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무협(武俠)은 무술에 뛰어난 협객을 뜻한다. 그렇다면 협객(俠客)은 또 무엇인가? 역시나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의롭고 씩씩한 기개가 있는 사람이란다. 막연하다. 좀 더 정확한 뜻을 찾아보면, <사기>를 쓴 사마천의 정의가 등장한다. ' 협객은 그 행하는 바가 비록 정의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행동은 반드시 과감하다. 이미 약속한 일은 반드시 이행하며 자신의 위급함을 돌보지 않은채 남의 위급함을 돕고, 사생존망의 위급함을 겪었어도 그 능력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래도 어쩐지 추상적이다. 좀 더 상세히 들어가서 ' 의를 쫒으며 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거는, 요컨데 범죄라도 가리지 않고 행하는 개인 혹은 집단들. 의병, 영웅 등과 같이 위기상황이 올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행동하는 패턴을 즐겨한다. 사실 단어 자체는 중국에서 나왔지만 그 범주 자체는 세계 곳곳의 역사에 존재하고 있다.  즉, 목숨을 아끼지 않고 행동하는에 방점이 찍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에 이르면 고개가 끄덕여 진다. 또한 무림(武林)이란 그런 무사 또는 무협의 세계를 말한다. (나무 위키 참조 )




사회적 질서로 부터 튕겨져 나온, 무협
'협객'의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처음 시작한 이는 위의 사마천이다. 그가 쓴 <사기>에는 협객들을 다룬 <유협 열전>이란 범주가 있다. 혹자는 <자객 열전>  또한 협객의 이야기로 분류하기도 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들 좀 과거에 한가락 한 인물들의 그 과거 '한 가락'은 결국 '협객'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또 다른 동양 고전, <수호지>는 협객사라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은 정의가 된다. 여기서 보듯이, '협객'은 우리나라보다는, 동양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중국의 서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또한, '당시 시대 기준으로도 엄연히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는 그들이, 스스로가 내세운 '대의명분'에 의거, '의롭고 기개가 있는'인물로 캐릭터의 변이가 이루어 지는 것은, 삼국지의 배경이나, 수호지의 배경으로 보건대, '국가 권력이 사회 전반을 관할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국면'에서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칼부림이나 하는 양아치들이 될수도 있는 인물이 당대의 영웅으로, 이른바 '협객'으로 대접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꼭 국가 권력의 영역에서만 '협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즐겨보는 중국의 무협 영화 다수를 보면, 개인의 원한에서 부터 국가에 대한 환멸, 의리까지 무협의 종류는 다종다양하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건, 기존의 사회 질서가 그의 검을 혹은 다른 무기를 다스릴 수 없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어쨌든 무협은 그 서사의 시작이나, 서사의 융성은 '중국'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무협지'는 다수의 마니아를 구축한 문학 장르이지만,  정통이 아닌 '하위 문화'장르로 취급받아왔었으며, 심지어 메이드인 코리아의 '무협지'의 배경 역시 우리나라보다는 중국의 어떤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정의에 근거하여  2015년에서 2016년에 걸쳐 대두되기 시작한 tv 무협을 살펴보자. 1월 11일 첫 선을 보인 kbs2의 월화 드라마 <무림 학교>는 말 그대로 '무협'을 배우는 학교이다. 산속에 신비스러운 결계에 가려져 있는 이 학교는 소림사처럼,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모여 '무'(무)에 근거한 심신 수련을 하는 곳이다. 이미 <드림 하이> 1, 2를 통해 정규의 학교 과정 외에 '신선한' 배움의 장을 마련해 왔던, 그리고 방학마다 '학교' 시리즈를 통해 학생 시청자들에 호응해 왔던 kbs2가 마련한 신선한 '고육지책'이다. 첫 회에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될 두 주인공들 면면에서 보여지듯이, 재벌 회장의 서자이지만 전 세계 어느 학교에서도 받아들여 주지 않는 말썽꾸러기 왕치앙(홍빈 분)에, 당대 최고의 아이돌이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와 귀가 들리지 않는 신체적 핸디캡으로 그가 속해있던 곳에서 방출되다시피한 윤시우(이현우 분) 등 아웃사이더들에게 마지막 비상구로 열려진 곳이 바로 '무림학교'로 설정된다. 



2016년 tv로 온 무협 
그런가 하면 고려말 국가적 혼란기라는 <육룡이 나르샤>의 시대적 배경은 '무협'이 득세하기엔 더할나위없는 상황이다. 이제 슬슬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고려 건국에서 부터 왕실의 뒤에서 고려를 도와왔던 '무명'이라는 조직이 있는가 하면, 그런 무명에 대항하여, 정도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갈 <뿌리깊은 나무>까지 이어질 '밀본' 역시 그 행동책에는 '무협'들이 다수 자리잡는다. 극의 기본 줄기는 이제 이방원을 내세워 정권의 뒷배가 되려는 무명과, 그에 맞서 왕이 중심이 아닌, 백성과, 백성의 뜻을 받든 '신하'들의 민주적 집합체이자, 유교적 구현을 이루고자 하는 '밀본'의 대결로 이어져 가지만, 그들의 구체적 행동 양태는 그들의 수하인, 각 조직의 '무협'들의 대결로 실현된다. 그 무협들은 중국 제일검 장삼봉과, 그의 제자로 삼한 제일검이 될 이방지, 그리고 여성으로서 장삼봉의 제자를 살한 척사광, 그리고 홍대홍의 제자로 홍대홍을 넘어선 훗날 조선 제일검이 될 무휼 등은 기존 왕 중심의 역사극에서 탈피하고자 한 <육룡의 나르샤>의 진짜 용이 되어 조선 건국이라는 격동에 휘말려 들어간다. 

이렇게 기존 학교 교육의 권태라는 공간에 드밀고 들어온 <무림 학교>나, 고려 말 격동의 아노미 속에서 한 획을 그을 무협들의 쟁투로써의 <육룡이 나르샤>의 설정은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 그럴 듯한 서사가 막상 드라마로 구체화되는 지점에서는 아직은 '실험적'이란 것이 정확한 평가일 듯하다. 

결계에 쳐진 무림 학교 라는 공간으로 들어온 재벌 아들과 아이돌이라는 설정부터 청소년 환타지의 진부한 클리셰를 답습한다. 또한 무림학교 라는 공간에서 이들을 굴러온 돌처럼 여기는 기존의 자부심 강한 학생들과 이들의 갈등, 거기에 두 주인공 사이의 갈등은 '학교', 혹은 '청소년' 물에서는 신물나도록 되풀이 되었던 설정이다. 심지어 여주인공을 둘러싼 어설픈 삼각 관계까지. 그런 '납작하고 또 납작한 갈등'을 어설픈 'cg'를 곁들여 펼쳐냄으로써 '어린이 드라마'같다는 평가를 받고야 만다. 이범수, 신현준, 신성우까지 묵직한 조연들과, 무림이라는 신선한 구도가 보여주는 기대는 크지만, 기본적으로 무림이건, 학교건 그 공간을 통해 풀어내는 청소년에 대한 전개가 '청소년'에 대한 일천한 이해, 혹은 설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무림학교>의 가장 큰 난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영 당일, 그리고 다음 날까지 이어진 화제성에서 보여지듯이, 어설픈 cg로 나마 구현한 무협의 세계는 신선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화제성이 높은 것은 안타깝게도 작가들이 이 비천한 육룡을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역사의 뒤안길이 아니라, 작가들 자신도 이미 본말이 전도된듯이 빠져들어 가고 있는 '무협'의 세계인 것이다. 즉, <육룡이 나르샤>를 보는 사람들 사이에선 과연 누가 진짜 조선 제일검이 될 것인가? 그들의 무협 순위 등이 관심이 높은 것이다. 정도전이 구현할 세계와, 이방원의 뜻이 어떻게 어긋날 것인가가 아니라, 그들과, 그들이 손잡을 조직, 그리고 거기에 이합집산할 무협들의 한판 싸움이 드라마의 볼거리로 귀결된다. 그리하여, 정작 '밀본'의 프리퀼이어야 할 <육룡이 나르샤>에서 가장 존재감없는 캐릭터는 분이가 도와야만 힘을 발하는  '밀본'의 본산 정도전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2016년초부터 한국의 tv 드라마에서 b급문화였던 '무협'과 '무림이 득세하고 있는 것이, 과연 콘텐츠의 신선한 기획인지, 아니면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둔 얕은 설정인지는 모호하다. 또한, <드림하이>처럼 신선한 학교 시리즈의 개척일지, 그저 <블러드>와 같은 괴작의 탄생일지 미지수다. <육룡이 나르샤>도 마찬가지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시작된 밀본의 탄생의 성공적인 프리퀼일지, 역사에 대한 어설픈 해석으로 귀결될 본데없는 퓨전 사극일지는 역시나 가늠하기 어렵다. 얕은 수로 시작된 시도라 하더라도 부디, 그 얕은 수가 신선하고 새로운 기획의 분수령이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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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01.13 15:42

11월 10일 <육룡이 나르샤>의 시청률은 그 전회 13.3%에 비애 0.8%나 상승한 14.1%(닐슨 코리아 기준)를 기록했다. 6회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인 셈이다. 하지만, 동시간대 mbc월화 드라마 <화려한 유혹> 역시 전회에 비해 똑같이 0.8% 상승한 것을 놓고 보면 월요일 <가요무대>의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같기도 하다. 하지만 시청률과 상관없이 12회 <육룡이 나르샤>는 흥미진진했으며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이 흥미진진과 감동의 속내를 한번쯤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 속내가 곧 쉽게 치고 오르지 못하는 이 드라마의 지지부진한 원인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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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마리 용의 산만함
제목에서 부터 여섯 마리의 용이 날아 다니는 이 거창한 이름의 사극, <육룡이 나르샤>, 하지만 300억 대작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시청자들의 반응은 지금까지 엇갈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엇갈린 반응들이 11월 10일자 방송에서는 한결같이 '좋았다'로 돌아섰다. 무엇이 좋았던 것일까?

무엇보다 그간 함주에 칩거(?)한 채 좀처럼 정도전의 '육룡' 낚시에 낚이지 않았던 이성계가 그의 아들 이방원의 옥사를 계기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살아온 장수, 흰서리가 희끗희끗한 상투 머리가 흐트러지고 얼굴엔 상처, 그리고 먼지와 피로 얼룩진 군복으로 등장한 천호진의 이성계 모습은, <정도전>의 기세 등등했던 유동근의 이성계와는 또 다르게 무인 이성계의 존재감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터를 누비던 그가,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이제 정치를 하겠다는 그 결심은 그 어떤 정치의 출사표보다 설득력을 느끼게 하였다.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역성 혁명을 이끄는 주역인 이성계가 극의 전면에 자신을 드러내자, 비로소 극이 중심을 갖추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성계가 중심에 들어서도록 그 숨막히는 정쟁의 막후에서 그 모든 것을 주물렀던 정도전과 그런 정도전의 손아귀 안에서 어떻게든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고심하는 이인임, 홍인방, 길태미의 이합집산이 긴장감을 부여했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치에 나서는 이성계와 그의 막후에서 그의 브레인으로 자리매김하는 정도전의 존재감이, 비로소 <육룡이 나르샤>를 본 궤도에 올려놓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곧, 퓨전 사극으로서, 역사적 사실 이상의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인 장치들의 취약함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제목부터 거창하게 육룡을 내세우고,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이라는 역사적 인물 외에 연희, 분이, 무휼, 땅새라는 '민중'을 고려 말 역성 혁명 과정의 중요한 주체로 내세우려 했지만, 그들이 극을 중심으로 이끄는 순간, 드라마는 흐트러지고, 그들의 이야기조차 설득력을 크게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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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 정도전, 그 혁명 조직의 설득력의 한계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퀼에 해당하는 <육룡이 나르샤>는 세종 조에까지 암약했던(?) 본원 정도전의 유지를 따른 결사 조직의 시초를 그린다. 당연히 거기엔 말 그대로 본래 이 조직의 뿌리가 된 본원 정도전이 등장한다. 

그런데, <육룡이 나르샤(이하 육룡)>의 정도전은 <정도전>의 풍운아 정도전과 다르다. 12회, 옥사를 겪던 이방원을 마지막에, 옥사를 담당했던 남은(진선규 분)은 이인임의 수하인 듯 굴었으나 결국, 정도전의 둘도 없는 벗이었으며, 이인임의 계략 하에 놀아나는 듯한 옥사를 정도전의 의지에 따라 바꿔놓은 결정적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보여지듯이, <육룡이 나르샤>의 정도전은 스스로 역사 속에 뛰어들어 혁명을 온 몸으로 겪어가는 인물이 아니라, 혁명을 계획하고 집도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를 따르는 연희의 태도에서 보여지듯이 전지전능한 종교적 교주와도 같은 인물로 그려지는 정도전은 드라마적 캐릭터로 보았을 때 '납작'하다. 즉, 그는 고뇌하나, 그의 고뇌는 마치 예수가 그의 제자를 두고 고민하듯 '인간적이지(?) 않다. 그리고 뻔히 구해줄 수 있는 이방원을 이 기회를 통해 반성을 하라고 내처두었듯이, 전지전능하다. 따라서 그런 전지전능한 인물 정도전은 종종 등장하는 코믹한 씬에도 불구하고 극중 할 일이라고는 알고보니 이게 내 계략이었어라던가, 아니면 장황한 설명조의 웅변 밖에는 극중 기여할 바가 적다. 다른 사람들은 욕망에 고뇌하고, 앞날을 몰라 헤매고, 세상에 자신을 던지지만, 이미 그의 머릿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는 혁명의 계획자 정도전은 믿고 의지할 대상은 되지만, 정이가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러기에 그와 홍인방의 불꽃튀는 설전의 장면에서, 어쩐지 홍인방에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홍인방의 의견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그가 인간적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이런 본원, 혁명의 기획자 정도전의 절대 옮음이 <육룡>의 장점이자, 동시에 극적 매력을 덜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또한 <육룡>은 그런 혁명의 기획자 정도전의 휘하에 비밀 조직원으로서 나머지 용들, 특히 고려의 젊은이들의 이합집산을 그려낸다. 특히 12부의 과정에서 아버지 이성계보다, 그의 아들 이방원의 열혈 혁명 의지로 인한 굴곡을 다룬다.  비록 지금은 젊은 혈기에 정도전을 스승으로 모시겠지만, 곧 그는 왕좌를 위해 정도전을 제거할 것이고 아비와 척을 지고, 형과 동생들을 제거할 권력의 화신이기에, 유아인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역성 혁명의 주도 세력으로 그를 따라가는 것이 저어된다. 

이방원이야 그래도 역사적 인물이니 그렇다 치고, 나머니 인물들 분이, 땅새, 연희, 무휼의 이야기로 가면 극은 지지부진해진다. 이들은 고려의 민중을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들인데, 어쩐지 저마다 사연도, 극중 역할도 어정쩡하다. 마치 정도전의 심중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장치가 된 듯한 연희의 존재도 부담스럽고, 당차게 황무지를 개간하던 소녀에서, 천민 출싱에 어울리지 않게 장황한 대사를 읊어대며 어느덧 이방원 바라기가 된 분이도 어정쩡하다. 땅새도, 무휼도 그들의 사연으로 들어갈라치면 극이 갈팡질팡하는 듯하다. 결국 '민중 사극'를 지향하지만, 극이 그 '민중'들은 저마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느덧 본원의 조직원으로만 그 존재감이 귀속되어 버리고, 대신 칼만 들지 않았을 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정치판과, 가끔씩 등장하는 황당무개한 무협 칼싸움이 <육룡>의 재미를 추동한다. 결국 무인과 사대부의 합작품 넘어선 조선의 역성 혁명, 그를 설득해 낼 수 있을 지, 이것이 시청률과 무관하게 <육룡>의 진짜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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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5.11.11 14:24

사랑과 복수가 지천에 늘어져 있는 tv드라마에서 생소한 화법의 두 드라마가 있다. 바로 sbs월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와, jtbc금토 드라마 <송곳>이 그것이다. 고려 말 권력 투쟁을 다루는 드라마라 생각하며 리모컨을 고정한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혁명'이 등장하고,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발 내딛고 마는 그런 인간의 이야기 <송곳>은 섬세하게 노동조합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고려 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의 혁명과, 2003년년 까르푸 노동조합을 배경으로 했음에도, 역설적으로 드라마 속 현실은 2015년의 현실을 복기한다. 그래서, 드라마 속 '혁명'은 과거의 혁명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요, 드라마 속 노동조합으로의 결집은 현실 속 우리의 단결을 촉구한다. 




'혁명 전야' <육룡이 나르샤>
왜 고려 말이었을까? 그것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답을 해준다. 백성들이 가진 것 30%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 90%로 세율을 높이는 권력, 그것도 부족하여 백성들이 피땀으로 일군 황무지까지 자신의 힘을 동원하여 빼앗는 권력,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는 권력, 빼앗긴 자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 나라, 가진 자들의 권한이 되어버린 나라, <육룡이 나르샤>는 말한다. 그건 더 이상 그 누군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그리고 그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고려 말에 시청자들은 묘한 현실의 기시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고려 말에 새로운 지켜야 할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혁명'을 외치는 일군의 무리들이 등장한다.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퀄로서 드라마는 본원 정도전(김명민 분)을 그 핵심에 두고, 그를 중심으로 이성계(천호진 분), 이방원(유아인 분), 땅새(변요한 분), 연(정유미 분), 분이(신세경 분), 무휼(윤균상 분) 등의 여섯 용을 등장시켜, 고려에서 조선이라는 역성 혁명의 과정을 그려낸다. 

조선의 시조 이성계의 성업을 기리기 위해 정도전이 지었다는 '용비어천가'는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건국까지 이성계의 선조들의 업적을 전설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중 첫 구절, '해동의 육룡이 나르시어, 그 행동하는 일마다 하늘이 내리신 복이시니'에서 유래된 <육룡이 나르샤>는 이성계의 선조 육룡 대신, 하잘것없는 백성들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는 곧,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을, 그저 왕씨 왕조에서 이씨 왕조로의 역성 혁명이라는 왕조의 변화가 아니라, 고려 말 그 억압의 구조를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민중'의 대변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상징적으로 '용'으로 승화시켜, 조선의 건국이 바로 이런 '민중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드라마는 그리고자 한다. 그에 따라 드라마는 장황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구구절절 땅새와 연희, 그리고 분이와 무휼의 사연과 역할을 부여하기에 고심한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정도전과 이성계, 이방원의 대업이 아니라, 바로 고려 말 민중의 참을 수 없었던 저항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참을 수 없음과, 저항 의지는 곧 견디기 힘든 우리의 현실로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더구나 이방원을 비롯하여 분이, 무휼 등이 대부분 젊은 연기자인 이 드라마의 육룡들의 활약은 결국 2015년 젊은이들의 각성과 행동을 촉구한다. 



2015 당신을 위한 노동조합 안내서, <송곳>
시작은 이수인(지현우 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제 스스로도 그 다음에 어떤 결과가 올 지 뻔히 알면서도 불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듯 그렇게 삶의 고달픈 행보를 밟으며 살아왔던 이수인의 지난 여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등학교 시절, 육사생도 시절, 늘 선택의 고민이 이수인을 휩싸였던 순간, 이수인은 결국 송곳같은 결정을 내리지만, 동시에 그의 결정은 그걸 지켜본 시청자들에게 지금 혹은 지나간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 이수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푸르미 마트의 노조원들과, 구고신의 노동상담소에 있는 문소진(김가은 분)으로 확산되어 가는 송곳들의 행렬, 그들이 선택한 노동조합의 여정은, 또 다른 질문을 시청자에게 던진다. 드라마는 매 상황마다, 섣부른 정답의 행보를 가는 대신, 의문부호와, 물음표를 던진다. 노동상담소 소장 구고신은 함께 모여 싸움을 하려고 하는 푸르미 식구들에게 지표를 제시해 주지만, 동시에 그들이 얼싸안고 쉽게 들썩일때 마다 찬물을 뿌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세상은 강고하고, 세상의 편견은 그보다 더 굳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구고신의 찬물 덕분에, 역설적으로 <송곳>은 쉬이 희망에 중독되지 않도록 한다. 노동조합 만들기의 여정이 어설프게 강령하되지도 않는다. 드라마의 제목, 송곳처럼, 어쩌지 못해 벼랑인 줄 알면서도 선택하는 과정처럼, 서로가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키며 살기 위해 결국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최후의 선택지로서, 그리고 단단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2003년 까르푸 노동조합 결성 과정을 다루지만, 드라마에서 시작된 정규직 해고와 비정규직 확산의 현실이 2015년의 암울한 현실에 잇닿아 있기에, 오히려 <송곳>의 2003년은 현실적이다. 또한, 이제는 굴뚝에 올라가서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하는 열악한 현실이, 더더욱 구고신의 찬물 한 바가지가, 드라마가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자기번민이, 드라마 속 대안을 수긍하게 만든다. 세상에 세뇌당하고, 현실에 지레 무릎끓은 시청자들은 그래서 <송곳>을 보며, 역설적으로 정답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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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5.11.10 15:09

대안학교를 다니다 뒤늦게 입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아들의 수능을 앞둔 친구는 기존의 교육 제도의 통과 의례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친구에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그토록 비합리적이라 비판했던 수능이 그나마 자신의 실력으로 자신을 입증하고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기회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고 만다. 그러나 그 조차도 어쩌면 거짓이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좋은 환경에서 남들과 다른 교육적 혜택을 풍요롭게 받은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과의 경쟁은 애초에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육룍이 나르샤>이 이른바 음서 '고려와 조선 시대,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나 지위가 높은 관리의 자손을 과거를 치르지 아니하고 관리로 채용하던 제도) 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던 고려 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것은 '시의적'이다. 그래서 무신 길태미의 아들이 성균관에서 펄펄 날뛰는 음서가 당연시되고, 이인임, 길태미로 대변되는 권문세가들의 권력이 횡행하는 그 시대는 사극의 한 장면이지만, 그대로 현실로 오버랩된다. 그리고, 그 혼란의 고려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망해가는 나라 속에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정의'는 그대로 이 드라마가 현실에 부르짖고 싶은 간절한 외침으로 전해져 온다. 



혼란의 고려 말, 인간은 저 마다 자신의 바닥을 확인한다. 
'난세'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어지러운 세상이란? <육룡이 나르샤>는 그것을 '인간이 자신의 바닥을,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시대'라고 말하는 듯 하다. 태평치세라면 그저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 세상의 이치대로 흘러가면 되는 것을,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저 마다 시험에 들고, 삶의 위기에 몰린 채, 자신이 결국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확인하게 만들고 만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영웅도 탄생하고, 비겁자도, 배신자도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이제 2회에 이른 드라마는 말한다. 

애초에 kbs의 대하사극 <정도전>과 비슷한 시기에 기획되었던, 하지만 <정도전>의 편성으로 방송사가 바뀌고, 시기가 미루어 진채 2015년에 돌아온 <육룡이 나르샤>는 <정도전>과 같은 시기를 다룬다. 하지만, kbs의 사극 <정도전>이 역사를 정공법으로 해석해 들어갔던 사실화에 가깝다면, <육룡이 나르샤>는 마치 피카소의 인물화처럼 같은 시대를 여러 각도의 다른 층위를 가지고 접근한다.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 속 인물이 그 미묘한 층위를 통해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듯, <육룡이 나르샤>도 드라마 속 다양한 군상의 인물들을 통해 혼란기 속에 드러난 인간의 본질을 논한다. 

그래서 북방의 장수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고려 말의 지도자로 등극한 이성계(유동근 분)는 <정도전>에서 마지막까지 왕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조의 신하로서 그 충심을 거스르지 않는 지극히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되었다면, <육룡이 나르샤>의 첫 번째 용 이성계(천호진 분)는 첫 회에 그의 숨겨진 치부를 드러내고 만다. 즉 쌍성총관부를 다스리던 조소생을 배신하고 고려군에 투항해 성문을 열었던,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의 과거가 이성계로 하여금 고려말 도당에 진입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장벽을 만든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선'과 '악'의 선문답같은 이인임(최종원 분)과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남다름 분)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을 이룬 시조 이성계가 위인전의 시나리오와 달리 이미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도덕의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잔트가르'(최고의 사내)'라 부르며 흠모하던 아들 이방원은 진짜 잔트가르를 찾아 헤맨다. 

그가 발견한 아버지와 다른 잔트가르는 정도전(김명민 분), <육룡이 나르샤>의 정도전과 <정도전>의 정도전은 그 정의의 방향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정도전>의 정도전이 시대와 불협화음을 내며 성장하는 캐릭터라면, <육룡이 나르샤>의 정도전은 좀 더 노회하게 시대를 짚어보며 전략가의 기지를 갖춘 캐릭터랄까. 그렇게 이인임 앞에서 고개를 숙인 이성계 대신 이인임을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정도전을 따라 이방원은 성균관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정도전과 그를 따르는 신진 사대부들의 길을 쫓는다. 하지만 결국 정도전은 원나라와의 수교를 하려던 이인임의 술수는 막았지만 고문을 당하고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었고, 성균관에 남은 이방원은 불법 서적 '맹자'를 읽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유교, 특히 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마에 새길 신세가 될 뻔한다. 



정의, 하지만 난세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다. 
<육룡이 나르샤>는 <정도전>과 비교가 되지만 오히려 극의 구성 면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미드 <왕좌의 게임>을 연상케 한다. 시청자들이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줄 수 없는, 왕좌를 향한 피비린내나는 욕망이 진동했던 '게임'과도 같은 처절한 권력의 드라마를 향해 <육룡이 나르샤>는 달려간다. 

도당의 일원이 되고자 하지만 자신의 부도덕성에 발목이 잡힌 이성계, 고고한 정의를 향한 의지는 갈급하지만, 그의 뜻을 펼칠 광장은 허락되지 않은 정도전, 그리고, '잔투가르'가 되기를 갈구하지만, 결국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자들의 목숨을 거두고 시작되는 현실적 정의의 이방원까지, 조선을 향한 대의에 힘을 모을 이들의 서로 다른 '정의'의 첫발을 드라마는 그린다. 

주인공들만이 아니다. 오히려 2회에 이르는 동안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려 제일검이라며, 경박하고, 또 경박하고, 경박하기 그지 이를데 없는 길태미의 캐릭터이다. 자신의 욕망에 너무도 솔직한, 그러면서도 자신의 권력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길태미의 캐릭터는 <정도전>의 이인임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대한민국의 속물 갑의 본질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시청자의 친근한 주목을 끈다. 거기에, 1회에서 정도전의 가장 가까운 벗으로 그와 함께 정의의 길에 나섰다가, 2회에 이르러 길태미의 사돈으로 변신하는 홍인방(전노민 분) 역시 그의 말대로, 위기 속에서 변절하고 마는, 이 땅의 그 누군가들을 연상케 한다. 

드라마 속 대사가 투박하게 '선과 악'의 변증법을 논하고, '정의'를 내세우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위기 속에서 저마다 자신을 확인한다. 누군가는 변함없는 권력에의 의지로, 그리고 또 누군가는 정의로운가 싶었던 자신의 속된 본질을, 그리고 또 누군가는 선하고 싶지만, 도덕적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내걸고도 여전히 자신의 뜻을 향한 멀고먼 길을 확인하고 마는, 그리고 또 누군가는, 정의보다 가까운 피를 확인하며 저마다의 '정의'를 써내려간다. 그렇게 실존적인 인물들의 이합집산을 통해 드라마는 추상적 정의가 아닌, 역사 속에서 펄펄 살아 움직이는, 그래서 인간적으로 고민해 볼만한 '정의'를 논하기 시작한다. 


이제 2회에 이른 <육룡이 나르샤>의 만듬새는 그다지 매끄럽지 않다. 장면은 들쭉날쭉하고, 인물들의 캐릭터에 집중은 쉽지 않다. 그런가 하면 대사는 사변적이고 어렵다. 그리고 그 핑계의 몫은 상당 부분 피디인 신경수에게 돌려진다. 그런데 신경수 피디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바로 2014년 세상이 바른 리더의 자질을 소리높여 갈구할 때, 부도덕한 대통령(손현준 분)이 젊은 세대의 대변자같은 경호원(박유천 분)과 함께 자신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했던 이야기를 다룬 <쓰리데이즈>가 그것이다. 희망을 기대할 수 없었던 세월호의 시대, 강직하게 '정의'를 이야기하고, 지도자와, 젊은이가 함께 미래를 기약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어수선했던 연출력에도 불구하고 신경수 피디의 우직한 주제 의식에의 천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여전히 그 어수선함은 쉬이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육룡이 나르샤>가 그 본래의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서 결코 곁가지로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부디 세월호의 시대보다 더 나쁜 시대가 있을까 라는 탄식이 실현되고 있는 2015년, 다시 우리에게 '정의'를 향한 희망을 길어줄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 주길 기대해 본다. 기왕이면, 간지나는 연출의 업그레이드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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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5.10.1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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