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 결혼하는 여자>가 종영되었다.

애초에 제목을 세번 결혼하는 여자로 삼았던 만큼, 극중 주인공이었던 오은수(이지아 분)가 과연 세 번째 결혼을 누구와 할 것인가가 세간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우선은 고부간의 갈등으로 인해 이혼을 했지만 헤어진 이후에도 애틋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던 전남편 정태원(송창의 분)과의 해후가 가장 설득력 있어 보였다. 하지만, 두번 째 결혼 대상이었던 김준구(하석진 분)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서, 아이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여론이 생기면서, 결국은 아이로 인해 준구와 다시 살지 않겠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통속적인 가능성을 차치하고, 여주인공 은수가 선택한 세 번 째 결혼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결혼이었다. 즉 자기 자신만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사진; 엑스포츠 뉴스)

<세번 결혼한 여자>를 문학 장르로 치자면, 겉으로는 남녀 간의 사랑과 이혼을 다룬 '순수 애정 소설'같지만, 오히려, 결론에 이르러 봤을 때, 작가 김수현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자 하는 '목적 문학'에 가까운 작품으로 보여진다. 

여주인공 오은수는 마치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여주인공 노라처럼, 자신을 속박하던 시집살이의 굴레로 부터, 그리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부 관계로 부터 자유를 찾은 여성이다. 드라마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전남편 정태원의 입을 빌어, 그리고 준구 이모의 입을 빌어, 세상의 시각을 전한다. 자신을 포기하라고, 그러면 또 다른 행복이 찾아올 거라고, 너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라고. 하지만 여주인공 은수는 그런 세간의 관습에 답한다. 이것이 나라고. 앞으로 어떤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나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을 아이를 위해 포기하느니, 차라리 후회를 택하겠다고, 뼈를 깍는 아픔을 겪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인생의 풍파를 겪은 나이의 노작가 답게, 물론 오은수의 선택을 마냥 해피엔딩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오은수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기 위해, 그녀가 낳은 두 번째 아이를 포기해야만 하는 댓가를 치뤘다. 작가는 마치 그것이 자신을 선택한 댓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삶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오은수의 선택이 이 시대에 분명 의미있는 선택으로, 삶의 한 유형으로 받아들여지길 김수현 작가는 강하게 말하고 싶은 듯하다. 

오은수 만이 아니다. 그녀의 언니 오현수(엄지원 분)가 선택한 삶도 마찬가지다.  15년을 짝사랑 했던 사람과 함께 살아가지만, 그것이 당연히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삶도 또 다른 작가가 말하고 싶은 삶의 유형이다. 마지막 회, 은수는 말한다. 정작 언니처럼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이야말로 결혼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런 동생의 정의에 대해 언니 현수는 말한다. 결혼을 한다면 안광모(조한선 분)의 어머니와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해서 피곤해서 싫다고. 이것을 통해 작가 김수현은, 우리 사회에서 사랑과 결혼은 결코 하나의 순차적 과정이 아닐 수도 있으면, 결혼이란 것은 그저 사회적 제도로, 이제는 이 사회 여성들의 삶에 질곡으로 자리잡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변하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특히나 주말 온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에서,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보여준 작가의 시선은 파격적이다. 작가의 바로 전 작품, <무자식 상팔자>에서도 현수 역을 맡았던 엄지원이 분했던 안소영 역을 통해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삶의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작품의 전체적 기조가 대가족 제도의 행복을 주제로 삼는 한에서 그 대안적 삶의 존재는 대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용해되고 말았었다. 하지만 이제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작가 김수현은 보다 적극적으로 삶의 또 다른 대안으로서 '싱글'의 위치를 보다 부각시킨다. 

하지만 한계 역시 분명하다. <무자식 상팔자>에서도 싱글이지만 가족 속에 어우러져 그 싱글의 삶이 무디어 졌듯이,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은수 역시, 독립적 싱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계적 확대 가족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은수는 독립적이라 하지만, 그녀의 삶은 그녀의 친정 부모와, 언니라는 모계적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다. 언니인 현수와 광모의 삶도 결혼만 하지 않았을 뿐 그들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현수 가족의 그림자는 짙다. 그런 한에서, <세번 결혼하는 여자>가 대안으로 내세운 '싱글'은 제한적이다.

또한 대부분의 목적 의식을 내세운 문학 작품이 가지는, 자신의 주제를 완성하기 위해, 작품성의 매끄러움을 희생하는 경우가 많듯이, <세번 결혼하는 여자> 역시 오은수라는 똑부러지는 삶의 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주변 캐릭터들을 훼손했다. 

이혼을 했음에도 한결같은 오은수 바라기였던 전남편 태원은 갑자기 새로 결혼한 채원(손여은 분)이 가정 폭력의 희생자라는 것을 알자 태도를 돌변한다. 심지어, 은수를 찾아가 함께 하는 행복 운운하는 오지랖까지 펴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세번결혼하는여자’ 손여은, 송창의 아이 임신에 ‘행복한 입덧’

오은수를 제외한 또래의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사이코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던 채원은 남편의 사랑을 찾자 공주가 되었고, 알콜 중독에 헤매던 다미 역시 준구의 사랑 속에 사랑스러운 천사가 되었다. 은수가 독립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동안, 그녀 주변의 여성들은 가장 의존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결론은, 여주인공의 선택과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마치, 작가가 저런 의존적 인물은 저런데서 행복을 찾아야 하고, 여주인공 같은 사람은 아픔을 겪더라도 독립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묘한 '선민 사상'을 가진듯이 보여 드라마적 일관성을 놓친 듯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삶이 저렇게 아롱이 다롱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제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회, 행복을 찾은 채원과 다미의 캐릭터는, 그간 그들이 드라마 내내 보여주었던 돌출적 캐리터의 결론으로는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보다 아쉬운 것은, 여성 캐릭터가 독립적인데 반해, 드라마 내내 일관되게 한심해 보였던 남성 캐릭터들이다. 마치 작가가 '쯧쯧쯧' 하며 바라보듯이, 그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들이 불쌍해 보일만큼, 수동적인 남성 캐릭터의 존재는, 비록 작가가 바라보는 이 시대의 대다수 남성이 그렇다 하더라도, 영웅 드라마의 감정 과잉의 영웅만큼이나, 단편적인 캐릭터로 일관된다. 충동적인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듯이 보였던 준구가 마지막 회 다미와 함께 행복해 하는 모습은 그가 그간 보였던 불성실을 사랑으로, 혹은 삶의 아이러니로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분명 김수현 작가가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결혼과 이혼만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이 시대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오은수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이 둘러리를 서는 듯한 스토리는,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설득은 되지 않는 껄끄러운 선동문으로 남는다. 


by meditator 2014. 3. 31. 01:47

시즌 2에 이르르며 금요일 밤 고정 시청자 층을 확보하고 있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2>의 결론은 언제나 이혼이다. 온갖 문제에 휩싸이던 부부들은 결국 이혼 재판정에 나가 자신들의 결혼을 심판받는 것으로 드라마는 마무리되는 것이다. 4주 간의 숙의 과정을 거쳐 그들이 이혼을 하지 않던, 이혼을 하던, 일단 그들의 부부 생활은, 이혼이 종착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이 tv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결혼이 인륜지대사인 만큼, 그 인생 최대의 과제인 결혼을 '쫑'내는 이혼은 마침표 그 자체였었다. 하지만, 이제 시즌2에 이를만큼 세월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에서 결혼과 육아가 권장해야 할 미덕인 지에 대해 의문 부호가 슬며시 붙여지기 시작한 것처럼, 이제 더 이상 이혼이 우리 사회에서 가슴아픈 일이지만, 보기 드물거나 이상한 사례가 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일까, 부쩍 드라마에서 이혼 후의 후일담을 다루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드라마 제목에서 부터 이혼을 전제로 하고 들어가는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억압적 시집살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혼을 선택한 부부의 재혼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병원 응급실을 배경으로 한 <응급남녀>는 제목이 무색하게 대부분의 이야기들을 우리 나라 드라마들이 늘 그래왔듯이,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 그 중에서도 병원에서 다시 조우하게 된 이혼 부부의 갈등에 촛점을 맞춘다. 벌써 제목부터 노골적으로 드라마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는 <앙큼한 돌싱녀>의 경우 역시 이혼을 한 부부가 한 직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그 주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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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하면 끝이었던 지금까지의 드라마들과 달리 <세번 결혼하는 여자>, <응급남녀>, <앙큼한 돌싱녀>는 이혼이 끝이 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것이 단 1년이 되었건(응급남녀), 지긋지긋하게 싸우다 원수가 되어 헤어졌건(응급남녀, 앙큼한 돌싱녀), 주변 가족으로 인한 갈등을 극복하지 못했건(응급남녀, 세번 결혼한 여자) 그들이 함께 한 시간들이 결코 무위의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가 있으면 아이가 있어서, 아니 아이가 없어도 두 사람이 함께 살을 부대끼며, 한 공간을 공유했던 시간들이 결코 끝난다고 끝나지는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세 드라마는 공통적으로 줄곧 이야기한다. 

이혼이 빈번한 사회적 현상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인생의 실패로 자리매김하는 사건으로 다루어 지고 있는 상황에서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이혼이란 사건이 드라마로 들어오면서 결국 복기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헤어졌지만 함께 낳은 아이로 인해 어쩔수 없이 자꾸 얽히게 되고 (세번 결혼하는 여자), 함께 한 시간때문에 만들어진 인연들로 인해 또 다시 어쩔 수 없이 얽히게 되고, 그래서 상처받고, 때로는 그래서 더 상대방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세번 결혼하는 여자, 응급남녀), 아니다 했지만 상대방이 자신에게 미쳤던 영향력을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실감하게 되면서(앙큼한 돌싱녀) 지난 시간을 복기한다. 

그러면서 지난 결혼의 시간 서로가 서로에게 이해가 깊지 않았음을, 혹은 자기 중심적이었음을 반성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한다. 이런 방식은 결혼과 이혼의 과정을 개인의 성장과 관련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다. 
아직 철없던 시절에 이혼을 하고, 철이 없어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아 실수로 이혼을 한 것이라는,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이혼이 아니라, 개인의 실수와 실책으로 이혼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런 경우의 진단에 있어서는, 그렇다면, 지나간 과오를 반성하고, 그것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그리고 반성에 대한 실천의 차원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여지가 크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세번 결혼하는 여자>나, <응급남녀>, <앙큼한 돌싱녀>에 모두 이런 방식의 사고가 들어있다. 


물론, 실제 결혼과 이혼에 있어서는 인간과 인간의 감정이 첨예하게 맞붙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이런 식의 해석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첨예화된 사회적 갈등 속에서 고사되어 가는 사람들을 '힐링'이나 '심리적'요인만으로 해석하고 치유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시즌을 거듭할 정도로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이 만들어 질 수 있는 이혼이 가지는 수많은 사회 경제적 이유를 획일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심리적 기제만으로서 이혼을 치유하고자 하는 측면에서도 최근의 드라마들이 보다 나은 성취를 보인다고 볼 수는 없다. 앞으로의 결말이 어떻게 될 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두 부부의 해후와 해프닝과 되살아나는 사랑에 촛점을 맞추는 <응급남녀>와 <앙큼한 돌싱녀>가 2006년에 만들어진 <연애 시대>가 가졌던 이혼 후의 부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행보로는 회의적이다. 


심리적 해석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어른들 세대의 사랑보다는 '정'이라는 전통적 인정주의가 스며들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한때는 지긋지긋해 했지만, 그래도 남보다는 익숙하고, 함께 한 시간이 있었기에 내가 그의 사정을 잘 알고, 더 이해하는, 그래서, 위급한 상황이 되면 더 쉽게 그에게 경도될 수 있는 인지상정이 이혼을 하고도 그들의 발목을 여전히 함께 묶어 두고 있다. 외로운 개인보다는 서로 어깨를 겯고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부부가 우선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발목을 묶어 두는 것에는 그 두 사람만이 아니라 두 사람을 둘러싼 가족도 있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나, <응급남녀>에서 처럼 이혼을 하게 된 계기 중 가장 큰 것이 경제적으로 보다 여유있는 시어머니의 억압이 큰 요인을 차지한다. 즉 이 말은 돌려보면, 이혼의 주체가 부부이되, 그 원인이 부부가 아님으로써 오히려 부부는 그 이혼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을 했지만 계기만 있다면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뿐만 아니다. 이혼을 하고 독자적인 개인이 됐음에도 이혼 전의 가족이었을 때의 가족 관계들이 이혼 후의 개인을 독립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도 이혼의 후일담을 풍성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아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친정부모, 그리고 시부모는 갈등 요인이자, 동시에 그들을 여전히 하나의 공동체로 간주하게끔 헷갈리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가족과 개인이 혼재되어 분리되기 힘든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사진; 서울신문)

하지만 한때는 이혼이 결혼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식이나, 심지어 한 개인의 해방까지도 여겨졌던 트렌드가 최근에 있어서 그 반대의 조류로 등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한번 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최근 종영한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도 이혼 위기의 부부들은 결국 이혼 도장을 찍지 않았다. 그리고 이혼을 한 부부들조차, 자신들의 이혼을 되돌아 보며, 과거의 인연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가족들은 한때 그들이 이혼에 이르게 할 만큼 딜레마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결국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들은 보호받고, 갈등을 해결하고, 그래서  다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족을 이루고자 애쓴다. 

한때는 성취와 해방의 상징이었던 개인의 독립이 사회적 갈등의 파고가 높아지고, 사회적 안전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한에서, 취약할 뿐더러, 결국 믿을 건 다시 가족 밖에 없다는 복고적 결론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자유를 찾아 뛰쳐나갔던 양이 스스로 울타리 안으로 돌아오듯, 갈등을 겪던 부부들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봉합하고, 이혼을 하고 개인으로 돌아갔던 사람들조차,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가족을 다시 꾸린다. 그리고 그것이 이혼 후 후일담을 로맨틱하게 그려내는 새로운 조류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23. 12:16

워낙 바빠서 tv 드라마 하나 챙겨 볼 여유가 없는 친구가 웬일로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했다. 

부부 사이의 문제를 모처럼 진지하게 바라보는 드라마라며, 그러면서 과연 재학(지진희 분)과 은진(한혜진 분)의 불륜으로 시작된 드라마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귀추가 주목된다고 덧붙였다. 중년의 그 친구가 살아온 나날에서 짚어왔을 때, 설사 불륜이라 하더라도, 실제 부부 사이의 이혼이란 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자기 나름의 결론과, 결혼에 대해 모처럼 진지하게 접근하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부부의 외도와 갈등을 여타의 드라마처럼 무 자르듯 이혼이라는 결론으로 맺을 건지 기대 반 걱정 반이라고도 했다. 

(사진; tv 리포트)

그리고 드디어 종영을 맞이한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친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덕분에, 그 결론으로 인해 드라마적 완성도에 대한 논란까지 불러왔다. 

아마도 그것은 재학의 불륜을 알고 용의주도하게 쿠킹 클래스까지 잠입하며 복수를 다짐했던 미경(김지수 분)의 깊은 분노, 그리고 그 깊은 분노만큼이나 집착적인 사랑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오랜 세월 재학에 대한 사랑 만으로 거의 학대에 가까운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을 견디며 살아온 미경에 대해 드라마를 봤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도 이 부부는 이혼을 하지 않을까 라고 쉽게 기대(?)를 했었기 때문이다. 
은진의 외도가 성수(이상우 분)의 외도로 인한 보복성 해프닝의 성격이 강하고, 두 사람이 막말을 하며 혹독하게 상대방을 몰아세워도 이른바 '미운 정'이 느껴지는 것과 달리, 재학-미경 부부에게서는 함께 한 세월의 온기가 그보다 덜 느껴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드라마의 마지막까지, 그 냉랭함을 대신할 '정'과 '관계'를 설득하기에 <따뜻한 말 한 마디>의 논리가 상투적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외도로 인한 상처가 치유받았다고 혹은 치유는 아니더라도 봉합되었다고 드라마는 말하고 싶었으나, 시청자들은 그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바가 클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논리적 근거의 부족과 함께, 부부간의 문제를 다루는 우리 드라마에 숨겨진 '이혼'에 대한 환타지를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무시했다는 데서 오는 배신감도 있지 않을까.
일상의 삶을 견디며 사는 사람들이 기회만 주어진다면 짧게는 하루, 아니 1박2일, 길게는 해외 여행을 꿈꾸는 핵심은 바로 '일탈'에 있다. 그처럼, 부부 간의 문제를 다루는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에게, 현실의 자신이 불만을 가지고 사는 문제들이 드라마를 통해 속시원하게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또한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전히 일정한 시청률을 확보하고 있는 부부간의 문제를 다루는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클라이막스와 엔딩은 마치 못된 놀부를 처단하듯,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응징하고 통쾌하게 이혼을 선언하는 것으로 끝나기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따뜻한 말 한 마디>는 미경이 재학을 버리고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삶을 찾아 행복하게 사는 환타지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현실의 선택을 보여준다. 이혼은 그리 쉬운 게 아니라고, 어쩌면 상대방의 불륜 한번으로 손상된 자존심을 내세워 이혼하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과, 가족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익숙하지 않은 해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세계 수위의 이혼율을 보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세운 해법이 역설적으로 환타지적이거나, 진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사진 엑스포츠 뉴스)

이렇게 대중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따뜻한 말 한 마디>와 달리, 애초에 제목에서부터 두 번의 이혼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당연한 수순이듯, 주인공 두 사람의  두번 째 이혼을 목전에 두고 있다. 

준구<하석진 분)와 재혼한 은수(이지아 분)는 마무리 되지 않는 준구의 불륜으로 이혼의 위기에 놓인다. 은수의 전남편인 태원(송창의 분) 역시 새엄만 채린(손여은 분)의 딸 슬기(김지영 분)에 대한 학대로 이혼을 선언한 상태이다. 마치 두 사람은 제목이 정해준 메뉴얼처럼, 재혼을 하고, 다시 이혼을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심지어, 이지아는 준구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상태이다. 

3월 1일 은수가 준구를 만나 정리하듯, 애초에 은수와 준구의 결혼은 잘못된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설사 준구가 바람을 피지 않았더라도 자의식이 강한 은수는 준구의 집안에서 조금씩 말라가다, 언젠가는 또 다른 이유로 이혼을 선언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 그보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마치 탯줄을 자르지 않은 아이처럼, 비록 시어머니의 학대로 인해 이혼까지 했지만 여전히 정신적 유대의 끈을 놓지 않은 은수와 태원의 두번 째 결혼이 순탄치 않는게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에서, 두번 째 결혼은 마치 두 사람이 지난 시간 내렸던 첫 번째 이혼이라는 결정이 경솔했음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처럼 씌여지고, 두 사람들의 두번 째 파트너는 무엇을 어떻게 해도 결국 두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못하는 도구적 인간들일 뿐이다. 드라마는 그들이 만난 새로운 사람들이 문제적 인간이기 때문에, 두번 째 이혼에 봉착한 것처럼 그려내지만, 결국 두 사람의 근본적 문제는, 자존이라고 내세우면서, 첫 번 째 결혼의 탯줄을 끊어내지 못하는데 기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두 주인공의 두번 째 이혼을 들먹이며,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이르른 이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르고 있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은수와 태원은 두번 째 결혼의 붕괴 지점에 이르러서야, 지난날 자신들의 결정이 경솔했음을 시인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다른 분석도 가능하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세월의 더깨가 앉은 좀 살아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결혼과 이혼에 대한 현실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혼에 대한, 그리고 관계에 대한 따스한 가능성에 대한 천착이라면,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김수현이라는 노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냉소가 그대로 드러난다. 사랑을 담기에도, 가족이라는 그릇으로 포용하기에, 더더우기 개인의 자존감이 존중받기에는 더더욱 어색해져 버린 이 시대의 결혼이라는 거북살스런 제도를 야멸차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가정으로 다시 돌아간 미경도 어색하고, 태중에 아이를 넣고 이혼을 하겠다고 나서는 은수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애초에 결혼 자체가 미친 짓이기 때문일까. 설득력있는 이혼이라는 건 존재하는 것일까. 


by meditator 2014. 3. 2. 10:26

매주말 9시 55분 sbs를 방영되는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이제는 거장이라 칭송받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이다. 하지만, 천하의 김수현 작가라는 말이 무색하게, 동시간대 방영되는 mbc의 <황금 무지개>에 밀려 한 자리 수의 시청률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시청률만이 아니다. 애초에 캐스팅 과정에서 여러 배우가 번복되는 해프닝성 화제와 달리, 오히려 방영되고 있는 이즈음에서는 연기를 하는 배우는 물론, 내용조차도 화제의 중심에 오르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시청률이 높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김상중, 도지원, 조민기 등의 열연에 힘입은, 극적인 스토리 탓이 클 것이다. 그에 반해, 지금까지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이미 재혼을 한 은수(이지아 분)에, 일편단심 친구 안광모(조한선 분)를 외사랑하는 현수(엄지원 분)의 스토리가 별다른 기복 없이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은수의 아이를 둘러싼 실랑이요, 큰 사건이라야 광모의 결혼식장 도피 행각 정도? 그 마저도 은수와 현수는 자신의 자존심을 손상 받지 않으려 쿨하게 자신의 속으로 삼켜낸다. 하지만, 이 쿨하고 자존심 센 여자들에게 더 이상 자존의 울타리 속에 숨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미친 놈’이라 구박했지만 오매불망 놓지 못했던 광모가 드디어 현수를 여자로 보기 시작했으며, 아이조차 포기한 채 한 재혼의 남편이 바람을 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사진; 텐아시아)


현수와 은수는 자매간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천양지차다.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포기할 줄 모르던 은수는 시어머니를 보고 기함을 해 말리던 첫 결혼을 당차게 해치워버렸다. 하지만, 그 과단성있는 결심의 마무리는 이혼이었다. 그리고 다시, 명망있는 시댁에, 외아들이 버겁지 않냐는 언니의 말을 사사건건 나한테는 좋은 소리를 안해준다는 시기로만 잡아채 버리고는 아이도 나몰라라 뛰어든 결혼에서 다시 남편의 외도와,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거짓말을 목도하고야 만다. 그렇다고 현수가 나은 건 아니다. 일찍이 철들기 시작해서부터 마음에 품은 친구지만, 그 친구가 자신의 친구와 결혼을 올리려 할 때까지 그가 자신을 여자로 보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묵묵히 자신의 사랑을 혼자 삼켜왔다. 덕분에, 광모를 여전히 사랑하는 자신과, 광모를 놓지 못하는 절친과, 이제 드디어 자신을 여자로 보기 시작한 광모 사이에 우정은 지저분한 행보가 예상될 뿐이다.


현수든, 은수든 배울만큼 배우고 보기엔 야무지고, 어디 가서 남한테 한 소리 듣지 않을 정도로 똑똑해 보이는 여자들이다. 심지어 사리분별마저 똑부러진다. 그런데, 이제와 은수가 내가 잘못산 것이 아닐까 라고 자신에게 되묻고 되물을 정도로 삶의 딜레마에 빠져들게 된다. 두 사람 만이 아니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에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또 한 사람의 야무진 여성이 나온다. 은수의 전 남편 태원(송창의 분)과 결혼한 채린(손여은 분)이다. 이 여성 역시 참 야무지다. 시누이 태희(김정난 분)가 일찍이 간파했듯 만만치가 않다. 태원이 못하겠다고 나온 결혼을 시어머니의 실력 행사(?)를 통해 이루어 낼 만큼 추진력이 있다. ‘굴러들어 온 돌’이란 시누이의 평가에 참지 못하며, 자신의 맘에 들지 않은 일하는 아줌마 정도는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 생각하고, 식구들이 하나같이 물고 뜯고 빠는 전처 소생 슬기(김지영 분)에 대한 자신의 교육관을 피력하는데 거침이 없다.


이렇게 <세번 결혼하는 여자>에 등장하는 이른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야무지고 똑똑하다. 스스로 자신이 선택한 삶에 늘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려고 한다. 그런데, 드라마가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이 똑똑한 여성들이 ‘헛똑똑이’ 같다. 그토록 늘 자신의 삶에 주체적이려고 애썼던 은수가 궁극적으로 맞부닥치는 삶의 현실은 남편의 외도요, 그것을 덮으려 거짓에 거짓을 더하는 남편의 비겁함이다. 그런가하면, 현수는 자신을 여자로 보아주지 않는다며 감내해온 첫사랑의 남자는 여자라면 사죽을 못쓰는 바람둥이다. 그런데도 그 남자를 놓지 못한다. 자신의 동생에게 아이를 버리고 갔다며 상처를 팍팍 주면서, 정작, 자신은 결혼식장에서 도망치는 천하의 불한당을 마음에서 지우지 못한다. 채린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선택이란 이유만으로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태원과 결혼하고, 그와의 결혼 생활을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 못하는 것에 안절부절 못한다.


(사진; tv리포트)


마치 70넘은 작가는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나 잘 났소 해봐야, 다들 헤맹이 빠진 헛똑똑이들이라고. 아니 그렇게 자존감을 내세워 보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여자들이 마주치는 현실은 그녀의 엄마 세대가 살아낸 그 시절과 다르지 않다고 냉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댁의 갖은 학대를 이겨내지 못한 은수가 재혼을 통해 마주한 현실은, 시댁은 지극히 이상적이지만, 그조차도 결국은 또 다른 결박이요, 첫 결혼에서는 결코 꿈도 꾸지 못했던 불성실한 남편이다. 은수가 비난하듯, 자신을 여자로 보아주지 않는다 숨겨온 사랑 때문에, 절친과의 연적이 될 지저분한 인간 관계의 늪에 빠져들 뿐이다. 그녀들이 자신의 자존을 위해 선택한 삶의 기회들이 또 다른 함정으로 그녀들을 빠뜨릴 뿐이다. 결국 ‘최선의 선택’이란 말이 유명무실해진다. 아니 작가는 애초에 삶에 있어서 최선의 선택이란 없다는 것을 냉소적으로 단정짓거나, 자신의 선택이란 함정에 빠져 삶의 우연성을 감지하지 못하는 요즘 여자들의 청맹과니짓을 비웃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14회에 이르기 까지 김수현 작가는 자신의 의지로 헤쳐나가려 했던 이 시대 젊은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릅 보여주기에 진력한다. 그러기에 드라마는 지긋이 그녀들의 삶을 쏘아보는 작가의 시선처럼 냉랭하고 관찰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남편의 외도와 그에 이은 거짓말을 알게 된 은수와, 이제 와 자신을 여자로 보아주기 시작한 첫사랑을 마주한 현수는 더 이상 그녀들이 자신을 철벽처럼 쌓아왔던 자존의 벽 속에 숨어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런 그녀들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는 70넘은 김수현 작가의 몫이다.


과연 그녀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자신의 자존을 보존할 삶의 선택을 할 것인가, 그녀의 엄마들과 다르지 않은 두루뭉수리한 행복의 선택을 할 것인가는 결국 김수현 작가가 바라본 여성의 행복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것이 궁금하다. 

by meditator 2013. 12. 23. 10:47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송미경(김지수 분)은 남편 유재학(지진희 분)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줄곧 말한다. '사랑해'라고, 하지만 그런 아내의 애닳은 사랑 고백에 대한 지진희의 반응은, '부담스러워'이다.

반면, 유재학과 밀어를 나누었던 나은진(한혜진 분)은 비를 맞으며 유재학에게 말한다. 어떻게 당신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남편에 대한 연민이 깊어지냐고. 단 한 마디도 부인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지 않던 남편 김성수(이상우 분)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울음을 쏟아 놓고서는 내가 마음놓고 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너라고 고백한다. 
단 2회에 불과했지만, 이미 이혼을 들먹이고 있는 성수, 은진 부부와 달리, 오히려 보면서 저 부부는 어떻게 살까 라는 마음이 드는 건 재학, 미경 부부이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성수, 은진 부부에게는 연민이나마 서로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는데, 정작 결코 이혼을 하지 않을 거라는 재학, 미경 부부 사이에는 온기가 없어 보이니까. 그러면서 드는 질문은 부부는 무엇으로 살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학자들에 따라 지금과 같은 부부와 아이 중심의 소가족 형태가 인류가 인류이던 그 처음 시절부터 가지고 왔던 모양새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형태와 상관없이, 이른바 '사랑'이라는 이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족의 탄생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탄생과 맞물리는 것으로 학자들은 정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거개가 집안에서 정해준 정혼자가 싫어 도피를 하거나, 자유 연애를 하는 이야기를 다룬 것은 그저 서양 조류에 따른 유행이 아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그저 경제적 제도의 변화만이 아니라, 그 경제적 제도를 담당하는 인간들의 모양새조차 그에 맞게 변화시켰으니까. 근대 이전의 농업 중심 사회가, 그것을 효율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대가족 중심의 가부장적 관계를 추동시켰다면, 근대 이후의 핵가족 관계는 산업노동자로 재편된 근대적 인간형에 맞는 가족 구도인 것이다. 해체된 대가족을 등지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개별의 인간군상들을 맺어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상 최고의 이념으로 간주하는 '사랑'인 것이다. 개인의 자아가 공동체 속에서 함몰되어 살아가던 집단 일부인 개인을 일깨운 근대의 자명종이었다면, '사랑'은 그 개인을 근대사회의 근간으로 묶어놓는 '팡파레'였다. 

네 이웃의 아내
(사진; tv데일리)

그래서 우리는 철썩같이 부부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사랑'이라고 믿으며,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사랑업이 집안의 강원으로 결혼한 재학과, 그를 목숨을 다해 사랑할 것 같은 미경 부부를 '불행'의 편에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네 이웃의 아내>에서 일찌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을 한 상식(정준호 분)과 경주(신은경 분) 부분가 문제를 원초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간주하게 된다. 경주의 선물을 낚아채 자신의 사랑의 증표로 만들어 버린 채송하(염정아 분)에 이르르면, 뒤틀린 관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공공연히 떠도는 속설이지만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이라는데? 그렇다면 그 나머지 장구한 기간 동안 부부를 채워가는 것은?
흔히 우리 부모님 세대분들은 그 나머지를 채워가는 것을 '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세대들은 웬지 징그러워한다. 마치 집안의 강요로 다시 만난 정혼자를 보듯이, 예전 같으면 소닭보듯 하는 게 당연한, 일찌거니 결혼을 했으면 손주 볼 나이가 된 부부조차도,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시대가 되었다. 왜?

'사랑'이라는 지상 최고의 이념으로 뭉쳤다지만, 근대 이후에 탄생된 가족은 우월한 남성 노동력을 과시하며 가정을 지탱하는 돈을 벌어오는남편과, 그 남편 아래에 복무하는 아내라는 가부장적 구조를 가져왔다. '정'으로 살아오셨다고 하지만, 당신이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하자면 '홧병'이라는 대한민국 여성만이 가진 고뇌의 시간을 넣지 않고서는 구성되지 않는 인고의 시간을 줄줄이 읊어야 하는 우리 어머니 세대만 보아도 당장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대신 어머니들은 밖으로 도는 아버지 대신 가정을 장악하며 늘그막에 실권자로 등극하는 궁극의 권위를 얻는다. 

(사진; 세번 결혼하는 여자 은수 역의 이지아; 오마이 뉴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 이후의 자식들은 더 철저하게 '사랑'으로 뭉친다. 이제 월급 봉투를 가지고 위세를 떨 남편은 없으며, 남편과 아내는 동등하게 '사랑'으로 만나고, 가정 내의 관계도 동등하다. 동등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데, 이제 그 '사랑'이 문제다. 남편과 아내로 만나 사랑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세계 최고의 노동 시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직장을 가진 남편과 아내들에게 집은 그저 머물 뿐, 대부분의 삶이 직장에서 이루어 진다. 그래서 오피스 와이프라는 단어가 탄생된 것이다. <네 이웃의 아내>의 상식과 경주처럼, 직장 내에서 만난 이들이 정작 '사랑'으로 이루어진 부부보다 더 알뜰하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아끼게 된다. 그런가 하면 빈둥지 같은 집은 완벽한 아내 경주를 흠모하는 선규와 같은 증상을 발생하기도 한다. 꼭 필요만이 아니다. '사랑'과 같이 불현듯 찾아오는 감기와 같은 증상은, 우연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은진의 밝은 모습에 마음이 활짝 열리는 재학처럼 어쩔 수 없는 열병에 빠지게 만든다. 이런 시대에 부부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 그 질문을 드라마는 대신 물어주고 있는 중이다. 

3일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이혼을 결심한 은진을 흔들어 놓는 건 '불행한 아이가 되고 싶지 않다'는 딸의 애절한 말 한 마디였다. <세 번 결혼한 여자>에서 처럼 이제 이 시대의 부부들을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건, 개인의 행복과 개인을 희생한  가족에 복무하는 집단 구성원 사이의 갈등이다. 은수(이지아 분)는 자신의 행복을 짓밟는 시댁을 떨치고 이혼까지 감행했지만, 여전히 은수의 발목을 잡는 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이다. 
대부분의 부모 세대들이 이럴 때 시댁과의 갈등을 인고하며,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세월을 살았다면, 이제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다른 선택을 한다. 아이보다 자신의 행복이 먼저라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미경의 배경이 되는 것은 완벽한 주부로써의 모습이지만, 이제 그것은 우리에게 공허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시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까지는, 아이들을 품고 기르며 온기를 나눠가질 공동체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해 우리를 고민에 빠뜨린다. 자는 아이의 모습을 고민스레 바라보는 은진처럼.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대 월,화 드라마로 방영되는 <네 이웃의 아내>와 <따뜻한 말 한 마디>는 표류하고 있는 이 시대 부부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그저 남의 집 부부 바람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시대 부부의 속살이자 바로미터인 것이다. 


by meditator 2013. 12. 4. 11:05

2004년 영국의 미술가 500명이 20세기 100년 동안 가장 영향력이 컸던 미술품을 뽑았다. 

결과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2면화'를 제치고, 마르셀 뒤샹의 '샘'이 그 영광을 차지했다. 
20세기에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 막상 그 작품을 보면, 대다수의 입에서는 '애개~'하는 단어가 튀어나오기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흔하디 흔한 남자 변기를 거꾸로 엎어 놓고, 거기에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 화장실에 걸려 있어야 할 흔하디 흔한 남자 변기는 마르셀 뒤샹의 손을 거쳐 예술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마르셀 뒤샹은 그 과정을 통해, 전시장에 걸려 고결한 예술 작품이 되어가는 그 전 세기의 미술을 비판하고, 가장 평범한 대중의 삶 속의 물건들이 예술적 '오브제'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내었다. 그저 변기였던 마르셀 뒤샹의 작품은 잃어버렸다 다시 복원이 되었음에도 100만 달러가 호가하는 예술품이 되었다. 

변기였다 20세기 최고의 예술 작품이 된 마르셀 뒤샹의 '샘'은 가장 통속적인 사람 사는 이야기가 텔레비젼을 통해 '막장'이 되었다가, 소프드라마류의 아침 드라마가 되었다가, 때로는 대중들의 뇌리에 남을 명작이 되기도 하는 우리네 드라마와 닮았다. 별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망작이 되기도, 명작이 되기도 한다. 김수현 작가가 새로 시작한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보면 이런 생각이 더욱 분명하게 다가온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여주인공이 세 번 결혼한다는 충격적 제목에서 오는 '스포'만 차치해 놓고 본다면 어디선가 본듯한 이야기들이다. 스물 아홉에 딸 아이 하나 데리고 이혼을 해 혼자가 되었다가, 멋진 재벌남을 만나, 결국은 딸내미를 친정에 맡기고 재혼을 한 여자, 하지만 늘 '사랑해'를 주문처럼 외우는 남편에, 지각있는 시부모님 등 무엇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환경이지만, 두고온 딸내미로 인해 늘 얼굴 한 편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여자, 우리는 이런 여자를 <사랑과 전쟁>이나, 아침드라마 들에서 종종 조우해 왔었다. 그녀의 언니도 마찬가지다. 독립적인 노처녀, 그리고 그녀의 오랜 베프 남자와 여자, 그녀는 오래도록 남자를 짝사랑하지만, 남자가 보낸 사랑의 짝대기는 늘 방향이 그녀를 비껴가고, 이제는 친구의 남자를 사랑하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만든다. 

하지만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들이, 김수현이라는 이제 '대가'의 칭호가 무색하지 않는 작가의 품 안에서는 매우 신선한 이야기들로 둔갑을 하기 시작한다. 
보통 아침 드라마들이 첫 결혼을 이혼으로 종지부 찍게 만드는 길고 지리한 '시월드'의 고통에 주목하는 것과 달리, 김수현 작가는 단번에, 이야기의 시점을 아침 드라마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끌고 온다. 마치 우리가 흔히 보던 아침 드라마의 결론- 아니 아침드라마로 갈 것도 없다. 요즘 아주머니들과 어머니들을 매료시킨 <오로라 공주>의 상황이 딱 요거다- 그렇게 포악한 시어머니와 간악한 시누이로 인해 고생하던 그녀는, 결국 지옥같은 시집을 떠나, 더 부자이고, 더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는 해피엔딩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히트 작가 김은숙이 '자기 복제'를 한다는 것을 시인하며, 그건 아무나 하냐며 자랑하는 세상에, 김수현 작가가 '대가'인 이유는, 우리가 익숙하게 혹은 드라마들이 익숙하게 사용해 왔던 서사에서 용감하게 한 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했어요 라는 결론에서 더 나아가, 그녀가 정말 행복했을까? 라는 질문으로 <세결여>는 시작된다. 그러면서, 부잣집 남자와 교양있는 시부모님과 다시 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그녀가 포기한 것들이 그녀를 여전히 짖누르고 있고, 그녀를 놓지 못한 전 남편의 인연이 여전히 한 자락 그녀의 삶에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궁극에 가서는 행복이라 부르는 것들이 모래성처럼 흘러내릴 지도 모른다. 

본듯한 이야기들을 접근하는 방식, 시점이 달라짐으로써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질감으로 우리게게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스토리는 여느 멜로 드라마처럼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고 사랑하고 아우다웅거리는 이야기들로 흘러가게 될 것이지만, 하지만 사람들이 흔하게 매료되는 멜로 드라마의 그 플롯의 익숙함에, 김수현 작가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의의'는 사라지지 않느다. 그 누구보다 통속적인 이야기에 있어서 '귀재'인 작가가, 바로 그 '통속성'의 함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전히 김수현 드라마를 자기 복제를 거듭하다 단물을 다 빼먹어가는 유명 작가들의 드라마와 달리,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당대성을 지니는 문제작으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출연하는 배우의 부도덕한 스캔들로 인해 얼룩지기는 했지만 <천일의 약속>이 젊은 여성의 치매라는 색다른 소재를 이용해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했다면,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재혼이라는 소재, 아니 애초에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김수현식의 조사 보고서가 될 듯하다. 물론 때로는 그 과정에서, 작가의 노파심이 앞서고, 그래서 작가의 목소리가 드라마적 재미보다 높아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2013년에, 김수현의 문제제기는 이 시대의 결혼 풍속에 의미를 지닌다. 


by meditator 2013. 11. 1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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