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탔다. 운전하시는 분이 틀어놓은 방송에서 최근 청년들의 동향에 대한 리포터가 나온다. 말인즉, 직장에 들어간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젊은이들이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현실이 녹록하지 않지, 라고 생각을 잇는데, 웬걸, 리포터의 해석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 리포터의 해석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이 직장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때려치는 게 너도 나도 창업을 하려는 트렌드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러 창업을 도와주는 시스템이 배려로(?) 직장 생활에 안주하는 대신, 젊음을 무기로 '도전'하려는 의지가, 바로 젊은이들의 잦은 퇴직 이유라는 이 얼토당토않은 분노까지 느껴졌다. 왜 분노하냐고? 6월 19일, <sbs스페셜-2016 사장님의 눈물>에 그 답이 있다. 




6월 19일 <sbs스페셜>의 소 제목이 2016 사장님의 눈물인 이유는 이미 2012년 동일한 제목의 다큐가 방영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2012년 7월 1일 방영된 298회 <sbs스페셜>은 <사장님의 눈물>의 부제는 '벼랑 끝에서 나를 찾다'였다. 2012년 당시 한 해 폐업자 수 85만 명 한때는 사장님이었다가, 대기업의 횡포로, 지인의 배신으로, 금융 위기로, 이젠 신용불량자로 전락하여 자신의 핸드폰조차 가질 수 없고,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가족들에게 조차 외면당한 중소기업 사장님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경남 통영의 죽도라는 외로운 섬 '재기 중소 기업인 수련원'에 모여 한 달간 합숙을 하며, 세상 밖으로 다시 한번 나아갈 '의지'를 다졌다. '눈물'로 삶의 의지를 되찾은 사장님들, 그들이 나아간 세상은 달라졌을까? 

2016, 더 열악해진 사장님들의 현실
2016년 다시 돌아온 <사장님의 눈물>이 다루고 있는 것은 '자영업자' 사장님들이다. 2015년 기준 우리나라 자영업자 수 556만 명, 경제활동 인구 2695만명 중 실업자를 제외하면, 4~5명 중 한 명이 '자영업자'라는 것이요, 이들의 부양인구까지 따지면 우리나라 인구 중 2천만 명 가까이가 자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렇게 인구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자영업자'들, 하지만 그들의 속사정은 열악하다. 최근 자영업자들 사이에서는 imf 때보다 현재가 더 어렵다는 토로가 나온다고 한다. 그 'imf'보다 더 어렵다는 자영업자들, 그들의 현실을 '요식업계의 자업업자'들의 실상을 통해 알아본다. 

'더럽고 치사한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다 한번쯤은 그런 꿈을 꾸어본다. 차라리 이럴 노력으로 나가서 내 장사를 하는가 낫지 않을까?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직장에 내 인생을 바치느니 차라리 일찌감치 내 사업을 하는게 낫지 않을까? 요식업 종사자들은 말한다. 남보기엔 접근성이 쉬워보이는 요식업, 하지만 막상 들어와 보면 '헬'이라고.



그 '헬'의요식업계를 증명하기 위해 sbs스페셜이 시선을 돌린 곳은 주방 철거업체, 시쳇말로 요즘 가장 잘 되는 곳이 '철거업체'라더니, 그 말이 빈 말이 아니듯, 주방 철거업체 사장님은 서울로, 지방으로 하루에 서너 곳, '이 사업을 시작한 뒤'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사업이 잘 될 수록, 사장님은 '착잡하다'. 그 사업의 호황 뒤에는 자신과 같은 '사장님'들의 좌절과 절망이 있기 때문이다. 

2016 대한민국에서 요식업이 망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그 중에서도 우선 무엇보다 장사가 안된다. 556만의 자영업자의 상당 수가 종사하는 요식업의 범람도 빼놓을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위해 주머니를 열어 줄 대한민국 사람들의 지갑이 얇아졌다. 직장 생활을 하다 정년 퇴직한 아버지와 갓 태어날 아이를 위해 패밀리 레스토랑을 연 사장님, 대출까지 받아 무리해서 개업한 가게를 지키기 위해 '이석증'이 생겨가면서도 단 한 순간도 '불성실'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 그의 가게는 600만원을 들인 후드 설비가 단 몇 백만 원으로 퉁쳐지는 폐업 상가일 뿐이다. 대신 하루 종일 주차장을 보며 손님을 기다리는 지옥같은 기다림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손님을 기다리는게 어디 그의 일일뿐일까? 장사를 한 지 22년, 한때는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 무공해 대통밥집으로 유명했었다. 하지만 방송에서도 소개되었던 '착한 식당'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출근할 때마다 사장님이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직원을 내보내며 허리띠를 졸라보아도 하루 채 두 테이블도 채워지지 않는 손님을 억지로 끌고 올 수는 없다. 

이 사례를 통해 알수 있는 것은, 그저 '장사가 안되는' 것이 몇몇 특수한 식당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가는 분석한다. imf 때보다도 더 살기 어려워진 대한민국, 그래서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맨다고, 현실의 존재가 불안한 2,30대는 물론이고, 그 중에서도 4~50대의 그나마 경제적 여력을 가진 계층조차 앞날의 불투명함으로 지갑을 닫고,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이 바로 '외식비', 곧 요식업계라는 것이다. 



장사가 잘 되도 망하고, 안되도 망하고 
경기 탓만도 아니다. 이미 여러 다큐를 통해 빈번하게 '고발'되었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도심에 가까운 낙후 지역에 고급 상업 및 주거지역이 새로 형성되면서 원래의 거주자들은 다른 지역으로 쫓겨나게 된다.) 또한 피해갈 수 없는 자영업자의 늪이다. 가로수길에서 인기있는 곱창집 사장님은 같은 건물에서 두번 째로 쫓겨날 위기에 놓여있다. 가게가 위치한 골목에서 제일 장사가 잘되는 집으로 소문난 가게, 바뀐 건물주는 자신이 장사를 하겠다면 곱창집을 내쫓으려 했다. 겨우겨우 설득하여 지하로 가게를 옮겼지만, 3년만에 건물주는 계속 장사를 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제 집행'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니, 장사가 잘 되는 것은 오히려 '사장님'에게는 독이다. 홍대 앞 젠트리피켘이션으로 인해 활성화가 된 상수동 골목, 여기도 이젠 골목의 활성화가 가게 사장님들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상수동 활성화의 기폭제가 된 '양고기 집', 양고기집 팬 후드 전깃줄까지 자르며 압박하는 건물주의 압박에 사장님은 불가항력이다. 

장사가 안되면 안되서 내몰리고, 잘되면 잘되서 내몰리는 2016 대한민국의 요식업 사장님들, 하지만, 그들의 '죽겠는' 속사정과 달리, 밖에서 보는 그럴 듯한 '요식업' 자영업에는 여전히 또 다른 '사장님 후보자'들이 몰린다. 서울시의 경우 개업을 한 식당의 10곳 중 6곳이 일년 안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빛을 내서라도 장사를 하겠다고 뛰어드는 사람들은 많고. 그런 사람들에게 요식업 사장님들의 유일한 충고, '장사를 하지 마세요'다.  

sbs스페셜은 2012년에 이어, 2016년 사장님의 눈물을 통해 우리 사회 중소기업, 자영업자들의 현실을 분석한다. 그래도 2012년에는 '재활'의 가능성이 열렸던 사장님들은 이제, 그의 부양가족과 함께,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할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이, 바로 2016의 결론이다. 중소기업도 안되고, 자영업도 안되고, 도대체 대한민국에서 가장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by meditator 2016. 6. 20. 12:11

내가 사는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거리에서 외로 돌아들어가야 한다. 집앞에는 센서가 켜지지만 그 센서가 켜질 때까지 다만 몇 미터의 거리는 늘 어둡다. 늦은 밤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 그날따라 방심했던 나는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남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남자'도 나를 보고 놀란 듯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언제라도 다른 의미로 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후론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언제나 핸드폰의 손전등을 밝히고, 시끄러운 벨소리가 울리는 앱을 준비하곤 한다. '성적 정체성'을 운운하기에도 민망한 나이가 된 이즈음도 여전히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약자'의 본능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동안 '여성'으로서 학습되어온 '본능적 두려움'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분출된 여성들의 분노, 그 이유는?
6월 7일 <pd 수첩>은 5월 19일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 수면 위로 올라온 '여성 혐오' 문제를 다룬다. 살인 사건을 계기로 '강남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조명한 다큐는 강남역 10번 출구를 가득 메운 포스트 잇에 드러난 '여성들의 공포'를 통해, 이 일련의 현상이 '여성 혐오'냐 아니냐가 아니라, 왜 이런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반응을 보이는가의 문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즉, 강남역에서 죽어간 그 여성이 특별한 '그녀'가 아니라, 우리 사회 여성 그 '모두'가 될 수 있다는데서 오는 '공포'와 '분노'라는 점에 촛점을 맞춘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 살해) 유형의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고 다큐는 밝힌다. 그리고 그 전형적인 예로 부산 도심에서 벌어진 묻지마 폭행을 전형적인 예로 제시한다. 조현병으로 인한 장애 3급의 남성 부산 도심에서 거리의 가로수 지지대를 뽑아 거리를 가는 노년의 여성과 20대 여성을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다. 실제 범죄자 분포수를 보면 정신 장애를 가진 범죄자는 2.6%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병으로 인해 자아가 취약하고 그로 인해 사회적 편견이나 관습에 취약, 쉽게 그런 인식들을 내재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즉, '당연히 맞을 짓을 한거지', '자업자득'이라는 부산 도심 폭행범이나,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장애가 되었다'는 강남역 살인 사건 가해자의 의식은 우리 사회가 가진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내재화한 전형적 예로, 이들의 망상은 '사회적 맥락'을 가진다고 밝힌다. 

우리 나라는 세계적으로 치안이 잘 구비되어 있는 국가에 속한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이 되면 그 양상은 달라진다. 강력 범죄를 저지르는 95%이상이 남성인 반면, 피해자의 84.7%가 여성이라는 통계는 여성이 얼마나 범죄에 취약한가를 드러낸다. 더구나 최근 해를 거듭할 수록 여성 범죄에 대한 불안감은 늘어나, 2014년에 이르면 70%에 육박한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일상적이다. 여성 폭력 범죄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락산' 등산로에서 발생산 살인사건처럼 범죄가 발생되는 장소가 삶의 근거지나, 길거리, 그리고 일상적으로 방문하는 장소등이어서 여성들의 공포는 커진다. 

범죄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남성들이 공감할 수 없는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의 근원은 남성과 여성이 일대일로 맞섰을 때 여성이 느끼는 신체적 불리함에 근본적으로 기인한다고. 또한 성폭행이라는 또 하나의 요소가 여성들을 수세적으로 만든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런 신체적 불리함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에게 폭력을 가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이수정 경기대 범죄 심리학과 교수)라는 문화라는 것을 다큐는 짚는다. 즉,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충분히 많은 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생활 방식이라고 부른다'(단편<체체파리의 비법 > 중)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표현처럼. 

거기엔 사회가 불안해지면 사회적 약자가 더 약자에게 불안을 투사하는 사회적 심리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런 범죄로 야기된다고 덧붙인다. 즉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아니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났을 뿐 성별이 불평등하고, 인종차별적이며, 성소수자에게 '관용'이라고는 없는 '차별 사회'라는 것이다. 

여성 혐오 범죄? 사회적 가치를 도발한 테러로 간주해야 
이에 범죄학자는 여성을 대상으로 백주대낮에 벌어지는 이러한 일련의 '여성 혐오성' 범죄들을 그저 대상이 '여성'이라는 특수한 범죄로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공동의 가치관을 가진 우리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도발한 '테러'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력하게 일벌백계를 해야할 뿐만 아니라, 사회로 부터 완전격리를 시키는 등 범죄에 대한 경고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같은 성범죄에 대해 미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처벌은 너무 가볍다는 것이다. 이는 그저 범죄의 처벌 방식이 아니라, 그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다큐는 짚는다. 뿐만 아니라, 훈방 등으로 풀려난 가벼운 경범죄자에 대한 사회 복귀, 융화 프로그램도 철저히 실행하여 재범을 방지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최근 벌어진 신안군 성폭력 사건의 범인이 알고보니 대전에서 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었듯이, '사후 약방문'의 현 범죄 예방 프로그램의 허상을 놓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수요자 중심의 치안 활동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망된다고 다큐는 나아간다. 2013년부터 실시된 여성 안심 귀가길 프로젝트는 실제 위기 대응에 있어 취약한 점을 밝히고, 그저 cctv 설치나, 남녀 화장실 분리 등 물리적 해결만으로 이런 구조적 성차별이 해결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다큐가 결론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 뿌리깊은 성차별을 해소할 '차별 금지법'이다. 이미 선진 각국에서 통과된 이 차별 금지법이 번번히 국회라는 문턱을 넘지 못한 채 보수 기독교 단체의 반대에 따라 2013년 또 다시 철회된 현실은 곧 우리 사회 차별적 문화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성폭력으로 죽어간 여성을 위해 이탈리아 사람들은 붉은 천 달기 운동을 벌였지만, 자신들이 느끼는 공포를 드러낸 대한민국의 강남역 추모 물결은 '여혐'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괴리는 곧 한국 양성 평등의 위치를 드러낸다. 

그래서 여성은 물론, 사회적 약자 전반을 보호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없는 차별을 금지, 예방하고 불합리한 차별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기본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채 계류중인 이 법안의 통과는 우리 사회 양성 평등 문화의 제도적 안착을 위한 첫 삽이 된다고 다큐는 말한다. 또한 계류 중인 스토킹 방지법 역시 서둘러 통과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숱한 미디어는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이 사건과 관련된 입장을 밝히고 그 맥락을 분석하고자 한다. 6월 7일 <pd수첩>이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런 일련의 흐름을 시의적절하게 반영하고, 그런 현상을 그저 '여혐이냐 아니냐' 논란을 넘어, 우리 사회에 잠재된 불평등 문화와 제도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차별 금지법'과 스토킹 방지법'이라는 충분히 제도적으로 불평등을 보완할 수 있는 법에 대한 제고를 결론으로 냈다는 점에서 백가쟁명식의 토론에서 한 발 나선 모습으로 보인다. 또한,언제나 사건이 일어나면 가쉽성으로 사건을 부풀리는  '만취녀, 부킹녀' 등 언론들의 피해자 귀책 프레임에 대한 언론의 자기 반성도 놓치지 않는다. 

by meditator 2016. 6. 8. 16:29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의 제 1조 1항이다.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래서 헌법은 이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라고 밝힌다. 특히나 '혁명'에 비례할 만한 변화를 낳은 4.13 총선을 통해 '투표'를 통한 국민의 주권 행사는 더더욱 피부에 와닿는다. 바로 이런 시점, ebs는 야심차게 <민주주의> 5부작을 선보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잘 몰랐던 민주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규정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시대, 민주주의의 방향을 짚어보고자 한다. 




1부 시민의 권력 의지
경제가 정치를 규정하는 21세기, 다시 민주주의를 복기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데이비드 이스턴의 신선한 정의로 부터 시작된다. 즉 우리가 익히 알고 배워왔던 '민주주의'와 관련된 제 개념이 새롭게 해석 시도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민주주의 기원이 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병사로서 그 중요성을 부여받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힘을 배경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이 된다. 또한 애초에 재산에 따라 제한이 주어졌던 선거권이 성장하는 노동자 계층을 배경으로 '좋은 외투, 좋은 모자를 쓰고 온 가족이 번듯한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권리'로써의 '보통 선거권'이 재조명된다.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듯 삶과 분리된 슬로건인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자원 배분'과 관련된 국민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고 민주주의의 역사는 증명한다. 즉 똑같이 가뭄과 기근에 시달린 아프리카의 두 국가 에티오피아와 보츠와나의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가에 따라, 자원의 평등한 배분을 하는가에 따라 100만영이 굶어 죽느냐 마느냐로 귀결된다고 다큐는 설득한다. 

2부 민주주의의 엔진, 갈등
정치에 대해 회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맨날 지들끼지 치고 박고 싸움박질 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바로 이 '치고 박고 싸움박질 하는' 갈등, 이를 <민주주의> 2부에선 오히려 '민주주의의 엔진'이라 정의내리며 편견의 재해석하고자 한다. 

즉 민주주의란 지들끼리 싸움박질 하는 것이 아니라, 교실에서 학생들끼리 치고받는 식의 사적 갈등을 정부나 정치 지도자라는 공적 주체를 통해 공적으로 해결하는 갈등의 사회화 과정이라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정부는 갈등을 억압하지만, 민주주의적 질서는 갈등을 인정하고 드러내어 해결하려 애쓰며, 그 분화구가 되는 것이 바로 '선거'라고 다큐는 규정한다. 

그래서 정당은 수많은 갈등 중 대표적인 갈등을 묶거나, 기존의 갈등을 새로운 정치 쟁점으로 변화시켜 갈등을 조직하여 투표를 통해 그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1980년대 레이건은 뉴딜 정책의 상징적 장소인 미시시피 카운티에서 공식 선거 운동을 시작하며 '인종주의'와 기독교 원리 주의'를 활용하여 '퍼주기식 복지'에 반대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첫 발을 내딛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민주 vs. 반민주로 대립각을 이루었던 정치적 쟁점은 민주주의를 원치않는 집단이 의도적으로 프레이밍한 호남 vs. 비호남의 정치 갈등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호남 vs. 비호남의 갈등 구조에서도 보여지듯 오늘날 선거는 '계급 배반 투표'라는 새로운 양상에 도전을 받는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계급 이해와 다른 투표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 조사 결과 미국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 지지층을 살펴보니 계급 배반 투표는 없었다. 심지어 고소득층의 공화당 지지는 확고하여, 계급 이해에 더 충실했음이 드러났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드러나는 세대별 성향 차이는 세대 별 시대 경험과 맞물리며, 특히 신자유시대의 파고를 고스란히 겪어낸 유권자의 목소리가 세대 갈등으로 나타날 뿐 결국 1920년대 좌우 대결 이후 계층간의 분열은 여전히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정치적 갈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다큐는 증명해 낸다. 



3부 민주주의가 우선한다. 
헌법 119조 2항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 경제 및 안정과 적절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며, 시장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 를 위하여 경제 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누가 이 조항을 넣었는가를 둘러싸고 논란을 빚은 헌법의 이 조항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개정된 헌법의 내용이다. 하지만, 헌법의 조항과 달리, 현재 전 세계는 불평등이라는 세계적 현상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금전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된 옥스퍼드 법대생, 이는 영국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 명문대 재학생 중 상위층이 74%인 반면, 최하위층은 3%에 불과하다. 한국 역시 2009년 기준 역시 명문대 재학 생 중 하위층은 14%인 반면, 최상위층은 64%나 된다. 전 세계적으로 상위 1%의 부가 하위 99%의 부를 넘어서는 시대다. 교육 불평등은 다시 소득 불평등을 낳고 이는 정치, 사회적 문제와 적대감을 야기하며 민주 사회의 위협 요소가 된다. 

불평등의 세계적 현상을 토마 피케티는 자본 수익율을 통해 분석해 낸다. 즉 경제 성장률이 1700년대의 0.1%에서 2013년 3%로 성장하는 동안, 자본 수익율은 항상 4~5%를 넘나들었다. 즉 자본 수익율이 경제 성장률을 앞지르는 비율만큼 부는 편중된다는 것이다.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로 자본주의는 정착되게 되었다. 평균 4%의 성장을 보였던 1940년대에서 8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 전쟁을 경험한 인류는 경제적 불평등 앞에 정부라는 조직화된 권력에 힘을 부여하며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의 집권으로 시작된 신자유즈의 정부는 통제하지 않는 정부라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전세계적 불평등의 심화를 낳았다. 자본에 전적으로 특권을 부여하는, 민주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해방하려는 2차 자본주의 혁명의 시도는 결국 고삐풀린 자본과 정체된 경제 성장과 복지의 파괴로 실패했다. 결국, 그래서 다시 '민주주의'인 것이다. 

4부 기업과 민주주의 
그렇다면 오늘날 불평등의 주범이 된 자본주의, 그리고 그 주체인 기업, 그 존재는 민주주의에서 어떤 위상을 가질까? 2011년 미 대선에서 밋 롬니 후보가 내세운 슬로건 '기업이 곧 사람이다'는 기업의 위상과 관련된 논쟁을 낳았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토지와 노동의 주인이 되는 자영농 중심의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실제 당시 미국 시민의 60%가 자영업자여서 제퍼슨의 이상은 현실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사회는 변화되었다. 60%이던 자영업자는 12%로 줄었고, 대신 당시 임금 노예에 해당하는 노동자가 54%로 늘어난 것이다. 즉 기업에 소속된 노동자가 다수가 된 현대, 시민이 자본의 통제를 받는 사회, 과연 기업에게 사람처럼 '자유를 부여해야 할 것인가가 오늘날의 과제가 된다.

더구나 2010년 미 연방 대법원은 기업의 선거 자금 지원을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허용했지만 지난 30년간 최상위 계층 1%의 정치 자금이 15%에서 41%로 늘어나는 현실에서 과연 이런 자본의 막대한 돈을 지원받은 정부가 모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론이 지배적이다. 뿐만 아니라 기업의 존재 자체도 문제가 된다. 기업은 주주 자본주의라 하여 기업의 주식을 산 주주의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그 활동을 하는데, 실제 기업을 일구고 위기에 기업을 책임지는 직원의 이익에 배제하거나, 오히려 주주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복지와 고용에 반하는 방식으로 존재론적 이율 배반을 실현한다. 

즉 정치의 외부에서 정치 자금의 형태로 정치에 영향력을 끼치는가 하면, 정치의 단위인 시민을 고용을 통해 내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주는 기업에 대한 문제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가진 최대의 고민으로 귀결된다. 



5부 민주주의의 미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라는 막연한 경구로써의 민주주의를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춰 재해석 해냈던 5부작 민주주의, 결국 다큐는 오늘날 불평등을 낳은 압도적 자본의 힘에 맞서 국가와 시민의 힘을 재규정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과제가 귀착된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주의의 미래는 어떨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노엄 촘스키, 아마티아 센, 쉐보로브스키, 존 던, 토마스 프리그먼, 리처드 프리먼 등의 석학들의 고견을 인터뷰한다. 민주주의는 이제 쓸데없는 흔적 기관이라고도 평가되는 시대, 즉 무대 뒤편에서 기업과 부유층이 조정하는 시대 민주주의 무대는 현실감을 잃어가는데, 과연 여전히 민주주의는 유효할까? 소득의 재분재를 둘러싼 부의 재분배의 결정권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의 귀결점은? 뿐만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비민주적 권력으로 관료주의의 대두와 그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잠식, 그리고 선출된 권력 사이의 불평등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이 낳은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환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학들은 민주주의를 대체할 체제는 아직 없다고 입을 모은다. 유일하게 민주주의는 투표를 통해 정부를 해고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인 점을 강조한다. 인구의 증가와 함께 정치와 사람들의 연결 고리는 약화되고, 그래서 실제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는 설득력은 저하되며, 기업의 업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피해의 당사자인 더 많은 하층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그 결과 사유재산과 금융 시장을 정부가 규제하는 틀을 마련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선점해 버린 현재의 민주주의의 위기는 희망을 가진다고 당연하지만,  엄정한 결론이다. 결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다. 
by meditator 2016. 6. 5. 22:13

조선시대 도구 중에는 매화틀라는 것이 있다. 바로 임금님의 '똥'을 담아낸 기구이다. 이 기구에 담긴 똥은 바로 뒷간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의원들에게로 가져가 의원들이 똥의 모양과 냄새를 통해 임금님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대장 내시경의 조선시대 버전이랄까? 그러나 6월 첫 날 방영된 < ebs다큐 프라임-당신의 대변은 안녕하십니까>는 그런 '진단'의 수준을 넘어선다. 바로 현대 의학으로 치유할 수 없는 아토피, 알레르기에서부터 슈퍼 박테리아로 인한 크론병까지 치유의 방법을 '똥'으로부터 찾고, '똥;의 변화를 통해 고치고자 한다. '의원'이 된 '뒷간'이랄까?





불치의 현대병, 그 해법은 '똥"?
현대 의학으로 치료될 수 없는 불치병들 답게, 다큐에는 오랫동안 일상 생활을 못할 정도로 각종 병으로 고통 받아온 환자들이 등장한다.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대학 병원 30년째 슈퍼 박테리아 씨디피실리균으로 인한 크론 병으로 인한 설사와 복통으로 30여년 째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환자가 있다. 한국에는 역시나 크론병으로 학교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해 휴학을 하고만 16세 지원이가 있다. 각종 항생제와 약이 이들에게는 백약이 무효다. 
그런가하면 엄마들이라면 공감할 전신의 소아 아토피로 고생하는 소윤이가 있다. 온몸이 간지러워 단 몇 분도 잠을 못 자는 날도 있는 소윤이는 동시에 변비로 고생을 하고 있다. 과민성 대장 증상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려 사회 생활이 편치 않은 조진철씨가 있는가 하면 일주일이 되도 화장실에 가기 힘든 남유주씨도 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들의 '똥'을 검사해 봤다. 검사 결과, 이들의 똥에는 이른바 좋은 세균이 현저히 적거나, 나쁜 세균 천지였다. 



세균이 왜? 우리 몸 전체에는 100조의 미생물, 세균이 산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똥은 수분을 제외하고 나면 반 이상이 세균인 세균 덩어리이다. 한 마디로 똥은 세균에게는 아마존 밀림이다. 정상적인 인간의 몸이라면 500여 종의 세균이 똥에서 발견되어야 정상일 정도다. 

그런데 검사 결과 크론병을 앓고 있는 지원이는 좋은 세균은 없고 나쁜 균인 클로스트로늄이 장악을 했다. 아토피를 앓는 소윤이는 몸 속에 균이 거의 없다. 과민성 장 증후군 조민철씨나 남유주씨도 나쁜 균이 많다. 또한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대부분 장내 균의 생태계가 단조롭다는 것이다. 

그간 인류의 의학은 치유할 수 없는 병의 비밀을 풀기 위해 인간 유전자의 비밀 지도를 해독하는데 골몰했다. 하지만 나날이 급증하는 현대병들은 인간 유전자의 해독만으론 역부족이었다. 다큐에서는 한 사람으로 등장했지만, 현대병이라 지칭되는 이들 병의 증가는 폭발적이다. 

                                       2008년           2010년       
   크론 병과 같은 염증성 장질환   1만2334          1만 8332       30%증가
               만성 변비             48만              61만            30% 증가
        과민성 대장 질환자          149 만             155만         32% 증가 



현대인들은 '깨끗한 환경', 그리고 '결벽'에 가까운 습관, 거기에 더해 서구화된 식습관, 항생제 남용 등으로 인해 깨끗해진 장을 가지게 되었다. 즉 장내 생태계가 현대인의 생활 습관과 잘못된 약 남용으로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장내 세균이 급속하게 사라지고, 천식, 알레르기 등의 자가 면역 질환과 슈퍼 박테리아 감염증인 크론 병등이 범람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쁜 균의 압도적 점유는 그 어떤 '약'으로도 치유될 수 없다. 

심지어 장내 세균의 활약은 그저 난치병으로 여겨지는 각종 현대병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뇌의 분비물인  세로토닌의 95%가 장내 세균에 영향을 받는다고 결론이 나왔다. 즉 장내 면역 체계가 뇌에 정보로 전달되고, 그 결과에 따라 세로토닌이 분비된다는 것이다. 결국 건강한 정신 건강을 위해, 건강한 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내 생태계의 회복 프로젝트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다큐 프라임>은 '똥'과 그 안의 '세균'에 주목하고자 한다. 30년간 크론병에 시달린 미국의 환자는 타인의 건강한  똥을 장내 이식하는 '분변 이식술'을 통해 30년간 고질적으로 시달리던 복통과 설사에서 해방되었다. 그저 남의 똥을 좀 빌렸을 뿐인데, 건강한 세균이 우글우글한 타인의 똥이 환자의 대장으로 들어가 대장 생태계를 변화시킨 것이다. 

사례의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똥, 좋은 세균이 많은 똥을 만들기 위해 12주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유익한 균을 많이 만들어 나쁜 균을 제압하는 방식이다. 똥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가 되는 먹는 것을 변화시켰고, 락토바실러스, 비피스테리움같은 유익한 균들을 채워갔다. 그 결과는 놀랍다. 그 어떤 항생제와 치료로도 낫지 않던 사례자들의 악성 질환이 덜해지거나, 나아진 것이다. 



그저 똥만 변화시켰을 뿐인데! 하지만 이는 그저 외눈박이 현대 의학이 헛짚은 경로였을 뿐이다. 사실 순조로운 출산을 통해 엄마의 산도를 지나오는 신생아는 산도 내에 '충만한' 좋은 균 락토바실러스의 혜택을 입어 세상의 모든 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실제 제왕 절개를 통해 태어난 신생아와 정상 분만을 한 신생아의 태변을 검사하면 세균의 분포도가 현격히 차이가 난다. 즉, 면역력의 출발선이 달라지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엄마의 뱃솟 주머니에서 자라난 코알라는 6개월쯤이 되면 엄마의 똥을 먹는다. 보기에는 좀 '거시기'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아기 코알라는 엄마 똥에 들어이쓴 소량의 독성 물질을 통해 그냥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유칼리투스 잎을 소화시킬 미생물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간 우리 사회가, 우리 의학이 '더럽다', '위생적이지 않다'고 치부했던 '똥'과 그 안의 '세균', 즉 마이크로 바이움(microbiome)이 현대인의 불치병을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으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그 방식이 그간 의학이 했던 흑백 논리식의 약을 통해 병을 제압하는 식이 아니라, '스님들의 식습관'에서 그 해법을 찾듣 건강한 장내 생태계를 지향하는 균형과 조화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시도다. 
by meditator 2016. 6. 2. 14:42

5월 16, 17, 18일 밤 9시 50분, 이어 일요일 밤 8시 15분부터 연달아 ebs 다큐 프라임 3부작 <공부의 배신>이 방영되었다. 중고등학교에서부터 대입, 그리고 대학생, 취준생까지 우리 사회 공부하는 청춘의 적나라한 현실을 그린 이 다큐는 <결국 꿈 포기한 나, 꿈을 꾸는데 자격이 필요한가?>, <ebs <공부의 배신>의 배신>처럼 다양한 당사자들의 반응처럼 시의적이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의 입시 현실을 겪은 당사자들은 어쩌면 다 알고 이미 경험하고, 경험했던 현실이지만, 막상 이를 3부작으로 모아놓으니, 그 적나라함에 등골이 오싹해 질 정도다. 우리가 결국 이런 사회에서 공부를 한다고 발버둥치고, 내 자식을 그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가 싶은 마음에. 한 마디로 학교 선생님들이나 입시의 당사자들은 <ebs<공부의 배신>의 배신>처럼 아이러니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지만, 과연 3부작 전체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개천의 용은 개뿔!이다. 




3부작으로 완결된 <공부의 배신>은 중고등학교에서 부터 시작하여 취준생까지 '공부'로 승부수를 띠우고 있는 우리 사회 경쟁의 현실을 까발린다. 

명문대를 가는 아이들은 일찌감치 정해진다
1부 <명문대는 누가 가는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지방 소도시 익산의 전교 1등 중학생 예원이는 그다지 넉넉치 않은 형편에도 자사고를 가기 위해 불철주야 공부중이다. 하루 두 시간을 자면서 손이 부르트도록 공부를 해 학교에서 전교 1등은 따놓은 당상이지만 예원이는 늘 초조하다. 자사고 입시야 어떻게든 통과한다지만 과연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예원이의 불안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 죽도록 공부해서 자사고에 입학한 예원이가 받아든 성적표는 전교 300등 밖이다. 이른바 자사고의 바닥을 깔아주는 성적이다. 이미 초등학교 이전부터 온갖 사교육을 선점한 아이들에게 예원이가 당해낼 바가 없다. 

그런 예원이의 처지를 잘 아는 건 특목고에서 바닥을 깔아주는 민기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공부했던 민기, 하지만 과학고에서 민기의 공부는 도통 힘을 쓰지 못한다. 사교육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민기는 제 아무리 수학 등에 시간을 투자해도 따라잡을 수 없다. 그에게 공부는 따라잡을 수 없는 '경사진 계단'이다. 

그래도 민기나 예원이나 죽어라하고 특목고나 자사고를 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 사회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고등학교 별 입시 결과 때문이다. 일반고를 다니는 정민이는 집에 와서도 긴장이 풀릴까 교복을 벗지 않고 공부하지만 내신 한 등급 올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대학에 가기 위해 필요한 건 공부만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수상 실적이나 비교과 성적이 미흡한 정민이는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일반 학생일 뿐이다. 

특목고와 자사고와 일반고 사이에는 수학, 영어 평균 40점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건 바로 학부모의 소득 차이이다. 특목고 학부모와 기초수급 대상자 가계 소득은 월 500만원 차이가 나고, 실제 대학생들의 수능 성적은 소득에 따라 43점 이상 차이가 났다. 부모의 소득이 높을 수록 명문대 진학율이 높은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경쟁과 계급을 내재화시키는 대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걸로 되지 않는다고? 그 이유를 2부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가 들려준다. 이미 고등학교에서부터 서열이 정해진 아이들의 현실은 대학에 와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수시 전형 200여 개의 대학 입시, 그 다양한 전형의 통과는 곧 정보력이고, 정보력은 부모의 소득과 맞물려 얻어진다. 같은 대학을 다니지만, 학생들은 서로의 입시 성적에 따라 벌레 충자를 붙이며 서로의 서열을 매긴다.  특목고, 자사고 출신들은 자신들의 출신을 학교 점퍼에 새기며 떵떵거리는 반면, 기회균등 입학생은 곱지않은 시선 속에 수그러든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다른 시스템 속에서 많은 것들을 선행 학습한 동기들에게 일반고 출신들은 주눅들 수 밖에 없다. 거기에 그저 공부만 해서 대학에 온 학생들은 자신들은 듣도보도 못한 갖가지 특혜를로 손쉽게 입학한 동기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박탈감은 시작일 뿐이다. 출신고별, 그리고 취직이 잘 되는 과별, 심지어 강의로 인해 끊임없이 재단되는 차별들이 입시 전쟁을 치루고 한숨 놓을 사이도 없이 학생들을 휘몰아친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 잘 하는 아이들과 못하는 아이들을 좋은 환경과 갖가지 특혜로 나누던 그 차별의 관습은 대학 사회에서 보다 확대 재생산될 뿐이다. 



꿈조차 버거운 대한민국
집값이 차이가 나는 서울의 두 지역 초등학생들에게 장래의 꿈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 결과, 강남의 학생들은 대부분이 의사, 검사 등 전문직종을 대답한 반면, 그 보다 소득이 낮은 지역 학생들은 요리사, 미용사 등 기술직을 선호했다. 뿐만 아니라 강남의 초등학생들은 자신의 꿈을 향한 행로에 대한 구체적 시뮬레이션조차 제시한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꿈조차 달라지는 대한민국. 

그나마 꿈이라도 꾸면 다행일까? 10대들은 이미 안다. 배신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공부'나 '노력'이 성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재력', 부모님빨'이 미래의 성공, 혹은 꿈을 보장하는 전제 조건이라 답한다. 그리고 3부작의 다큐는 입시생들로부터 대학생 취준생들까지 학생들의 대답이 빈말이 아님을 낱낱이 그려낸다. 

대학, 그것도 스카이나 그에 버금가는 대학에 갔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성균관대 사회학과를 다니는 선혜, 하지만 지금은 휴학생이다. 그나마 고등학교까지는 잠이라도 줄여 입시관문을 통과했지만, 대학에 와서는 그런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대학원에 가서 사회학자가 되고싶지만, 당장 학비 마련도 못해 휴학을 거듭하는 현실에서 그런 미래는 요원할 뿐만 아니라 불투명하다. 서강대 졸업생 만길이의 현실도 퍽퍽하긴 마찬가지다. 피디가 되고 싶지만 하루 서너 시간 자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생활을 견딘 만길에게 기업들이 요구하는 스펙은 무리이다. 하루 30만원이라도 있으면 취업 준비에 매진할테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다. 



3부작 <공부의 배신>이 증명한 것은 '미움을 넘어 '증오'를 배태하는 경쟁 사회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그 경쟁 사회의 현실이 처연한 것은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그것이 '경사진 계단'이라 칭해지고, '포기'를 부르는 고착화된 계급 자본주의 사회이다. '금수저'라는 말이 일상화된 표현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내가 경주한 노력이, 누군가의 가진 것으로 인해 쉽게 버림받아지는 상처의 경험이 일반화된 사회, 애초에 경주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사회에서, 공부는 어느 학교 선생님 표현처럼 그럼에도 유일하게 배팅할 수 있는 칩이지만, 점점 더 그 배팅의 결과가 보장되지 않거나 희박한 승률을 보여주는 무모한 도전이 되는 사회를 다큐는 증명한다. 

역사를 배우며, 고려 시대 귀족 사회의 자제로 아버지의 벼슬에 따라 자연스레 관직에 나가는 '음서' 제도를 배우며 쯧쯧거렸다. 그러나, <공부의 배신>이 증명해 낸 것은, '경쟁'과 '노력'이라는 말로 포장된 또 다른 계급 사회 대한민국이다. 결국 말로는 '노력'이라하고, '경쟁'이라 하지만 애초에 서로의 출발선이 다른 불공정한 레이스에서 수많은 학생들은 자신을 '노력'으로 가학하다 배신당하고 증오에 치떨게 만들고 낙오자로 스스로를 낙인찍도록 만드는 귀족 사회 고려보다도 더한 서열 사회의 민낯이다. 결국 고려는 그 불공정한 '음서'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 내지 못한 채 무너져 갔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공부의 배신>을 보고, 그러니 너희들은 낙오되지 않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선생님과 우리 공부 열심히 하자는 학생들이 있는 한 아직 이 견고한 계급 사회는 쩡쩡하게 버틸 듯하다. 
by meditator 2016. 5. 23. 19:23

선생님을 하는 친구가 전해준 말이다. 초등학교 1학년인 학생은 자기 집 식구를 소개할 때 꼭 다섯이라고 한단다. 친구가 기억하기엔 분명 부모님과 1학년 학생, 그리고 동생, 이렇게 네 식구가 다인 걸로 아는데, 알고보니, 학생이 꼽은 가족에는 그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제 애완견이 '가족'인게 하등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미래의 언젠가는 그 '가족'의 자리에 애완견처럼 '로봇'이 차지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5월 15일 방영된 sbs의 2015 sdf(서울 디지털 포럼) 특집 다큐 <알파고와 어린 왕자>는 '알파고'의 시대, 그저 알파고의 공습으로 인한 공포 대신, '인공 지능 ai(auto intelligence)에 대한 새로운 관계 모색을 시도한다. 




'알파고'가 결국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서 내리 세 판을 이겨 버리자, 사람들은 충격에 빠져 버렸다. '알파고 쇼크'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세상은 인간을 상대로 스스로 진화하여 승리를 이끌어낸 저 무시무시한 인공 지능에게 조만간 '지배'당할 것 같은 위기에 빠져 버렸다. 심지어 일부러 져준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조차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알파고 쇼크는 우리 사회 빠르게 변화하는 화제의 아이템에게 곧 자리를 빼앗겼지만, 여전히 '인간조차 이겨버리는 인공 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굳게 자리잡았다. 

인공 지능과의 관계 모색
이런 우리 사회 저변에 깔린 인공 지능에 대한 두려움을 전제로, 다큐는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는 ai에 대한 보다 진전된 '관계'를 모색하고자 한다. '인공 지능'과의 새로운 관계라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다큐에서도 등장하다시피, 2014년 개봉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her>가 '알파고 쇼크'의 대척점에 놓여있다. '인공 지능과의 사랑'이라? 이 또한 사랑의 쇼크일까?

하지만 영화에서 등장했던 이 인공 지능 운영 체제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분)'와의 사랑에 빠졌던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가 그저 가상의 이야기가 아님을 다큐는 보여준다. 일본에서는 이미 여자 친구 노릇을 하는 인공 지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다큐에 등장한 일본 남자는 인공 지능 여친과 함께(?) 밥을 먹고 데이트도 한다. 여자 친구는 아니더라도, 낡은 기계의 부분조차 마치 '늙어가는' 모습으로 받아들이며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일본처럼 시제품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가족'이 미처 하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는 인공 지능이 등장했다. 로봇 동아리 경험이 있는 부부는 자라나는 아이를 위해 부부의 여력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인공 지능 로봇을 만들었다. 물론, 우리가 상상하듯, 영화 <AI>의 데이빗같은 모양새가 아니라 그저 아이의 걸음마 보조용 손잡이와 바퀴가 달린 단순한 모양이지만, 아이의 성장에 따라 걸음마에서부터, '나 잡아봐라'까지 함께 하며 자란 로봇은 이 가족의 생각을 담은 '플랫폼'으로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심리학 연구는 인간이 로봇과 교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로 증명한다. 

이렇듯, 현실의 인공 지능은 알파고처럼 '인간'과 대결을 하며 '인간'의 영역을 호시탐탐 엿보는 또 하나의 세력이 아니라, 인간 삶의 빈틈을 채워주는 '조력자'의 형태로 등장한다고 다큐는 밝힌다. 

삶의 조력자로서의 로봇
전신마비 환자의 눈을 통해 그의 목소리와 발이 되어 세상과 소통시켜 주는 로봇, 반신불수 장애인의 발이 되기 위해 개발 중인 로봇,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아이의 일정을 보살펴 주고 외국어까지 가르쳐 주는 학습 도우미 로봇, 그리고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무인 자동차', 그리고 시판 중인 vr(virtual reality)까지, 현실의 로봇은 인간과 힘 겨루기를 하기 보다, 마치 서로가 길들여가며 '친구'가 되어가는 어린 왕자와 '사막 여우'처럼 인간 생활의 '벗'으로 자리 매김할 것이라며 '관계'를 재정립한다. 



이세돌 9단을 이기는 '알파고'는 무시무시해 보였고, '소설'까지 써내는 인공 지능이 잠재력은 그 한계의 가능성에 '인간'을 넘어선 듯 보였다. 언젠가 인공 지능이 써낸 소설이 자신의 소설보다 더 베스트 셀러가 될 그날이 올 지 몰라도, 그래도 자신의 소설이 가진 '인간의 향취'는 독보적일 것이라는 소설가 박범신의 소견은 '자족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의 예견처럼 언젠가 사람대신 로봇 친구와 로봇 아내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생길 그날이 올지라도, 여전히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인간이라는 류적 존재의 dna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학자들은 예견한다. 오히려 그런 위기보다는, 인공 다리 로봇을 장착하고 십 여년만에 일어선 장애인이 두 발로 서서 맡는 공기가 다르다고 감동하듯, 로봇의 미래는 새로운 '관계'로서 가능성을 연다. 

물론, 미래의 언젠가 진화한 로봇에게 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로봇을 상대로 '러다이트 운동(기계 파괴 운동)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로봇이 사막 여우와 같은 길들인 벗이 될지, 위기의 '적'이 될지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sbs 스페셜  <알파고 쇼크, 그 실체는 무엇인가?> 와 <sdf 특집 다큐 알파고와 어린 왕자>는 우리 손에 놓인 양 날의 검이다. 
by meditator 2016. 5. 16. 06:29

강준만 교수는 5월1일자 한겨레 신문 칼럼 <언론도 소통합시다>를 통해 관성에 젖은 언론 행태를 꼬집는다. 강교수는 '각자 당파성에 기인해 반대 정당이 압승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의 캠페인성 기사를 양산해 내거나, 각 정치 세력과 정치인들의 유불리나 이해득실을 분석하는 일에만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독자가 그런 기사를 좋아한다며 독자의 뒤에 숨지만, 결국 '싸움과 당파성을 파는 상인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 이유로 '당장 여기서'라는 목전의 사태에만 집중하느라 10대 재벌 사내 보유금 분석 같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소통'의 방식을 놓치고 있다고 통탄한다. 


그렇다면 강교수가 주장하는 바 '소통 불능'에 빠진 언론이 스스로를 '언로의 죽음'에서 구제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 가능성을 5월 3일 방영된 <시사기획 창>이 보여준다. 



샅샅이 훑어 본 19대 정치 자금 보고서
외람되게도 2016년 정치 개혁을 내걸은 이 다큐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이제 새롭게 열릴 20대 국회가 아니라 조만간 폐업할 19대 국회이다. 

<시사 기획 창(이하 창)> 탐사팀은 지난 4년간 19대 국회의원들이 쓴 정치자금 1448억원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국회의원은 한 명당 1년에 1억 5천만원, 선거가 있는 해엔 최대 3억원의 정치 자금을 모을 수 있다. 지난 4년간 19대 국회의원 292명이 쓴 정치 자금 내역서인, '정치 자금 수입 지출 보고서'를 '정보 공개 청구'를 통해 입수, 지난 3개월에 걸쳐 5만 3천여 페이지, 52만 4천여건의 정치 자금 내역을 데이터화하고, 분석했다. 

도대체 이런 긴 시간을 들인 정치 자금 분석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건 다큐의 내용을 통해 명확해 진다. 

정치 자금이란 대의 민주주의 제도에서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을 대신하여 국회에서 국민의 뜻을 제대로 실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십시일반 모아진 돈이다. 물론, 정치 자금과 관련하여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있었지만, 기본 취지는 그렇다. 그러기에 정치 자금은 국민들의 의혹을 살 일이 없이 공명정대하게 운영되어야 하고, 사적인 사용이나, 부당한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창>을 통해 살펴본 국회의원들의 정치 자금 사용 내역은 웃프다. 가깝게는 자신의 아들과 딸, 혹은 아내 등 가족들이 벌이는 사업을 돕기 위해 사용되는 것에서 부터, 단란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빵집에서 빵을 사고, 새로 산 와이셔츠, 넥타이 값에 동창회비까지 정치 자금으로 유용된다. 심지어 과속 벌칙금까지 이 돈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엄연히 정치자금 법을 통해 사용될 수 없다고 명시된 동창회비까지 버젓이 정치 자금으로 낸다. 이런 국회 의원들이 292명의 19대 국회의원 중 204명이나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부적절한 사용 내역에 대해 제작진이 문의를 하면, 그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반응이다. 어떻게 다 하나같이 '몰랐다'거나, '실수'이거나, 해당 관계자가 업무에 미숙해서 라고 답을 하는지. 국회의원들만이 아니다. 이런 국회의원들이 크건, 작건 정치자금 유용의 문제를 감독해야 할 '선거 관리 위원회'는 탐사 보도 팀이 데이터화한 내용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다. 아니 뒤늦게라도 알게 된다 하더라도 후속 조치가 취해지지 않거나, 취해진다 해도 '경고' 등의 말뿐이다. 모두가 다 알듯이 이제 지는 해가 되는 얼마 남지 않은 회기에서, 이제야 밝혀지고 경고를 받는다 해도 유명무실하다. 



사후 약방문을 통해 20대 국회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다. 
그런데 왜 뒤늦게라도 19대 국회의원의 정치 자금을 들여다 보아야 했을까? 그건 바로, 사후 약방문인 19대 국회의원의 정치 자금 사용 내역을 통해, 20대 국회의원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는 '고비용'의 정치 자금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치 자금과 관련된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국회의원과 일부 언론들은 현재의 정치 자금이 비효율적이며,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이상적 제도로, 결국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만다고 입을 모은다. 

과연 그럴까? <시사 기획 창>이 살펴본 우리나라 국회의원 한 사람이 쓰는 비용은 한 달에 천 여만이 넘는 세비를 비록하여, 사무실, 보좌관, 심지어 집기 사용에 필요한 비용까지 모조리 국가가 지원해준다. 영국의 국회의원이 자신의 사물실을 운영하기 위해 정부 보조금을 받는 것과는 완연히 다른 형편이다. 

무엇보다 정치 선진국이라 하는 영국은 2009년 정치 자금과 관련된 스캔들 이후, 국민들이 국회의원의 정치 자금을 감시할 수 있도록, 각 국회의원이 쓴 자금들이 상시적으로 공개된다. 국회의원들은 자신이 쓴 자금을 데이터화 하여, 국회내 윤리 위원회에 제출하고, 이 윤리 위원회는 이를 인터넷 등을 통해 공개하여, 감시를 일상화한다. 

이런 영국과 같은 제도에서라면,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처럼 주차하기 편하다 하여, 대부분의 만남을 호텔에서 뻔질나게 하는 '갑'의 행태를 보일 수는 없을 것이며. 또한 4년 동안 쓴 자금을 차기 국회의원 선거 관리에도 정신이 없는 선관위에 4년이 지난 후 보고하는 형식에서라면 현재와 같은 '눈가리고 아웅'의 형태는 얼마든지 방조될 수 있다는 것을 다큐는 지적한다. 

결국 19대 국회의원 정치 자금 보고서를 통해 <시사 기획 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20대 국회의원의 활동 방향이자, 고비용 정치 자금의 현재의 정치 구조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19대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갑질' 행태가 문제가 되자,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세비를 비롯한 항목을 30% 삭감하겠다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여타 정치적 사안이 등장하자, 세비 삭감은 어느새 없었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여론이 비난의 방향으로 가면 삭감하는 모양새만 취하다, 잠잠해지면, 자신들이 자신의 세비를 20%나 삭감하는 몰지각한 행태를 여야 막론하고 벌이는 현재의 국회의 관습, 국회법, 그리고 선관위법에서는, 정치 자금의 유용과 고비용의 정치 자금 관행은 사라질 수 없다고 지적한다. 결국, 정치 개혁의 시작은, 지금껏 관행적으로 사용되고 눈가리기 식으로 넘어갔던 '정치 자금'에 대한 새로운 입법, 즉 '갑'이 아닌 '봉사'하는 존재로서의 국회의원에 대한 법적인 새로운 규정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고 3개월에 걸친 정차자금 보고서 분석은 밝힌다. 

by meditator 2016. 5. 4. 07:01

엄앵란과 신성일은 60년대의 대표적 청춘 스타이다. 60년대의 청춘의 상징이었던 두 사람은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에서처럼 사랑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축복받는 결혼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그 이후의 이야기는 결코, 우리가 흔히 보듯 사랑해서 결혼했고,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을 맺지 못했다. '스타'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혹은 무색하게 전국민이 두 사람의 별거와 그에 이르기까지의 속내를 잘 알수 있도록 '가쉽'성 기사를 양산해 냈다. 




황혼 이혼이 낯설지 않은 세상에 두 사람의 뒤늦은 해후 
'황혼 이혼'이 낯설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이 말의 범용화의 의미는, 더는 '백년해로'가 미덕이 되지 않는 세상을 되었다는 것이고, 결국 그 근저에는 우리 사회를 지탱해 왔던 '가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빈발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이 들어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노추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 미덕이 아닌 것이 된 세상에, 2016 휴먼 다큐 사랑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40년을 별거한 엄앵란 신성일 부부의 '결합' 이야기이다. 도대체 40여년을 따로 살아왔던 이 부부가 이즈음에 굳이 함께 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거기에는 아내 엄앵란의 건강 상의 위기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진행된 건강 검진 프로그램에서 유방암 검사를 받은 엄앵란은 수술을 받게 된다. 그리고 건강하게 가정을 지탱해 왔던 아내의 뜻하지 않은 암 통보는 바깥으로 돌았던 남편 신성일에게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에 남편은 남은 여생 아내의 곁에서 아내를 돌보며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하지만 방탕한 남편의 귀의라는 미담으로 단순하게 마무리될 줄 알았던 남편의 의지는 뜻밖에도 '이제와서 무슨!'이라는 아내의 주저함이라는 벽에 봉착해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미 서로 떨어져 산지 40여년 세월, 바람에, 정치에, 그리고 영화를 한답시고 투자에, 당대 최고의 여배우란 수식어가 무색하게 신성일의 아내로 살아온 시간은 여배우 엄앵란에게는 남편이 감당하지 않는 가정을 '가장'으로 이끌어와야만 했던 고난의 시간이었다. 비록 아직도 두 딸과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와 호적상으로 갈라서지 않고, 여전히 시어머니 앞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은 있지만, 부부로서의 믿음을 잃어버린지 오래, 거기에 사는 스타일마저 다른 남편과 너무 오래 떨어져 산 엄앵란은 남편의 제안 자체가 부담스럽다. 그런 남편의 제안에 맞춰 두 사람의 결합을 유도하는 방송조차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고. 

하지만, 방송과 신성일은 꾸준히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한다. 별거 이후 네 번째인 신성일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하고, 며칠에 한번 아픈 아내를 위해 보양식을 싸들고 찾아오고, 다리가 불편한 아내를 위해 장모님을 모신 절에 동행한다. 

결국 이런 남편과 제작진의 지극한 성의에, 아내 엄앵란은 지난 시간 자신을 힘들게 했던 남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어가는 자신에게 여전히 '기둥'이었음을 받아들이고, 의지할 의향을 보이며 방송은 마무리된다. 



'사랑'을 빙자한 노년의 환타지는 아닐까?
이날 방송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호사다마했던 신성일의 일생이 아니라, 책임지지 않는 남편 대신 가장이 되어 한 가정을 이끌어 왔던 전통적인 어머니 엄앵란이다. 
엄앵란은 여든의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몸신이다> 등의 방송 패널로 활동 중이다. 심지어 다큐에서 보여진 유방암 수술을 하고서도 아직 채 완쾌되지 않은 노구를 이끌고 방송 출연을 재개한다. 그 이유는, 그녀의 일생이 남편이 돌보지 않은, 그리고 이제 여전히 자식들에게 용돈은 커녕, 집안에서 돈을 버는 사람이 여전히 그녀가 유일한 이유로 마음 편히 쉴 틈이 없다. 심지어 자신이 죽고 난 뒤 자식들과 남편이 거지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죽는 날까지 돈을 벌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60년대의 대표적 여배우라 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엄앵란은 방송 패널로 나온 후덕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후덕한 외모와 달리, 그녀의 입을 통해 풀어지는 이야기들은 젊은 세대로서는 공감하기 힘든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주입'하다시피한 내용들이었다. 주로 종편의 이야기 쇼를 통해 활약하는 모습에서 보여지듯이, 엄앵란의 이야기는 그녀가 여자임에도 여자의 편에 서기 보다는 가장과 자식들을 위해 희생을 당연시 해야 하는 우리 어머니들의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그리고 다큐를 통해 보여진 엄앵란의 모습은 그녀가 방송을 통해 풀어냈던 이야기들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남편이 방기한 가정을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책임지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서도 다시 방송에 서야 하는 노년의 가장이었다. 여전히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그녀가 지켜내야 하는 가정, 심지어 그녀가 죽고 재혼을 해야 할 지도 모를 남편이었다. 당대 숙명여대를 다니던 재원으로 대중들에게 인텔리로 사랑을 받던 여배우는 하지만, 몇 십년이 지난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가부장적 사고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 세대의 여성일 뿐이었다. 

단지 그녀에게 자유가 있다면, 여전히 재정적으로 가정을 책임져야 하지만, 남편과 함께 살지 않을 자유였다. 바람잘날 없는 남편과 별거 이후, 남편은 남자의 손이 없어 아프게 되었다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스타일에 맞게 편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과연, 이제와,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결초보은의 자세로 마음을 바꾼 남편과 40여년만에 한 집에 살아야 할까? 다큐는 여전히 남편을 '기둥'으로 여기는 전통적인 아내 엄앵란의 정서를 강조하며 이 부부의 결합을 '사랑'의 미담으로 구색을 맞추지만, 오히려 '황혼 이혼'이 이상하지 않는 세상의 사람들 눈에는 40여년을 떨어져 산 낯선 이들의 어색한 동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부부의 가정사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그 사연에는 개별성의 깊이가 있겠지만, 40여년 바람처럼 스치듯 살고, 자식과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남편이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내의 곁을 지켜봐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기둥'이 될 수 있는 세상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남편의 결초보은은 꼭 이미 이혼한 딸과 손주들과 또 다른 가정을 이루고 사는 아내의 집에 들어가 사는 방식으로 이루어 져야 하는 것인지. 아픈 아내에게 결국 은수저를 찾게 만드는 그의 잔소리와 같은 남편의 고집은 아닐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별거 이후에도 행복한 부부상을 연출했던 두 사람의 지난 날처럼, 이미 허상이 되어 가는 '가족'과 부부'의 환타지를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부는 한 집, 한 방, 그리고 한 침대를 나누어야 부부라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양반가에서는 부부가 담을 나누어 서로 다른 공간에 살아야 했던 것이 법도였던 시대를 살았었다. 별거 40여년의 부부를 아내의 투병, 하지만 이제는 방송 출연조차 가능한 아내를 위해 굳이 한 집에 사는 것을 '사랑'의 미덕으로 그리고자 하는 다큐에, 2016년의 '사랑'이 무엇일까? 회의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by meditator 2016. 5. 3. 06:00

고담시를 지켜왔던 배트맨과 지구를 구하는 슈퍼맨이 싸운다. 이른바 '정의'의 가치를 두고 싸우는 '저스티스 리그'란다. 그런데 두 영웅도 부족해서 떼거리로 편을 먹고 싸우겠단다. <캡틴 아메리카; 시비 워>가 그렇다. 지구를 지키던 영웅들이, 각자가 가진 트라우마와 가치관의 혼돈으로 오히려 지구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렇게 영웅도 고민하고 고뇌하는 시대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우리가 위험에 빠졌을 때 우리를 구하러 나타나는 수퍼맨은 영화에서 봤던 그들이 아니다. 사람인 소방관들이다. 하지만, 우리를 비롯한 이 사회는 그들에게 영화 속 영웅들보다도 더한 짐을 지운다. 차마 인간의 영역으론 감당하기 힘든. 


소방의 날은 11월 9일이다. 소방의 날도 아닌데 4월 24일 방영된 <sbs스페셜>은 소방관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슈퍼맨의 비애- 소방관의 sos>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인권의 사각지대로 보야야 할 열악한 소방관의 현실을 우리가 소방관을 부를 때 사용하는 119번 대신 119명의 소방관들의 속내를 통해 털어놓는다.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아이들과 함께 죽고 싶어요'

'희망 tv'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도네이션에 참여했던 류수영이 눈물을 흘리는 소방관으로 분한 모습으로 시작된 다큐, 거기서 만난 소방관들은 사고가 일어나는 현장 그 어느 곳이나 나타난 현실의 슈퍼맨이 된 영웅들이 아니다. 이제는 영웅의 무게 대신에 자신이 겪었던 상처와 가치관으로 인해 고뇌하는 영화 속 영웅들처럼, 첫 출동 현장에서부터의 기억조차 켜켜이 자신 속에 쌓아둔 상흔이 깊은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현실의 슈퍼맨, 소방관의 정신적 고통 
이미 우리는 각종 뉴스나 사건 등을 통해 지방직 공무원인 소방관이 자신의 안전 장비를 자신의 돈으로 사서 충당해야 하는 열악한 현실에 대해 접한 바 있다. 그러나 다큐는 말한다. 소방관의 열악한 현실은 사고 혹은 화재 현장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미흡한 안전장비뿐 아니라고. 매년 소방관의 날, 미국에선 전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방관들이 퍼레이드를 벌이고 대통령이 나와 한 해 동안 순직한 소방관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이 된 소방관과 달리, 우리의 현실은 퍼레이드는 커녕 겨우 200여 명의 관계자가 모인 초라한 기념식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다큐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사고 현장에서 미흡한 장비, 열악한 사회적 처우, 그 모든 것들을 넘어, 현재 국민 안전처 조사 통계 상 최근 5년간 순직 27명, 그 배를 넘는 자살자 41명의 현실을 다룬다. 심지어 2015년에는 순직한 소방관의 수에 여섯 배에 달하는 소방관들이 자살을 했다. 그리고 드러난 통계 아래 100명 중에 한 명은 하루 종일 죽음을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405가 우울증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 최고 감정 노동자 소방관들이 있다. 

소방관이 되기 위해 준비를 하는 소방관 예비 후보생들 그들의 정신 건강을 조사해 보면 그들은 또래 젊은이들보다 그 누구보다 건강한 정신 상태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청년들이 소방관이 되어 맞닦뜨린 현실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터뷰에 응한 119명의 소방관들, 그들 중 상당수가 첫 출동에서 마주친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고 현장에서 구하지 못한 아이, 할머니, 그리고 신체가 훼손된 사상자들을 마음의 준비없이 마주친 소방관들은 하지만 그 트라우마를 치유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사고 현장으로 출동을 거듭하며 마음의 상처를 키워간다.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그들의 직업이, 현장에서 누군가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고통으로 고스란히 쌓여가며 자기 자신을 상처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구하지 못했던 고통은 자기 자식에 대한 학대나 자살 충동으로, 그리고 결국은 현장을 떠나거나 소방관이란 직업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우울증으로 늪으로 소방관들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고통에 대해 사회의 반응은 냉정하다. 사람을 구하는 그들의 직업을 당연하게 여길 뿐아니라, 주취자의 폭력이나, 이유없는 감정적 반응, 심지어 출동 현장에서 불가피한 재산 손실까지 따져묻는 이기적 행태 등이, 사회의 슈퍼맨 소방관들의 자부심을 갈갈이 찢어버린다. 출동 현장에서 문을 파손하는 대신, 더 위험한 고공 줄타기를 감수하도록 하는 현실이 바로 소방관들을 정신적 고통으로 몰아넣는 또 다른 원인이 된다. 

하늘나라에서는 소방관 하지 마. 우리 이제 소방관 하지 말자...” 



뿐만아니라 2001년 홍제동 사고 현장에서 순직한 여섯 명의 소방관들처럼, 현장에서 사고로 동료들을 잃는 경험도 소방관들에겐 치유되지 않는 상처다. 함께 생활했던 동료나 선배들을 사고로 잃는 고통도 무색하게,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처리해야 하는 마무리까지 하는 그 직업적 아이러니가 소방관들의 고통을 더 깊게 한다. 

감정 노동자로서의 소방관의 인권
이렇게 출동 현장에서 만난 예기치 못한 죽음, 그리고 동료를 잃은 충격 등은 치료되지 않은 채 방치되면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우울증을 넘어 자살을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 안그래도 직업적 특수성으로 인해 평균 수명이 가장 짧은 소방관들은 그 직업적 특수성으로 인해 정신적 고통까지 짊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다큐는 밝힌다. 

하지만 현실은 열악하다. 해마다 늘어나기는 커녕 오히려 줄어든 소방 예산은 소방관들의 정신 건강을 돌볼 여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사 결과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인 소방관들의 70%가 치료를 거부한다고 한다. 즉 상당수의 소방관들이 소방관으로서의 자부심과 정신적 부담을 혼돈하거나, 자신들이 안고 가는 정신적 부담을 소방관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그로 인해 승진 등의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소방관 한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국민 1300명의 현실은 소방관들의 열악한 근무 조건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다. 

4월 24일 방영된 <슈퍼맨의 비애-소방관의 sos>는 인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소방관의 직업을 당연시 하는 우리 사회의 의식 저 너머에 신음하고 있는 소방관의 인권을 끄집어 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사회적 복무가 그 일이 된 직업군을 '감정 노동자'로 규정하고, 직업적 자부심과 직업적 부담을 분리하여, 한 개인의 고통으로 치환된 소방관의 정신적 고통을 사회적 문제로 공론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는 곧 사회, 혹은 집단이라는 전체가 우선이 되어왔던 우리 사회의 지난 시절의 사고 방식, 시스템을 반성하는 진지한 첫 걸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영화 속 슈퍼맨에 열광하고, 그들의 고뇌에 공감하는 만큼, 우리 사회의 슈퍼맨들의 현실도 들여다 보아야 한다고 다큐는 간곡히 설득한다. 바로 이것이 현실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인권'이다. 







by meditator 2016. 4. 25. 14:46

최근 전 사회적으로 '당'의 과도한 섭취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다. 먹방의 범람에 이은, 쿡방 열풍이 사회 전반에 '먹거리'에 대한 '탐닉'을 무방비하게 만들고, 사회적 성취로 도달하지 못한 개별화된 사람들의 열망은 가장 용이한 '먹'는 열망으로 이어져 '탐식'이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한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탐식'의 중심에 있는 과도한 '당'의 섭취에 대해 황교익 씨 등의 맛 칼럼니스트와, sbs 스페셜 들의 다큐 등이 중심이 되어 꾸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고, 한동안 붐을 이루던 무방비한 '탐식'의 열풍은 이제 자기 점검에 단계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심지어 된장 찌개에 까지 설탕을 넣어 먹는 최근의 당의 과도한 섭취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대두되었다. 과연 우리가 지금까지 먹던 설탕 등을 줄이면 우리의 당섭취는 줄어들게 될까? 




이에 4월 11일과 18일 2부작에 걸쳐 방영된 <mbc다큐 스페셜-밥상, 상식을 뒤집다-탄수화물의 경고(이하 탄수화물의 경고)>는 그저 설탕을 줄이는 것만으로 우리가 섭취하는 당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탄수화물의 경고>란 제목에서도 이미 알 수 있듯이 다큐는 우리가 섭취하는 탄수화물이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돤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탄수화물이야!
성인 기준 탄수화물의 최저 섭취량은 100~150g이상, 성인의 하루 권장량은 281.9g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성인 남녀 1000명을 기준으로 조사했을 때 65% 이상이 과잉 섭취, 그중에서 9%는 중독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 결과가 나왔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하루 권장량의 두 배 이상이 넘는 탄수화물을 섭취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주식으로 삼고 있는 밥, 국수, 빵등 대부분이 탄수화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탄수화물은 우리 몸에 절대 필요한 영양소이다. 뇌를 비롯하여, 장기, 적혈구의 에너지원으로 쓰인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냥과 채집에만 의존하던 인류가 농사를 지으면서 문명이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안정적으로 탄수화물을 섭취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인류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 발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가진 탄수화물이 하지만 현대에 와서 애물단지가 되어가고 있다. 

탄수화물 과잉 섭취나 중독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다큐는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탄수화물을 섭취할 경우 성인병은 물론 암과 혈관 질환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성인병의 원인을 과도한 단백질과 지방의 섭취에서 찾았는데, <탄수화물의 경고>는 그 상식을 뒤집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주장을 위해 탄수화물 중독에 가까운 네 명의 사례자를 등장시킨다. 하루 종일 빵등을 입에 달고사는 22세의 대학생, 야식을 참을 없는 국수예찬론자,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마지막은 밥 한 공기로 마무리지어야 포만감을 느끼는 주부, 하루 일과의 끝에는 맥주를 빼놓을 수 없는 외식을 주로 하는 직장인 등, 우리, 혹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현대인의 전형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건강 검진 결과 이들 4명 모두 당뇨는 물론, 콜레스테롤, 지방간, 중성 지방 등에서 위험한 수치가 드러났다. 이에 다큐는 4주라는 기한을 두고 이들에게 '탄수화물 줄이기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처음 탄수화물 줄이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 4명은 공통적으로 흰 밥 대신, 잡곡밥을 먹는 등 탄수화물을 줄이는 것은 물론, 그 구성에서도 차별화를 가지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다이어트란 생각에 대뜸 먹는 양을 줄이거나 대부분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한 이들은 고통을 받는다. 심지어 탄수화물 금단 증상으로 어지러움증을 호소하거나 우울해 한다. 

이에 제작진은 무작정 먹는 것을 줄이거나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공복감에 시달리는 네 명의 사례자에게 권장 식단을 제시한다. 제작진이 제시한 것은 그저 무작정 굶거나 줄이는 것이 아니라, 탄수화물을 제한하되, 그 부족분을 다른 영양소로 채우는 일본 에베 코지의 당질 제한 다이어트 식이었다. 즉, 탄수화물은 줄이되, 그 공복감을 각종 채소와 단백질 공급원이 되는 육류, 생선들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열 사람 중 여섯 사람이 당뇨로 고생하는 일본에서 10년전부터 꾸준히 주장되어 방식으로, <sbs스페셜-콜레스테롤을 허하라>를 통해 등장한 하버드의 채소 50%, 단백질 30%, 탄수화물 20%의 식단과 일맥상통한 방법이다. 

편중된 식습관을 개선하라 
물론 처음 먹는 잡곡밥 등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무작정 굶는 것이 아니라 탄수화물 부족분을 포만감을 주는 다른 영양소로 채운 당질 제한 다이어트로 4명의 사례자들은 한결 순조롭게 4주간의 실험 기간을 마쳤다. 이후 실시된 건강 진단 결과, 놀랍게도 4명은 모두 한 달 전과 비교해 체중 감량은 물론 건강 상에 문제가 되었던 당뇨, 콜레스테롤, 중성 지방, 지방간 등에 있어 한결 나아진 상태를 보였다. 즉 탄수화물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건강 상의 적신호가 줄어든 것이다. 


사례자들의 결과는 탄수화물이 문제였음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우리 사회 상당수의 성인들의 건강상의 문제점은 그 무엇보다 우리 사회 편중된 식습관에서 비롯된 탄수화물의 과잉 섭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던 성인병 및 각종 현대 질병의 상식을 뒤짚는다. 또한 다큐는 이미 다각도로 실천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를 보여주며 개인의 결단을 넘어 사회적 실천 양식이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매식 등의 생활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편의점에 진열된 저탄수화물 빵등이나, 가정으로 배달되는 저탄수화물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작진이 권장 식단을 제공해도 대부분 외식을 하는 직장인이 그 내용을 따라하기 힘든 우리 사회 현실과 대비된다. 

물론 탄수화물은 필수 영양소다. 필수인만큼 하루 20g 이하로 섭취했을 때 우리 몸의 균형이 깨지는 등 부작용도 드러난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국민이 두 배 이상의 탄수화물 섭취를 해서 각종 성인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탄수화물의 경고>는 <설탕 전쟁>만큼이나 시의적이다. 

by meditator 2016. 4. 19. 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