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알렌 감독의 영화 <블루 재스민>의 여주인공 재스민(케이트 블란쳇 분)의 본명은 자넷이다. 하지만 자넷은 평범한 이름 대신 분위기있는 재스민이란 이름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학시절 해오던 학업을 포기하고 잘 나가던 사업가 '할'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 자넷이 재스민으로 살아가는 그 시점을 재스민이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가진 것 없는 빈털털이가 된 재스민이 가장 먼저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마음을 먹은 것 중 하나는 바로, 대학 시절 못다한 학업을 다시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못다한 학업은 그저 배움의 과정이 아니다. 재스민으로 자신을 포장하며 살았던 자넷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스스로 설 수 있는 어떤 계기를 상징한다. 물론, 영화 제목이 블루인 것처럼,(영어의 blue는 우울한, 등의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자넷은 재스민으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지 못한다. 

'주군의 태양' 방송화면
(사진; 텐아시아)

<주군의 태양>에서, 이제 더 이상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게된 태공실 역시  가장 먼저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의 대학은 <블루 재스민>의 대학과 동일한 상징성을 띤다. 주군의 캔디가 아닌, 귀신에게 쫓겨다니다 사회에서 밀려나간 백수가 아닌, 태공실 자신으로 서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론, 태공실은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대신 사랑을 위해 맺은 계약을 지키기 위해 공동 묘지를 헤맨다. 

물론 마지막 한 회가 남았지만, 그리고 그 남은 한 회가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크게 위배할 것 같아보이지는 않지만, 엔딩의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주군의 태양>은 강력한 '안티 캔디'물이다. '사랑지상주의'여야 하는 로맨틱 멜로 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내내, 객관적으로 캔디로 규정될 수 태공실의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고뇌로 가득차있다. 10월2일의 마지막 한 회를 남긴, <주군의 태양>은  언뜻 보기엔 태공실의 말 대로, 주군과 태공실의 밀땅처럼 보이지만, 실은 캔디가 되고 싶지 않은, 캔디에 머무르고 싶지 않은 태공실의 몸부림으로 한 회를 채운다. 

물론 계기는 자신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군이 죽음으로 몰리게 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여느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이라면, 주군이 내가 괜찮다, 그래도 널 사랑한다 하면 그래 나도 그래 하고 해결될 이야기를 <주군의 태양>은 한번 더 질문을 던진다. 
유진우(이천희 분)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태공실과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과, 주군처럼 같은 바라보지 않지만 그것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란, 설정은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태공실은 그 기로에서, 질문을 자신에게 향한다. 주군을 사랑하지만,그를 반공호로 쓰는, 그에게 기대야 하는, 여전히 귀신들에게 휘돌리는 자신 정체를 고민하는 것이다. 외면하다 결국 간청하는 아기 귀신에 못이겨 그 아이 엄마의 목숨을 구해주고 절규하는 태공실은 절실하다. 이런 자신이 싫다고! 당신을 반공호로 쓰는 자신이 미덥지 않다고. 

<블루 재스민>의 재스민이 된 자넷은, 동생 집에 얹혀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보려 애쓴다. 공부도 다시 해보려고 하고, 돈도 벌려고 하고, 하지만, 그녀에게 쉬운 길은 언제나 그랬듯, '캔디'가 되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너무도 자연스레 거짓을 도배한다. 
하지만 <주군의 태양>의 태공실은 재스민과 다른 선택을 한다. 지루한 논리 대결과도 같았던 16회 주군과의 실랑이 속에서 태공실은 확고하게 자신을 선택한다. 이기적이 되겠다고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러브 스토리'는 상대방이 어떤 조건에 있어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화합'의 정신을 구가했다. 하지만, <주군의 태양>은 그런 류의 사랑에 반기를 든다. 태공실은 당당하게 말한다. 내가 중요하다고. 이제는 더 이상 귀신을 무서워하지도 않지만, 심지어 귀신을 도와주는데 익숙해지기까지 했지만, 태공실은 과감하게 그런 외적으로 씌워진 자신의 운명에 도전한다. 사랑도 내가 당당히 설 때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홍자매의 작품들은 늘 인기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젊은 여성층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홍정은, 홍미란 자매의 작품 속 러브 스토리는 그저 사랑을 쟁취하는 것으로 완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군의 태양>도 마찬가지다. 태공실에게 주어진 귀신을 보는 운명과, 그런 두려움을 피해갈 수 있는 반공호로써의 주군은, 마치 2013년의 거친 세파와, 거기서 도피할 수 있는 사랑으로 치환되어도 크게 어색함이 없이 상징적이다. 취직이 힘들어 취집을 고민하는 시대, 젊은이들의 고뇌를 고스란히 담았다. 

이제 다시 <블루 재스민>으로 돌아와서, 거짓을 해서라도, 백마 탄 왕자를 만나고 싶었던, 보기엔는 그럴듯했던 재스민의 자넷에게 돌아온 것은 처절한 현실이다. 그녀는 전 남편에게도 버림받은, 희생자연했지만 알고보니 전 남편의 불안한 부를 파괴한 장본인인, 이젠 동생 집에서도 조차 더 이상 머물기 힘든, 그저 다시 한번 버림받은 별볼 일 없는 여자라는. 그토록 우아한 재스민이 되고 싶었지만, 우아함은 남자를 선택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냉정한 결론을 영화는 가감없이 보여준다.
다행히도, 태공실은, 주군 곁에서 주군의 도움으로 빛나는 대신에, 스스로의 길을 선택했다. 설사 그것이 태양으로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결과가 되더라도. 그저 어떻게든 주군의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의탁하려던 태공실에게는 장족의 발전이다. 주군과 태공실의 사랑이 블루일지, 핑크일 지는 모르겠지만, 운명에 떨던 태공실은 이제 더 이상 없다. <주군의 태양>을 통해 홍자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16회를 통해 이미 완결되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사랑도 당신이 스스로 빛날 때만 가능한 거야! 


by meditator 2013. 10. 3. 10:03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는 캔버스에 담배 파이프를 떠억하니 그려놓고는 이런 제목을 붙인다. 
그런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분면 쇼핑몰 사장 주중원(소지섭 분)과 일개 여직원 태공실(공효진)의 연애 이야기 임에도, <주군의 태양>은 끊임없이 말한다. 이것은 캔디가 아니다. 이것은 캔디물이 아니다. 라고. 

그림의 존재에 대해 회의와 질문을 하던 시대에 그림을 그린 르네 마그리트는 뻔한 담배 파이프를 통해 본질에 다가간다. 내가 파이프를 그렸는데, 이게 파이프인가? 실제로 들고 필 수도 없는 그저 보여지는 이 형상을 파아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림을 통해 표현되는 것들은 무엇인가?


<주군의 태양>도 마찬가지다. 
주군이 맘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태공실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바로 '캔디의 딜레마'이다. 말로는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하지만, 울 상황이 되면, 어딘선가, 안소니가, 혹은 테리우스가 나타가 그녀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캔디와 자신은 처지가 다르다고, 달라야 한다고 태공실은 말한다. 심지어, 주군과 태양은 사랑의 밀담을 나누는 대신, 캔디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으로, 태공실의 존재 이유와, 주군의 필요성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 까지 한다. 하지만 어쩌랴, 엎어치건 메치건, 현실은 주군과 태공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고, 주군이 쇼핑몰 사장이고, 태공실이 여직원인 한에서 그들은 캔디와 그녀를 사랑하는 가진 남자일 뿐인 것을. 

르네 마그리트가 단순한 그림 한 장을 통해 그림의 존재 이유, 나아가 사물의 이름값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듯, 홍정은, 홍미란 자매(이하 홍자매)들은 <주군의 태양>을 통해 흔히 그려지는 우리나라의 캔디물 러브 스토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쇼핑물 사장과 여직원의 사랑을 그려놓고, 이건 캔디물일까? 캔디물이 아닐까? 그렇다면 캔디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라고. 


처음 이 땅에 [들장미 소녀 캔디]라는 만화가 소개 되어, 텔레비젼 만화로도 방영이 되고, 책으로도 나왔을 때 많은 소녀들은 열광했다. 별로 이쁘지도 않은 소녀 캔디를 왕자님같은 안소니와 멋진 남자 테리우스 두 사람 모두 자기 목숨처럼 사랑해 주는 이야기에. 그래서 로맨스 소설을 읽을 나이의 소녀들조차 수업 시간마저 참지 못한 채 책상 아래에 캔디를 숨겨 읽다 선생님께 들켜 책을 빼앗기는 봉변을 당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좀 깨이기 시작하면서, 주체적 여성상이 부각되면서, 캔디는 멋진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사랑스러운 소녀가 아니라.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남자들의 사랑에 의지한 민폐녀로 캐릭터가 변모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주군의 태양> 속 캔디는 사랑스러운 만화 속 여주인공이 아니다.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멋진 사장님에게 '사랑'으로 들러붙는 민폐녀의 상징처럼 쓰인다. 그래서, 태공실은 그런 민폐녀가 되기를 질색하며, 주중원에 대한 사랑을 숨기려 애쓴다. 텔레비젼을 보는 우리도 알고, 드라마 속 주변 인물도 다 아는 사랑을 태공실만이 하늘의 태양을 두 손으로 가리듯 사랑이 아니라고 필요에 의한 거라고 아득바득 우긴다. 아니 우기려 애쓴다. 

홍자매는 애초에 태공실은 아주 노골적으로 주중원에게 들러붙는 여자로 그려낸다. 하지만 단지 이유가 다르다. 귀신을 보는 태공실이, 그녀의 앞에 들이대는 귀신을 사라지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주군이기 때문에, 태공실은 살기 위해서 주군을 붙잡고 늘어진다. 주군이 장담하듯이, 어떤 면박을 줘도, '꺼져'라고 몇 십번을 외쳐도, 주군이 '방공호'인 한 태공실은 주군을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그래서 태공실은 당당하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귀신을 쫗아주는 주군은 괜찮고, 사랑을 하는 주군은 안되는가? 라는 딜레마이다. 
이것을 통해 홍자매는 질문을 한다.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가진 남자의 사랑을 받는 캔디가 정말 민폐녀야? 라고. 

그리고 하나의 담론이 더 등장한다. 바로 늑대와 염소 이야기. 
늑대는 염소를 잡아 먹는 천적인데, 바로 그 늑대와 염소가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동화, 동화 속 염소는 늑대를 사랑해, 자신을 잡아 먹으라고 말한다. 그런 염소에게 늑대는 그럴 수 없다고, 
아직 드라마 속에서 동화의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고모의 말처럼, 결국 더 사랑하는 사람이 희생을 하게 된다. 12일 <주군의 태양>의 주중원처럼. 태공실을 향해 날아오는 드라이버를 몸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마치 그 예전 테리우스가 몸을 날려 캔디를 구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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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는 말귀를 못알아먹는 태공실에게 글을 못읽는 주군을 그냥 놔두라고 한다. 공소 시효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냥 지금처럼 살게 놔두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태공실을 만난 주중원은 김귀도의 말처럼 자꾸 달라진다. 차이령의 죽음 이래로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닫고 모든 것을 사업적 이해 타산 관계로만 판단하던 주군이 조금씩 사람같아 지는 것이다. 귀신이 되어서도 태공실 앞에 나타나 '사랑해'라고 고백할 정도로 그 모든 것은 '태공실을 향한 사랑'때문이다. 난독증을 해결한 건 태공실을 향한 사랑이다. 

캔디는 민폐녀일까?
가진 것이 많은 것과 적은 것으로 사랑의 역학 관계를 설명해서는 안돼지 않을까, 사랑은 늑대와 염소 같은 거 아닐까, 서로 잡아 먹어야 될 처지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거,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성장시키는 거. 늑대는 그저 염소나 잡아먹는 동물이었지만, 염소를 사랑하는 늑대는 더 이상 늑대가 아니듯이. 사랑을 통해 변화되고 달라지는 주중원을 그저 더 가진 자라고, 그런 주중원을 변화시키는 태공실을 민폐녀 캔디라고  말할 수 없지 않냐고 홍자매는 반문하는 중이다. 

홍자매의 작품들은 '프리티 우먼'처럼 뻔한 통속적 러브 스토리의 틀을 늘 가지고 있다. 재벌이 가난한 여주인공을 만나고, 최고의 스타가 무명의 여배우를 사랑하고, 선생님이 제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뻔함 속에서 부지런히 홍자매 작가들은 세속적 평가로 재단되어 지는 생각들에 대한 자신만의 담론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아마도 <주군의 태양>의 담론은 태공실과 주중원으로 하여금 설전을 벌이게 하는 바로 그 '캔디'의 딜레마'일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 태이령이 늘 내거는 샐러리맨과 사업가라는 명목상 선택의 기로와도 통한다. 
그걸 통해 사실은 그저 '사랑'일 뿐일 그것들을 세속적 잣대로 억지로 얽어매고 있는 건 아닌가 라고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9. 13. 10:19

예전에는 그랬었다.

그저 여름이면 납량 특집 <전설의 고향>정도는 봐줘야 하고, 거기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사연이 억울하건 어떻건 결국에는 귀신의 본연에 충실해, '내 다리 내놔~~' 정도의 대사에, 공중 뒤집기 두 바퀴 정도는 여유있게 해내는 능력치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사람사는 세상이 하도 그악해진 탓일까. 이젠 사람보다 못한 귀신이 귀신이랍시고 텔레비젼을 메운다. 

엄마가 귀신이 됐는데 왜 슬프지?
<드라마 스페셜-엄마의 섬>의 엄마(김용림 분)에게는 네 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다. 하지만 네 명이나 되면 뭐하랴. 
드라마 초반 엄마를 만나러 온 둘째 아들 역의 유오성은 꽃무늬 장화를 엄마에게 드리며 '이런 이쁜 장화 하나는 신어주어야 한다'며 온갖 설레발을 떤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나머지 형제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둘째 아들은 칼만 들지 않았을 뿐, 강도와 같은 태도로 엄마에게 돈을 내놓으라며 협박한다. 그간 엄마가 자신에게 못해주었던 과거까지 들먹이며 엄마의 숨통을 죄는 건, 차라지 강도가 낫지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다른 자식들이 나은 편도 아니다. 사업을 하고, 변호사를 하고, 재벌 짐에 시집을 갔다는 자식들도 각자의 복잡한 속사정 때문에 치매를 앓는 엄마를 모셔갈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결국 엄마는 홀로 죽어간다. 그리고 귀신이 되어 자식들 앞에 나타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식들이 스스로 느끼는 자식이 되어 해드리지 못했던 도리에 대한 죄책감이, 귀신의 모습으로 엄마를 불러들인다. 
하지만, 그런 귀신이 된 엄마를 물러나게 만드는 것도, 또한 '나야, 엄마'라는 자식의 목메인 한 마디이다. 
<엄마의 섬>에서 정말 무서운 것은 클라이막스에서 잠시 등장하는 귀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뻔히 엄마가 아픈 걸 알면서도, '깜빡깜박 잊어버리시기도 잘 한다'며 자신의 편의에 따라 엄마를 외면하는 자식들의 모습이다. 그렇게 엄마를 '고독사'로 몰아가는 인간 자식들의 모습이 더 무섭다. 그리고 그런 자식들에게 남은 땅뙈기를 팔아 돈과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를 남긴 엄마, 그리고 귀신은 가슴이 미어지게 슬프다. 

매회 눈물이 난다. 
<주군의 태양>이 방영 중반에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홍미란, 홍정은 자매 특유의 허술한 플롯이라는 단점이 드러나지 않고 탄탄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찌보면, 눈 가리고 아웅일 지도 모른다. 거의 매회, 하나씩 등장하는 귀신 에피소드를 제외하고 보면, 여전히 홍자매의 이전 작품과 다르지 않게 허술한 틈이 보인다. 특히나, 8회에 이르러, 갑자기 진전된 주군(소지섭 분)과 태양(공효진 분)의 사랑 이야기는 어차피 그렇게 될꺼였으니라는 이해(?)를 차치하고 보면, 구멍이 숭숭 뚫린 다리를 건너가듯 어딘가 껄쩍지근하기가 이를데 없다. 
그럼에도 막상 <주군의 태양>을 시청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느끼는 이 두터운 밀도의 감동이, 주군과 태양의 러브 스토리의 탄탄함으로 인한 것인지, 귀신들의 억울한 죽음을 이끄는 사연때문에 그런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게 시청자들을 몰입시킨다.
그렇다. <주군의 태양>에서 시청자들이 느끼는 공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귀신들의 이야기이고, 귀신들의 이야기는 매회 뭉클함을 지나 눈물이 나올 만큼 애절하고 안타깝다. 

(사진; 뉴스엔)

외국 호러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두 눈의 색깔이 다른 인형에, 그 인형과 함께 등장하는 아이들은 괴괴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아이들, 보호자의 방치, 혹은 유기로 인해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은 채 죽어갔던 원혼들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신처럼 외로운 아이를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태양이 제일 무섭다는 물귀신이란 전제를 깔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나꿔채는 메니큐어를 바른 여자 귀신은 알고보니, 호텔 이벤트에 당첨되어 너무나도 기뻐했던 고단한 삶을 혼수 상태에 빠진 주부였다. 
이번 주 만이 아니다. 8회에 이르도록 등장했던 귀신들은 늘 억센 인간사에 치여 이 세상을 하직한 억울한 귀신들이고, 그 자신의 억울함을 풀지 못해 태공실 앞에 등장해 칭얼거리는 것이다. 한을 좀 풀어달라고. <전설의 고향> 버전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던 구신들과는 하늘과 땅차이다. 게다가 한만 풀어주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저 세상을 향해 연기처럼 날아버리기 까지 매우 '쿨'하기까지 하다. 

<드라마 스페셜- 엄마의 섬>과 <주군의 태양>을 보다보면,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귀신을 만들 정도로 인간 세상이 지독하게도 모질단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2013 납량 특집은 지나가는 인간도 다시 보게 만드는 '인간의 무서움'을 항시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무서운 효과를 낳을 거 같다. 


by meditator 2013. 8. 30. 10:09

<주군의 태양>이 나날이 시청률 고공행진을 할 때마다 되돌아 오는 질문이 있다. 홍정은, 홍미란 자매님들(이하 홍자매) <빅>때는 왜그러셨어요? 

이제는 대세가 된, 연기돌 랭킹 1위에 빛나는 수지가 출연했음에도, 그녀의 작품으로 언급조차 회피되고 있는 <빅>과 <주군의 태양>은 동일하게 홍자매의 작품이지만, 과연 이 두 작품이 홍자매의 작품이 맞는가 싶게 다른 느낌의 드라마이다. 
같은 작가 작품이라고 꼭 같아야만 돼?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두 사람의 작품을 되돌아보면, <최고의 사랑>, <환상의 커플> 등 인기를 누린 것일 수록 <주군의 태양>과 거의 같은 포맷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오히려 주인공들이 설정은 비정상적이지만, 상대적으로 멀쩡해 보였던, <빅>이 홍자매에겐 외도와도 같은 성격의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다면, 이른바 홍자매의 작품답다라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것일까? 그걸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자면 '병맛'이다. <주군의 태양>은 홍자매 특유의 병맛이 펄떡펄떡 살아움직인다. 그러니 재미없을래야 재미없을 수가 없다. 



"꺼져!", "꺼져, 꺼져!", '얼른 꺼져!" " 꼭 세번을 말해야 알아 듣는 군"
위의 대사를 글자로만 읽으면 굉장히 모욕적이다. '인격 모독'으로 고소를 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물론, 처음에 주중원(소지섭 분)이 어색한 손짓으로 저 대사를 칠 때, 뭐지, 이 작위적 대사는? 하면서, <최고의 사랑>의 '극뽁'처럼 유행어 하나 만드려는 거야? 하면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더구나 늘 정극의 연기만 하던 소지섭이 홍자매 특유의 리듬과 겉돌던 시기이니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게 몇 번 반복이 되면서, 어색하면 어색한대로 중독성이 있는 거다. 이즈음에는 '꺼져' 한 번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면서, 이제 6회차에 들어, 소지섭조차 드라마의 리듬에 조금씩 몸을 맡기면서, 그 어색한 맛의 '꺼져'조차,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게다가 공효진은 늦고 빠르고가 없이 이미 그녀 자신의 연기력으로만 초반부터 무리수일 수도 있는 이 드라마의 설정을 책임지고 가고 있다. 그녀만큼 말도 안되는 드라마 속 캐릭터 자체로 사랑스러운 여인이 또 어디 있을까 싶게. 

"한번만 만져봐도 돼요?"/"안돼, 꺼져!"
홍자매 드라마의 대사들은 흔히 아이들간의 대화 같다. 어른들이 듣고 있노라면 뭐 저리 막말을 하나? 싶거나, 쓸데없는 말만 하나? 싶은데, 지들은 그게 하냥 좋다고 하는. 언뜻 들으면 욕이 반이 넘는 막말인데, 그 속에서 정이 넘치고, 우정이 깊어지는 그런 묘한 맛? 그게 홍자매의 대사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홍자매의 드라마 속 캐릭터들은 분명 어른인데도 아이들이다. 덩치만 어른일 뿐, 사탕을 빼앗기기 싫어서 앙탈을 부리고, 온갖 모험을 불사하는 그 아이들의 마음 그대로이다. 아마도 어른 들 사이에서 '꺼져'를 세 번 쯤 하면, 마음 속에 칼을 갈게 되겠지만, 아이들같은 어른들이기에 얼마든지 그 보다 더 심한 말도 가능하다. 아마도 그래서, 유치하다라는 평가를 받고, 아마도 그래서, 어른인 척, 혹은 멋있어 하는 가식이 없어서, 같은 젊은이들 사이에, 일단 홍자매 드라마는 보고 판단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일 것이다. 

<주군의 태양>의 주인공 혹은 그 주변의 사람들은 어느 하나 멀쩡한 사람들이 없다. 일단 쇼핑몰의 사장 주중원은 어릴 적 납치를 당했던 트라우마로 글을 읽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사람들을 피하고 자신만의 성 속에 숨은 채, 주군처럼 행사한다. 오직 이익을 위해서만 억지로 웃음을 만들고 사람을 만나는 그 주변엔 그를 이해하는 김비서 말고는 그 누구도 없다. 
태공실은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설정부터 귀신을 본다는, 거기에 귀신이 들러붙어 자신의 사정을 해결해 달라고 애걸복걸한다는 이 여자는 등장부터 잠도 못자고,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하는 루저 그 자체이다. 
남녀 주인공만이 아니다. 조만간 태공실의 어설픈 연적으로 등장하는 태이령(김유리)은 전지현의 밥솥 광고를 패러디한 것이 분명한 냄비 광고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캐릭터를 한껏 뽐냈다. 어디 그뿐인가, 제일 멋있어 보이는 강우(서인국 분)도 귀신 이야기만 나오면 쫀다. 
번듯한 어른이지만 속내를 알고보면 다 한 끝차이로 찌질하기가 이를데 없는 '병맛'어른 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른들이 내뱉는 대사들은 아이들 수준 그대로다. 

대한민국 드라마답게 <주군의 태양>에서도 재벌이 나오고, 스타가 나온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드라마와 다르게 참 없어보인다. 권위는 허세요, 가진 건 스쿠루지 저리 가라게 짠돌이에, 정신 세계는 딱 아이 수준이다. 학창 시절 평가하던 어른들 딱 그 모습이다.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런 그들이기에, 가진 것 없는 여주인공과 얽히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 엮어져갈 그들의 사랑이 전혀 불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재벌이 한낫 루저녀를 사랑하는 것이 호의로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속 주중원과 태공실이 계약 관계로 동등하게 엮이듯, 그들의 사랑조차 동등해 보인다. 심지어 나중에는 오히려, 태공실이 더 많은 걸 줄 수도 있어 보인다. 
학창 시절 아이들이 어른들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다. 자신들보다 더 많이 알고, 가졌지만 자신들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는, 냉소어린 그 시각이 그대로 드라마로 연결된다. 
흔히 청소년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눈높이를 맞추라고 하는데, 홍자매의 드라마가 딱이다. 그들의 정서에 맞춘 어른들의 세계.  

흔히 '병맛'의 시초를 만화로 본다. 철 든 어른들이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낄낄거리며 한없이 빠져들게 하는 그 매력을 병신미, 혹은 병맛으로 정의한다. 혹자는 이걸 잉여력이 넘치는 루저들의 집합체인 젊은 층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에 반발해, 일찌기 조선시대 김삿갓에서부터 비롯된 해학과 페이소스의 유산이라고도 정의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홍자매 드라마는 재밌다. 그리고 그게 바로 '병맛'의 본령이다. 꼭 무슨 교훈을 남겨야 해? 의미가 있어야 해? 하하 호호 깔깔거리고 서로 친해지고, 사랑하게 되면 그뿐. 


by meditator 2013. 8. 23. 10:20
홍미란, 홍정은 자매(이하 홍자매) 작가의 작품에는 이른바 창의적인 측면에서 늘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다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자매의 작품은 노골적으로 이미 오래 전에 유행했던 미국의 영화에서 모티브를 따온다던거가,(<빅>, <환상의 커플> 등),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나 만화 등의 포맷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경우가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미남이시네요> 등)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근한 서사의 되풀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홍자매의 작품이 방영되면, 일단 보게 되는 '믿고 보는' 드라마가 된 데에는, '창의성'을 뛰어넘는, 홍자매만의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맛깔나는 뒤틀기가 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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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이 귀신을 보는 설정은 이미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이다. 가깝게는 2011년 개봉한 손예진 주연의 <오싹한 연애>가 있고, 조금 더 시야를 넓히면, 시즌을 거듭하고 있는 미국드라마 <고스트 위스퍼러>, <고스트 앤 크라임>, <슈퍼 내츄럴> 등이 있다. 

제목이 노골적으로 <주군의 태양>이듯이, 남자 주인공 주중원과 여자 주인공 태공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주군의 태양>은 굵직한 스토리로 보면, <오싹한 연애>의 귀신을 보는 여자와 사랑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여주인공이 귀신과의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 주인공이 귀신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채 이승의 곤란함을 겪는 처지에 놓여있다. 그런가 하면, 귀신을 보기 때문에 밤에는 잠도 못자는 여주인공에게 어드벤티지를 주는 것은 그의 옷깃이라도 잡으면 귀신이 싹 사라지는 남자주인공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일방적으로 영매가 된 여주인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형식을 띤다면, 드라마는 언제나 홍자매의 드라마가 그래왔듯이, 남,여 주인공은 어떤 이해 관계를 매개로 얽히게 되고, 얽히다 보니 서로의 진심, 특히나 보기엔 별 볼일 없지만, 알고보니 괜찮은 여자라는 여주인공의 실체라던가, 보기엔 멋져보였는데 알고보니 불쌍한 남자였다는 반전의 매력을 선사한다. 
즉 홍자매의 인간형들은 언제나 등장할 때는 지극히 타산적이거나, 혹은 타산적이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여, 혹은 남주인공으로 인해 '진정한 인간'으로 교화되는 '승화'의 드라마저 감동을 그려낸다. <주군의 태양>은 이미 제목에서 그 특징을 드러낸다. 쇼핑몰의 사장 주중원은 마치 왕조시대의 '주군'처럼 쇼핑몰의 대표로서 전폭적인 권능을 행사한다면, 백수의 수준에서 겨우 벗어나 쇼핑몰의 아르바이트 청소직으로 취직한 태공실은 겨우 '태양'으로 불린다. 하지만, 여느 홍자매의 드라마처럼, 귀신을 보는 또 다른 권능을 지닌 태양은 결국 주군의 묵은 해원을 풀어줄, 그리고 얼어붙은 주군의 심장을 녹여줄 구세주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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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매회 펼쳐지는 주된 에피소드는 오히려 미드 <고스트 위스퍼러>난 <고스트 앤 크라임>처럼 여주인공이 영매가 되어 억울한 사연으로 인하여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이승을 떠도는 귀신들의 '한'을 풀어주는 성격이 부각된다. 물론 이것은 좀 더 시야를 확장하면, 여름이면 찾아왔던 <전설의 고향>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등장할 때는 무시무시한 귀신이었는데, 알고보니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거나 하는 식이다. 
더구나 <주군의 태양>에 지금까지 2회에 걸쳐 등장한 귀신들은 이른바 도시괴담류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에피소드들이다. 죽은 친구를 불러내는 여고생들의 '분신사바' 해프닝이나, 결혼할 여인이 바라보는 거울을 통해 지켜보는 또 다른 신부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었을 법한 익숙한 설정들이다. 
하지만 여름이면 공포 영화가 빠짐없이 개봉하듯, <전설의 고향> 쯤은 또 한번 봐줘야 할 것 같듯이, 사람들은 익숙한 공포의 소재에 거부감없이 빠져든다. 더구나, 알고보니 그 귀신이 사람을 해꼬지 하려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혹은 진심으로 걱정해서 등장한 것이라는 결론은 뻔하다 하면서도 <전설의 고향>을 보고 눈물 콧뭇을 찍어냈듯이, 여전히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마치 주중원과 태공실의 사랑을 인큐베이팅하듯, 귀신들은 하나같이 사랑의 완성을 지향한다. 등장할 때는 섬칫한 모습이지만, 알고보니 커피 한 잔을 갈구하거나, 제사상을 원했던 귀신처럼 인간사와, 구천의 경계가 희미하고, 그 사이에는 다하지 못한 인간의 사연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연을 풀어내면서, 주군과 태양은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삶의 딜레마를 넘어 행복한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그런데 항상 매력적인 홍자매의 드라마에 발목을 잡는 것은 완성도였다. 기존의 이야기를 뒤틀든 어떻든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놉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나가는 세부적인 스토리들의 개연성이 부족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평가였다. 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자매의 작품이 흥행작이 되었던 이유는, 부실한 스토리를 메꾸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향연이었다. 단 1회만에 냄새나는 머리, 확연한 다크서클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태공실처럼. 하지만 캐릭터의 매력만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것을 홍자매는 이미 <빅>을 통해 충분히 학습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2회를 메꾸어 낸 익숙한 도시 괴담류의 스토리들이 지금은 친근하고 약간은 감동적일지 몰라도, 이것이 되풀이 되다보면 진부해질 수도 있는 위험성 역시 <주군의 태양>은 내포하고 있다.
부디 이번엔 용두사미가 되지 않기를~


by meditator 2013. 8. 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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