가. 육지의 사람들이 차를 가지듯 붕인 섬의 사람들은 차처럼 배를 가진다. 한 대는 기본, 재력에 따라 두 대, 세 대를 가지기도 한다. 늘어나는 배와 함께 어획량도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물고기 개체 수는 그대로이다. 늘어나는 배만큼 경쟁도 심해지고, 배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바다로 향한다. 바다는 위협당할 수 밖에 없다. 

마을 사람들은 생선은 매일 즐기지만 육지나 도회지의 사람들처럼 인스턴트나 육류를 즐기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친환경적일까? 붕인 섬에서는 채소가 나지 않는다. 키울 땅이 없다. 채소 뿐인가. 전기, 수도, 플라스틱 등의 공산품, 식료품 등 생활의 대부분을 섬 외부로 부터 조달한다. 재생 에너지? 붕인 섬 사람들은 재생 에너지가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 자동차와 비행기는 이용하지 않지만 붕인 섬 사람들처럼 살려면 2.7개의 지구가 필요하다. 

 

 

지구의 한 귀퉁이에 불과한 붕인 섬, 하지만 붕인 섬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곧 지구의 축약본이다. 지구를 1억 분의 1로 줄이면 붕인 섬이다. 아버지처럼 어부가 되고 싶은 안드레, 하지만 청년 정치가 티손 사하부딘은 붕인 섬의 어부는 조만간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안타까워한다. 물고기가 살기 좋은 환경을 위해 지난 10년간 노력했다. 그 결과 절반 가까이 훼손되었던 산호에 새 살이 돋는 중이다. 하지만 안드레가 느끼게 될 바다는 그 이전 세대가 느끼게 될 바다와는 다를 것이다. 

1950년대를 기점으로 에너지 사용과 기온 상승 오존 파괴 등 지구 시스템의 가파른 상승세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가속은 지구 시스템의 변화 비율을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밀어붙였고, ㄱ결국 지구 시스템은 홀로세의 안정적인 상태를 벗어났다. 그 결과 호주 들불과 같은 기후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더 이상 우리는 홀로세에 살고 있지 않다. '(책 <인류세>  중)

인류세, 인류가 소행성 충돌, 지각판 충돌처럼 지구의 지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붕인섬은 바로 인류세의 현장이다. 




by meditator 2020. 10. 10. 22:33

2020년 7월 10일부터 wave 오리지널을 통해 선공개되고 매주 금요일 mbc를 통해 방영되었던 시네마틱 드라마 SF8이 10월 9일 <인간 증명>을 끝으로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민규동 감독을 비롯하여 노덕, 이윤정, 한가람, 안국진, 오기환, 장철수, 김의석 감독까지 한국 영화 감독 조합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OTT) 웨이브의 조합으로 주목받았던 이 시리즈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의 대항마로서 야심찬 출발을 선언했지만, 첫 방송 <간호중>의 1.6%가 자체 최고 시청률로 1%도 못미치는 안타까운 성과를 보이며 조용히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기술 발전을 통해 완전한 사회를 꿈꾸는 인간들의 이야기란 모토 아래, 좀비에 이은 SF 장르에 대한 선도적 '도전'을 선언했던 SF8, 그러나 40분이란 짧은 시간에 펼쳐낸 영화 감독들의 포부는 '실험', 그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마지막 작품으로 선보인 김의석 감독의  <인간 증명>은 SF8이 시도한 실험 정신과 한계를 다시 한번 명확하게  보여준다. 

 

 

아들을 죽인 아들 
<인간 증명>은 <곡성>의 연출부를 거쳐, <죄많은 소녀>로 백상 예술대상, 대종상 신인 감독상을 휩쓴 김의석 감독의 작품으로 죽은 아들의 뇌와 결합된 안드로이드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고발한 엄마(문소리 분)의 이야기를 다룬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들(장유상 분), 엄마는 차마 그 아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과학의 도움을 얻어 아들을 회생시킨다. 아들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기쁨도 잠시, 어느날인가 부터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라 생각했던 안드로이드의 '눈이 비어있음'을 느낀다. 분명 모습은 자신의 아들인데 거기서 아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법정에 아들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를 세운다. 

엄마의 의심은 틀리지 않았다. 여전히 어머니의 아들이라 주장하던 안드로이드는 결국 변호사의 집요한 설득에 자신이 영인을 죽였음을 고백한다. 정확하게는 영인과의 뇌회로를 단절시켰다고. 그런데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안드로이드는 영인은 살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귀에 자신을 죽여달라 하던 그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주었다고 하는 안드로이드, 그리고 그렇게 살 의지가 없었던 영인과 달리 자신을 살고싶다는 삶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피력한다. 

여기서 문제는 과거로 회귀한다. 이 사건을 맡은 조사관은 이제 엄마에게 다시 묻는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교통 사고의 원인을. 엄마는 차량 문제로 인한 사고라고 하지만, 그 표정이 석연치 않다. 안드로이드는 영인을 대신해 말한다. 삶에 대한 오랜 고통과 고뇌를 거쳐 겨우 공포와도 같은 죽음의 터널을 지났는가 싶었는데, 한숨 자고 깨어난 듯 다시 삶에 던져진 고통에 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자를 엄마가 과학 기술의 도움을 얻어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선(善)'인가? 그게 아니면 엄마의 '과욕'인가? 그렇다면 세상에 머물고 싶지 않은 영인의 뇌와의 접속을 끊어, 다시 한번 영인에게 '자살 아닌 자살'을 방조한 안드로이드에게는 '살인'의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인가? 여전히 영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삶의 의지를 주장하는 안드로이드의 권리는? 

그렇게 <인간 증명>은 과학이 발달한 세상에서 인간에게 닥친 삶과 죽음의 딜레마를 '철학적' 화두로 묻는다. 

결국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과학의 도움을 얻었지만 다시 한번 아들을 잃게된 엄마는 뒤늦게 오열한다. 아들을 안드로이드로 만드는 바람에, 아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추모'할 시간조차 놓쳤음을. 

그런데 여전히 아들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는 남아있다. 결국 안드로이드를 법정에 세웠던 엄마는 아들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안드로이드는 묻는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엄마를 대했으면 좋겠냐고. 영인의 모습으로? 아니면 다른 모습으로? 하지만 영인과 같은 안드로이드의 모습을 견딜 수 없는 엄마는 안드로이드에게 기억 삭제와 '성형'을 권한다. 하지만 기억마저 자신의 정체성이라 주장하고. 아들은 갔지만 아들의 기억과 남겨진 모습 사이에 안드로이드와 엄마는 고뇌한다. 

 

 

아들인 줄 알았는데 아들과 연결된 뇌의 접속 장치를 차단하여 아들을 죽인 안드로이드, 이야기의 얼개는 신선하다. 엄마인 문소리와 아들 장유상의 연기도 절절하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금요일 밤 10시 공중파의 시청자들을 흡인하기에는 '난해'하다. 풀어가는 과정 역시 '죽음'과 '삶'에 대한 담론적 대사로 이어진다. 공중파 드라마가 가지는 '사건'보다는 두 모자 사이에서 이어진 '존재론적' 질문들이 채운 행간이 넓다. 의미는 있지만 대중적이지는 않다. 대부분의 SF8 작품들이 가진 한계다.  이렇게 '매니악'한 접근이라면 SF 장르에 대한 장벽을 낮추는 것조차 무리가 아닐까. 이미 '넷플릭스' 등을 통해 '담론적' 주제를 가졌음에도 재미와 대중성을 담보한 작품들에 눈이 높아진 시청자들에게 '실험적 양식'과 '난해한 주제 의식'만을 앞세운 이들 작품들이 호평을 떠난 관심을 받기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by meditator 2020. 10. 10.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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