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 결혼하는 여자>가 종영되었다.

애초에 제목을 세번 결혼하는 여자로 삼았던 만큼, 극중 주인공이었던 오은수(이지아 분)가 과연 세 번째 결혼을 누구와 할 것인가가 세간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우선은 고부간의 갈등으로 인해 이혼을 했지만 헤어진 이후에도 애틋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던 전남편 정태원(송창의 분)과의 해후가 가장 설득력 있어 보였다. 하지만, 두번 째 결혼 대상이었던 김준구(하석진 분)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서, 아이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여론이 생기면서, 결국은 아이로 인해 준구와 다시 살지 않겠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통속적인 가능성을 차치하고, 여주인공 은수가 선택한 세 번 째 결혼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결혼이었다. 즉 자기 자신만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사진; 엑스포츠 뉴스)

<세번 결혼한 여자>를 문학 장르로 치자면, 겉으로는 남녀 간의 사랑과 이혼을 다룬 '순수 애정 소설'같지만, 오히려, 결론에 이르러 봤을 때, 작가 김수현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자 하는 '목적 문학'에 가까운 작품으로 보여진다. 

여주인공 오은수는 마치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여주인공 노라처럼, 자신을 속박하던 시집살이의 굴레로 부터, 그리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부 관계로 부터 자유를 찾은 여성이다. 드라마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전남편 정태원의 입을 빌어, 그리고 준구 이모의 입을 빌어, 세상의 시각을 전한다. 자신을 포기하라고, 그러면 또 다른 행복이 찾아올 거라고, 너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라고. 하지만 여주인공 은수는 그런 세간의 관습에 답한다. 이것이 나라고. 앞으로 어떤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나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을 아이를 위해 포기하느니, 차라리 후회를 택하겠다고, 뼈를 깍는 아픔을 겪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인생의 풍파를 겪은 나이의 노작가 답게, 물론 오은수의 선택을 마냥 해피엔딩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오은수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기 위해, 그녀가 낳은 두 번째 아이를 포기해야만 하는 댓가를 치뤘다. 작가는 마치 그것이 자신을 선택한 댓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삶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오은수의 선택이 이 시대에 분명 의미있는 선택으로, 삶의 한 유형으로 받아들여지길 김수현 작가는 강하게 말하고 싶은 듯하다. 

오은수 만이 아니다. 그녀의 언니 오현수(엄지원 분)가 선택한 삶도 마찬가지다.  15년을 짝사랑 했던 사람과 함께 살아가지만, 그것이 당연히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삶도 또 다른 작가가 말하고 싶은 삶의 유형이다. 마지막 회, 은수는 말한다. 정작 언니처럼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이야말로 결혼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런 동생의 정의에 대해 언니 현수는 말한다. 결혼을 한다면 안광모(조한선 분)의 어머니와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해서 피곤해서 싫다고. 이것을 통해 작가 김수현은, 우리 사회에서 사랑과 결혼은 결코 하나의 순차적 과정이 아닐 수도 있으면, 결혼이란 것은 그저 사회적 제도로, 이제는 이 사회 여성들의 삶에 질곡으로 자리잡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변하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특히나 주말 온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에서,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보여준 작가의 시선은 파격적이다. 작가의 바로 전 작품, <무자식 상팔자>에서도 현수 역을 맡았던 엄지원이 분했던 안소영 역을 통해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삶의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작품의 전체적 기조가 대가족 제도의 행복을 주제로 삼는 한에서 그 대안적 삶의 존재는 대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용해되고 말았었다. 하지만 이제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작가 김수현은 보다 적극적으로 삶의 또 다른 대안으로서 '싱글'의 위치를 보다 부각시킨다. 

하지만 한계 역시 분명하다. <무자식 상팔자>에서도 싱글이지만 가족 속에 어우러져 그 싱글의 삶이 무디어 졌듯이,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은수 역시, 독립적 싱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계적 확대 가족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은수는 독립적이라 하지만, 그녀의 삶은 그녀의 친정 부모와, 언니라는 모계적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다. 언니인 현수와 광모의 삶도 결혼만 하지 않았을 뿐 그들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현수 가족의 그림자는 짙다. 그런 한에서, <세번 결혼하는 여자>가 대안으로 내세운 '싱글'은 제한적이다.

또한 대부분의 목적 의식을 내세운 문학 작품이 가지는, 자신의 주제를 완성하기 위해, 작품성의 매끄러움을 희생하는 경우가 많듯이, <세번 결혼하는 여자> 역시 오은수라는 똑부러지는 삶의 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주변 캐릭터들을 훼손했다. 

이혼을 했음에도 한결같은 오은수 바라기였던 전남편 태원은 갑자기 새로 결혼한 채원(손여은 분)이 가정 폭력의 희생자라는 것을 알자 태도를 돌변한다. 심지어, 은수를 찾아가 함께 하는 행복 운운하는 오지랖까지 펴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세번결혼하는여자’ 손여은, 송창의 아이 임신에 ‘행복한 입덧’

오은수를 제외한 또래의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사이코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던 채원은 남편의 사랑을 찾자 공주가 되었고, 알콜 중독에 헤매던 다미 역시 준구의 사랑 속에 사랑스러운 천사가 되었다. 은수가 독립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동안, 그녀 주변의 여성들은 가장 의존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결론은, 여주인공의 선택과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마치, 작가가 저런 의존적 인물은 저런데서 행복을 찾아야 하고, 여주인공 같은 사람은 아픔을 겪더라도 독립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묘한 '선민 사상'을 가진듯이 보여 드라마적 일관성을 놓친 듯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삶이 저렇게 아롱이 다롱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제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회, 행복을 찾은 채원과 다미의 캐릭터는, 그간 그들이 드라마 내내 보여주었던 돌출적 캐리터의 결론으로는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보다 아쉬운 것은, 여성 캐릭터가 독립적인데 반해, 드라마 내내 일관되게 한심해 보였던 남성 캐릭터들이다. 마치 작가가 '쯧쯧쯧' 하며 바라보듯이, 그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들이 불쌍해 보일만큼, 수동적인 남성 캐릭터의 존재는, 비록 작가가 바라보는 이 시대의 대다수 남성이 그렇다 하더라도, 영웅 드라마의 감정 과잉의 영웅만큼이나, 단편적인 캐릭터로 일관된다. 충동적인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듯이 보였던 준구가 마지막 회 다미와 함께 행복해 하는 모습은 그가 그간 보였던 불성실을 사랑으로, 혹은 삶의 아이러니로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분명 김수현 작가가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결혼과 이혼만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이 시대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오은수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이 둘러리를 서는 듯한 스토리는,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설득은 되지 않는 껄끄러운 선동문으로 남는다. 


by meditator 2014. 3. 31. 0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