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부터 12월 13일까지 4부작으로 방영된 <sbs스페셜- 바람의 학교>는 스쿨픽션이라는 새로운 다큐 양식을 통해 현실 교육의 문제점, 현재 학교 속에서 벌어지는 소외의 문제를 짚었다. 그리고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12월 17,18 양 일간에 걸쳐 kbs1을 통해 방영된 <다큐1>의 교육 혁신프로젝트 <학교의 진화>는 바로 그 문제 제기한 '학교'의 문제를 짚는다. 




변화하는 시대, 변화를 요구받는 학교
아마도 현재 우리 사회의 정규 교육 과정으로 인정받고 있는 '학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말은 이제는 사라진 '국민학교'라는 말일 것이다. 이제는 그 정체성 분명한 단어 대신 단계별로 초등, 중등, 고등 학교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교육 현장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은 바로 그 '국민교육 헌장'을 외우던 그 시절의 '국민학교'이다. 즉, 산업 국가가 원하는 인재를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정해진 교육 과정을 통해 일정 수준에 도달하도록 교육시키는 곳이 바로 현재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학교'라는 곳이다. 철학자 푸코는 그런 제도권 교육의 학교를 '개인을 유용한 사회적 자원으로 키워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 사회 '규율 권력'의 실현체로 보았다. 그래서 학교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을 생산해 내며', 나아가 '인간 자체'를 만들어 내는 기관으로, 공장, 감옥, 수도원, 군대 조직과 동일한 '감금형'의 규율 지배적 공동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성격을 띤 학교에서는 규율과 그에 대한 제재가 우선적일 수 밖에 없고, 교사는 '지식'의 전수자로서 학생들을 '억압'하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푸코의 생각이다. 그리고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오늘날 학교 현실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은 바로 이 '푸코'의 냉정한 철학적 인식의 기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은 더 이상 사회를 '절대적 지식의 전수와, 그 실행인'들의 집합체로 사회가 구성되는 산업사회를 넘어, 위계가 무색해지는 네트워크 중심의 혹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패러다임의 새로운 경제 질서, 사회 질서의 사회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그 본질은 여전히 자본주의이지만, 더 이상 산업사회적 '지식'으로 현재, 혹은 미래의 사회를 규정하거나 대처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당연히 이제 더 이상, '공장제' 식으로 찍어내듯 전달, 전수되는 교육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지 예측 미지수인 미래 사회에서는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학교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아니 이제 더 이상 감금형의 교실에서 자신의 미래를 기약하지 못하는 아이들로 인해 변화가 강제되고 있는 상황이다. 



4부작 <sbs스페셜-바람의 학교>에서 시작은 이런 기존의 제도권 학교 교육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바람같은 아이들에 대한 '대안' 모색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찾은 것은, 아이들 각자의 문제점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들의 꿈을 찾을 수 없는 학교, 꿈을 위해 견뎌야 할 이유가 없는 학교였다. 즉, 이제 현실의 학교는 그 교실에서 수년간 입시라는 골문을 향해 견뎌내는 아이들을 제외한 다른 꿈을 꾸는 아이들, 아니 입시라는 맹목적 목표에 쫓겨가면서도 갈증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꿈을 생각할 여지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어려운 오이디푸스도, 버거운 공연 과정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으면 짧은 시간에라도 기꺼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바람의 학교>는 증명해 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다시 돌아간 학교는, 그 가능성을 숙제로 남겼다. 

자유학기제, 시험없는 학교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작은 답을 <다큐 1-학교의 진화>가 마련한다. 전국에서 뜻을 가진 20여명의 교사들을 시작으로, '자유학기제'라는 새롭게 모색되는 제도 속에서,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한다. 

시험이 없는 학교는, '시험'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2016년 전국의 중학교에서 자유학기제가 실시될 예정이고, 이미 다수의 중학교에서는 시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중이다. 자유 학기제에서는 한 학기동안 시험의 부담없이 여러가지 토론, 체험, 활동 중심의 수업 모형이 시도되는데, 이에 대해 '어른'들은 아이들이 공부를 게을리할까 걱정이 앞선다. 

이런 어른들의 노파심에 대해 하지만 일찌기 학교라는 제도를 강제해 온 '시험'이란 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말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시험이냐고? 막상 사회에 나오면 시험은 '운전 면허 시험'말고는 없는 세상에서, 왜 어른들은 '시험'에 연연해 하는 것이냐고, 오히려 '시험'은 아이들로 하여금 애초 '공부'의 목적을 잊은 채, 시험만을 위한 '파블로프의 개'가 되게 한다고. 자유학기제는 바로 그 공부의 목적을 '본말이 전도되게 한 '시험'을 떠나 아이들이 스스로의 '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시도하고자 한다. 

시험과 수업 진도가 사라진 교실에서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다양한 직업 체험을 해보기도 하고, 프로젝트를 마련하여 각종 활동을 펼쳐나간다. 그 과정에서 놀란 것은 선생님들이다. 사실 다른 어른들처럼 시험이 없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자칫 흐트러질까봐 우려했던 선생님들은 시험이 없어도 아이들이 즐겁게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을 추동하는 본질의 힘은 시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시험이 아닌 활동을 하며 아이들도 자신들을 발견해 나간다. 자신이 관심있는 것들에 대해 '두려움'없이 움직인다. 생명 과학 교과서의 모형을 실제로 만들어 보면서 지식의 깊이는 총체적이면서 깊어져가고, 직업 체험을 하며 비로소 자신의 꿈을 찾는다. 

그렇게 수업 시간에 졸거나, 혹은 어떻게 하면 피씨방을 가거나 게임을 할까 골똘하던 아이들은 '자유학기제'라는 풀어진 물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기 시작한다. 어느 학교는 아이들이 스스로 영어 공부를 위한 앱을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학교는 학교 방화벽에 부딪쳐 죽는 새들을 위한 부딪침 방지 스티커를 기획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학교 내에 자치 시설을 위한 쉼터나 조리실을 기획하기도 한다. 

이 과정은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도 처음 가보는 과정이기에, 때론 그 과정에서 '선생님'으로서의 '존재론'에 막막해 하기도 하고, 학생들은 시간이 흘러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없기도 한다. 하지만, 그 첫 발자국은 때론 실패라도 자신들이 딛은 거라, 그 걸음의 웅덩이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또 다른 발걸음을 띨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몇몇 학교, 뜻있는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자유학기제'를 다룬 <다큐1-학교의 진화>는 그저 교육부 시행령에 따른 자유학기제를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이 새로운 시도가 현재 교육 현실, 그리고 사회 발전의 과정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규정하고자 애쓴다. 그것을 위해 실제 SAT를 반영하지 않는 미국 햄프셔 대학의 교육 과정에서부터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애썼다. 또한 자유학기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의 선생님들의 주저함과 고민들을 가감없이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자유 학기제가 진행되는 학교 교육 현장 밖에서, 뒤처진 진도를 먼저 뽑아야 한다고 홍보하는 학원의 실상을 드러내며 학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교육 풍토의 현실도 짚는다. 

무엇보다 <학교의 진화>가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 교육 현장의 모순이다. '입시 교육'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현실에서 아이들은 스스로의 꿈은 사치인 양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숨죽여 자신을 짖누르고 있는 상황를 보여주며, 자유학기제라는 쉼표를 통해 아이들이 '귀차니즘'을 떨어내고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주체적 인간으로 설 가능성을 열어보인 것이다. 더불어 활기넘치는 공간으로서의 학교도 함께. 

by meditator 2015. 12. 19. 16:54

소파에 거만하게 기대어 앉은 장동민이 앞의 제작진들에게 호기롭게 큰 소리를 친다. 조금 뒤, 조명이 꺼지고 급 정색을 하며 일어난 장동민은 여태까지 큰 소리를 치던 제작진들에게 고개를 깍뜻하게 조아리며 인사를 한다. 이렇게 방송의 겉과 속을 까발리는 듯한 짧은 스폿 광고로 줄기차게 시청자의 시선을 끌어안고자 애썼던 <방송국의 시간을 팝니다(이하 방시팝)>가 12월 10일 첫 회에 이어, 18일 2회까지 마쳤다. 잔뜩 벌려놓았던 광고 덕인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던 1회가 케이블 프로그램의 성공을 가늠하는 1%의 시청률을 넘었지만(1회 1.189% 닐슨 코리아), 2회만에 0.872%로 떨어짐으로써 갈길이 멀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내놓고 큰 소리를 친 명목은 그간 지리멸렬했던 각종 예능 프로그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출연자들에게 프로그램의 제작까지 맡긴다는 취지에서 <방송국의 시간을 팝니다>라고 했지만, 출연자인 장동민, 유세윤, 이상민 등이 각자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프로그램으로 시청률을 가지고 승부를 본다는 기본적인 컨셉에 있어, <마이 리틀 텔레비젼>이 연상된다. 즉, 내놓고 말은 할 수 없어도 <마이 리틀 텔레비젼>이 없으면 등장할 수 없었을 프로그램 중 한 편인 것이다. 그리고 올 한 해 여러 편 등장했던 <마리텔>의 아류들처럼 <방시팝> 역시 청출어람 대신 귤화위지(枳;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가 되었다. 


橘化爲枳

<마리텔>의 청출어람? 
단지 <방시팝>은 그간 주도면밀하게 <마리텔>을 연구한 듯, 그간 <마리텔>이 가지고 있던 단점들을, 그리고 <마리텔>의 모작이라 비교될만한 지점들을 '소거'한 채 신선한 콘텐츠인양, 방송국의 시간을 운운하며 등장했다. 
그간 <마리텔>에서 한 시간 내에 보여주기에 버겁다고 매번 지적되던 많은 출연자들을 <방시팝>은 정리하여, 네 사람, 그것도 첫 번째 회차에는 초짜 출연자인 유재환을 제외한 세 사람만의 콘텐츠로 방송을 꾸렸다. 거기에, 이 방송, 저 방송 보여주느라 한 방송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는 <마리텔>의 또 다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한 사람의 콘텐츠에 충분한 시간을 제공했다. 또한 답답한 마리텔의 카메라와 제작 방식을 벗어나, 출연자 1인의 아이디어로 제작되는 콘텐츠이되 그 공간적 영역에 있어서 제한을 두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방식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마리텔>의 청출어람을 지향한 <방시팝>, 그렇다면 그 연구 성과는 어떠했을까? 자칭 cj의 아들이라 자평하는 장동민을 비롯하여, 역시나 cj 계열 케이블 예능 <더 지니어스>, <the bunker>를 비롯한 프로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상민, 그리고 유세윤이 합류했다. 그리고 '무도가요제'를 통해 각광을 받기 시작한 유재환이 깜짝 출연자로 합류했다. 

장동민, 그리고 이상민, 유세윤은 그들의 면면에서 부터 '아이디어'가 특출한 연예인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들이다. < 더 지니어스; 그랜드 파이널>에서 쟁쟁한 스펙의 출연자들을 쥐락펴락했던 장동민이나, 장동민만큼은 아니지만, 그 빠른 두뇌 회전력으로 호평을 받았던 이상민, 그리고 독특한 아이디어로 뮤지와 음악작업을 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는 유세윤은 이미 그들의 출연만으로도 콘텐츠의 보증서가 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콘텐츠의 보증서가 된 세 사람은 야심만만하게 그간 자신들의 머릿 속에서만 꿈틀거렸던 아이디어를 <방시팝>을 통해 펼친다. 장동민은 거창하게 나폴레옹에서부터, 고릴라, 낙타 등 동물까지 들먹이며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인간적인 예능'을 승부욕이 강한 연예인들을 출연시켜 풀어간다. 그저 팔 굽혀 펴기 경쟁에, 오줌참기, 침 삼키지 않기, 심지어 잠자기 않기까지, 가장 인간적인 욕구들을 가지고, 승부욕에 불탄 출연자들이 투혼을 불사르는 장면은, 그 자체로 '웃음의 코드'가 된다. 장동민에 이어 등장한 유세윤은 이미 사전에 홍보가 되었던 '쿠세 스타'의 판을 벌인다. 노래를 잘 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노래 부르는 습관 등을 통해 '합격' 판정을 받는 묘한 경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상민은,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던 <더 지니어스>의 승부를 재연한다. 그가 회심의 첫 카드로 보여준 것은 바로 임요한; 홍진호의 임진록의 결판 승부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장동민, 유세윤, 이상민이 준비한 콘텐츠들은 각자 수긍이 갈만한 웃음의 코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세 코너 모두, 안타깝게도 화제성은 있었지만, 지긋이 프로그램을 시청으로 끌고가기엔 지구력이 딸리는 듯 보였다. 인간 본연의 욕구를 승부욕으로 불사리는 장동민의 경기들은 초반에 팔굽혀 펴기를 할 때만 해도 역동적인 듯 보였지만, 이후 오줌참기, 침 삼키는 것 참기를 넘어서 쏟아지는 잠을 참기로 가서는 지루해졌다. 마찬가지로, 유세윤의 쿠세스타는 그가 준비한 아이디어는 야심찼으나, 막상 방송 분에서 보여지듯이, 그의 야심찬 쿠세스타의 화제성을 뒷받침 해줄 스타가 드물었다. 심사위원들이 합격, 불합격을 선정하는데, 시청자들의 고개가 함께 끄덕여 질 쿠세의 '공감'이 아쉬웠다. 이어진 이상민이 야심차게 준비한 '임진록', 하지만 2회에 걸쳐 장황하게 진행된 게임은, 홍진호, 임요한의 결승이라는 화제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만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게임이 화제가 되었던 것은, 홍진호, 임요한이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로서 각자의 전략과 전술이 걸출하게 맞붙은 그 지점인데, 그것을 그저 심리전과 요행에 치중한 포카로 대치한 다는 것은 여러모로 아쉬운 지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2회를 보여준 <방시팝>은 그들이 그간 연구해, 스스로 청출어람이라 자평하고 내보였지만 역으로 <마리텔>의 장점을 증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수선하지 않게 한 출연자당 충분한 방송 시간은 '충분하지만' 동시에 그 출연자의 프로그램에 호응을 하지 않는 시청자가 리모컨을 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즉, <마리텔>은 예을 들어 백종원 방송을 띄엄띄엄 배치함으로써 오히려 그외의 콘텐츠마저 강제 시청하는 효과를 낳지만, 서로 호응하는 시청층이 다른 <방시팝>은 시청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프로그램만 골라보는 선택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방시팝>이 증명한 것은, 콘텐츠가 '아이디어'만으로 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시팝> 예고 방송에서 장동민이 '그까이꺼'를 외쳤지만, 막상 장동민도, 유세윤도, 그리고 이상민도 각자의 아이디어는 신선한 것들이었지만, 그 진행 과정은 늘어지거나, 웃음의 포인트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즉,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증명하고 만 것이다. 거기에, 최근 새로인 출범하는 예능마다 모습을 보이고 있는 장동민, 이상민 등에 대한 권태감도 슬슬 밀려들기 시작한 점 또한 <방시팝>의 생각지 못한 복병이다. 
by meditator 2015. 12. 18. 14:18

여기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고등학생이다. 하지만 고등학생인 이 아이가 학교에 가서 하는 일은 잠을 자는 일이다. 제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는 것도 힘들다. 그래도 겨우 온 학교에서 아이가 하는 일이란 하루종일 잠만 잔다. 수업 시간에 깨우던 선생님도 결국 포기하고 만다. 함께 운동장에 나가 체육을 하자며 아이를 흔들던 친구들도 잠에 취한 아이를 어쩌지 못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이 학생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선 이런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도대체 부모가 어떻게 키웠길래?' 그런데, 48%난 되는 고등학생들이 평소에 학교를 그만두고 싶단 생각을 한다면, 그리고 그중 태반이 하루 수업의 대부분을 '잠'으로 때운다면, '학교를 왜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아깝잖아요. 3년동안 하지도 않는 공부하려고 학교 책상에 앉아있는게'라는 아이들의 '토로'에서 비단 그 책임을 학생 개인의, 혹은 학생 부모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2014년 한 해에만 2만5천명의 학생이 '학교 부적응'이란 이유로 '자퇴'를 하는 현실, 그리고 그렇게 떠날 용기를 내지 못하는 다수의 학생들이 '3년'을 '잠'으로 때우는 학교의 현실에, sbs가 창사 25주년 기획으로 야심차게 문제 제기를 한다. 과학과 현실의 조우를 마련했던 사이언스 픽션(sciencefiction)이나 집단 지성의 사회 변화 움직임을 담은 소셜픽션(socialfiction)처럼 상상 속의 학교를 현실로 구현한 스쿨픽션(schoolfiction)을 시도한 것이다. sbs스페셜은 29박 30일의 바람의 학교 리얼리티를 11월22일부터 12월 13일까지 4부작으로 방영했다. 

바람이 부는 곳, 그리고 바람이 이루어지는 곳, 바람의 학교 
제주도에서도 바람이 가장 많아 풍력발전기가 6기나 도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마을, 이곳에 임시로 바람의 학교가 창립되었다. 전 이우학교 교장이었던 정광필 교장 선생님을 비롯 전국 각지에서 뜻을 가지고 오신 네 분의 선생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서울 사대 대학생 멘토 5명, 거기에 소년원을 갓 출소한 아이에서 부터, 탈북 청소년, 다문화 가정의 아이, 홈스쿨링에서 부터, 하루 여섯시간 이상 게임만 하는 아이에서부터, 학교에만 가면 자거나, 아예 학교 가기조차 거부를 하는 아이까지 다양한 전력(?)을 가진 16명의 아이들이 '바람의 학교'의 입학생이 되었다. 

4주간에 걸친 소셜픽션, 하지만 당연히 순조롭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pc방등 아이들이 즐겨놀만한 꺼리가 없는  이곳에서 새로운 다짐을 가지고 '우일신'해보자는 선생님들의 다짐과 달리, 아이들의 흡연권에 대한 논의조차 쉽지 않은 '정글'이 바로 학교의 시작이었다. 



지금의 학교와는 다르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온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와 같이 자신들을 '교칙'이란 이름으로 '통제(?)하려는 선생님들에게 불만을 표출하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하지만, 차라리 토론이 돠는 사안이면 그렇다 치지만, 아예 막무가내 하교에 들어서기 조차 힘들게 생활 습관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은, '학교 존립' 자체에 위기를 가져온다.

튕겨나가고 널브러지는 아이들을 추슬러 겨우겨우 학교의 틀안에 꾸겨 넣지만, 일반인들조차 난해한 '오이디푸스'의 독해에서부터 시작된 '연극 수업'등은 아이들로 하여금 '학교'의 의미를 찾기 힘들게 한다. 따라서 일반 학교 교실의 풍경이 다시 답습되고, 그런 아이들의 몸에 밴 저항(?)에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선생님'이 된 존재 이유조차 되물으며 아이들과 함께 흔들린다. 

그렇게 어거지같은 교육과 막무가내의 함께 함으로 몇 주가 지나며, 도저히 가능성이 없을 것같은 아이들에게서 희망의 빛이 보인다. 그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거부하는 아이들마저 있었던 연극 수업, 준비 과정에서 늘어지던 아이들도 막상 연극이 구체화되어 자신들에게 맞는 책임이 주어지자 달라지기 시작한다. 평소에 화장을 즐기던 아이는 분장을 하고, 하루종일 기타만 치던 아이는 음악을 만든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살던 아이는 편집을 하고, 자신의 삶에 이유를 찾지 못하던 아이들이 사진을 찍고, 무대 장치를 하며 눈을 빛낸다. 그러다 보니 어느 덧, 상습적으로 지각을 하던 두 아이들이 반장이 되어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시점까지 이르게 된다. 

도대체 외딴 곳에 지어진 학교에서, 난해한 오이디푸스를 읽으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던 바람의 학교는 4주만에 스스로 만든 연극 '수업료를 돌려 주세요'와, 가시리 홍보 프로젝트 두 편을 성공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을 찾아온 학부모들과 눈물의 상봉을 하고, 16명 그 중 한 명의 탈락자도 없이 선생님의 성의있는 졸업장을 받아들게 되었다. 



바람의 학교가 던지는 질문; 학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이들이 학교로 간 기숙사에서 오후가 되도록 잠에 늘어진 아이들, 집보다 편할 줄 알고 왔는데 자신의 자유를 속박한다며 돌아가겠다는 아이들에게는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을 통해 느껴진 절망이 깊은 만큼, 겨우 4주만에 그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이 만든 랩을 쑥쓰러워하며 발표를 하고, 반장으로 다짐을 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 반전의 묘미는, 그저 감동 이상의 충격이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아이를 추스리기 위해 달려온 교장 선생님, 흡연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다하여 아이들에게 담배를 나누어 주는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이 외면하는 수업에 눈물로 읍소하는 선생님, 그런데, 그 포기하지 않는 선생님들의 진심에 아이들이 조금씩 깨어난다. 물론 그 과정에는 진심만이 있는 건 아니다. 담배를 나누어 주듯이 처음 선 원칙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선생님으로서의 존재 이유에 회의를 가지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손을 놓지 않는다면,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도달한 성취이다. 결국 바람의 학교 4주가 남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아이들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아주 지극히 사소한 원칙이다.

또한 그 원칙과 함께, 그 널브러진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자신의 공연을 완성하듯이, '희망'의 내용이다. 대다수 무기력한 청소년들의 문제는 가정문제나, 학업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에서 앞으로 살아나갈 그들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여부라고 다큐는 힘주어 말한다. '희망 진로가 없는 상위권 학생들이 희망 진로가 있는 하위권의 학생들보다 학교 적응이 떨어진다'는 조사에서도 드러나듯이,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은 아이들에게 그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견디게 만든다. 그리고 바람의 학교 4주의 과정은 결국 그걸 찾아내는 과정일 뿐이었다. 

13일 방영된 4부의 끝부분에서는 4주간의 바람의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의 후일담을 다루었다. 누군가는 바람의 학교 경험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고, 누군가는 자신이 하고싶은 음악에의 길을 열게 되었다. 그렇게 몇명은 바람의 학교 경험으로 다음 희망의 징검다리를 짚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바람의 학교에서 반장까지 하던 아이는 학교로 돌아가 다시 예전처럼 되었다. 학교를 나오지 않은 것이다. 바람의 학교 교장 선생님이 나서서 아이를 추슬러 보지만, 결국 아이는 자퇴를 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결과는 바람의 학교가 결국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그렇게 달라질 수도 있는 아이를 제 자리에 돌려놓고 마는 기존의 학교 교육 시스템을 증거하는 것이다. 나서서 주도적으로 아이들을 이끌 수 있는 아이도, 결국 스스로 학교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마는 현재 학교 교육 시스템, 그것에 대한 강력한 물음표로, 그리고 바람의 학교 경험으로 정규 학교 과정에서 적응을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대안 교육 센터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교육자에 대한 물음표로 마무리된다. 
by meditator 2015. 12. 14. 14:07

12월 6일 방영되었던 28회 <애인있어요>의 마지막 장면은 은솔이를 죽인 범인이 출소한 후 도해강을 찾아와 오히려 도해강을 몰아붙이다, 그만 도해강을 쓰러지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정신을 차린 도해강의 뇌리에 그녀가 독고 용기로 살던 지난 4년간 잊었던 기억, 바로 그녀의 '핵심 기억'인 최진언과의 이별 과정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런데 13일 방영된 29회에서 다시 되풀이된 그 장면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도해강은 그녀가 사고를 당하기 전 바로 그 시간으로 돌아가 바렸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즉, 그녀는 도해강으로서의 기억을 되살린 대신, 지난 4년 독고용기로 살아왔던 기억을 지웠다. 




파렴치범 최진언에 대한 속 시원한 도해강의 복수 
50부작 <애인있어요>의 초반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바로 남자 주인공인 최진언의 불륜이었다. 아니 불륜도 불륜이지만, 비록 아이가 죽었다지만, 오랜 시간 함께 살아왔던 아내에게, 아이의 죽음에 대해 태연하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모진 말을 퍼붇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이 여자만 치워준다면 어떤 것이라도 하겠다'는 폭언을 최진언은 서슴치 않았다. 그래서, 그가 시간이 흘러 4년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해강을 잊을 수 없고, 도해강과 다시 사랑을 하기 위해 '순애보'를 펼침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최진언을 연기하는 지진희의 설레는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선뜻 그에게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29회를 통해 배유미 작가가 왜 그토록 극 초반 최진언에게 그 모진 말을 도해강에게 퍼붓도록 했는지 설명한다. 바로 독고 용기로 살아왔던 지난 4년을 잊은 채, 그 4년 전 최진언에게 갖은 수모를 당한 채 시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도해강의 기억으로 돌아간 현재의 도해강은, 최진언에게 예전의 그가 그녀에게 그랬듯이, 치를 떨어한다. 그래서 극 초반 최진언이 도해강에게 퍼부었던 그 '혐오'의 대사들은 29회를 통해 통쾌하게 최진언에게 돌려진다. 도해강은 결혼 생활 동안에서 듣지 못했던 '사랑해요'라는 말까지 들으며 가슴이 설레이던 최진언에게, 4년 전 최진언이 그랬듯이 당신에게 질렸으며, 당신을 보면 가슴이 떨리는 대신 소름이 끼친다며, 자신의 앞에서 최진언을 치워달라 최진언에게 퍼붓는다. 그래서, 독고 용기가 되어도 여전히 최진언을 보고 가슴이 떨리던 그녀는 그 기억을 지운 채 마치 체증이 풀리듯 도해강의 묵은 분노를 맘껏 표출한다. 



원죄의 주인공으로 돌아온 도해강
물론 도해강으로 돌아온 그녀로 인한 아픔도 있다. 마치 1인 3역처럼, 도해강, 그리고 독고 용기, 독고온기로 도저히 한 사람의 연기로 보여지지 않은 김현주의 연기력에 의해, 다시 도해강으로 돌아온 그녀는, 지난 4년동안 독고 용기로 살아온 도해강이 떠올려지지 않을 만큼 찬바람이 씽씽 분다. 그래서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던 독고 용기는 울화통이 터져 술잔을 기울이고, 지난 4년간의 순애보를 접지 못해 애태우던 백석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 주저앉아 버린다. 

또한 도해강으로 돌아와 극의 긴장감은 배가되었다. 백석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으로, 그리고 백석의 동료 변호사로서, 도해강으로서 살아온 지난 날의 '속죄'에 매진하려 했던 독고용기였던 도해강은, 이제 다시 그 예전의 피도 눈물도 없는 도해강이 되어 '천년 제약'으로 복귀한다. 그녀의 복귀에 천년 제약 측 민태석과 최진리, 그리고 최진언바라기인 설리의 셈은 저마다 복잡해졌다. 

<애인있어요>의 묘미는, 쉽게 그 누구의 편도 들수 없는 반전의 반전, 그 연속에 있다. 극 초반 불륜파렴치범이었던 최진언은 4년 후 도해강 바라기의 '순애보'로 변모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천년 제약의 개 도해강은 사고 후 의협심강한 독고용기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다시 그 기억을 지운 채 도해강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마치, <송곳> 속 구고신의 '사는 데가 바뀌면 사람이 바뀐다'라는 말의 극화처럼, 드라마는, 요동치는 운명 속에서 자신의 업보에 허우적거리는 남녀 주인공의 행보가 시청자을 쥐락펴락한다. 이제 최진언의 순애보 앞에 쉽게 가슴을 열었던 도해강은, 그녀가 4년 전 미처 못했던 복수의 말들을 퍼붓는다. 아니 그 보다도 더 잔인한 복수는, 바로 최진언의 사랑을 잊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고용기였던 도해강이 제 아무리 자신의 지난 기억이라 해도 도해강의 지난 원죄에 대해 제 3자적 입장이었다면, 이제 도해강은 그 원죄의 주인이 되어 돌아오게 된 것이다. 과연, 사랑도,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지난 시간의 원죄도 어떻게 풀어갈 지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 
by meditator 2015. 12. 13. 01:05

12월 11일 새벽 급상승 검색어 1위에 '루시드 폴'이 떠올랐다. 그 이유는 같은 시간 홈쇼핑 채널인 cj오쇼핑을 통해 자칭 타칭 '감성 시인'이라 칭해지는 뮤지션 루시드 폴의 7집이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제주도로 귀농하여 귤 농사를 지은 뮤지션 루시드 폴은 '누군가를 위한'이라는 제목의 7집 앨범과 함께 그가 지은 동화책 <푸른 연꽃> 그리고 그가 찍은 혹은 그를 담은 그림 엽서에, 그가 직접 농사를 지은 '농약을 치지 않았지만 유기농이라 말할 수 없는' 귤 10개 정도를 담아 '한정판 패키지'로 홈쇼핑에 등장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루시드 폴이 소속된 안테나 뮤직의 대표 유희열을 비롯하여, 소속 뮤지션 페퍼톤즈, 정재형, 이진아, 샘킴 등과 <k팝스타>를 통해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를 함께 하여, '안테나 뮤직'의 루시드 폴을 빛냈다. 그런 소속사의 지원에 힘입어, 루시드 폴의 음반은 발매된지 단 9여분만에 매진이 되었고, 나머지 시간은 루시드 폴의 새 음반 '쇼케이스'로써 충실한 시간이 되었다. 

<안테나 뮤직>은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뮤지션들의 고학력을 평균치로 했을 때 가장 높은 학력의 소유자들이 모여있는 음악 기획사라고 대중들에게 각인된 곳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세간의 인식을 넘어, <안테나 뮤직>은 대표 유희열과 소속 가수 루시드 폴과 정재형이 이날 홈쇼핑 방송에서 전화 연결한 김동률이 그 곳은 소속 가수들의 가창력을 봐서 자신없다는 역설적 표현에서 보여지듯, 대표 유희열이 소속 가수 루시드 폴의 음반 소개에, 불면증에 자신있다는 언습에서도 보여지듯, 가창력을 가수의 기준이라 보는 세상의 시선에서 빗껴간 음악인들의 공동체이다. 뿐만 아니라, 몇 해에 걸쳐 보여졌던 <안테나 뮤직> 뮤지션들이 보여준 '무엇을 기대해도 그 이하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발한 콘서트에서 보여지듯, 늘 세상 사람들이 '음악'과 '가수'에게 기대하는 그 무엇의 이변을 즐겨 기획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12월 11일 새벽 홈쇼핑을 통해 공개된 루시드 폴의 7집 앨범 패키지 판매는 바로 그런 <안테나 뮤직>의 일련의 행보 궤도에서 역시나 벗어나지 않는 '유머'러스하지만, 한편에서는 뜨끔한 기획이다. 

유머러스한 해프닝? 그 안에 담긴 암울한 음악계에 대한 해학 
이날 방송에서 쇼호스트는 질문한다. <안테나 뮤직>의 대표 유희열씨는 <유희열의 스케치북> mc로도 활동 중인데 소속가수인 루시드 폴은 왜 그 음악 방송 대신 홈쇼핑을 택했냐고. 그런 질문에 유희열은 제주에 내려가 귤 농사를 짓는 루시드 폴이 그가 직접 지은 귤도 팔고, 음반도 파는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홈쇼핑에서의 판매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대답한다. 이런 유희열의 말은 액면 그대로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말의 저변에는 우리 음반계의 열악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과연 루시드 폴이 그가 소속된 '안테나 뮤직'의 대표 유희열이 mc를 보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한다고 하면 몇 분의 방송을 배정받을 수 있을까? 10분? 그에 반해 12월 11일의 루시드 폴의 앨범 패키지를 팔기 위해 할애된 시간은 40여분이 넘는다. 포맷은 홈쇼핑의 여타 물건을 파는 방식이었고, 심지어 루시드 폴은 귤이 포함된 앨범을 파기 위해 귤 코스프레를 했지만, 그 40여분 동안 방송은 온전히 루시드 폴과 안테나 식구들에 집중했다. 현재의 음악 방송에서, 온전히 한 음악인의 음악과 앨범을 위해 40여분을 투자해 주는 방송이 있을까? <유희열의 스케치북> 10여분이면 감지덕지 아닐까? 그 마저도 할애받지 못한 앨범은, 앨범 순위 사이트의 시선 밖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루시드 폴과 안테나 뮤직의 홈쇼핑 선택은 이제는 퇴화해 버린 음악 생태계의 활로를 모색한 웃픈 시도가 되는 것이다. 그 시간 검색어 1위를 비롯하여 하루가 지나도 기묘한 해프닝으로 화제되는 이 사건(?)은 결국 안테나 뮤직과 루시드 폴의 기획의 승리로 결과된다. 음악을 그 '숭고함'의 가치로 논하기엔 너무 밑바닥이 되어버린 현실에, 스스로 그 바닥에서 몸을 굴러, 자신의 음악을 구한 루시드 폴의 이벤트는 그런 면에서 통쾌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세월호 아이들이 남겼을 말, '아직, 있다' 가 흘러나오는 홈쇼핑
하지만 비록 홈쇼핑이었지만, 40여분간의 루시드 폴을 위한 시간은 풍성했다. 그의 신곡 '집까지 무사히'와 '아직, 있다'를 조윤성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루시드 폴 자신의 목소리로 전달했고, 그가 지은 동화 <푸른 연꽃>의 ost와 같은 별은 반짝임으로 말하죠가 또 다른 소속 가수 이진아의 목소리로 전해졌다. 

이렇게 한 편의 코미디처럼 진행된 홈쇼핑 시간 속에 그의 귤 따는 모습의 영상 뒤로 전해지는 루시드 폴의 잔잔한 목소리에 얹혀진 그의 앨범 대표곡 '아직, 있다',  (살아)남아서 학교를 가는 친구에게, 기죽어 어깨가 움츠러든 친구에게 노란 나비가 된 자신을 대신하여 대신 하늘을 봐달라고 하는 그 가사에서 선뜻 떠올려지는 누군가가 있다. 그 노래 가사를 듣는 순간, 드는 생각은 과연 저 '아직, 있다'가 공중파의 음악 방송이라면, 그것이 소속사 대표인 유희열이 mc를 보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이라도 불리워 질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일찌기 앨범 <레미제라블><국경의 밤> 등을 통해 비록 낮은 목소리로 잠이 올 정도로 잔잔한 음률을 통해 읊조리듯 노래하지만, 그 노래에 담긴 이야기가 결코 사회의 제 사건으로 부터 괴리되어 있지 않고, 그 어떤 투쟁가보다 묵직했던 루시드 폴의 전작들의 흐름을 이번 앨범은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용산 참사를 두고 쓴 '평범한 사람'처럼 '아직, 있다'는 새 봄이 오기도 전에 노란 나비가 되어 버린 친구가, 남은 친구에게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하고 '영원의 날개를 달고 지켜볼테니'라며. 오히려 위로의 말을 건넨다. 자본주의의 극점인 홈쇼핑에서 그 가사를 듣자마자 눈물이 흐르고 말, 세월호 아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가 울려퍼진다. 그저 해프닝이나, 재미로만 넘기기엔 끝내 목에 무언가가 걸리고야 마는, 기억에 남는 판매 방송이다. 

by meditator 2015. 12. 11. 14:48

로맨틱 코미디(이하 로코)는 가장 트렌디한 장르이다. 당대 젊은이들의 로망을 담은 이 장르는 그래서 가장 당대적 편균 시선을 검증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기도 하다. 11월 11일 종영한 최고 시청률 18%를 기록하며 붐을 일으켰던 <그녀는 예뻤다>나, 시청률의 늪을 헤어나오지 못했던 kbs2의 월화 드라마의 부진을 극복하기 시작한 <오 마이 비너스>는 그런 면에서 2015년 의 평균 시선을 알아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드라마, 전혀 다른 배경의 전혀 다른 이야기임에도 기본 이야기의 구조 면에서 유사하다. 마치 이란성 쌍둥이처럼.  




얼굴도 안되고, 몸매도 안되는, 심지어 가진 것도 없는 여주인공들
두 드라마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지점은 바로 '육체 미흡'의 여주인공들이다. <그녀는 예뻤다>의 여주인공 김혜진(황정음 분)은 강력한 곱슬 머리에 안면 홍조를 지닌 오래전 남자 친구에게 자신을 내보이기조차 미안해 하는 '얼굴'에 자신이 없는 인물이다. <오 마이 비너스>의 강주은은 77kg의 거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몸매'가 과다한 여성이다. 물론 초등학교에서 전교생의 주목을 받았거나, 대구에서 비너스라 날렸던 '한때'의 시절이 있지만, 그 시절을 뒤로 하고 이제는 남 앞에 선뜻 나서는 것에 자신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육체'만이 아니다. 입사 면접에서 씩씩하려고 하지만 번번히 낙방을 하고마는 만년 취준생이었거나, 겨우 취준생 딱지를 띤 인턴이며, 말이 변호사지 은행 융자때문에 로펌에서 눈칫밥을 먹는 명색만 변호사지, '을'의 처지이다. 이렇게 2015년 로코 속 그녀들은 2015년의 화두였던 부와 육체 모든 면에서 미흡한 '을'들이다. 그것은 곧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같은 처지의 '을'이라 생각하는 시청자들의 공감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환타지'를 기반으로 한 이들 로코는 이런 '을'들의 인생 역전을 '사랑'을 매개로 이루어 나간다. 

트라우마에 갇힌 백마 탄 왕자들
그렇게 이쁘지도 않고 뚱뚱한 그녀들 앞에 '그'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 앞에 나타난 그는 참 번듯하다. 김혜진의 오랜 친구이자 첫사랑인 뚱보였던 지성준(박서준 분)은 이제 훤칠한 인물이 되어 그녀가 인턴으로 몸담은 '모스트'의 해와 파견 부편집장으로 금의환양했다. 그런가 하면 <오 마이 비너스>의 김영호(소지섭 분) 역시 만만치 않다. 골수암을 앓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나서서 절을 하지도 못한 채 숨죽여 흐느껴야 했던 소년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는 트레이너가 되었고, 이제 곧 그룹 가홍의 신임 이사장이 될 터이다. 

'그'들의 스텍은 잡지사 부편집장에, 트레이너에 그룹 이사장까지 화려하기 이를데 없다. 그런 그들에 비하면 일개 월급받는 변호사나 인턴 사원인 그들은 초라하기 그지 이를데 없다. 과연 이런 언밸런스한 스펙의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스펙의 남자들을 매료시킬 그녀들의 무기는 그녀들의 씩씩하면서도 소탈한 인간성이다. 그들은 번듯하지만 하지만 그 번듯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에게는 각자 숨겨진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다. 김혜진과 같이 초등학교 다녔던 지성준은 그 시절 몹시 뚱뚱해서 학교 친구들의 놀림감이었고, 그런 '왕따'는 그가 이민을 간 미국에서도 이어졌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매달린 끈은 놀림받던 시절 유일하게 자신의 친구가 되준 김혜진이었지만, 김혜진네 집안 사정으로 그 마저도 끊어지게 되자, 생존하기 위해 혹독한 다이어트를 감행한 것이다. 김영호 역시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숨죽여 울어야 했던 소년, 그런 그를 나약하다며 외면했던 아버지로 인해 '단맛'을 보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뒤로 하고, 역시나 살아남기 위해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지금의 '존킴'이 탄생되었다. 지금의 그들은 번듯하지만, 그 번듯함을 얻기 위해 그들은 '인생의 단맛'을 삼켜야만 했다. 

즉, 두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은 사회적으로 그럴 듯한 스펙을 챙겼지만, 그 스펙을 얻기 위해 인간적으로 소중한 것들을 놓친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은 비록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외모와 몸매를 지녔음에도, 즉 자신들이 '희생'했던 그 요건을 비록 갖추지 못했음에도 여전히 '당당'한 그녀들에게 자신들도 모르게 빠져들어 간다. 즉, 그들은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스펙'을 얻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그녀들로 부터 보상받게 된다는 것'이 이들 드라마의 사랑 코드가 된다. 외적으론 그들이 가졌고, 그녀들이 갖지 못했지만, 사실은 그녀들이 가졌고, 그들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그녀들로 인해 회복하거나 치유한다는 것이 두 드라마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공교롭게도 지성준, 김영호, 두 주인공은 '어머니를 상실'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육친으로서의 '어머니'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지성준이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신 비오는 날 운전을 못할 정도로 혼란에 빠지듯이 그로 인한 상실의 늪에 빠져있다. 그 늪에서 그들을 건져 올리는 것은, 바로 그 '어머니'같은 모성성을 지닌 그녀들이다. 



그녀들의 연적 혹은 잃어버린 친구'
그녀들이 건져올릴 것은 심지어 그들 뿐이 아니다. 두 드라마의 연적은 공교롭게도 그녀의 친구들이다. <그녀는 예뻤다>에서 김혜진과 한 집에 사는 오랜 친구 민하리(고준희 분)는 남자들이 줄줄 따르는, 거기에 직업 조차도 호텔리어다. <오 마이 비너스>의 오수진 역시 강주은의 대학 시절 친구에 서울 법대 수석 졸업 사시 조기 패스의 수재로 이젠 강주은이 일하는 법률 로펌의 부대표이다. 당연히 몸매도 얼굴도 이쁘다. 그런데 그녀들이 이 못나고, 뚱뚱한 여주인공들의 남자들을 못 뺐어서 안달이다. 

두 드라마는 이 두 연적들의 불량한 연애관에 대해, 정신병리학적으로 다가선다. 가정적으로 불우한 민하리의 라이프 스토리를 구구절절 설명하며, 그녀의 불완전한 자존감이 친구의 애인 앞에서 솔직하지 못한 그녀를 대변한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로펌의 부대표에 멋진 몸매를 지닌 오수진은 여전히 과체중의 그 시절 사랑받지 못해 상처받은 오수진의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자신들에게 따스한 말 한 마디를 던져준 친구의 남자 친구에게 부도덕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의리있는 친구 앞에 자신을 속인다. 아니 근본적으로, 두 사람 모두 그럴 듯한 스펙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스펙'은 여주인공에 비해 한참 딸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 그리고 연적들은 경쟁 사회가 요구하는 그럴 듯한 '스펙'을 가졌음에도, 동시에 그 '스펙'의 부작용들도 모조리 가지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지워낸 이들은,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 '지워버렸던 것'이다. 그들이 그런데 비해, 여주인공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지워가며 그럴 듯한 '스펙'을 갖춘 동안 이뻐지지도 못하고, 뚱뚱해 졌지만, 그들이 잃은 것 놓치지 않고 지켜냈다. 이렇게 2015년의 두 로코는 2015년을 살기 위해 자신을 내던져가며 사람들을에게 그렇지 않고서도 여전히 인간적인 면을 잃지 않는 그녀들의 환타지를 통해 위무한다. 그녀들의 사랑과 아름다움은 덤이다. 김혜진이 이뻐지자 급격하게 바람빠진 듯 되어버린 드라마가 그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뚱뚱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주은이 매력적인 것이다. 비록 드라마는 겉으로는 백마탄 왕자가 가진 것 없고, 이제는 심지어 못 생기고 뚱뚱한 그녀를 구원하는 듯하지만, 기실, 구원을 받는 것은 그들이다. 못생기고, 뚱뚱한 그녀들이 '어머니'처럼 그들을 심지어 그녀들의 연적마저 사랑으로 '구원'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5. 12. 9. 14:32

2003년 11월 21일 방영된 도현정 작가가 쓴 mbc베스트 극장<늪>의 엔딩은 충격적이다. 남편의 불륜을 알고 난 후 집요하게 복수를 해오던 여주인공 윤서(박지영 분)가 불륜 내용이 담긴 테이프를 듣고 당황해 하는 남편의 차 위로 자기 자신을 던지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깨진 유리 위로 눈을 부릅뜬 채 남편을 노려보던 여주인공의 표정은 오래도록 시청자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복수의 마지막을 자신을 '산화'시켜 완성하던 <늪>의 여주인공처럼 12월 3일 종영된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속 비극의 주인공인 김혜진(장희진 분)은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을 '단죄'하고자 '자신'을 던졌다. 


우리 드라마에서 자고로 '복수'는 익숙한 코드이다. 아침 드라마에서부터 주말 드라마까지 억울한 사연을 가진, 주로 여주인공이 입지전적 성공을 배경으로 삼아,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 이른바 트렌디한 스토리의 주를 이룬다. 드라마 속 그녀들은 대부분 '권선징악' 복수도 성공하고, 자신의 일과 사랑에 성취를 하며 '해피엔딩'을 이룬다. 현실 속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을 통해 한껏 '환타지화'되어 시청자들의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자신을 던져 '단죄'하는 여주인공
그런데 2003년작 <늪>의 여주인공은 달랐다. 부유한 집안의 잘 나가는 정형외과 의사이던 여주인공은 남편과 불륜에 빠진 여자를 정신병원에 보내고, 남편을 남자 구실을 못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결국 자신의 목숨을 던져 '복수'의 정점을 이룬다. 왜? '복수'를 하고 잘 살면 되지? 여기서 도현정 작가의 시선이 드러난다. 남편의 불륜을 통해 산산히 조각난 그녀의 가정, 그리고 남편의 불륜 과정에서 죽어간 아버지, 심지어 불륜의 상대방은 그녀가 가장 아끼던 동생 뻘의 여자, 그건 그냥 불륜이 아니라, 그녀가 의지하고 믿었던 세계의 파괴라고 작가는 <늪>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의 세계를 파괴한 사람들을 '단죄'하기 위해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그녀 자신 또한 '피폐해져갔음'이 결국 그녀 자신을 던진 또 다른 이유라고도 덧붙인다. 그리고 이것은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혹은 결과만 괜찮으면 되지 않느냐는 현재 대한민국의 허위적 윤리 의식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문제 의식은 십 년 여의 세월을 흘러 <마을-아치아라의 비밀>로 다시 통한다. 마을로 흘러 들어온 외지인 김혜진, 하지만 그녀는 사실 외지인이 아니었다. 마을의 상습 강간범에게 강간을 당한 채 아이을 낳게된 윤지숙(신은경 분)의 버려진 아이였다. 파브리 병으로 인해 신장 이식이 필요했던 그녀는 자신을 도와줄, 그리고 병든 자기가 의지할 혈육을 찾아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피붙이를 찾아 헤맨 여정에서 그녀가 만난 끔찍한 사실, 그녀의 남편에게 불륜을 해가면서 '단죄'를 하려고 했던 친엄마가 사실은 '강간'의 피해자였다는 것, 더구나 그녀를 강간했던 당사자는 여전히 마을에서 자기 자식을 끔찍히 여기며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자신을 버린 엄마를 밝히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엄마가 자신을 '괴물'로 여기도록 만든 그 '강간'범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그리고 신장 이식을 해주겠다고 나선 엄마조차 외면한 채 진실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김혜진의 맹목적 몸짓은 자신의 출생이 주는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애초에 친엄마를 밝히려던 그녀의 시도도, 그리고 마지막 자신과 엄마를 그렇게 만든 강간범을 밝히려던 시도도, 그 어느 것 하나 그녀를 막아서지 않는 것이 없다. 겨우 찾아낸 엄마는 그녀를 괴물로 불렀고, 잘 살고 있는 자신을 흐뜨러 뜨리는 훼방꾼 취급을 했다. 강간범은 한 술 더 뜬다. 자신의 어린 딸이 아플까봐 애지중지 하는 그는, 또 다른 그녀의 혈육인 그녀를 끝내 '그 여자'라 부르며 '협박범' 취급이나 한다. 병에 대한 치료보다도 더 간절히 원한 '가족'의 손길을 '괴물'이 되어버린 김혜진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신장 이식이 필요했던 김혜진이나, 의붓 오빠가 신장이식을 해줄 여유도 없이 죽어버린 가영(이열음 분)이나, 강간범의 상습 강간의 피해는 십 여년이 지나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낳았던 딸을 괴물이라 부르는 윤지숙에게서 보여지듯이 강간의 상처는 덮는다고 덮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치아라 마을은 곧 현실의 우리 사회
결국 윤지숙 모녀의 불행을 통해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른바 사회의 그럴 듯한 허위적 윤리의 껍데기 속에 숨죽여 사라져 가는 윤지숙 모녀와 같은 피해자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확장하면 아직도 수요일마다 일 대사관 앞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사과받기 위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시위를 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요, 가깝게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피해자들의 숨은 상처이다. 또한 그것은 단지 '성'과 관련된 상처만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사건을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져 가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깊어져만 가는 '세월호' 등 각종 사회적 상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초에 제대로 단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상처의 피해를 공동체가 보다듬었다면 김혜진이든 가영이든 애꿏은 두 아이의 운명을 달리 할 일이 없을 사건을 십 여년이 지나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야 풀어지는 그 '과거사'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서 보여지듯이 김혜진은 자신을 던져 그 '과거사'를 해결하려 했지만, 정작 그녀가 죽음으로 드러낸 것은 또 다른 피해자 윤지숙의 슬픈 과거였을 뿐이다. 결국 피해자와 피해자만이 마을의 역사에서 상처를 받은 채 쓰러져 간 모습은 얄궃게도 우리의 현대사와 닮았다.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범죄자는 단죄의 시간을 벗어나 멀쩡한 모습으로 경찰서를 나올 수 있게 되는 그 슬픈 결론이 놀랍게도 현실과 흡사하다. 때문에 결국 윤지숙의 아이러니한 모정이 김혜진을 죽음에 이르게 했음에도 윤지숙에게 쉽게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우리를, 그리고 우리 사회가 멀쩡한 듯 가리고 있는 위선의 가면을 벗긴다. 그리고 그 평화롭던 아치아라라는 마을이 상습 강간범을 결국 품어준 꼴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또한, 우리가 습관적으로 의지하는 '모성'과 '가족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뿐만 아니라, 결국 피해자였던 두 여주인공의 죽음과 감옥행으로 끝나 버린 채, 그 사건을 둘러싸고 음습하게 등장했던 윤지숙의 남편과 노회장의 커넥션을 남겨 둠으로써, 쉽게 종식되지 않는 사회적 비리의 뒤끝을 여운으로 남긴다. 그것은 이른바 미드처럼, 드러난 한 사건 이후에 보다 큰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시즌제를 위한 포석일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자체 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아마, 그 어떤 드라마보다, 시원한 '환타지'의 여력이 없는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 그래서 생소하고 낯설지만, 그것이 바로 시청률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드라마의 가치이다. 
by meditator 2015. 12. 4. 14:07

박리환(이동욱 분)과 김행아(정려원 분)의 사랑 이야기로 시작된 드라마<풍선껌> 하지만, 12회를 마친 이 드라마의 굵직한 줄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박리환의 엄마 박선영(배종옥 분)의 이야기이다. 그러기에 어쩌면 늦가을 감성을 촉촉히 적겨줄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고 <풍선껌>을 봤던 혹자는 현실에서처럼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혈육에의 끈끈하고 지긋지긋한 관계에 지레 질려버리고 이 드라마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 아니, 그 어떤 드라마이든 '쾌(快)'이거나 락(樂)이 아닌, 보는 것자체가 인(忍)이 필요한 드라마들은 드라마조차도 편집본이나 팟캐스트를 이용해 소비하는 세상에서 마치 멸종 위기의 동물과도 같은 존재일 지도 모르겠다. <풍선껌>의 1.705%(닐슨 코리아 기준 케이블 기준)의 쉽지 않은 시청률은 많은 것을 내포한다. 하지만, 드라마<풍선껌>은 그 수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한 해를 보내며 생각케 한다. 




알츠하이머, 천형의 징벌 혹은, 회자정리
알츠하이머에 걸린 이후 친정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고 아들마저 기억에서 잠시 지우는 등 급격한 악화 증세를 보이던 선영은 이후 아들 리환과 주변 친지들의 따스한 도움으로 회복세를 보인다. 이제 아들 리환을 기억하고, 종종 이전의 선영이 가졌던 똑부러지던 판단력의 기세를 보인다. 하지만, 그 이외의 시간 선영은 여전히 자신이 몸담았던 병원을 좋은 냄새로 기억하고, 좋았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차츰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놓쳐간다. 그런 자신의 증세에 대해 선영은 자신이 행아의 아버지와 함께 했던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마저 잃으면 어떡하냐로 불안해 했지만, 그런 엄마에 대해 리환은 '아이로', 돌아가는 삶의 단순성으로의 회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물론 선영의 질병으로 인해 리환은 고통받는다. 엄마가 잠시 보였던 행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그리고 그로 인해 추측되는 도발될지도 모를 자신의 유전적 결과물에 대한 두려움으로 리환은 행아와 이별을 선택하고 하루하루를 견디어 간다. 하지만 그런 리환과 다르게, 11회를 통해 장황하게 설명했던 선영의 지난 날처럼, 이제 풍성했던 잎을 거두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삶의 집착을 조금씩 거두어 가는 선영은 그녀의 나레이션처럼 '현명'해지고 '편안'해진다. 

선영에게 행아는 애증이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딸,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아들이 사랑하는 아이, 거기에 자신이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사랑을 이루어 주지도 않고 행아만 남기고 떠난 행아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선영은 내내 행아를 불편해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이었던 아들의 마음마저 가져간 행아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그토록 집착했던 지난 날의 모든 것을 거두기 시작한 선영은, 그 과거 속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에의 집착도 거두고, 그래서 행아 아버지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대신 찰라와도 같았지만 행복했던 순간만을 기억 저 편에 남긴 선영은 그녀를 버텨오던 자존심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한다. 용서하라고. 엄마의 이기심으로 너를 불행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아들 리환은 친정쪽 식구들에게 보란 듯이 의대에 보내고 친정에 금의환양하겠다는 욕심으로 아들을 외롭게 자라게 했다고, 거기에 친정 식구들마저 쉽게 하지 못할 집안에 리환을 보내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었다는 걸 사과한다. 

선영의 사과는 아마도 그녀가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루어 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리고 선영의 사과는 그저 선영의 사과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모든 부모 자식의 질곡의 속내를 토로한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말한다. 어디 내가 내 욕심때문에 그러느냐고, 그저 너 잘 돼기만을 바라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픈 뒤의 선영의 고백처럼, 기실은 그 부모들의 자식 잘 되라고의 기원은 그 시초가 부모들의 '자존심'으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선영의 고백을 통해 드러내고야 만다. 



회개, 반성 혹은 머뭇거림의 치유 
그래서 1.705%의 시청자들은 현실에서 부모의 전횡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시간을 알츠하이머에 걸린 선영을 통해 치유받게 된다. 동시에,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렀던 이기적인 지난 날을 되돌아 보게 한다. 

자신의 삶처럼 아들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던 선영이 그녀의 앙칼지고 상처투성이였던 사랑도 놓아두고, 그 사랑의 떨거지 아들도 받아들이며 인생을 정리하는 한편에서,  <풍선껌>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 앞에서 머뭇거린다. 리환은 혹시나 자신을 찾아올 유전병 알츠하이머로 인해 사랑하는 이 행아가 불행해 질까봐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런 리환의 이별 선언에 행아는 지금 자신이 리환의 어깨에 얹혀진 또 다른 짐이 될까봐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리환과 행아만이 아니다. 여전히 행아를 사랑하는 강석준(이종혁 분)도 리환 앞에서는 패기를 부리지만 막상 행아 앞에선 기다리겠다는 말 밖에는 할 줄 모르고, 여느 드라마라면 돈과 권력으로 사랑을 밀어 붙였을 재벌 집 딸래미 홍이슬(박희본 분)도 리환의 불행 앞에 눈물을 보일 뿐이다. 연적인 권지훈(이승준 분)도, 조동일(박원상 분)도 서로 멱살잡이를 하는 대신 조심스레 상대방의 장점을 짚어본다. 

덕분에 <풍선껌>의 가장 악역은 두 어머니였다. 이슬을 재벌 집 딸내미 답게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이슬모의 무지막지한 모성과, 사실은 그 모성과 별반 다를 거 없던 선영의 속물적인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그건, 처지만 다를 뿐,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혈육이라는 이름의 딜레마들이다. 그리고 그걸 치유해 가는 건, 그 혈육의 주변 사람들의 따스한 기억의 순간들. 견뎌낼 수 없었던 행아 아버지의 죽음은 그와의 찰라와도 같았던 행복했던 시간, 그리고 상처받은 채 스스로 자신을 지우려 했던 선영을 보듬었던 공주 이모 등의 친지들. 그리고 아들 리환. 

그리고 종종 자신을 놓아버리려 하는 엄마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 살아왔던 리환을 견디게 해주었던 것은 혈육과도 같은 행아, 지훈, 그리고 시크릿 가든의 식구들. 그물망처럼 그들은 서로서로 조심하고 머뭇거리며 서로의 주변에서 서성이며 서로를 든든하게 지켜준다. 그래서, 이제 리환과 행아의 이별도, 권지훈과 조동일의 어긋난 사랑도, 막장 대신 '사랑'에 대한 반추로 이어진다. 

엄마 선영은 병을 통해 자신을 버티어 왔던 속물적인 자존심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아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얻고, 서로는 사랑의 이기심대신, 사랑으로 인한 배려로 마음 졸인다. 덕분에 드라마는 화끈한 사건은 없어도 매회, 마음을 덥힌다. 가족의 이름으로, 모성의 이름으로 아들을 몰아부쳤던 엄마가 맨정신으로 아들에게 전한 마지막 이야기는, 너의 행복을 찾으라이다. 


똑같이 알츠아히머를 앓아도 도시의 알츠하이머 환자와 농촌의 알츠하이머 환자가 예후가 다른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도시의 알츠하이머 환자가 고립된 공간 인간 관계를 통해 급격하게 악화되는 징후를 보이는 반면, 삶의 근거지를 놓치지 않는 농촌의 환자들은 그저 조금 기억력이 떨어지는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고 하니, 선영의 알츠하이머는 그저 예후로서가 아니라, 결국은 인간에게 닥치고야 말 질병에 대한 개인과 그 주변 사람들의 또 다른 화법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by meditator 2015. 12. 2. 14:40

<풍선껌> 9회 리환 모 박선영(배종옥 분)은 리환이를 가져 집을 나온 이후 선뜻 찾아가지 못하고 미루어 두었던 아버지와의 묵은 해원을 알츠하이머로 더 이상 정신을 놓기 전에 풀고자 마음 먹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그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 오랜 투병 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그녀의 사과 한 마디를 기다려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시고 만 것이다. 오빠의 원망을 채 듣지도 못한 채 전화기를 떨어뜨린 선영, 힘들게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며칠 만에 깨어난 선영은 그녀의 아들 리환을 그녀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만다. 




가족이란 이름이 지워주는 무게에 대하여 
아들을 부정하는 엄마라니! 남자 주인공 리환(이동욱 분)의 엄마 선영의 아들에 대한 기억 상실은 한국 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문 설정이다. 우리 나라 드라마에선 그 어떤 힘든 역경이 있어도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절대적인 것으로 그려 왔으니까. 하지만, <풍선껌>의 선영은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걸려서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아들을 지운다. 

이런 선영의 아들에 대한 기억 상실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 우선 대학 병원의 호흡기 내과 의사라는 번듯한 직위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월 미혼모로 아들 하나를 키워내기 위해 그녀가 견뎌냈던 세월의 무게를 역설적으로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쉽게 다시 자신의 육친을 찾지 못할 정도로 그녀가 가졌던 부와 명예를 상실케했던 미혼모로서의 삶, 제 아무리 번듯한 직업을 가졌다 한들 여전히 이 사회에서 미혼모로 살아냈던 삶의 무게를 전해주는 것이다. 

또한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그토록 '당연시' 여기는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한 개인에게 하중되는 부담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선영은 아들 리환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버렸으며, 그 부모가 선사해줄 가족의 부를 외면해야 했다. 즉,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한 삶은 그녀에게 추운 방과 떨어진 천장으로 기억되는 삶을 기억에 새긴다. 가족은 그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유지되고 계승되는 것이라고 <풍선껌>은 말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닐 수도.
<풍선껌> 속의 가족은 질곡이다. 선영은 자신의 아들 리환을 알츠하이머가 걸린 자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리환을 보호해줄 강력한 유사 가족을 원한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부가 충만한 이슬과 그녀의 가족이다. 하지만 선영이 선택한 이슬의 가족이란 또 다른 질곡이다. 이슬 자신이 대놓고 엄마가 아프면 엄마 곁에 머물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에서 가능하면 엄마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만큼, 이슬의 가족과 가계는 '부'의 카르텔이며, 그 카르텔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인간적'인 고려는 사치가 되는 관계들이다. 하지만 아픈 선영에게 그런 이슬의 가계가 동앗줄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이 마음을 두고 있는 사고무친 행아(정려원 분)를 멀리한다. 선영의 선택을 통해 이 사회 속 '가족'의 존재 이유와 존재 기반을 생각케 보게 된다. 그런 엄마에게 반기를 들면서도 행아를 선택하려 했던 리환은 하지만 10회 마지막 결국 행아에게 이별을 고한다. 알츠하이머 엄마라는 무게를 같이 짊어지며 '가족'이 되려 했지만, 리환은 깨닫는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가족이 질곡으로 작동하는 반면, <풍선껌>에서 위로가 되는 것은 가족 아닌 사람들이다. 진짜 이모가 아니지만, 이모라고 부르며 자신을 혹사하며 선영을 돌보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행아는 선영이 사랑했던 선배의 딸일 뿐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선영이 의지하는 것은 자신이 외면했던 피붙이가 아니라, 행아의 아버지 김준혁(박철민 분)이 운영하던 '시크릿 가든'에 모여든 사연있는 공주 이모(서정연 분)다. 거기에 이모를 돌보느라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는 행아를 걱정해 주는 것은 그녀의 방송국 식구들이요, 리환의 곁에서 그를 형처럼 지켜주는 것은 그와 한의원을 함께 하는 권지훈(이승준 분)이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이 '유사 가족' 패밀리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혈연 관계로 인해 고통받은 행아와 리환이 의지하고 그들을 지켜주는 사람들이다. 즉, 가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정작 위로를 받는 것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다. 

뻔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 같았던 <풍선껌>은 하지만 회를 거듭하며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관계들을 통하여, 현재 우리가 믿고 살아가는 이 사회의 편견과 속념들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다. 가족의 절대성에 대하여, 가족의 무게에 대하여, 그리고 과연 '가족'만이 대안이 되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 
by meditator 2015. 11. 25. 16:08

24회 <애인있어요>, 드디어 주민센터에 들러 자신이 도해강(김현준 분)임을 확실하게 알게 된 도해강은 도해강의 이름으로 최진언(지진희 분)을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불륜과 생과 사의 고비마저 갈라놓지 못하는 말 그대로 이 죽일 놈의 맹목적인 사랑이다. 


이 죽일 놈의 맹목적인 사랑 
극 초반 자신의 재판 피해자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리고 심지어 자신들의 아이의 죽음에도 요동조차 하지 않는 아내 도해강에 질려버린 최진언은 이제 다시 도해강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전 아내 앞에서 '사랑에 지쳐서'아내를 버리려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아내를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마다치 않고, 심지어 아내의 어머니 빛쟁이에 맞기까지 했던 최진언의 지독한 사랑은, 그 사랑이 아이의 죽음과 함께 환멸로 바뀌어, 결국 불륜이란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 앞에서 '어떤 일이라도 할 테니 저 사람 좀 치워주세요'라고 말하던 최진언은 하지만, 아내와 헤어지고 불륜녀 설리와 함께 외국 생활을 하면서도 아내와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했다. 연구에 밤을 세워 매달리고 쪽잠을 자면서 자신을 내몰았지만, 4년만에 자기 앞에 독고 용기의 모습으로 나타난 도해강에게 불가항력으로 무너지고 만다. 



도해강도 만만치 않다. 남편의 앞에서 물에 자신을 던져 가면서 구출하려 했던 결혼 생활도 최진언의 가차없는 오해와 시누이의 음모로 하루 아침에 회사에서의 직위와 결혼 생활, 모든 것을 잃은 처지가 되어서도 다시 한번 남편을 만나러 가다 사고를 당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독고용이가 되어 산 4년이 흐르고서도 그녀는 최진언을 만나자 다시 가슴이 뛴다. 그녀의 기억은 잊혀졌지만,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는 최진언으로 인한 아픔보다 그로 인한 사랑이 더 크다. 

그래서 사고 후 기억을 조금씩 다시 찾게 된 도해강은 거침없이 최진언을 선택한다. 그리고 최진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하고자 한다. 

7%의 딜레마, 바로 설득되지 않는 사랑?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4년후 고국에 돌아온 최진언이 아내 도해강을 만나고 마치 일방통행 도로처럼 도해강을 향해 달려가지만, 시청자들은 잊지 않고 있다. 그가 지금 그렇게 맹목적으로 아내를 향해 사랑으로 치닿듯이, 4년 전에는 아내와의 이별을 향해 그렇데 치달아 갔었다는 것을.

즉 <애인있어요>는 극 초반 최진언에게 '혐진언'이란 별명이 붙여지듯이 아이를 낳고 함께 살아왔던 아내를 떨어버리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상황을 설정했던 부담을 상쇄하기라도 하는 듯, 4년 후 도해강을 만난 최진언은 그녀를 향해 세상에 없는 순애보를 펼친다. 

그런데 그 최진언의 순애보가 그 누군가의 눈에는 순애보가 아니라, 그저 또 다른 형태의 이기적인 사랑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애인있어요>의 딜레마라는 것이다. 아이의 죽음을 자기처럼 슬퍼하지 않는 아내가, 순수했던 시절을 잊은 채 입신양명에 매달리는 아내가 싫어서, 이혼을 하자 하고, 매달리는 후배를 안고,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 앞에서 아내를 치워달라고 말하며 모멸감을 안겼던 최진언과, 지금 그가 헤어지면서 바랬듯이 좋은 사람들과 웃으며 그 이전 도해강과 달리 정의롭게 살아가는 독고 용기가 된 삶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신이 사랑했던 도해강만을 확인하기 위해 독고용기의 삶에 뛰어드는 최진언이 똑같이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화제성을 넘어 7%대에서 쉽게 상승하지 못하는 시청률은 그 딜레마의 반증이 아닐지.



사랑은 이기적이라지만, 한 입으로 두 말 하듯, 극 초반 아내를 버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최진언이, 이제 와 도해강을 향한 순애보를 펼치고 있는 것이 <애인있어요>를 처음부터 시청했던 시청자들에게는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극중 도해강과 최진언을 연기하는 김현주와 지진희의 연기는 순애보를 설득하기에 넉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그 딜레마를 쉽게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 24회를 넘긴 <애인있어요>의 나머지 추동력이 될 것이다.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 도해강 앞에 순애보를 펼치며 돌아온 최진언, 그런 그의 사랑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는 도해강이 과연 이 순애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애인있어요>의 후반부 전개의 키 포인트이다. 또한 거기에 두 사람의 부모가 얽힌 오랜 해원도 만만치 않다. 

즉, 최진언의 아버지는 자신의 사업적 욕심에 도해강의 아버지의 죽음을 묵과했거나 방조, 심지어 도발했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드라마는 기억을 찾은 도해강을 다시 한번 최진언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 두 사람을 원수의 집안으로 서로 사랑하게된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만들어 가고자 한다. 하지만, 딜레마는, 극초반 불륜도 마다하지 않는 최진언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이 둘의 사랑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순애보라기 보다는, 자신의 이기적인 감정에 휘둘려 사랑을 기만한 '햄릿'과 그 사랑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오필리아'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다시 돌아온 순애보적인, 거기에 정의로운 인물인 최진언이, 이 모든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을지. 아내를 버릴 수 있다면 그 싫어하던 아버지의 사업도 물려받겠다던 인물의 순애보를 나머지 극의 흐름이 설득할 수 있을지. 거기에 자신의 과거, 거기에 더해진 최진언의 혐오스런 사랑까지 도해강이 '결자해지' 할 수 있을지, 그것이 시청자를 설득할 수 있을지가 <애인있어요>의 관건이 된다. 

by meditator 2015. 11. 23. 1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