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이 여주인공을 연기하던 90년대의 로맨틱 멜로물 <미스터 Q>(1998)나, <토마토(1999) 속 여주인공은 얼굴은 이쁘지만, 가진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마치 '콩쥐팥쥐' 속 콩쥐처럼 극중 불쌍한 처지에 팥쥐 역을 맡은 배우에게 온갖 고난을 다 겪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미모와 그 미모보다 더 이쁜 마음에 매료된 남자 주인공을 그녀를 '백마탄 왕자'처럼 굳건하게 지켜준다. 


그러던 로멘틱 멜로물의 주인공이 한예슬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환상의 커플(2006)>을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여주인공은 아름답지만, 거기에 가진 것도 제법 있는데, 대신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얼굴 이쁘지만 성격이 싸가진인 여주인공은 <별에서 온 그대>으로 정점을 이룬다. 오랜 연예계 생활, 하지만 일관된 발연기와 안하무인의 성격으로 이제는 그 정점에서마저 추락할 위기에 놓인 여주인공 천송이, 그런 그녀에게 왕자님보다 능력이 한 수위인 외계인 도민준이 다가선다. 그래도 여전히 여주인공은 이뻤다. 

물론 여주인공에게 데미지가 가해진 경우도 있다. <성균관 스캔들(2010)>이나, <커피 프린스 1호점(2007)>처럼 피치못할 사정으로 여주인공이 남장을 해서 남자 주인공으로 하여금 '커밍아웃'의 갈등을 느끼도록 하는 사연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거죽일뿐,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시청자들이 보기엔 한 눈에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걸 알아볼 만큼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등장했었다. 오죽하면 남자 주인공이 미소년인 그를 아니 그녀로 하여금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까. 역시 여전히 여주인공은 이뻤던 것이다. 



경쟁력이 없는 그녀들
그런데 2015년 로맨틱 코미디를 내걸고 등장한 두 편의 작품 속 여주인공이 모두 이쁘지 않다. 한 명은 외모에 하자(?)가 있고, 또 다른 한 명은 몸매에 하자(?)가 있다. <그녀는 예뻤다> 여주인공 김혜진은 어릴  때 한 미모했었지만 가계의 내력에 따라 자라면서 심한 곱슬 머리와 안구 홍조증을 가진 여자이다. 그런가 하면 새로 시작한 KBS2의 <오 마이 비너스>의 여주인공 강주은(신민아 분)은 역시나 대구를 주름잡을 정도의 미모로 그녀의 얼굴로 안되는 것이 없었지만 이제 현실은 77사이즈에 15년 남친마저 살을 뺀 친구에게 뺏긴 처지가 되버렸다. 

얼굴이 안되거나, 몸매가 안되는 여주인공들 이들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외모가 경쟁력'인 2015년의 세태다. 돈이나 빽이 대세인 '자본주의 성장기' 시절 여주인공들은 가진 것이 없고, 지켜줄 집안이나 배경이 없었다. 혹은 가진 것이 없어 자신의 성조차 부정해야 하거나, 자신의 왜곡된 성격으로 가진 것조차 빼앗기게 된 처지에 놓인다. 이제 '자본주의'가 인간의 전인격을 굴복시킨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상품으로 내세워야 하고, 그래서 성형으로 외모를 바꿔 인생을 역전시킨 TV 프로그램이 등장하는 시대에, 그녀들은 그 경쟁력을 상실한 '을'로 등장한다. 

거기에 '외모'가 '을'인 것과 비등하게 삶의 조건도 '을'이다. 어렵사리 회사에 들어갔지만 이리 저리 가라하는 데로 처분이 정해진 '인턴' 신세이거나, 몸매도 포기하며 어렵게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지만, 그녀가 학창 시절 생각했던 정의의 수호자 대신 '고객이 원하는 법률 서비스'를 수행하는 심부름 센터 직원과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는, 로펌의 일개 직원에 불과한 처지인 것이다. 



당연히 경쟁력이 없는 그녀들과 만나게 된 남자 주인공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가진 것 없어도 이뻤던 그녀들은 첫 눈에 호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안면 홍조의 김혜진은 달라진 외모 때문에 어린 시절 친구 앞에 자기 대신 친구를 세우고, 자기 자신은 그저 눈 밖에 난 '인턴' 사원으로 사사건건 남자 친구에게 닥달을 당하는 처지이다. 자신이 이제 와 친구라고 말하는 것조차 자존심상할 만큼. <오 마이 비너스>의 강주은과 김영호(소지섭 분)의 만남도 그리 유쾌하진 않다. 언제나 그와의 만남의 순간에 강주은의 '살려주세요'가 등장하는 만큼, 그녀는 늘 위기에 빠지고, 그 위기의 순간에 김영호는 그녀를 구한다. 하지만 살집이 두둑한데다, 고맙다는 말을 제쳐버리는 그녀가 그에게 매력적일 리가 없다. 그저 길잃은 강아지 두고 올 수 없는 마음으로 김영호는 강주은을 보살핀다. 물론 그 마지못한 관심이 그녀들의 인간적 매력을 통해 '사랑'으로 변화될 것이지만. 

그렇게 외모의 경쟁력이 없는 그녀들, 거기에 번듯한 직업인 듯 보이지만 사실 속 빈 강정에 불과한 그들의 처지는 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수술대에 눕기를 거부하지 않고, 그럼에도 그 속빈 강정을 포기할 수 없는 동시대 여성들의 위안이 된다. 물론 이 위안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하루 아침에 '변신'을 하고 나타난 김혜진처럼, 이미 아름다움이 보장된 여배우들의 거친 분장 캐릭터로 등장한 <그녀는 예뻤다>와 <오마이 비너스>의 여주인공들은 마치 '해피엔딩'이 보장된 동화와도 같다. <그녀는 예뻤다> 마지막 회 김혜진이 다시 안면 홍조 곱슬머리 김혜진이 되었다 하더라도 시청자들은 사실 김혜진의 황정음이 이쁘다는 걸 안다. 그래서 언제든 다시 이뻐질 수 있는 김혜진처럼 다시 돌아온 안면 홍조 김혜진이 그리 안타깝진 않다. 드라마는 외모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지만, 이쁜 여배우들의 분장으로 눈속임을 한 캐릭터를 보며, 시청자들은 보험을 든 기분으로 그 '인간 승리'의 로코를 편안히(?) 즐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생 역전의 아이콘 헬스 트레이너 김영호를 만난 강주은의 변신 과정은 시청자 머리 속에 이미 인형 같은 몸매로 인식된 신민아란 배우가 있기에 여유로운 것이다. 

그렇게 행복이 보장된 동화 속 그녀들의 자신을 던진 개과천선과 달리, 시대를 달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을 사랑하게 된 그들은 변함이 없다. 첫 눈에 그녀들을 보고 반하든, 혹은 싸가지 없는 그녀들에 불평을 하며 시작했든, 아니 이제 외모가 경쟁력이 없는 그녀들에 측은지심으로 다가섰던, 여전히 그들은 시대에 따른 '갑'의 캐릭터다. 실장님이었다가, 능력 갑의 외계인이었다가, 이제 잡지사 편집장이거나, 기업의 후계자이자, 헐리우드를 들었다 놨다 하는 헬스 트레이너로 시대에 맞춰 옷을 갈아입듯 트렌디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때론 완벽남이었다가, 외계로 돌아가지 못해 절쩔 매거나,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상처를 입어도 능력남인 게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능력자'인 것이다. 변한 듯 하지만 결국 변한 게 없는 로맨틱 드라마 속 남녀의 갑을 관계이다. 

by meditator 2015. 11. 18. 1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