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윤석이 감독 김윤석이 되었다. 그 첫 작품이 <미성년>이다. 아마도 김윤석 배우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우가 오랫동안 감독에 대한 꿈을 꾸어 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성년>은 반가운 영화다. 누군가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현장이니까. 나이가 들어 퇴색되고 무뎌지지 않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쁘다.

하지만 <미성년>은 그저 그렇게 배우 김윤석의 첫 데뷔 영화라는 측면에서만 반가운 것이 아니다. 모처럼 우리, 인간에 대한 '넉넉한 시선'을 풀어놓은 영화라는 측면에서 반갑다. 마치 하루 종일 격식에 맞춰 정장을 입고 있다가 집에 돌아와 무릎 툭 튀어나온 낡은 츄리닝을 입고 퍼질러 앉아 기지개를 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렇게 편하게 나, 우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보는게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든다. 

 

 

어른의 딜레마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흔히 부모님들이 하는 말씀이다. 그 떡이 생길 어른 말씀이라는 거의 전제는 어른 말씀은 옳다라는 것이다. 어른은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성년>은 그 옳다는 어른에 대해 질문한다. 과연 그런가 라고. 

그리고 이 '옳지 않을 수도 있는 어른'에 대해 영화는 가장 흔하고도 속된 주제 '불륜'을 들고 나온다. 대원(김윤석 분)은 이 땅 어디에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아재'다. 그런데 이 '아재'에겐 비밀이 있다. 본인만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남들은 다 알아버린 비밀, 바로 미희(김소진 분)와 불륜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버린 딸 주리(김혜준 분)가 미희의 가게 주변에서 기웃거리다 미희와 미희의 딸 윤아(박세진 분)에게 틀키고, 그 바람에 아내 영주(염정아 분)까지 알아버렸다.

아니 그건 어쩌면 타이밍의 차이일 뿐일 지도 모른다.  이미 아내와 각 방을 쓴지 2년 여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가는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대원의 바람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인 듯 보여진다. 아니 그것보다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미희의 배는 어떻고. 게다가 회식 장소를 두고 오리집으로 할까요 하며 빙글거리는 직원을 보니 정말 대원을 빼고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혹' 해서는 안될 '미혹'의 나이에, '혹'하면 안되는 아내와 딸이 있는 가장의 바람인지, 불장난인지, 사랑인지는 동심원을 그리며 여파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세상에서 젤루 이쁜 딸도 알고, 아내도 알고, 미희는 아이를 '조산'하고 그 대책없는 상황에 대원은 그만 내빼버린다. 그가 '미희'와 시작했던 그 '사랑인지 바람인지'에서 고려치 않았던 결과들이다. 미희 말대로 '맘대로 되지 않는 바람'이라서 그런가, '책임'이란 단어와 동음이의어로 쓰이는 어른이 대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듯하다. 

이 대책없는 대원의 불장난, 그 마주쳐야 소리를 낸 당사자, 어쩌자고 남의 집 남편의 아이까지 가졌냐며 다그치는 딸에게 외려 너라도 엄마를 좀 이해해 주면 안되겠냐며 울음을 터트리는 미희. 돈만 쥐면 도박판으로 달려가는 남편 대신 열 일곱에 '책임'을 진 딸을 키우며 오리집을 하며 살아가는 미희의 삶을 들여다 보니 그녀가 뒤늦게 매달린 '사랑'이 짠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른스럽지는 않다. 

 

 

이 대책없는 두 사람으로 인해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은 영주, 여전히 딸 주리 앞에서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만 그 허울은 얇다. 더구나 미희의 조산 앞에 그녀의 자존심마저 약해진다. 아니 그녀를 더욱 약하게 만드는 건 그녀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하나 없이 지켜왔다고 생각하는 가정, 그리고 남편인지 웬수인지 모를 대원.

이렇게 <미성년> 속 어른들은 다 어쩌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다. 어른답지 못한 일을 '저지르고', 그 저지른 일에 대해 어쩌지 못한 채 '책임'지는 대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거나, 방임한다. 아니 '책임' 조차도 어쩌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내 맘'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 와중에 '어른'이라며 아이들을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서 저만치 밀어낸다. 즉 <미성년> 속 어른들의 상태는 바로 '어른' 그 자체의 '딜레마'다. 책임질 수도, 책임 지지지도 못할 상황에 놓여버린 어른의 삶. 그건 어쩌면 '도덕'이라는 교집합으로는 쉬이 메꿀 수 없는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삶 자체일 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정의내린 어른이라는 깜냥 자체 미달인 '어른'들의 이야기. 이를 통해 '어른'이라는 우리의 고정 관념에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이 짊어지고 사는 그 '어른'이 정말 어른맞냐고. 아니 우리가 만들어 놓은 '어른'이라는 성채가 허상이 아니었냐고. 

 

 
어른스러우려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인 아이들 
그리고 이렇게 어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맞은 편에 정작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대략난감'인 어른들보다 어른스런 아이들을 내세운다. 공부의 세상 속에 밀어넣으며 아이들의 문제 조차도 해결해 주겠다는 어른들의 세계에 기꺼이 책임감을 가지고 발을 밀어넣는 아이들. 

어찌어찌해서 아빠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딸 주리는 흔히 드라마가 설정하듯 철부지 딸의 캐릭터 대신에 어른스레 그 사실을 알게되어 충격을 받을 엄마를 걱정하고 수습하려 애쓴다. 윤아는 어떻고. 대책없는 엄마를 다그치면서도 어떻게든 그 사태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자신의 주머니를 털고 파탄난 가정을 봉합해보려 아버지를 찾아나선다. 심지어 그 사태로 인해 등장한 '동생'을 들여다 보며 책임지려 까지 하며.

 

 

구멍난 '가족'의 틈을 메우려 애쓰는 아이들. 어른들이 방기한 책임의 세계에 자신을 기꺼이 들이미는 아이들. 그렇게 <미성년>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고정 관념, '철없고 대책없는 아이들'이란 세계에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이들이 책임지고자 하는 '어른'의 세계에 아이들은 아직 역부족이다. 아니 영화의 엔딩처럼 아이들은 어른스러우려 하지만 아직 '아이들'일 뿐이다. 아니 '아이들'이기에 어른들의 그 심각한 사태에 웃을 수 있고, 엉뚱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미성년>은 그렇게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들과 어른스러운 아이들을 통해 '어른'의 경계를 해체한다. 어른됨의 버거움을 피력하고, 어른됨의 난센스를 드러내며,  애초에 우리 사회가 불문율처럼 정의한 '어른'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문을 표한다. 반면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철딱서니 없지도 않고 생각이 없지도 않다. 결국 <미성년>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과 어른다운 아이 그 흐트러진 경계를 통해 이 사회가 강력하게 선을 그어 놓은 '어른'과 아이'라는 선이 어쩌면 불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찌질하기 한량없는 대책없는 고딩같은 대원과 아우토반 중2병같은 미희의  깜냥에,  자신의 감정조차 추스리기 힘들어 보이는 영주의 흔들림에 엄격한 학칙의 잣대를 들이대다 한참 모자란 찌질이들을 마주하듯 실소가 흘러나온다. 미희와 대원이 해맑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던 낡은 놀이 공원을 찾은 아이들의 미소처럼. 결국 <미성년>이 도달한 곳은 그 모자람에 대한 인정이요, 이미 늘어진 고무줄같은 어른의 세계에 대한 '관용적 이해'다. 그리고 그건 지금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괴물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여유'의 틈이다. 

by meditator 2019. 4. 15. 0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