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영화 평론가이자 이론가인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이 1947년 창간한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지인 까이에 뒤 시네마는 올해의 10대 영화로 다음 작품들을 선정했다고 한다. (osen 12.2 최나영)


1. 나의 어머니(Mia Madre, 난니 모레티 감독)
2. 찬란함의 무덤(Cemeteryof Splendour,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
3.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In the Shadow of Women, 필립 가렐 감독) 
4. 더 스멜 오브 어스(The Smell of Us, 래리 클라크 감독) 
5.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Max: FuryRoad, 조지 밀러 감독) 
6. 도원경(Jauja, 리산드로 알론소 감독)
7. 인히어런트 바이스(Inherent Vice,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8. 천일야화 볼륨1(Arabian Nights, 미겔 고메즈 감독) 
9. 상가일레의 여름(The Summer of Sangaile, 알란테 카바이테 감독)
10. 해안가로의 여행(Journey to the Shore,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이 발표가 난 이후 언론에서는 우리가 지난 여름 열광했던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가 세계 10대 영화에 뽑혔다는 기사가 등장했다. 하지만, 그 열광했던 <매드 맥스> 외에, 나머지 아홉 편의 영화를 비록 프랑스의 영화지 선정이라지만, 올해의 10대 영화라는 그 영화들이 우리 관객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언론은 거의 없었다. 





불공정한 선택에 던지는 달걀; 늦어도 11월에는 
그 중 <찬란함의 무덤>, <인더 새도우 오브 우먼>, <도원경>, <천일야화 볼륨>, <상가일레의 여름>, <해안가로의 여행>은 부산 국제 영화제를 통해, 그리고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전주 국제 영화제를 통해, 영화제를 찾은 일부 매니아 층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 이후 일반 관객을 위한 기회는 얻을 수 없었다. 단지 <나의 어머니>만이 8월 20일 개봉했지만 박스 오피스 만명을 겨우 돌파한 채(?) 조용히 사라져 갔다. (박스 오피스 10131명) 그렇게 세계적은 인정받은 좋은 영화들이 아주 적은 관객들과 만나거나,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사라져 가고, 대신 우리는 멀티 플렉스 시간표를 가득 채운 대기업 유통의 선택권이 거의 없는 몇몇 영화들만을 '선택'한다 생각하며 산다. 

그런 기회의 불평등, 혹은 선택권의 봉쇄에 대한 계란 던지기가 시도되었다. 지난 11월 28일 개막한 <늦어도 11월에는>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제는 영화 평론가 오동진씨가 기획한 것으로 올 한 해 수입되었던 수십 편의 외국 영화들 중 스크린 독점 등 배급 구조의 문제 등으로 충분히 관객과의 만남을 만끽할 수 없었던 영화 들 중 선별하여 다시 한번 상영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올해의 10대 영화로 선정된 <나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미셜 공드리의판타지 멜로<무드 인디고>, <렛미인>의 미국판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평화 행진을 다룬 <셀마>까지 다양한 장르 27편의 영화들이 브로드웨이 신사 롯데 시네마를 통해 12월 6일까지 98회 상영중이다. 

마음같아서는 한 해 동안 게으름을 핀 내 자신을 되돌이키듯 하루 종일 신사동 그 어두컴컴함 공간에 차지하고 싶지만, 늘 삶의 또 다른 핑계가 나를 쉬이 신사동으로 몰지 못했다. 그래도 지난 9월 개봉했을 때부터 보자 마음 먹었던 <이민자>라도 꼭 봐야 하겠다는 의지(?)로 신사동을 향했다. 신사동 번화가가 무색하게  멀티 플렛스라기엔 조촐하고 고즈넉한 극장, 그곳에서 글쓴 이처럼 늦어도 11월 아니, 12월 초라도 미처 보지 못했던 영화들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한 이들은 별로 없었다. 물론 낮시간이라는 시간 제약도 있겠지만, 이 영화제를 기획한 오동진씨가 '실패'라고 내놓고 자책할 만큼 영화제는 한산했다. 기회의 불공정을 소리 높여 보지만, 이미 우리 안에 내재화환 문화의 획일화의 뿌리는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어 수위에 점하지 않고서는 쉽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힘든 문화의 단선화는, 좋은 의도조차 무기력하게 만드는데 특효약이 아닐까란 회한조차 들었다. 허긴 '국정 교과서'보다, 한 여가수의 불손한 컨셉이 더 화두가 되는 세상에, 애초에 이 시도는 '달걀'이 아니었을까? 그 언젠가 프랑스 문화원을 볶딱거리게 하던 문화적 갈증은 멀티 플레스의 휘황한 척하는 시간표가 덮은 지 오래일 지도 모른다. 


<이민자>; 우리 안의 호모 파베르를 상기 시키다 
조촐한 개막식에서 '삼년하면 천만 상'을 거머쥔 <이민자>는 1921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뉴욕의 입성하려던 폴란드 여인 에바(마리옹 꼬띠아르 분)의 비극적 운명을 그려낸다. 부모가 전쟁의 와중에서 학살당한 에바는 동생과 함께 어렵사리 뉴욕에 이르렀지만, 그 관문 엘바 섬에서 그만 동생의 병으로 홀로 뉴욕에 떨어지게 된다. 

사고무친(다분히 브루노에 의해 의도된 바이지만)의, 가진 것도 없는 여자 에바의 운명은 역시나 가진 것이 무작정 뉴욕행 배를 탔던 그녀의 배에서의 부도덕한 행위로 귀결되는 그 전례를 고스란히 답습할 수 밖에 없다. 아니 그것은 에바라는 여성의 특수성이 아니라, 전세계, 역사의 고래로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진 것없이, 도움을 받을 길 없는 여성들의 보편적 행로이기도 하다. 

그렇게 에바는 운명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뚜쟁이 브루노(호아킨 피닉스 분)의 눈에 띄어 뉴욕 뒷골목 스트립바의 일원이 되어간다. 영화는 스트립바를 배경으로 한 만큼 상체를 드러낸 여성들이 심심찮게 등장하지만, 전혀 야하지 않다. 오히려 그녀들의 나신은 그녀들을 보고 아우성을 치는 남성들의 반응보다 시선을 잡아끌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신은 뉴욕 뒷거리에서 가진 것 없는 여성들의 유일한 대안일 뿐이다. 그 드러낸 젖가슴을 무기로 한 그녀들은 그래서 뚜쟁이 브루노에 의지할 수 밖에 없고 결말의 비극적 상황을 유도한다. 

그렇게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어, 혹은 육체를 팔아 삶을 영위하는 브루노의 사업에 떨어진 에바, 이미 배 위에서 살기 위해 몸을 팔았던 그녀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결과론적 행위를 내면화하지 못한 채 도덕적으로 고뇌한다. 그리고 그 고뇌는 그녀에 대한 '집착'을 어쩌지 못하는 브루노에 대한 거리감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내내 선정적인 브루노 사업 속에 휘말렸음에도 그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놓아버리지 못한 에바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촛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녀의 완강한 거부에 절망하는 브루노의 순애보 역시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도덕저 고뇌와 순애보라는 극단의 감정은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력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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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민자>가 마음에 남는 이유는 1921년 운명적 삶에 휘말린 여자 에바의 슬픈 운명 때문이 아니다. 브루노의 이율배반적 순정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1921년의 뉴욕 뒷골목의 비루한 삶이, 21세기의 오늘에도 그리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에바가 가진 것도 없이 뉴욕 행 배에 무작정 동생과 자신을 싣게 된 것은 바로 자신의 나라에서 행해진 무차별 학살 때문이다. 세상은 is의 파리 테러를 '침공'이라 규탄하지만 정작 그 한달 전에 벌어진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 다국적군의 예멘의 모카 일반인 131명 학살은 세상의 시선을 받지 못했다. 아프가니스칸, 이라크, 시리아 등 나라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민간인 학살에 대해 세상은 외면한다. <21세기 자본론>의 저자 토마 피케티는 르몽드에 기고한 글에서, 중동발 테러의 원인을 석유 자원을 근간으로 해서 축적된 막대한 부가 일부 국가 소수 층에 치중된, 그리고 그것을 방조한 서방 국가들로 인해 벌어진 불평등에서 기인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곳에서 부모를 혹은 삶을 잃은 사람들은 에바처럼 정처없이 자신을 '희망'의 땅으로 던질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찾아온 '엘도라도'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의지할 곳없는 에바가, 결국 브루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듯이, '희망'을 찾아온 '현대'의 이민자들은 유럽의 '호모 파베르'가 되어 버린다. 2015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태를 보고 2005년 프랑스의 전국적 소요 사태를 떠올린 이들도 있다. 즉 감전사로 죽은 두 명의 소년으로 부터 시작된 시위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던 데는 그저 시민권 부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프랑스 내 소외, 가난, 불평등 심화의 양극화에 기인했다고 당시 진단했었다. 이민자들은 대를 이어 프랑스 내 도시 근교 열악한 삶의 환경 속에서 실업률 20%의 희망을 기약하기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계는 파리의 사태를 서구와 is라는 이분법으로 규정하려 하지만, 일부에서는 오히려 그보다는 프랑스 내의 사회 모순으로 보고자 하는 시각도 있다는 점에서, 영화 <이민자>는 그저 한낱 에바와 브루노의 이야기로 닫혀지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 브루노는 자신의 위험을 무릎쓰고 에바와 그 동생을 도피시키지만 그녀들이 의지해 가는 일엽편주처럼 그들의 미래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녀들의 위태로움은 이 2015 그럴듯한 부의 겉치레에 속고사는 우리들 허상의 삶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5. 12. 3.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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