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뚜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에서 16살 소년 블라디미르는 옆 집에 이사온 지나이다를 보고 첫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감정을 40살이 넘은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니고, 남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제 <하늘재 살인 사건>에서 스무 살의 윤하(서강준 분)는 동급생의 어머니 정분(문소리 분)에게 [첫사랑]책을 건네며 이 문장에 붉은 줄을 그어 놓는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윤하에게 수줍은 러브레터를 보낸 정분의 외동딸 미수(이세영 분)는 첫사랑에 붉은 줄 그어진 글이 자신의 연서에 대한 답신이라 오해한다. 미수에게는 책 [첫사랑]의 내용은 들어오지 않았고, 마지막 줄의 고통은 그저 사랑의 산통에 불과한 것이었다. 비극이 잉태된다.
드라마의 마지막 [첫사랑] 소설 책과 코티 분을 하늘재에 묻으며 미수는 혼잣말한다.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녀와 소년에게 침을 뱉겠다고. 아마도 미수의 관점에서 보면, 엄마와 윤하는 뚜르게네프의 [첫사랑]은 블라디미르의 난봉꾼 아버지와 그에게 농락당한 지나이다와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재 살인 사건>은 딸조차 침을 뱉어 덮은 정분과 윤하의 사랑 이야기, 총을 맞아 죽어가는 정분을 따라 아내인 미수를 아랑곳않고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 윤하의 속사정을 헤집는다.
전쟁은 사람들에게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이를 빼앗을 뿐아니라, 그 속에 깃들어 보호받던 울타리조차 깡그리 날려버린다. 남이 해주던 뜨신 밥만 받아먹던 아내 정분이 바로 그 처지다. 시부모님과 남편과 살던 집조차 빼앗기고, 어린 딸과 아픈 동생을 건사해야 하는 정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떡을 만들어 저자거리에 나와 파는 것이다. 하지만 곱디고운 아내였던 정분은 전쟁통의 저잣거리에 서는 것자체가 고통이다. '떡 사세요'라는 말 한 마디조차 힘들다. 그런 그녀에게서 윤하는 아기인 동생을 맡긴 채 떡 좌판을 들어 뺑소니친다. 거기까지는 흔한 거리의 도둑놈 이야기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달라지는 건 그 다음부터이다. 끝내 자신의 떡을 훔쳐간 소년을 뒤쫓아간 정분은 소년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그의 머리채를 잡고 악다구니를 쓰는게 아니라, 어른이라고 다 어른인 게 아니라고. 떡 사세요 한 마디로 못하는 내가 무슨 어른이냐고. 순간 배고픔을 못이겨 떡을 훔쳐 달아나던 소년과, 시장에 나와 말 한 마디 못하던 새댁은 나이를 건너뛰어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하나가 된다. 그리고 이제 소년은 잔술을 팔러 새댁 옆에 나란히 서고, 말 한 마디도 못하는 그녀를 위해 소리쳐 준다. '떡 사세요!' 소년의 독려에 새댁의 목소리도 높아간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전쟁이 네 꿈을 빼앗가 가면 안된다'던 새댁의 말대로 선생님이 되고자 사범학교에 들어간 소년은 거기서 동급생의 어머니 정분을 다시 조우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와 함께 하기 위해 동급생이었던 미소와 결혼까지 감행하는 희대의 막장극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리고 소년의 숨길 수 없었던 무모한 사랑은, 코티분 하나로, 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소년의 사랑을 집착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새댁 정분이 나타나지 않은 저잣거리에서 목놓아 정분을 찾던 소년의 울음은 애처롭다. 마찬가지다. '난 엄마야, 엄마야'라며 가슴을 쥐어 뜯던 정분의 자학을 이겨버린, 결국 코티분을 자신의 장롱 깊숙이 숨겨버린 여자, 아니 딸 미소의 정의대로 소녀 정분의 마음도,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윤하뿐이었어'를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이해가 된다. 꽃물로 얼룩진 옷을 입혀 그대로 묻어달라던 잔망스런 소나기의 소녀와, 자기 슬픔에 못이겨 시냇물을 튕겨대던 소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니 그저 치기어린 수준을 넘지 못하는 사랑이라 담아두기엔 두 영혼의 간절함이 깊다. 전쟁이 그들에게서 그렇게 많은 것을 앗아가버리지 않았다면 순탄했을 그들의 삶이, 전쟁으로 인해 잃은 많은 것들로 인해 왜곡되고 끔직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들 담아야 하기에 저잣거리에서 동지애를 나누는 듯한 두 사람의 관계가, 소년소녀의 남녀 관계로 곧바로 치환되는 과정의 개연성이 좀 부족해 보였던 것이 굳이 흠이라면 흠이겠다. 하지만 그렇게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공감가게 만드는 <하늘재 살인 사건>은 정분 역의 문소리와, 윤하 역의 서강준에게 의존하는 바가 크다. 엄마이면서, 여전히 소녀같은 여인을 표현해 내는데, 문소리는 더할 나위 없다. 그녀의 애처로운 연기로 인해, 딸이 불쌍한 처지라는 것조차 염두에 두기 힘들다. 어른이 되어서도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상태에 여전히 머무는 듯한 서강준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사립문을 나서면 자박자박 낙엽 소리가 들려올 듯한 늦가을의 정취가 흠씬 느껴지던 배경도 적절했고. 그 예전 <베스트셀러 극장> 때의 잔향이 그득했다면 오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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