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글자 그대로 아이들이 읽은 이야기 책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동화' 앞에 '잔혹'이란 수식어가 붙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로 알려진 그림 형제의 전래 동화집, 지금은 좀 덜해졌지만 예전에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이 목차의 동화책들이 구비되어 있는 동화전집이 아이들의 서가를 채우곤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동화였던 이 이야기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보고'가 등장하며,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잔혹'한 일면을 숨기고 있다는 '잔혹 동화'로서의 버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니 애초에 행복하게 살았더래요라는 결론의 주술에 눈이 어두워져서 헐리웃을 중심으로 환타지 버전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들 잔혹 동화 버전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름다움을 질시하여 의붓 딸을 죽이려는 등의 끔찍한 설정은 굳이 버전을 운운하지 않아도 잔인한 설정들이다. 실제 언어학자였던 그림 형제는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보다 전해내려온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으며, 기독교 신자로 때론 채록을 하다 분노를 했을 지언정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불문하고, 그리고 나라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매료시킨 이들 동화의 요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건 가장 날것의 '욕망'이 아니었을까? 바로 이 욕망의 서사를 솔직하게 24일 개봉한 <테일 오브 테일즈>가 재연한다. 

욕망의 서사, 그 속살을 드러내다 
이탈리아 시인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설화집 <테일 오브 테일즈Lo cunto de li cunti >를 영화화한 <테일 오브 테일즈>는 말 그대로 '이야기의 이야기'인 셈이다. 나폴리 방언으로 씌여지는 바람에 200년 동안 묻혀 있던 이 책은 하지만 세상에 알려진 후 그림형제, 안데르센, j,r톨킨 등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들의 원형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형'의 속살을 감독 마테오 가로네가 가감없이 드러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에서는 그렇다. 착하지만 가난한 노파는 우연히 샘물을 마시고 영원한 젊음을 얻은 후 왕비가 되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오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던 왕비는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아이를 낳아 아이와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괴물에 납치되었던 공주는 멋진 기사의 도움으로 괴물을 물리치고 그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테일 오브 테일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해피엔딩'의 신화를 무참히 깨부순다. 세 가지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시작은 아이를 갖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롱트렐리스 여왕(셀마 헤이엑 분)이다. 그녀를 사랑한 왕은 그들을 찾아온 정체모를 검은 두건을 쓴 마법사의 말을 따라 바닷속에 잠자는 괴물을 사냥한다. 사냥 과정에서 괴물의 목숨을 담보한 댓가로 '왕'이 죽고, 아랑곳없이 심장을 아귀아귀 먹어댄 왕비는 단 하루 만에 왕자를 생산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작한다. 바다괴물 심장의 기를 받은 사람은 왕비 단 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요리를 한 처녀 역시 왕비와 같은 날, 왕비가 낳은 아이와 쌍둥이라 해도 믿을 똑닮은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또 다른 욕망의 서사는 또 다른 왕국이다. 바다 괴물을 잡으러 갔다 죽음을 당한 왕의 장례식에서 조차도 여색에 빠져있던 스트롱클리프(뱅상 카셀 분) 왕의 왕국, 난잡한 주연에 빠져있던 왕의 귀에 지상의 것이 아닌 듯한 고아한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를 찾아 하던 식으로 추파를 던진 왕, 그 추파의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천사의 목소리를 지닌 염색쟁이 노파 자매였다. 오랫동안 갇혀 지내다시피 하며 염색을 하며 살던 언니 도라는 왕이 던진 추파를 기회로 잡고 '인생 역전'의 기회로 노린다. 

마지막을 여는 건 황량한 허허벌판 그 중 한 봉우리에 우뚝 솟아있는 외딴 왕국, 그 왕과 공주의 이야기다. 공주의 연주에도 아랑곳없이 벼룩잡기 놀이에 빠져있던 왕은 결국 벼룩잡기를 벼룩 키우기 취미로 전이시키고, 그 벼룩놀이의 결과는 예상치못하게 괴물에게 공주를 넘겨주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번갈아 진행되는 세 이야기 속 욕망을 추동하는 건, 자손과 생식, 사랑과 결혼, 젊음과 우정 등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 정서들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이런 요소들이 그 '만족'을 위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나타나는 '잔혹한 부작용'들을 영화는 솔직하게 드러낸다. 모성이란 이름의 내 자식만을 위한 끔찍한 집착, 사랑이란 이름으로 씌여지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추악한 욕정과 그 욕정에 화답하는 또 다른 욕망, 그리고 노년의 나이에도 견뎌낼 수 없는 욕망의 사다리.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욕망과 욕망의 결과물들까지. 

욕망을 에스컬레이팅하는 권력
하지만 <테일 오브 테일즈>를 그저 '욕망'에만 방점을 찍으면 설명이 부족하다. 그들이 그렇게 부조리한 욕망을 분출하는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중세로 여겨지는 시대의, 서로 다른 지정학적 조건을 가진 세 왕국, 그리고 서로 다른 세 명의 통치자들, 하지만 영화 속 그들 누구도 한 왕국의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이 가진 권력은 그들이 뿜어내는 욕망의 '에스컬레이팅(escalating)' 도구이다. 스트롱클리프 왕은 자신이 왕임을 강권하며 노파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그러다 하룻밤을 보낸 여인이 추한 늙은이인 것을 확인하자 담박에 창밖으로 던져버릴 것을 명령한다. 이런 식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오로지 자신의 자신의 욕망과 집착과 재미를 위해 쓴다. 



그러나 그 왜곡된 욕망이 낳은 결과물은 초라하다. 집착도, 사랑도 , 그 어느 것도 그들이 결국 손에 쥔 것은 없다. 아픈 하이힐스 왕을 치료하는 명목으로 그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처럼, 그 욕망에 빨릴 뿐이다. 욕망으로 치달았던 당사자들은 사라지거나 물러나고, 그 속에서도 약속을 지키고 신의를 지켰던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것, 어쩌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읽었던 전래 동화가 미처 말해주지 못했던 진짜 해피엔딩일 것이다. 
by meditator 2016. 12. 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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