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부터 12월 13일까지 4부작으로 방영된 <sbs스페셜- 바람의 학교>는 스쿨픽션이라는 새로운 다큐 양식을 통해 현실 교육의 문제점, 현재 학교 속에서 벌어지는 소외의 문제를 짚었다. 그리고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12월 17,18 양 일간에 걸쳐 kbs1을 통해 방영된 <다큐1>의 교육 혁신프로젝트 <학교의 진화>는 바로 그 문제 제기한 '학교'의 문제를 짚는다. 




변화하는 시대, 변화를 요구받는 학교
아마도 현재 우리 사회의 정규 교육 과정으로 인정받고 있는 '학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말은 이제는 사라진 '국민학교'라는 말일 것이다. 이제는 그 정체성 분명한 단어 대신 단계별로 초등, 중등, 고등 학교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교육 현장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은 바로 그 '국민교육 헌장'을 외우던 그 시절의 '국민학교'이다. 즉, 산업 국가가 원하는 인재를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정해진 교육 과정을 통해 일정 수준에 도달하도록 교육시키는 곳이 바로 현재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학교'라는 곳이다. 철학자 푸코는 그런 제도권 교육의 학교를 '개인을 유용한 사회적 자원으로 키워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 사회 '규율 권력'의 실현체로 보았다. 그래서 학교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을 생산해 내며', 나아가 '인간 자체'를 만들어 내는 기관으로, 공장, 감옥, 수도원, 군대 조직과 동일한 '감금형'의 규율 지배적 공동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성격을 띤 학교에서는 규율과 그에 대한 제재가 우선적일 수 밖에 없고, 교사는 '지식'의 전수자로서 학생들을 '억압'하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푸코의 생각이다. 그리고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오늘날 학교 현실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은 바로 이 '푸코'의 냉정한 철학적 인식의 기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은 더 이상 사회를 '절대적 지식의 전수와, 그 실행인'들의 집합체로 사회가 구성되는 산업사회를 넘어, 위계가 무색해지는 네트워크 중심의 혹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패러다임의 새로운 경제 질서, 사회 질서의 사회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그 본질은 여전히 자본주의이지만, 더 이상 산업사회적 '지식'으로 현재, 혹은 미래의 사회를 규정하거나 대처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당연히 이제 더 이상, '공장제' 식으로 찍어내듯 전달, 전수되는 교육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지 예측 미지수인 미래 사회에서는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학교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아니 이제 더 이상 감금형의 교실에서 자신의 미래를 기약하지 못하는 아이들로 인해 변화가 강제되고 있는 상황이다. 



4부작 <sbs스페셜-바람의 학교>에서 시작은 이런 기존의 제도권 학교 교육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바람같은 아이들에 대한 '대안' 모색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찾은 것은, 아이들 각자의 문제점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들의 꿈을 찾을 수 없는 학교, 꿈을 위해 견뎌야 할 이유가 없는 학교였다. 즉, 이제 현실의 학교는 그 교실에서 수년간 입시라는 골문을 향해 견뎌내는 아이들을 제외한 다른 꿈을 꾸는 아이들, 아니 입시라는 맹목적 목표에 쫓겨가면서도 갈증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꿈을 생각할 여지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어려운 오이디푸스도, 버거운 공연 과정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으면 짧은 시간에라도 기꺼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바람의 학교>는 증명해 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다시 돌아간 학교는, 그 가능성을 숙제로 남겼다. 

자유학기제, 시험없는 학교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작은 답을 <다큐 1-학교의 진화>가 마련한다. 전국에서 뜻을 가진 20여명의 교사들을 시작으로, '자유학기제'라는 새롭게 모색되는 제도 속에서,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한다. 

시험이 없는 학교는, '시험'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2016년 전국의 중학교에서 자유학기제가 실시될 예정이고, 이미 다수의 중학교에서는 시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중이다. 자유 학기제에서는 한 학기동안 시험의 부담없이 여러가지 토론, 체험, 활동 중심의 수업 모형이 시도되는데, 이에 대해 '어른'들은 아이들이 공부를 게을리할까 걱정이 앞선다. 

이런 어른들의 노파심에 대해 하지만 일찌기 학교라는 제도를 강제해 온 '시험'이란 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말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시험이냐고? 막상 사회에 나오면 시험은 '운전 면허 시험'말고는 없는 세상에서, 왜 어른들은 '시험'에 연연해 하는 것이냐고, 오히려 '시험'은 아이들로 하여금 애초 '공부'의 목적을 잊은 채, 시험만을 위한 '파블로프의 개'가 되게 한다고. 자유학기제는 바로 그 공부의 목적을 '본말이 전도되게 한 '시험'을 떠나 아이들이 스스로의 '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시도하고자 한다. 

시험과 수업 진도가 사라진 교실에서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다양한 직업 체험을 해보기도 하고, 프로젝트를 마련하여 각종 활동을 펼쳐나간다. 그 과정에서 놀란 것은 선생님들이다. 사실 다른 어른들처럼 시험이 없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자칫 흐트러질까봐 우려했던 선생님들은 시험이 없어도 아이들이 즐겁게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을 추동하는 본질의 힘은 시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시험이 아닌 활동을 하며 아이들도 자신들을 발견해 나간다. 자신이 관심있는 것들에 대해 '두려움'없이 움직인다. 생명 과학 교과서의 모형을 실제로 만들어 보면서 지식의 깊이는 총체적이면서 깊어져가고, 직업 체험을 하며 비로소 자신의 꿈을 찾는다. 

그렇게 수업 시간에 졸거나, 혹은 어떻게 하면 피씨방을 가거나 게임을 할까 골똘하던 아이들은 '자유학기제'라는 풀어진 물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기 시작한다. 어느 학교는 아이들이 스스로 영어 공부를 위한 앱을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학교는 학교 방화벽에 부딪쳐 죽는 새들을 위한 부딪침 방지 스티커를 기획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학교 내에 자치 시설을 위한 쉼터나 조리실을 기획하기도 한다. 

이 과정은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도 처음 가보는 과정이기에, 때론 그 과정에서 '선생님'으로서의 '존재론'에 막막해 하기도 하고, 학생들은 시간이 흘러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없기도 한다. 하지만, 그 첫 발자국은 때론 실패라도 자신들이 딛은 거라, 그 걸음의 웅덩이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또 다른 발걸음을 띨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몇몇 학교, 뜻있는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자유학기제'를 다룬 <다큐1-학교의 진화>는 그저 교육부 시행령에 따른 자유학기제를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이 새로운 시도가 현재 교육 현실, 그리고 사회 발전의 과정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규정하고자 애쓴다. 그것을 위해 실제 SAT를 반영하지 않는 미국 햄프셔 대학의 교육 과정에서부터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애썼다. 또한 자유학기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의 선생님들의 주저함과 고민들을 가감없이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자유 학기제가 진행되는 학교 교육 현장 밖에서, 뒤처진 진도를 먼저 뽑아야 한다고 홍보하는 학원의 실상을 드러내며 학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교육 풍토의 현실도 짚는다. 

무엇보다 <학교의 진화>가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 교육 현장의 모순이다. '입시 교육'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현실에서 아이들은 스스로의 꿈은 사치인 양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숨죽여 자신을 짖누르고 있는 상황를 보여주며, 자유학기제라는 쉼표를 통해 아이들이 '귀차니즘'을 떨어내고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주체적 인간으로 설 가능성을 열어보인 것이다. 더불어 활기넘치는 공간으로서의 학교도 함께. 

by meditator 2015. 12. 19. 16:54

여기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고등학생이다. 하지만 고등학생인 이 아이가 학교에 가서 하는 일은 잠을 자는 일이다. 제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는 것도 힘들다. 그래도 겨우 온 학교에서 아이가 하는 일이란 하루종일 잠만 잔다. 수업 시간에 깨우던 선생님도 결국 포기하고 만다. 함께 운동장에 나가 체육을 하자며 아이를 흔들던 친구들도 잠에 취한 아이를 어쩌지 못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이 학생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선 이런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도대체 부모가 어떻게 키웠길래?' 그런데, 48%난 되는 고등학생들이 평소에 학교를 그만두고 싶단 생각을 한다면, 그리고 그중 태반이 하루 수업의 대부분을 '잠'으로 때운다면, '학교를 왜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아깝잖아요. 3년동안 하지도 않는 공부하려고 학교 책상에 앉아있는게'라는 아이들의 '토로'에서 비단 그 책임을 학생 개인의, 혹은 학생 부모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2014년 한 해에만 2만5천명의 학생이 '학교 부적응'이란 이유로 '자퇴'를 하는 현실, 그리고 그렇게 떠날 용기를 내지 못하는 다수의 학생들이 '3년'을 '잠'으로 때우는 학교의 현실에, sbs가 창사 25주년 기획으로 야심차게 문제 제기를 한다. 과학과 현실의 조우를 마련했던 사이언스 픽션(sciencefiction)이나 집단 지성의 사회 변화 움직임을 담은 소셜픽션(socialfiction)처럼 상상 속의 학교를 현실로 구현한 스쿨픽션(schoolfiction)을 시도한 것이다. sbs스페셜은 29박 30일의 바람의 학교 리얼리티를 11월22일부터 12월 13일까지 4부작으로 방영했다. 

바람이 부는 곳, 그리고 바람이 이루어지는 곳, 바람의 학교 
제주도에서도 바람이 가장 많아 풍력발전기가 6기나 도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마을, 이곳에 임시로 바람의 학교가 창립되었다. 전 이우학교 교장이었던 정광필 교장 선생님을 비롯 전국 각지에서 뜻을 가지고 오신 네 분의 선생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서울 사대 대학생 멘토 5명, 거기에 소년원을 갓 출소한 아이에서 부터, 탈북 청소년, 다문화 가정의 아이, 홈스쿨링에서 부터, 하루 여섯시간 이상 게임만 하는 아이에서부터, 학교에만 가면 자거나, 아예 학교 가기조차 거부를 하는 아이까지 다양한 전력(?)을 가진 16명의 아이들이 '바람의 학교'의 입학생이 되었다. 

4주간에 걸친 소셜픽션, 하지만 당연히 순조롭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pc방등 아이들이 즐겨놀만한 꺼리가 없는  이곳에서 새로운 다짐을 가지고 '우일신'해보자는 선생님들의 다짐과 달리, 아이들의 흡연권에 대한 논의조차 쉽지 않은 '정글'이 바로 학교의 시작이었다. 



지금의 학교와는 다르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온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와 같이 자신들을 '교칙'이란 이름으로 '통제(?)하려는 선생님들에게 불만을 표출하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하지만, 차라리 토론이 돠는 사안이면 그렇다 치지만, 아예 막무가내 하교에 들어서기 조차 힘들게 생활 습관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은, '학교 존립' 자체에 위기를 가져온다.

튕겨나가고 널브러지는 아이들을 추슬러 겨우겨우 학교의 틀안에 꾸겨 넣지만, 일반인들조차 난해한 '오이디푸스'의 독해에서부터 시작된 '연극 수업'등은 아이들로 하여금 '학교'의 의미를 찾기 힘들게 한다. 따라서 일반 학교 교실의 풍경이 다시 답습되고, 그런 아이들의 몸에 밴 저항(?)에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선생님'이 된 존재 이유조차 되물으며 아이들과 함께 흔들린다. 

그렇게 어거지같은 교육과 막무가내의 함께 함으로 몇 주가 지나며, 도저히 가능성이 없을 것같은 아이들에게서 희망의 빛이 보인다. 그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거부하는 아이들마저 있었던 연극 수업, 준비 과정에서 늘어지던 아이들도 막상 연극이 구체화되어 자신들에게 맞는 책임이 주어지자 달라지기 시작한다. 평소에 화장을 즐기던 아이는 분장을 하고, 하루종일 기타만 치던 아이는 음악을 만든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살던 아이는 편집을 하고, 자신의 삶에 이유를 찾지 못하던 아이들이 사진을 찍고, 무대 장치를 하며 눈을 빛낸다. 그러다 보니 어느 덧, 상습적으로 지각을 하던 두 아이들이 반장이 되어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시점까지 이르게 된다. 

도대체 외딴 곳에 지어진 학교에서, 난해한 오이디푸스를 읽으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던 바람의 학교는 4주만에 스스로 만든 연극 '수업료를 돌려 주세요'와, 가시리 홍보 프로젝트 두 편을 성공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을 찾아온 학부모들과 눈물의 상봉을 하고, 16명 그 중 한 명의 탈락자도 없이 선생님의 성의있는 졸업장을 받아들게 되었다. 



바람의 학교가 던지는 질문; 학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이들이 학교로 간 기숙사에서 오후가 되도록 잠에 늘어진 아이들, 집보다 편할 줄 알고 왔는데 자신의 자유를 속박한다며 돌아가겠다는 아이들에게는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을 통해 느껴진 절망이 깊은 만큼, 겨우 4주만에 그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이 만든 랩을 쑥쓰러워하며 발표를 하고, 반장으로 다짐을 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 반전의 묘미는, 그저 감동 이상의 충격이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아이를 추스리기 위해 달려온 교장 선생님, 흡연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다하여 아이들에게 담배를 나누어 주는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이 외면하는 수업에 눈물로 읍소하는 선생님, 그런데, 그 포기하지 않는 선생님들의 진심에 아이들이 조금씩 깨어난다. 물론 그 과정에는 진심만이 있는 건 아니다. 담배를 나누어 주듯이 처음 선 원칙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선생님으로서의 존재 이유에 회의를 가지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손을 놓지 않는다면,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도달한 성취이다. 결국 바람의 학교 4주가 남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아이들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아주 지극히 사소한 원칙이다.

또한 그 원칙과 함께, 그 널브러진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자신의 공연을 완성하듯이, '희망'의 내용이다. 대다수 무기력한 청소년들의 문제는 가정문제나, 학업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에서 앞으로 살아나갈 그들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여부라고 다큐는 힘주어 말한다. '희망 진로가 없는 상위권 학생들이 희망 진로가 있는 하위권의 학생들보다 학교 적응이 떨어진다'는 조사에서도 드러나듯이,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은 아이들에게 그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견디게 만든다. 그리고 바람의 학교 4주의 과정은 결국 그걸 찾아내는 과정일 뿐이었다. 

13일 방영된 4부의 끝부분에서는 4주간의 바람의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의 후일담을 다루었다. 누군가는 바람의 학교 경험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고, 누군가는 자신이 하고싶은 음악에의 길을 열게 되었다. 그렇게 몇명은 바람의 학교 경험으로 다음 희망의 징검다리를 짚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바람의 학교에서 반장까지 하던 아이는 학교로 돌아가 다시 예전처럼 되었다. 학교를 나오지 않은 것이다. 바람의 학교 교장 선생님이 나서서 아이를 추슬러 보지만, 결국 아이는 자퇴를 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결과는 바람의 학교가 결국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그렇게 달라질 수도 있는 아이를 제 자리에 돌려놓고 마는 기존의 학교 교육 시스템을 증거하는 것이다. 나서서 주도적으로 아이들을 이끌 수 있는 아이도, 결국 스스로 학교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마는 현재 학교 교육 시스템, 그것에 대한 강력한 물음표로, 그리고 바람의 학교 경험으로 정규 학교 과정에서 적응을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대안 교육 센터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교육자에 대한 물음표로 마무리된다. 
by meditator 2015. 12. 14. 14:07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에 대해 '전국민을 비정규직으로 만들려는 계획으로, 임금이나 해고에 있어 노동자들의 법적 보호장치를 완전히 해제시키는 심각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민주 노총 장그래 운동 본부는 전국 각지에 1만 여개의 투표소를 설치하고 정부의 반 노동성에 대한 국민들의 의사를 묻기로 하였다. 


과연 국민들은 누구의 편을 들까? 정부의 노동 개혁이 민주 노총이 주장하는 바의 '음모'라는 것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까? 현실은 암담하다. '10월 19일자 한겨레 신문 칼럼 <야! 한국 사회>에 소개된 9월 15일에서 17일에 걸쳐 실시한 한국 갤럽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정부의 노동 개혁에 대해 '좋은 일자리 마저 나쁘게 만들 수 있다'며 반대한 의견이 41%인 반면, '기업이 유연하게 고용할 수 있어야 일자리가 늘어난다'며 찬성한 의견이 46%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런 여론 조사의 결과에 대해 칼럼의 지은이는 전국 방방 곡곡에 걸린 '정부의 '노동 개혁으로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이라는 현수막 정치의 소산이라 결론내린다. 즉, 부모 세대를 과녁으로 하여 '우리 아들 딸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기 위한 노동 개혁'이라는 선동이 먹혀 들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세대 갈등론'이 '노동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기성 세대의 양보를 얻어내려 한 것이다. 



금수저 논란, 그 진실은?
과연 최근 우리 사회에서 등장하고 있는 세대 갈등론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기성 세대의 양보를 타깃으로 삼은 '노동 개혁'이 결국 전국민의 비정규직화를 결과하는 것처럼, 최근 프레임으로 빈번하게 나타나는 '세대 갈등론' 역시 우리 사회 갈등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0월 20일 <pd수첩>은 그 왜곡된 갈등의 민낯을 드러내고자 한다. 

<pd수첩>이 주목한 것은 사립학교 교원의 불공정한 임용이다. 프로그램은 최근 10년간 사립학교의 친인척 채용 현황을 입수했다고 한다. 명단 속에는 이사장의 아들, 딸, 조카, 며느리 등 친인척들이 현재 교원으로 근무하고 있음이 즐미하게 드러난다. 사립학교 기간제 교사 모임 사이트에 '내정자'라는 검색어를 치면 2000여개가 넘는 게시물이 나온다. 미리 내정자가 있느냐며 문의를 하는 예비 교사들의 문의와, 어느 학교에 내정자가 있다는 소식들이 대부분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내정자란 누구일까? 사립학교 친인척 채용 현황을 확인하기 위해 <pd수첩>이 찾아간 학교, 188;1의 경쟁을 물리치고 채용된 사람은 이사장의 며느리였다. 이런 식이다. 누군가의 며느리, 아들, 조카가, 면접 50%의 배점이 있는 채용 과정에서, 혹은 타 후보들과 애초에 다른 준비된 시험 조건을 가지고 사립학교 교원에 응시한다. 결국 다른 응시자들은 들러리이다. 설사 기간제 교사가 된다해도, 정교사의 몫은 이사장의 인맥을 탄 그 누군가의 몫이다. 이러니, 꼭두각시가 되지 않기 위해 '내정자'를 검색해 보는 일이 당연시 되는 것이다. 

항의를 하는 프로그램의 제작진에 대해 사립학교 측은 당당하다. 이른바 '사학의 자율권'을 운운하며, '설립 정신의 유지'를 들먹이고, 결국 '가문'으로 귀결된다. 결국 '설립 정신을 구현하는 인재'란 이사장의 친인척이거나 인맥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이렇게 사립학교 교원들이 사립학교 측의 인맥으로 채워지는 동안, 교사가 되긴 위해 오랫동안 노력한 학생들에게 주어진 길이란 임용 교시라는 바늘 구멍이 유일해 진다. 2015년 기준 유치원 교사 7.9;1, 중등 10.6;1의 길이다. 

<금수저 선생님>에서도 보여지듯이 결국 '금수저' 논란의 본질은 대를 이른 계급의 재생산이라는 것이다. 역시나 한겨레 20일자 <청년 담론이 감추는 것들>에서는 이른바 청년 세대 혹은 세대 갈등이라는 프레임이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8월 한겨레 경제 사회 연구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상층 이상의 청년층 78.5%는 그들의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낙관적인 의견을 보였다고 한다. <금수저 선생님>에서도 보여지듯이 자식을 위해 없는 자리도 만들어 주는 부모들, 대학원을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이 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는 희망적일 수 밖에 없다. 그에 반해 중간층(67.9%)나, 중하층(55.3%)로 가면 '희망'의 수치가 떨어지다가, 빈곤층에서는 희망이 없다가 52.2%로 그 비율이 역전된다고 한다. '헬조선'이 현실은 그들의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부모의 자산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불공정성, 그 실체는? 
20일 <pd수첩>의 의미는 그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금수저 논란의 실체를 낱낱이 밝히는데 그치지 않는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2015년 서울시 교육청의 291개 사립학교 편성 예산은 8840억원이라고 한다. 경기도 교육청까지 합치면 1조 6천억원이 넘는다. 이 돈은 대부분 재정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한 사립학교의 재원 충당에 들어가며, 그 대부분은 교원들의 인건비로 쓰여진다고 한다. 

결국 가문까지 운운하는 사립학교의 본질은 '준공립'이라 할 정도로 정부의 재정 지원금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사립학교는 자기들의 잇속을 보전하기 위해, 자기 친인척들을 교원으로 임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당당하게 '금수저'의 권리는 주장하지만, 결국 그 '금수저'들을 먹여살리고 있는 것은, 사립학교의 자체 재원이 아니라, 국민들의 혈세라는 '아이러니'를 <pd수첩>은 밝힌다. 결국 우리 사회 '금수저'들의 배를 불리워주는 것은 왜곡된 우리 사회의 제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pd수첩>이 취재한 학교 중에는 최근 형편없는 급식으로 문제가 된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학교도 들어있다. 심지어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급식 문제는 그 사립학교가 가진 '복마전'의 일부일 뿐이라 입을 모은다. 급식 재료가 풀어지기도 전에 은밀하게 다른 트럭으로 옮겨지는 일이 가능한 이 사립학교 역시 '금수저' 선생 채용을 했다. 그렇게 채용된 '금수저' 선생은 학교의 비리에 눈을 감거나, 적극적으로 돕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헬조선'을 구할 '수구 기득권 층'에 대항하는 변혁의 상징'은 그곳에 없다. 가진 것이 많은 금수저 집안은, 젊은 세대를 위해 그 어느 것도 양보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부를 대물림하기 위해 고심할 뿐이다. 그곳에 '세대 갈등'이란 없다. 부를 가진 아버지 세대를 대물림하는 '희망'을 가진 젊은 세대가 있을 뿐. 그런 금수저 선생님들의 존재 뒤로, 교사가 될 기약이 없는 임용 고시 준비생들의 한숨은 깊어진다. 

by meditator 2015. 10. 21. 06:00

얼마전 중국 동방 위성 tv <여신의 패션>에 참가한 배우 윤은혜의 참가 의상이 온라인 상에서 문제가 되어 기사화되기 까지 하였다. 하지만, 네티즌들이 속속 찾아내는 '표절' 확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인 윤은혜는 오히려 반박을 하거나, 그 사실에 대해 함구하여 논란을 증폭시켰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윤은혜가 보인 반응의 속내는 11월 발매 예정 인 중국 잡지 <보그 차이나>와의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윤은혜는 '중궁 생활이 편하고 기대되'며, '내게 중국은 새로운 시작'이고, '대중들 마음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생각을 밝힌다. 그녀가 했던 '표절'에 대한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오히려 이제부터의 중국 활동에 대한 포부를 밝힐 뿐이다. 한국 네티즌을 중심으로 한국 내에서 들끓은 '표절' 시비에도 불구하고 동방 위성 tv <여신의 패션>에 참가한 윤은혜는 연일 1위에 오르는 성과를 올렸다. 고국의 표절 시비가 문제가 된다 하더라도, 아니 그것을 무시할 만큼 중국 활동을 통해 얻고 있는 결과물이 더 큰 것이다. 이렇게 '표절' 시비조차 꿀꺽 삼켜버리는 한 여배우의 행보는 최근 한국 문화 산업계를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만든 이른바 중국 한류의 한 표상이다.





한국 콘텐츠에 대한 중국의 끊임없는 구애
윤은혜의 사건은 이른바 '중국 한류'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중국 한류에 기댄 것은 윤은혜만이 아니다. 10월 14일 <라디오 스타>의 mc진들은 두번 째 출연한 fx의 멤버 루나에 대한 대우에 격을 달리한다. 그저 아이돌 그룹의 외국인 멤버였던 루나는 이제 중국 한류의 선두 주자로, 엄청난 출연료로 저절로 mc진의 고개를 수그리게 만든다. <라디오 스타>만이 아니다. 첫 방송을 선보였던 <해피 투게더>에 출연한 <런닝맨>의 동료 지석진과 개리를 대하는 유재석의 반응 조차 다르다. 여전히 동네 형 다루듯이 짖궃게 굴지만, 방송의 상당 부분은 개리와 지석진이 '중국 한류'로서 얼마나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에 대한 감탄과 존경(?)으로 채워진다. 더 이상 찌질한 동네 형이나, 이상한 동생이 아니라,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류 스타인 것이다.

이렇게 방송가의 문화나 관행조차 변화시킨 중국 한류, 그 현실에 대해 10월 15일 방영된 <추적 60분>이 다룬다. 그 시작은 지석진과 개리를 한류 스타로 등극시킨 <런닝맨>이다. 일요일 저녁 예능 <런닝맨>은 한국 내에서는 동시간대 타 방송사 예능에 비해 낮은 성적을 보이지만, 해외로 나가면 위상이 달라진다. 아이돌을 비롯한 핫한 스타들의 출연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출연진들이 중국내 한류 스타가 될 정도로 이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는 핫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시청률 40%에 해당하는 5%의 기록적인 수치를 자랑한다. 한류 붐의 시초가 되었던 <대장금>이 2.9%였음을 상기해보면 격세지감의 인기다. 심지어, 중국 위성 tv에서는 이와 비슷한 아류 프로그램들이 양산될 정도이고, 중국 내에서 <달리는 사람들>처럼 새로운 공동 제작 양식도 도입되고 있다. 

최근 중국 한류는 이전에 드라마를 중심으로 완성된 작품의 콘텐츠를 파는 형태에서 변화하는 중이다. 드라마로 시작된 한류는 이제 <런닝맨>, <드림팀> 등 예능 프로그램이 그 중심에 놓여지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넘어 제작진의 중국 행과, 공동 제작 등 새로운 양식이 시도되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 <별에서 온 그대>를 통해 검증을 받은 장태유 피디는 중국에서 두번 째 작품에 돌입하고 있으며, mbc 예능의 대부 이영희 피디 역시 중국 행을 선택했다. 

중국 한류의 변화는 여러가지 외적 내적 요인에 기인한다. 무엇보다 최근 중국 정부가 '특정 국가 특정 지역에 편중해서 콘텐츠 구입을 자세하라'는 정책을 내건 것처럼, 자국 문화 보호와, 외국 콘텐츠 수입에 제동을 거는 등 무분별한 한류 수입에 통제를 가하려고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정부의 정책 발표 이후 중국에 수입되는 한국 드라마의 수입 단가가 한층 낮아졌다고 한다. 또한 중국 문화계 이제는 대부분의 한류 콘텐츠 상품들이 수입된 상황에서, 선별적인 수요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제작진, 그리고 합작을 통해 중국화된 콘텐츠를 만들어 가고자 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 문화계가 변화되는 것과 달리, '러쉬'라는 말이 적당할 정도로 한국의 문화 인력들의 유출은 물밀들이 중국으로 몰려가고 있다. '15분 짜리 코너에 1억 5천의 제작비, 카메라 72대'를 쓸 수 있는 풍족한 제작 환경이 능력있는 문화 자원들의 유출을 독려한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포화가 된 상황에서 열린 중국 시장', 돈과 시장이 있는 중국과, 재능이 있는 한국 사람들의 결합은 천생연분(장태유 피디)라는 것이다. 더욱이 경제 대국에 이어, 문화 콘텐츠 강국을 추구하는 중국의 정책은 말만 하면 헐리우드의 첨단 기자제를 빌려서라도 제작을 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여, 열악한 제작 환경에 시달리던 문화 인력들에겐 '엘도라도'처럼 여겨질 것이라 다큐는 전한다. 



얼마 남지 않은(?) 한류의 미래 
중국 시장으로 달려가는 인력은 비단 피디 등만이 아니다. 영화 <명량>에서 특수 효과를 맡았던 업체는 이제 중국 영화 <서유기>의 특수 효과를 담당한다. 우리 어린이들의 친구 뽀로로도 중국 시장을 향해 달린다. 중국에는 한국 감독들의 합숙소가 있다는 우스개가 돌 정도이다. 

이런 한국 인력의 중국 러쉬에 대해, <까칠한 시선>의 최광희 평론가는 한국 영화가 중국 영화의 하청 업체로 전락할까 우려한다. '하청'도 만만치는 않다. 소규모 방송 제작사는 중국측의 요구에 따라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돈을 못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이런 경우는 비단 소규모 제작사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제작사 역시 중국 측의 요구로 제작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시즌2를 제작할 처지에 놓였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거기에 심각한 것은 윤은혜 사례에서도 보여지듯이 '표절' 등에 대한 중국 측의 취약한 법적 장치도 문제다. 한국의 방송사, 혹은 제작사가 중국 측과 계약을 해도, 그 전에 타 위성tv에서 아류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해 버리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개그 콘서트>, <무한 도전> 등이 그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고 있다. 심지어 한국의 인력들에게 그 모사 프로그램 제작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류 프로그램이든, 자체 프로그램이든 이미 한국 내 방영되고 있는 대다수의 프로그램이 동시에 중국인들과 공유하는 현실이다. 중국 문화계는 이제 한류의 수입을 넘어, 공동 제작, 그리고 유능한 인력의 수혈을 통해 자신만의 문화 콘텐츠를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현재 융성하고 있는 중국 한류의 미래가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정도의 기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한류'라면 '일본'이 대세였다. 하지만, 결국 '겨울 연가'붐을 피크로 재미를 보게 만들었던 일본 한류는, 일본내 한류 거리를 불황에 빠뜨릴 정도로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말았다. 동방신기, jyj처럼 일본 내 자생력을 가진 몇몇 한류 스타를 제외하고는 일본 한류는 맥을 못춘다. 과연 중국 한류는 이와 같은 일본 한류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까. 조만간 미국에 이어 문화 콘텐츠 강국으로 등극하고자 차분히 준비해 가는 중국 콘텐츠 시장에서, 과연 우리는 한때 '한류'로만 남을 것인가, 재능있는 인력의 유출 이상, 콘텐츠 강국의 위상을 지킬 수 있을지, 낙관은 쉽지 않아 보인다. 

by meditator 2015. 10. 15. 16:10

지난 9월 29일부터 30일까지, 그리고 4일 저녁에 거쳐 재방영된 <ebs다큐 프라임- 행복한 건축 3부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4일밤 방영된 <sbs스페셜-아파트 혼란의 시장>으로 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맞겠다. 대한민국의 주거비율, 단독 27.3%, 연립 12.6%. 아파트 59.6%이 시대, '집'에 사는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아파트'라는 곳에 사는 세상, 하지만 그런 '집'을 사는데 한 푼도 안 쓰고 평균 9년 5개월을 모아야 집을 살수 있는 세상, 그런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란 대명사로 지칭되는 '집'이란 <sbs스페셜>에서 보여지듯이 지금 아파트를 살 것인가 말 것인가로 귀결되는, 부동산의 물건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즉,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사회의 문화적 형태, 혹은 가족의 정체성을 짓뭉개버린 채 오로지 '돈'으로의 가치가 있느냐 여부가 그 모든 것을 짚어 삼켜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제적 부'의 상징인 혹은 '부'의 뻥튀기가 되는 '집'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곧 '루저'가 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행복한 건축'이란 무엇일까? 총선 전에 건설사들이 어떻게든 사둔 땅을 털어버리려 마구잡이로 분양을 하고, 정부는 앞장 서서 그걸 부추키는 세상에, 건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다니, 그건 어떻게 사놓은 아파트 한 채가 일확천금이 되었던 우리 한강의 기적 세대 이후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행복한 건축이란 무엇일까?
그렇게 '건축'=환금성이 되는 세상에서, <행복한 건축>은 뭉근히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서울 시민 아파트가 건립되어, 1970년대 한강이 개발되어 건축이 돈이 되었던 세상에서 아파트 풀숲을 헤치고서야 겨우 찾아들어갈 수 있는 '학소도'로부터 다큐는 시작된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월급을 모아 하나둘씩 벽돌을 올렸던 집, 하지만 세월과 함께 버려지다시피 하여 외딴 범죄의 소굴이 될 뻔한 집, 그 집을 공부다 여행이다 하며 외국을 떠돌던 아들이 되찾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글씨로 쓴 '학소도(학이 머무는 섬)'이란 현판을 올리고, 어린 시절 추억을 고스란히 벽에 걸어놓고 그 멈춘 시간과 함께 아들이 아버지처럼 나이들어 간다. 그런가 하면 충남 공주에 역시나 버려질 뻔한 돌아가신 교우 할머니의 집이 할머니가 쓰시던 세간살이가 그대로 자리를 지킨 채 '루치아의 뜰'이란 찻집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오하이오 페리스버그에는 200여년이 된 집들이 그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추억을 상실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는 '건축물'들을 통해, 다큐는 '건축'의 의미를 묻는다. 그것이 1부, 집을 기억하다의 화두이다. 

그렇게 가족과 함께 살아온 시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건축은 결국 함께 살아온 삶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건축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소통하고 나아가 치유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부, 소통을 넘어 치유로는 바로 그렇게 건축을 통해 소통과 치유를 논한다. 

소통의 건축을 위해 다큐는 일본의 고즈넉한 도시 고치현을 찾아간다. 일본의 작은 도시, 하지만 건축을 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꼭 찾는다. 그 이유는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다와씨가 만든 '소통'의 아파트 때문이다. 1971년부터 시작하여 세번에 걸쳐 건축된 아파트, 계단 대신 건물을 삥 둘러싼 비탈길로 에워싸여진 아파트는, 그거 건축물을 넘어 '소통'의 공간을 지향하는 대표적 건축물로 유명하다. 또한 거주하는 세대가 너나없이 살아가는 풋콩집 또한 소통의 공간이 된다. 

소통을 넘어 '치유'가 되는 건축물도 있다. 세지마 가즈요가 지은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은 거창한 미술관 대신 고풍스런 도시와 조화를 이루며 도시민들을 향해 열린 나즈막한 열린 건축물로 도시의 숨통을 틔운다. 그런가 하면 루이스 칸에 의해 지어진 소크 생물학 연구소나 라 투레트 수도원은 애초에 '치유'가 건축물의 목적이 된다.



'행복한 건축'을 통한, 아파트 대한민국에 대한 반성
하지만 다큐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멋들어지게 지어진 건축물이 아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골목을 걸어보라는, 그래서 스스로 그 골목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의 병원 건물을 동네의 헐릴 한옥으로 재단장한 대구의 한 의사처럼, 그리고 그리니치 빌리지를 뉴욕의 명물로 생존시킨 제인 제이콥스처럼, 젠트리피케이션을 통해 사라져가는 도시 속 소통과 치유의 공간의 가치를 다큐는 역설한다. 부수고, 짓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는 소통과 치유는, 우리가 머물렀던 공간을 소중하게 지키고 그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2부는 결론짓는다. 

그래서 다큐의 3부는 '기억의 유산'으로 귀결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애초에 호텔로 지어졌지만 역사의 흐름에 따라 감옥과 수용소를 오갔던 건물이 그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채 '문화적 대사관'의 역할을 하듯이, 건축은 그것이 흘러온 시간을 새로운 시대 속에 흩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고 가꿈으로서, 사랑하면 알게되고, 그 앎은 이전과 다른 가치는 지니듯, '기억의 유산'은 오늘을 사는 주거 유목민들의 삶은 안정화시킬 유일한 수단이라 주장한다. 

세계의, 그리고 우리나라의 '행복한 건축물'들을 통해 3부의 다큐가 도돌이표처럼 되새기는 것은, '기억'의 흔적을 쉽게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기억'의 흔적을 놓친 그곳에 남는 것은 결국 '자본'의 잔인한 파고만이 휩쓸고 지나갈 터이니. 그리고 오히려 그 흔적이,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가치를 부여하며 그곳을 오히려 더 가치있는 명소로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낙산의 사람 냄새 나는 고즈넉한 골목, 그리고 동사무소에 목욕탕을 만들었던 정기용의 '인간적 건축'이 '행복한 건축'의 숨겨진 진짜 주제 의식이다. 굳이 소리 높여 '건축 자본주의'를 비난하거나, 아파트 대한민국을 비판하지 않지만, 오히려 '행복'이란 주제로 조감한 3부의 건축 속에서, '환금성'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주거'를 통한 '행복'의 가치는 강건해진다. 

집은 유년시절을 보낸 기억의 집, 현재 사는 집, 살아 보고 싶은 꿈 속의 집이 있다. 이 세 가지가 겹친 집에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정기용


by meditator 2015. 10. 5. 17:25

최근 새정치연합의 윤후덕 의원의 로스쿨 출신의 딸의 대기업 취업 청탁이 이슈가 되었다. 윤의원만이 아니다. <pd 수첩>이 찾아본 사례에 따르면 여당 의원, 장관, 대법원 등 정가와 법조계 등 다양한 곳의 명사들이 로스쿨 출신 자신들의 자녀들을 자신의 '인맥'을 통해 '취업'을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네이버의 경우, 지난 해 5월 인턴으로 뽑혔던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의 딸을 같은 해 11월 변호사로 정식 채용했다. 그 과정에서 변호사 채용 공고는 없었다. 네이버는 자신들이 채용한 변호사가 이주영 의원의 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이의원의 딸이 채용되는 그 시점에 네이버와 이주영 의원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있던 해양 수산부 사이에 '해양 수산 콘텐츠 공동 활용'에 대한 포괄적 업무 협약(MOU)를 체결했다. 이외에도, 김태원 새누리당 의원의 아들 역시 2013년 정부 법무 공단에 특혜 채용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로스쿨, 개천의 용인가? 희망의 덫인가?


현대판 음서 제도 로스쿨

불거진 몇몇 의원 자녀들의 취업 특혜는 어쩌면 로스쿨 제도가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우리 사회 가진 자들의 계층 아니 이제는 계급이 되어가는 에스컬레이션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 할 수 있다. <PD 수첩>은 왜 로스쿨이 '현대판 음서 제도'가 되어가는지, 그 입학과 졸업의 전 과정을 샅샅이 훑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로스쿨 제도를 추진한 것은 노무현 정부 때이다. 2009년 사법 개혁의 차원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인재들을 전문성 있는 변호사로 양성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오늘날 일반 대학원의 두배인 연간 2000만원의 등록금을 내야 갈 수 있는 로스쿨은 로스쿨이 주장하는 바 다양한 장학금 등의 제도에도 불구하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제도가 되어가고 있다.


입학 과정에서의 진입 장벽은 비단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다. 경제적 장벽을 감수하고 로스쿨에 지원하는 학생들, 그들 대부분의 성적은 로스쿨의 기대치에 맞춰 비슷한 수준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비슷한 성적 수준을 가진 학생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결국 당락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은 '면접'과 자기 소개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그 과정에서 각 개인이 가진 배경, 집안, 인맥 등이 로스쿨 당락의 주요 요인으로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PD수첩>은 밝힌다. 심지어 아버지가 교수로 있는 학교에 아들이 입학을 하는 '로사부일체'의 웃지 못할 사례로 비일비재하다. 성적이 안되더라도 유력한 인물이 자녀를 거부라는 건 불가항력이다. 


로스쿨, 개천의 용인가? 희망의 덫인가?


'금수저'만이 아니다. 실제 서울 지역에 위치한 로스쿨의 경우, 대부분이 이른바 SKY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 또한 서울 지역 로스쿨 학생들의 거주 지역을 보면, 강남 3구가 다수를 차지한다. 높은 등록금, 불평등한 입학 사정 제도는 결국, 가진 자들의 계층 상승 과정으로서 로스쿨 제도를 안착시킨다. 


입학 이후에는 더더욱 문제가 된다. 상대 평가 중심의 평가 제도, 그리고 평가를 로스쿨이 책임지기에 절대적일 수 밖에 없는 교수의 권한 속에서, 입학 과정에서의 불평등은 오히려 확산되거나 양산된다. 교수의 자녀는 순탄하게 변호사를 따고 유력한 로펌에 취업을 하게 되고, 심지어 유력한 인사의 자녀는 로스쿨 1년차에 벌써 취업이 결정되어 버리는 웃지 못할 사례도 생겨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네이버와 해양 수산부의 업무 협약에서도 보여지듯이, 거대 로펌의 경우, 앞날을 위한 '보험'의 성격으로 대기업 자녀라든가, 고위 공직자, 고위 검사의 자녀는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받아들에게 되는 것이다. 


로스쿨, 개천의 용인가? 희망의 덫인가?


로스쿨 관계자들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로스쿨이 '현대판 음서 제도'의 오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입학에서 부터 교육 과정, 그리고 이후 졸업과 변호사 자격 취득, 취업에 이르기까지, '음서 제도'로 오인받을 수 있는 여러 제도적 헛점들을 가지고 있고, 이것들을 애써 해명하거나 개선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에서 2017년 사법시험이 폐지된다면, 변호사, 검사, 판사 등 법률적 직위들은 그간 그나마 우리 사회에서 '계층 사다리'의 최소한의 가능성마저 걷어차여진 채, 철저한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것이라는 것이 22일 <로스쿨, 개천의 용인가, 희망의 덫인가>의 결론이다. 


하지만, <PD수첩>의 결론에 더더욱 암울한 것은 로스불의 개혁만으로 쉬이 개선될 수 없는 우리나라의 사회적 현실이다. <PD수첩>이 암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사법 시험의 존치론은, 결국 왜곡된 결과를 낳게 되었지만 이미 노무현 정부시절 그 이전부터, 이미 계층 상승 사다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법률 마피아라는 패권 세력을 양산하는 주요한 통로이기도 했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스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경제적 부담을 지고, 상대적으로 덜 금수저들의 음서 제도로서의 역할을 한다지만, 이미 우리나라 사시 합격자의 대다수가 또 다른 '금수저'들이라는 것은 통계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대학 입학자, 그리고 그중 이른바 명문이라는 SKY 합격자의 상당수가 강남 3구와, 이른바 명문이라 불리워지는 학교들 출신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로스쿨은 이미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고착된 계급 구조의 일각을 일깨워 준 것에 불과한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법 개혁으로 시작된 로스쿨 제도가 결국 가진 자들의 음서 제도로 귀결된 현실이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5. 9. 23. 15:51

셀프 인테리어 말 그대로 자신의 주거 공간을 스스로 고치는 인테리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인터레어란 또 무엇일까? 실내 마감재, 가구, 조명기구, 커튼 등 쾌적한 실내 환경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이들을 변화시키는 과정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성 잡지를 사면 언제나 그 한 코너를 차지하는 것이 이른바 '인테리어' 파트이다. 한 눈에 봐도 몇 천 만원, 심지어 억을 호가하는 비용이 들었음직한 화려한, 혹은 멋들어진 인테리어가 우리의 인식에 박힌 '인테리어'였다. 그래서 새로 지은 아파트의 설비들을 몽땅 뜯어내고 완전 다른 집처럼 꾸미는 것이 인테리어였고, 거의 집을 새로 짓듯이 헌집을 싹 뜯어 고치는 것이 '인테리어' 인 줄 알았다. 그래서 '디자이너'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사람들에 의해, 비싼 자재와 가구들을 배치해 '잡지'에나 나올 그런 폼 나는 집을 만드는 것이 '인테리어'를 하는 것이란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의 근저에 깔린 것은, 즉, 몇 천만원, 혹은 그 이상의 돈을 들여 집을 고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돈을 들여도 아깝지 않을 오래도록 지낼 수 있는 '내 집'이 선행 조건이 된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전셋값 폭등에, 심지어 돈이 있어도 전셋집을 구하기조차 힘든 세상이 되었다. 삼포 세대라 지칭되는 젊은 세대들이 포기해야 할 항목의 제일 첫 번째는 바로 집인 세상이다.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지 않고서, 자신이 돈을 벌어 집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대한민국에서, 잡지에 등장하는 비싼 인테리어는 딴 세상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데, 아니 그렇다면 남의 집을 잠시 빌어 사는 전셋집은 그냥 꾹 참고 살아야 하는 건가, 심지어 전세도 아니고 월세라면? 그런 월셋집을 고치겠다고 하면, '미친'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평생을 벌어도 집을 살수 없는 세대라면, 퇴근 후 돌아와 머무는 '공간'을 통해 누릴 수 있는 행복조차 포기해야 하는 걸까? 


바로 이런 기본적인 욕망, 비록 나의 집은 아니라도, 내가 머무는 주거 공간을 내 맘에 드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셀프 인테리어'이다, 합리적인 금액으로, 내 맘에 쏙 드는 공간으로 재창조하는 셀프 인테리어, <mbc다큐 스페셜>은 바로 최근 붐을 이루고 있는 셀프 인테리어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제이쓴과 함께 하는 셀프 인테리어

<나 혼자 산다>를 통해 강남의 집을 단돈 97만원으로 180도 다른 집으로 변화시켜 화제가 되었던 셀프 인테리어계의 아이콘 제이쓴이 제작진과 함께 '셀프 인테리어'의 전도사가 된다. 


제작진이 선택한 셀프 인테리어의 대상자가 된 집은 세 집, 고향에서 직장을 얻어 올라와 처음으로 자신의 공간을 가진 이상진씨,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남겨진 두 자매의 미완성된 집, 그리고 결혼 7년차, 결혼 생활만큼 쌓인 짐, 그렇다고 더 이상 큰 집으로 이사를 할 형편은 아닌 김선아씨의 집이다. 


제작진이 사연을 보낸 신청자들 중 몇 집을 골라 집을 고쳐주는 컨셉은 마치 그 예전 신동엽이 진행하던 집고치기 프로그램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제이쓴이 합류한 셀프 인테리어의 시작은 집 주인의 눈을 가리고 집안으로 들어와 눈 가리개를 벗겨내면 신세계가 펼쳐지는 깜짝쇼와 다르다. 오히려 제이쓴이 제시한, 어떤 힘든 과정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싸인을 하는 '살벌한 (?) 과정으로 시작된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셀프 인테리어계의 아이콘이라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 '셀프 인테리어', 자신의 집을 가장 적은 비용을 들여 고치기 위해, 집에 거주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움직여 '인테리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첫 주거 공간을 가진 이상진씨는 제이쓴과 함께 도배를 하고, 김선아씨의 남편은 스스로 톱질을 한다. 겨우 스물 두살의 잔디씨는 자신들의 공간이 마련된다는 기대에 무거운 것을 마다치 않는다. 



셀프 인테리어의 과정은 거창하지 않다.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온집이 '짐' 덩어리였던 김선아씨의 집에서 보여지듯이, '인터리어'의 시작은 '빼기'이다. 자신의 것이라 쌓아두었던, 하지만 결코 쓸 일이 없는 것들을 빼고, 자신의 공간이지만, 남이 살았던 흔적을 하나 둘 지워간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도배를 하고, 가벽을 세우고, 분위기에 걸맞은 조명을 설치하면, 끝난다. 간단하지만, 그 과정은 온전히 최소한 이 공간의 명목상의 주인의 땀과 노력을 통해 하나씩 채워져 간다. 이상진씨 집의 멋진 벽화는 알고보니 크레용을 녹인 것이요, 김선아씨 집 현관문은 집 식구들의 낙서로 채워진다. 그저 아파트 베란다에 인조 잔디를 깔고, 탁자를 놓았을 뿐인데 마음을 나눌 공간이 탄생되었다. 


그렇게 하여, 남의 것같던 공간이 비록 월셋집이라도 퇴근 후 돌아와 쉴 수 있는 자신만의 안식처로 탈바꿈했고, 짐에 식구들마저 더부살이하는 것같던 공간은 가족들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진 스윗 홈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그저 돌아오면 설겆이 등 집안일만 남겨진 마음 붙일 곳이 없던 스트레스였던 집은 이제 난생 처음 자신의 꿈을 키울 '집'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그 누구 딴 사람이 아닌,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낸 곳이라 더 애착을 느끼게 된다. 


셀프 인테리어는 삼포 세대가 스스로 삶의 숨구멍을 만드는 방식이다. 자신의 집을 살 수는 없어도, 비록 빌린 집이라도 잠시 머무는 그곳을 자신의 개성이 숨쉬는 공간을 재탄생시키는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삼포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 생존 방식이다. 

by meditator 2015. 9. 22. 15:21

'이혼 연습1'을 통해 배우 이재은과 안무가 이경수 부부의 실감나는 '이혼 롤플레잉'을 다루어 화제가 되었던 <sbs스페셜>은 9월 20일 '이혼 연습' 그 두번째 시리즈를 방영했다. 첫 번째 '이혼 연습'에서 이혼의 당사자가 된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다큐는 이제 두번 째 이혼 연습으로 '이혼을 마주한 아이들'을 다룬다.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받는 아이들

첫 번째 이혼 연습과 마찬가지로 두번 째 이혼 연습도 '이혼'의 시뮬레이션에 참가할 부부로 시작된다. 벌써 8년전이 된 임신과 출산의 과정이 고스란히 한 광고를 통해 전달되며 전 국민의 감동을 자아냈던 전수아 이도엽 부부가 그 주인공들이다. 그렇게 전국민들의 눈시울을 흘렀던 시절이 무색하게 더 이상 손을 잡고 걷지 않는 건 물론, 남편 이도엽이 아내로 부터 이혼 결정을 들을 지로 모른다고 덤덤히 말하는 지경에 이르른 결혼 8년차의 부부, 이들 부부가 '이혼 연습'에 돌입한다. 


'가상 이혼 프로젝트'에 돌입한 전수아 부부는 실제 이혼 과정의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 소송을 준비하던 한 주부, 남편 측의 과실로 인해 자녀 양육에 유리한 위치였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어느날 친정 어머니와 돌아오던 아이를 납치해서 돌려주지 않은 채 2년이 흘렀다. 법은 '약취 유인'의 판결을 내렸지만, '법'의 처벌은 친권자의 영역에서 그저 '벌금형' 정도로 미약했고, 법적 제재는 더 이상 가해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하며 놔두었던 아이들의 옷이 작아진 지금, 이제 아이들은 엄마를 낯설게 바라본다. 


법적인 이혼 과정 중 아이들의 '약취 유인'은 생각보다 빈번하다. 그에 대해 법적인 처벌은 취약하고, '약취 유인' 당한 아이들조차, 데려간 과정에서 얻은 심리적 충격, 그리고 이어진 데려간 측의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남겨진 부모를 오해하고, 원망하며, '약취유인'한 부모를 선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이들에게는 지금 자신들에게 잘해주는 현실의 부모가 의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부모 중 그 누구를 선택한다 해도 아이들에게 남겨진 상처가 덜해지지는 않는다. 


이혼 후 직장 생활을 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 아이들이 자신을 잘 따라준다 위안을 삼았지만, 아빠가 없는 시간의 몰래 카메라는 충격을 준다. 엄마의 재혼과 새로운 출산 이후 달라진 아이들, 그 중 큰 아이는 부쩍 폭력적이 되며, 그 화풀이를 동생에게 퍼붓는다. 심리적 분석의 결과, 오랫동안 누적된 분노가 그 아이의 마음 속에 켜켜이 쌓아있다는 것이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이, 역설적으로 부모가 이혼했는데도 잘 자랐다는 말에도 분노를 느끼듯이, 부모 중 한 사람이 사라진 가정에서 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혼 가정 아이들에게는 상처로 남는다. 그렇다고 부모의 사정으로 이미 저질러진 이혼을 아이들에게 마냥 숨길 수도 없다. 또한, 홑부모와 살아가는 생활고의 무게도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으로 남는다. 



이혼의 그림자, 아이들의 무게 

2013이후 다시 증가세로 돌아선 이혼, 2014년 11만 5천5백건으로 소도시 수준의 인구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고, 여전히 OECD이혼율 1위의 자리는 부동이다. 그런 형편에, SBS가 꾸준히 내보내고 있는 <이혼 연습>은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문제인, 그리고 개별화된 문제인 '이혼'을 함께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유의미하다. 


특히 첫 회 이혼 연습이 배우 이재은 부부의 이혼 시뮬레이션을 통해 많은 관심을 받은 바 있어, 그에 이은 <이혼 연습2> 역시 전수아 부부를 가상 이혼 프로젝트에 불러들인다. 하지만, 부부의 문제와 아이들의 문제는 달랐다. <이혼 연습1>의 이재은 부부는 부부 모든 자신들의 문제를 실감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들의 가상 이혼 프로젝트가 현실만큼 실감나게 다가왔지만, 아이들의 문제에 이르면, 다큐에서 보듯이 전수아 씨가 대역 배우처럼 타인의 이혼 과정에 참여해 실감을 느끼는 이상, 직접 자신들의 아이와 '이혼'을 연습하기엔 너무 무리수였던 것이 드러난다. 


그 이유는 다큐 과정에서도 드러나듯이, 아이들은 그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부모에게 태어났듯이, 부모의 이혼 과정에서도 역시나 자신들의 뜻과 상관없이 상처를 받는 상황이기에, 더구나 어린 전수아 부부의 아이에게 부모들은 '이혼'이란 말 조차 꺼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큐의 마지막 '아이'때문에 이혼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전수아 부부의 멘트 역시 안일해 보인다. 내내 이혼 과정에서 상처를 입은 아이들의 문제를 이렇게 저렇게 다루다가, 마지막에 아이를 생각해서는 이혼할 수 없겠다는 마무리는 어쩐지 이율배반으로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OECD이혼율 1위의 현실에서, 아이를 배려하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이미 '이혼'이라는 것이 기정사실화된 과정에서, 아이를 생각해 보니 안되겠다는 잔뜩 문제만 벌려 놓은 셈이 된다. 


즉, <이혼 연습> 1이 이혼의 과정을 복기하며 결국 그 과정과 이후의 여파가 생각보다 여의치 않다는 것을 전달하려 했듯이, <이혼 연습>2 역시 마찬가지로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뜻밖에도 아이들이 많은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전달하여, 이혼 자체에 대한 고민을 보다 심도깊게 하려는 의도인 것은 알겠지만, 이미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다수의 아이들이 양산되고 있는 상태에서 처방은 어쩐지 눈가리고 아웅하는 느낌인 것이다. 오히려 '이혼 과정'에 상처받는 아이들에 촛점을 맞춘다면, 그 아이들이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 속에서 상처받은 아이들의 치유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 현실적인 해법이 아니었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 아이들의 상처를 운운하기에 대한민국의 '이혼'은 너무 '기정 사실'인 것이고, 과연 아이들만을 생각하며 연장해 가는 부부의 삶이란 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이혼하는 부부들은 아이들을 외면하는 것이 되는 것인지, 부부를 대상으로 한 <이혼 연습>1과 다르게, 이혼 과정에서 상처받는 아이들에게 촛점을 맞춘 <이혼 연습>2는 그 과정에 끼인 아이들만큼이나 딜레마에 빠진 듯 보인다. 

by meditator 2015. 9. 21. 15:40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대머리'란 글자만 봐도 웃음을 터트린다. tv 속 개그맨들의 대머리 분장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된 웃음 코드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머리'란 한 마디로 '웃음거리'다. 그렇다면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살아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어떨까? 그 대한민국에서 대머리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9월 14일 <mbc다큐 스페셜>이 다루었다. 


국민건강 보험 공단에 따르면 전국민의 14%, 탈모 인구 1000만 시대이다. 다섯 명 중 한 사람이 '탈모'의 고민을 앓아가고 있는 시대, 하지만, 그 '일상'이 된 '탈모'가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차라리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없는 게 더 나은 '고통'과 '치부'의 상징이 된다. 





뒤집어쓰거나, 이식하거나, 대머리의 삶

<mbc다큐 스페셜>은 이제는 일상이 되어가는 '탈모'의 현상, 하지만 여전히 사회 속 타자로, 그 '다름'으로 인해 손가락질 당하고 고통받는 사회 속 '타자'로서의 '대머리'의 삶을 지켜본다.


그 시작은 '대머리'와 관련된 프로그램 제작과 관련하여 '대머리' 연예인들의 섭외이다. 하지만, 자타공인 대머리인 연예인들이 막상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 출연에 미온적이거나, 외면을 한다. 결국 또 의탁하게 된 것은, '게이'로 커밍 아웃을 한 홍석천, 그의 말대로, 자신이 게이인 것 다음으로, 자신을 힘들게 한 것이 '대머리'라는 사실인데, 여기서 또 '총대'를 매라는 말이냐는 볼멘 소리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은 '용감한' 홍석천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그렇게 '대머리'인 홍석천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 프로그램, 카메라는 머리숱이 풍성한 한 남자의 일상을 따라간다. 집으로 돌아와 화장실로 들어간 그 남자, 조심스레 머리의 중앙 부분을 들어낸다. 대머리였다! 하지만, 그도 잠깐, 헤어스타일링이 가지런히 된 가발을 벗어놓은 그는, 조금 더 편한 스타일의 다른 가발을 집어든다. 집에서도 '가발'을 쓰는 것이다. 심지어, 들키기 전까지, 그가 가발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아내도, 가족 중 누구도 몰랐었다는 것이다. 대머리가 유전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고민, 하지만, 그것은 '가족'과도 나눌 수 없는 그가 짊어져야 할 '개인'만의 고통이었다. 심지어, 첫 아들 탄생의 반가움마저, 유전적 형질이 계승될까 하는 두려움이 상쇄시키는 무시무시한 고통이다. 





제작진이 만난 대부분의 대머리들은 가발을 사용했다. 그게 아니면 이식을 준비 중이거나, 이식을 했다. 홍석천의 민머리는, 그의 말 그대로, 게이에 이은 또 하나의 커밍 아웃같은 상징처럼 보인다. 왜 대한민국 사회는 대머리로 사는 걸 부끄럽게 만들까?


하지만 대머리가 바다를 건너면 사정은 달라진다. 남성 호르몬의 과잉으로 생겨난 대머리는 서양에서는 '남성성'의 상징이다. 그래서 근육질의 대머리 연예인들이 액션 영화에서 자신들의 민머리를 드러낸 채 한껏 남성성을 뽐낸다. 실제 동양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의 대머리들이 있는 서양에서, 대머리가 숨겨야 할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러나, 동양으로 건너오면 달라진다. '관계 지향 사회'인 아시아 중국, 일본, 한국에서, 대머리는, 남과 다른, 특이하고 이상한, 심지어 우스운 그 어떤 것이 된다. 똑같은 사람의 머리가 있고 없는 모습을 본 여성들의 반응이 그랬고, 몰래 카메라로 대머리 가발을 씌운 젊은 남성의 태도의 변화가 그걸 여실히 증명한다. 더구나 세계 남성 화장품 소비 1위인 한국, '외모'가 경쟁력이 되는 사회에서, '대머리'는 경쟁력이 젬병이다. 한때는 '사장님'같다던 '대머리'가 어떻게든 숨겨야 하는 치부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렇게 '다름'이 '틀림'이 되어가는 '대머리'의 삶을 다큐는 주목한다. 





<mbc 다큐 스페셜-대머리라도 괜찮아>는 그저 '대머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외모 지상주의 사회의 상징적 단면이다. 또한, 나와 다름을 쉽게 '타자화'시키는 '관계 지향 사회'의 잔인한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속에 함몰된 사람들은 쉽게 그 '다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아니, '개인'의 짐인 자신의 모습을 홀로 감당하기엔 '사회'의 편견은 깊다. 


하지만, 우리나라 못지 않게 관계 지향적인 일본에서, '대머리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겠다며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는 '대머리'클럽은 희망적이다. 홍석천의 자신의 딜레마를 넘어섰을 때 느끼게 되는 카타르시스는 용기를 준다. '대머리'들의 이야기는, 그저 대머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 지향 사회' 속에서 누구나 하나씩 자신의 '다름'으로 인해 고민하는 요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한번씩 생각해 볼만한 지점을 남긴다. 




by meditator 2015. 9. 15. 15:18

얼마전부터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 상에서 '천일염'과 관련된 논쟁이 뜨거웠다. 그건 바로, <수요 미식회> 등을 통해 미식 평론가로 세간에 주목을 받게 된 황교익이 제기한 '천일염의 유해성 문제'때문이었다. 


천일염은 일정한 공간에 바닷물을 가두어 놓고 햇볕과 바람으로 수분을 증발시키는 방법으로 얻는 소금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 소금 제조 방식으로 알려져, 각종 전통 음식의 맛을 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식품이다. 또한 최근 '건강 열풍'과 맛물려 천연 식품으로서의 천일염의 가치가 부각되면서, 각종 미네랄이 함유된 천일염이 '된장',이나 고추장처럼 우리 전통의 자연 건강 식품으로 대접받아왔던 것이 최근의 실정이다. 황교익 평론가는, 바로 이렇게 그간 우리가 알고있던 '천일염'과 관련된 모든 허상을 무참히 무너뜨린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최근 생산되고 있는 천일염은 외국의 기준에 비추어 한없이 높은 세균 수치로, 그리고 그에 대한 기준치가 없는 정부 가이드 라인으로 말미암아, 국민들이 '더러운' 천일염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폭로했다. 그리고 황교익의 주장과 관련하여, 각 매체들, 그리고 천일염과 관련된 이익 단체들의 맞물리는 보도가 연이어지는 가운데, <sbs스페셜>을 발빠르게 그 논쟁의 장을 옮겨온다. 



천일염, 유해성 논란을 정면으로 다루다  
프로그램의 시작은 <sbs스페셜>이 마련한 토론회의 자리였다. 천일염 논란과 관련하여 마련된 카메라 앞의 토론회 자리, 하지만 황교익 평론가를 비롯하여, 서강대 이덕환 교수 등 관계자들이 자리를 다 채운 것에 비해, 단 한 명의 식품 연구가 만이 자리를 채운 그 반대의 입장은 이미, 세간에 불이 붙은 천일염 논쟁의 진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천일염 논쟁, 무엇이 문제인가?
논쟁의 내용을 따지기에 앞서, <sbs스페셜>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의 소금'이라던 천일염의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실체는, 천연의 바닷물과 햇빛으로 만들어 지는 줄 알았던 염전 바닥에 깔린 시커먼 플라스틱 성분의(그것이 비닐이든, 비닐이 아니든)장판에서 '천연' 혹은, '자연'의 환상은 산산이 부수어 진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플라스틱 장판이 깔린 염전 바닥을 염부가 득득 긁어 모은 천일염, 소비자들이 천일염을 샀을 때 거기에 간간히 섞여있던 그 검은 입장의 정체는 바로 그 장판의 부스러기였다. 

우리의 전통 소금 생산법에 장판이!! 라는 충격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환상은 다시 한번 무참히 깨어진다. 그간 매스컴을 통해, '전통'의 소금 제조 방식이라 알려졌던 천일염 제조법이, 몇 백년 된 것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도입된 '대만'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대륙을 향한 자신들의 야욕을 다지기 위해, 다량의 공업용 소금이 필요했고, 그 소금 공급의 일환으로 대만의 소금 제조 방식인 천일염 제조 방식을 도입했고, 그것이 매스컴의 윤색을 통해 전통의 소금 제조 방식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일제에 의해 도입된 천일염 제조 방식으로 인해, 진짜 우리 전통의 제조 방식이었던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갯벌의 모래를 통해 소금을 얻는 '자염(紫染)'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의 방식으로 떠받들어 지고 있는 천일염의 제조 방식이 그 유래의 본토인 대만에서는 비위생적이고 비생산적인 방식으로 거의 소멸 위기에 놓여있고, 그것을 도입한 일본에서는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그 유래의 추적을 통해 밝힌다. 

거기에 황교익 평론가가 최근 제기하고 있는 유해성과 관련하여, 염전의 환경은 '유해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덧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있는 천일염보다 맛도 떨어지고, '천연적'이지 않다는 정제염과 관련된 실험은 그간 대중의 인식이 '착각'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천일염 논쟁의 실체는?
마치 한 편의 기막힌 사기극을 보는 듯한 '천일염 신화', 한때는 신문 지상에서 깨끗하지 못한 천일염의 기사들이 비일비재하게 올라오던 시절도 있었던 천일염, 과연 이런 '신화의 왜곡'은 어디로 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거기서 < sbs스페셜>은 미디어 관련 학과 전문가의 입을 빈다. 이정교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천일염뿐만이 아니라 어떤 이슈든 간에 미디어가 반복적으로 보도를 하게 되면 이론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보통 컬티베이션 이론이나 의제설정 이론에 따르면, 미디어가 묘사하거나 보여주는 것들을 현실과 거리감이 있을 지라도 소비자들이나 사람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실제로 묘사된 천일염에 대한 것들을 사람들이 좋게 믿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다. 10년 전의 천일염 조사 자료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관련 단체, 그리고 천일염과 관련하여 대규모의 위조된 신화를 창조해낸 관련 업계와, 그를 확산시킨 미디어, 그 결과 우리나라 국민들은 근거도 없는 '천일염 전통 식품론'을 믿고, 각종 '미네랄이 풍부한 건강 식품'으로 세균에 대한 기준조차 없는, 그래서 외국 기준에 훨 못미치는 3년이 지나도 세균이 없어지지 않는 더러운 천일염을 식용으로 먹고 있게 되는 거라 밝힌다. 



<sbs스페셜>이 다룬 소금 논쟁은 시의적이다. 한 평론가로 부터 시작되어 sns 상을 뜨겁게 달궜고, 여타의 매체들이 정부와 각종 단체들의 입장을 들어, 그 진실을 왜곡하려 들때, 양 자들을 불러 모아 토론회의 형태로 시작하여, 천일염의 역사를 통해, 그 실체를 밝히려고 한 시도는, 그간 천일염의 왜곡된 신화에 일조한 미디어의 제대로 된 '반성'을 적극적으로 보여준 형태이다. 그래서, <sbs스페셜>은 황교익의 사과로 마무리된다. '자신이 천일염의 진실을 알기 전에, 천일염을 옹호한 글을 썼고, 그 글을 읽고 천일염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지게 된 분들에게 황교익은 사과를 한다. 물론, 황교익은 이후, 자신은 사과를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왜곡된 글을 쓰도록 왜곡된 정부를 내놓은 정부와 학자들에 대한 '분노'도 표명했으나, 그 부분은 편집이 되었다고 자신의 sns를 통해 아쉬워한다. 하지만, 분노의 이전에, 황교익이든, 그런 사실의 왜곡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온 미디어든, 자신의 과오에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 그것이,진정성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분노'보다, 거짓과, 외면과, 왜곡이 횡행하는 시대 탓일 듯하다. 
by meditator 2015. 9. 14. 1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