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감탄을 했던 적이 있었다. 모두가 노회해지고, 무덤덤해져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날을 세우고, 그 나이들어 가는 그가 화두로 삼았던 사람들에 대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그 지점 때문이었다. 다른 영화들도 있겠지만, 아마도 내게는 <여자는 남자의 미대다>의 그 사람들이, 홍상수의 화두가 되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소위, 그 시절(?) 지식인이라고 불리웠던 사람들, 당대의 지식인의 허위와 위선을 일상 속의 삶의 아이러니를 통해 통렬하게 폭로하던 홍상수는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처럼 그와 동시대에 비슷한 이야기를 하던 다수의 감독들이 이제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하기를 멈추거나,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버전만 달리하며 '동어반복'처럼 올곧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왔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결국은 궁극으로 도달하는 지점이 같음에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홍상수가 펼쳐놓는 변설은 고고해졌고, 마치 강태공의 낚시처럼 인생을 낚아 올리는 경지에 이르른 듯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홍상수가 변할 수 없는 것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대학 강사에서, 영화 감독으로, 혹은 교수로 신분만 달리했을 뿐, 여전히 우리 사회 속 어딘가에서 기생하며, 먹물의 냄새를 풀풀 피우며, 하지만 그 이면의 가장 본능에 철저한 대한민국 표준 남성의 모습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듯하다. 2015년 거꾸로 돌아가고자 애쓰는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변함없는 주제에 천착한 홍상수의 이야기 방식의 혜안이 거꾸로 돋보이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그런 혜안에 대한 지혜가 짧은 이 글쓴이는, 시대가 달라짐에도 여전히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를 하는 홍상수에게 조금은 진저리가 쳐지기 시작했다. 어줍잖게, 우디 앨런을 들먹이며, 홍상수의 진화를 촉구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무식하게도 용감하게 2014년의 신작을 건너뛰어 버렸다. 그리고 <어셈블리>의 '국민 진상' 정재영이 출연했다는 말에 솔깃하여, 다시 찾아보게된 홍상수 감독의 신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통해, 어쩌면 영영 홍상수 월드의 신도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2015년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홍상수 
2015년의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라 명명된다. 21세기의 초반을 지나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시계는 거꾸로 '조선'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제는 '음서'라는 제도가 이름을 달리하여 횡행하고 있는 세상에서, 머리에 든 게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또 다른 본능에 충실하여 그 가진 것을 한껏 응용하는 세상에, 여태까지 줄기차게 같은 곳을 바라보던 홍상수의 목소리가 조금 톤을 달리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그때는 틀리는 함춘수(정재영 분)의 모습은, 지금까지 홍상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재연이다. 말로는 다양한 언설을 구사하지만, 오로지 그의 목적이 하나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한 그런 인물들말이다. 정작 그의 목적이 분명하기에, 그 목적을 향한 그의 언어들을 장황하고, 들떠있으며, 마치 이리저리 구차하게 꼿은 까마귀가 빌린 깃털처럼, 그의 입에서 말이 나오면 나올 수록, 그를 공허하게만 만드는 언어들이다. 때로는 그래서 '그'가 귀여고, 애처롭지만, 결국, 그의 노림수가 너무 뻔하다는 것이, 홍상수 영화가 보여준 '속물적 주인공'의 모습이다. 그렇게 예의 홍상수 영화 속 주인공과 한 치도 다름이 없이, <지금은>의 주인공 함춘수 역시 윤희정(김민희 분)를 향한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불사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갈구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혹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애초의 그의 의도를 왜곡하고, 결국은 애초의 목적조차 무의미해져 버리게 만들고, 기왕에 한껏 폼을 잡은 그의 위신조차 무너뜨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 겨우 여자 하나 어떻게 해보려다가 무너지고 만 그의 위신처럼, 그리고, 평론가의 세치 혀 앞에 무기력해져버린 그의 영화처럼, 결국 그가 거창하게 부풀렸던 그를 감싼 그것들은 알고보면 보잘 것 없는 그의 남성성처럼 역시나 별거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허위'와 '위선'을 제치고 나면 구애조차도 실패한 보잘 것없는 사내일뿐이다. 그렇게 홍상수의 영화는 마치 빚쟁이처럼 영화 속 사내가 가진 것을 짧은 런닝 타임 안에 홀딱 벗겨 거리로 던져 버린다. 

그런데 그렇게 자비없이 홀딱 벗겨버리던 홍상수가 '지금'이라는 토를 달고, 이야기를 달리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이야기 방식의 변화가 생소해, <자유의 언덕>을 찾아보니,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미 카세 료를 동원한 이 이야기에서 기미가 보인다. 권이 놓쳐버린 편지 더미 덕분에, 앞뒤가 뒤죽박죽되고, 계단 참에 흘려버린 한 장 덕분에 심지어 빠져버리기까지 한 이야기에서, 함춘수의 '지금'에 대한 빌미가 있다. 영화 속 모리로 분한 카세 료는 '권'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우연치 않은 사건을 통해 영선(문소리 분)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영화는 영선과 그런 사이가 된 이후의 모리의 난감함을 보여주고 그 이후의 정황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지만, 뒤늦게 찾아온 권을 맞이하는 영선의 밝은 모습을 통해, 모리와 영선의 끝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음을 예상하게 된다. 오히려, 그 보여지지 않은 편지 한 장의 후일담을 알 수 있는 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함춘수를 통해서 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같은 상황 속에 다른 대응을 보이는 함춘수의 모습이다. 똑같인 첫 눈에 윤희정이라는 여인에게 반해, 그녀를 단번에 '사랑하게' 된 함춘수라는 인물의 하룻밤의 이야기이지만, 아이 둘을 가진 유부남 감독 함춘수의 윤희정을 향한 서로 다른 사랑 이야기가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도록 만든다. 

홍상수 감독이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는 '그때'의 함춘수에 대한 조롱과 폭로였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연민이었더. '천착'이라고 할 만큼 감독은 줄기차게 그 이야기에 매달려 왔다. 주인공과 배우만 달라졌을 뿐, 결국 하고자 이야기는 그것이었다. 오히려, 세월에 따라, 그 이야기는 달관으로까지 보여질만큼, 그런데, 정작 2015년 그랬던 사람들이 가장 무기력해지고, 현실에 무너지려할 때, 정작 홍상수 감독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저 '그때'의 모습 밖에 모르던 함춘수가, '모리'로 부터 시작하여, 궤도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허위'와 '위선'을 폭로하고, 결국 사람이 그 정도라고 자조하던 감독이, 아니,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사람들이 가장 '희망'을 놓쳐버린 바로 그 시점이다. 

'그때'와 ,'지금', 함춘수는 똑같이 윤희정을 사랑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솔직히 다가가는 가, 그 방식에 따라,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윤희정이 받아든 감정의 결과물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함춘수와 같이 한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을 통해 확인하게 된 실체를 깨닫게 되면서 변화하는 윤희정의 표정은, '그때'의 슬픈 결론이다. 그런가 하면, 똑같이 '사랑'을 얻지 못하지만, 홀가분하게 눈속을 떠나는 윤희정의 뒷모습은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래서 점점 더 살기 힘든 세상에, 여태까지 사람이 어쩔 수 없어 라고 이야기를 하던 홍상수 감독이, 아니, 다르게 살 수 있어, 다른 방식이 있어 라고 말을 건네기 시작한 것이, 심지어, '혁명적'이고 '전투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남성성'과 같은 본능에만 충실한 것이 인간이지, 하며 자조적으로 비판하던 감독이, 아니, 꼭 그건 아니야, 같은 상황이라도, 좀 더 솔직하게 담백하게 자신을 인정한다면, 어쩌면 그때의 상황은 지금과 다를 것이야 라고 도전전으로 말을 건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맞고> 속 '지금'의 함춘수는, <어셈블리> 국민 진상 진상필만큼이나 도발적이다. 편의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등등 툭툭 치며 세상을 향해 떠미는 것 같다. 해학과 풍자 대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세상을 향해 다시 살아봐야 할 분위기다. 

그러니 여전히 홍상수는 우리 시대에 가장 날이 선 청백리이다. 그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서 부터, 그가 세상에 말을 전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날선 이야기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정재영',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홍상수는 정재영을 비롯한 배우들을 재발견하게 해준다. 김민희가 가장 이쁜 영화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5. 10. 4. 1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