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딱 중반을 지난 tvn의 수목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 생활>에 대해 일각에서 볼멘 소리가 나온다. 어떻게 된게 감옥에 다 억울한 사람만 있는 거냐고? 우리 사회에서 감옥이란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막상 감독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김제혁의 주변 인물들 중 상당수가 억울하다. 늘 해맑은 웃음을 짓던 목공반의 신재하는 보험이 들지 않은 사주의 차를 몰다 교통사고를 내고, 합의금이 없어 감옥에 온 처지이며, 말끝마다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고박사는 지방대 출신으로 회사의 비리를 짊어지고 대신 형을 사는 중이고, 악마 유대위는 알고보니 더 악마같은 내무반 병장의 상습적 구타로 인한 군대 내 폭력 사건의 희생양이었다. 회를 거듭하며 감빵 생활 동료들의 사연이 풀어질 수록, 감빵에 오지 않아도 될 사람들의 수도 늘어난다. 과연, 감빵의 미화일까? 


물론 비율로 따지고 보면 전체 제소자 중 억울한 사람들의 비율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의 사연이 풀어지며 그들의 억울함이 도드라져 '미화'냐라는 볼멘 소리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악마 유대위의 사건도, 고박사의 사건도 실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초로 하여 재구성된 사연들로 결국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건 '법'이라는 그물의 성김이요, 인간이 주재하는 재판의 '자의성'이다. 심지어, 8회, 신재하의 가석방 에피소드에서 보여지듯, 10분의 시간만 투자하면 한 사람의 재소자에게 사회의 빛을 줄 수 있는 사안이 얼마든지 업무상 편의에 의해 지연되거나 파기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사회의 조직의 명암'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공교롭게도 '미화'가 아니냐는 <슬기로운 감빵 생활>이 교도소 내 재소자의 현실을 '인간적'으로 다루고 있는 상황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살인>이 개봉했다. '인간'이 만든 법, 그리고 그 '법'을 운용하는 인간들, 그리고 성긴 그 그물 속에서,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할 듯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 속 주인공은 '세번 째 살인'의 주인공이 되고만다. 

보이는 것 - 자의적 심판의 도구; 법 
영화를 여는 건 살인을 저지른 미스미(야쿠쇼 쇼지 분)가 아니다. 그를 변호하기 위해, 아니 그에게 내려질 살인죄라는 형량을 감하기 위해 동원된 성취 지향적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 분)이다. 죄의 여부가 아니라 '승소'를 위해 싸우는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사건을 어떻게든 사형을 면하게 하기 위해 다시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미스미가 탄 택시 블랙 박스를 조사하며 그간 계획된 범죄였던 사건의 판도를 변화시키려 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통장에 입금된 돈으로 '청부 살해'의 형태로 범죄를 변형시키고자 한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즈언조차 헷갈리는 미스미는 순순히 응하고, 검사는 그렇게 승소를 향해 달려가는 시게모리에게 죄인이 자신의 죄를 마주할 기회조차 놓치게 만든다며 비난한다. 

하지만 그런 비난을 뒤로하고 사건을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조사를 해가던 중, 그의 눈에 피해자의 딸 사키에(히로세 스즈 분)가 들어온다. 다리를 절룩이며 그 절룩이는 다리의 이유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고 전해지는 소녀, 그런데 뜻밖에도 그 소녀가 빈번하게 미스미의 집을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애초 목적한 바를 따르다 본의 아니게 미스미란 인물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지켜보며 마음 속에 의문을 키워가게 된다. 

그리고 재판을 앞두고 찾아온 사키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비밀을 재판정에서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런 사키에의 증언은 그녀에겐 치명적이지만 시게모리가 의도했던 바 미스미에겐 사형을 면하게 되는 가장 유리한 방법인 만큼 당연히 시게모리 팀은 그 증언을 채택하고자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스미의 반전, 기소된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자신의 죄를 시인했던 그가 입장을 바꾼 것이다. 황급하게 찾아온 시게모리에게 '자신을 믿느냐'며 강렬한, 혹은 간곡한 입장을 전하는 미스미, 그의 의사에 따라 시게모리 역시 지금까지 진행된 미스미의 살해를 뒤엎고자 하는데......



배심원 참여 재판으로 진행된 재판 과정, 미스미의 번복에 대해 재판부는 당황한다. 함께 모인 판사, 검사부, 그리고 변호사들. 원칙대로라면 재판을 엎고 다시 처음부터 진행해야 하지만, 그 원칙에 대해 판사가 재판의 편의성을 내세워 제동을 건다. 그리고 오가는 서로의 눈빛, 그 순간 그들은 법의 판결을 내리는 사람도, 심판을 하는 사람도, 변호를 하는 사람도 아닌, 재판이라는 과정의 공범자들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재판은 돌발적인 미스미의 반론을 무시한 채, 예상대로의 결론에 도달한다. 

보이지 않는 것- 인간은 사회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
미스미는 30년을 감옥에서 살다나온 사람이다. 자신을 찾아온 시게모리에게 그는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사람이라 말한다. 공교롭게도 30년전 미스미에게 은혜로운 판결을 내려 사형을 면하게 했던 시게모리의 아버지는 이제와 자신의 판결을 후회한다. 그때 차라리 사형을 내렸다면 오늘날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시게모리의 아버지가 사형에서 미스미를 구해주었던 30년전 사건 때도 미스미는 두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지 않은 채 자신의 죄를 수긍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가난 때문에 고생만 하다 가셨다는 미스미, 그는 그가 살던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괴롭히던 조폭 두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사키에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사키에를 어린 시절부터 괴롭혀 왔던(?) 그래서 그녀의 절룩이는 다리의 원인을 제공했던 그녀의 부친을 살해했거나, 살해의 죄를 뒤짚어 썼다. 오히려, 현재의 그가 보인 '보이지 않는 행보'를 통해, 그의 30년전 살인까지 의심되기 시작한다. 그 없이 홀로 자라 여급이 된 딸에게는 죽어 마땅한 아버지이지만, 정작 딸이라 판사에게 엽서까지 보낸 사키에를 딸로 여긴 듯한 미스미, 자신이 키운 카나리아를 죽이거나 풀어주는 그 미묘한 경게에서, 관객은 시게모리처럼 의심과 믿음의 경계에서 혼돈을 느낀다. 

아마도 우리 영화라면 어땠을까? 끝내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달라는 시게모리에게 화사한 역광과 함께 입을 다물어 버리는 미스미 대신, 그의 곡진한 사연과 함께, 헌신적 대리 부성애를 풀어내지 않았을까?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주목한 건, 미스미의 사연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나오면 더 모호해지는 미스미의 진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처럼, 애초 어쩌면 30년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한 사람의 진실 따위는 아랑곳없이, 아니 애초에 '진실이 해명되는 곳이 아닌' 법정, 그리고 그 법정으로 상징되는 인간 사회를 드러낸다. 



그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유달리 다른 일본 감독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호응이 좋았던 감독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려낸 풍경화같은 배경과, 그 속의 따스한 인간애를 그렸던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등의 작품들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인간들 사이의 이야기를 보다 거시적으로 확장하자, 그의 작품이 말하는 바가 비판적으로 변했다

마치 그의 전작들과 <세번 째 살인>의 간격은, 신영복 선생이 <더불어 숲>에서 말한 후지산과 키 작은 풀이란 뜻의 아사쿠사(淺草)로 대비된 일본 사회가 연상된다. 즉, 키작은 풀들이 사는 나라, 작은 주택과 낡은 가구들을 아끼며 검소하고 겸손한 삶의 방식을 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를 상징하는 후지산은 정작 풀 한 포기 거둘 수 없는 쉬이 그 모습을 허락치 않는 군림하는 거대한 설산이라는 것이다. 즉, 조직화된 거대한 체계 속에서 숨죽여 온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단지 일본이라는 사회가 아니라 근대화라는 과정 속에 숨겨진 이 사회와 인간의 아이러니를 일찌기 신영복 선생은 짚으셨다. 

미스미와 사키에 사이의 숨겨진 사연은 어쩌면 그의 전작 속 훈훈한 인간애의 그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사건'이 되고, '법'이라는 사회적 제도 속에 편입되는 순간, '인간'은 상실되고, 인간적 구원은 요원해지며 심지어 법과 그 법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살인'의 공모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영화는 증언한다. 영화는 '구원'과 '심판'을 논하지만, 그건 종교적인 언어가 아니라, 인간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과정으로서 '구원'과 '심판'을 묻고 회의한다. 


by meditator 2017. 12. 15. 1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