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는 고통이 싫어,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모성'이 회피되는 세상이지만, 오히려 그런 '반발'은 우리 사회가 얼마 만큼이나 '모성의 포용성'에 기대고 있는 가를 반증하고 있는 현상이라 보여진다. '엄마'라는 존재가 되는 순간, 그 '여성'에게는 '무한한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전제되는 것으로 우리 사회는 모성을 존재한다. 진화 심리학이 꼭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아이를 감당하기 버거워 방황하는 '산후 우울증'이 엄연히 현존해도 말이다. 바로 그런 지상 명제로서의 '모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드라마가 등장했다. 이제 중반을 넘어선 10회, 이 드라마는 우리가 그리도 당연하다 생각하는 '엄마'에 대해 많은 질문과 과제를 제시한다. 


해외에서까지 화제가 되었던 신경숙 작가의 화제작 <엄마를 부탁해>는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했던 엄마의 실종으로 부터, '엄마'란 존재로 살아온 한 여성에게, '엄마'가 아닌 다른 삶이 있었음을 갸륵해서 추모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그럼에도 '엄마'는 '엄마'였다. '엄마'가 되는 순간, '엄마'는 '엄마'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엄마'로 자신을 밀어넣는 삶을 살아냈던 것이다. 


엄마들이 아이를 버렸다! 
바로 이렇게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엄마'에 대해 tvn의 드라마 <마더>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 시작은 지금 자신의 곁에 머무는 남자에 연연하여 자신의 아이를 쓰레기 봉지에 '방기'하는 엄마로 부터이다. 엄연히 우리 사회에 현실로 존재하는 아동 학대, 그 현실을 '자영'를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사랑했던 남자에게 버림받고 아이와 함께 남겨진 자영(고성희 분), 그녀에게 혜나(허율 분)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상심한 엄마를 위해 카페라테를 타다 그걸 좋아해 버린 아이를 자영은 버거워했다. 그런 그녀의 감정은 학대로 나타났다. 그렇게 '모성'의 상실된 자영, 그런 자영의 아이 혜나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수진(이보영 분)'이 자신의 아이로 거둔다. 상실된 모성과, 그 상실된 모성을 대신하는 '공감의 의제 모성', 유괴라는 사건 이면의 이 모성의 대립을 통해 드라마는 우리 사회가 신봉하는 '모성 신화'에 발을 건다. 

그렇게 엄마가 곧 모성이라는 전제를 스스로 짓밟아 버렸던 자영은 수진이 자신이 아이를 데리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혜나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혜나를 마주하고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읍소한다. 그러나, 이제 응복이 된 혜나는 자영에게 그간 엄마라는 이름으로 자영이 자신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를 복기시킨다. 죽지 않기 위해 엄마로 부터 자신을 지켜내야 해서 응복이 되었던 혜나, 그런 사실을 깨닫고 자영은 발을 돌린다. 다시 한번 혜나를 버린 것이다. 

또 다른 모성 신화도 있다. 버려진 아이 혜나를 거둔 수진처럼, 보육원에 버려졌던 내 새끼처럼 길렀던 수진의 양모 영신(이혜영 분), 스물 다섯 살 시절 홀연히 그녀의 곁을 떠나버린 수진을 암에 걸려 시한부의 삶을 사는 영신은 애타게 찾는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르는 딸을 데리고 나타난 수진과, 그녀의 딸 혜나, 아니 응복에게 열렬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수진이 데리고 온 응복이 자신의 친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영신은, 그 둘에게 집착하여 놓았던 자신의 삶마저 다시 애착을 가지게 되었던 영신은 '테메테르'로 분해 가장으로서 남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수진과 응복을 버리겠다 선언한다. 



버려서 찾은 모성 
자영과 영신이 자신의 딸들을 버리는 이 상황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성'의 방기가 아니라 성장이다. 혜나를 늘 자신의 부속물로 생각하여 방기하고 심지어 쓰레기 봉투에 버렸던 자영은 처음으로, 혜나를 마주한다. 밀어내도 다가와 자신을 안아서 부담스러웠던 혜나였지만 수진에게 빼앗길 수 없어 홍희의 이발관까지 찾아온 자영이었지만, 이젠 더 이상 자신이 혜나가 아니라 응복이라 말하는 딸 앞에서 발을 돌린다. 딸에게 외면받은 엄마의 상처받은 뒷모습이지만, 그리고 아직 채 깨닫지 못한 채 분노한 상태이지만 자영으로서는 처음으로 혜나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첫 번째 선택이었다. 그 순간 자영은 처음으로 엄마다웠다. 

영신도 마찬가지다. 영신은 의사에게 고백했었다. 자신에게 수진은 아직도 열 살의 아이 그대로인 채라고. 여전히 어린 아이 수진의 보호자연 했던 영신은 이제 기꺼이 응복의 보호자로 살아가겠다고 결정한 수진을 놓아보내 주려한다. 남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가장의 책임을 내세웠지만, 그 마음의 기저에는 어린 자식을 끌어안아아야만 엄마라 생각했던 그 1차원적 모성으로 부터의 탈피가 있다. 유산 대신 새처럼 훨훨 날아가라 했던 그 마음의 연장 선상에서, 응복의 엄마됨을 선택한 어른 수진의 삶에 대한 존중이 있다. 

이런 자영과 영신의 모성에 대한 방기는, 그에 앞서 딸을 살리기 위해, 살인자의 딸로 살아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딸을 버렸던 홍희의 모정에 잇닿는다. 그리고 드라마는 다시 묻는다. 모성의 의미를. 

우리 사회에서 엄마들은 '자식을 끼고 품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식을 품은 모성'들이 치맛 바람이란 이름의 역효과를 낳으며, 아이의 삶을 재단하고, 수강 신청에서 부터 미래의 직업, 결혼 이후의 생활까지도 '지도'하고 '군림'하며 아이를 '지체'시키는 '모계 사회'의 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다. 

<마더> 속 자영과 영신, 그리고 홍희를 통해 보여진 모성의 방기는, 과연 '엄마됨'의 내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어린 자식을 품고 보호하고 보살펴 주는 그 1차적 보호를 지나, 성숙된 모성으로의 성장을 위해, 진정 아이를 위해 '엄마'들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냐고 '극단적 설정'을 통해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 10회 이들의 갈 길은 멀다. 응복이 된 혜나 앞에서 발을 돌린 자영은 '엄마 이전에 한 사람으로 먼저 서야 한다'는 수진의 충고가 무색하게 '분노'의 반격을 준비한다. 영신의 희생어린 선택은 영신보다 더 큰 희생을 선택한 응복, 아니 혜나로 인해 또 다시 위기를 맞이한다. 과연, 이 엄마들의 앞으로의 여정은 또 어떤 '모성'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것인지. 그 누구도 쉽게 던지지 못했던 '엄마'에 대한 질문을 드라마 <마더>는 끈질기게 천착한다. 

by meditator 2018. 2. 22. 1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