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도 인기있는 일본의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에 [편지]라는 작품이 있다. 

소설 속 형 츠요시는 어머니도 죽고 홀로 동생을 보살피며 생계를 책임지던 중, 동생의 대학 입시를 앞두고 홀로 사는 노파네 집 담을 넘다 강도 살해범으로 잡히는 처지가 되고 만다. 편지는 강도살해범을 둔 동생이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세상 사람들의 편견에, 불편함을 견디며, 도망치며, 발버둥치며 살아가려 하지만 천형같은 강도살해범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오키의 이야기인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편지]는 대다수 이런 문제를 다루는 다른 이야기들이 츠요시나 나오키에 대한 편견을 지향하는 것을 취지로 다루는 것과 달리, 그 편견을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당사자 가족의 운명을 더 실감나게 그려내는데 치중한다. 

그렇게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은 형제라는 운명으로 엮어진 사슬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그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천형과도 같은 것이라고 소설은 은밀하게 토로하는 것처럼,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사랑의 결실을 넘어, 사회적 관계로서의 부부를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은진(한혜진 분)-성수(이상우 분) 부부는 물론,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가졌던 미경(김지수 분)-재학(지진희 분)부부 역시 결국은 이혼이라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른다. 하지만, 사랑으로 시작하여, 신뢰로 지탱하던 부부 관계가 종지부를 찍는 마당에도, 이들의 부부 관계는 쉬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지 못한다. <사랑과 전쟁>에서라면 오히려 부부의 불화를 부채질할 주변의 관계들이, 역으로 네 사람의 부부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접착제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집에서 얼굴을 맞대는 것조차 힘들어 하던 은진-성수 부부에게는 아픈 성수의 어머니가 찾아온다. 그래서 둘은 어쩔 수 없이, 비록 침대 위와 아래에서이지만, 시어머니 앞에서 부부인 척 생활할 수 밖에 없다. 미경-재학의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재학의 바람이, 그저 바람이 아니었음을 절감한 미경이 집을 나가고 이혼을 선언했지만, 역시나 재학의 어머니가 쓰러지는 바람에 미경은 며느리의 역할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미경의 시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남편을 견딜 것을 미경에게 종용한다. 뿐만 아니다. 미경의 의붓 동생 민수(박서준 분)와 은진의 동생 은영(한그루 분)의 결혼으로 불가피하게 부부연하게 되는 미경과 재학, 은진과 성수의 관계만 보아도, 부부는 그저 부부가 아니다. 

시한 폭탄과도 같은 민수와 은영의 결혼은 그걸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접점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사랑하지만, 두 사람을 둘러싼,은진-성수, 미경-재학의 관계가 과연 그걸 용인해 낼 수 있을까. 심지어 은진 부부에게 차 사고까지 낸 민수가 순탄하게 결혼에 이르를 수 있을까. 이는 결국, 대한민국에서 부부란 관념적으로 사고되는 사랑의 결실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관계 단위로서의 부부가 차지하는 바가 더 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라 보여진다. 

<힐링 캠프>에 나온 황정민은 자신의 아내에 대해,
이제는 배도 나오고, 주름도 지고, 예전처럼 이쁘지는 않지만, 그러나 자신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되더라도, 나의 편이 되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아내라고, 가장 자신의 친한 친구가 바로 아내라고 정의 내린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 아니 희미해져가는 자리, 부부는 그 틈을 신뢰와 우정으로 메워간다. 하지만, <따뜻한 말 한 마디>는 그런 신뢰와 우정조차 너덜너덜해진 상황에서도, 부부는 그리 쉽게 지워질 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첨언한다. 대한민국 에서 부부란 그저 사랑하는 사람 둘이서만 만들어진 단위가 아니라, 부부와, 그 주변 사람들이 얽혀진 공동체로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물론 경우에 따라서, 그 공동체가 오히려 부부 관계의 파국을 재촉하는 촉매제가 되기도 하고, 지금까지 대부분의 드라마는 그걸 유효한 카드로 사용하고 있어왔다. 하지만,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좀 다르게 진지하게, 우리 사회에서 부부의 위치는 어디쯤 되느냐고 다시 한번 반문한다. 혈연주의의 확장이, 발목을 잡기도 하고, 반대로, 부부란 인연의 접착제가 되기도 하는 모호한 그 경계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 나오키와 츠요시는 제 아무리 츠요시가 저지른 범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혈연으로 나누어진 형제였다. 그래서, 나오키는 형의 범죄를 함께 짐지우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부부는 분명 다르다.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끝나는 쿨한 관계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진정 부부는 무엇으로 살아갈까? 그렇게 자꾸만 <따뜻한 말 한마디>는 반문한다. 전생에 억만 겁의 인연이 합쳐져 이생에서의 부부라는 연을 맺었다던 전통적인 부부 관계의 관념이 사랑이 없으면 헤어져야 한다는 신식 이혼관이 대체해 가는 이즈음, 하지만 부부란 그리 간단명료한 사회적 단위가 아니라고 한번쯤은 진지하게 되돌아 보자고 드라마는 말한다. 


by meditator 2014. 1. 22. 1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