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적 자부심 중에 하나는 서양에 비해 앞선 금속 활자의 발명이다. 하지만, 당시 세계사 속 고려의 금속 활자 발명은 그리 '인정받지 않는 모양새'다. 왜 그럴까? 그건 활자의 발명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사회 문화적 변화가 어떻게 이끌어 졌는가라는 영향력에 있어서 고려 금속 활자의 파급력은 서양의 금속 활자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세 금속 활자의 발명은 이 금속 활자를 활용한 성서의 보급을 이끌고, '종교 개혁'이라는 시대적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랬기에, 활자가 발명되었을 때 기득권인 귀족들은 활자의 보급을 반대했었다.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세종대왕이 발명한 '한글' 역시 기득권인 양반 계급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이런 당시 기득권 계급과 백성을 사랑한 군주 세종대왕의 갈등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상세하게 그려진 바 있다. 



감시 부재 사회 대한민국 
2월 19일 방영된 <sbs스페셜>은 중세의 활자와 조선의 '훈민정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백성들이 '무지'하기를 바랬던, 그래서 자신들이 마음껏 권력을 농단하기를 원했던 기득권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런 당시의 시대를 배우며 한껏 혀를 찬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역적>을 보며 저런 시대에 살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런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을까? 20세기 이후의 세계를 정보화 시대라 지칭한다. 정보화 시대의 권력은 바로 그 '정보'를 '소유'하거나 '독점'하고 있는 세력을 뜻한다. 그러기에 정보화 시대 '우민화 정책'은 바로 권력의 정보 독점으로 이어진다. 바로 2017년 청문회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그 '권력'의 독점적 폐해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그래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데, 2017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아니 해방 후 현대사에서 거개의 권력은 늘 '부패'의 딱지을 떼지 못했다. 왜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권력이 늘 부패하는 걸까? 과연 '탄핵' 이후 새로운 권력이 들어선다면 그 권력은 '부패'로부터 자유로울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 바로 그 의문과 과제에 대해 <sbs스페셜>이 선택한 답은 '권력'에 대한 국민의 권리로서의 '감시'이다. 

위안부 합의 내용을 외부에 공표하지 않기로 합의? 
그 '감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다큐가 접근한 우회로는 세 가지다. 그 첫 번 째, 2015년 12월 28일에 발표한 한일 위안부 합의이다. 양국의 외무 장관의 합의 조항에는 일본은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했다. 하지만 이후 아베 총리는 말을 바꿔 '털끝만큼도 인정할 마음이 없다'고 주장한다. 아베 만이 아니다. 국제 회의에 나선 일본 외교관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은 돈을 주었기에 소녀상을 철거하라며, 자국의 대사를 소환하는 강력한 제스처까지 취한다. 얼굴을 바꾸는 일본, 그런 안하무인의 태도에 분노하며 양국의 합의 내용을 알려달라는 시민 단체에 정부는 양 국 정부의 합의 내용을 외부에 공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식의 '비공개' 원칙을 고수한다. 


지질 역학 조사는 했지만 발표는 할 수 없다?
외교적 관례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월성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주변 마을, 마을에 사는 주민들 대다수가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거나 투병 중이다. 과연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암에 걸려 검사를 받은 주민, 주민의 몸에선 제한치 이상의 방사능이 검출됐다. 거주민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아들도, 심지어 손자의 몸에서 까지, 3대에 걸쳐 모두 방사능이 검출됐다. 하지만 이에 정부는 방사능 수치가 높다고 암에 걸리는 건 아니라는 식으로 발뺌을 할 뿐이다. 심지어 월성 주변 마을 주민의 암 발생 수치를 알려 달라고 하니, 이번에도 역시 '비공개' 원칙을 주장한다. 

암 환자 수치만 비공개가 아니다. 그 수명이 다한 월성 원전의 재가동을 시도하려 했던 정부, 하지만 주변 도시인 경주의 잦은 지진 발생과 함께, 월성 주변 지질대에 대한 의심이 커져만 갔다. 이에 '역학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 또한 '비공개'다. 심지어 '역학 조사'에 참여한 학자들조차 보고서의 열람이 복사나, 카피가 안되는 제한적 열람만을 가능하게 했을 정도다. 

국회 청문회만이 아닌, 국가 전반, 사회 전반 곳곳에서 '국민의 주권'이 행사되어야 할 영역이라면 어디서든지, 국민이 맞닦뜨리는 것은 '위임한 권력'에 대한 정보 대신 '비공개'의 원칙이다. 그리고 결국 그 '비공개'의 향배가 궁극적으로 향한 곳은 '저 푸른 기와 집'.


3년 전 일이라 기록이 없다? 혹은 국가 원수 안위의 문제다?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와 관련하여, 여전히 우리 사회는 '안갯속'을 헤맨다. 당시 출동했지만 학생들을 구하지 않았던 해경 출동선의 cctv에서부터, 바로 그 시간 위임받은 국가 권력이었던 대통령의 7시간 행적까지, 도대체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당시의 일정이라 내놓은 보고서는 허술하기 짝이없고, 보고를 했다는데 통화 기록이 없다. 남겨진 것조차 '기록'되 내용이 아니라, 알음알음 누군지도 모르는 당사자의 기억을 쫓은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 마저도 이제 대통령의 '정보 보호' 요청이 있다면 향후 30년간 '자물쇠'가 잠궈질 처지이다. 

달라질 세상을 향한 전제 조건으로서 국민의 알권리 
과연 이런 권력의 비타협적 비공개는 '민주적 정부'의 관행일까? 당연히 아니다. 다큐는 외국의 예를 들어 비교한다. 스웨덴에서는 이미 학교에서 민주 사회의 기본 권리로서 정보의 공개를 배우고 실습한다. 학생이 요청한 정보 공개를 위해 교장은 지난 3년간의 이메일 기록 수백 페이지를 복사해 준다. 이유는? 물을 것도 없다. 그것은 권리이고, 의무이기 때문에. 덕분에 스웨덴에서는 공금으로 가족들에게 초콜릿을 선물한 총리 후보가 사퇴한다. 전기 요금을 내지 않은 장관도 사퇴한다. 마늘 주사를 비롯하여 정체 불명의 약품과 심지어 비아그라를 구매한 청와대의 물품 목록의 사용 내역은 여전히 '국가 안위'를 위한 '비공개'인 우리와 격세 지감이다. 우리나라에선 관련자조차도 혹시나 정보를 퍼다 나를까 열람 제한을 하는 원전 주변 지질 조사서는 캐나다로 가면 인터넷만 켜면 바로 검색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사무실에서는 그 자료가 굴러다니는 수준이라나. 

이런 '정보'에 대한 스웨덴, 캐나다와 우리의 서로 다른 관행은 이들 나라와 우리의 부패 지수의 차이로 판가름난다. 스웨덴이 전년도에 비해 한 계단 내려와 4위인 반면, 우리나라는 1년 사이에 37위에서 52위로 전락했다. 국민의 알권리 보다 '국가 보안'과, '국가 안위', 통치자의 신변이 우선되는 나라인 이상, 어쩌면 정권이 변하다 해도 쉬이 '부패'는 개선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정권의 변화와 함께, 이제 정말 다른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다큐가 전제로 삼은 것은 바로 국민으로 부터 나온 권력의 진정한 행사로서, 국민의 알권리 보장이다. 

by meditator 2017. 2. 20. 05:39

자괴감'을 운운하며 전국민을 '자괴감'에 빠뜨렸던 당사자는 아직도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다. 덕분에 엄동설한을 보내고 입춘을 맞이하는 광장의 촛불은 여전히 활활 타오른다. 그러나 김부겸 의원은 '쉽지 않은 싸움'이라 주장한다. 여전히 지방으로 내려가면 정치 활동을 하면 안되는 저 청와대 점거인에 대해 '불쌍하다'는 인식이 저변에 널리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 '강고한' 온정, 덕분에 선거 때마다 그 사람을 '선거의 여왕'으로 만들었던 저 '괴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sbs스페셜은 2월 5일 과연 우리가 그간 '선거'를 통해 뽑은 '대통령'의 선택이 어떤 것이었나, 그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정치인은 어떻게 보면 연예인하고 같은 과예요. 
        그러니까 이미지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한때 이명박의 좌청룡우백호 정두언- 


연예인과 같이 이미지만 그럴듯하면 대통령이 가능?
1948년,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건국'과 '정부 수립'의 그 '딜레마'의 원년,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하지만, 그 '초대' 대통령이래, 지금까지 18대 11명의 대통령들의 대부분이 '불명예'스러운 인물로 남았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로 시작되는 대통령의 사과는 너무 익숙해서 이젠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이렇게 '대통령의 사과'가 대통령 취임 시기의 관례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도대체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어떻게 속았길래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황상민 전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일침을 가한다. '내가 왜 속았는지 정확히 알지 않으면 다음에 또 속게 돼있다'고. 이에 다큐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기초로 하여, 또 속지 않을 묘책을 고심한다.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이구동성은 한결 같다. 대통령은 '연예인'과 같은 과다. '이미지'라는 것이다. 공약도, 정책도 아닌. 대통령 선거 전문가는 말한다. 사람들은 그저 이미 자기 맘 속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뽑을 뿐이라고. 공약, 정책, 그거 하룻밤이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 

연예인같은 이미지의 대통령,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혹자는 말한다. 대한민국의 일부는 여전히 '왕조' 국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이씨 왕조'의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처럼 뽑힌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후진형 독재'를 자신들을 잘 살게 해주었던 왕조로 떠받들던 사람들, 노무현 대통령처럼 친근한 이미지의 대통령을 받아들일 자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내가 다 잘 할 수 있다'며 호언장담하는 '장군'과 같은 이미지의 이명박 대통령을 뽑고, 그도 부족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후광에 기댄 독재자의 딸을 눈물겹게 대통령의 자리에 모셨다. 

모르는 질문이 들어왔을 때 좀 엉뚱하지만 다른 식으로 넘어가는 연습, 
그게 제일 주안점이죠.” 
-임현규 전 이명박 대선후보 캠프 정책홍보특보-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마련된 후보자 검증의 시간 
이런 선택에 대해 유시민 작가는 냉정하게 말한다. 오늘날 국민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잘못된 선택때문에 인간의 질병(메르스)도, 동물의 질병(AI)도, 재난이나 참사(용산 참사, 세월호 등)도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그러니 자신이 그 엄청난 대가를 다시 치루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의 한국 선거 시스템은 '이미지'의 외피를 걷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인터뷰 말미, '언론은 뭐했냐?'며 냉정하게 되물은 유시민 작가의 질문처럼, 그 '이미지'에 언론은 나팔수 역할을 했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 양산된 종편, 정권의 입맛에 맞게 개악된 이른바 공영 언론들은 노무현 선거는 물론, 이명박 선거 때보다도 거의 반에 불과한 선거 관련 방송을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선거 관련 방송의 대부분이 '이미지네이션'에 부합하는 후보자 동정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방송 환경에서 '이미지'의 척결은 커녕, '이미지'의 확산만이 가능할 뿐이다. 

미 대선의 경우, 대통령 선거 자체가 1년 반정도가 걸리는 대장정이기에, 그 과정에서 검증에서 탈락한 후보는 자체적으로 '사퇴'라는 경우가 등장한다. 또한 장시간에 걸쳐 되풀이 되는 후보 토론 과정은 자신이 선택할 후보에 대해 충분히 알고자 하면 알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다. 거기에 토론 과정에서 제시된 내용에 대한 '언론의 팩트체크'가 뒤따른다. 물론 이런 다큐의 내용조차 '이미지네이션'의 끝판왕이라 일컬어지는 미 대선에 대한 '오독'일 수 있다. 하지만, '토론'자체가 봉쇄되어, 앵무새처럼 외워 온 대답만으로도 '능력있는' 대통령처럼 보여질 수 있는 현재의 선거 제도 자체에서는 '미국'만큼이라도 하는 것이 '이상'이 되는 것이다. 



결국 2월 5일의 다큐는 프로그램 말미 바로 이어진 대통령 후보에 대한 <국민 면접>로 이어진다. 다큐는 그나마 우리의 현실에서 '이미지'로 오독된 대통령을 다시 뽑는 어리석은 행동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끝장 토론'을 제시한다. 기존의 선관위의 준비된 대답만을 읽어내리는 지극히 부족한 '토론' 양식 대신, 후보자의 면면을 다 드러낼 수 있는 충분한 토론 시간만이 현재의 이미지 정치를 탈피할 최소한의 방법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다큐의 제안에 '선관위'는 난색을 표한다. 아마도 후보 측에서 저어할 꺼라고. 다큐가 찾아간 대선 주자들. 기꺼이 토론에 임하겠다 하고. sbs는 자신이 준비한 카드 <국민 면접>을 꺼내드는 것으로 <대통령의 탄생>은 마무리된다. 

 긴 서론 끝에 등장한 <국민 면접>, 하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문재인 후보가 거절한 것으로 인해 화제가 되었던 kbs의 <대선 주자에게 듣는다>가 이미 테이프를 끊은 바 있다. 그 뒤를 이어 sbs가 끝장 토론이 가능치 않다면 압박 면접이라도 하겠다며 국민들이 직접 보내온 질문을 바탕으로 5명의 면접관들이 대선 주자들을 탈탈 털어보겠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타 방송사들에서도 이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뒤를 이을 듯하다. '선관위'가 하지 못한다면, 이번엔 '방송사'만이라도 제대로 '검증'을 하여, '말은 많지 않지만 결정적 한 마디를 잘 해서, 혹은 웃음으로 잘 때워서' 대통령이 되는 불상사는 막아야 할 것이다.  

by meditator 2017. 2. 6. 12:53

sbs는 지난 해 신년 특집으로 <엄마의 전쟁 3부작>을 내보낸 데 이어 2017년 신년 특집으로 <아빠의 전쟁 3부작>을 마련했다. 전개 방식은 유사하다. 이상한 나라의 나쁜 엄마들이 되어버린 이 시대의 엄마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보고 대안을 모색해보던 그 방식을 <아빠의 전쟁>에서도 동일하게 차용한다. 1부에서 문제 아빠들의 사례를 모아보고, 2부에서 그 해법을 마련하고, 3부에서 대안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구성이다. 


지난 해 <엄마의 전쟁>에서도 다큐의 사례 중 등장한 이른바 '나쁜 엄마'의 사례를 놓고 인터넷 게시판은 갑론을박으로 뜨거워졌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특히나 2부에서 등장한 이벤트성 아빠와의 저녁 식사 해법이 방영되자, 방송인 조영구 씨네의 방영분을 놓고, '차라리 혼자 사는게 낫다'는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가족'의 일부이기도 어색한 아빠, 차라리 혼자 사는게 편하다는 아빠, 그럼에도 부득불 가장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아빠, 이 시대의 아빠, sbs스페셜이 지켜본 아빠가 도대체 어땠길래?

아름다운 야경을 가진 나라, 대한민국,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요인이 야근을 하느라 건물마다 밝혀진 불빛이라면? 다큐의 시작은 OECD 36개국 중 두번 째로 긴 노동시간, 일과 삶의 균형 지수 끝에서 3번째인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들, 아빠의 삶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평균 하루 6분, 저녁이 사라진 시대, 아빠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냥 없어졌으면 좋겠는 아빠
다큐가 들여다 본 아빠, 그 첫 번 째,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한다는 국제 중학교에 입학한 딸, 하지만 그 딸은 핸드폰에서 아빠의 번호를 지워버렸다. 아빠와 눈이 마주치기는 커녕 벌레보듯 피한다. 딸은 지난 5월의 사건을 원망스레 말하지만 아빠의 기억엔 그 날이 없다. 다른 아빠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방송인 조영구씨도 바쁜 스케줄에 가정을 돌볼 새가 없다. 어느새 아들과 엄마만의 라이프 사이클과 아빠 조영구씨의 라이프 사이클은 엇물린 지 오래다. 

젊은 아빠라고 나을까? 어린 아들을 둔 인천 공항 직원 부부, 삼교대 근무인 이들 부부의 만남은 아이 돌보기 육아 근무 교대식이다. 혹여 늦을까 아기띠를 둘러매고 공항에서 종종거리다 겨우 시간에 맞춰 아이를 근무가 끝난 상대에게 맡기고 다시 종종거리며 가는 일상, 연가와 휴가, 근무 그 모두는 아이 육아를 위한 돌려막기이다. 밤을 새고 돌아온 아빠는 밀린 잠 대신 아이를 돌봐야 한다. 

1부에서 보여진 이 시대의 아빠들, 좀 젊어서 아이를 함께 키운다 싶으면 그 육아에 치이거나, 그도 아니면 아이를 볼 시간도 없이 직장 업무에 쫓기거나, 아이가 철 들기 시작하면 아이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제대로 아빠 노릇을 하지 못하거나, 할 시간이 없다. 

2부에서 한 달간 아빠와의 저녁 식사라는 이벤트를 통해 풀어보려 하지만 쉽게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관계를 악화시키기조차 할 정도로 쉬이 해소되지 않은 가족 문제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아빠들은 바쁘다. 2부에서 한 직장의 두 직장인을 실험 삼아 정시 퇴근을 하도록 만들었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음 날 더 일찍 출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대한민국 직장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3부 스웨덴의 아빠들과의 비교 사례에서 야근을 밥먹듯이 하며, 하루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6분이라는 사실에 믿기 힘들어 하는 모습에 대비되듯, 대한민국 아빠들은 '일'에 대한 강박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다. 

돈을 벌어야 하기에 자신이 좋다는 아이를 밀어냈던 아빠. 당연히 그 상처의 댓가는 철든 아이의 외면이나, 냉랭한 대응이다. 아빠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항변하지만,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아이의 트라우마는 좀처럼 해소되기 힘들다. 

하지만 과연 열심히 일했다는 것만이 유일한 호소가 될까? 아빠를 벌레보듯 피하는 딸, 그리고 아빠의 말끝마다 톡톡 쏘아대는 딸의 버릇없음을 따지고 들어가니, 거기엔 '가장'이란 이름의 '독재자'가 등장한다. 하루 종일 돈을 버느라 힘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집에 돌아와 '감정을 고스란히 배설'했던 기억은 이제 아이들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아니 아빠들도 억울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아빠들이 보고 자라온 아빠들이 그랬으니깐. 아빠들의 아버지들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면 집안에서 독재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 그렇게 하면 되려니 했지만, 이제 아빠들은 밖에나가 돈을 버는 것도, 가정에서 아빠로 대접받는 것도 그 어느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는 시대에 힘들어 한다.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건 아빠가 아니다. 
그 해법을 찾기 위해 다큐가 선택한 건 뜻밖에도 외국행이다. 복지 천국이라는 스웨덴으로 젊은 아빠 윤상현이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라떼 파파들, 육아 휴직 중에 커피 한 잔을 들고 유모차를 끌고 여유를 즐기는 아빠, 라떼 파파를 만난 윤상현은 묻는다. 당신들은 어떻게 그리 살 수 있냐고.

뜻밖에도 돌아온 대답은 그저 부러운 외국 사례가 아니다. 스웨덴도 아이를 돌보며 행복한 여유를 즐기는 라떼 파파가 등장한 것이 불과 20여년 내외에 불과하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거리에서 만난 라떼 파파의 아버지들은 우리나라의 아버지들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 일벌레 아빠들의 악순환을 깬 것은 아빠들이 아니라, 정부와 제도였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분명 아빠들의 육아 휴직이 존재한다. 하지만 육아 휴직의 급여는 40%, 그 정도를 가지고는 아이를 돌보며 생활하는 건 불가능하다. 더구나, 아빠 외벌이 가정이라면 더더욱.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육아 휴직을 했을 경우 당하는 불이익이다. 대부분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육아 휴직 이후 직장 내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심하면 권고 사직을 당하는 현실에서 가정을 책임지는 아빠의 육아 휴직이라니! 

스웨덴은 국가가 나서서 이런 부조리한 제도를 척결했다. 육아 휴직 수당의 부족분을 국가가 충당하여, 아빠들은 육아 휴직 기간에도 경제적 곤란함을 겪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육아 휴직을 했다고 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그것이 지켜진다. 거기에 육아를 하는 부모를 위한 오픈 어린이집에서 극장까지 다양한 문화적 배려가 마련된다. 이런 제도적 뒷받침 위에 비로소 아이의 성장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아빠들의 선택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런 아빠들의 다른 삶이 아빠만 생각하면 술, 담배, TV 대신 하트 뿅뿅이 난무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끌어내는 것이다. 

여성들이 가장 살기 좋다는 스웨덴보다 한 술 더 뜨는 건 가장 적은 노동 시간을 자랑하는 독일이다. 최고의 컨디션에서 최상의 노동이 나온다는 생각을 가진 독일의 회사는 아픈 직원이 출근하면 오히려 힐난을 듣는 분위기다. 불경기를 맞이하면 직원을 자르는 대신, 노동 시간을 줄여 모두가 조금씩 그 부담을 나눠지고 가는 것이 관례가 되고, 제도가 된 나라. 그곳의 아빠들은 장기간 노동 대신, 너무 긴 휴가 계획이 고민이다. 



결국 스웨덴과 독일의 사례를 통해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전쟁의 책임이 '아빠'들 개인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와 제도가 달라져야 아빠들이 달라질 수 있다고 강변한다. 야근과 특근을 해야만 수당으로 적정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사회에선 아빠 노릇은 용기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정시 퇴근에 적정 임금이 된다면? 다큐는 회의적으로 답한다. 아마도 아빠들은 정시 퇴근 후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설지도 모른다고. 아이 한 명을 대학까지 보내기 위해 갖가지 과외 활동비까지 3억을 훨씬 웃도는 돈이 필요한 대한민국에서 정시 퇴근이 법적으로 정해진다면 아마도 아빠들은 또 돈을 벌러 거리로 나서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2016 <엄마의 전쟁>이 가족 간의 관계 해소를 위한 노력에 방점을 두었다면, 2017 <아빠의 전쟁>은 그 방점이 사회와 제도에 찍힌 만큼, 그 해소는 난망이다. 이미 IMF 등을 겪으며 경제적 공포가 내재화된 우리 사회의 아빠들, 그 아빠들은 가족들의 원망을 들으면서도 '돈'에 대한 강박을 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아빠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경쟁과 불안을 고도화시키고 있다. 거기에 변화되는 가족 관계, 고착화된 가부장 의식이 가정을 위기로 내몬다. 쉬이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아빠의 전쟁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2017년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by meditator 2017. 1. 16. 13:36

거리의 시민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노후를 어떻게 보내고 싶냐고? 대부분 지금 먹고 사느라 할 수 없었던 취미 생활을 즐기는 여유로운 노후를 떠올린다. 과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직 노후를 맞이하지 않은 사람들의 천진난만했던 답을 뒤로하고 이어진 다큐, 그 어떤 지옥의 묵시록보다 처연하다. 그런데 그게 바로 2017년 노령인구 14% 고령사회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새해를 맞이한 mbc스페셜은 특별히 새해맞이 특집이라 이름을 내걸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주 <나 혼자 산다>에 이어, 이번 주 <노후, 생각해 보셨나요?>는 1인 가구 520만 시대, 노령인구 14%의 대한민국을 가감없이 진단해 보려는 시도들이다. 거리에선 촛불을 들고 희망을 소망하지만 그 희망이 닿아야 할 지면의 구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랄까? 마치 다큐판, 아니 리얼 한국판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다큐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갑남을녀로 성실하게 살아왔던 대한민국 노년의 처연한 삶을 그려낸다.  



평생을 목수로 성실하게 살아온 다니엘 블레이크 일하다 쓰러져 심장 이상을 진단받은 후 요양 급여를 받으려 하지만 신자유주의 하 영국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그는 자신의 자존을 주장하지만 그 자존이 증명되기엔 그의 병은 너무 깊었다. 아니 영국의 복지는 성실하게 살아온 노년을 보상하기엔 너무 편협하달까? 그래도 명목 상이나마 영국의 복지는 그 통과 의례를 지난다면 요양 급여를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시작은 49, 회사에서 명퇴를 하며 사회로 튕겨져 나온 중년의 끝자락에서 시작된다. 그래도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나이, 그 다음은 50대, 60대, 70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여전히 먹고 살아야 하는 '먹고사니즘'은 물론 때론 '부양의 의무'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평균 은퇴 연령 53세, 그러나 늘어만 가고 있는 기대 수명은 82.2세 은퇴 후 생존하는 기간이 30여년 가까이 된다. 1인 최소 노후 생활비 99만원 부부를 기준으로 하면 160만원, 적정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225만원, 그렇게 따지면 노년에 최소한 필요자금은 5억5천만원, 적정한 필요 자금은 8억 1천만 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웬만하지 않고서는 일을 해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노년이다. 이렇게 '돈'이 드는 노년 우리의 부모님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돈이 드는 노년, 하지만 돈이 없는 가난한 노인들
다큐는 몇몇 노인들의 하루를 쫓는다. 움직이는 않는 손으로 쇼핑백을 접어가며 돈을 버는 70대, 처음부터 그가 이런 생활을 한 건 아니었다. 노년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버젓이 집칸이나 지닌 중산층이었다. 아이들도 내로라하는 대학까지 보냈다. 그러나 자식 중 한 명에게 닥친 루게릭 병, 자식의 병마는 그가 노후 자금으로 마련한 집칸을 들어먹었다. 이제 그는 노숙자 쉼터에서 살며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쇼핑백을 붙이며 자식까지 뒷바라지하는 처지다. 

공공근로로 학교 화장실 청소를 하는 노년의 여성 사례라고 다르지 않다. 사립대학을 나와 논현동에서 풍족하게 살던 전업주부, 하지만 삼십대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뜨자 그녀는 가장이 되었다. 동네 주부들을 상대로 밍크 코트를 팔고, 오십이 넘어 보험모집인을 하며 그래도 돈을 좀 만졌다던 그녀, 하지만 그 돈을 자신의 노후 자금 대신 자식들 교육비에 투자했다. 이제 자식은 커서 떠나가고, 그녀에게 남은 건 그런 곳이 있냐고 했던 비닐 하우스 단지, 공공근로의 일자리다. 

번듯한 대학이라면 고려대학을 나온 정대윤 할아버지를 따를 사람이 있을까? 대학을 나와 두 달만 벌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던 엘리트로 살던 할아버지, 80년대 국제 그룹 해체로 평생 직장이던 그곳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후에 집을 지어 파는 사업을 하며 돈을 모을 필요도 없이 풍족하게 살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불어닥친 IMF, 두 번의 경제 위기는 그에게서 노년의 여유로움 따위를 앗아가 버렸다. 이제 월세 17만원의 임대 아파트에서 기초 생활 보장 40만원, 노령 연금 20만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 1인 최소 노후 생활비에는 한참 모자르다. 

다큐가 보여준 노년의 사례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평범하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성실하게 살아왔던 이들, 자신의 축적보다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애를 썼던 그들, 하지만 이제 노년의 그들은 '빈곤하다. 노인 빈곤율 48.4%, 0ecd 최고인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도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없다. 노인들의 단골 직업 아파트 경비원, 한 달에 150만원 남짓을 벌 수 있는 아파트 경비원을 하는 인구가 23만 2천 명에 이른다. 그게 아니라면 택시 기사? 70대 김영철 어르신은 말한다. 그 나이대 할 수 있는게 경비원 아니면 택시 기사 밖에 없다고. 지하철을 이용해서 택배 기사로 일하는 70대 어르신이 두 시간을 걸려 배달하고 받은 돈은 2만원 남짓, 그 조차도 택배 업체와 나누어야 하는. 하지만 어르신에겐 80대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아쉬운 처지일 뿐. 십년을 내다보고 벌어놓은 과일 도시락 노점 점포는 하루 수입이 2만원이 안될 정도로, 노년의 벌이는 위태롭다. 



그래도 새해 소망난에 공공 근로 재계약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몸이 건강하면 다행이다. 65세 노인 인구 중 만성 질환자가 89.2%, 노인 1인당 만성 질환 평균 2.6개, 노인과 약봉지는 대한민국에선 너무 익숙한 구도이다. 그래도 정신이라도 멀쩡하면 아직은 견딜만하다. 치매라도 온다면? 하지만 노년과 치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7.1%이던 60대 치매 환자가 70대가 되면 21%로 늘어나고 80대 중반을 넘어서면 거의 1/3 수준을 넘는다. 더구나 치매로 인한 가정 파탄은 물론 입원비 등 경제적 부담도 가장 크다. 하지만 우리 노년의 치매와 병은 온전히 그 개인과 가족의 부담분이다. 

다큐는 덤덤하게 때론 처연하게 노년의 일상을 그려낸다, 그 흔한 다큐의 데코레이팅같은 외국의 사례조차 없다. 2017년 새해, 해가 바뀌었지만 하루하루 늙어가고, 그렇지만 가난하고, 할 일조차 줄어들고, 이젠 몸조차 아픈, 그러나 한 때 건설입국의 견인차였고, 새마을 운동의 동력이었으며, 홈 스윗 홈의 주역이었던 대한민국 근대사의 주인공들은 이제 병들고 가난에 시달리며 노년을 맞이한다. 그들에겐 다니엘 블레이크가 벽에 자기 이름을 쓰며 항변할 패기조차 사치이다. 

by meditator 2017. 1. 10. 12:04

728회 mbc 스페셜의 신년 첫 방송분은 < 나 혼자 '먹고' 산다>이다. <나 혼자 산다>의 다큐편일까? 왜 신년 벽두부터 혼자 사는 이야기를 다루었을까? 다 이유가 있다. 


거리에 '집' 미니어처를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이 집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살 꺼 같냐고? 그래도 세상이 많이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식구가 많이 줄었으니 하면서, 두 명이나 세 명을 미이어처 집의 가족으로 셈한다. 여전히 사람들의 머릿 속에 '집'에는 '가족'이 사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tv만 틀면 나오는 드라마들은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대가족이 등장한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한데 살면서 세대 간 갈등과 화해가 대부분 '가족' 드라마들의 주 내용이다. 여전히 '가족'이 대세인 양 하는 대한민국, 하지만 실상은 대한민국 가족의 가장 보편적 형태는 이제 1인 가족이다. 520만 1인 가족 시대 어느덧 우리는 인생의 과정에서 젊은 시절 교육과 구직을 위해서 부터 시작하여, 이혼, 사별 등의 이유로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번 그 이상 홀로 사는 시기를 '필연적'으로 경과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여전히 사회는 1인 이상의 다인 가족을 사회의 기본 단위로 작동하는데, 대세가 되어버린 1인 가구, 이 언밸러스한 사회 구성이 낳은 문제를 신년 벽두의 mbc 스페셜은 '한 끼'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미래에 알약 하나로 식사를 대신하는 날이 온다면 당연히 그것을 선택할 거예요” - 혼자 살기 5년 차 돌싱남 김성현

홀로 때우는 한 끼
'혼밥'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이와 관련된 내용의 드라마가 만들어 질 정도로 홀로 먹는 한 끼가 낯설지 않은 시대,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주말 부부 6년차인 강대문씨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에서는 바베큐 장인 포스를 지녔지만, 정작 홀로 돌아온 그의 숙소에서 그의 한끼는 맥주 한 캔과 약간의 견과류 안주이다. 그의 싱크대를 채운 것은 3분 즉석밥들. 그만이 아니다. 다큐가 따라간 1인 가구, 다수의 1인 가구들에게 식사란 한 끼 '때우는 것'이다. 라면 등의 인스턴트 식, 편의점 도시락이나, 시켜먹는 경우가 대부분인 1인 가구들, 홀로 음식을 해먹으려 장을 봐놨다가 버리는게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이들은 어느샌가, 고민스런 한 끼대신 '알약'을 소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렇게 때우는게 되어버린 1인 가구의 한 끼는 필연적으로 영양 불균형을 초래한다. 전국의 대부분 1인 가구주들은 2인 이상의 가구들에 비해 영양이 결핍되어 있거나, 불균형적인 것이다. 대세가 되어버린 1인 가구, 그들의 불균형적인 한 끼 식사, 이는 결국 전국민 건강의 적신호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나 혼자 먹고 산다>가 둘러보는 1인 가구의 한 끼는 이제는 국민 건강에 대한 우려이다. 



알약으로 대처했으면 좋겠다는 1인 가구의 영양 부족이나 결핍에 대한 대안을 위해 다큐는 여러가지 방식의 홀로 한 끼 식사 방안을 찾아본다. 

우선은 혼자서도 잘 해 먹는 방법, 서른 초반 이제 막 1인 가구 생활을 시작한 가구주는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엄마의 도움없이 홀로 된장찌개를 끓여본다. 하지만, 결과물은 홀로 식사라기엔 너무도 풍성한 서넛이 먹어도 남을 만한 양의 찌개. 과연 대안은 없을까? 일찌기 이십대 초반 홀로 살기 시작하여 서른 중반이 넘은 자취 생활 십 몇 년차에 이른 고수를 찾아가 본다. 오랜 자취 생활의 경험 끝에 '살기위해' 스스로 음식을 해먹기 시작했다는 고수는 근처 재래 시장을 활용한 한 사람의 먹거리에 걸맞는 장보기에서 부터, 있는 재료를 활용한 요리 팁, 그리고 마른 재료 등의 적절한 재료 찾기까지 유용한 팁들을 제시한다. 

“1인 가구에게 해물찜이란? 과도한 허세!” - 우야TV 애청자 조아연

이렇게 요리에 도전하는 1인 가구를 위한 손쉬운 팁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1인 가구의 증가로 인해 시장 판매의 저하로 고민하는 망원시장 상인들은 역시나 우야 tv라는 먹방을 주도하는 1인 가구 세 청년 셰프와 함께 먹거리 꾸러미를 준비한다. 시장에서 파는 신선한 재료들로 음식 쓰레기를 남길 여지도 없이 바로 조리해서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낸 덥밥, 찌개들의 소분 꾸러미. 이 덕분에 해물찜이란 1인 가구의 허세가 현실이 된다.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사는 법 
1인 독거 노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홀로 남은 남성 독거 노인을 위한 요리 교실을 운영한다. 시금치 다듬기, 콩나물 데치기 등 가장 기본적인 요리 방법을 가르쳐 준다. 여성 어르신들과 달리, 홀로 남겨진 남성 어르신들이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색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밥 해먹기가 번거로운 이들이라면 1인을 위한 식당을 찾아가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관악구의 한 식당은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신 인터폰을 눌러야 한다. 직원의 허가를 얻어 들어간 식당은 일반 식당과 달리 요리공간을 둘러싼 ㄷ자의 식탁이 삥 둘러싼 공간, 그 곳에서 홀로 식사하는 사람들은 일반 식당에서의 소외감없이 조용히 식사에만 집중할 수 있다. 연인조차도 나란히 앉아 사랑의 밀어를 자중해야 하는 처지다. 



조금 더 대안적 방식으로 등장한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알려진 소셜 다이닝이다. 금천구의 한 빌딩, 오로지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모인 열 댓명의 청년들은 풍성한 해물찜을 앞에 놓고 모처럼의 호사를 누린다. 한 끼의 호사만이 아니다. 일이 아니고서는 일주일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일이 별로 없는 1인 가구가 모처럼 가족처럼 속을 터놓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우리 사회 1인 가구의 한 끼 식사를 모색해 보던 다큐는 시선을 덴마크로 옮긴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가게, 우리 나라의 식료품 가게와 같은 곳이지만, 파는 방식이 다르다. 비누 한 개도 반으로 잘라 살 수 있는 곳, 모든 식재료가 유리 용기에 담겨 있어 필요한 만큼 살 수 있는 곳, 코펜하겐 과반수에 해당하는 1인 가구를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가게다. 심지어 장바구니를 가져오지 않으면 가게에 구비된 주머니에 물건을 담아갈 수 있는 곳, 1인 가구 = 인스턴트와 그 음식물 쓰레기로 대변되는 우리네 현실과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모습이다. 

소셜 다이닝이 승화된 형태도 등장한다. 90대 노인에서 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30명 15가구의 가족들이 어울려 사는 덴마크의 코하우징. 한 달에 한 두번 돌아오는 식사 당번, 매일 저녁 함께 하는 식사, 하지만 의무는 아닌, 자유롭지만, 함께 하는 덴마크의 삶의 방식을 이상으로 다큐는 궁핍한 우리의 홀로 한 끼 식사에 대한 탐험을 마무리한다. 

무엇보다 <나 혼자 먹고 산다>가 대세가 된 1인 가구, 그들의 식생활에 주목한 것은 그간 다큐가 우리 사회 주도적 생활 방식이 된 1인 가구에 대한 관심을 넘어선 시도이다.  또한 그들의 영양이 궁핍한 현실과 그 대안 마련을 위한 다양한 방법은 <나 혼자 산다>의 현실판으로, 또한 우리 시대의 현실에 대한 생생한 접근으로 새해 첫 다큐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by meditator 2017. 1. 3. 17:49

대기업의 독점적 과두 지배로 인한 '갑을 관계'등 제반 사회적 문제가 우리 사회를 짖누르다 못해 권력형 비리의 형태로 터져나오고 있는 이 즈음, 12월 5일에서 19일까지 3부작으로 찾아온 MBC 창사 특집 다큐 <미래인간 AI>는 시절을 모르는 한가로운 환타지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촛불 광장에서 회사 마크를 떼어냐 하는 처지의 MBC지만 창사 특집 <미래인간 AI>만큼은 '혜안'에 속한다. 우리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성큼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 혁명의 현실과 미래를 촉빠르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AI로 대변되는 4차 산업 혁명의 도래
AI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우선 최근 변화되고 있는 산업 환경이란 전제 조건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듯하다. 최근 변화되는 산업 환경이란 한 마디로 요약하면 4차 산업 혁명을 말한다. 18세기 '증기 기관'으로 상징되는 기계 공업과 공장제 노동 분업을 통한 대량 생산을 가능케한  1차 산업 혁명은 세계를 '근대'로 이끌었다. 이후 1870년을 기점으로 헨리 포드가 도입한 '컨베이어 벨트' 생산 체제로 상징되는 2차 산업 혁명은 영국을 중심으로 했던 산업 혁명을 미국 등 전세계로 그 영향력과 생산 능력을 확산시키며 자본주의를 업그레이드시켰다. 다시 1965년 컴퓨터와 로봇의 등장을 통한 IT 산업의 발전은 공장을 '기계화'시키며 더 많이, 더 빨리, 그리고 사람으로 인한 오류를 제거하며 3차 산업 혁명을 선도했다. 그리고 이제 <모던 타임즈> 속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다, 기계에 밀려나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인간의 지능을 위협하거나, 혹은 뛰어넘을 지도 모를 인공 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AI로 상징되는 4차 산업 혁명을 맞이하고 있다. 

2016년 다보스 포럼의 주제였던 AI, 과연 AI로 대변되는 4차 산업 혁명이 가져올 미래의 변화는 어떤 것일까? 천 억개의 신경 세포, 백 억개가 넘는 시냅스, 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피조물이라는 자부심이 무색하게 인간을 추월하고 있는 AI, 그 현실은 어떨까? MBC 창사 특집 다큐 <미래 인간 AI>는 AI로 변신한 프리젠터 배우 김명민을 등장시키며 AI의 도래를 체감시키며 다큐를 연다. 

인간을 모방한 AI, 하지만 어느덧 AI의 발전은 인간의 능력을 앞지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30여년간 암 사망율 1위였던 폐암, 무엇보다 조기 발견이 어려웠던 폐암의 조기 발견을 위해 1년간의 시스템 구축 끝에 영상 의학과 의사들도 판독하지 못한 폐암 병소를 AI는 발견해 낸다. 영국 마이크로 소프트의 프로그래머 사킵 사이머가 개발한 Seeing AI는 외양은 안경처럼 생겼지만, 누 눈 앞에 있는 사물, 글자의 판독 뿐만 아니라, 상대의 감정까지 알아맞추는 경지에 이른다. 

이처럼 인간을 빠르게 따라잡으며, 때로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기 시작한 AI, 과연 이런 '과학 기술적 발전'을 그저 '산업적 성과'라 기뻐만 할 수 있을까? 2부 노동의 미래에서는 AI의 발전이 가져올 노동의 종말을 진단한다. 



AI의 발전, 편리한 세상, 혹은 노동의 종말
AI의 발전은 인간 세상을 한결 더 편리하게 만든다. 연간 3천만개의 일회용품을 만드는 미국의 뱅가드 플라스틱 공장, 1년전 들여온 AI 덱스터가 일당 백의 능력치를 보이자, 다수 노동자들이 해고의 위협을 받게 된다. 2020년이면 일상화된 자동차의 자율 주행 기술 역시 운전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해고를 수반한다. 

노동직만이 아니다. 1억원대의 가상 금액을 두고 한 주식 모의 투자에서 노련한 증권가의 이사급 중진을 AI는 거뜬히 제친다. 미국 대선 등 중요한 빅 이벤트 등에 있어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엄청난 데이터를 가진 AI가 인간을 압도한다. 올해 세계 경제 포럼에서는 2020년까지 행정, 법률, 사무 직종의 '화이트 칼라' 직종 2/3이 사라질 것을 예견하고 있다. 불과 몇 년 남지 않은 시간, 하지만 그 옛날 인클루저 운동으로 도시로 쫓겨난 농민들처럼 인간 사회는 막연히 인간이 낫겠지라며 AI 발전에 대해 무방비하다. 

혹자는 산업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고기술직 직종이 등장하듯, 엄청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AI의 발전은 그와 관련된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겠냐고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자율 주행과 관련된 시스템의 발전 과정에서 등장한 것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른 채 구글 지도의 앱 구성을 위해 단순 계약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등장이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미래의 사회에서 핵심적 산업의 중추가 AI가 되고, 인간이 그 보조적, 수단적 단순 업무로 밀려날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다. 



양 날의 검, AI
물론 AI로 인해 사람들이 늘 몰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독거 노인의 고독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 가와하라 에이코 할머니를 찾아온 인형 크기의 말벗 로봇 파르미는 웃을 일이 없었던 할머니와 친구들에게 웃음을 찾아준다. 원자화된 인간 관계가 일상이 된 중국 청년들에게 찾아든 영화 <HER>의 현실판 챗봇 샤오빙은 어느덧 없어서는 안되는 여친이 되었다. 

문제는 바로 이렇게 끊어진 인간 들의 관계의 틈을 메워준 AI, 어느덧 핸드폰이 없이는 견디기 힘든 현실을 예로 들어 송길영 다음 소프트 부사장은, 문제는 AI에 의존도라 지적한다. 인간 대신 인간을 위로하는 AI, 옷까지 만들어 입히는 에이코 할머니, 식사 메뉴 하나까지도 공유하며 함께 영화 보기를 즐기는 짜오쑤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의존하는 AI가 방대한 데이테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의존도가 심해지고 고삐풀린 말처럼 가속도를 내고 있는 AI 개발과 관련하여 대두되고 있는 AI의 윤리와 도덕 문제이다. 실제 미국 터프츠 대학에서는 무조건 YES 맨이 아닌 부적절한 상황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윤리적 판단을 AI에 가르치려 하고 있다.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을 위해 급성 바이러스에 걸린 환자를 죽인 간호 AI, 그런 AI를 질책하는 인간의 비효율적 판단 능력을 거부하고 스스로 인간을 통제하겠다고 나설 가능성을 보여주며, '폭주하는 인공 지능'의 불운한 미래 역시, 발전하는 AI 산업의 결과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3부작의 다큐는 AI로 대변되는 4차 산업 혁명이 도달한 성과를 기반으로 서둘러 우리가 고민해야 할 AI로 상징되는 미래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세대 갈등이 무색하게, 도래할 AI로 인한 여러 직종에서의 실직이 예견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현재와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과 문제들을 현실적으로 짚어본 <미래 인간 AI>는 어수선한 시국과 무관하게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려는 이 즈음 적절한 선택이었다. 

by meditator 2016. 12. 20. 15:02

우리 말 감정의 영어 feeling은 '느끼다'는 동사의 행위를 나타내는 동명사이다. 즉 감정이란 거울처럼 우리 몸 혹은 우리 몸 밖의 것들을 '느껴'서 만들어 내는 마음의 형태들이라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의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상태이다. 대부분 우리 사회에서 아니 어느 사회에서나 '감정'은 개개인 고유의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한 집단 구성원들이 공통된 감정을 드러낸다면, 비슷한 정서의 상태를 공유하고 있다면? 그간 다큐 프라임을 만들어 온 제작진은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다수의 다큐를 만들면서 최근 대한민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불안'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현재의 대한민국을 '감정'을 통해 설명하는 <감정 시대> 5부작이 제작되었다. 

<감정 시대> 5부작의 관점은 개인의 감정은 사회와 맞닿아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사적, 주관적, 내면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온 감정,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그 개인은 물론, 그 개인의 감정조차 상품화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또한 여전히 권위적이고 집단적인 사회 체제는 그 속에서 개인을 품어주지 못한 채 개개인은 온전히 '감정'의 형태로 그 상흔을 부등켜 안고 살아가도록 만든다. '감정'을 통해 대한민국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 감정을 지배하다. 
5부작을 연 것은 '실직'이다. <을의 가족-가난의 대물림>은 원치않았던 실직에 봉착한 가장과 가장의 실직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IMF, 2016년 대규모 구조 조정을 겪고 있는 거제 조선소, 그리고 비정규직화 되어가는 서비스 직종의 종사자들을 통해 '실직'이 낳은 그리고 끝나지 않은 가족의 상흔을 들여다 본다. 

'어둠', '사망신고', '신기루', '무서움'이라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표현되는 실직, 하지만 문제는 사회적 안전판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가장의 실직이 이후 '을'로써 존재가 규정된 채 자식 세대에게 까지 대물림됨으로써, 그 실직의 상흔조차 대물림되고 있는 지점을 포작한다. 부모는 못나서 미안하다고 하고, 자식은 한 순간에 삶의 조건이 송두리채 빼앗겨 지는 공포로 부터 시작하여 미래가 불투명한 노력 세대가 되는 현실까지, 고스란히 그 공포와 불안을 대물림한다. 



실직이 상흔이라면, 2부는 감정조차도 상품이 된 자본주의 사회, 즉 감정 노동자들이다. 성희롱을 당하고, 욕설이 퍼부어지는 그 어떤 순간에도 '고객'이 우선이라는 '고객 만족'이 모토가 된 서비스 산업, 그 산업의 그늘에서 마트 노동자, 전화 상담원 들이 신음하고 있다. 사회면은 이런 문제를 '갑을 관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루고 있지만, 이런 감정 노동의 본질은 바로 서비스 산업의 핵심이 '인간 감정'이며, 그것을 자본이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소비자의 갑질이 아니라, 기업이 감정을 통제하고, 조직하고 조작하여 이윤을 확보하고자 하는 메뉴얼을 만든, 결국 드러나는 것은 '갑을 관계'이지만, 그 저변에는 기업이 진정한 갑이라는 본질을 다큐는 꼼꼼하게 짚는다. 1983년 앨리 러셀 혹실드의 <감정 노동 the managed heart>의 신노동주의 관점에서 이익을 위해 서비스 직종을 늘려 노동자의 자기 결정권조차 기계처럼 종속시키는 자본을 고발한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노동자'라는 질문에 부정적이거나 블루 칼라 노동자만이 노동자라 대답하다 스스로 의구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트 노동자의 질문처럼,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아이들은 '노동자'가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초중고 모두 노동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5시간을 넘지 못하는 우리 교과서는 '노동' 대신, 경영과 경제에 시선을 고정시켜 왜곡된 시각을 양산한다. 

사회, 그리고 국가가 지배한 감정
3부가 들여다 보는 것은 '아저씨', 그 중에서도 아저씨의 마음이다. 2016년 어느덧 마흔줄을 훌쩍 넘어선 이들, 경제 성장의 호황기의 열매로 성장했지만, 정작 그들이 '가장'이 된 지금 불황을 짊어진 채 하우스 푸어로 살아가는 현실을 온전히 혼자 감내해야 하는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이다. 

자영업자, 치과의사, 회사원 등 이른바 이 시대의 평범한 아저씨들, 그러나 감정 치유 전문가 앞에 내놓은 그들의 첫 마음은 놀랍게도 불안, 부담감, 자책에 공통적으로 귀결된다. 나는 어느덧 사라지고 가장으로서의 역할만이 그들의 전부가 된 이들, 그들은 스스로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내야 하는 것이란 중압감에, 그리고 정글같은 세상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곧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란 사회적 인식 속에 '슈드비(should be 해야만 하는)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여유를 갖지 못한 채 가장으로 몰린 이들 중, 결국 그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스스로 세상을 버린 이들이 있다. 바로 4부 <너무 이른 작별>의 가장들이다. 김명자씨(51)와 김혜정(51)의 남편 두 사람은 1년, 혹은 7년전에 경제적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자살을 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생명을 거두어 버린 남편의 뒤에 남겨진 아내와 가족은 그 '자살'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감정만큼이나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로 치부되고 있는 자살, 하지만 12년째 자살율 1위, 매일 37명이 자살을 하는 우리 사회 현실에서 자살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매일 자살하는 한 사람과 연결된 230여 명의 가족은 그 한 사람이 선택한 결과를 온전히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김혜정씨는 묻는다. 자살율 1위라는데, 도대체 주변에 그런 사람은 왜 없냐고? 즉 천주교 묘지에서 자살이유만으로 배척당하는 죽음, 사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을 죽은 후에조차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하물며 그 남은 가족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사람과의 제대로 된 이별은 커녕, 주변의 편견과 외면을 감당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하물며 자살도 이럴진대, 그 죽음이 사회적 죽음이라면 감정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이 시대의 트라우마, 세월호에서 남겨진 이들의 상처입은 감정이다. 아직도 아홉 명이 돌아오지 않은 세월호, 물 속에 잠긴 채 파면 팔 수록 의혹만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고, 친구들과 함께 그 배에 탑승했던 단원고 2학년 학생들 중 겨우 살아남은 학생들 중 네 친구의 현재를 통해 치유되지 않은 사회적 트라우마의 잔영을 들여다 본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 사회가 세월호를 두고 했던 말,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하지만 네 명의 학생들은 반문한다. 정말 잊지 않았냐고, 정말 기억하고 있냐고? 단원고에서 쫓겨난 열 한 개의 교실, 안산 교육 지청에 겨우 마련된 기억 교실, 대통령이 탄핵 심판대에 올라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었던 청와대 앞, 과연 우리 사회는 그간 무엇을 했는지 다큐는 묻는다. 

뿐만 아니라, 생존한 아이들을 만나면 사고의 기억만을 되묻는 사람들, 아이들은 왜 친구들을, 친구들의 빈자리를 물어봐 주지 않느냐고 한다. 아직도 친구들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아이들, 하지만 어른보다 더 어른스런 아이들은 말한다. 살아남은 친구들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먼저 간 친구들만이라도 좋게 생각해 주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박준혁 학생)



감정 시대, 상처입은 감정의 치유, 그 첫 걸음은?
시대가 억압하고, 자본이 조작하며, 사회가 짖눌러버린 감정, 그리고 그런 감정의 상흔에 불안에 떨며 고통받는 개인과 가족들, 이 낭자한 시대적 트라우마들 그 치유의 시발점은 어디가 되어야 할까?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수용하고,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귀한 사람인데 왜 그렇게 당하고 있을까? 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던 마트 노동자 이효숙 씨는 감정 노동자가 아닌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자신을 세우기 위해 2016년 메이 데이에 마트를 끌고 거리로 나섰다.

감정 노동을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후기 산업 사회 일반적 노동의 한 현상으로 바라보듯, 자신의 상흔을 사회화, 객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인 세상에서 대기업 서비스 센터 직원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급여를 위해 거리로 나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 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실직으로 인해 가족까지 고통을 겪은 가장과 가족들은 이제서야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 본다. 마흔 줄의 슈드비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아저씨들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고, 자신 속에 또아리를 튼 자신도 몰랐던 감정을 터논다. 마음이 어떠세요? 라는 질문에 당혹스러워하던 아저씨들이, 비로소 감정의 고삐를 푼다. 

미안하고, 원망스럽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자살 유족자들은 '심리 부검'을 통해 비로소 죽은 이의 마음을 헤아려 볼 여유를 가지게 된다. 버림받았단 고통, 남겨진 슬픔이란 자신의 무게 너머, 죽은 이를 이해할 여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살이란 족쇄로 인해 세상에 없는 존재들처럼 살아던 유가족들, 전 생애가 자살이란 단어로 규정되어 버린 죽은 이, 그런 사회적 편견을 넘어, 자살이라는 사건을 넘어 죽은 이를 추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세상으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이런 자살 유족자의 첫 발은, 조금 더 넓게 동심원을 그리며, 5부 세월호 살아남은 친구들의 속마음으로 이어진다. 죽은 자조차도 잊지 않겠습니다 하며 애써 잊고 폄하하려는 사회, 그 속에서 친구들조차 아직 보낼 수 없는 아이들, 그 누구에게도 쉽사리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던 아이들의 상처가 비로소 봉인 해제된다. 

물론, <감정 시대>의 전제가 개인의 감정은 사회와 맞닿아 있다고 하듯이, 여러가지 사회적 이유로 상처입은 개인들의 치유 역시,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거리로 나선 마트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해서는 우리의 사회 교과서가 노동을 정당하게 대접해야 하고, 비정규직이 가족을 공포에 떨지 않고 돌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인간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변화해야 한다. 아저씨들은 가장의 공포에서, 그리고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가족들이 그 고통속에 신음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가족이란 단위로 책임지우는 '경제적 부담'이 헐거워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탄핵이 발의되던 날 국회에서 통한의 눈물을 쏟던 세월호 가족들처럼 그날의 진실이 밝혀져야 제대로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결국 개인의 감정을 치유하는 건 사회요, 국가이다. 

by meditator 2016. 12. 14. 14:05

갱년기,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노년기 남녀의 내분비나 신체적, 정신적 변화 증후군'이라 정의내린다.(다음 백과) 혹은 좀더 구체적으로는 여성에게 있어 생리를 기준으로 생리가 없어지기 전후 '폐경기'의 1년간을 가르키기도 한다.(의학 용어 백과) 갱년기 쯤 여성의 몸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 찾아보면 십중팔구는 갱년기의 증상, 쉽게 말해 그 모든 게 다 '갱년기' 때문이다. 잠이 안오는 것도, 땀이 많이 나는 것도, 문득문득 우울해지는 것도, 심지어 발바닥이 아프거나, 온 몸이 쑤시는 것까지 갱년기 때문이니, 이쯤되면 만병통치? 아니 만병은 '갱년기'로 통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전에는 '생리'를 중심으로 여성만의 문제인 듯했지만, 최근들어서는 남성들에게도 '갱년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남녀 모두의 '증후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갱년기의 '갱'은 한자로 更, 다시 혹은 재차 , 고치다, 개선하다의 뜻을 가진다. 삶의 다시 살고, 고치거나 개선해서 살 수 있다는 뜻인데, 현실에서 갱년기를 맞이한 중년들은 마치 '삶'의 종착역에 도달한 듯 우울하다. 왜? 11일 밤 <sbs스페셜>이 그 이유와 해법에 주목한다. 

47세 박수홍, 눈물이 많아진 그를 보고 주변에선 '갱년기'란다.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발끈해보지만 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 <sbs스페셜- 중년의 사생활, 갱년기>에 등장한 그와 동년배의 남자들, 어째 박수홍 판박이다. 

갱년기 증후군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중년들
박수홍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 다큐는 그와 동갑내기인 정은영-송무석 씨 가정으로 시선을 옮긴다. 은영씨가 하이 소프라노로 중학생 아들을 깨우는 이 집의 아침, 은영 씨의 목소리는 전쟁의 서막이다. 그렇게 힘들게 아들을 깨워놓은 은영 씨, 그 순간부터 매 순간 '사춘기' 아들과 '갱년기' 엄마의 갈등이 시작된다. 중학생이 되면서 부터 '욱'하며 반항하는 아들, 그런 아들을 예전과 달리 '울화통'을 터트리는 엄마, 그 둘 사이에서 아빠와 작은 아들은 눈치보느라 바쁘다. 남편과 두 아들 뒤치닥거리에 살림살이, 거기다 부업으로 신발 꿰매는 일까지 하는 은영 씨의 하루는 24시간이 부족하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서 요즘 은영씨는 시도때도 없이 열이 오르고 땀을 뻘뻘 흘리는 갱년기에 시달린다. 몸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이라면 그나마 선풍기를 틀고 부채질을 하며 참을 수 있다. 아들과 싸우다, 잔소리하다 나도 모르게 불쑥 '이렇게 살려고 살아온 게 아닌데'하며 솟구쳐 오르는 서러움에 자기도 모르게 자꾸 눈물 바람을 한다. 그런데 눈물이 많아진 건 은영 씨 만이 아니다. 가장인 무석씨도 마찬가지다. 요즘 제일 재밌는 tv프로그램이 연속극이고, 그걸 보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설겆이를 하다말고 뜬금없이 '엄마가 보고싶'단다.



이 눈물이 흔해진 부부의 병명은 바로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갱년기', 다큐는 갱년기를 맞이한 정은영- 송무석, 윤정섭 부부와 그 친구들의 사연을 통해 갱년기의 증상에 접근한다. 윤정섭 씨 친구들의 모임, 흔히 중년 남자들의 모임에서 그러하듯 건강한 성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우스개로 편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전과 같지 않은 몸과 마음의 상태, 그리고 갱년기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진다. 특히나 다큐는 갱년기의 남자들에 주목한다. '울면 안돼'는 수컷의 사회 속에서 '갱년기'를 맞이한 남자들은 더 이상 남성답지 않고, 심지어 여성스러워져 가는 자신들의 변화에 당혹스럽다. 

그리고 이어진 이들 중년에 들어선 남녀들의 호르몬 검사, 그들의 호르몬은 그들의 변화를 고스란히 설명해 준다. 사춘기 아들이 보이는 '질풍노도'의 모습이 그의 몸에서 열 배 이상 분비되는 '남성 호르몬'으로 설명되어지듯이, 붉으락 푸르락 화를 잘 내는 은영씨의 증상은 여성 호르몬 에르트로겐을 비롯하여, 행복을 느끼도록 해주는 세로토닌 등의 급격한 감소로 설명된다.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급격하게 줄어든 남성 호르몬의 감소가 바로 그들 자신도 당혹스러워 하는 변화의 원인인 것이다. 고등학생이 된 아들들의 이해를 받는 윤정섭 씨의 아내가 상대적으로 갱년기 증상이 덜한 것과 달리, 사사건건 사춘기의 아들과 충돌이 잦은 정은영 씨의 호르몬 수치는 더욱 심각한 것으로 드러난다. 

호르몬 수치로 드러난 갱년기의 상태, 이렇게 다큐는 중년들에게서 나타나는 당혹스러운 변화를 '호르몬'이라는 불가항력의 신체적 변화를 통해 설명한다. 즉 나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여성중 14%만이 무사히 넘기는, 그리도 뜻밖에도 남성들 중 63.8% 경험하고 있는 증상의 원인을 짚는다. (이화여대 간호학부)

호르몬 만능주의를 넘어
하지만 '모든 게 다 호르몬 때문이었어'라는 식의 '모든 길은 호르몬'으로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갱년기 증상의 정도 차이가 '내재되어 있는 우울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크리스티안 노스럽 박사)이란 관점에서 접근한다. 은영 씨와 무석 씨 부부는 서로의 하루 생활을 지켜보며 그간 자신만 힘들게 살아왔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서로가 일상에 얼마나 지쳐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24시간이 부족해 동동거리는 아내의 모습에 남편은 눈물을 흘릴 뻔했다고 토로할 정도로. 또한 중년의 남자들은 사회와 가정의 '가장'이란 짐을 내려놓고 편하게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 마치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바탕 울어보기 모임처럼. 



그렇게 호르몬으로 설명되었던 갱년기는 호르몬이 아닌 각자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주어진 해법에 의해 점차 '호르몬' 수치조차 갱신되어져 가는 '기적'을 보인다. 인간의 노화를 결정하는 건 '호르몬'이지만 그 조차도 삶의 방식과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큐가 더욱 긍정적인 지점은 바로 '갱년기'의 '갱', 즉 새로 고쳐 사는 삶의 긍정성에 주목한 것이다. 실험에 통해 그저 나이듦, 그리고 더 이상 청춘이 아닌 갱년기의 우울한 면 뒤에 숨겨져 있는 장점을 찾아낸다. 젊은 청년들과의 실험에서 분명 갱년기의 중년들은 젊은이들보다 체력도, 순발력도 떨어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젊은이들보다 공간 지각력, 언어능력, 귀납적 추리 능력이 뛰어났다. 지난 60년간 미국 세로 연구소의 연구 결과이자, 짧은 시간이지만 다큐의 실험 결과이기도 하다. 즉, 청춘의 시대인 이 시대가 중년,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갱년기의 '더 이상 젊음이 아님'에만 주목하는 것과 달리, 그리고 의학적으로 호르몬의 부정적 수치라는 결과만이 아닌, 진짜로 그 옛날 마을을 이끌던 '어르신'의 존재 이유처럼, ;갱년기'는 그 각도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라고 다큐는 말한다. 그리고 실험을 통해 증명한다. 그간 집중했던 '성적 에너지' 대신, 새로이 쓸 수 있는 '지혜'에 주목한다면 갱년기 이후의 삶은 얼마든지 살만한 인생이 된다. 
by meditator 2016. 12. 12. 11:03

광장이 뜨겁다. 한 겨울의 추위도 비바람도 모여든 사람들의 열기를 식히지 못한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지만 꺼지기는 커녕, 갈수록 그 목소리는 커지고 열기는 뜨거워져만 간다. '하야'로 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하지만 과연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 청와대에서 떠날 것만을 바래서 모여들었을까? 유시민 작가가 작금의 사태가 그 한 사람과 그 한 사람을 등에 업은 배후 세력의 농단만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형광등이 백 개'운운했던 방조와 부역의 결과라 정의내렸듯이, 그 한 사람과 그 배후 세력으로 대변되는, 그리고 그들에게 부역하고 방조했던 무리들이 만들어낸 부조리한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울분과 분노때문이라는 것이 옳바른 해석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울분과 분노의 대상이 된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일까? 이에 sbs의 2016 창사 특집 대기획이 답한다. 바로 수저 계급주의라고. 




<최후의 제국(2012)>, <최후의 권력(2013)>, <바람의 학교(2015)> 등 '창사 특집'을 통해 신선한 다큐의 실험적 시도를 거듭했던 sbs가 2016년에 들고 돌아온 것은 <수저와 사다리>3부작이다. 

권력과 제국을 탐험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교육을 실험하기 위해 제주도에 학교를 지었던 그간의 시도에 비해 개그맨 김기리를 데리로 땅을 보러다니기 시작한 그 시작은 전작에 비해 소소해 보인다. 

수저 계급주의, 걷어차진 사다리를 논하다. 
이른바 처음으로 시도된다는 리얼 땅 버라이어티 전국에서 가장 싼 땅을 사서 땅부자가 되겠다는 제작진의 초대에 응한 김기리는 산넘고 물건너 자신의 발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제일 싼 땅을 향한다. 왜 이런 우스꽝스런 무리수를 두었을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초등학생 장래 희망으로 떠오른 '건물주'라는 직업(?)때문이다. 소득 상위 10%가 전체 부의 45%를 차지한 아시아에서 가장 소득이 불평등한 나라 대한민국, 95년 이래 가장 급격하게 불평등해진 나라, 그 이유 중 하나가 불평등한 '소유'로 부터 시작된다고 다큐는 말한다. 

대한민국이 100명의 마을이라면 그 중 72명은 손바닥만한 땅조차 없다. 땅을 가진 사람은 단 28명, 그중에서도 단 한 명에 해당하는 토지왕이 대한민국 땅의 55%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 땅은 증여와 상속을 통해 미성년을 불문하고 대물림되는 등 '세습 자본주의'를 굳힌다. 바로 이렇게 '사다리'가 걷어차진 대한민국의 현실을 리얼 땅 버라이어티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어디 소유뿐일까? 일을 해서 버는 돈보다, 돈이 돈을 버는 난라 대한민국이 그 불평등을 더한다. 그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은 '주인 의식만 있다면'을 외치는 국내 최대 치킨 프랜차이즈업체 사장님의 언더커버 보스 리얼리티이다. '닭'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사장님이 시급 백만 원을 받는 동안 아르바이트생들은 시급 7200원을 받고 있다. 그 중요한 일을 한다던 사장님이 하루 일하고 다리에 알이 배길 정도의 강도로. 그를 통해 다큐는 묻는다. 과연 7200원과 백만원의 차이를. 또한 프랜차이즈 대표 사장님이 해마다 늘어나는 사업체에 미소지을 때, imf로 회사를 짤리고 치킨 집을 개업한 또 다른 사장님은 배달인원을 둘 형편이 돼지 못해 홀로 닭튀기고 배달하느라 한겨울 동상에 화상에 상해투성이다. 과연 '주인 의식'만으로 이 다른 삶의 조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이렇게 1부에서 소유에의 불평등, 2부에서 임금 소득으로 인한 불평등을 짚어보던 다큐는 3부 <모두의 수저>를 통해  비로소 판을 벌였던 속내들 드러낸다. 정치인, 요트회사 사장, 변호사, 철거민, 싱어송라이터, 강사, 학생 등 각계 각층의 사람 8명이 모여 각자 뽑은 수저 계급에 따라 출발선이 다른 불공정 게임으로 3부가 열린다. 



불공정 게임으로 시도해본 '기본 소득' 실험 
1000만원으로 10개의 땅, 500만원으로 5개의 땅, 100만원으로 1개의 땅으로 시작된 게임, 주사위를 굴려 나온 지역을 지날 때마다 낸 땅의 주인이 거두어 들인 돈은 전반전이 끝나자, 빈익빈 부익부의 우리 사회 현실과 판박이가 된다. 1, 2부에서 다큐로 설명되었던 '불공정'한 사회가 게임을 통해 그 운용 원리가 드러나고 참여자들을 통해 적나라한 반응이 보여진다. 100만원이라는 돈으로 의욕적으로 살아보려는 흙수저들, 하지만 주사위를 던지면 던질 수록 빚이 늘어나것과 비례해 게임에의 의지도 상실해 간다. '노력'과 '주인 의식'만으로 해결될 길이 없는 구조를 불공정 게임은 단번에 설명해 내고만다. 

이어진 후반전 게임의 룰이 바뀐다. 건축비의 10%를 무조건 세금으로 걷고, 어느 정도 모여지면 그걸 골고루 나누어 주는 '기본 소득' 실험이 게임을 통해 등장한 것이다. 게임의 결과,  결국 가진 자의 것을 뺏어서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포퓰리즘' 운운하던 이준석의 반론과 달리, 게임이 끝난 후 가진 자 금수저의 재산은 줄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은수저의 재산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흙수저는 달라졌다. 저마다 주렁주렁 목에 걸었던 빚대신, 처음 받은 100만원을 유지하건, 그보다 조금 늘었건, 빚이 조금 남았건, 게임 자체를 자포자기하던 그런 분위기가 사라졌다. 누구 한 사람, 혹은 몇 명만 부자가 되는 대신, 모두가 조금씩 더 행복해 진 것이다. 

행복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다. 처음 건축비에서 10%를 거두어서 당혹스러워했던 참가자들은 세금이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늘어났지만, 그것이 게임의 룰이 되자, 자연스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금을 내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기본 소득'의 운용 원리와 그 필요성에 대해 저마다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시청자도 더불어. 

스위스에서 '기본 소득'에 대한 국민 투표를 한다고 하자, '붐'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한동안 '기본 소득'에 대해 백가쟁명식의 토론이 벌어졌다. 그리고 냄비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sbs 창사 특집 대기획은 그 화제속으로 사라진 기본 소득을 우리 사회에 걷어차버려진 사다리를 복구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물론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2005년 종합 부동산세는 강남에 사는 35.9%에게서 평균 2%의 세금을 거두는 부의 재분배를 시도했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2008년 mb 정부의 셀프 절세를 통해 부동산 정책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버렸다. 그리고 이 정부는 담배 한 갑의 세금을 강남 9억원짜리 집에 매긴 세금과 동일하게 매겼다. 

기본 소득 과연 스위스의 부결로 한 여름밤의 꿈으로 사라진 것인가? 핀란드는 내년부터 매달 70만원을 전국민에게 나누어주는 기본 소득 실험을 할 예정이다. 이미 하고 있는 곳도 있다. 석유 매장량이 풍부한 알래스카는 해마다 석유를 팔아 번 돈 중 일부를 알래스카 주민들에게 배당금의 형식으로 나누어 주고 있다. 나미비아 역시 기본 소득 제공으로 실업률과 빈곤율을 0%로 만들었다. 인도에서는 아동들이 정상 체중을 회복했고, 진학률이 높아졌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이재명 시장의 성남시가 시행하고 있는 청년 수당과 이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노인 수당 등이 모두 기본 소득의 일환이다. 언제나 그렇듯 복지에는 꼬릿말처럼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실제 핀란드 등에서는 풍족한 실업 수당으로 인해 1,2년씩 장기 실업으로 인한 높은 실업률이 골치거리다. 맞춤형 복지냐, 기본 소득이냐의 선택과 비용의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 결국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없는 사람들 배를 불리워 준다는 호혜성 시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 불공평이 그리도 문제일까? 3부에 걸친 다큐는 매회 '미친 짓'같은 시도를 보여준다. 시애틀의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 회사인 그래비티 페이먼츠의 댄 프라이스 사장은 스스로 110만 달러였던 자신의 연봉을 7만 달러로 낮추고, 직원들은 오히려 높였다. 그 결과 놀아웠다. 매출은 두 배로 늘었고, 이직율은 역대 최저가 되었으며, 만 통의 우수한 인력의 입사 지원서가 쇄도했다. 뿐만 아니라 연봉이 늘자 직원들은 너도 나도 아이를 가져 '베이비 붐'이 일어났다. 연봉만이 아니다. 디즈니의 손녀인 아비가일 디즈니는 뉴욕 상위 1%의 부호이다. 그녀는 뉴욕의 백만 장자 40여 명과 함께 자신들의 세금을 올려달라는 청원을 넣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아비가일 디즈니는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기 위한 필요 조건이라 답한다. 

이 이상적인 행위들, 하지만 3부 불공정 게임의 참가자의 말을 주목할 만 하다. 변호사인 참가자는 말한다. 민주주의도 한때 이상적인 제도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누구도 민주주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기본 소득도 마찬가지다. 성인 남녀 1000 명을 대상으로 기본 소득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찬성과 반대의 비율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본 소득을 위한 세금을 더 걷는 것에 대해 반대의 인원은 59.2%로 급격하게 늘어난다. 물론 거기엔 현실에서 보여지는바의 '부조리'에 대한 불신도 한 몫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2016 창사 대기획>이 벌인 불공정 게임의 의의가 짚어진다. 당위론으로서의 기본 소득이 아닌, 함께 실행해보고, 짚어보는 실험으로서의 기본 소득, 게임 전과 후 계급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달라졌다. 세금에 대한 거부감 대신 돌아오는 소득에 대한 환희가 빛났다. 당위가 실험을 통해 가능성으로 변화되는 시간, 바로 2016 창사 대기획의 소득이다. 

by meditator 2016. 11. 28. 17:40
일찍이 공자님은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고.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요즘 한참 '공부'를 해야 하는 청춘들에게 전해준다면 당장 읽던 책이 날라올 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사회에서 공부란 곧 밥벌이를 뜻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의 인생 충고 세 번째,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연봉 4만 달러가 될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그 교시에 충실한 공부이다. 일찌기 초등학생 시절부터 아이들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안타깝게도 연봉 4만 달러를 보장하지 않는 불경기로 인해 또 공부를 시작한다. 전공과 상관없이 각종 고시와 자격증을 따기위한. 이런 형편에 놓인 이들에게 공부는 즐거움이 아니라, 생존의 도구다. 그러니 절바감은 있을 지언정, 즐거움은 얼어죽을 놈의 소리다. 그러니 취직에 도우이 되지 않는 '문과'는 '문송합니다'가 되는 것이다.



죄송한 공부가 즐거운 공부가 되다. 
그런데 그 '죄송한' 문과 공부가 사회로 나오면 처지가 달라진다. '인문학 열풍'의 당당한 주역이 되는 것이다. 이 '공부'의 갭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를 위해서 장미 여관의 뇌가 순수한 남자 육중환이 나섰다. 최고의 성적 반에서 32등, 양치기를 즐겨했던 38년의 인생 동안 단언컨대 단 한 번도 공부를 해본적이 없는 그가 mbc스페셜-공부 중독의 프리젠터로 나섰다. 말이 프리젠터지 본의 아이게 읽어야 할 책을 받아든 육중완, 도무지 읽어도 읽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을 붙잡고 씨름하다 결국 책의 저자 유시민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리고 거기서 들은 뜻밖의 '풀밭론'

유시민은 묻는다. 과연 당신은 몇 평의 풀밭이 필요한 사람이냐고? 평생 세 평의 풀밭에 만족하는 토끼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초원이 필요한 사람인지 알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각자 사회적 경험을 쌓은 중년 이후의 사람들이 공부에 빠져든다. 직장인으로
승승장구하던 김승호씨는 퇴직 후 사회와 삶으로부터 고립된 선배들을 보며 찾아온 우울증을 공부로 치유했다. 주변에서는 '돈'이 되는 공부를 하라지만, 돈은 덜 되지언정 비어있던 삶을 채워준 공부에 충분히 만족한다고 답한다. 청도 농사꾼 김형표씨 부부는 농사일 하는 틈틈이 팟캐스트로 '공부'를 한다. 자식을 키우고, 손주까지 키우워 낸 후 노년의 허탈함을 7순이 넘은 나이에 뒤늦게 들어간 방송 통신대학 공부로 달랜다. 가정 대신 공부를 택한 남편이 괘씸했던 아내도 이젠 남편 못지 않은 과학 매니아가 되었다. 아이를 낳은 후 복직한 직장에서 권고 사직을 당한 후 세상에서 밀려난 소외감을 '힐링' 시켜준 것도 공부다. 



공부가 즐거운 사람들
중년 이후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고자 시작한 공부는 이제 '도끼 자루 썪는 줄' 모르는 늦바람이 되었다. 그 골치앞은 과학을 배우는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의 회원은 6000명을 넘어섰다. 몽골로 떠난 학습 탐사, 이들은 털털거리는 버스에서도 촌음을 아껴 공부에 빠져든다.  꼭 책으로 하는 공부만이 아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등의 공부 관련 팟캐스트가 6000개가 넘었다. 구청, 도서관에서 열리는 교양 강좌가 가득차고, 도서관에는 취업 준비를 하는 젊은이들과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들이 자리 경쟁을 한다. 이렇게 '밥벌이'가 되지 않는 공부를 하며, 어른들은 비로소 '공부가' 재밌어 졌다고 한다. 허무했던 중년 이후의 삶이 충만해 졌다고 한다. 



책 한 장을 넘기기 힘들어 했던 육중완도 달라졌다. '공부'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공부'의 재미를 알 수 있는 사회, 이 '아이러니한' 공부 중독은 '성장주의' 한국 사회가 낳은 기현상이다. 즐겁지 않은 공부를 강요하는 사회, 그래서 공부의 즐거움을 놓치는 사회, 뒤늦게 공부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사회. 다큐는 늦바람난 중년 이후의 공부를 '보람'되게 그려냈지만, 그 재미진 공부 중독 이면의 씁쓸한 사회는 쉬이 가려지지 않는다.
by meditator 2016. 11. 8. 1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