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개봉한 <해무>가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장벽을 뚫고 6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는 1000만 관객의 기록을 수립하고도 여전히 파죽지세의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명량>과 전체 관람가의 <해적>의 흥행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작품성만을 믿고 연령제한가를 감수한 고진감래의 성취다. 

이런 <해무>의 성과는 같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던 <신의 한 수>나 <아저씨>에 비해서도 빨리 달성됐고, 자체 배급망을 가진 CJ와 롯데를 상대로 한 투자배급사 NEW의 고군분투의 결과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청소년 관람 불가의 영화로 이 정도 기록이라면 무난하게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을 거라 예상되지만, 극장 체인을 가지지 않은 뉴의 <해무>는 다른 영화들의 상영관 과점을 넘지 못하고, 상영관이 축소되는 처지에 있다. 보고 싶어도 마음 놓고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19금 스릴러 최고의 흥행작 <추적자>보다 2일 빠르게 100만 관객을 돌파했음에도 이 상태라면 200만 고지는 물론, 손익분기점은 언감생심이 될 수도 있다.

<해무>에서 선장 역할을 맡은 배우 김윤석이 이 영화를 두고 '용감한 선택'이라고 표현한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듯이, 심의 과정에서 15세 관람가 버전까지 마련했던 영화는 원래 작품이 하고자 했던 바를 포기하지 않고자 '19금'을 감수했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만난 사람들 중에는 <해무>가 보여준 선상 잔혹사를 이겨내지 못한 경우가 많다. 

또한, 그런 와중에서도 피어나는 선원 동식과 조선족 홍매(한예리 분) 두 남녀의 적나라한 사랑에 대한 호불호도 갈린다. 초반에 막내 선원 동식(박유천 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리고, 배에 도끼를 댔던 사람들이 해무가 드리워진 전진호 안에서 아비규환의 대립을 보이는 것에 대한 급격한 온도차에 대해서도 '영화적 완성도'를 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리얼리티'로서의 이야기를 넘어서, '묵직하게 은유의 그물을 치고 은밀하게 생각의 미끼를 던진다'는 영화 평론가 심영섭의 평처럼,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전진호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으로서 전진호 선원들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 <해무>는 달리보인다. 마치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소년과 함께 배를 탄 호랑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순간, 영화가 무궁무진한 철학적 담론의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해무>를 상징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영화의 묘미에 빠질 수 있다. 우선은 이 영화의 제작자가 봉준호 감독임을 전제로, 그가 <설국열차>를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적 계급 관계를 열차의 나뉜 칸을 통해 설명해 냈듯이, <해무>는 '바다로 간 <설국열차>'라고 해석하는 관객들이 있다. 선장 철주는 기성세대를 대변하고 그들의 질서를 옹호하는 지배 계급을 상징하며, 기관장이나 그의 결정에 호응하는 선원들은 기성 질서에 순응하는 사람들로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밀항을 하기 위해 올라탄 조선족들의 해석 또한 다른 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그 중 밀항의 와중에서도 책을 들여다보는 조선족 선생은 지식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선장이 난폭하게 밀항자들을 몰아붙일 때 가장 앞장서서 조선족들을 독려하여 어창으로 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상징되어진다는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진호를 '바다로 간 설국열차'로 해석하면, 동식의 사랑은 그저 사랑이 아니다. 돈과 권력에 순응하는 기성세대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젊은 세대의 열정이요, 순수함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전진호를 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장 철주를 향해 질주하는 동식은 또 한 사람의 꼬리칸 승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뭍으로 걸어 나온 동식과 홍매는 <설국열차> 마지막 장면 하얀 설원 위에 던져진 요나(고아성 분)의 '막막함'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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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회 계급적 관점에서 바라본 <해무>를 보다 폭넓게 신화적 영역으로 확장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신화 속 젊은이들이 아비 세대를 극복하기 위해 아비를 죽이는 '살부'의 형식적 과정을 건너듯이, 동식이의 사랑은 바로 그런 아비 세대를 극복하기 위한 서사적 형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배에 여신이 상징물로 담기고 여성의 이름을 붙이듯이, 신화적 상징으로 배는 여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아비 세대는 자신들의 여성인 전진호에 또 다른 여성 홍매 등이 타는 것을 불온한 징조로 여긴다. 그리고 당연히 젊은 세대는 아비 세대의 여성이 아닌 젊은 여성에게 매료되어 아비의 세계를 파괴한다. 

하지만 이는 파괴가 아닌, 탄생이다. 동식은 홍매의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이불 등을 들고 오면서 손에 사과 한 알을 함께 들고 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덴동산의 그 선악과를 상징하는 듯한 사과를 말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나누어 먹은 순간, 더 이상 그들에게 에덴동산이 낙원이 아니듯이, 사랑을 하게 된 동식과 홍매에게 아비 세대의 불온한 공간 전진호는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전진호를 파괴하고 아비들을 죽이지만, 오이디푸스가 그러했듯 동식이도 그 대가가 마냥 행복하지 않다. 낙원을 떠난 아담과 이브가 삶의 고난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듯, 동식과 홍매가 만난 건 현실이다. 결국 살부의 죄과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의 눈을 찌른 채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와, 홍매를 구하지만 그녀를 잃은 채 일용직 근로자가 되어 중국인 거리를 전전하는 동식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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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식과 홍매의 도발적 사랑은 마치 <금지된 장난>의 소년과 소녀와도 같다. 부모를 잃은 채 전쟁고아가 된 폴레트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종교적 금기를 어긴 소년의 행동은 홍매의 말 한 마디에 몰매를 맞는 조선족 밀항자를 몸으로 막아주는 동식의 맹목성으로 이어진다. 

완호 아제(문성근 분)의 죽음 이후 그들이 벌인 눈물의 정사는 사랑보다는 생존을 향한 절망 속의 몸부림에 가깝다.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잊고자 금지된 장난을 하는 어린 아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금지된 장난>의 어리고 나약한 폴레트와 미셸이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함께 할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듯이, 세상 속으로 나온 동식과 홍매는 무기력하게 진짜 세상에 휩쓸려 간다. 


묘하게도 <해무>는 첫 번째 관람할 때는 영화의 자극적 상황에 눈을 빼앗긴다면, 그런 상황을 한번 거르고 본 두 번째 이후의 관람에서는 영화 속 인물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을 사로잡는 장면은 바로 선장 철주의 마지막이다. 배를 살리기 위해 돛을 들어 올리던 그는 그 돛을 매놓은 밧줄에 발이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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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해무>를 본 다수의 관객들은 철주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상징으로서 공감했을 것이다. 철주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는 각각의 캐릭터로서의 인간 군상이다. 누군가는 집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돈을 위해, 혹은 누군가는 양심을 위해,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습성, 혹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위해, 그리고 사랑을 위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대다수의 그 핵심을 <해무>는 콕 찌른다. 

진짜 <해무>가 불편하다면, 그건 전진호 안에서 벌어진 조선족 몰살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잔혹하리만치 사실적으로 그려낸 인간 군상들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섬에 표류된 25명의 소년들이 보여준 적나라한 인간 본성 <파리 대왕>의 해상판 버전에 다름 아니다. 그런 진실을 직시하기가 불편한 것을 겉으로 드러난 잔인한 묘사로 면피하려고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객들이 내놓은 이러한 여러 해석 중 어느 것이 맞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영화 <해무>의 진짜 묘미다. 지금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고민,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사회,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삶에 따라, <해무>는 안개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래서 볼 때마다 다르다는 평도 눈에 띈다. 

물론 극장에 가서 꼭 심각한 영화를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올 한 해 너무나 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우리 사회의 속살을 지켜 본 우리들, 몇 번의 웃음으로 쉽게 잊거나, 맹목적인 지도자에 대한 향수로 그 모든 것들을 지워내는 대신, <해무>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의 미끼'를 던져보는 건 어떨지. 다시 한번 <해무>를 강추한다. 


(이 글은 디시 인사이드, 기타 드라마 갤러리, 하필시크미랑동 님의 <리뷰> 내가 본 해무는 IMF와 두 남자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였다 등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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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4.08.26 12:18

올 여름엔 '바다'를 보고 싶으면 극장에 갈 일이다. 

여름 극장가 4편 중 3편이 바다를 담았다. 그 중 <명량>은 날마다 기록을 갱신하며 천만 관객 몰이를 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해적>이 '의외로 재밌다'는 평을 받고 개봉했고, 다음 주면 올 기대작 중 마지막 영화 <해무>가 개봉할 예정이다. 이렇게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 세 편을 내리 보고 나면, 아마 올 여름도 지나갈 것이다. 

<명량>이 천만 관객을 추동하는 가장 중심적인 요건은 아마도, '명량 해전'을 통해 구현된,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순신의 전략적 성공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보듯이, 그에게 남겨진 단 열 두 척의 배, 그것도 그나마 믿었던 거북선마저 불타 없어져 버린 상황에서, 판옥선 열두 척을 가지고 330여척의 위용을 자랑하는 일본을 무참히 패배의 늪으로 빠뜨렸던 '승리'의 역사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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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사를 많이 알지 못했던 사람이라도 안다. 그렇게 '기적'을 만들었던 이순신이지만, 결국, 노량 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전사했다는 것을. 또한 전장에 나서면서, 투구를 벗고 나섰다는', 어쩌면 예정되었을 지도 모르는 죽음이,  이미 영화 <명량> 서막에서도 보여지듯이, 그를 질시하는 임금과 조정 관료들에 대한 그의 비감어린 마지막 선택이었으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역사적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명량>은 그런 후기를 담지 않는다. 오로지, 갖은 고문으로 옥고를 치루어 병을 얻고,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신위조차 모시지 못한 상황에서도, 백성에 대한 '의리'를 다하여 결국 성공하고 마는 지도자 이순신이 성공했던 '순간'을 그려내고, 사람들은 그에 환호한다. 

하지만, 그런 영웅을 거두고 본 <명량>의 바다는 비감하다. 
패전을 거듭하여, 단 열 두 척의 배만이 남은 상황에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의 수군은 '전멸'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았고, 그런 수군에 대해 중앙 정부는, 그나마 전력을 집중하기 위해 육지의 권율 부대로 합류할 것을 명령한다. 
날마다 전해지는 소식은, 일본에 의해 저질러지는 갖은 만행, 그 결과물로 돌아오는 건, 귀와 코가 베어진 채 죽은 자들의 머리들이다. 일본군은 누가 먼저 한양을 칠 것인가를 두고 내기를 하는 마당에, 갈 곳 없는 백성들은 하지만 믿을 자가 없다. 이순신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지만, 그가 바다에서 외선을 쓰러뜨리는 그 순간까지, 그 누구도 진정 이순신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파죽지세로 밀려들어오는 왜국의 파고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댈 곳 없는 현실의 비감한 바다는 시대를 달리 하지만, IMF의 파고를 맞은 <해무>의 바다와 그리 다르지 않다. 수리를 필요로 하는 낡은 배, 하지만 선주는 수리비를 주는 대신, 정부 방침이라며 '폐선'을 종용한다. 이름만 전진호일 뿐, 물때를 맞추지도 못한 채 항구로 돌아온 낡은 배와 거기에 몇 명의 선원이 있을 뿐이다. 몇 푼의 보상금으로, 지금까지 뱃놈으로 살아왔던 삶을, 그리고 미래를 날려버리라 한다. 온갖 서류를 내세워도 알량한 돈 몇 푼을 마련하기 힘들다. 하지만, 여전히 배에는 팔팔하던 그렇지 않던 사람 여섯 명이 있고, 그들의 인생이 있다.  IMF라는 소리없는 전쟁은 조용히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전사시켜 가는 중이다.단지 다르다면, 그런 현실의 비감함을 이순신은 '기적'을 통해 성공적으로 길어올렸고, <해무>는 한 치 앞을 모르는 바다 안개 속에, 배와 함께 뱃사람들의 삶도 방향을 잃는다. 

이순신은 현실의 비감함을 '두려움'이라 정의내린다. 
동료들이 모두 죽어, 자신도 죽을 게 뻔해 도망을 치려던 병사를, 두 말 할 것도 없이 처치해 버린다. 덕분에 사람들은 두려우면서도, 두려움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한다. 자신은 그런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하겠다고. 
물 때를 이용한 유리한 위치 선점, 그리고 거북선의 위용에 가려 그 능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바다에서 일본 배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가졌던 판옥선,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다 절묘한 시기에 발휘되는 기가 막힌 전술을 통해 이순신은 열 두 척, 아니 영화 속에서는 그들 역시 두려움에 떠는 백성에 불과했던 나머지 군장들의 판옥선들 앞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순신을 보고, 우리쪽 사람들은 두려움이 '용기'가 되어  쓰러져 가던 이순신의 배를 사람들의 힘으로 살려냈고, 일본군은 공포에 질려 앞다투어 도망을 치게 되었다. 

하지만 배를 살리기 위해 '밀항'이란 최후의 수단을 선택하는 운명적 리더, 자신이 이 배에선 선장이고, 아버지고, 책임자라며 소리를 높이는 철주와, 죽기를 각오하고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았다며' 싸움에 나서는 이순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래서 무척이나 다른 듯 닮았다. 
해전이 성공을 거둔 후, 한적한 길을 여유롭게 거닐며 아들은 아비에게 묻는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섰던 그 전투의 승패가 갈리던 그 순간이 미리 대비해 두었던 것이냐고. 그에 이순신은 담담하게 말한다. 천우신조라고. 즉, 그에게 명량의 회오리 물때를 대비한 전술은 있었지만, 그래도 300여 척이 넘는 역부족의 외선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결국 '두려움이 용기가 되어,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기적이었다. 

덕분에 <명량>에서 리더 이순신의 행간을 채우는 것은, 그런 리더의 고뇌어린 선택에 따라, 때론 방황하고, 저항하며,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며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리가 국제 경기에서 종종 마무쳤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헝그리 정신'과 묘하게도 일치한다. 적진에 첩자로 나갔던 젊은 남편은, 죽어가면서도 아내에게 치마를 휘둘러 자신이 탄 배가 화약고임을 알리게 했고, 주줌거리던 무장들도, 지켜보던 백성들도, 그리고 아비를 잃은 아들들도 신들린 듯, '용기'를 낸다. 어쩌면 이순신이 말했듯이, 기대했지만, 우연이고, 기적이고, 그 기적의 실체는 사실 리더가 아니라,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런데, <명량>을 통해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이 비감한 현실에서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용기를 줄 헌신적인 리더이다. 정작 명량 바다에서, 배를 젓고, 배에 기어오르는 적들과 뒤엉켜 싸우고, 쓰러지는 배를 세운 사람들은, 백성 자신들인데, 그런 자신들을 그렇게 이끌어준 이순신에 환호한다. 즉, 열패감에 사로잡혀 현실을 견디기 힘든 자신을 다시 한번 '헝그리 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독려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구도의 심정이요, 그런 영화를 통해 쏟아지는 환호는, 우리가 매번 선거 등을 통해 확인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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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메시아적 열망을 대변하는 <명량>과 달리, <해무>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구원을 약속하는 메시아는 멀고, 현실의 리더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리 넓지 않으며, 그 조차도 여의치 않다. 선장이 안겨 준 돈을 받고 뿔뿔이 흩어지는 선원들처럼, 부당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듯한 이익은 결국 신기루라는 걸 확인시켜 줄 뿐이다. '환타지'로서의 <명량>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메시아적인 리더와, 그를 따라 기적을 만들었던 역사가, 현실로 내려 앉으면, 사실 이렇다는 걸 <해무>는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당신이 선택한 리더가 철주요, 당신 역시 전진호 선원 중 누구 하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족과 같은 선원들을 저버리고 '사랑'을 선택했던 동식의 선택조차 결말을 알 길 없다. 그리하여, <명량>에 이어, <해적>을 걸르고, 뒤이어 개봉하는 <해무>에 대한 대중의 판단이 더더욱 궁금하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기적을 구원하는 대중의 열망이, 현실 속 자신들의 모습을 안개 속에서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전진호 선원들의 선택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기적처럼 현실의 삶을 구원해줄 거라 믿었던 리더가 선택한 묘수가, 밀항과 같은 무리수이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이 나라를 구원해 주리라 믿으며 젖는 노와, 휘두르는 칼날과도 같은 선택이, 해무 속에 오리무중 갈 길을 잃은 욕망을 향한 몸짓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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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4.08.07 18:27

묘하다. 

마치 사귀던 애인에게 느닷없이 이별 선언을 들은 것과 같다. 달콤한 데이트를 기대하며 나갔던 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친 이별 선언, 처음엔 이게 뭐지? 얼떨떨하다가,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이별의 아픔이 치고 올라오듯이, 영화가 암전된 후, 극장을 벗어나는 거리가 멀어지고, 시간이 흐를 수록, 전진호와, 거기에 올라탄 여섯 선원들이 가슴으로 스며 들어온다. 

영화 <해무>에서 전진호는 IMF의 파고 속에 헐떡인다. 이제는 폐기될 고물처럼 여겨지는 배, 그리고 한때는 여주 다방가에 짜한 소문을 내던 돈 잘 쓰는 선장이었지만, 이제는 온갖 서류를 들이대봐도 돈 몇 푼 꾸기도 힘든 처지의 선장 철주, 하지만 여전히 그에겐 포기할 수 없는 배와, 그를 포함한 여섯 선원이 있다. 

그래서 '돌아갈 집'이 없는, 철주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집', 배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믿고 따라오는 '가족같은' 선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독단적으로 물고기 대신 사람을 낚기로 한다. 하지만 처음 해본 '밀항'을 낡은 배는 소화할 수 없었고, 배에 들이친 해무처럼 여섯 선원들은 한 치 앞을 모르는 운명 속에 휘말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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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의 쇼케이스에서 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심성보 감독은 뜻하지 않은 상황 속에 놓인 여섯 선원들의 서로 다른 인간적 선택을 주목해 주셨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 그대로, 여섯 명의 인간들은, 뜻하지 않게 그들에게 닥친 상황 속에서,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하지만 그래서,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선택을 한다. 

올해 들어 유난히도,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그 중에서도, <명량>, <바다로 간 해적>, 그리고 <해무>까지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런데 그 중에서, 현재의 우리 사회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을 고르라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해무>다.  

영화 속 '전진호'는 그 살기 힘들었다던 IMF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제 오늘을 사는 누군가는 말한다. 차라리 그때는 견딜만 했다고. 그렇게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들던 IMF 시절에, 선장 철주는, 이제는 한물갔다고, 그래서 보상금이라도 받으라는 낡은 어선을 고집한다. 그의 모습은, IMF 때 한참 우리 사회에서 화자되었던, 바로 그 '무기력한 아버지'상을 다시 한번 재연한다. 이제는 사회적으로 무기력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살아왔던 인생을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 세대가 바로 철주다.
그래도 아버지 철주는 어떻게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책임지려고 마지막 까지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이가 든, 기관장 완호에게 가면, 인생은 처참하다. 배에 등록된 선원 명부에도 올라갈 수 없이, 숨어 살아햐 하는 그의 인생의 내력은 그의 허물어진 표정만으로도 짐작 가능하다. 70년대 문학에서 만났던, 산업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채, 몇 켤레의 구두를 남긴 채 사라졌던 인물이, <해무> 속 완호 아재로 버티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래도 전진호에 기대 안간힘을 쓰며 붙들던 그의 삶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진짜 무너져 버린다. 
선장이 '밀항' 흥정을 하는 동안 밖에서 지키고 섰던,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선장이 '밀항'을 하라면, '밀항'을 하고, 그보다 더한 일을 시키면, 더한 일도 해치우는 호영,  또한 자기 자식을 거느리고 살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우직한 어느 집안 가장의 현현이다. 

그렇게, 허물어져 가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던 아버지 세대와 함께, 그보다 젊은 경구, 창욱, 동식이 있다. 
<해무> 속에서 그들이 어우러지고, 엉클어지는 사건의 중심에, '성'과 '여자'가 놓인 것은, IMF를 이끌던 세대의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장치이다. 약삭빠르게 자기 것은 챙기려는 경구와, 그 누구보다 욕망의 화신같지만 정작 뒷북만 치는 창욱도, 그리고, 첫 눈에 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던 동식은, 아버지 이후 세대, 젊음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세대, 서로 다른 삶의 이유를 가진 여섯 명의 선원들의 처음은 '가족'과도 같았다. 동식이 해온 음식을 놓고 술잔을 기울이고, 함께 온기를 나누고, 모처럼 만난 병어 떼를 동식이의 다리와 맞바꾸어도 '다행'이라며 동식이를 다독일 줄 아는 가족이었다. '밀항자'를 처리해야 하는 과정에서도 '해양고' 출신이 이럴 때도 통하냐며 이기죽거리면서도 막내는 접어주려던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 '가족'은 그들이 살기 위한 이기적 선택의 풍랑 속에 해체되고, 무너져 간다. IMF 때이후로 끊임없이 해체되어 가는 우리 사회처럼. 
같은 하지만 다른 뉘앙스의 조선족을 '상품'으로 여기며, 그들을 다루는 철주, 그들의 저항에, 그들이 이 살기 힘든 세상에 내 밥그릇을 빼앗아 먹는 '것'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경구, 그리고, 묵묵히 그들을 '상품'답게 뒤탈없이 처리하려는 전진호 선원들의 행태는, 완호의 정신적 아노미가 일탈처럼 여겨질 정도로, 우리 사회의 냉혹한 '민족 이기주의'를 복사한다. 
그리고 그런 '민족적' 이기주의는 상황에 따라, 완호 아재마저 거추장스러워지고, 그가 사라지자, 그의 돈과 물건을 챙기는, '나 하나의', 이기주의로 자연스레 넘어간다. 그렇게 경계를 넘어선 인간다움은 끝을 모른 채 추락해 간다. 
영화 속 그들은 뜻하지 않은 운명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전진호와 함께, 혹은 따로 운명이 갈리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그들은 이 시대을 사는 우리들의 선택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아직, '인간적'이라고 믿고, 우리가 탄 이 배가, 아직 침몰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을 뿐,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닻을 포기하지 못한 선장 철주처럼, 우리도 우리의 가슴께까지 차오른 물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인간 군상의 극단적 선택들 속에서, 맹목적인 동식의 '사랑'은 그래서 더 대비된다. 사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가이내 내꺼'라는 창욱과, 내 목숨을 다해 너를 지켜주겠다는 동식의 사랑 사이에, 욕망과 순정의 지수를 논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홍매를 만난 처음 순간부터, 마지막 6년 후까지, 포기할 줄 모르고 자신을 던진 동식의 사랑은, '욕망' 그 이상의 '연민'을 남긴다. 덕분에, <해무>제작 발표회 이후 계속 풍문으로 떠돌던, 홍매와 동식의 베드신은, 아마도 우리 영화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사랑' 그 이상의 공감을 나누는 교감의 나누는 씬으로 회자될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이 몸을 나누는 그 순간의, 절망과, 두려움과, 슬픔,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삶에 대한 갈구의 정서가 '정사'를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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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 화법을 두고 논하자면, <해무>에 대해 각자의 의견이 갈릴 수도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동안의 영화적 기법에 익숙한 누군가는, 좀 더 스릴있게, 좀 더 서스펜스가 강하게, 좀 더 하나, 하나의 캐릭터를 진하게 라는 아쉬움을 피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처음에 서두를 띄웠듯이 묘하다. 어쩐지 아쉽다고 했던, 그런 것들이, 영화가 끝난 후, 묘하게, '인간적 조심스러움'이나 '존중'처럼 남는다. 그들은, 좀 더 '극악'해질 수 있었지만, 여전히 한 자락, 인간이기에, 라는 연민을 위해, 어쩌면, 그 미진함이, <해무> 전진호의 여섯 선원에 대한 기억을 당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오래 저장시키도록 만드는 건, 김윤석, 박유천, 김상호, 이희준, 유승목, 문성근, 진짜 전진호에 있을 것만 같은 여섯 배우들이다. 결국은 '악의 화신'같은 폭발적 연기력을 보이면서도, 스러져가는 아버지 세대의 허망함을 놓치지 않는 김윤석의 카리스마도, 오랜만에 돌아와 그림자처럼 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고 하지만, 그의 표정 하나만으로도 연민이 울컥 솟아오르게 하는 문성근도, 끝까지 '욕망'에 충실한데, 그게 결코 미워지지 않는 이희준의 창욱에 대한 훌륭한 해석도,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갑판장의 우직함이 드러나는 김상호의 뚝심도, 이제야 유승목이라는 배우가 있었구나 깨달음을 주는 경구 역의 유승목도, 그리고, 그의 사랑이 안쓰럽게 못해 미어지게 만드는 동식 역의 박유천까지, 좋은 배우들의 진솔한 연기의 향연으로 <해무>는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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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4.07.28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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