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건국을, 그 기틀을 구축한 삼봉 정도전의 시각에서 그려내고 있는 kbs1의 대하 드라마 <정도전>이 조선 건국의 인큐베이팅에 들어섰다.


귀양을 내려가 만나게 되었던 백성 아니 도자기를 빚어야 살아갈 수 있는 부곡민 천복과 양지를 만나 막연했던 정치적 풍운아에서 고려의 실상, 그리고 나라의 중심이 누구여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된 정도전은, 이 두 사람의 죽음을 겪으며, 더 이상 고려라는 나라로는 그곳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결론과 함께, 정치의 중심에서 벗어나 유랑 생활을 거듭하던 그의 방랑도 끝을 향해 달려간다.


드라마 <정도전>은 정도전과, 천민 양지, 천복의 만남과 그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정도전을 상세히 그려냄으로써, 정치인 정도전의 목적이 일종의 '민본주의'임을 분명히 하고자 애쓴다. 중앙 정치가의 전횡으로 먹고 살기 힘든 그들의 생활, 외구의 침탈에도 보호막이 되어줄 수 없는 정부,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외구의 앞잡이가 되거나, 그게 아니라도, 결국은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힘없는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기 위한 정부여야 한다는 신념을 드라마는 삼봉을 통해 피력하고 또 피력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백성 중심 사상은 당연히 그 누가 왕권을 잡던 상관없이 그들을 제대로 따뜻하게 보살피기만 하면 된다는 역성 혁명의 사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고려라는 왕조 국가를 거쳐,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 낸 정도전의 진실된 면모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다. 고려 말 사회적 갈등의 가장 큰 부분이자, 고려 왕권을 허약하게 만들었던 가장 결정적 요인이 바로, 세금을 낼 백성들을 모조리 흡수해버린  일부 권문 세가의 농장과 사병이었다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것을 지양한 새로운 체제라는 것이, 불가피하게 세금을 낼 수 있는 소농들이 중심이 된 이상적인 정도전이 구상한 토지 제도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 역시  조선 왕조 개국 후 불과 몇 명의 왕을 거치지도 못하고, 왕가와 또 다른 신흥 권문 세가들의 이해 관계에 의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할 운명을 지닌 이상적(?)인 제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민본주의적 지향을 가졌음에도 정작 백성이 어쩔 수 없이 자기 삶의 기반을 잃거나 포기하고  권문 세가의 그늘이 된  '노비'에 대해서는 무신경한 한계를 드러내며 시대적 한계를 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석의 여지와 상관없이 드라마 <정도전>의 지향은 분명하다. 한 나라의 존립 근거는 그 나라를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백성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드라마의 시각,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정도전의 시각에 따라, 드라마 속 인물들은 혁명과 개혁의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 원대한 기획을 마친 정도전은 자신과 함께 할 인물로 고려를 넘어뜨릴 만한 무력을 가진 그 누군가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레이더망에 잡힌 인물이 바로 최영이다. 주변에서 만나는 백성들에게 번번히 물어볼 때마다 답으로 돌아온 최영을 만나 새로운 국가를 도모하고자 했던 정도전은 그 말을  꺼내기 전에 발길을 돌린다. 먹고 살기 위해 법을 어긴 백성에게 무리한 벌을 내리는 최영을 보고, 그가 백성을 생각하기에 앞서, 그 뿌리에서부터 고려라는 왕조 국가의 사람이라는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다음 발길이 향한 곳은 최영만큼 전국민적 인지도(?)에 있어서는 떨어지지만 그 못지 않은 잠재적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성계이다.


(사진; 미디어펜)

정도전이 선택한 이성계는 미묘한 경계인으로 그려진다. 조선이라는 500년의 완고한 유교적 왕조 국가를 이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인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국경이 분명하지 않은, 싸움 한번에 고려인이 되기도 혹은 오랑캐가 되기도 하는 경계에 자신의 존립 근거를 가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이 되려 애쓰지만, 그래서 고려 조정의 견제 대상이 되는 위태로운 운명의 인물로 그려낸다. 또한 고려를 뒤엎을 만한 무력을 가졌음에도, 고려를 뒤엎은 후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 능력이 없어 안타까운 무장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안타까움의 근간을 드라마는 전쟁터를 누비며 짐승처럼 살아온 그가 가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멈추고자 하는 그래서 더 이상 사람들이 죽어나가지 않게 만들고 싶은 덕장의 이미지로 설명해 낸다. 그렇게 하여, 백성을 생각하는 정도전과, 살생을 더 이상 피하고 싶은 이성계의 접점을 드라마는 그들이 만나기도 전에 이미 완성해 낸다. 

그리고 이제 드라마는 두 사람이 만나 혁명을 논하고, 그리고 그들의 주변 사람들이, 그런 과정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갈 것이다. 새로운 나라라는 불온한 담론 앞에서 인연도, 우정도, 보은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결국 기로에 서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과거를 논하지만, 결국 그 생각의 끝이 닿는 곳은, 현재이다. 2014년의 국영방송 <정도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국가가 되지 않는다면 혁명조차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는 가장 불온한 서사이다.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2014년의 대한민국이 던진 질문이다.  


by meditator 2014. 2. 23. 10:14

2월 21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4부작 <미미>가 방영을 시작했다. '고스트 로맨스'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처럼, <미미>는 이제는 죽어 영혼이 되어 떠도는 미미와, 28살의 잘 나가는 웹툰 작가가 되었지만 불현듯 지난 기억을 잃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헤매는 미미의 첫사랑 한민우의 뒤늦은 혹은 지나간 사랑이야기이다. 


드라마는 마치 청소년 관람가가 아니라, 청소년만 보라는 듯이 소녀들의 사춘기 시절 감성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그래서 조금이라도 철이 든 사람들이 오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쓰러질 듯한 순정만화식의 설정으로 도배된다. 

메모리

아파서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휴학을 밥먹듯이 하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모의 미용실에서 일을 도우며 학교가 그리울 때면 교복을 입고 학교에 숨어드는 비밀스런 소녀. 아무도 없는 미술실에 홀로 남아 묘한 분위기의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소년. 그런데 우연한 해프닝으로, 아니 이제는 솔직히 뻔해도 너무 뻔한 소녀의 실수로 인한 만남과, 자전거 타기 등의 도발 등으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 호감을 만남으로 이어간 소년과, 소녀, 알고보니 이들에게는 서로가 공감할 만한 가족으로 인한 상처가 있었다! 소년의 상처를 위해, 소년에게는 소년을 구하다 죽어간 아버지가 등장하고, 소녀에게는 소녀에게 이름모를 병을 물려줄 병으로 고생하다 죽은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따라간 아버지가 존재한다. 청춘의 고독을 씹기 위해서, 내가 어디서 데려온 자식이었으면 좋겠어, 아니 데려온 자식이 아닐까, 내가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을 부풀렸던 사춘기 시절의 그 상상력의 척도에 딱 들어맞는 설정이다. 그래서 그저 우연히 마주친 소년과 소녀는, 당연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호감은, 그들 각자가 가진 비밀을 공유하는 만큼, 연민으로 사랑으로 발전하는데 하등의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1시간 여의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위의 구구절절한(?) 설정 들을 드라마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가 3분 여의 짧은 뮤직 비디오에서 흔히 보았듯이, 드라마 속 그녀와 그는 그저 당연히 만나고 그리고 사랑하고, 이제 뜻하지 않게 이별까지 하며 또 다른 사연을 보탤 기세다. 그리고 설명을 하는 대신, 드라마는 그 행간을 장황한 음악으로 채워간다. 마치, the sm 발라드의 홍보용 뮤직 비디오라도 되는 것처럼, 드라마는 태연과, 종현 등의 목소리로 충만하다.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드라마의 목적이, 스토리인지, 아니면 상투적인 스토리를 뛰어넘어 존재감을 드러내는 ost인지 질문할 수 밖에 만들도록.

뭐 비단 <미미>의 문제만이 아니다. <응답하라 1997>이란 드라마를 통해 ost로 부각된 90년대 음악의 융성을 기점으로 케이블 방송 드라마들에 있어서 음악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닌 것이 되었다. 특히 m.net에서 앞서 방영되었던 <몬스타>의 경우는 드라마의 제재도 음악이었으며, 그 역시 드라마적 설정의 빈 공간을 음악으로 꽉 채웠다는 데서, <미미>와 다르지 않다고 보여진다. 아니 이제 애초에 본말이 전도된, 음악 드라마라는 형식이 m.net 드라마적 경향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여지기도 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음악이 그저 ost에 머물고 있다는 자조도, m.net 드라마의 경우가 되면, 그 경우가 역전이 되는 것이다. 

미라클

주인공의 대사보다도 많은 음악, 구체적이고 개연성있는 상황 설정보다도 아름다운 배경과 그럴듯한 분위기와 거기에 깔리는 드라마의 설정보다도 더 그럴 듯한 음악으로 대신되는 드라마의 내용을 이른바 '스타일리쉬한' 특징이란듯 내걸고 있다. 마치 중년 이후의 세대를 대상으로 한 드라마들이, '막장'이란 요소를 세대적 흥행의 주된 코드로 장착하듯이, 청소년 세대, 그 중에서도 특히 여린 감성의 소녀 세대를 농단하기 위해서는, 분위기있는 그럴듯한 음악과 순정만화 스타일의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또 하나의 공식 같이 m.net 드라마의 특징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결코 '막장'을 좋은 드라마라고 하지 않듯, 죽음을 농락하는 극단적 낭만주의에 호소하는 <미미>식의 설정이 결코 청소년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화뇌동하기 쉬운 여린 소녀 감성일 수록, 그 감성을 자극만 하지 않을 더 섬세한 개연성과 논리가 심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저 그들이 보면 설레일 모든 설정이 모아놓은 드라마는 지극히 청소년들을 구매 대상으로만 삼은 얕은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심지어 19금에도 불구하고, 이젠 <마녀 사냥>을 현실적이라며 즐겨보는 청소년들이 과연 <미미>식의 감성에 호응을 할지조차 의문이다. 

<미미>는 두 주인공 최강 창민과 문가영이 각가 sm과 sm의 방계 회사 smc&c이며, 드라마에서 주구장창 흐르던 ost 역시 sm 소속 태연과 종현의 음악이듯이, made by sm의 드라마이다. yg의 아이돌 양성 과정을 <위너tv>란 프로그램으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황에서 굳이 드라마가 made by sm을 걸고 넘어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주된 시청층인 채널이 거대 기획사들의 홍보의 장이 되고 있다는 점은, 이제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케이블임에도 공중의 전파를 활용하는 매체로서의, 그리고 결국은 청소년 문화를 끌고가는  m.net의 책임감이란  문제를 한번쯤은 되짚어 볼 지점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4. 2. 22. 10:41

독한 혀들의 전쟁 하이퀄리티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 <썰전>이 1주년을 맞이했다. 그에 따라 <썰전>은 프로그램의 특색을 살려 1주년을 기념하는 갖가지 다양한 특집을 마련했다. 


앙케이트 조사로 돌아본 <썰전>
1부 <썰전>과, 2부 <예능 심판자> 모두 프로그램과 관련된 앙케이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중 1부 <썰전>에서는 <썰전>과 비슷한 분야에 종사하는 기자 들의 평가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간 1년 간의 활동을 통해 여, 야의 두 성향을 대표하는 이철희, 강용석 두 사람의 평가는 상반되었다. 개인적 구설수에 시달렸던 강용석의 경우, '이미지 세탁'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걸맞게, 그간 그가 보여준 성실한 태도와 명확한 입장으로 인해 '또라이'는 아니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반면, 이철희 소장의 경우는 그 개인보다는, 그가 대변하는 입장을 통해, 그의 야성이 괴팍하거나 편협하지만은 않다는 평가를 얻어냈다. 그저 패널 두 사람에 대한 평가이지만, 보수적 세력에 대한 인간적이라는 평가나, 야권 성향의 인물에게 알고보니 '객관적'이라는 평가는 묘하게도 우리 사회 보수와 진보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알고보니 '인간적'이라는 보수와, 알고보니 '객관적'이라는 진보는 얼마나 서로 상대 진영에 대해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증명하는 언어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편견과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과연 '성공적인 이미지 세탁'이라는 효과를 얻은 인간적인 보수 강용석이지만, 그의 성실하고 순박한 인간성이 곧 그의 정치적 식견의 성실함(?) 혹은 정치적 야망으로의 성실함(?)으로 드러날 때의 위험성은 잔존한다. 그가 매회 준비한 엄청난 양의 자료에 의해 윤색되는 그의 논리는 또 다른 함정일 수 있다. 이철희 소장의 프로그램만 하라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인 강용석의 발톱은 늘 실전을 위해 날세워져 있고 <썰전>은 그런 그를 위한 도구로 소용될 가능성 잔존한다. 
또한 '객관적'인 이철희 소장의 진보가 진보적 스펙트럼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도 불명확하다. 최근 안철수의 신당 움직임처럼, 이제 더 이상 아니 원래부터도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진보 세력 내에서, '민주당'과 '안철수'에 대해 부정적인 이철희 소장이 포지션이 객관적인 것인지, 그저 이제는 현장에서 멀어진 노회한 평론가적인 것인지에 대한 검증 역시 애매모호하다. 

그러기에, 1년을 맞이한 <썰전>의 미묘한 무딤은, 점점 더 평론가적이 되어가는 이철희 소장과 현실에의 발톱을 숨기지 않지만 인간적인 강욕석의 조화에서 오는, 균형의 무너짐에 기인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링 안에서의 실전을 준비하는 여와, 링 밖에서 훈수를 둔 야의 대전은 가끔은 날이 곤두서지만, 어쩐지 한 김 빠져 보이는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 <jtbc뉴스9>이 가지는 현장성도, 이제는 그 래디컬함도 한 김 빠져버린 훈수두기에 
빠져가는 <썰전>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사진; osen)

패널을 평가하는 또 다른 패널
<예능 심판자>의 경우, 앙케이트 조사에 덧붙여, 동업자들인 비평지[ize]의 편집장 강용석, 전 [씨네21]기자 김도훈, 한겨레 tv의 이승한, 개그맨 조세호, 배우 여민정들을 패널들과 <예능 심판자>에 대한 평가를 덧붙였다.

예능이라는 특성을 잃지 않으려는 애교(?)로 보여지는 여민정과 조세호의 등장은 뜬금없었지만, 각계 전문가들의 입에서 나온 <예능심판자>에 대한 평가는 이 프로그램이 처한 상황을 가감없이 드러내 주었다. 바쁜 스케줄에 밀려 더 이상 공부하지 않으면서 특색을 잃고 고루해지는 김구라와, 동료 연예인들의 뒷담화 외에는 아직 그 자리에 걸맞는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 채 눈치보기에 급급한 김희철, 미디어 평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코미디를 하고 있는 이윤석 등에 대한 평가가 적나라하게 이어졌다. 

무엇보다 <예능 심판자>의 딜레마는 최고 시청률의 1분, 혹은 최저 시청률의 1분에서 보여진다. 배우들의 연예담과 부업 등에 쏠린 대중의 관심은, 대중들이 이 프로그램에 거는 기대가 아니라, 여전히 대중들이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을 지니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져야 할 것이다. 즉, 프로그램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각계 각층의 입담가들에 의한 미디어 평론을 지향한다 하지만, 보는 시청자들은 그저 또 하나의, 혹은 좀 색다른  연예 정보 프로그램처럼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1부가 <썰전>이라는 색깔에 안착한 반면, 제목이 무색하게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예능 심판자>의 현실인 것이다. 더우기 패널들도 지적하듯, 김희철의 합류 이후, 눈에 띄게 방향을 잃고 정보에 대한 코멘트 정도에 그치거나, 노골적인 특정 소속사 사람들 띄우기나,  뒷담화에 귀기울이는 프로그램은 미디어 평론이란 미명이 무색해 질 정도이다. 그러기에, 최고의 1분 혹은 최저의 1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앞으로의 <예능 심판자>는 더더욱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패널 중 한 사람이 옹호한다. <썰전>의 무뎌짐은 무뎌짐이 아니라, 시청자들의 익숙함이라고, 정의내린다. 그런 평가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익숙함을 핑계 대거나 익숙함의 피로를 논하기에 앞서, 익숙함의 성질이 미더움인가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찾아보게 되는 것은, 그 익숙함의 밑바탕에 미더움이라는 신뢰가 쌓여있기 때문이지만, 익숙함이 외면으로 바뀌어지고 있음은, 미더움을 쌓기도 전에, 나른해지고 있는 자신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돌잡이가 마이크를 굳이 잡지 않았더라도, 앙케이트 조사에서 시청자들이 <썰전>의 초심을 소원한 것처럼, 1주년에 초심을 기대하는 처지가 된 것에 <썰전>은 진지한 방점을 찍을 때라고 보여진다. 



by meditator 2014. 2. 21. 10:08

언제나 그렇듯 국가적 행사인 올림픽을 향해 각 방송사들이 전력질주한다. 심지어 이제는 중계조차 각 방송사 별 특색을 갖춰, 중계 방송 간의 경쟁 조차도 나날이 치열해 진다. mbc가 스타mc 김성주의 화려한 입담에 의존한다면, sbs는 신예 배성재 아나운서의 차분한 진행과, 거기에 덧붙인 전문가의 노련한 해석의 조화로 mbc의 중계와 쌍벽을 이루어 나가는 가운데, kbs는 강호동이라는 또 다른 스타의 해설 합류로 화제성을 이끌어오고자 했다. 이렇게 각 방송사 별로 중계를 둘러싼 경쟁이 예년과 다르게 좀 더 치열해 지고 있는 가운데 조용히 자신의 전통을 유지해 나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경규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돌아오면 떠오르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이경규가 간다>이다. 2002년 올림픽을 필두로 언제나 우리 나라의 국가적 운동 경기에는 그가 있었다. 이경규가 mbc에서 <일요일일요일 밤에>를 하건, kbs에서 <남자의 자격>을 하건, 심지어 sbs로 옮겨와 <힐링 캠프>를 해도, 언제나 <이경규가 간다>는 그 제목의 고유성을 살려내며 이경규를 따라 다녔다. 그리고 이제, 2014년의 소치 올림픽, <이경규가 간다>를 찾아볼 수는 없다. 대신, 올림픽 기간 동안 17일, 19일 양일 간에 걸쳐 <힐링 캠프> 소치 특집 편이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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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과 다르게 <이경규가 간다> 대신에 <힐링 캠프> 소치 특집이 방영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지난 번 <힐링 캠프> 런던 올림픽 특집이었던 '런던 캠프' 특집에 대한 반성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을 맞아 <이경규가 간다>라는 전통을 유지하고 싶었던 이경규는 <힐링 캠프>라는 특성을 배제하고 런던 올림픽 특집 런던 캠프라는 특집의 미명 하에, 런던 판 <이경규가 간다>를 강행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경규, 한혜진, 김제동 세 사람의 응원 방식에 호불호가 갈렸으며, <힐링 캠프>란 프로그램의 성격 특성상, <이경규가 간다>라는 방식의 부조화가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처음 <이경규가 간다>를 했을 때만 해도, 예능 프로그램이 국가적 체육 행사에 앞장서 응원을 한다는 방식이 신선한 포맷이었지만, 이제는 너도 나도 서로 못가서 난리인 상황에서 <이경규가 간다>라는 포맷이 전통성은 있을지언정, 차별성을 누리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는 점이 가장 딜레마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던 <힐링 캠프> 런던 캠프는 결국 <이경규가 간다>의 한계점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결과만을 낳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을 맞이해, 이경규와 <힐링 캠프>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방식을 포기하고 대신 <힐링 캠프>의 특성을 보다 고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소치 올림픽 판 <힐링 캠프>가 그 결과다. 이제는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현지 응원 방식 대신에 발빠르게 금메달리스트 이상화와,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했지만 6회 연속 올림픽 출전이라는 기록을 세운 이규혁 선수를 섭외한 <힐링 캠프> 소치 특집은 <힐링 캠프>다운, 그러면서도, 여전히 국가적 행사의 현장을 지키는 <이경규가 간다>의 전통을 지킨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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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발빠르게 섭외한 이상화 선수와 이규혁 선수와의 시간이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는가는 평가의 여지를 남긴다. 늘 그래왔듯 게스트의 역량에 따라 프로그램의 질이 리듬을 타는 <힐링 캠프>답게, 특히나 스포츠 스타들을 데리고는 상투성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전례처럼, 이상화 선수나, 이규혁 선수의 특집이 특별히 별다르지는 않았다. 그들의 고된 시간을 진솔하게 드러낸 시간은 좋았지만, 뻔해도 너무 뻔한 성유리를 제물로 삼은 러브 라인에 치중한 토크, 거기에 본인이 말해놓고도 무안할 지경의 이경규의 상투적 마무리는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그저 보도와 응원에 그쳤던 다른 프로그램들과 달리, 차분하게 올림픽의 상반된 캐릭터의 영웅을 발빠르게 이야기의 장으로 끌어온 것만으로도 <힐링 캠프> 소치 특집은 의미가 있다. 금메달리스트의 영광만큼, 6회를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메달인 이규혁 선수의 출연과 그의 소회는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 캠프>다운 특성을 십분 살려낸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경규의 소치 버전 <이경규가 간다>는 최고는 아니었지만, 그의 전통을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지난 해 sbs연예 대상에서 후배 들과 겨루어 상을 받는 현역으로 여전한 이경규의 저력이 보여지는 지점이다. 또한 이경규의 이런 면은, 또 한 사람, 그의 후배로 여겨지면서, 소치에서 해설자로서 모습을 보였던 강호동과 대비되는 측면이기도 하다. 

<우리 동네 예체능>을 진행하는 강호동은 <우리 동네 예체능>의 프로그램적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이번 소치 올림픽에서 프로그램 해설자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거둔 일련의 성과과 상관없이 과연 이번 올림픽에서 그의 선택이 어울렸는가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가리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우리동네 예체능>이란 프로그램의 성격을 해설자 강호동이 제대로 살려냈는가에는 의문의 방점이 찍히는 상황이다. 자신이 이끄는 프로그램의 성격에도 맞지 않고, 그렇다고 이경규처럼 지금까지 자신이 해오던 전통이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해설자로서의 등장은 <달빛 프린스>의 강호동처럼, 나도 이런 걸 할 수 있다. 혹은 그저 올림픽이니 나도 한 자리 끼어보자 라는 강호동 자신의 욕심만이 앞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 런던 올림픽의 단점을 극복한 이경규의 선택에 한 수 아래다. 50을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후배들과 대등한 경쟁을 하는 이경규와, 짧은 자중과 숙고 뒤에 오래도록 자신의 페이스를 찾지 못하는 강호동의 차별 지점이기도 하다. 소치 올림픽의 이경규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현장을 지키던 자신의 전통을 지키면서, 자신이 하는 프로그램의 전통도 살린 현명한 버전업의 사례다. 


by meditator 2014. 2. 20. 08:49

kbs1 tv에서는 미래 창조 과학부의 지원을 받아 창조 경제 특집 2부작 다큐 <상상력이 경쟁력이다> 중 1부, 미래를 위한 선택이 2월 18일 방영되었다.


<썰전>의 패널 중 한 사람인 이철희 소장이 프로그램에서 우스개로 종종 즐겨하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도 모르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김정은의 마음, 그리고 안철수의 새정치, 마지막으로 박근혜의 창조 경제라는 것이다. 그렇듯, 박근혜 대통령이 새 정부의 슬로건으로 내건 창조 경제는, cj그룹이 매번 목놓아, 자사의 프로그램을 선전하면서, 이것이 창조 경제의 지름길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알듯 모를 듯한 퍼즐과도 같은 게 현실이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 <썰전>의 이철희, 강용석 두 패널은 결국 창조 경제라는 것이 기업의 규제 완화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에 공감을 했지만, 기업의 규제 완화가 창조 경제로 둔갑하는 매커니즘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 듯하다. 

그런 세간의 의혹을 풀어주기 라도 하듯, kbs1tv에서는 미래 창조 과학부의 도움을 받아 창조 경제의 실마리를 제공할 다큐를 준비했다. <상상력이 경쟁력이다>라는 제목에서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듯이,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다큐는 우선 핀란드의 국민 기업으로 핀란드 경제를 지탱해 왔던 노키아가 MS사에 인수되는 충격적 사건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세계의 우려와 달리, 핀란드는 노키아란 대표적 기업이 무너지는 것이 곧 핀란드라는 나라의 몰락으로 이어지지 않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모바일 게임 앵그리 버드로 유명한 로비오 등의 콘텐츠 산업이 노키아의 공백을 메워 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핀란드 만이 아니다. 한때 가장 높은 실업률로 인해 해가 지는 나라가 되어가던 영국은 블레어 총리 시절 크리에이티브 정책(Creative Britain)을 내걸고 문화 콘텐츠를 주된 산업으로 성장시키려고 애썼고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뮤지컬의 다수가 영국산이라는 소정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중이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벤처 산업의 메카로 이름을 떨쳤던 실리콘 벨리가 소프트 웨어 산업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 될 플러그 앤 플레이 테크 센터(Plug&play tech center)에 세계 각국의 인재들을 끌어 모아 활성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를 통해 <상상력이 경쟁력이다>는 이제는 , IT라는 말조차도 시대에 뒤처지는 세상이 되었다며, 인터넷이 컴퓨터나 핸드폰 속이 아니라 사물에 투영되는 시도가 빈번히 이루어 지는 세상에서, 소프트 웨어의 경쟁력, 결국은 그것을 판가름할 창의력, 상상력이 미래 사회의 산업적 경쟁력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KBS1TV에서 소리높여 상상력만이 이제 우리가 살 길이라고 외칠 때, 그와 비슷한 시간에 tvn의 <공유 tv>에서는 재미있는 화제의 인물이 다루어 졌다. 세간에 힐링의 전도사로 인기를 끌고 있는 혜민 스님을 패러디해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된 인물 '혜믿 스님'이 등장한 것이다. 혜믿 스님은 그의 sns아이디가 허망하다(@humanghada)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혜민 스님의 힐링 어록을 우리 사회에 맞는 촌철 살인의 패러디로 재탄생시켜 공감을 얻어 가는 중이다.

<공유 tv>에서 소개된 여러 혜믿스님의 어록 중 하나는 개미와 베짱이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여름내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음악을 즐기던 베짱이는 겨울이 다가오자 여름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한 개미를 찾아간다. 그리고 베짱이는 개미에게 '방빼!'라고 말한다. 

(사진; 한국 경제)

여기서 포인트는 베짱이가 여름 내내 놀고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개미네 집 주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혜믿 스님은 말한다. 최고의 힐링은 입금이라고, 집에 돈이 많으면 실수를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일개 패러디에 불과한 혜믿 스님이라는 sns의 글이 방송 프로그램에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시대적 공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베짱이와 개미는 우리의 현대사에서 무수한 캐릭터로 변주되어 왔다. 경제 개발 시대에는 땀 흘려 일하는 개미가 근면한 일꾼의 상징으로 칭송받았으며,  그 후 다시 시대가 흘러 창의력과 상상력이 중요한, 바로 창조 경제가 내걸고 있는 그 콘텐츠가 부각되는 시기가 되면, 땀을 흘리며 일하는 개미 대신 베짱이가 보다 크리에이티브한 예술가로 새롭게 조명되었다. 그리고 이제, 2014년의 sns는 바로 그 창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베짱이 같이 집주인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88만원 세대처럼 스펙을 걱정하고, 집값을 걱정하며 살아서는 창조력 따위는 없다는 걸 역설적으로 혜믿스님은 말하고 있다. 

<상상력이 경쟁력이다>는 의기 양양하게 이 시대의 새로운 화두가 창의력과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콘텐츠 산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거기서 예를 들은 핀란드와 실리콘 밸리의 현실은 하나만 보여주고, 둘은 보여주지 않는다. 핀란드라는 나라를 지탱하던 대기업 노키아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핀란드라는 나라를 건재하게 만등러 주는 여러 작은 기업들은 그냥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실패를 해도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핀란드라는 나라의 사회적 기반이 그 뒤에 있다는 말은 드러나지 않는다. 벤처 기업의 모태인 실리콘 밸리를 설명해 주는 또 다른 단어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라는 걸 설명하지 않는다. 

노키아가 무너진 핀란드의 건재를 부러워 하기 전에, 과연 우리나라 전체 예산보다도 더 큰 규모가 되어버린 삼성이 무너져 버려도 대한민국이 건재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대기업이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그럼에도 대한민국을 지탱해 줄 중소기업들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라는 질문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전제가 생략된 질문, 그리고 전제를 무시한 질문은 다시 허겁지겁 또 하나의 과제만을 젊은이들에게 부여할 뿐이다. 영어 공부에, 인턴에, 자소서에, 거기에 얹어서 이제 창의력과 상상력도 스펙으로 쌓아야 하는 버거운 과제를. 크리에이티브한 영국을 이끌고 있는 테크시티의 관건은 싼 임대료와 싼 음식값이었다는 게 포인트다. 과연 오르는 집세를 걱정하고, 학교가 끝나기가 바쁘게 뛰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춘에겐 창의력이나 상상력은 경쟁력이 아니라, 사치일 수가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2. 19. 02:27

드라마가 시작되자 마자 눈밭을 비칠비칠 걸어가던 배우 윤계상은 자신이 지나왔던 과거에 대한 후회의 변을 늘어놓더니 다짜고짜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그리고 드라마는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무고시 합격을 기다리던 정세로(윤계상 분)는 그가 면접 시험에서도 말했듯이 세계를 떠돌지만 떠돈 만큼 성과를 얻지는 못하는 아버지가 있는 방콕으로 그를 만나러 떠난다. 그리고 그말고 그곳을 향해 떠나는 또 한 쌍의 커플이 있다. 정세로가 우연히 꽃배달을 가서 그의 눈에 띄었던 여인, 재벌의 딸이자, 쥬얼리 업체 벨 라페어의 대표인 한영원(한지혜 분)과 그녀의 약혼자 공우진이다. 그들은 방콕에서 열리는 쥬얼리 페어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을 향하지만, 세로의 아버지 정도준(이대연)과 박강재(조진웅), 서재인(김유리)이 그들의 다이아몬드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공우진(송종호 분)이 눈치채는 바람에, 그리고 다시 세로의 아버지가 배신하는 바람에 사건은 복잡해 지고, 그 과정에서 공우진과 세로의 아버지가 죽게 된다. 

억울하기로 따지자면 외무고시 합격을 한 마당에 손에 수갑을 차고 살인자의 누명을 쓴 채 아버지의 입원비조차 마련치 못해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던 정세로나, 그 하나만 믿고 의지했지만 하루 아침에 약혼자가 다이아몬드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주근 한영원이나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드라마는 '복수'를 위해 한영원의 복수는 약혼자를 잃은 상심으로 덮어 잠시 미뤄둔다. 반면에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태국 감옥에 갇혔던 정세로는 그를 면회 온 박강재의 말 한 마디만 믿고 '벨 라페어'를 아버지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라, 복수의 대상이라 여긴다. 


언제나 우리나라 드라마의 복수극의 주인공들이 그래왔듯이, 복수에 눈이 먼 주인공은 맹목적으로 복수를 향한다. 5년이나 감옥에 있으면서, 한번도 냉정하게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지 못한 채, 언제나 가장 믿지 못할 조력자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의 운명을 넘기는 어수룩한 태도로 일관하고, <태양의 가득히>의 정세로 역시 그 전례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그의 맹목성이 결국 첫 장면 정세로가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후회하는 그 지점이 되어, 정세로와 한영원의 비극을 낳을 것이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정세로의 오해가, 결국 한영원과의 악연을 풀 실마리가 될 것이다. 결국, 박강재의 근거도 없는 말 한 마디가 <태양은 가득히>의 전체 플롯의 견인차가 된다. 덕분에, 드라마는 첫 장면부터 비장하게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5년 전을 오가며, 복수의 실타래를 풀어내지만, 그 실타래가 어딘가 엉성하게 감긴 듯하다. 심지어 현실에서는 가장 엘리트적인 주인공들은 '복수'의 노예가 되어, 언제나 그래왔듯, 이성을 잃고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해코지 하고자 노력한다. 

제목 역시 그러하지만, 1회부터 주구장창 되풀이 되는 ost에서도 깨닳을 수 밖에 없듯이, 알랭 들롱이 분한 톰 리플리의 야망을 향해 달렸던 영화는, 이제 복수를 위해 야망을 이용하는 청년 정세로의 입지전적 성공기로 돌변할 것이다. 누군가의 말만 믿고 맹목적으로 복수에 뛰어든 청년 정세로의 복수가 리플리의 야망만큼 공감을 얻을 지는 미지수다. 
태국 경찰에서 그를,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외쳤던 두 사람의 절규처럼, 결국은 하나의 사건에서 조력자여야 하는 두 사람이, 복수의 대상과, 복수에 헌신하는 사람으로 만나는 아이러니는 무척이나 극적이다. 복수극만큼이나, 진실을 안 이후의  두 사람의 행보가 <태양은 가득히>의 후반전의 또 다른 매력일 것이다. 하지만, 복수극이든, 그 이후의 또 힘을 합친 복수극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시작은 주춧돌이 되는 사건들의 개연성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주춧돌이 얼기설기 놓인 복수를 위한 복수극은 허황하다.


by meditator 2014. 2. 18. 02:07

'추억팔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추억을 팔아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용어로, 말 자체의 뉘앙스로도 알 수 있듯이 그다지 긍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하다하다 오죽해서 할 것이 없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추억이라도 팔아 관심을 끌려고 한다는 부정적 의미가 담겨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공유하며 살아가는 시간 위의 존재로써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 과거의 그 무엇에 약하다. 더구나, 그 과거가 나와 연관된 고리를 가지는 한에서 더욱. 

지난 주 방영된 <1박2일>이 설날 서울의 명소를 그저 장소가 아니라, 멤버들의 과거, 그들의 아버지 세대의 시간과, 아들 세대의 시간이 중첩된 장소로써 자리매김되어,  그것들이 그간 다녀온 여행지 중 하나가 아니라, 멤버들에게, 그리고 그 방송을 본 사람들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의 의미로 다가온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에 덧붙여 <1박2일>의 추억 여행은 계속 된다. 지난 주의 방영분이 <1박2일>의 멤버 개개인의 추억이라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면, 2월 16일에 방영된 <1박2일>은 예능 프로그램으로써 <1박2일>이 과거의 예능 프로그램을 추억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난 주도 그렇고, 이번 주도 그렇고, <1박2일>이 추억을 되새기는 방식은 현존재적이다. 
보통하는 추억팔이라 하면 '그땐 좋았지'라는 회고조가 되어, 말하는 자의 감상에 빠져, 공감의 시점을 놓치기 십상이나, <1박2일>은 추억을 현재의 그 무엇처럼 불러온다. 
방금 전 명동 성당을 다녀왔는데, 몇 십 년 전, 나보다도 더 젊은 아버지가 명동 성당에서 연인과 함께 손을 잡고 찍은 사진은 오히려 보는 과거가 현재인 듯 느껴진다. 마찬가지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가족 오락관>의 mc인 허참을 모시고, 멤버들을 여성 팀과 남성팀으로 나누어 스튜디오에서 펼쳐진 추억의 <가족 오락관>은 그저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지라던가, 좋았었지라는 감정을 넘은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정말 좋았던 그 무언가를 놓쳐버린 것 같은 감정의 수위를 찰랑거리게 만든다. 

(사진; 리뷰스타)

특히나,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몇몇 게임에서 보여지는 명mc 허참의 명불허전 능력은, 어떤 안타까움마저 불러일으킨다. 특히나 최근, 리얼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대세를 이루면서, mc의 능력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은 상황에서, 단 몇 마디의 말로 진행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진행 실력을 보여준 허참의 모습에서, '레전드'라는 단어의 정의가 새삼 깨달아지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만나보기 드문 허참이라는 명 mc, 그리고 또 그만큼이나 만나보기 힘든 '가족'적인 오락 프로그램의 분위기에서, 정신없이 흥겹게 웃어제끼다 문득 우리가 이제는 흘려보내 버린 과거가 되어 버린 어떤 정서에 문득 가슴이 시큰해진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가족 오락관>이 돌아와도, 그 몫은 자기가 아니라는 허참의 한 마디에, 손가락 틈으로 흘러내려가는 모래처럼 잡을 수 없는 과거를 흘러보냈음을 깨닫게 된다. 

묘하게도 잠시 만난 가족 오락관은 지난 주의 아버지와 아들이 한 장소에서 만나게 된 합성된 사진과도 닮았다.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된 mc허참과, 그가 활동하던 당시 신세대나, 유망주로서 <가족 오락관>에 참여했던 멤버들이 이제 주역이 된 프로그램에서 <가족 오락관>을 추억하는 방식은 합성된 가족 사진과도 같은 감회를 불러온다. 잊고 살았지만, 지금의 내가 그렇듯이, 내 아버지 세대의 누군가도 여기 이렇게 살았었다는, 박제된 추억이 아닌, 과거의 어느 공간에선가 현존재였던 추억을 존중하게 만든다. 

설날맞이 <1박2일>은 <1박2일>이면서도 <1박2일>답지 않았다, 늘 장소를 찾아가서 그  곳에 정박된 배처럼 그 장소의 이것저것을 탐색하는 <1박2일>의 본래적 활동은 지속하되, 그것을 탐색하는 자세는 이전의 것과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음을 설날 특집 <1박2일>은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제 시즌3에 들어서, 더 이상 어디 가볼 데가 있겠어가 아니라, 그 전에 가본 곳을 또 가더라도, <1박2일>이 전혀 다른 추억을 우리에게 남겨줄 것같다는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by meditator 2014. 2. 17. 10:27

'귀농' 말 그대로 농사에 귀의하는 귀농이 더 이상 특별한 사건이 아닌 사회적 현상이 되고 있다.

2011년을 기준으로 그 전해에 비해 158% 증가하여 만 가구(10, 503 가구, 23,415 명)을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 수원 농업 진흥청 귀농귀촌종합 센터에서 상담자  1000 여 명한 중 무작위로 선정해 조사를 놓고 봐도, 그 전해에 상담자 중 실 귀농자가 11%에 불과한 것에 비해, 16%의 상담자가 이미 귀농을 했고, 52%가 귀농을 준비중 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귀농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삶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중이다. 

바로 이런 사회적 현상인 '귀농'이 리얼 버라이어티로 들어왔다. 
물론 농촌으로 향하던 리얼 버라이어티는 그간 종종 있어 왔다. <패밀리가 떴다>는 농가를 빌어 농촌 체험을 리얼 버라이어티의 소재로 삼았고, 최근 인기를 끌기 시작한 <사남일녀>의 첫 꼭지도 강원도 인제 산골짜기 마을로 찾아 들었었다. 하지만 <패밀리가 떴다>는 농가라는 배경을 리얼 버라이어티의 소재로 삼았을 뿐이고, <사남일녀> 역시 체험의 시한이 한시적이다. 아니 '귀농' 자체가 목적이 된 적도 있었다. <남자의 자격>에서 야심차게 농촌에 땅을 빌어서 일년 농사를 짓겠다는 포부를 내비쳤었지만, 다른 미션에 짖눌려서, 일년간의 귀농은 멤버들이 농사짓는 모습 한번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을 맺고 말았다. 이제 그 <남자의 자격>에서 결실을 얻지 못했던 '귀농'이 리얼 버라이어티의 전면에 내세워 졌다. tvn에서 새롭게 시작한 <삼촌 로망스>는 6개월간의 농촌 재생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네 남자의 농촌 정착기를 다룬다. 

(사진; tv리포트)

프로그램의 목적이 귀농인 만큼, <삼촌 로망스>의 시작 역시 만만치 않다. 앞서 수원 농진청 귀농귀촌 종합 센터 상담자 중 32%가 상담 과정에서 귀농을 포기하고, 실제 귀농만큼 낭만적으로 귀농을 했다가 현실이 여의치 않아 귀농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는 시점에서, <삼촌 로망스>는 귀농을 꿈꾸는 네 남자 양준혁, 강레오, 강성진, 양상국의 귀농 면접부터 까다롭게 보면서 '귀농'을 시작한다. 그저 프로그램 하나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삶의 선택으로서의 '귀농'의 무게감이 <마스터 세프 코리아>의 무서웠던 심사위원 세프 강레오가  면접관들 앞에서 흘리는 식은 땀에서 현실감있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실제 귀농 인구의 평균 연령은 52.4세로(2011년 기준), 그 중 40대의 귀농 인구도 25.4%를 차지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귀농 인구 중 중장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 <삼촌 로망스>도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네 남자의 평균 연령이 40.3 세이다. 이들은 각자 한때 잘 나가는 야구 선수이거나 배우였지만, 제2의 인생으로 귀농을 생각하고 있거나, 요리사로써 자기 요리의 재료를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로망을 지니고 있거나, 태어날 때부터 농가에서 자랐기에 농촌에서의 삶을 꿈꾸는 구체적 목적을 가지고 '귀농 면접'에 임한다. 즉, 그저 리얼 버라이어티의 멤버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농'이라는 특정의 삶의 형태에 맞도록 각자 삶의 조건에서 그 목적이 배태되어 나올 수 있도록 제작진은 노력한다. 그래서, 그들이 리얼 버라이어티의 멤버인 줄 알면서도, 막상 면접관 앞에서 그들의 소견이 그리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들처럼 많은 도시인들이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저렇게 귀농을 시작할 것이란 막연한 공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버라이어티의 특성을 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귀농 면접은 현실감있게 진행되었다. 양상국이 가져온 아메리카노와 부셔먹는 과자로 무마될 정도 면접이 호락호락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진심만 있다면 어찌 넘어가 볼 수 있는 대인 면접이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에 이은 실습 장작 패기와, 실제 농장 체험 과정은 힘으로는 자신감이 넘치던 양준혁조차 신음 소리를 절로 낼 만큼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다. 물론 장작 패기를 농촌 실습으로 하는 장면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수의 농촌 체험 프로그램들이 다짜고짜 농촌에 찾자들어 살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실제 정착 과정이 5~7년이 걸린다는 귀농의 무게감을 '면접'이라는 과정을 통해 다루려고 한 것은 기존의 프로그램들과 차별성을 둔 지점이었다. 또한 그들이 살고자 찾은 강원도 인제군 소치 마을에서 기대와 달리 이장님의 냉랭한 반응이 그대로 방영된 것 또한 설정일 망정 '귀농' 프로그램으로서의 리얼리티를 살린 측면이다.

그저 막연한 농촌 체험이 아니라 '귀농'이라는 목적 의식성을 가진 <삼촌 로망스>의 첫 회는 그 목적에 어울리는 첫 발을 내딛은 듯하다. 동상이몽의 네 남자의 개성도 기대해 볼만하다. 부디 앞으로의 과정에서도 현실의 '귀농'이라는 사회적 현상이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과정을 통해 잘 버무려져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4. 2. 16. 11:49

드라마 속 여주인공을 '마녀'라 지칭하며 남녀 간의 연예에 대해 갑론을박할 때만 해도 <마녀 사냥>이 뭐야? 했었다. 하지만, 2013년 8월에 시작하여, 불과 반년 정도가 지난 지금, 거리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소리높여 말한다. 매주 즐겁게 시청하고 있어요~.  군대간 아들의 전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가장 즐거이 시청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마녀 사냥>이라고 한다. 어느덧 이 프로그램에서 묘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출연자의 머리 위에 퍼지는 초록빛 기운과 시그널이 타 프로그램에서도 도용되어도 전혀 이물감이 없는 상징이 되었다. 시청률 표에 잡히는 시청률과 상관없이, <마녀 사냥>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사진; 뉴스웨이)


그래서 이제 <마녀 사냥>은 위험해 졌다. 그저 어느 종편 방송국 구서진 스튜디오에서 출연자들이 각자의 개성을 살려 누군가의 연애를 도마에 올려놓고 회를 칠 때만 해도, 그저 저런 시각도 있구나 싶었지만, 이제 동시대의 연애 코칭의 상징적 프로그램이 되어가는 <마녀 사냥>에서는 권력의 향기가 난다. 
들여봐 주는 사람들이 적을 때의 <마녀 사냥>에서 곽정은 에디터가 외국의 유명(?) 박사나 연구 기관의 실험 결과를 들먹일 때만 해도, 그녀의 이야기는 그저 각자의 사견에 불과한 연애론에, 조금은 더 객관적인 데이터처럼 보였지만, 이제 다수의 관심이 쏠린 <마녀 사냥>에서 그녀가 매주 들먹이는 이론들은 마치 교과서처럼 신봉되어질 가능성을 보인다. 특히 그린 라이트를 켜줘가 그저 네 남자의 지극히 남성중심적 뒷담화와 거리의 반향을 모으는 수준에 그친 다면, 그린라이트를 꺼줘에 이르면 좀 더 넓은 스튜디오에서, 나름 연예에는 일가견이 있네 하는 출연자에서, 방청객의 선택까지, 연예 재판정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그린 라이트의 불이 거의 꺼진다면, 당연히 질의자의 연애는 '쫑'을 내야 하는 분위기로 몰아간다. 즉 연예가 남녀간의 사설이 아니라, 공적 담론이 되어 도덕적 잣대에 따라 정해지게 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마녀 사냥>을 통해 등장하는 질문들의 경향이 묘하게 달라져 간다. 처음에 그저 그린 라이트를 켜느냐, 끄느냐처럼 이것이 사랑인가 아닌가 라는 자신도 헷갈리는 연애에 대한 질의 정도였다면, 언제인가 부터 자꾸만 출연자들에게 자신의 연애를 결정해달라는 식의 질문들이 등장한다. 원컨 원치 않건 출연자들이 질의자들의 연예 멘토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경향을 인지한 듯, 출연자들이, 자신들의 그린 라이트 켜고 끄는 결과와 상관없이 결정은 질의자의 몫이라는 언급이 부쩍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연예는 끝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미련이 남는다는 부연 설명도 붙여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게 더 책임감있어 보이는 한 발 빼기가 시청자들에게는 겸손으로 비춰져 더 신뢰의 도를 더할 뿐이다. 

물론 이렇게 지극히 사적인 척도의 연예 담론으로 시작된 <마녀 사냥>이 마치 이 시대의 대표적 연예 코칭 프로그램화 되어가는 것에는 프로그램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우리 사회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탓이 클 것이다. 도무지 공부 외에서 그 어떤 것도 가르쳐주거나, 의논해 주지 않는 사회, 그저 공부만 하다 어른이 된 아이들은 우왕좌왕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풀기 위해 골몰하다, 이제 금요일 밤 텔레비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거기에서만은 가식적이지 않게, 연애에 대해 속시원한 답을 찾을 수 있는 듯하니까. 그렇지 않다면 인터넷의 바다를 헤매며, 어느 카페, 어느 사이트의 게시판을 헤매며 공인되지 않은 연애의 담론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 검증되지 않은 의견들에 비하면 tv프로그램화 된 <마녀 사냥>의 공신력은 상대적으로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 스포츠 한국)

결국 이것은 그저 출연자들의 사견이라는 첨언도 중요하지만, 지금 <마녀 사냥>이 처하게 된 위치에 대한 책임감을 제작진이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보여진다. 그저 우리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어, 혹은 시청률이 높아 라는 자부심이 아니라, 연예 상담에 갈 곳 몰라 목말라 하는 청춘들이 <마녀 사냥>이라는 연못에 우르르 모여드는 현상에 대해, 좀 더 진지하고 유연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 시점이라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2월 14일 게스트로 출연한 문소리의 입장은 의미심장하다. 20 대 초반에 만난 그 한 사람이 내 평생의 사람이 아니라는 넓은 시각 아래, 차이기도, 차보기도, 심지어 매달려 보기도 하며 다양한 연예를 경험하라는 그녀의 시각이 <마녀 사냥>에 역시 필요한 시점이라 보여진다. 


by meditator 2014. 2. 15. 11:35

신정태(김현중)의 아버지 신영출(최재성)이 죽었다.

가야의 아버지 신죠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그 누명을 벗기 위해 아내와 자식들을 내버려 둔 채 평생을 떠돌아야 했던 한 사람의 주먹이 죽었다.  가야의 아버지를 죽이기는 했지만, 모든 숨통과 혈이 끊어져 고통에 몸부림치던 동료의 가는 길을 편하게 해주려는 의도였듯이, 그 역시 신죠의 딸 가야의 도움으로 이승을 하직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누구냐고 절규하는 가야 앞에 모든 것은 자신들의 세대로 끝내야 한다는 회한 만 남긴 채, 그의 업보를 고스란히 아들 신정태에게 남긴 채 아버지 신정출은 죽어갔다.

그리하여 원하건 원하지 않건 상해로 온 신정태에게는 또 하나의 복수가 지워진다. 아버지의 숨통을 끊었다며 신정태를 도발할 가야,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진짜 아버지를 죽인 그 누군가. 뜬금없고 불친절했던 마치 방송 사고처럼 등장한 아버지의 죽음의 배후에는, 떠나는 그를 잡으며 자꾸 그러시면 자신이 우두머리가 될 수도 있다는 정재화(김성오)가, 그게 아니면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덴카이(김갑수>의 사주를 받은 아카(최지호)가 있을 수도 있겠다. 불친절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결국, 다시 정태를 또 다른 복수의 길로 들어서게 만드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정태에게는 동생을 찾겠다던 맹목적인 목적 외에 또 아버지의 복수라는 하나의 목적을 암묵적으로 생성됨으로써 그가 등장한 상하이에서 그의 활약을 추동한다. 

<감격시대>이 주인공의 추진력은 개인적 원한이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동생을 구하기 위해, 혹은 여자를 구하기 위해 정태는 주먹을 휘두르고, 그가 주먹을 휘두르는 횟수에 따라, 주먹 세계로 그의 발걸음은 깊어진다. 가야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킬빌>의 주인공처럼, 부모의 복수를 향해서 무차별적으로 전진한다. 지극히 맹목적이고 단선적인 주인공들의 감정이 드라마의 씨줄이라면, 그들이 개인적인 포한을 풀어내는 그 세계 속에서 자신들의 조직의 이익을 위해 이합집산하는 주먹 세계가 드라마의 날줄이다. 주인공들은 원수를 갚기 위해 저돌적으로 적을 향해 치닫고, 그들을 맞이하여 주먹 세계는 자신의 편의대로 그들을 자신의 편에서, 혹은 적으로 하여 이용한다. 드라마에서 표피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애닮은 감정선에 휩싸인 복수지만, 결국 제 아무리 미화한다 한 들 결론이 되는 것은 주먹 세계의 승부일 뿐이다. 

(사진; 이타임즈)

영화 <신세계>가 상영되었을 당시, 그리고 그 이후로도 쭈욱 영화는 다수의 남성들과, 그 못지 않은 여성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경찰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을 이용해 먹기만하던 사람들, 하지만 그에 반해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형제로 대접하던 또 다른 사람들, 그 사이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듯하면서 결국 모든 것을 차지해 버리는 이자성의 결단은 매혹적이다. 이리저리 치이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카타르시스다. 하지만, 거기에 빠져있는 것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형제애란 이름으로 범죄 세력을 선택하고 마는 경찰 이자성의 부도덕말이다. 아무도 경찰로써의 이자성의 도덕정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영화<신세계>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 세대의 대변자 같기도 하다. 사적인 목적이든 복수든 무기를 들고 누군가를 해친 사람이라면 결코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는 씁쓸한 도덕적 결론에 이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용서받지 못한자>의 혜안은 멀다. 

 <감격시대> 역시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매회, 주인공들의 복수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골몰한다. 뜬금없이 길을 떠난 애비를 피범벅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풍차(조달환)처럼 주인공들을 돕기 이해 나선 선한 사람들은 다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은 주인공들에게 짊어져지고, 주인공들은 그 죽음을 되갚기 위해 이를 앙다물고 결투에 나선다. 결코 한번도 주인공이 스스로 주먹이 좋다거나, 주먹질을 하고 싶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그의, 그녀의 삶은 불가피했고, 그들은 운명 속에 수동적으로 휘말려든 객체일 뿐이다. 그래서 주먹을 쓰는 것이 옳거나, 그르거나에 대한 판단을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드라마의 또 다른 날줄인 주먹 세계에서 정당하다. 드라마 역시 정당하다. 그저 주인공들의 복수극을 그려내는 것이기에, 결국은 주먹세계 이합집산을 다루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언제나 변명하고 또 변명한다. 주먹으로 하는 복수는 불가피하다고. 결코 주먹 세계의 매력을 그리는게 목적이 아니라고. 하지만 언제나 드라마 <감격시대>에서 가장 공들이고 화려한 장면은 누군가와 누군가와 맞붙어 피터지게 싸우는 장면이다. 


by meditator 2014. 2. 13. 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