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일 <관능의 법칙>이 개봉했다. 권칠인 감독의 <싱글즈>가 2003년 개봉한 이후로 부터 거의 10년, 마치 그 영화 속 삼십대들이 십년 후의 후일담을 다루듯, <관능의 법칙>은 마흔이 넘은 여자들의 속사정을 들춘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여주인공들의 질펀한 관능의 한 판으로 시작된다. 일주일에 세 번을 하겠다는 약속을 결혼 초부터 굳건하게 지켜오는 미연(문소리), 남편 재호(이성민)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재 안에서 조심스레 비아그라를 털어넣고 아내의 요구를 맞추느라 애쓴다. 다 큰 딸과 사는 싱글맘 해영(조민수)은 딸아이의 눈을 피해 성재(이경영)와의 시간을 갖기위해 궁색하다. 물심양면으로 도와가며 오랫동안 사귀었던 직장의 상사가 어린 여자랑 결혼해버리는 바람에 분노에 떠는 것도 잠시, 그의 어린 연인 못지 않은 연하남의 대쉬에 곧드미스 신혜(엄정화)는 흔들리고. 영화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삶의 욕구를 성욕으로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질펀하게 육체의 향연을 벌인다. 사랑이라 쓰고 '성'이라 오독하듯이. 

하지만 그도 잠시, 동년배의 여자들을 만나면 늘상 하는 얘기라곤 누가 암걸렸네 라는 식의 건강담론 밖에 없어서 재미없다던 미연의 뒷담화가 무색하게,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딸이 '적당히 하라'며 퉁박을 줄 만큼 만끽하며 삶을 누렸던 그녀들에게 삶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녀들이 사실은 가장 믿고 의지하던 삶의 보루들이 흔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금과옥조처럼 믿었던 부부사이의 불문율이 흩어지고, 골드미스로서의 삶을 지탱하던 직장에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결혼에 대한 희망의 무산조차도 무색하게, 싱글맘의 삶을 견인하는 건강이 무너진다. 
그리고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이라도 되는 양 육덕스레 중년의 삶을 묘사하던 영화는 이즈음부터 슬슬 현실에 발을 디디기 시작하고, 남편의 바람난 현장을 목격한 미연, 수술실로 들어가는 해영에 이르러 그들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은 극점에 이르고, 중년의 삶을 묘사하는 영화의 미덕은 이 지점에서 가장 생기가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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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도 잠시, 잠깐 숨고르기를 한 영화는, 중년의 신산한 삶을 견딜 수 없었는지, 당의정처럼 아름다운 사랑으로 그걸 포장한다. 결국 관능으로 시작된 그녀들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들을 지켜주고 바라봐주는 순정남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의 원작이 롯데 엔터테인먼트 공모전 1회 수상작인 이수아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서두에 권칠인 감독을 내세운 이유는, 중년의 사랑을 다루었다는 소재적 특수성을 차치하고 보면, 영화의 얼개는 그간 권칠인 감독이 만들어 온 <싱글즈>를 비롯한 <뜨거운 것이 좋아>, <참을 수 없는>와 동일하다. 심지어 신혜에게 등장한 연하남의 설정에서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영미(이미숙> 앞에 나타난 연하남 경수(윤희석)가 오버랩된다. 아니, 다짜고짜 몸부터 맞추고 사랑을 시작하는 방식은 권칠인 감독 영화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사랑의 해법이다. 뿐만 아니라, 삼십대 라는 나이에서 오는 현실적 고민을 결국 나난(장진영)과 수헌(김주혁)의 사랑으로 마무리지은 방식처럼, 환타지적 사랑으로 현실의 고민을 무마하는 방식 역시 일관되게 감독의 영화적 스타일(?)이다. 

그래서 늘 권칠인 감독의 영화에서 그래왔듯이, 삼십대든, 그보다 더 나이든 중년이 되었든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듯한 관음의 민망함과, 그걸 지나 현실적 공감의 깊이에 빠져들었가가, 서둘러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 영화를 보고 나면 어쩐지 허무한 것이다. 과연 이 영화가 목적한 것이, 진짜 삼십대, 혹은 중년의 삶과 고민인지, 그게 아니면 그럴듯한 주제 의식으로 포장한 환타지적 사랑과 육욕의 향연이었는지. 

영화는 100일의 말미에도 불구하고 이미 잠시 바람이 난 남편에게 마음이 돌아선 미연을 보여준다. 하지만, 과연 일주일에 세 번 하는 것을 '신봉'하였던 육체적 삶이 중심이었던 미연이라는 여성의 삶에 대한 고민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정'으로 사는 재호와의 삶이 미연에게 의미가 있을지 영화는 고민하지 않는다. 성을 중요시하지만, 정작 한 사람의 삶에 있어 성의 의미를 고뇌하지 않는다. 
자신이 암을 걸렸다는 사실조차 그에게 숨겼던 해영의 자존심은, 그녀의 똥물 묻은 침대 시트조차 닦아주고, 그런 그녀를 보다듬어 주는 성재 앞에서 스르르 사라지고 만다. 이기적이었다는 후회로 결혼을 회피했던 성재의 고민은 서둘러 마무리된다. 
홀로 서기를 한 신혜에게 손을 내밀어 준 현승(이재윤)만 있다면 오케이다. 이모와 조카 정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현승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정말 그녀들의 중년의 삶에 여전히 그녀들을 사랑하는 그들만 있다면 다 해결이 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건 영화 자체 담론의 한계라기 보다는, 우리 시대 과학적 도움을 받아서라도 여전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중년의 담론에 대한 즉자적 반영일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내 곁에 나를 사랑해 주는 누군가만 있다면 나의 중년은 견딜만 한 것일까. 결국, 영화는 관능도, 사랑도, 결국은 중년의 삶도 깊게 들여다 볼 여유가 없다. 

늘 광고에 함께 하듯이 이 영화는 <건축학 개론>을 만들었던 명필름의 작품이다. 영화 <건축학 개론>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결국은 다시 봉합되어질 수 없는 젊은 날의 아픈 추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사는 중년에겐 용기와 사랑이 필요하다고 판단 했는지, <관능의 법칙>은 중년의 고민을 좀 더 들여다 보고 여운을 남기는 대신, 서둘러 사랑하는 남자를 쥐어주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덕분에 환타지는 얻었지만, 관능으로 시작된 중년의 문제제기는 휘발된다. 모처럼 몸에 맞춘 캐릭터를 만난듯한 세 여배우의 열연, 그에 못지 않는 이성민의 발군의 연기, 모처럼 만나는 이경영의 멜로가, 그래서 더 아쉬운 영화, <관능의 법칙>이다. 


by meditator 2014. 2. 1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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