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은 미국의 홍상수라고 할까? 아니, 홍상수가 한국의 우디 앨런인가? 이제는 나이가 지긋한 두 감독의 끊임없는 행보는, 최근 불거진 홍상수 감독의 '스캔들'과 함께 더더욱 두 감독의 행보 사이에 유사성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연예인 걱정만 내려놓아도 한결 편해진다'는 박명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대적 서비스'처럼 불거져 나온 스캔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매년 꾸준히 마치 일기를 쓰듯 또박또박 작품을 생산해 내는 두 '노장' 감독의 성실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우디 앨런을 우리의 홍상수에 빗대는게 어쩐지 어패가 있게 느껴지는 건,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지역적 협소성, 혹은 문화적 열패감, 그런 것의 소산만은 아닐 것이다. 두 감독이 매년 성실하게 작품을 만들어 내지만, 홍상수 감독이 평생을 한 화두에 매달린 '선승'과 같다한다면, 우디 앨런의 궤적은, 때론 깊게, 때론 넓게, 그 세계의 품과 깊이가,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울 만큼 포괄적이며, 여전히 당돌하다. 나이가 들수록 그의 궤적은 넓어지지만, 여전히 그가 가진 뒷통수를 치는 듯한 문제 의식은 날카롭고, 그 제기 방식은 신선하다. 2015년작 <이레셔널 맨> 역시 다르지 않다. 



2013년작 <her>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인지도를 넓힌 호아킨 피닉스가 인기 철학 교수 '에이브'로 분한 <이레셔널 맨>의 시작은 그가 여름학기를 맞아 로드 아일랜드의 대학에 오기로 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소란스러워지는' 대학 사회로 부터이다. 저마다의 기대를 갖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운전 중 거침없이 '알콜'을 섭취하며, 에이브는 칸트는 명구를 읊조린다. 

'인간 이성은 거부할 수도, 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 할 운명이다'
마치 그런 칸트 '정언'의 현신인양, 교수 에이브는 자신이 추구해 왔던 '이성적 삶'을 배반한 현실로 인해 처절한 무기력에 빠져있다. 강의는 심드렁하고, 집필 활동은 도무지 진전이 없으며, 뭇 여성들의 추파도 그에게는 불가항력이다. 심지어, 학생들의 모임에 등장한 호기심어린 '룰렛'게임을 직접 실현하며, 무기력한 일상을 탈출해 보고자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삶에 환멸을 느끼며 자신을 마구잡이로 내던질 수록, 그런 그에게 역시나 단조로운 삶에 환멸을 느낀 그 대학의 화학과 교수와, 그에게 '로맨틱'한 매력을 발견한 '질(엠마 스톤 분)은 그에게 매료된다. 

질과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로 이어지는 나날, 그 중 하루 에이브와 질은 식당에서 들른 뒷 좌석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 작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한 판결의 소문을 듣는다. 그리고 뒷담화처럼 에이브와 질은 그 소문의 주인공인 '판사'가 '죽어마땅한 사람'이라는 데 공감한다. 

그날 이후, 질은 에이브가 달라진 것을 느낀다. 세상 그 무엇이라도 그가 빠진 삶의 권태를 구해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에이브 스스로 삶의 활기를 찾아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달뜬' 채, 무기력했던 화학과 여교수와의 '성생활'에도 활기를 찾았으며, 수세적이었던 '질'과의 관계도, 이제 '헌정시'를 바칠 정도로 적극적으로 변해간다. 질은 그런 그가 이상했지만, 그것이 '자신과의 사랑'으로 인한 변화로 받아들이며, 그와의 관계를 진전시켜가는데, 뜻밖에도 그들이 '뒷담화'했던 그 판사의 죽음이 전해진다. 



에이브는 이성적 삶을 실천해 왔던 인물이다. 그는 평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그의 친구는 그런 그와 뜻을 같이 하다 '중동'에서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현실 참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아내는 그의 또 다른 친구와 바람이 나 그를 버렸다. 그의 현실 참여는 '보상'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그를 배반한다. 어쩌면 에이브의 무기력과 권태는 당연하다. 그는 노력했지만, 현실에게 그의 의지가 가닿을 수 있는 곳은 '허무'와 '알콜' 뿐이었다. 그런 그가, '죽어 마땅한' 판사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무력하게 했던 '정의 구현'의 의지가, 불쑥 솟아난다. 그를 좌절케 했던, 그 '정의'를 이제 스스로 직접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이런 '소영웅주의적' 욕망이 꿈틀댐과 동시에, 잦아들었던 삶의 욕구가 동시에 발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심드렁했던 '성생활'도, 그리고, '사랑'까지도. '시'에 침을 뱉었던 그가, 사랑의 헌정시를 쓰게 될 정도로. 

동시에 영화는, 질과 에이브의 나레이션을 번갈아 등장시키며, 에이브가 몰입해 있는 상황에 관객들조차 '시험'에 들게 한다. 등장 전부터 화제가 된 매력남, 하지만, 권태와 무기력에, 수시로 알콜을 섭취하는 그, 그리고 판사의 소문을 통해, 활기를 되찾는 그를 통해, 엉뚱한 그 삶의 활력에 저마다, '혹'한 물음표를 던지게 만드는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발군의 연기에 휘말려, 저도 모르게, 에이브의 선택에 휘말려드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윤리적 미혹'을 당돌하게 일으켰던 에이브 교수의 비밀은, 마지막 순간 뜻밖의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뜻밖의 파국을 인도한 건, 그에게 '로맨틱하게 미혹되었던' 순진한 질의 선택이다. 

미혹된 인간에 대한 해학적 질문
에이브가 등장하면서 읊조렸던 칸트의 명구는 시사적이다. 동시에, 그 불가항력의 인간 운명에 대해 안타까워하기 전에, 그 명구의 근저를 살펴볼 일이다. 영화 속 에이브는 '철학 교수'다, 하지만 그는 강의 시간에, 칸트의 형이상학에 대해, 현실과 괴리된 머릿 속 말장난이란 식으로 치부한다. 그가 '철학'을 가르치지만, 그가 가르치는 '철학자'들의 정언은 '현실'을 벗어났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중세의 끝자락과 근대의 새벽을 가로지른 칸트의 고민은, '신의 존재 유무'등의 형이상학적 문제를 인간의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인가 였다. 그런 칸트, 혹은 철학의 고민들을 현실 바깥의 머릿 속 상념으로 치부해 버린 철학 교수 에이브의 결론은, 이미 그가 이후 저지르는 사건들의 전조 증상이 된다. 또한 칸트의 철학이, 중세의 '신'을 대신하는 근세 인간 이성주의의 서막이자, 근간이라 한다면, 에이브로 상징되는 '광기'는 그 이성의 근대에 도발하는 탈 근대적 도발의 단편적 징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성의 힘으로 세상의 불합리를 해결하려 했던 지난 세기의 시도들이 무력화되었을 때, 거기에 파괴적으로 실현되는 비이성의 '정의'들. 그리고 그것이 에이브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도처에서 마주하고 있는 광기들이요, 한때 이성적인 기준으로 현실을 변화시키려 했던 지식인 에이브조차 '미혹'되고마는 현실의 세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무기력해진 우리 시대의 실천 이성에 대한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런 에이브의 도발적 판단, 혹은 결단에 대한 '우디 앨런'식의 대답은 가장 원론적인 '도덕률'로 귀착된다. 관객들로 하여금, 한껏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에이브에 질과 함께 매료되게 만든 우디 앨런은, 언제나 그가 종종 그래왔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평형이 귀착되는 곳은 평범한 도덕률이라는 것을 일깨우며 마무리짓는다. 그간 에이브와 함께 잠시 격동했던 관객들의 마음조차 머쓱하게. 에이브의 광기에 천착했던 영화는 마지막 질의 나레이션과 함께, 퍼뜩 그간 놓쳤던 혹은 방기했던 '이성'의 세계로 돌아온다. 칸트가 그러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으로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임을 영화적으로 설득한다. 

따지고 보면, 굳이 <이레셔널 맨>만이 아니라, 지난 우디 앨런의 영화는 '거부할 수도 없고, 답할 수도 없는 인간의 운명'을 해학적으로 다루어 왔다. 물론, <블루 자스민>처럼 예외적으로 일관되게 처절할 수도 있었지만. 우디 앨런이 대단한 것은, '거부할 수도 없고, 답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다루었고, 그런 것이 '인간'이라는 점에 시인하지만, 결코 그렇다고, 그 운명에 쉬이 동조하거나, 휘말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여전히 꼿꼿하게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적 댓가조차 냉정하게 '해학적'혹은 '관조적'으로 그려내는 것, 바로 그 점이, 우디 앨런 영화의 가치이다.  특히나, 되돌아 보면, 에이브의 일탈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진 질문같은 <이레셔널맨>은 두고 두고 곱씹어 볼만한 영화다. 




by meditator 2016. 7. 29.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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