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예년 겨울과 다르게 유난히 춥다. 그리고 눈도 많고. 날이 추워지면, 마음도 추워지고, 그래서일까? 올 겨울 뜨겁게, 혹은 잔잔하게 반응을 보이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중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건, 바로 주말 드라마 <황금빛 내인생>이다. 주말 드라마의 아성 kbs2의 토일 8시 자리야 높은 시청률이 따놓은 당상이지만, <황금빛 내인생>은 40%를 거뜬히 넘어선 소현경 작가의 전작 <내딸 서영이>의 시청률 기록과의 경쟁 이상,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전 세대에 걸친 뜨거운 반응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반응의 중심에 이른바 '도지 커플', 최도경(박시후 분)-서지안(신혜선 분) 두 주인공이 있다. 



황금 수저를 포기한 황태자의 사과 
극 초반 어려운 가정 형편에 대기업의 인턴 사원으로 갖은 수모를 겪던 서지안이 어머니의 한 순간 거짓말로 그룹 해성의 잃어버린 딸이 되어 재벌가의 신데렐라가 되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신분 상승의 서사를 다루었다. 짧고 고단했던 서지안의 빛나는 순간은 그 이후 참혹한 현실과 함께 추락해 버린다. 그러나 사고 차량 주인과 가해 차량 운전사로, 이어서 싸가지 갑과 을, 그리고 오빠와 동생으로 악연인지 운명인지를 이어가던 해성 그룹의 외아들 최도경과 서지안은 그 과정을 통해 '사랑'에 눈뜨게 되지만, '부'가 곧 신분인 세상을 절감한 서지안은 굳게 마음을 걸어 잠근다. 

그리고 이제 중반을 넘어선 <황금빛 내 인생>은 황금빛 수저를 내팽개친 채, 사랑을 찾아, 그 사랑의 용기로 자신을 찾아나선 최도경의 역 계급 경험이 극의 중심을 이룬다. 서지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 최도경, 그리고 서지안에 대한 자신의 사랑, 그 중심에 오로지 서지안만이 재벌 그룹의 후계자로 길들여져야 하는 자신의 수동적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깨달은 최도경은 사랑을 찾기 위해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의 '독립'을 일회적 반항이라 생각한 그룹의 창시자 할아버지는 그를 빈털털이 신세로 거리로 내쫓고 마는데, 그런 할아버지의 결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도경은 '알바'를 전전하며 '쉐어 하우스'에 거쳐를 마련하고 '독립'에의 의지를 불태운다. 

34회 마지막 장면, 밤낮으로 알바를 전저하던 최도경, 알고보니 그가 알바를 했던 이유가 바로 크리스마스 당일이 생일이었던 서지안의 생일 선물을 마련하기 위했던 것. 꾸벅꾸벅 졸아가며 미역국을 끓여 생일 상을 차리고, 포장도 없이 다친 손으로 움켜 쥔 목걸이에 결국 서지안은 마음을 열고만다. 하지만, 눈물겨운 생일 상과 선물 때문만이었을까? 그건 그간 최도경이 꾸준하게 서지안을 향해 보인 성의있는 사랑의 '대미'를 장식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최도경은 서지안을 찾아나선 이래, 서지안을 만날 때마다 꾸준하게 '사과'를 해왔다. 

집에서 쫓겨나던 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최도경을 찾았던 서지안, 그런 서지안을 최도경은 냉정하게 잘랐다. 혹시나 서지안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에게 향하는 서지안의 마음을. 그러나, 그런 최도경의 차가운 태도로 인해 서지안은 홀로 집으로 들어가 거리로 내쫓겼다. 그 사실이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던 최도경은 서지안을 만날 때마다 사과를 한다. 심지어, 서지안을 찾아헤맨 아버지에 대한 선의로 전했던 소식에 서지안이 폭풍같은 분노를 퍼부으며 최도경의 알량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비아냥거릴 때조차 최도경은 그 모든 걸 자신으로 인한 서지안의 상처로 감수한다. 가진 자로써 자신의 영역이 흐트러질까 걱정했던 노파심, 재벌 후계자로서 자신의 지위라 흔들릴까 두려웠던 그 마음을 서지안의 분노를 통해 반성하며 최도경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한다. '사랑' 이란 이름의 계급적 반성이자, 후회이고, 그에 대한 진솔한 사과, 그것이 다른 계급의 처지를 몸서리치도록 절감한 서지안을 봄눈 녹듯 녹여간 최도경의 '사랑'이다. 

최도경과 서지안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두 주인공이다. 재벌가의 황태자와 월세를 전전하는 집안의 비정규직조차 버거운 딸, 하지만 이 전형적인 서사를 소현경 작가는 2017년의 방식을 풀어간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삶의 모토로 삼았던 황태자 최도경은 자신의 그 신념이 사랑 앞에서 얼마나 자기 안위적인 계산이었던가를 통렬하게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유산으로서의 계급'대신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의 선택과, 그 온전한 최도경으로의 주체로서의 사랑으로 귀결된다.



비서를 존중한 보스의 사과 
다른 백마 탄 왕자도 있다. 꼴찌에서 시작하여 이제 당당하게 월화 드라마 1위를 거머쥔 <저글러스>의 남치원(최다니엘 분)이 그 주인공이다. 부사장의 특채로 yb 영상 사업팀의 상무로 등장한 그, 그리고 까칠한 그를 위해 공채 입사 5년, 그러나 전임 보스의 배신으로 기피 직원에서 겨우 자리를 얻은 좌윤이(백진희 분)가 그 사랑의 상대다. 

보스와 비서, 이 엄연한 직장 내의 서열이 분명한 관계로 만난 이들은, 하지만 뜻밖에도 좌윤이의 집 2층에 남치원이 세들어 오면서 직장 밖에서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뒤바뀐 관계가 되어 드라마의 역학 관계를 튼다. 독불장군 모든 것을 자신이 혼자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남치원은 당연히 '비서'의 존재가 필요없다 생각하고, 그래서 좌윤이의 존재를 무시했지만,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가 본의아니게 그로 하여금 '비서'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하지만 사사건건 수동적 비서로서의 좌윤이를 미더워하지 않았던 남치원은 보스를 위해 충정을 다하던 '본투비 비서'로서 사명감을 지닌 좌윤이를 '여성으로서 곁을 허용한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등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러나 제 아무리 비서로서의 존재를 무쓸모라 여겨도 비서라는 직업을 '하인' 다루듯하든 다른 '전통적 보스'와 달리 좌윤이를 존중하던 그는, 집주인의 배려, 그리고 비서로서의 헌신성을 차츰차츰 알아가며 자신이 끼고 있던 색안경을 벗어버리게 된되고, 비서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혼돈했던 자기 자신을 진솔하게 사과한다. 그리고 나아가 전직 보스에 대한 수모를 '보스 어워드'를 통해 갚으려 했던 좌윤이의 심중을 헤아려 함께 보스 어워드에 출전하기 까지 한다. 

<황금빛 내 인생>과 <저글러스>를 통해 등장한 남녀 관계는 '과도적'이다. 여전히 '사회적 계급'의 측면에서는 '백마탄 왕자'와 같은 존재와의 사랑이라는 '로망'을 구현하는 한편, 그 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2017년에 대두된 '여성 존중'의 담론에 충실하다. 남자들은 여성들의 존재와 그들의 직업, 그리고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때로는 자신이 곡해했던 지점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한다. 그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황금빛 내 인생>의 최도경은 자신의 동생이나 해성 그룹의 딸인 서지안 이전에 사원 서지안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녀가 디자인한 도안을 공모에 내는가 하면, 해성 그룹에서 쫓겨난 그녀의 경력 단절을 안타까워 직업을 알아봐준다. <저글러스>의 남치원이 비서로서의 좌윤이를 존중하고, 다른 상사들 앞에서, 혹은 다른 직원들 앞에서 수모를 겪는 좌윤이의 손을 잡아 보호하듯 에스코트하며, '자신의 비서'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는 것도 같은 방식이다. 때로는 그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기심에 불온한 행동을 하거나, 남성적 편견에 불쾌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그들 '왕자'들은 곧 반성하고, 기꺼이 '사과'한다. 거기엔 내가 남잔데, 혹은 내가 '상사'인데 하는 치졸한 자존심 따위는 없다. 

이런 일련의 남녀 관계는 이들 드라마에 앞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던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남세희(이민기 분)- 윤지호(정소민 분)의 관계 설정과 일련의 맥을 같이 한다. 2017년에 가장 어울리는 백마 탄 왕자였던 집주인 남세희, 그는 오갈데 없는 88만원 세대 윤지호를 자신의 집에 세입자로 거둔다. 그리고 젊은 남녀에게 편견의 통과 의례를 요구하는 세상을 편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위장 결혼'에 돌입한 이 집주인 세입자 커플. 그 결혼의 과정에서 남세희가 윤지호 모친에게 약속한 건 그 무엇도 아닌 윤지호의 꿈에 방해가 되지 않는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남세희의 약속은 윤지호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계약 결혼을 파기하기를 요구할 때 두말하지 않고 그 파기에 대한 동의로 이어졌고, 결국 꿈을 이룬 윤지호와 그런 그녀를 기꺼이 서포트하는 남세희의 진정한 결혼으로 드라마는 '로맨틱'하게 마무리되었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커플, 우수지(이솜 분)-마상구(박병은 분) 역시 여성의 꿈에 기꺼이 조력하는 파트너쉽이 사랑의 요건이다. 

이렇게 2017년 겨울을 달군 이들 세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황금빛 내 인생>, <저글러스>는 2017년의 사랑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 사랑 이야기 속 남성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그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 캐릭터들이지만, 그들이 사랑을 구현하는 방식은 달라졌다. 더 이상 '남자'라서, 혹은 '가져서', 그게 매력인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남자'라서 몰라서, '가진 자'라서 무지해서 몰랐다 사과하고, 여성들의 입장에 서보고, 반성하고, 함께 하고자 노력하는 자만이 사랑을 쟁취한다. 그게 2017년 식 사랑이다. 


by meditator 2017. 12. 27. 1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