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집에서 뒹굴던 노란 테두리의 책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어떤 그림 책도 보여주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 황홀한 자연, 그리고 그 곳에 어우러져 살아가는 인간들의 희노애락, 그것들이 가감없는 직설의 시선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던 사진의 세계, 내셔널 지오그라픽이었다. 이제 그 노란 테두리의 책은, 당당히 한 케이블 채널을 차지하고, 전 세계 곳곳의 현실감넘치는 풍경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하지만, 정작, 다른 나라의 풍광과 사람사는 모습에 빠져들면서, 우리의 모습을 거기서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찌기, 다양한 자연 다큐멘타리의 독보적 성취를 보이고 있는, kbs가 비로소, 한반도의 '지오그래픽'을 만들어 내었다. 10월2일부터 12월18일까지 거의 두 달간 매주 목요일 방영되었던 <코리안 지오그래픽>이 그것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처럼, <코리안 지오그래픽>도,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한 종, 특정 지역을 가리지 않고, 환경, 문화, 지리적 가치를 지닌 지역을 중심으로 자연, 인문, 생태적 비밀을 풀어'가고자 한다. 


12월 18일 마지막으로 방영된 <코리안 지오그래픽>은 남해의 죽방렴을 다룬다. 다큐가 시작되고, 바다를 잇닿은 남해의 풍경이 비추어 진다. 누런 밭을 가는 농부의 바쁜 일손, 그 옆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노오란 유채꽃, 그렇게 화면은, 흥건한 색감으로 봄을 알린다. 죽방렴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바다로 옮겨진 카메라의 시선, 육지와 그리고 섬이 즐비어 늘어져 있는 사이, 좁은 바다, 지족해협, 그곳에, 5백년의 전통을 가진, 바다의 문전옥답 죽방렴이 있다. 멸치를 유인하는 기다란 나무 울타리, 그 끝에 그들을 가두는 둥그런 나무 그물. 죽방렴의 봄은, 한 해를 넘겨 낡아진 나무 그물, 죽방렴을 수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말이 수선이지, 얕게는 몇 십센티, 깊게는 1,2미터에 박혀있는 참나무 기둥을 하나 빼고 박는 일은 누구 한 사람의 힘으론 불가능하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참나무를 베고, 다듬고, 바다에 담구어 1년을 보내고, 다시 힘을 합쳐 겨우 기둥 하나를 세울 수 있는 수고가 필요한 공사다. 어디 기둥만이랴, 멸치를 가두는 대나무 그물은 또 어떻고, 그물을 꼼꼼하게 박는 어부는 말한다. 대나무 그물에 긁힌 손때문에 악수하기가 부끄럽다고. 그렇게, 그저 바다에 박혀 놓고, 멸치를 거저 얻는 것처럼 보이는 죽방렴 속에 스며들어 있는 어부의 땀을 카메라는 태풍을 거쳐 멸치 농사가 끝나는 계절까지 꼼꼼하게 지켜본다.  어디 시간의 길이 뿐이랴, 물때를 맞춰, 새벽이고, 밤이고를 가릴 것없이, 노년의 부부가 잠을 설치며 멸치를 수확하는 그 시간의 깊이도 놓치지 않는다. 하릴없이 태풍이 그치기만을 기다리며, 자연에 순응하며 늙어가는 노년과, 달관의 중년, 그리고 3대의 자부심을 느끼는 아들의 얼굴은 이미 죽방렴의 일부인 듯하다. 
하지만, 죽방렴이란 자연 속에 드리워진 그물 속에는 인간의 삶만이 무르익어 가지는 않는다. 그 속에서 포획되는 멸치의 삶도 놓치지 않는다. 치어에서 부터 시작된 멸치의 화려한 군무와, 인간 못지 않게 그들을 사냥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갈치, 우럭들의 현란한 사냥기도 소리없는 전쟁이 되어 등장한다. 어디 그뿐인가, 죽방렴에 깃들여 사는 건 인간뿐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죽방렴이지만, 이제는 자연의 일부가 된 죽방렴에, 수달과, 바다새는, 알속만 빼어가는 단골 무전취식자이다.

이렇게 10부 죽방렴에서 보여지듯이, <코리안 지오그래픽>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한반도를 이룬 그 누구 하나의 관점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죽방렴 아래에 멸치의 세계가, 그리고 거기에 깃들여 사는 또 다른 생물의 삶들을 '죽방렴'이란 대상 아래 모여든 '공존'의 세계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렇게 금강도, 제주 앞바다도, 동강도, dmz도, 백령도도, 지리산도, 대관령도 담는다. 굳이 강변하지 않아도, 우리가 사는 한반도가, 그저 인간의 것만이 아님을, <코리안 지오그래픽>을 지켜 보는 것만으로 절절하게 '공감'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다큐는 오랜 시간 공을 들인다. 죽방렴의 멸치를 알리기 위해, 멸치 농사 한 철을 고스란히 담듯이, 생명공동체로서의 다랑논 1년이, 폭설로 대변되는 이면의 아름다운 대관령의 사계가, 인간의 이기심으로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내성천의 1년이, 장산곳매와 괭이 갈매기 가족의 역사가 담긴 시간들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무엇보다, 어쩌면 몇 년 후면 그저 기록으로 남을 지도 모를, 인간의 이기심으로 사라져가는 내성천의 모래나, 멸종 위기에 처한 금강의 꾸구리, 감돌고기, 퉁사리처럼, 한반도의 토종들을 담기 위해 고심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dmz이나 백령도 nll, 오름 아래 동굴 들은, 천혜의 자연을 신비롭게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척박한 돌 투성이 산간 벽지에 물을 가두어 쌀을 품게 만든 다랑논을 찍은, 피디는 다랑논의 구불구불한 모양과, 그곳을 일군 농부의 주름이 유사함을 말한다. 물질을 하는 해녀들의 '숨비소리' 역시 어느 덧 제주 바다의 일부가 되었다. 폭설을 견디며 살아가는 대관령의 사람과 동물들의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다. 멸치를 기다리고 거두다 한 평생 늙은 어부는 그저 삶이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연에서 멀리 떨어진 듯 살아가는 '문명(?)'의 시청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코리안 지오그래픽>은 일깨워 준다. 


by meditator 2014. 12. 19. 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