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 아들을 죽인다. 그것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뒤주에 넣어, 고스란히 생매장을 한다. 

이 '엽기적 비속' 살해 사건에서 '뒤주'라는 단어만 등장하면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고개를 까딱한다. 누군지 알기 때문이다. 세세한 그 내막은 몰라도, 조선 조 역사에서 영조가 그의 아들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이 사건은 전대미문의 역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이 '비극적이고도', 드라마틱한 '엽기적' 비속 살해 사건은 당연히 이야깃거리에 솔깃한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와 문학에서부터 드라마,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로 변주된다. 그리고 변주를 하는 사람들마다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 서서 '사도'의 죽음을 해명하고자 애쓴다.

 

<영원한 제국>에서 <비문>까지 정치적 개혁 세력으로서의 사도 
2014년 12월 종영된 sbs사극 <비문>은 사도를 둘러싼 역사적 시각 중 한 편을 대표한다. 즉, 아비 영조로 대비되는 '노론'과 본의건, 본의 아니건 손을 잡게 된 '수구' 세력에 대비되어, 기존 정치 세력에 반발하는 '개혁' 세력이 대표자로서 '사도' 이선을 그려낸다. 이미 어미의 뱃속에서 태자가 되어 이십대가 되어 아비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까지 해낸 영특한 세자, 하지만 그의 '영특함'은 오히려 무기가 되어, 그를 아비와, 그리고 그 아비를 존립하게 만든 '노론' 세력에 반기를 들게 만들고, 결국 그것은 정치적 패배로서의 '뒤주에서의 죽음'을 기인하게 만든다.

여기서 그려진 사도 세자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집권 세력인 '노론'에 대해, 그리고 그 '노론'을 중용하는 '노회'한 아비 영조에 대해 '개혁'과 '진정한 탕평을 이루고자 했던 '개혁'의 주도 세력으로서, 그리고 실패한 '개혁'을 죽음으로 감수한 '낭만적 영웅'이요, '정치적 희생양'이다. 1994년 상영된 <영원한 제국> 역시 이런 개혁 세력으로서의 사도 세자를 그린다. 심지어 2011년 <무사 백동수>의 사도 세자는 북벌을 주장하다 청과 결탁한 집권 세력에 의해 '살해'된다. 

뱀파이어를 다룬 퓨전 사극 mbc의 <밤을 걷는 선비> 역시 '사도 세자의 죽음'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이다. 극중 '사동 세자'는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오랫동안 우물에 갇혀 죽음을 당한 인물로 그려진다. 사도와 사동이라는 받침 하나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희생양으로 아비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그의 아들인 세손이 아비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자 하는 이야기가 '사도 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역사적 정황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뱀파이어물답게, 정치적 희생양으로서의 죽음으로 알려진 사동 세자 죽음의 뒤에는 뱀파이어를 없애기 위해 '비기'을 손에 넣으려 했던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귀'(이수혁 분)라는 뱀파이어가 있었다는 식으로 변주된다. 



정신병력에 희생된 사도 
이런 정치적 해석의 또 다른 한편에서, 사도 세자가 '의대증'(옷을 잘 입지 못하는 정신병)'을 보였다던가, 동궁전의 인물들을 별다른 이유없이 죽인 일 등을 예로들어 개인적 고뇌의 상징으로 사도 세자를 그리는 방식이 있다. 

사도 세자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그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존해왔던 바가 컸기 때문에 이전의 역사적 사극들은 정신적 이상자로서의 사도 세자를 그려내는데 충실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선왕조 500년-한중록>이다. 이 작품에서 사도 세자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유약한 심성을 가진 인물로, 그로 인해 결국 정신병까지 얻은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후 그저 아비를 잃은 불쌍한 여인네로 <한중록>에서 자신을 그려낸 혜경국 홍씨가 당대 노론 대표적 명문가의 여식으로 아비 홍봉한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 했다는 역사적 해석이 등장하면서, 혜경궁 홍씨 자신에 당위성을 강조한 <한중록>의 시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 제기되어 왔다. 

8월 7일 방영된 드라마 스페셜<붉은 달>은 정신병력을 앓은 사도 세자 개인의 불행에 집중하지만, 그것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제 아무리 정치적 입장에서 '재조명'을 한다 하더라도 사도 세자가 말년에 비단 옷을 가져다 주면 찢어버리고,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거나, 무명 옷만 겨우 갈아입었던 병력이나, 동궁전의 인물들을 별다른 이유없이 죽였던 범죄 행각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덮을 수 없다. 그리고 공포물로서의 <붉은달>은 이런 사도 세자의 정신적 불안정을 숙종-경종-영조 연간의 비극적 왕실사로부터 길어 올린다. 

즉 마흔이 넘은 나이에 겨우 아들을 얻은 영조는 그 아들을 왕재로 잘 키울 욕심에 경종과 장희빈이 기거했던 저승전 아들의 세자궁을 만든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저승전에서 내시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붉은 달>이 주목하는 것은 뜻밖에도 정신병력을 보인 사도 세자 뒤에 숨겨진 배후, 한을 품은 장희빈이다. 즉 숙종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사약을 받고 숨져간 어미, 그리고 어미의 뒤를 이어 숙종의 또 다른 아들인 영조의 정치적 야망으로 인해 독살된 아들 경종, 이 두 모자의 억울한 죽음을 부각시킨다. 즉 정치적 욕망에 따라 자신의 아내와 형조차도 가차없이 죽여버리는 아비들의 무자비한 행각이 '장희빈의 한'을 낳았고, 그 한은 왕실의 저주가 되어 '사도'에게 드리워진다. 

'사도'의 눈에만 나타나 그를 뒤흔드는 장희빈, 안그래도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에 강력한 군주 아비 영조 눈에 들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그는, 귀신의 속살거림에 하염없이 무너져 버린다. 원망하는 아비의 관을 만들고, 자신보다 더 아비의 사랑을 받는 세손의 관을 만들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관을 만들며 미쳐가는 것이다. 

아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세손의 남바위를 쓰고 육친의 정을 호소하는 세자, 그러다 장희빈의 혼령 앞에 혼돈에 빠져 마구 칼을 휘두르고 마는 세자의 모습은 흡사 셰익스피어 비극 속 햄릿이 영혼 앞에 자신의 정신을 놓아버리는 장면처럼 처절하다. <미생> 속 김대리였던 김대명은 어느 틈에 소심하고 유약한 세자가 되어 때로는 안쓰럽고 무기력하고 섬뜩한 새로운 사도를 선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붉은달>이 신선했던 것은 그저 혼귀의 희생이 되어버린 인물을 넘어 비극적 조선 왕실사로 확장된 공포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서 비극의 당사자만이 아니라, '어미'대 어미'의 대결로 이야기를 확장시킨 점이다. 자신은 물론 아들까지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린 장희빈 모자, 그들이 그래서 이후 왕실의 후계를 '비극'으로 물들이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해 보인다. 사도는 물론, 그의 아들인 세손에까지 뻗치는 공포의 야욕, 거기에 맞선 것은 또 다른 어미의 한이다. 장희빈의 포한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만 아들 사도, 그의 무기력한 패배가 그의 아들 세손에게까지 이어지지 않기 위해, 한의 대물림을 막기 위해 사도의 어미인 선희궁이 나선 것이다. 

사도도,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도, 그리고 그 아들인 정조까지 사도의 죽음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로 늘 역사의 주목을 받았지만 단 한번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았단 선희궁 영빈 이씨를 <붉은 달>은 주목한다. 비천한 신분을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그 인물은 악귀의 제물이 된 아들의 희생이 더는 세손에게 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왕실에 드리운 한을 종식시키기 위해 나서는 용기있는 여성으로 그려낸다. 그저 아들을 죽음으로 종결시키는 당사자를 넘어, 장희빈의 한에 대결하는 또 다른 '어미의 한'을 지닌 귀신으로 화하기 위해 자신을 '살신성인'하는 실천하는 '어미'상으로 선희궁을 새롭게 창조한다. 비록 공포물이지만, 사도라는 인물을 통해 본 비극적 왕실사, 역사적으로 조명받지 않았던 인물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붉은 달>의 접근은 뻔한 그 어떤 퓨전 사극보다 신선했다. 
by meditator 2015. 8. 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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