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부부 문제에 개입하여 해결책을 제시하고(아침 마당), 가상 결혼을 하고(우리 결혼했어요), 결혼을 앞둔 적령기의 남녀에게 소개팅을 하고(짝), 가족을 만들어 주던(사남일녀) tv가 이제 재혼 시장에까지 발을 들였다. jtbc의 <님과 함께>가 그것이다. 


재혼을 화두로 삼은 것은 물론 <님과 함께>가 처음은 아니다. <아침 마당>에서 종종 재혼의 문제가 등장했었고, <짝>에서는 '돌싱'들간의 만남을 특집을 다루어 화제를 끌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그런 '특집'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님과 함꼐>는 <우리 결혼했어요>처럼 가상의 재혼 부부를 등장시켜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봄으로써 재혼의 리얼리티를 예능의 소재로 끌어들인다. 

'재혼'이 비록 종편이라고는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대중적 반응을 얻고 있다는 jtbc에서 정규 방송으로 정규 편성되었다는 것은 한 해 840쌍이 결혼을 하고, 그 중 398쌍이 이혼을 한다는 50%에 가까운 이혼율을 보이는(OECD국가 중 3위) 우리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중년층을 주된 타깃으로 삼고 있는 종편 JTBC에서 재혼을 담론으로 삼은 것은, <님과 함께>가 보여주고 있는 환타지성과 무관하게, 중년의 삶의 질에 있어 재혼이 더 이상 방치될 문제가 아니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하는 확신의 반영이기도 하다. 

<님과 함께>는 두 쌍의 가상 재혼 부부를 등장시킨다. 일찌기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했던 부부를 연기했던 박원숙, 임현식, 그리고 배우 이영하와 전 농구선수 박찬국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면면은 재혼이라는 화두에 대한 제작진의 생각이 담겨 있다.
두 쌍의 재혼 부부 중 두 사람은 배우자를 병으로 잃어 사별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이혼을 한 사람들이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재혼의 사유가 되는 이혼과 사별을 통한 경험들을 담으려는 배려가 있었을 것이다. 

박찬숙과 임현식은 배우자와 사별을 했다. 그래서 박원숙의 표현대로, 미운 정이든, 고운 정이든, 평생을 함께 하지 못했던 아쉬움과 함께 결혼 생활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반면 박원숙과 이영하의 경우는 다르다. 왜 재혼을 하지 않으시냐는 박찬숙의 질문에, 이영하는 한번의 이혼으로 그렇게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과정을 또 겪고 싶지 않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나마 자신에게 귀책 사유가 있었음을 은연 중에 내비친 이영하는 나은 편이다. 상대방으로 인한 고통이 컸던 박원숙은, 결혼이라는 자체에 대한 지겨움을 표명했고, 도대체 왜 그러면 가상 재혼 부부 예능이 등장했는지 의문이 될 정도로, 임현식이든, 누구든 재혼이라는 자체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한다.

덕분에, 의도하건, 의도치 않았건, 가상 재혼이라도 그것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협조하려는 이영하 -박찬숙 부부와, 재혼 자체에 부정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박원숙과 그의 재혼 남편으로 떠맡겨진 임현식 부부의 생활은 모양새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영하-박찬숙 부부가 이영하의 집을 배경으로 재혼이라는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 함께 장도 보고, 밥도 먹고, 어떻게든 함께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애쓰는 반면, 당장 임현식-박원숙 가상 부부는, 강렬하게 피력되는 박원숙의 재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이 먼저 경주되어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 되었다. 드라마에서도 언제나 갑이었던 아내 역할의 박원숙과, 그 앞에서 쩔쩔매던 을의 역할의 남편 임현식의 관계가, 재혼이라는 말만 들어도 징그러워 하며 벽을 치는 박원숙과, 그런 그녀와 어떻게든 재혼 비스무리한 분위기를 내보고자 들이대는 임현식이라는 관계로 치환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첫 회의 박찬숙의 딸이 보내준 커플 잠옷을 입고 사진을 찍으며 달달한 분위기를 낸 이영하-박찬숙 부부와, 손 한번을 잡아주어도 감읍하는 박원숙-임현식 부부의 관계가 계속 지속되리란 보장은 없다. 첫 날 장을 보러 갔을 때부터 참아야 했던, 그리고 혼자 사는 삶에 익숙해진 이영하와,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잔뜩 도배된 이영하의 집이 그다지 탐탁지 않았던, 그리고 가사일의 통제성을 선호하는 박찬숙의 허니문이 얼마나 지속될 지 의문이다. 20여년을 부모 밑에서 살아왔던 젊은이들도 결혼이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기 버거워 하는데, 이미 또 다른 배우자와의 경험, 그리고 홀로 살아 온 삶의 틀이 공고해진 중년의 삶이 어느 만큼 재혼이라는 것을 통해 유연해질 수 있을까가 관건이다. 

오히려 재혼이라는 말만 들어도 징그러워 하면서도, 자신이 혼자 하기 버거웠던 커튼 달기며, 앞 마당 정리같은 일들을 척척 해내는 임현식을 다시 보는 박원숙에게서, 오랫동안 혼자 외롭게 닫아왔던 삶의 봇물이 터졌을 때,그리고 배우라는 길을 오래 함께 걸어왔던 두 사람의 유대로 인해 오히려 더 반전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박원숙-임현식 부부의 앞날을 점쳐 볼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디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그 과정이, 그저 가상 재혼의 아름다운 환타지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재혼의 고민을 성의있게 담아주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4. 1. 28. 10:46

일년간 책정된 적은 예산으로 드라마가 만들어 지기에 2013년 12월 8일 <진진>으로 마무리 되었던 드라마스페셜이 2014년 단막극으로 돌아왔다. 비록 모두가 새로 시작할 한 주를 버거워 하며 잠자리에 들고도 남을 다음날을 5분 앞둔 11시55분이지만. 그렇게 의욕적으로 시작된 2014 단막극의 첫 작품은 <학교 2013>의 프로듀서인 한상우 피디와, 지난 해 드라마 스페셜 <그렇고 그런 사이>로 그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홍정희 작가의 <카레의 맛>이다.


<카레의 맛>은 홍정희 작가의 전작이 그랬듯 화면과, 배경과, 그리고 작품의 내용까지 삼위일체로 단편 드라마의 맛을 제대로 살렸던 <그렇고 그런 사이>처럼 역시나 또 한번 단편 드마라로서의 묘미를 뽐낸 2014 단막극의 시작을 알리기에 손색이 없는 드라마이다. 

홍정희 작가의 전작 <그렇고 그런 사이>로 가보자. 
이 드라마의 주된 축은 죽은 남편과, 그 남편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아내 은하(예지원)와 그녀 앞에 불쑥 등장한 남편의 후배 준희(송하윤)의 갈등이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를 놓지 못해 그의 블로그 이웃들을 불러모을 만큼 남편을 믿고 사랑했지만, 알고보니 그는 잠시 후배를 마음에 두었다는 사실에 아내는 혼란스러워 한다. 한 술 더 떠 후배 역시 그를 잊지 못해 그의 집까지 찾아들어오는 것이다.
대한민국 드라마에서 흔히 등장하는 삼각관계이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남편이 사랑했던 후배, 하지만, 두 여자가 사랑한 대상 남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진다. 그렇게 드라마는 지극히 통속적인 부부 사이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다. 


<카레의 맛>도 마찬가지다.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몽땅 쏟아부어 음식 솜씨도 없으면서 식당을 연 유미(전혜빈)가 식당의 메뉴를 카레로 정한 것은 돌아가신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해주었던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 앞에 청년 경표(현우)가 등장한다. 식당 앞에 누워있단 그녀때문에 기억을 잃었다 주장하며 그녀 식당에 기생하며 무임금 알바를 자청한 청년은 묘하게도 그녀와 비슷한 식습관 등으로 그녀의 주의를 끈다. 게다가 대담하게 그녀 식당의 주메뉴인 카레가 맛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고 그녀에게 은근슬쩍 비법을 전수하기도 하는 것으로 그녀의 맘을 끌어당긴다. 자꾸 그가 신경쓰이는 유미는 그런 그에 대한 관심을 '남자'에 대한 그것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알고봤더니, 이 청년, 평생을 바람으로 어머니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하지만 다른 씨는 남기지 않았다는 자존심마저 무색하게 만든 아버지가 남긴 배다른 동생이었다. <그렇고 그런 사이>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통속극에 어울릴 애증의 가족 관계의 등장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 애증의 대상이 된 아버지는 죽고 없고, 그저 유미가 그의 맛을 그리워하며 식당을 열 만큼 추억의 대상으로만 남아있다. 그러기에, 유미와 그녀의 배다른 동생은 통속극에서 재산 싸움 대신에, 애증의 갈등 대신에,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라는 공감대로 유대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지극히 통속적인 우리네 가족 관계를 비틀어 생각할 수 있는 단막극 <카레의 맛>의 묘미가 시작된다. 

단편 소설처럼, 단막극도 우리가 세상을 살며 조우하게 되는 모든 사건들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여, 진부해진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해결했던 문제들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는 쉼표와도 같은 시간인 것이다. 죽은 남편의 바람도, 죽은 아버지의 바람도, 그저 남겨진 사람들에게 더해지는 상처만이 아니라, 홀로 기억해야 할 추억의 더하기, 그리고 홀로 남은 외로움의 완충재로 더해질 수 있음을 단막극은 말해준다. 그래서, 단막극이기에, 그를 사랑해서 머리끄댕이라도 잡아야 했던 그녀들을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유대하고, 아버지를 나누었던 누나 동생은 함께 밥을 먹는다. 단막극에서라면 통념의 관계들이 전복되고, 그것은 우리가 견고하게 버텨왔던 경징된 관계들에 숨쉴 여유를 주는 것이다. 


홍정희 작가의 전작 <그렇고 그런 사이>처럼, 이번 <카레의 맛>의 묘미는 극의 주제을 풀어내는 데만 있지 않다.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주연을 제외한 인물들이 제공하는 온기 또한 만만치 않다. <그렇고 그런 사이>에서 남편의 블로그 이웃으로 등장한 사람들처럼, <카레의 맛>에서 식당을 드나드는 사람들 역시 따스한 이웃 그 자체다. 등장은 가게세를 닥달하는 미용실 원장에, 스토커같은 손님, 그리고 그저 평범한 동네 경찰 아저씨였지만, 그들은 유미가 가게를 닫고 사라졌을 때, 그녀의 부재를 걱정해 주고, 결국 그녀에게 돌아올 힘을 내도록 견인해준 진짜 이웃이 되었다. 그렇게 드라마는 우리가 이제는 이웃 사람하면 범죄자가 주인공이 된 영화 제목을 떠올리듯, 남이거나, 심지어 남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따스한 그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살포시 자신의 생각을 얹는다. 가족으로 인한 상처조차 스멀스멀 치유될 만큼. 이 역시 굳이 리얼리티를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단막극의 묘미라면 묘미랄까.

또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단편 드라마에는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연출과 그외 스태프가 공들인 티가 역력한 화면과 음악이 있다. <그렇고 그런 사이>에 남편이 딸을 위해 고집했던 한옥의 맛을 고스란히 살린 연출이 있었다면, <카레의 맛>에는 홍대 앞 자그마한 식당의 소박함이 들어가 있다. 고고한 빌딩 숲이 세력을 떨치는 서울 하늘 아래, 그래도 사람들이 모여 숨쉴 틈이 되는 듯한, 고즈넉한 한옥, 훈훈한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목재로 마감된 가게가 드라마의 주제를 한결 돋보이게 만든다. 거기에 얹혀진 음악은 주인공들의 정서를 가장 로맨틱하게 대변한다. 늦은 밤 나 혼자 만끽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그래서 또 늦은 밤 나 혼자 보는 게 안타까운 작품이기도 하고. 마치 외딴 골목에서 만난 조그만 화랑의 아름다운 그림을 누군가 같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게 만드는 <카레의 맛>인 것이다. 


by meditator 2014. 1. 27. 10:17

2014년을 맞이한 <인간의 조건>의 첫 미션은 한 겨울에 어울리는(?) '난방비 없이 살기'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없이 살기' 미션이 기간 동안 일관되게 핸드폰이나 컴퓨터가 없던가, 쓰레기가 없는 생활을 유지한 것과 달리, '난방비 없이 살기'는 그것을 실행하는 기존의 미션과 달리, 미션 기간 동안 '~없이 살기'라는 목적을 맹목적으로 고수하지 않았다. 

첫 날과 둘째날은 원래의 목적에 충실했다. 
첫 날, 게스트 하우스의 난방을 끊어버리자, 더운 물도 한 방울 나오지 않고, 방안 온도는 급격하게 내려가, 창가 옆에서는 거의 2 도  정도가 측정될 수준이 되었다. 온도로만 측정되지 않는 추위는 더했다. 온기가 드리우지 않는 바닥에서 새벽으로 갈수록 차오르는 냉기, 열려진 방문 밖에서 스멀스멀 스며드는 찬바람, 자고 일어난 멤버들은 온몸이 쑤시는 경험을 했고, 밤새 뒤척인 덕분에 전혀 하루의 피로가 풀리지 않는 듯 했다. 


(사진; 스타투데이)

둘째 날, 바깥만큼 추운 실내를 경험한 멤버들은 각자 최선의 피한 방법을 동원했다. 등산용 침낭에, 실내 텐트에, 창문용 뽁뽁이 비닐에, 바닥에 깔 은박비닐은 물론, 수면 양말에 잠옷에, 내복에, 군대용 깔깔이까지 각장 다서 여섯 겹의 옷을 껴입는 것 당연지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아침 여전히 <인간의 조건>을 여는 건 추위에 시달린 힘겨운 비명이었다. 그리고 미션을 약올리기라도 하는 듯 동장군은 더 거세어 질 뿐이었다. 

그리고 셋째 날, <인간의 조건>은 지금과 다른 미션이 주어진다. '적정 온도 찾기' 막무가내로 추위를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난방비를 최소화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조건을 찾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를 추동한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유난히도 기세를 떨치던 2013년 말의 추위였다. 하지만 그런 외적 조건만은 아니다. 멤버들이 직접 발로 찾아 뛴 난방비 zero를 향한 실험 현장에서 마주친 것은 이미 지어진 게스트 하우스 조건에서 난방비를 없앤다는 것은 무리라는 결론 때문이기도 했다. 즉 난방비를 없애기 위해서는 애초에 집 자체를 다르게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난방비를 하나도 쓰지 않을 수 있는 이른바 passive house는, 몇 겹의 비닐을 두르는 식의 방풍이 아니라, 애초에 집을 지을 당시 벽과 벽 사이에 엄청난 두께의 스치로폼을 넣는 식의 방한용 건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조건>은 맹목적으로 난방비를 없이 사는 전략 대신에 적정 온도라는 현명한 전략적 수정을 택한다. 하지만 첫째, 둘째날의 잠 못이루던 밤의 혹한 덕분에, 멤버들은 겨우 10도, 실제로 추위를 느낄 정도의 상화에서도 한결 나은 밤을 보낸다. 14도로 올린 날은 제법 잘 만하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실제 정부가 권장하는 적정 실내 온도 18도로 자던 날, 멤버들은 그간 겹겹이 싸매고 있던 파카 등 겉옷을 벗어제낀 채 내복 바람으로 이불을 차내며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인간의 조건>의 수정된 전략, 적정 온도로 찾아가기가 절묘했던 것은 혹한의 시간 덕분이다. 그들이 애쓰고 버티는 그 이틀의 시간에 대한 간접 경험 덕분에, 시청자들조차, 겨우 10도, 14도의 공간이 충분히 지낼만 하다는, 18도 정도면 금상첨화라는 공감에 이르게 되었다. 아침이면 온 몸이 부서져라 느껴지는 고통이 느껴지는 이틀이 없었다면 막연한 난방비 절약은 그저 슬로건이 되었을 뿐이다. 이봉원과, 양상국이 찾아간 시골의 촌로의 명언처럼 겨울은 추운 것이라는 진리를 우리는 화석연료의 늪에 빠져 잊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준호가 찾아간 홀로 사는 할머니처럼, 우리가 덮다 싶을 만큼 난방을 때우고 사는 동안, 그 이면의 그늘에 난방비 사각지대에 놓인 빈곤층이 있다는 사실 또한 놓치지 않았다.

(사진; osen)

추우니까 촘촘히 붙어 앉아있게 되는 어쩔 수 없는 본능 때문일까, 난방비 없이 살기 미션에 도전한 이번 기간은 유독 멤버간의 시너지가 빛을 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이돌 등의 이질적 성향의 멤버가 아니라, 이봉원, 김기리라는 선후배 동료와 합을 이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침마다 솔선수범 일을 나가는 후배들을 위해 밥을 해먹이는 선배 이봉원의 따스한 마음에, 반짝 반짝 막내의 몫을 톡톡히 해낸 김기리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게스트의, 그리고 게스트와의 시너지가 온기없는 게스트 하우스를 훈훈하게 덥혀 주었다. 

난방비라는 특수한 조건 덕분일 지 몰라도 달라진 <인간의 조건>의 융통성있는 궤도 수정, 그리고 시너지 넘치는 게스트의 변화는 긍정적이다. 2014년의 <인간의 조건>이 기대된다.



by meditator 2014. 1. 26. 11:26

입시를 겪어보지 않은 누군가는 이제 입시철이 끝났으려니 하겠지만, 아직도 수험생들에겐 한참 입시철이다. 물론 일찌감치 수시를 통해 합격의 기쁨을 맛본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일부일뿐, 정시라는 능선에, 추가 합격이라는 깔닥고개까지, 오리엔테이션이 마무리되는 그 날까지 대학 입시라는 관문은 마무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쟀든, 수능 시험을 보는 그날부터 대학 입학식이 치뤄지는 그날까지, 아니, 사실은, 아이들이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아니 좀더 적나라하게 아이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부모들의 입시 전쟁이 시작이라고 하는편이 대한민국 실정에 맞는 정의일 것이다. 그렇게 길고 긴 장정을 마지치고 아이들은 저마다 순위가 정해져 있지는 않다지만, 사실은 냉엄하게 순위가 정해진 저마다의 대학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대학이 끝이 아니다. 
2부 인재의 탄생에 멘티로 참가한 서울대 법대 김성령에 따르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들어왔다는 기쁨이 딱 1주일 갔다고 한다. 딱 1주일, 그간 공들여, 참아가며 공부했던 성과에 대한 기쁨에 들떴지만, 그도 잠시 곧 대학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이 마주한 현실에 대해, ebs 다큐 프라임이 시선을 돌렸다. 6부작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6부작은 1부<어메이징 데이>로 시작한다. 그렇게 힘들여 들어온 대학, 그 대학에서 대학생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6개월간에 걸쳐 44개 대학에 학생들로 이루어진 촬영팀이 대학 생활을 밀착하여 카메라에 담는다. 
하지만 어메이징 데이라는 말이 역설적이게도 청소년 시절을 쏟아부어 들어간 대학에서 만난 대학생들은 전혀 어메이징하지 않다.  강의실에서 그들은 교수가 초등학생처럼 별을 준다고 해야 어쩔 수 없이 질문을 하는 수동적 리스너였고, 대학 생활은 짖누르는 등록금에 대학을 즐길 새도 없는 생활인이었고, 그 보다 더 조여오는 취직이라는 또 다른 관문에 허리 한번 펼 사이도 없는 수험생들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런 현실의 압박을 견뎌낸 그들이 보란듯 이른바 '인재'가 되는가? 그렇지도 않다. 이어지는 2부, 3부 인재의 탄생은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을 통해 만들어 지는 인재의 현실을 가감없이 그려낸다. 

우리 사회 인재상을 다시 그려가겠다는 목적 하에 2부<인재의 탄생>에서 다섯 명의 멘티들이 선정되었다. 지방대를 나왔지만 다시 중국에서도 각 성에서 1등만 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베이징대에 다시 합격하여 다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종다양한 스펙으로 입사지원서를 채우고도 남을 김관우, 그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에서 압도하고 남을 서울대 법대 졸업생 김성령, 그리고 그에 반해 항상 지방대라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대구 카톨릭대의 엄지아 등이 그 면면이다. 

드러난 조건으로만 보면 서울대 법대를 나왔지만 방향성을 잃고 사시를 보지 않은 김성령이나, 지방대인 엄지아에 비해 베이징대에 온갖 스펙을 갖춘 김관우가 인재라는 말에 어울니는 품새이다. 김관우 자신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좀 더 취직에 도움이 될 무언가를 얻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사 전문가, 호주대사관 교육 참사관, 인재 스카우터, 감정코칭 전문가, 인재 육성 전문가로 구성된 멘토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심지어 워크샵에서 만난 모 기업의 인사 담당자는 대놓고 자기라면 김관우를 뽑지 않겠다는 말까지 한다. 멘토들은 김관우와 같이 외면적 성과만으로 자신을 채워가는 학생을 가장 위험군에 속하는 학생이라 평가를 내린다. 그에 반해 자존감이 떨어지는 엄지아의 경우에는 그녀가 자신에 대해 혹독하게 내리는 평가와  달리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다.

이를 통해, <인재의 탄생>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지금 필요한 인재가, 수많은 스펙를 쌓기만 하면, 토익의 점수만 놓으면 되는 것일까? 대학을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고개를 들 틈도 없이 취직 공부에만 매달리는 그 현실이 인재로 가는 지름길일까? 라고. 

다큐는 시청자들이 가장 솔깃할 사람의 주장을 얹는다. 삼성경제 연구소에서 나온 면접관은, 그를 인터뷰하러 간 멘티를 통해 이 시대 부모들에게 말한다. ' 제발 부모들이 자식을 좀 내버려 두면 좋겠다고. 부모 세대에서 잘 나가던 직업과 직종이 더는 잘 나가지 않는 다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고 

그래서 <인재의 탄생> 2부작은 전혀 다른 과정을 통해 인재를 재탄생시킨다. 블라인드 식사 면접과 스튜디어 멘토링을 통해 멘티 각자를 판단한 멘토진들이 내린 첫 번째 미션은 하루 한 시간 걷거나, 30분을 주 5일 동안 꾸준히 하는 것이다.  멘토진들은 이를 통해 무엇이든 매일 꾸준히 하는, 삶의 방식으로부터의 변화를 유도하고자 했지만, 겨우 꾸준히 걷거나 뛰는 미션에 불과함에도 늘 요점 정리와 예시 문제 풀이에만 익숙했던 멘티들은 이 미션의 의미도 헤아리기 힘들어 하고,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건 더 힘들어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어서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돌아보는 미션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변화되지 않은 멘티들은 자신의 조건에 침잠되어 있는 결과물을 내보였다. 

(사진; 오마이뉴스)

하지만 6개월 동안, 자신의 장점도 찾고, 홀로 걸어보고, 또 그곳에서 지인도 만나는 등 다종다양한 미션을 거치면서, 다섯 명 모두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멘티들이 변화되어간다. 그저 자신이 쌓은 성과를 통해서만 자신을 설명하던 김관우가 자신을 하고자 하는 삶의 방향을 어렴풋이 찾아나가고, 방향을 잃고 우울증에 빠져있던 김성령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했다. 무엇보다 지방대라는 이름표로 인해 루저라는 규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엄지아는 자신의 학력을 넘어서는 장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멘토진이 주장하고자 한 것은 인재란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자기 중심에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고, 6개월이라는 과정을 통해 멘티들은 그것을 찾아내었다. 진짜 인재가 만들어 진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결국 되묻게 되는 것은 그렇다면 지금 대학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인재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저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가지만, 정작 이 사회가 어떻게 부모가 되어 살아가야 되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듯이, 사회를 책임질 인재를 길러낸 우리의 대학이 정작 그들이 기르고 있는 학생들을 진정한 인재로 키우지 못한 채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취직 대비 준비반에 그치고 있는 냉엄한 현실을 짚고 있는 것이다. 대학 이름표가 그럴듯해도 사실은 쓸모없는 인재를 양산하거나, 지방대라고 하여 기회조차 주지 않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6개월, 6개월의 기간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른 사람처럼 달라진 네 명의 멘티들의 모습에서, 진정 인재로 거듭난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 대학 교육의 방향을 묻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1. 25. 12:32

우리나라에서도 인기있는 일본의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에 [편지]라는 작품이 있다. 

소설 속 형 츠요시는 어머니도 죽고 홀로 동생을 보살피며 생계를 책임지던 중, 동생의 대학 입시를 앞두고 홀로 사는 노파네 집 담을 넘다 강도 살해범으로 잡히는 처지가 되고 만다. 편지는 강도살해범을 둔 동생이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세상 사람들의 편견에, 불편함을 견디며, 도망치며, 발버둥치며 살아가려 하지만 천형같은 강도살해범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오키의 이야기인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편지]는 대다수 이런 문제를 다루는 다른 이야기들이 츠요시나 나오키에 대한 편견을 지향하는 것을 취지로 다루는 것과 달리, 그 편견을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당사자 가족의 운명을 더 실감나게 그려내는데 치중한다. 

그렇게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은 형제라는 운명으로 엮어진 사슬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그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천형과도 같은 것이라고 소설은 은밀하게 토로하는 것처럼,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사랑의 결실을 넘어, 사회적 관계로서의 부부를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은진(한혜진 분)-성수(이상우 분) 부부는 물론,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가졌던 미경(김지수 분)-재학(지진희 분)부부 역시 결국은 이혼이라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른다. 하지만, 사랑으로 시작하여, 신뢰로 지탱하던 부부 관계가 종지부를 찍는 마당에도, 이들의 부부 관계는 쉬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지 못한다. <사랑과 전쟁>에서라면 오히려 부부의 불화를 부채질할 주변의 관계들이, 역으로 네 사람의 부부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접착제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집에서 얼굴을 맞대는 것조차 힘들어 하던 은진-성수 부부에게는 아픈 성수의 어머니가 찾아온다. 그래서 둘은 어쩔 수 없이, 비록 침대 위와 아래에서이지만, 시어머니 앞에서 부부인 척 생활할 수 밖에 없다. 미경-재학의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재학의 바람이, 그저 바람이 아니었음을 절감한 미경이 집을 나가고 이혼을 선언했지만, 역시나 재학의 어머니가 쓰러지는 바람에 미경은 며느리의 역할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미경의 시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남편을 견딜 것을 미경에게 종용한다. 뿐만 아니다. 미경의 의붓 동생 민수(박서준 분)와 은진의 동생 은영(한그루 분)의 결혼으로 불가피하게 부부연하게 되는 미경과 재학, 은진과 성수의 관계만 보아도, 부부는 그저 부부가 아니다. 

시한 폭탄과도 같은 민수와 은영의 결혼은 그걸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접점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사랑하지만, 두 사람을 둘러싼,은진-성수, 미경-재학의 관계가 과연 그걸 용인해 낼 수 있을까. 심지어 은진 부부에게 차 사고까지 낸 민수가 순탄하게 결혼에 이르를 수 있을까. 이는 결국, 대한민국에서 부부란 관념적으로 사고되는 사랑의 결실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관계 단위로서의 부부가 차지하는 바가 더 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라 보여진다. 

<힐링 캠프>에 나온 황정민은 자신의 아내에 대해,
이제는 배도 나오고, 주름도 지고, 예전처럼 이쁘지는 않지만, 그러나 자신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되더라도, 나의 편이 되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아내라고, 가장 자신의 친한 친구가 바로 아내라고 정의 내린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 아니 희미해져가는 자리, 부부는 그 틈을 신뢰와 우정으로 메워간다. 하지만, <따뜻한 말 한 마디>는 그런 신뢰와 우정조차 너덜너덜해진 상황에서도, 부부는 그리 쉽게 지워질 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첨언한다. 대한민국 에서 부부란 그저 사랑하는 사람 둘이서만 만들어진 단위가 아니라, 부부와, 그 주변 사람들이 얽혀진 공동체로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물론 경우에 따라서, 그 공동체가 오히려 부부 관계의 파국을 재촉하는 촉매제가 되기도 하고, 지금까지 대부분의 드라마는 그걸 유효한 카드로 사용하고 있어왔다. 하지만,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좀 다르게 진지하게, 우리 사회에서 부부의 위치는 어디쯤 되느냐고 다시 한번 반문한다. 혈연주의의 확장이, 발목을 잡기도 하고, 반대로, 부부란 인연의 접착제가 되기도 하는 모호한 그 경계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 나오키와 츠요시는 제 아무리 츠요시가 저지른 범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혈연으로 나누어진 형제였다. 그래서, 나오키는 형의 범죄를 함께 짐지우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부부는 분명 다르다.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끝나는 쿨한 관계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진정 부부는 무엇으로 살아갈까? 그렇게 자꾸만 <따뜻한 말 한마디>는 반문한다. 전생에 억만 겁의 인연이 합쳐져 이생에서의 부부라는 연을 맺었다던 전통적인 부부 관계의 관념이 사랑이 없으면 헤어져야 한다는 신식 이혼관이 대체해 가는 이즈음, 하지만 부부란 그리 간단명료한 사회적 단위가 아니라고 한번쯤은 진지하게 되돌아 보자고 드라마는 말한다. 


by meditator 2014. 1. 22. 10:44

일찌기 어린 시절 추리 소설이란 장르의 시작을 셜록 홈즈에서 시작한 이 사람에게, 영화 <셜록 홈즈>가 셜록 홈즈의 캐릭터의 핵심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한 냉소를 자아내는 결과물이었다면, 영국 드라마 <셜록>은 어린 시절 맛보았던 셜록 홈즈의 추억의 맛과, 그것이 21세기 버전으로 변환되면서 새롭게 느끼게 되는 변환의 맛이 적절히 섞인, 잘 만들어진 퓨전 요리를 맛보는 심정과도 같다. 


어린 시절 추리 소설의 기억은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팡에게서 시작되었다. 고지식한 어린 맘은 그 영웅과 도둑 중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어야만 할 거 같았고, 두 사람의 대결을 그린 <기암성>을 읽은 후 내 마음의 추는 확연하게 루팡의 편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셜록 홈즈는 정의를 실현하는 탐정이었지만,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오히려 괴도보다도 더 인간미가 없는, 그저 탐정이라는 그 직종에만 헌신하는 인물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 21세기판 셜록 홈즈의 버전 <셜록>이 셜록 홈즈를 반사회적 인격 장애가 있는 소시오패스(베네딕트 컴버배치 분)로 설정했을 때 어린 시절 맛보았던 셜록 홈즈가 떠올라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늘 셜록 홈즈의 곁에서 머물며 동료이자, 조력자가 되는 왓슨(마틴 프리먼 분)을 참전 의사로 설정한 것 역시 지극히 21세기다운 해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죽음의 틈바구니에서 트라우마를 가진 인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소시오패스와 동료가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심지어, 이번 시즌3에 이르러서는 왓슨의 마누라까지 소시오패스로 만들어 버리는 패기에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 밖에 없다. 유유상종이랄까, 그런데, 그게 묘한 위안을 주는 건 어떻고. 


국영 방송 BBC에서 제작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드라마에는 묘한 반사회적, 혹은 반정치적 정서가 흐른다. 일찌기 <닥터 후>의 시즌에서 영국 수상을 외계인의 후예로 묘사하는 신성 모독을 불사하던 전통은 <셜록>이라고 다르지 않다. 소시오패스와 참전 트라우마을 가진 의사가 해결하는 사회적 사건이라지만, 그 사건을 일으키는 주인공들은 오히려 그들보다 더 병적이요, 이른바 영국 정보부의 중요 직책을 가진, 셜록의 형 마이크로프트(마크 개티스 분)역시 소시오패스인 동생보다 한 수 위처럼 보인다. 
시즌3의 마지막 미디어 재벌 마그누센을 총으로 죽은 셜록이 형을 사는 대신 동유럽 첩보 작전에 동원되었다가, 비행 몇 분만에 모리아티의 등장으로 귀국해야 하는 설정처럼, 정치의 세계에 죄의식과 형벌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세계가 오늘날이라는 걸 드라마는 놓치지 않는다. 
이런 드라마의 분위기는 정신병이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대두된 현대 사회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으며, 협잡과, 농간과, 비리가 점철된 현대 정치와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거침없이 드러냄으로써 시청자들의 답답한 속을 긁어준다. 

시즌 1이 셜록과 왓슨의 캐릭터를 형성하는데 중점을 두고, 시즌 2가 절대 악 모리아티와 셜록의 대결에 치중했다면, 2년만에 돌아온 <셜록 시즌3>는 불과 세 편의 시리즈를 오랫동안 기다려준 시청자들에게 보답을 하려는 양, 시리즈의 다종다양한 매력을 점층적으로 보여주었다.

첫 회, <빈 영구차>에서는 호청자들을 경악으로 몰아넣었던 시즌2의 마지막 사건, 즉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셜록의 미스터리를 풀어내며, 셜록과 왓슨의 재회가 중심 스토리였다. 하지만, 스토리 외에, 눈이 돌아갈 정도의 장면 전환과, 화려한 카메라 워크를 통해, 스타일리쉬한 <셜록>의 특기가 무엇인가를 뽐내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1회는, 2년간을 골머리를 썪었던 셜록 죽음의 비밀을 푼 것 외에, 현란한 영상미만으로 어딘가 2년간의 갈증이 부족하다 싶었다. 이걸 보자고 오랜 시간을 갈망해 왔는가 허무해 질 무렵, 이어진 2회, <세 사람>은 잘 짜여진 추리극을 보는 맛을 즐기게 해주었다. 흩어져 지나갈 뻔한 사건,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 한편의 스토리로 짜여지는 즐거움은 역시나 <셜록>이라는 확신을 들게 해주었다. 하지만, 굳이 털어서 먼지를 내보자면, 2회의 스토리는 추리를 위한 추리랄까. 마치, 일본 만화 <명탐정 코난>의 알고 보면 어쩐지 뻔한 밀실 살인 사건을 보는 작위적인 맛이 슬며시 느껴지려는 찰라. 시즌3의 마지막 회, <마지막 서약>은 결국 또 다시 시즌4를 기다리는 <셜록>의 노예로 시청자들을 묶어두는 화룡점정의 한 편이 되었다. 


특히나, 시즌3의 3회, <마지막 서약>은 가장 널리 알려진 추리 소설 셜록 홈즈의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냉소적인 탐정 셜록 홈즈를 21세기판 소시오패스로 재탄생 시켰듯이, 은밀한 밀애의 편지를 빌미삼아 정치적 협잡을 꾀하는 정적의 이야기를 정보의 보고를 통해 현대사회에 중요 지위를 차지하는 미디어 재벌의 현신으로 해석한 핵심 스토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뒷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다, 원전 속의 편지를 가장 잘 보이는 편지 보관함에 숨겨두었던 미스터리를 천재적인 두뇌 속에 저장이라는 아이디어로 재해석한 것에 이르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시즌3의 매력은 그저 점층적으로 흥미를 고양시켰던 사건과 그 해결에만 있지 않다. 소시오패스라는 인간 관계의 부적응을 상징하는 인물 셜록이, 왓슨과 그의 아내라는 삼각 관계 속에 인간미의 언저리를 서성이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묘한 동질감과 공감의 고통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인물 왓슨이 택한 친구, 그리고 이제 아내마저 소시오 패스라는 지경에 이르르면, 재미를 넘어, 연민의 경지에 이르르게 된다. 가장 비정상적인 인물과, 비정상적인 관계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인간미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모리아티의 '내가 보고 싶었지?'라는 반문이 없어도, 우리들은 저 반사회적 인간들의 모험의 다음 시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볼모가 된다. 그래서 시즌4는 언제 만들어 진다구요?


by meditator 2014. 1. 20. 19:19

작은 아이가 드디어 길고 길었던 대학 입시의 터널을 지났다. 무사히 원하던 대학에 수시 합격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순조롭게 대학 입시를 끝내준 아들에게 덕담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묘한 현상이 있다. 
소위 이른바 우리나라 중위권 대학 중 하나에 합격한 아들 녀석에 대해 아들 녀석 또래들은 흔쾌히 축하의 인사를 보내주는 반면, 부모인 내 또래의 사람들은 아들이 합격한 대학 명을 듣고 나면 한 템포 쉬고, '원하는 대학을 갔으면 돼지'라든가, '요즘 뭐 대학만 가면 돼지'라던가, 심지어 '가서 자기만 열심히 하면 돼지'라는 식의 형식적 축하를 보내주는 식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 어른들에게 대학이란 이른바 'sky'를 제외하고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통속적 관념에 지배되는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키우는 학부모가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이 되는가를 보여준 것이, <sbs스페셜 부모vs. 학부모>이다.

(사진; 스포츠 월드)

자랑같지만, 아니 대놓고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이번에 대학 입시를 순조롭게 치뤄낸 작은 아들 녀석도, 그리고 지금은 군대에 간 큰 아들 녀석도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만 대학 입시라는 관문을 통과해 낸 것이다. 나라를 망치고, 아이들을 망친다는 사교육의 도움을 받지 않고 대학을 들어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넉넉치 못한 가정 형편이라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다. 하지만 넉넉치 못한 가정 형편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의 길을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행운(?)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할 기회를 얻은 아이들 혹은 그렇지 못한 아이들의 이야기로 <sbs스페셜 1부 공든 탑이 무너진다> 가 시작된다. 

다큐는 서울대 학생들로 시작된다. 실제 서울대 학생들을 조사해 보니, 대부분의 예상과는 달리, 어릴 적 부터 늘 공부를 잘해왔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다양한 성적 분포를 보였으며, 심지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그것도 3학년부터 공부를 잘하기 시작한 학생들이 많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오히려, 입시에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서울대 경영대 학생들의 입시 성공의 관건은, 이른바 자기 주도적인 학습 태도였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그저 도울 뿐,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학업을 선택하고 공부했던 학생들의 서울대 취학률이 높았다는 것이다. 

(사진; 스포츠 월드)

물론 씁쓸하다. 진정한 아이들의 행복을 이야기하면서 서울대 경영대의 입시 앙케이트로 시작해야 하는 현실이. 서울대 경영대를 간 아이들이 사실은 부모의 집요한 조련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정도는 되어야 그래? 하면서 귀기울여 주는 현실이. 하지만 이런 '서울대 경영대'라는 그럴듯한 낚시밥 속에 들어있는 진실은, 입시 교육에 짖눌린 우리의 아이들이, 그 속에서 고사되어가다 못해 진짜 자신의 목숨을 끊고, 자신을 억압한 부모를 해치는 존속 범죄의 주인공이 되어간다는 현실이다. 지금 학부모가 된 부모들이 달라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지금 우리의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현실인 것이다.

우리집이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넉넉했더라면 과연 아들 녀석들이 사교육의 도움을 하나도 받지 않고 스스로 공부를 하도록 했을까? 그런 질문을 던져 본다면, 자신만만하게 그렇다 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물론,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학교, 고등학교에서의 삶도, 그 과정의 행복도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기는 했지만, 나에게 조금의 여유라도 있었다면 과연 그런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 역시 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야기를 sbs스페셜 2부 <기적의 카페>에서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조련이다. 부모가 조련하면 조련하는대로, 따라와 주는 아이들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대한민국 아이들을 줄세우는 대학 입시가 승패의 서바이벌 게임과 다름없듯이 아이들은 그 속에서 줄세우기의 어느 한 켴에 서있게 된다. 아이들은 소신껏 한다고 하지만, 그 아이들의 노력은 늘 부모가 보기엔 미덥잖고, 그래서 아이들을 다그치고, 조련을 하게 되는 것이다. sbs스페셜은 이른바 강남 엄마라 불리우는 교육의 랜드마크 대치동에 까페를 만들고 아이들과 교육적 갈등을 빚는 부모들에게 6개월간 교육 과정을 실시한다. 

▲ SBS <SBS 스페셜-부모 vs 학부모> ⓒSBS
(사진; PD저널)

시민 단체 <사교육 없는 세상>과 <아름다운 배우>이 주최하는 이 기적의 까페에서는 아이들과 갈등을 빚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부모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아이들에게 멘토링을 하는 양방향 교육이 이루어진다. 물론 당장 기적이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몇 번의 교육을 통해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이 개과천선했음을 자부하는 부모들과 달리, 노트를 들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적으며 대화를 하려는 엄마들에게, 아이들은 수법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억압적이라며 냉정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들보다 나은, 혹은 자신들만큼은 이 사회에서 경제적 지위를 누리기를 원하는 부모들의 욕망이 거세되지 않는 한, 이 교육 과정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일 수 밖에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딘 진전이지만, 부모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맹목적으로 더 나은 성적에 매달려 아이들을 학대해 왔으며, 아이들은 그런 부모들에게 마음을 닫아 걸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노력하는 시작이야말로, 시작이 반이 되는 것이다. 

여전히 국제적인 성적 평가 제도인 PISA에서 한국은 성적 최상위를 자랑하지만, 그 속에 드리워져 있는 학습 성취도 최하위의 그늘을 지울 수는 없다. 3부 <부모의 자격>은 그렇게 병들어 가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변화의 물꼬를 어디서 틀 것인가에 대한 담론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해를 손쉽게 하기 위해 다큐의 시선을 핀란드로, 미국으로 옮긴다. 나라에서 모든 교육적 재정을 대신해 주는 핀란드의 아이들은 경쟁 대신 스스로 성취해 가는 시험을 치르며 방과 후 활동을 즐기며 학교 생활을 지낸다. 국가적 뒷받침이 되어 있는 핀란드야 그렇다 치고, 공교육에 있어 경쟁 체제를 도입하고자 했던 미국의 실상도 다르다. 다수의 학부모와 학생들이 그런 경쟁 체제 도입에 반대하고 있으며, 미국의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실리콘 밸리의 학부모들은 그런 미국 정부의 결정과는 반대로, 경쟁이 없는 학교를 선택하는 추세라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경쟁'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의 본질이 아니라는 교육심리학자의 조언도 덧붙인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있다. 경기도 교육청을 중심으로 몇몇 혁신 학교에서 시작되고 있는 경쟁 중심이 아닌, 교과 중심이 아닌 교육 과정의 실험이 그것이다. 하지만, 부모들은 불안해 한다. 그저 3년간 머물다 간 중학 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거대한 입시 교육 대열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이탈할까봐. 하지만 SBS스페셜은 말한다. 부모가, 학부모가 시작해 한다고. 시작할 수 있다고. 그러면 교육도 달라질 수 있다고.

사회에서 실패를 겪으면 고스란히 그 몫을 개인에게 짐지우는 우리나라 사회와, 그것을 사회적 안전만으로 뒷받침해주는 핀란드같은 나라를 비교하며, 우리나라 학부모들에게 새로운 선택을 하라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 학부모가 된 부모들의 불안은, 결국 그들이 이 사회에서 겪는 경쟁과 생존의 불안감의 즉자적인 반영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SBS스페셜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병들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을 구제할 사람 역시 부모밖에 없다고 설득한다. 

드디어 천만을 넘은 <변호사>를 두고, 모 평론가는 이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저 그에게서 연상되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속물적인 주인공의 모습이요, 그 주인공이 변화되는 모습에서 공감하고 감동했기 때문에 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 2014년에도, 여전히 체제도, 사회도, 그리고 교육도 강고하다. 어쩌면 사회, 그리고 사회적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는 한 교육의 변화는 요원할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변호인>에서 속물 변호사의 변화가 한 청년을 구했듯이, 당장 우리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아이들의 부모들, 우리 자신들의 변화이다. 그리고 그걸 SBS스페셜 부모VS학부모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1. 20. 11:14

 18일 방영된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5회분은 전국시청률 13%를 기록했다(닐슨). 종전 기록보다 1.4% 상승한 수치로 자체 최고 시청률이다.

이날 방영된 내용은 원과 다시 손을 잡으려는 이인임, 그의 설득에 넘어간 최영, 그리고 그에 반대해 명과 손을 잡아 원을 저지하려는 정도전과 사대부 세력, 그런 정도전을 제거하려는 이인임, 그런 이인임보다 강경하게 정도전을 처형시키려는 최영에 맞서 정도전의 목숨을 구하려는 정몽주 등의 고군분투가 그려졌다. 덕분에 참형에 처할 뻔하던 정도전은 목숨을 구하고 대신 삭탈관직과 유배령으로 개경을 떠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소신 무능해 간신배를 몰아내지 못했나이다. 이 죄 달게 받겠나이다.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

이는 유배를 떠나야 하는 정도전의 입에서 나온 대사이다. 대사로만 보면 정도전은 천하의 충신이다. 그리고 <정도전>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정도전 말고는 도무지 고려에 제대로 된 신하라고는 없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의 충신 정몽주가 하는 일이라고는 늘 전전긍긍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사건을 만드는 정도전의 뒷수습을 하느라 쩔쩔 매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가 정도전을 구명하지 못해 미안해한다. 아니 뭐 일찍이 미쳐 돌아가던 공민왕이 그의 말 한 마디에 마음을 돌리기도 했다.


(사진; 뉴스엔)


이제 시작한 지 5회에 불과한 시간에 드라마에서 정도전의 목숨이 벌써 몇 번이나 경각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드라마에서 권문세족으로 나오는 이인임에게 호령을 하며 대드는 건 예사요, 고려 최고의 명장 최영을 찾아가 독대를 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죽은 공민왕 앞에서도 눈 하나 끔쩍 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을 보면, 정도전은 열사요, 의사다. 덕분에, 역사 속에서 간신으로 낙인 찍힌 이인임이야 그렇다 치고, 최영에, 정몽주까지, 모두 가 올바른 정도전 앞에, 어딘가 모자르고 부실한 인물로 보일 뿐이다.


특히, 18일 최영이 정도전의 참형을 주장하는 부분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 바로 전 회에 이인임을 만나 그의 계략에 넘어갔다 해도, 정도전이 직접 찾아가 자신이 생각한 것은 친명이 아니라고 설득을 했음에도, 이인임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처형을 주장할 정도의 개연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그의 심중은 그려지지 않는다.


5회에 등장한 고려의 정국 상황은 중국 대륙의 격동기를 겪고 있다. 그 상황에서, 이인임, 최영 등의 권문 세족은 아직은 지지 않는 태양 원과의 관계를 잘 이끌어 가려고 하는 것이요, 정도전 등의 신진 사대부 세력은 새롭게 등장하는 명에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고려의 임금 앞에 충(忠)자를 붙일 정도로 치욕스러웠던 원의 지배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배했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 정신을 짚어 보건대, 결코 정도전 세력의 친명 사대주의도 만만치 않다. 조선의 광해군처럼 실리주의 외교 정책을 펼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말의 세력은 각자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 한 나라를 선택하고 있는 양상일 뿐이다.



오히려 최영을 설득하려고 하던 이인임이 중국 대륙이 어느 한 나라에 의해 통일이 된다면 고려는 망할 것이라는 균형론이 그의 정치적 선택과 관련없이 설득력이 있다. 명에 사대를 하는 게 치욕적이라면서도, 원 사신을 대접하는 일을 맡긴 업무가 맘에 들지 않는다 하여 제껴버리는 정도전의 선택은 사상의 조국 명을 향한 해바라기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선택과 결정들이, 그저 옳고 그름이 입장으로만, 조선을 건국할 위인 정도전의 행보를 빛내기 위한 장치들로만 그려진다. 이미 망한 국가이지만, 그 시절 고려 말의 치열했던 정국 상황은 그저 정도전이 조선을 건국할 불쏘시개일 뿐이다.


드라마는 그런 변화되는 강국의 상황 속에서 각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세력을 역동적으로 그려내는 대신, 이인임은 나쁜 놈, 그리고, 최영은 거기에 넘어간 한심한 놈, 거기에 반대한 정도전은 좋은 놈이라는 식의 초등학교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논리를 재현한다. 마치 일제시대가 끝나고, 미군이 들어오자, 미군은 무조건 우리 편이라던 논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실제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되는 역사의 상당 부분은 조선이 건국 되고, 정도전 등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고려사’의 내용이다. 심지어 그가 만든 고려사가 사실과 너무 다르다고 태조, 세종 등 조선의 임금들이 개정을 요할 정도였다고 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도전 혹은 이후 조선의 입장에서 그려진 고려사를 드라마는 반성없이 고스란히 복기하고 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갈등하는 고려말 세력의 각축전을 단순히 옳고 그름의 이데올로기로써만 그려내고 있으니 역사를 반추함은 없고, 항상 옳았던 위인 정도전만이 남게 된다. 

by meditator 2014. 1. 19. 12:00

고향집에 계신 부모님들이 자식이 찾아올 때 마다 잊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구나!’

그 말씀의 행간에 스며있는 쓸쓸함에, 그리고 그걸 또 알면서도 그저 잠시 온기를 드리우고 떠냐야 하는 송그러움에 자식들의 고개는 절로 수그러들게 마련이다.

금요일 밤 찾아든 <사남일녀>는 부모님이 말씀하셨던 사람 사는 집의 온기, 그걸 상기시켜준다.


처음 뜬금없이 강원도 인제 산골짜기에서 배를 타고 외딴 섬으로 건너갈 때만 해도 그저 그런 여행 예능이 하나 보태지는 것만 같았다. 처음뵌 박광옥, 김복임 어르신들게 다짜고짜 ‘아빠, 엄마’ 할 때만 해도, 무리수란 생각마저도 들었다. 심지어, 스튜디오 예능만 하던 김구라에, 김민종, 김재원에 서장훈, 이하늬의 조합은 그 시너지를 감히 예측하기 힘들 정도였었다. 하지만, 이 생뚱맞은 조합에, 시골밥상 같은 컨셉의 <사남일녀>가 하루 이틀 사흘, 그들이 시골에 머무르는 시간의 증가와 함께 새로운 정을 느끼게 해주는 예능으로 탄생되고 있다.



물론 여전히 맏형 역할의 김구라는 예의 그가 스튜디오에서 했던 진행 스타일이 종종 튀어나오지만, 그의 모습에서부터 풍겨나오는, 그리고 리얼리티 예능에서는 무능한 실제가, 큰 소리는 치지만 정작 별 다른 실속은 없는 여느집 큰 형의 모양새랑 비슷해 존재만으로도 재미를 준다.


일찍이 ‘살인미소’란 별칭으로 대중의 스타가 되었고, 이제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김재원이 ‘저음의 깐족’이나, ‘악마 미소’란 별칭을 얻을 줄은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그런 예상 외의 캐릭터 말고도 여전히 어머님을 녹이는,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살인 미소’ 김재원의 친화력은 <사남일녀>의 접착제와도 같다.


그리고 김재원 만큼이나 그 존재만으로도 빛이 나는 딸 이하늬가 있다. 자고 일어나 부숭부숭한 얼굴을 들이 밀어도, 어떤 일을 시켜도 덜렁덜렁 잡음이 나는 캐릭터임에도, 그녀의 ‘아빠~’, ‘엄마~’ 혹은 ‘오빠’라며 부르는 해맑은 목소리와, 넘어지고 자빠져도 ‘까르르르’ 웃고 마는 밝은 심성은, 외진 시골 마을 집의 정적을 온기로 덥히고도 남는다.


그런가 하면, 그의 존재 만으로도 빛나는 김재원과 정반대로 험상궃은 얼굴에, 방 안에서 일어설 수 없는 덩치의 서장훈의 반전도 만만치 않다. 국가 대표 농구 선수였음에도 우유도 마시지 못하는 예민한 장의 소유자인데다, 어떤 일을 해도 새초롬하고 섬세하게 해내는 모습은 <사남일녀>의 또 다른 묘미다.


하지만, 무엇보다 화룡점정은 둘째 형을 맡고 있는 김민종이다. 자연인 그 자체로 김민종이 보여주는 모습 자체가 예능이다. 검은 가방에 잔뜩 스프며, 햄이며 온갖 가지 물품을 준비해와서, 그 어떤 일에서도 자신이 없으면 안된다 믿는 자신감으로 오지랖을 부리지만, 정작, 나머지 형제들의 평가처럼 그 어떤 것도 시원하게 해내는 것이 없는 노총각 둘째 오빠의 역할을 그는 톡톡히 해낸다. 아직은 밋밋했던 <사남일녀>에서 온갖 예능적 재미는 김민종으로부터 빚어진다. 호시탐탐 시원찮은 형을 갈구는 김재원과의 대결 구도만이 아니라, 시골 장에 나서서 지갑을 홀라당 털리고야 마는 여린 마음에, 아버지와 형제들의 부추김에 문어가 나와도 몰래 카메라인 줄 모르는 그의 순진함이 웃음을 마구 자아낸다.


(사진; 뉴스엔)


하지만 <사남일녀>의 맛은 김민종의 어처구니 없는 강문어 몰래 카메라에 있지 않다. 처음에 아들 딸이라고 해도 낯설어 어쩔 줄 모르시던 박광옥 아버님과 김복임 어머님이, 아들 딸들의 부추김에 둘째 아들 몰래 카메라에 적극적으로 나서시고, 잘 한다, 니가 좋다 손도 잡아주고, 얼싸 안아주는 정감 있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가족애가 진짜 이 프로그램의 맛이다. 그래서, 김민종의 몰래 카메라 이후, 모두가 땅을 칠 정도로 웃어 제낀 후, 아버님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꺼 라는 말씀이 더 뭉클해지는 것이다. 겨우, 며칠 연예인들 몇몇이 와서 아들딸 노릇하는 게 뭐라고, 그간 얼마나 적적하셨으면 그걸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는 그 말씀이, 고향 집 부모님의 ‘이제야 사람 사는 집’같다는 그 말처럼 가슴에 남는다. 

by meditator 2014. 1. 18. 12:12

얼마전 소리소문도 없이 종영한 <빠스껫볼>의 한 장면,

돈이 없어 학교에서도 쫓겨난 강산이 결국 흘러든 곳은 거리의 농구장, 그곳은 말이 농구장이지, 돈 놓고 돈을 먹는 투전판이나 진배없는, 골대에 골을 넣기 위해서는 폭력이든, 속임수든 그 어느 것이라도 가능한 싸움판이었다. 그곳에서 강산은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울분을, 자신의 덩치보다 한참 큰 상대 선수를 향해 그저 자신이 가진 장기 농구를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거리에서의 삶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그에게 돈을 걸었다가 가진 돈을 다 잃고, 그것도 모자라 농구판 모리배에게 두들겨 맞고 쓰러진 사람과, 그런 광경을 보고 질타하는 어머니, 그리고 진짜 농구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 한 여인에 대한 사랑 등이 결국 그로 하여금 편법으로 농구를 하고, 돈을 벌던 거리의 농구판을 떠나게 만든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사라지긴 했지만, <빠스껫볼>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식민지 시대의 건강한 역사 의식과 실존적 삶을 살아내려 했던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으려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보다 1년 전에 방영되었던 kbs2의 <각시탈> 역시 다르지 않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역사적 주체성과, 실존적 자아의 성취를 그려내는데 진력했다. 그리고 이제 2014년에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감격시대>의 위치? 섣부른 판단일 지 모르겠지만, 2회까지로 보건대, 이 드라마의 위치는 앞선 두 드라마의 정반대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듯하다. 

<빠스껫볼>이든, <각시탈>이든 그리고, <감격시대>이든 모두 소년들의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든, 혹은 세상 사람이라도 자신의 삶의 굴레에 휘말려 돌아가 미처 가족들을 돌볼 처지에 놓이지 못한다. 반면 소년들에겐 아버지가 미처 챙겨내지 못한 가족이라는 짐이 지워져 있다. <빠스껫볼>에서는 일본인 집에서 떨어진 꽃잎 조차도 손으로 집어 치워야 하는 수모를 겪으며 일하는 어머니, <각시탈>에서는 일제의 고문으로 바보가 된 형에, 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어머니, 그리고 <감격시대>에서는 병든 동생까지, 어린 나이에 소년들은 가장의 몫을 다하느라 버겁다. 

아마도 힘들기로 치자면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 지도 모를 동생을 둔 <감격 시대>의 정태(곽동연 분)가 최고일 것이다. 정태는 1월16일 방영분 마지막 장면, 동생을 위해 철교 위로 올라간다. <빠스껫볼>과 <각시탈>의 주인공이 식민지 시대의 지난한 삶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주체로 거듭나게 되는데 반해, <감격시대>의 주인공은, 그의 강고한 실존적 환경이 그를 정반대의 길로 빠져들게 만든다. 


감격시대 원작

이제 2회에 이르른 <감격시대>를 한 마디로 정의내리자면, 결국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이다. <각시탈>에서 친구에게 배운 검법이 일제를 향한 단죄의 철검으로 변모한 반면, <감격시대> 정태가 가진 주먹은 그를 폭력의 세계로 인도한다. 

인력거 사납금을 채우지 못해 사무실에서 도꾸(엄태구 분)에게 맞던 짱똘(김동희 분)을 구하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싸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보복을 하기 위한 도꾸의 패거리에게 몰매를 맞던 정태를 풍차(조달환 분)가 구해주고, 다시  싸움은 풍차가 속한 도비패와 도꾸가 속한 불곰패거리의 싸움으로 번질 조짐이 보인다. 결코 한번 이기고 져서 끝날 일이 아니다. 마치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동심원을 이루며 물 전체의 파장으로 번져가듯, 에스컬레이션 된다. 그리고 그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정태는 휘말려 갈 것이다. 그럴 듯한 캐릭터의 조연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이들은 정태가 보다 본격적인 싸움꾼이 되어가는데 조력자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정태가 좋은 사람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실 드라마가 노리는 것은 싸움꾼으로 멋지게 등극하는 낭만적인(?) 주먹 세계일 뿐이다. 

물론 폭력의 이유는 많다. 아픈 동생을 위해, 몰매를 맞는 친구를 위해, 괴롭힘을 당하는 여자를 위해, 고뿔조차도 고치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의리를 위해, 자존심을 위해,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감격시대>의 논리는 폭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덕분에 드라마는 화려한 몸 싸움의 향연을 방영 시간에 몇 번씩 등장시켜 주지만 그렇다고, 화법이 달라지지 않는다. 싸움은 불가피했다고, 폭력의 세계는 운명이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되물을 수 밖에 없다. 1985년 군사 정권 시대에 스포츠 신문에 연재되던 주먹들의 이야기가 2014년에 다시 일제 시대를 산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둔갑하여 드라마로 제작되는가 라고. 더구나, 무엇이 어떻든 동시대의 고통스런 실존적 삶에서도 전혀 다른 선택을 했던 드라마, <빠스껫볼>, <각시탈>이 있었기에, 주먹으로 세상을 살아보려 했던 이야기의 논리적 불가피성은 취약할 수 밖에 없다. 150억이나 들여서 만든 폭력적 서사의 허황함이다. 


by meditator 2014. 1. 17. 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