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모래알처럼 구별이 안 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어떤 얼굴이든 독특하고 딱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그 얼굴들은 엄마의 얼굴이거나 아빠의 얼굴이고, 누이 혹은 형제의 얼굴이며, 딸의 얼굴이거나 아들의 얼굴이다. 그 얼굴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아로새겨져 있어서 다른 누구의 얼굴과도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애착의 핵심이고, 그 애착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질이다. -붉은 낙엽, 토마스,H.쿡


흔히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뇌리에 떠오르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일 것이다. 인류가 수만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자손손 융성을 이루는 기본이 되어온 남녀간의 끌림, 하지만 곰곰히 다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인간의 삶을 보존하는데 거 원초적인 것은, 남녀간의 원초적 끌림보다도 더 맹목적인, 내 새끼를 보호해야 한다는 부모들의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었을까? 더구나 다른 동물들과 달리, 나이가 지긋해서야 지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인간이란 동물의 생존에는, 이성에의 사랑보다 육친의 맹목적 보호가 더 선험적이 아닐까 싶다. 흔히, 육친에의 사랑이라고 하면, 모성성을 우선으로 치지만,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비의 자기 유전자에 대한 집착이란 어미의 모성성 못지않은 한가닥을 하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11월 17일 KBS드라마 스페셜, 단막극 2013, 드라마 극본 공모 당선작 시리즈 마지막 편으로 방영된 <불청객>은 이 맹목적 부성애에 발목을 걸며, 인간으로서의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숭고한 이유는 죄의식이 있어서래요'라며.



이야기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다. 매의 눈을 가진 강력반 반장 국서, 그의 집에 불청객이 찾아온다.

그는 바로 7년전 국서가 살인죄로 집어넣었던 범인 이태호다. 그는 7년전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 아니었으며 국서 자신도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냐며 다그친다. 그렇다. 매일 밤 한 컵의 소주를 들이키고도 잠을 못이루는 국서는 알고있다. 그날 밤 죽은 자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 태호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막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딸을 둔 아빠는 현장에 떨어진 핸드폰으로, 딸이 범인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딸의 핸드폰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고, 대신 엄한 태호를 범인으로 몰아 감옥에 보낸다. 결국 참지못한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슬며시 흘린 채. 그 한 마디에 단서를 얻은 태호는 7년만에 감옥에서 나와, 다짜고짜 국서의 집을 찾아 들어와 복수를 하겠단다. 그의 복수란 건, 국서 스스로 경찰에 자신의 딸을 고발하라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딸을 죽이겠다고 태호는 협박을 해댄다. 


드라마 스페셜 극본 공모 당선작 시리즈의 카피는, '한 줄의 상상이 한 편의 드라마가 되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방영된 네 편 중, 10월 23일 방영된 <마귀>는 역사의 행간에서 길어올린 파발꾼을 역사적 인물로 형상화시켰고, 11월3일 방영된 <나에게로 와 별이 되었다>는 이 시대 88만원 세대의 슬픈 사랑이 자화상을 그려내었다. 11월 10일 방영된 <오빠와 미운 오리>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상투적 반전이 또 기존 드라마와는 또 다른 반전이 되는 사고를 담아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시리즈인 <불청객>은 가장 공모작 카피에 어울리는 상상의 폭과 깊이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마치 한 방울의 물감이 종이 한 장을 다 물들이듯이, 그저 집에 찾아온 불편한 사람이라는 에피소드는 아버지와 딸, 그리고 억울한 범인과 그를 범인으로 몰아간 형사, 라는 표면적 관계를 넘어, 인간다움의 근원을 헤집는다. 

좋은 드라마일수록,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단선적이지 않다. <불청객>은 보는 내내 등장하는 누군가의 편을 들어 우리 편 이겨라 하는 심리로 편하게 드라마를 보던 시청자들을 괴롭힌다. 느닷없이 쳐들어 온 불청객인 줄 알았더니,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람이요, 그래서 그의 편을 들고자 했더니, 그의 협박은 도를 넘고, 이미 아비와 딸은 충분히 고통을 받은 거 같아 보인다. 그래서 다시 불청객을 미워하려 했더니, 아뿔사, 그는 그 7년 동안, 그나마 자신을 혹처럼 생각하는 아비가 죽은 것도 모른 채 그 자신도 죽을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저 드라마의 마무리에 이르러, 내뱉을 수 있는 단어는, '이를 어째'이다. 


삶은 언제나 불신과 추측으로 무너진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의심이 모든 것을 망쳐놓는다. 혹시 혹은 만약에, 라는 생각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이다-토마스, H쿡


부모 자식의 연을 맺고 사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국서가 맞딱뜨린 상황에서, 맹목적인 부성애의 결정에 토를 달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단지 부성애와 인간의 도리를 대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7년이 지난 후, 딸은 울부짖으며 대든다. 아버지는 왜 한번도 그날의 일을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아버지는 지레 자신이 피해자를 죽였으리라 예단한 거 아니었냐고. 아버지는 나를 한번도 믿지 않았다고. 그러면서 드라마는, 우리가 원초적이라 접어두는, 그 맹목적 육친애의 맹목성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당신 자식을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이냐고. 



토마스 H쿡의 소설 <붉은 낙엽>은 그 막연한 부성애가, 어떻게 세 명의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두 가정을 무너뜨려 가는지를 증명해 내는 소설이다. 드라마 <불청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막연히 내 자식을 사랑한다고 지레 짐작한다. 그러면서, 사실 누구보다 앞서 내 자식을 의심하고 불신하며 자식들을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왜곡된 부모 사랑들이 그 증거로 넘쳐나고. <불청객>은 그 눈감은 내리 사랑에 발을 건다. 그리고, 그 맹목성이 가지는 잔인함을 가슴 절절하게 그려낸다. 태호의 죽음이 마치 내 잘못인 것처럼 뜨금하도록. 언제나 그렇듯 좋은 드라마는 고해성사와도 같이 우리를 정화시킨다. 


<불청객>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절찬리에 종영한 kbs2의 수목 드라마 <비밀>이 떠오른다. 운전대의 주인을 바꾼 남녀의 어긋난 사랑이 펼쳐가는 파장은, <불청객> 아비의 잔인한 내리 사랑의 파장과 유사하다. 똑같이 좋은 드라마에서 풍기는 향내가 난다. 조만간, 또 한 편의 무시무시한 명작 속에서 이은미 작가와, 노상훈 피디의 이름을 발견할 것같은 예감이 든다. 벌써부터 기대로 어깨가 들썩거린다. 

by meditator 2013. 11. 18. 10:19

sbs는 11월16일부터 5부작으로 <최후의 권력>을 방영한다. 그중 1,2부는 이병헌의 나레이션으로, 정봉주, 금태섭, 천호선, 박형준, 차명진, 손수조, 정은혜 등, 여, 야를 망라한 전, 현직 국회의원들 7명이 코카서스 산맥을 종주하는 일종의 리얼리티 다큐 프로그램이다. 


국회의원 시절, 서로 여, 야의 저격수로 만났던 박형준, 차명진, 그리고 정봉주 의원은, 공항에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돌아서려 했다는 정봉주 의원의 말처럼, 사석에서도 대면하기가 껄끄러울 만큼 정치적인 앙금이 남아있는 사이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마치 감옥에서 출소한 사람처럼, 국회의원이라는 권력 밖으로 튕겨져 나와, 현실에 힘겹게 적응해 가는 처지이다. 
정봉주 의원은, 공항에서 떠나기 전 아내가, 만약 지금 당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면, 아내인 나도 당신을 뽑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번 여행으로 그 이유를 곱씹어 보라고 했던 아내의 전언으로 참여 이유를 밝힌다. 그와 정치적 적대 관계를 형성하던 차명진 의원도 마찬가지이다. 현역 시절 '안하무인'이라는 말에 딱 맞에 과격하기 이를데 없는 야당 저격의 논평으로 이름을 날렸던 차명진 전 국회의원은 그간 자신이 옳다고 굳건하게 믿었던 정치의 방식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정치적 입장을 서로 달리하지만, 이렇게 일곱명의 정치인들은, 우리 시대 권력이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제작진의 취지에 동의하며, 7박8일간의 험준한 코카서스 산맥의 여정에 동참한다. 


(사진; 마이데일리)

비록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다르지만, 7명의 정치인들은 순조로운 여행을 위해, 그리고 애초에 제작진이 제시했던 '권력 탐사' 취지에 발맞춰, 하루에 한 사람의 '빅맨'을 뽑아 여행을 지휘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빅맨'이란 무엇일까? 
제작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이상적이었다는 '빅맨'을 설명하기 위해 아프리카 부르키나피소의 티벨레 부족의 마을로 카메라를 옮긴다. 한 해의 농사를 기념하는 추수감사제에 등장한 빅맨, 그의 앞에서 춤을 추는 부족민에게 한 사람, 한 사람 복을 기원해 준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둘러앉아 잔치의 음식을 먹는데도, 부족민으로부터 귀중한 선물도 받은 빅맨은 결코 한번도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그 마을의 땅은 모두 빅맨의 것이지만, 결코, 빅맨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빅맨이 불철주야 자신들을 위해 일하느라 바쁜 사람이라고 증언한다.
이런 이상적 지도자 빅맨은, <최후의 권력>의 박권홍 피디가 만든 전작<최후의 제국>에서도 상세하게 다루어 졌었다.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아버지와 같은 지도자, 그것이 빅맨이었다. 
하지만 빅맨이 전지전능을 과시하지는 않는다. 외적을 막기 위해 두터운 흙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건물을 세우는 일은 여자들의 몫인 이 마을의 건축 일에서, 지도자는 빅맨이 아니라, 빅맨이 인정한 '퀸마더'였다. 즉, 빅맨은 마을 사람들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쓸 줄 알고, 권력을 제대로 배분할 줄 아는 리더였던 것이다. 

이런 이상적인 지도자 '빅맨'을 제작진은 일곱 명의 정치인들에게 날마다 돌아가며 해볼 것을 권했고, 그 결과 첫 번 째 날의 지도자로 금태섭 변호사가 자천타천으로 뽑혔다. 
길조차 알 수 없는 코카서스 산맥의 종주길에서, 한때 저마다 한 가닥을 했던 일행은 빅맨을 뽑아 놓았음에도 매 결정의 순간마다 목소리를 높여 빅맨의 권위를 추락시킨다. 결국 금태섭 변호사는 험준한 길의 선봉대로 차명진, 정봉주 의원을 뽑는 것으로 그의 권위를 다하고, 스스로 빅맨의 자리를 내려놓는다.

(사진; osen)

프로그램은, 그 결정의 과정, 그리고 빅맨의 결정 이후의 일행이 목표 지점까지의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겪은 빅맨의 심정, 그리고 다음날 빅맨이 아니었던 일행의 평가까지 가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마치 일곱 명의 정치인이 각자 빅맨에 도전하는 과정은, 2010년 1월에 방영되었던 <sbs스페셜 완장촌>의 또 다른 버전과도 같았다. 이상적인 권력을 찾아간다고 했지만, 결국 빅맨이 된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빅맨의 권위는 다양한 양태를 띨 수 밖에 없고, 그리고 언제든지 자신 역시 빅맨이 될 수 있는, 그래서 진지하게 빅맨의 권위를 모색하기 보다, 마치 정적을 감별하듯 혹독한 심사 과정 역시 권력에 목말라하던 완장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다. 

아직은 서로가 다른 정당, 그리고 한때 반목을 거듭했던 기억에 지배되고 있는 정치인들이지만, 첫 날의 여정에서, 고소공포증으로 길을 잃은 정봉주를 찾기 위해, 어렵게 도달한 정상을 뒤로 하고 그를 찾으러 다시 돌아간 차명진이라던가, 결국 조우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을 저리 미뤄둔 채 서로의 별명을 부르며 얼싸안는 과정은 이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by meditator 2013. 11. 17. 10:35

일단 내가 말하는 아줌마들이란 단어에 보편성이 좀 부족할 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두고 싶다. 여기서 생략된 말은 '내 주변에 있는'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주변에 있는 아줌마들이 이상한 건지, 죄다 <오로라 공주>에 빠져있다.


매일 저녁 7시 15분 방영하는 <오로라 공주>는 당초 120부작으로 기획되었으나, 작가의 요청으로 30회를 연장했고, 이제 다시 또 30~50회 연장을 고려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장과 관련하여, 그간 등장 인물 10여명이 빠져나갈 정도로 개연성 없는 전개에 분노한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다음 아고라에 '연장 반대 서명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일부 지각있는 네티즌들의 연장 반대 서명 운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로라 공주>는 이번 한 주 동안 자체 최고 시청률을 세 번이나 갈아치웠다. 

*친정 아버지 제사 때 만난 친정 어머님은 요즘 낙이 <오로라 공주>를 보는 거라고 하신다. kbs1의 8시 30분 일일 드라마의 고정 시청자였던 어머니가 노선을 바꾸셨다. 거기 다 한 술 더 떠서, 드라마를 보고 나면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의 시청담을 나누신단다.
*친정집 김장하는 날 동생이 늦었다. 산더미같은 배추더미를 쌓아놓고, 속을 버무리고 있는데, 느지막히 나타난 동생이 하는 말, 어제 <오로라 공주>를 못봐서 아침에 재방송 보고 오느라 늦었다나.
*직장을 다니느라 바쁜 이웃집 아줌마가 쉬는 날 오전 빼먹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면 일주일 동안 바뻐서 빼먹은 <오로라 공주>를 몰아서 보는 일이다.

(사진; tv리포트)

그런데 재미있는 건, 세대별로 <오로라 공주>를 시청하는 태도에 차이가 난다. 
친정 어머님처럼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전혀 꺼리낌없이 <오로라 공주> 찬가를 부르신다. 네티즌들이 문제를 삼고 있는 것 중 하나인,등장인물의 잦은 사라짐에 대해서는 '잔가지를 쳐낸다'는 표현을 쓰시고, 오로라 공주와 시월드의 다툼을 논하실 때는 흥이 나셔서 열변을 토하신다. 어머니 세대의 최근 가장 핫한 이슈는 오로라의 시집살이이다. 
반면 중년의 주부들은 <오로라 공주>를 재미있게 그것도 빠짐없이 보면서도, 어딘가 껄끄러운 자세를 취한다. 마친, 한참 야한 영화를 보다 그 모습을 엄마에게 들킨 아들처럼 면구스러워한다. 그냥 뭐 욕하면서 본다든가,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마지못해 본다는 식이다. 보고는 있지만, 자신들이 보는 드라마가 그닥 건전하지 않다는 걸 인식하는 모습이다. 
물론 세대를 막론하고 오로라의 또 다른 남자, 설설희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걔중에는 그 남자 보는 맛에 본다는 분조차 계신다. 

<오로라 공주>는 아줌마들의 '게임'이다. 그것도 가장 환타지스러운 rpg게임이다. 드라마 <오로라 공주>는 마치 게임 한 판을 하듯이 매회 승부가 결정된다. 오늘은 오로라의 시월드가 한 판을 따면, 내일은 거기에 오로라가 반격을 하고, 다시 그 다음날이면 숨죽여 있던 오로라의 남편 마마가 목소리를 높인다. 오로라가 궁지에 몰리자, 설희가 나타나 손을 내밀어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부잣집 공주님같던 오로라가 모든 걸 잃고 가난에 빠져있다가, 스타가 되고, 다시 결혼을 하며 시월드의 늪에 빠지는 방식은 rpg게임의 롤을 고스란히 빼다박는다. 자식들이 게임이나 한다고 쯧쯧거리던 그들이 정작 자신이 가장 게임같은 드라마에 빠져있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그런 나이든 세대를 한심스러워 한다. 누군가는 엄마 때문에 강제 시청의 고통을 호소하고, 또 누군가는 그 소리를 듣는 거 조차 소음 공해라며 비명을 지른다. 몇 십회의 연장으로 작가가 얻어가는 수십억의 돈에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젊은 세대들은 어떤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게임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벌 집 자제들의 사랑 싸움 드라마에 또한 열을 올리지 않는가 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놀 것이 없는, 재미를 찾을 수 없는 중년 이후 세대의 놀이이다. 수능을 앞둔 고3들 중 다수가, league of legend에 빠져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소중한 1년을 날려버린 거에 비하면, 작가에서 수십억을 더 얹어주고, <오로라 공주>라는 게임을 연장하는 건 약과같기도 한다.
엄마는 아들에게 게임만 한다고 욕을 하고, 아들은 엄마가 맨날 막장 드라마만 골라서 본다고 한심해 하고, 세대별로 극명하게 갈리는 문화적 괴리감, 과연 이걸 각 가정의 문제로만 치부해야 할까?  

최근 게임과 관련하여, '중독 예방·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욕하면서 드라마를 즐기는 중년 주부들에 대해서도 그저 '개념이 없다'며 치부할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드라마 중독의 관점에서 치유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게임이 하다보면 점점 더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스케일이 큰 장르에 빠져드는 것처럼,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주부를 대상으로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쏟아붓는 드라마 들 중에서 당연히 가장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그 무엇을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드라마는 그저 재미있으면 보는 것인 것이다. 그러기에, <기황후>가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게임이 잘 팔린다고 해서, 그 게임을 좋은 게임이라고 하지 않듯이, 시청률을 척도로 드라마를 재단하는 기준 자체를 달리해야 할 것이다. 더더구나 게임이 찾아가 하는 것과 달리, 드라마는 그것을 만들어 제공하는 방송사라는 '공공'의 기관이 있다. 결국 연장 반대 서명이든 무엇이든, 그 공적 구조를 가진 방송국과, 제작진의 양식에 기대어 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오로라 공주>의 연장에, 역사 인식에 기본적으로 함정을 지닌 <기황후>의 방영을 결정한 mbc의 행보가 아쉬울 뿐이다. 
더더구나 결국 연장 결정은 방송국이 함에도 우리는 임성한 작가의 결정에 따를 거예요, 하면 뒤로 물러나 있는 방송국의 태도는 더더욱 비겁하다. 
작년 kbs 주말 드라마로 높은 시청률을 보이며 인기를 끌었던 <내 딸 서영이> 같은 드라마는 늙고 젊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세대가 감동을 받으며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교훈적 내용이 넘쳐났던 드라마였다. 꼭 막장이라야 사람들이 보는 게 아니다. 결국 만드는 사람들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만드는가에 따라 좋은 드라마라도 높은 시청률을 올리며 인기를 끌 수 있다. 
만드는 사람의 자질과 인식에 따라 세대간 평화를 불러올 수도, 세대간 갈등과 반목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11. 16. 10:49

친한 친구를 만나니 몹시 화가 나있다. 

함께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보신과 안위를 위해, 또 다른 함께 하는 사람을 쳐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목도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그 일을 교묘하게 합리화하기 까지 하면 자신의 입장에 반대하는 친구를 공격하기 까지 했단다.
분노한 친구를 그 사람이 혼이 쏙 빠지게 한번 들었다 놔야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라며 한바탕 할 궁리를 한다. 그런 친구에게 말했다. '얘야, 자기가 무얼 잘못한 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백날 이야기 해봐라, 어디 동네 개가 짖나 할 꺼다. 아니 오히려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면서 길길이 날 뛸 수도 있어. 지가 깨닫지 못한 사람한테 한바탕 해봐야, 니 입만 아퍼'

14일 16부작으로 종영된 드라마 <비밀>을 보니, 친구에게 했던 이 말이 떠오른다. 유정이에게 결혼 신청을 할 생각에 설레이며 집을 나서던, 아니, 심지어 사랑하는 유정이가 자기 대신 감옥에 갈 때만 해도 검사 안도훈이 꿈꾸던 행복은 '정의로웠다'. 그리고 가진 것 없는 자기 부모와, 유정이의 희망을 걸고, 그 정의를 실현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미 엄밀하게는 자신의 차로 친 것도 아닌, 피흘리는 지희를 버려둔 채 떠나는 그 순간부터 안도훈은 명예로운 검사직 대신에, 검사라는 직위가 이 사회에서 누리는 입신양명의 유혹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지희를 눈감은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유정이의 가석방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또 한 발 더 나아가 유정이의 아버지를 죽게 방기하는 수준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려 했던 그 검사직이 무위로 끝나는 순간, 안도훈은 가속 패달을 밟은 사람처럼, 이 사회 상층부의 그 무엇이 되기 위해 치달아 간다. 

16부작이 마무리되었을 때 어쩐지 한켠에서 속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바로 <비밀>이란 드라마 내내 오로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유정이를, 그리고 유정이의 아버지를, 해치고 죽음으로 몰아가며 모든 짓을 저질렀던 안도훈의 결말이, 유정이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조민혁의 처절한 복수로 마무리되지 않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계급 에스컬레이션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안도훈의 결말은 결국 감옥행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좀 더 처절한 복수의 결말로써의 그것이기를 바랐던 또 다른 시청자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굴에 점을 찍고 나타나 다른 사람이라 우겨도, 그의 복수가 통쾌하면 박수를 쳐주던 우리나라 드라마의 주된 '맥거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대리 만족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드라마<비밀>은 그런 '복수'로 점철되었던 우리나라 드라마의 방식을 탈피한다. 대신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만드는 '참회'의 방식에서 해법을 구한다. 되돌아 보면, 이 드라마가 중반 이후 많이 던져진 질문이 바로 '너는 니가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지?'가 아니었을까? k그룹 옥상에서 조민혁이 안도훈에게 이 말을 던졌을 때, 안도훈은 부정한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궤멸되어가기 시작한다. 그는 단지, 유정이를 포기했을 뿐이라고 자신의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여자와 그의 아버지를 제거했을 뿐이라고 치부했지만, 조민혁의 그 질문에는, 그 사실 뒤에 숨겨진,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넘긴 파우스트처럼,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순수한 시절'의 안도훈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게 피부에 와닿는 안도훈의 표정 역시 일그러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일그러진 표정을 악으로 버틸 수 있었던 안도훈도, 자신의 모친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신의 혈육조차 지우려 했던 지점에 도달해서는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참회를 한 건, 비단 안도훈만이 아니다. 이미 조민혁은, 그가 유정이가 자신을 죽인 여자라며 집요하게 괴롭히다, 뜻밖에 마주한 유정이의 순수함을 조우하며, 그리고 혹시나 자신이 그토록 스토커처럼 괴롭혔던 유정이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에 맞딱뜨리게 되면서, 증오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조민혁 식의 참회 과정을 겪어 왔다. 자기 자식 산이를 결국 품안의 자식에서 놓아주는 유정이 역시, 사랑하는 아버지를 홀로 두고 또 다른 사랑을 쫓았던, 안도훈의 부정을 눈감아주는 과정에 동참했던 자기 과거에 대한 그녀만의 참회이다. 

<비밀>의 작가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해오던 말귀 못알아 먹는 얘들 실컷 때려주는 대신에,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게 만드는 방식을 택한다. 
결국 자기 자식조차 유기했던 안도훈은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감옥행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단말마의 저항을 포기한 채 미소를 띠며 재판에서 자신의 죄를 시인한다. 조민혁은 애초에 깜냥조차 되지 않았던 재벌 가문의 승계자 지위를 내려 놓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드라마 시작 즈음에 가장 첨예하게 우리 사회의 계급 구조의 대립각을 드러내던 <비밀>은  각자 자신의 분수에 맞는 행복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마도 이 드라마의 해피엔딩에 이런 해결 방식도 있구나 감동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괜히 껄쩍지근한 한 구석이 남는 것은, 그런 실컷 때려주는 복수극을 기대했던 습관에 기인한 것이요, 또 한편으론, 유정이의 복수를 통해, 안도훈은 물론, 검사 등의 관료 엘리트 계층과, 재벌, 그리고 정치로 이어지는 커넥션의 전복을 꿈꾸어보던 일말의 기대를 접어야 하는데서 오는 아쉬움일 수도 있겠다. <비밀>의 비밀이 폭로되면서, 안도훈만이 아니라, k그룹이라는 거대한 그 무엇이 뒤틀리는 광경을 보고싶은 욕구 그것 말이다. 아니 어쩌면 하수인에 불과했던 안도훈이 아니라, 그 뒤에 음모의 시작으로 부도덕의 결정체 k그룹의 실체가 드러나는 보다 큰 구도로서의 드라마 <비밀>을 기대했던 야무진 기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친자 문제로 물러나는 검찰 총장의 후임으로, 여전히 땅뙈기를 몰래 거래하고, 자기 자식을 몰래 군대 안보내고 좋은 회사에 들여보내는 또 그저그런 사람이 후임이 되는 세상에 대한 비감이 괜히 비밀의 해피엔딩을 지레 김빠지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민혁의 말대로, 생각보다 k그룹은 견고했다. 대신 자각한 조민혁이 있을 뿐이다. 마치 드라마는 어설픈 전복보다는, 자각한 이성적인 인간들이 꾸려가는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를 선택한 듯하다. 

결국 <비밀>은 말한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by meditator 2013. 11. 15. 09:25

여진구가 분한 홍혜성은 결국 노수동(노주현 분)네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이렇게 최근의 <감자별2013QR3(이하 감자별)>를 한 줄 요약할 수 있겠지만, 들여다 보면, 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사정이 간단치만 않다. 

노수동의 큰 아들 노민혁은 하~버드를 나온 그의 사진으로 사무실을 도배할 만큼 자부심이 대단한 (주) 콩콩의 새 대표이사였다. 하지만 그는 야심차게 회사를 개혁하려던 차에 그만 불의의 사고를 당해 초딩 수준의 정신 연령에 정체되어 있다. 바로 그 시점에 오이사가 잃어버린 둘째 아들을 찾아냈단다. 바로 홍혜성이다. 
그렇다. 홍혜성은 바로 자신의 비리가 담겨있는 USB를 찾고자 오이사가 들여보낸 스파이다. 지난 번 도우미를 들여보냈다가 실패한 오이사는 이번에는 보육원 출신의 혜성을 유전자 검사까지 조작하며 이 집에 들여보낸다. 결국 홍혜성이 이 집에서 해야할 일은 지속적으로 비리를 저지르며 회사를 말아먹고 있는 오이사를 돕는 일, 즉, 노수동 네 집을 망하게 하는 일이다. 
물론 <감자별>에서 홍혜성은 이 집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모든 가족이 혜성을 준혁이라 한 치의 의심을 가지지 않고 받아들이는데 반해 엄마만이 유일하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역시, 유전자 검사를 조작했다면서도 복잡한 오이사의 표정을 보면, 반전이 있을 여지를 남긴다. 아니 시청자들은 보면서 저절로 진짜 친아들 아냐를 연상케 한다. 


진짜 아들의 여부와 상관없이, <감자별>에서 여진구가 분한 홍혜성 에피소드의 얼개는 고스란히 영화 <화이>의 그것을 닮았다. 
범죄자인 다섯 아버지에 의해 폭력과 살인의 기계로 길러진 화이, 그리고 비리의 주범 오이사의 끄나풀이 된 화이, 다섯 아버지가 화이에게 시킨 첫 번째 살인이 바로 화이 자신의 친 아버지를 죽이는 것, 그리고, <감자별>에서 혜성이 해야할 임무는 오이사의 비리를 담은 USB를 찾는 것, 그것은 곧 대표이사의 기억 상실로 무주공산이 된 (주) 콩콩을 오이사가 집어 삼키는데 걸림돌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영화 <화이>가 다섯 아버지가 그들의 아버지 세대로부터 받은 정신적 육체적폭력으로 인해 괴물이 되는 것으로 자신을 구원(?)했고, 그 구원의 길을 다시 화이에게 고스란히 전수하고자 했다면, 시트콤 <감자별>은 그것이 경제적인 권력의 시점으로 옮겨온다. 
회사를 가진 자, 회사를 가지려 하는 자, 이미 진행된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노수동이 이루어 놓은 (주) 콩콩은 나진아 아버지의 아이디어로 히트를 쳐서, 노수동의 처 왕유정의 부동산 재테크로 몸집을 불린 기업이다. 노수동은 말끝마다 공치사를 하지만, 기업의 성장에 그의 역할은 미미해 보인다. 그러니, 창업시기부터 공신이었던 오이사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의 지분을 요구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더더구나, 노수동의 아들 노민혁이 리노베이션을 외치며 오이사 등을 과거의 인물로 치부할 때 오이사의 도발은 더더욱 적극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아직 친아들일 지는 모르지만, 되찾은 아들, 하지만 스파이인 홍혜성의 존재가 필요해 진다. 
<감자별>에서 오이사의 하수인으로 USB를 찾으라는 추궁을 받고, 틈만 나면 집안 곳곳을 뒤지며, 노수동네 가족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복잡해지는 홍혜성의 표정은 영화<화이>에서 마주쳤던 소년 화이의 그것과 닮았다.

(사진; TV리포트)

이렇게 <감자별>은 시트콤의 가장 큰 장기인 현실에 익숙한 그 무엇을 뒤틀어 냄으로써 빚어지는 불협화음에 충실하다. 
영화 <화이>에서 두 시간 여에 걸쳐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던 '살부'스토리는 그 배경이 (주) 콩콩이라는 회사와, 노수동이라는 전 대표이사의 집이 되면서, 보다 복잡해지고, 상징성조차 교묘해졌다. 오이사 역시 나쁜 놈이지만, 그의 '나쁜 놈'은 영화 <화이>의 다섯 아버지들이 가진 장엄한 상징성과는 류가 달라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시대가 품고 있는 구조적 관계의 상징성은 그것이 정치적 함의의건, 경제적 함의이건 다르지 않다는 공감을 자아내게 만들고, <감자별>판 <화이>가 어거지 같아 보이지 않는다. 외려, 친부를 살해하게 된 화이의 피의 숙청, 즉 또 다른 '살부' 스토리가,시트콤 <감자별>에서는 어떻게 변주되어갈 지 궁금할 뿐이다. 

여진구가 분한 홍혜성의 캐릭터가 시트콤<감자별>의 기본적 동인으로 묵직하게 드라마를 끌고 간다면, 그외 여타 인물들의 전형성 뒤틀기는 시트콤으로써의 <감자별>을 화려하게 치장한다. 
대표적으로는 11월 12일 에피소드에서 드러난 노수동의 캐릭터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노수동으로 분한 노주현 씨는 그의 잘 생기고 중후한 마스크로 인해 젊은 시절 오랫동안 멜로드라마의 멋진 남자 주인공 역할 만 맡아왔었다.  <감자별>은 그렇게 마스크에서 풍기는 중후한 이미지 이면에, 노수동이 지니는 찌찔하고 쪼잔한 이미지를 드러냄으로써, 시트콤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노수동 외에도, 장기하가 분하고 있는 장율 캐릭터 같은 경우가 비슷한 케이스이다. 

주연 배우의 부상으로 인한 방송의 공백, 그리고 분명한 캐릭터와 메시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때로는 그것들이 한 음정 높게, 혹은 한 음정 낮게 조율되어, 말 그대로 불협화음처럼 느껴지던 <감자별>이 조금씩 마치 현대 음악처럼,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저마다 소리만 지르는 것 같던 캐릭터들의 낯섬에 친숙해져 가는 걸지도. 첫 회부터 케이블의 특성을 살린다며 '똥'만 외쳐대던 생경함도 조금씩 다듬어지고, 날선 비난은 있으되,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던 스토리도 홍혜성의 귀환(?)으로 재미를 얹어간다. 
늘 김병욱은 시트콤을 하지만, 그의 장기는, '드라마'인 듯하다. 드라마적 재미가 드러나면서, 그의 생뚱맞은 뒤틀기도 안정감을 얻어 간다. 


by meditator 2013. 11. 13. 10:21

만만치가 않네 서울 생활이란게
이래 벌어가꼬 언제 집을 사나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나오네

월세내랴 굶고 안해본게 없네
이래 힘들라꼬 집 떠나온 것은 아닌데
점점 더 지친다 이놈에 서울살이


11월 11일  mbc 다큐 스페셜에서 <전, 월세 대란, 서민은 서럽다> 편이 방영되었다. '62주 연속 ' 등 주식 상한가를 치듯이 천정부지로 오른 채 내려오지 않는 전세 대란은 또 한편에서, 월세의 확산을 포함한다. 
집주인은 30%가 되었든 40%가 되었든 마음대로 전세를 올리고, 하지만 전셋값 상승에도 불구하고 결국 낮은 은행 금리 등으로 인해 그 돈이 더 이상 황금알을 낳지 못하자, 이젠 적극적으로 월세로 전환해 가는 중이다. 가진 것 없는 세입자들은 주인들의 입맛에 따라 바뀌어가는 월세에,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올려달라는 전세에 맞출 수가 없어서 또 월세로, 지상의 방 한 칸 얻기가 버거워져만 간다. 


9월 28일 <무한도전>에서는 노홍철이 무한도전 가요제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된 장미 여관의 육중완의 집을 찾아가는 내용이 방영되었다.  방 하나는 작업실로, 또 하나는 침실 겸 의상실로 이루어져 있다는 육중완의 집은 이른바 옥탑방이었다. 방송에서는 서울 살이 5년 만에, 빛을 다 갚고 마련한 옥탑방을 자랑스레 선보이는 육중완을 그려내 보였다. 
하지만, 그 자랑스레 선보인 옥탑방은, 그의 집이 아니다. 그의 노래 '서울 살이'에서처럼, '월세내랴, 굶고 안해본 게 없네'의 바로 그 '월세'이다. 육중완 만이 아니다. '장미 여관'의 멤버 전원이 형편이 다르지 않다. '이래 힘들라꼬 집 떠나온 것은 아닌데'라지만, 그들의 서울 살이는 버겁다.
장미여관만이 아니다. <전, 월세 대란, 서민은 서럽다>에 등장한 서민들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게 고시원이냐, 단 칸 월셋방이냐, 옥탑방이냐의 차이일뿐, 기껏해야 섭취하는 단백질이 계란후라이가 되는 삶을 지탱하며 사람들은 월세를 버텨낸다. 하루에 삼백 건이 넘는 올린 전셋값을 내라는 주인의 문자 폭탄, 정신적 고문을 버티어 낸다. 
무한도전 가요제 말미 소감을 피력하는 장면에서, 장미여관의 멤버는, 우리네 같은 밴드에게 무한도전의 기회란 소중한 것이라며 울먹인다. '월세 내랴 굶고 안해본 게 없는' 장미여관 멤버들에게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의 출연은 하늘에게 내려온 두레박이다. 하지만, 아이들과 점점 집을 줄이고, 옥탑으로 올라간 가정의 아내가 바라본 서울 하늘은 먹먹하다. 한참 꿈을 펼쳐야 할 청춘은 월세에 짓눌린 삶을 호소한다. 그들을 길어올려줄 두레박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장미여관의 서울 살이 1절의 마지막 가사 '점점 더 지친다 서울살이'는 그들 모두의 돌림노래가 되어간다. 

<전, 월세 대란, 서민은 서럽다> 편에서 대학 교수 등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전세 중심이었던 주택 시장이 급격하게 월세로 바뀌어 가면서 사람들이 채 거기에 적응하지 못한 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월세를 매달 따박따박 낼 만큼 안정된 수익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부유'와 같아 지는데, 매달 지불할 월세는 저승사자처럼 변함없이 버티고 서있다. 
거기에 한 술 더떠서, <전, 월세 대란, 서민이 서럽다> 제작진이 서울 시내 대학가 및 주요 주거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원룸, 빌라, 아파트, 주상복합 그리고 고시원까지 총 다섯 가지의 주거 형태를 방문 및 전화 조사한  결과 '1 제곱미터 당 가장 비싼 월세를 내고 있는 곳은 고시원으로 나타났다. 고시원의 1 제곱미터 당 월세 가격은 62,500원으로 주상 복합 아파트의 34,300원보다 두 배 가까이에 달했다. 또 같은 주거 형태라 할지라도 월세가 전세보다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원룸 전세의 경우 1 제곱미터당 11,700원이었지만, 원룸 월세의 경우에는 25,500원으로 두 배 이상의 가격 차이를 보였다' 가난할 수록, 더 비싼 집에 살고 있는 현실이다. 여전히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아니 '안한다는' 원칙이 득세하는 세상이다. 


월세에 쫓기다 못해 밥을 굶고, 연애는 꿈도 못꾸고, 결혼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서민의 삶을 구제할 방법은 '공공 임대' 주택 밖에 없다는 해결 방법은 인지상정일 수 밖에 없다.  <전, 월세 대란, 서민은 서럽다>뿐만이 아니라, <sbs스페셜> 등 타 다큐 프로그램에서도 언제나 도달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결론이 oecd국가는 물론, 이웃 홍콩조차 30%에 달한다는 공공임대 주택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나 대통령 선거의 주된 정책이었지만, 결과는 미비했다. 다큐 스페셜 제작진이 밝히듯이, 그간 선거 유세동안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공공임대 주택만 제대로 지어졌어도, 이런 전, 월세 대란이 없었을 것이란 분석처럼, 대한민국의 현실은 집 가진자, 그리고 그 집 값의 반등으로 이익을 보려는 자들의 이해의 척도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채 다시, 박근혜 정부의 행복 아파트 정책까지 도달했다. 당장 요즘 이슈가 되는 감사원장 후보자의 위장 전입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치고 위장전입 한 번 안해본 사람이 없는 정부에서 과연, 전, 월세 대란에 서러운 서민들을 위한 공공임대 아파트가 제대로 지어질 수 있을까?

데이비드 스터클러의 <긴축은 죽음의 처방전인가>라는 책에서는, 1929년 ~1933년 미국 대공황기 사람들의 소득은 1/3로 떨어졌지만 사망률은 물론, 질병 감염률도 떨어지고, 자살률조차도 감소로 돌아섰다는 통계를 제시한다. 즉 대공황기 미국 국민은 한층 살기 어려워졌지만, 프랭클린 루브벨트 정부가 제시한 뉴딜 정책으로 인해, 일자리와, 공중 보건 프로그램 등으로 국민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이 통계의 메시지는 건강에 악영향을 주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경제난 그 자체가 아니라, 정부의 정책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mbc 다큐 스페셜의 결론에도 부합한다. 우리 시대 여전히 사람들을 서럽게 만들고, 자살율 1위 등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누군가의 이익에서 자생적으로 빚어진 듯한 '전, 월세 대란'이 아니라, 국가의 정책이다. 


by meditator 2013. 11. 12. 10:29

2004년 영국의 미술가 500명이 20세기 100년 동안 가장 영향력이 컸던 미술품을 뽑았다. 

결과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2면화'를 제치고, 마르셀 뒤샹의 '샘'이 그 영광을 차지했다. 
20세기에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 막상 그 작품을 보면, 대다수의 입에서는 '애개~'하는 단어가 튀어나오기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흔하디 흔한 남자 변기를 거꾸로 엎어 놓고, 거기에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 화장실에 걸려 있어야 할 흔하디 흔한 남자 변기는 마르셀 뒤샹의 손을 거쳐 예술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마르셀 뒤샹은 그 과정을 통해, 전시장에 걸려 고결한 예술 작품이 되어가는 그 전 세기의 미술을 비판하고, 가장 평범한 대중의 삶 속의 물건들이 예술적 '오브제'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내었다. 그저 변기였던 마르셀 뒤샹의 작품은 잃어버렸다 다시 복원이 되었음에도 100만 달러가 호가하는 예술품이 되었다. 

변기였다 20세기 최고의 예술 작품이 된 마르셀 뒤샹의 '샘'은 가장 통속적인 사람 사는 이야기가 텔레비젼을 통해 '막장'이 되었다가, 소프드라마류의 아침 드라마가 되었다가, 때로는 대중들의 뇌리에 남을 명작이 되기도 하는 우리네 드라마와 닮았다. 별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망작이 되기도, 명작이 되기도 한다. 김수현 작가가 새로 시작한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보면 이런 생각이 더욱 분명하게 다가온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여주인공이 세 번 결혼한다는 충격적 제목에서 오는 '스포'만 차치해 놓고 본다면 어디선가 본듯한 이야기들이다. 스물 아홉에 딸 아이 하나 데리고 이혼을 해 혼자가 되었다가, 멋진 재벌남을 만나, 결국은 딸내미를 친정에 맡기고 재혼을 한 여자, 하지만 늘 '사랑해'를 주문처럼 외우는 남편에, 지각있는 시부모님 등 무엇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환경이지만, 두고온 딸내미로 인해 늘 얼굴 한 편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여자, 우리는 이런 여자를 <사랑과 전쟁>이나, 아침드라마 들에서 종종 조우해 왔었다. 그녀의 언니도 마찬가지다. 독립적인 노처녀, 그리고 그녀의 오랜 베프 남자와 여자, 그녀는 오래도록 남자를 짝사랑하지만, 남자가 보낸 사랑의 짝대기는 늘 방향이 그녀를 비껴가고, 이제는 친구의 남자를 사랑하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만든다. 

하지만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들이, 김수현이라는 이제 '대가'의 칭호가 무색하지 않는 작가의 품 안에서는 매우 신선한 이야기들로 둔갑을 하기 시작한다. 
보통 아침 드라마들이 첫 결혼을 이혼으로 종지부 찍게 만드는 길고 지리한 '시월드'의 고통에 주목하는 것과 달리, 김수현 작가는 단번에, 이야기의 시점을 아침 드라마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끌고 온다. 마치 우리가 흔히 보던 아침 드라마의 결론- 아니 아침드라마로 갈 것도 없다. 요즘 아주머니들과 어머니들을 매료시킨 <오로라 공주>의 상황이 딱 요거다- 그렇게 포악한 시어머니와 간악한 시누이로 인해 고생하던 그녀는, 결국 지옥같은 시집을 떠나, 더 부자이고, 더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는 해피엔딩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히트 작가 김은숙이 '자기 복제'를 한다는 것을 시인하며, 그건 아무나 하냐며 자랑하는 세상에, 김수현 작가가 '대가'인 이유는, 우리가 익숙하게 혹은 드라마들이 익숙하게 사용해 왔던 서사에서 용감하게 한 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했어요 라는 결론에서 더 나아가, 그녀가 정말 행복했을까? 라는 질문으로 <세결여>는 시작된다. 그러면서, 부잣집 남자와 교양있는 시부모님과 다시 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그녀가 포기한 것들이 그녀를 여전히 짖누르고 있고, 그녀를 놓지 못한 전 남편의 인연이 여전히 한 자락 그녀의 삶에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궁극에 가서는 행복이라 부르는 것들이 모래성처럼 흘러내릴 지도 모른다. 

본듯한 이야기들을 접근하는 방식, 시점이 달라짐으로써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질감으로 우리게게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스토리는 여느 멜로 드라마처럼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고 사랑하고 아우다웅거리는 이야기들로 흘러가게 될 것이지만, 하지만 사람들이 흔하게 매료되는 멜로 드라마의 그 플롯의 익숙함에, 김수현 작가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의의'는 사라지지 않느다. 그 누구보다 통속적인 이야기에 있어서 '귀재'인 작가가, 바로 그 '통속성'의 함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전히 김수현 드라마를 자기 복제를 거듭하다 단물을 다 빼먹어가는 유명 작가들의 드라마와 달리,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당대성을 지니는 문제작으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출연하는 배우의 부도덕한 스캔들로 인해 얼룩지기는 했지만 <천일의 약속>이 젊은 여성의 치매라는 색다른 소재를 이용해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했다면,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재혼이라는 소재, 아니 애초에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김수현식의 조사 보고서가 될 듯하다. 물론 때로는 그 과정에서, 작가의 노파심이 앞서고, 그래서 작가의 목소리가 드라마적 재미보다 높아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2013년에, 김수현의 문제제기는 이 시대의 결혼 풍속에 의미를 지닌다. 


by meditator 2013. 11. 11. 10:11

지난 한 주 배우 정우는 그 누구보다 귀가 간지러운 한 주를 보냈다. 아니 남들이 하도 자기 얘기를 해서 귀가 간지러운 정도가 아니라, 기사로 나올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만 터져도 들들 볶이는 연애 가쉽성 스캔들이 무려 두 개나, 그것도 그저 사귄다, 사귀었다를 넘어, 복잡한 삼각 관계를 연상케 하는 사건들이 터졌기 때문이다. 최근 <응답하라 1994>를 통해 정우가 연기하는 '쓰레기'캐릭터가 여자들의 로망인 '무뚝뚝하지만 그 누구보다 자상한 멋진 오빠'캐릭터로 워낙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저 해프닝으로 지나갈 정우의 연애사는 입가진 사람들은 너도나도 한 마디 보태는 심각한 사안이 되었다. 유명세라기엔 혹독한 한 주였다. 


정우의 가쉽성 스캔들 기사들은 지금 한참 <응답하라 1994>에서 나정(고아라 분)이를 여동생을 넘어 연인으로 자각할락 말락 하는 쓰레기 역할을 해야하는 배우 정우에게도, 이제 본격적으로 삼각 연애 구도를 만들어 가려는 제작진에게도 부담이 될 거라고 예상되는 게 하등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웬걸, 막상 11월 8일 방영된, <응답하라 1994>에서, 정우는 그저 여전히 쓰레기였다. 

응사
(사진; 텐아시아)

처음<응답하라 1994>의 캐스팅이 발표되었을 때 여러모로 우려가 되었었다. 주인공을 맡은 정우는 연기를 잘 한다고 인정은 받았다지만 인지도도 낮았을 뿐만 아니라, 스무살 대학 초년생을 연기하기에는 중후(?)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응답하라 1997>의 남자 주인공 서인국은 이미 슈퍼스타k 첫 시즌의 우승을 거머쥔 아이돌에 버금가는 지명도를 가졌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응답하라 1994>에서 정우가 결국 여주인공의 사랑을 쟁취하는 서인국이 될지, 아니면 '좋은 오빠'로 남게되는 송종호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는 후발 주자로 등장한 칠봉이(유연석 분)와 달리, 초반부터 쓰레기를 남자 주인공으로 집중 조명해 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저 '우려'에 불과했음을 제작진과 정우는 증명해 냈다. 그저 나정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인데도 보는 시청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런가 하면 정말 그 집 아들인 줄 착각하게 만드는,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는 '멋진 오빠'요, 그러면서도 '쓰레기'라는 별명이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에 시청자들은 열렬한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스캔들 기사가 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저 쓰레기는 쓰레기로 받아들이게 할 만큼. 

이미 <응답하라 1994>는 <응답하라 1997>의 신드롬을 넘어서는 궤적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응답하라 1997>의 성공이 있었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미 전작의 묘미를 터특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제작진이 던져 준 떡밥에 설레발치며 나정이의 남편감을 예상해 보고, 칠봉이와 쓰레기의 노선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하지만, 또래 배우들의 몰입감으로 말랑말랑한 순정 만화를 보는 듯한 <응답하라 1997>과 달리, 여전한 청춘들의 연애사로 전개되어 가는 <응답하라 1994>임에도 전작보다 더 감칠 맛 나는 드라마라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전작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캐릭터의 힘이라 할 수 있겠다. 

쓰레기 역의 정우는 물론이고, 그것보다 한 술 더 뜬 것이 삼천포 역의 배우 김성균이다. 그가 등장했을 때, 아버지 역의 성동일 조차 그의 외모에 감히 반말을 맘놓고 하지 못할 정도로 이제 막 대학을 입학한 '프레쉬맨' 역할의 삼천포 김성균은 어느모로 보나 말이 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이제 8회의 방영을 앞둔 시점에서, 삼천포는 정말 대학 1년생같아 보인다. 그 누구와 방도 같이 써본 적이 없고, 누구랑 무엇을 나눠 본 적이 없는 귀하디 귀한 지방 부잣집의 외동 아들, 그래서 서울 생활은 물론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생활에 눈치코치 없는 그럼에도 열심히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려 노력하는 삼천포가 종종 귀여워보이기 까지 한다. 저 사람이 영화 <화이>에서 그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거침없이 사람을 가해하던 아빠 동범이었는지, <이웃집 사람>의 살인마였는지 전혀 떠올리지 않게 만든다. 

삼천포 만이 아니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고군분투했음에도 멀쩡한 허우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유연석도 <응답하라 1994>에서 비로소 허여멀건한 서울 놈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반질반질하다 못해 빤질빤질해 보이던 해태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던 빙그레 역시 조금씩 드라마 속으로 한 발 한 발 자신을 들여놓고 있는 중이다. 

<응답하라 1997>에서도 도학찬(은지원 분)이나, 방성재(이시언 분) 등의 캐릭터가 재미있었지만 주인공의 주변 인물이라는 포지션이 분명해 보였지만, <응답하라  1994>의 캐릭터들은 마치 집단군물를 추듯, 각 캐릭터가 분명한 자신의 스토리와 성격을 가지고, 드라마 내에서 우뚝 서있을 뿐만 아니라, 캐릭터들간의 합종 연횡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응답하라 1994>가 캐릭터의 성찬이 되고 있는 이유는 극본 상의 단단한 캐릭터 구축에 있지만, 그 캐릭터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배우들의 힘 역시 무시하지 못할 요인이다. 

감독과 작가진이 정우가 출연한 전작 영화 <바람>을 좋아했고, 그 영화의 캐릭터를 그대로 옮겨왔다시피한 '쓰레기'캐릭터는 물론이고, 마흔살 아저씨같은 장국영을 스물살로 보이게 만드는 삼천포나, 해태 등은 그 역할을 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없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정우, 김성균, 유연석 모두 여러 작품을 통해 단련된 내공이, <응답하라 1994>를 통해 비로소 진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응답하라 1994>는 매회, 전작에서 이미 재미를 톡톡히 본 나정이의 남편 찾기에 대한 기묘한 떡밥을 던지며 드라마적 흥미를 이끌어 내고 있다. 하지만, 쓰레기와 칠봉이, 그리고 나정이의 연인 관계의 결말만큼, 삼천포, 해태, 그리고 정대만(조윤진 분)의 삼각관계의 결말이 궁금해 지고 애닳아진다. 이미 드라마는 나정이의 남편 찾기라는 떡밥을 넘어서 캐릭터의 진기명기만으로도 풍성한 진수성찬이 되고 있는 중이다. 


by meditator 2013. 11. 9. 10:20

11월 6일 mbc <라디오 스타>에는 우리나라에서 초연되는 뮤지컬 <머더 발라드>의 제작자 김수로와 출연하는 임정희, 간미연, 심은진이 출연했다. 언제나 그래왔듯 <라디오 스타>는 연예계의 금기로 되어있다시피한 간미연과 문희준의 이야기까지 수면 위로 올리며, 강성진이 '똥배우'라 디스한 김수로의 반격까지, 가쉽을 유머로 풀어내는 라디오스타만의 장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유쾌함은 거기까지였다. 프로그램의 말미, 네 mc들은 출연한 세 명의 여자 게스트에게 신설 코너라며, '애교 작렬' 코너를 들이밀며, 애교를 선보일 것을 강권했다. 
신설 코너라니, 고정 코너라니, 1982년생 올해 나이 만으로 31세의 간미연, 1981년생 올해 나이 만으로 32세 심은진, 그리고 그녀와 동갑인 임정희는 최선을 다해 애교를 자아낸다. 터프하기로 소문난 심은진도, 알고 보면 애교스러운 여자라며, 간미연은 아이돌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 그리고 애교가 정말 없어 연기가 힘들 정도라는 임정희는 애교 3종 세트를 각각 보여주었다. 이제는 각 분야에서 캐리어를 쌓은 중견이 되어가는 나이의 게스트들의 애교는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어색하기 한 건 당연지사, 그런 게스트들의 애교에, mc들은 그런 걸 애교라고 하냐며 면박을 떠안긴다. 심지어 3종 세트를 선보인 임정희한테는 하나만 하지 그랬냐면 타박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임정희 애교 /MBC '라디오스타' 화면 캡처
(사진; chosun.com)

이날 '애교 작렬'코너가 고정이 되었다는 멘트와 함께, 자막에는 강지영 헌정 이라는 문구가 함께 띄어졌다. 네 mc 중 김구라도 강지영을 언급했고, 윤종신은 '이제 그만해'라고 했지만, 그건 진짜 말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를 희롱하는 친구 옆에서, 그만해 하며 부추기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애교 작렬' 코너를 고정으로 만들게 된 강지영 '사건'을 되돌아 보자. 강지영를 비롯한 카라 멤버가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것은 벌써 두 달여 전인 9월4일이었다. 그 날 출연한 카라 멤버들은 그다지 라디오 스타 진행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등장하기 전부터 '연애 사건' 이야기만 주구장창 해대는 진행에 구하라는 경직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강지영은 애교 좀 보여달라는 요구에 이제 다시는 애교같은 건 보여주지 않겠다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날의 강지영을 비롯한 카라 멤버의 방송 태도가 바람직했는가는 이미 왈가왈부하기에도 진부한 논제가 되었다. 그날의 출연 태도로 이미 방송 중 네 mc는 물론, 각종 언론사의 기사, 심지어 방송 리뷰를 통해서까지 강지영을 비롯한 카라 멤버들은 통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여자 연예인에게 그런 강권을 하는 게 올바른가란 본질은 차치한 채, 마치 '예전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하지 못해 안달이더니, 느네들이 이제 좀 떴단 말이지'식의 반응들이 대다수를 이뤘다. 일본에서 활동하다 오랜만에 신곡을 들고 복귀를 한 카라는 예능에 안나가느니만 못한 결과를 얻고 돌아서야 했다. 

그런데 그게 언제적 이야기인데 그걸 또 끄집어 내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라디오 스타>는 매주 출연하는 여자 게스트들에게 '애교' 시범을 강권하며 그 언제적 출연한 강지영에게, 이거 보라고, 애교가 뭐 그렇게 어렵다고, 이렇게 애교를 선보이면 된다는 멘트를 치면서, 뒤끝을 '작렬'하게 보이고 있는 중이다. 마치 자신들의 프로에 나와, 애교 한번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강지영이 대역공노할 죄라도 저지른 듯 매주 한번씩 비아냥거린다. 그러다 이젠 아예 '강지영 헌정 애교작렬' 코너를 고정으로 만들었단다.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진 네 명의 mc진들이 쭈욱 늘어서 앉아 어디 '애교 한번 보여봐~!'하는 느낌은 흡사, <내 깡패같은 애인>에서 입사 시험을 보러 온 정유미에게 섹시 댄스 한번 보여줘 봐, 해놓고는 죽어라 울음을 참고 손담비의 춤과 노래를 최선을 다해 선보이는 정유미를 보고 히히덕대는 면접관들을 보는 느낌이다. 심지어 어렵게 선보인 애교를 품평까지 한다. 
그까짓 애교가 뭐라고? 그렇다면 왜, 여자 게스트들에게만 매번 애교를 강권하는가? 요즘 남자 아이돌들도 팬들한테 귀요미 세트를 선보이는 세상에, 서른 넘은 여자 게스트들에게만 애교 작렬을 요구하고는 그게 뭐냐고 면박할 꺼면, 공평하게 김수로에게도 해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어쩌면 연기 내공이 빵빵한 김수로가 덜 잘할 지도 모르는데, 왜 여자라고 세 명의 여자 게스트에게만, 네 명의 남자 mc 들 앞에서 애교를 끄집어 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게 언제적이라고, 애교 한번 안보여주었다고 질기게 강지영을 물고 늘어지는 건지. 

<라디오 스타>의 뒤끝 만발한 진행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그런 의문이 든다. 과연 강지영이 mc를 맡은 윤종신이나, 규현과 같은 소속사였어도, 저렇게 질기게 뒤끝을 보여주었는지 말이다. 강지영 이후에, 출연한 fx의 크리스탈과 설리의 방송 태도 역시 시청자 입장에서는 만만치 않았다. 어쩌면 성의없기론 그 두 사람이 더 하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방송 중에 그들은 그저 대답이 성의가 없건, 하라는 걸 안하고 정색을 하건, 대단한 f(x)였을 뿐이었다. 

제 아무리 유명인이라고 해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mc가 갑이 되고, 게스트가 을이 되는 관계가 형성된다. <라디오 스타>의 묘미는 을이된 출연자들을 이리저리 갑인 mc들이 굴리고 뜯으며 을의 색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해주는데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발견을 지나, 가학과 가해의 수준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더구나, 그 을의 요리 방식이, 갑과 같은 소속사라거나, 갑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위치라고 해서, 달라진다고 하면, 결국 만만한 애들 괴롭히는 동네 양아치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말이다. 


by meditator 2013. 11. 7. 09:54

학창 시절 나에게 '지리'라는 과목은 참 지루한 과목이었다. 토양, 식생, 기후 등 여러 가지 분야로 끝없이 나누어진 세계 곳곣을 외우고, 또 외워도, 외워야 할 것이 남은 그저 '암기 과목'이었다. 그런데, 아들 녀석에서 '세계 지리'는 참 흥미로운 간접 여행의 시간이다. 과목을 맡으신 분이 젊은 시절 세계 여러 곳을 배낭여행으로 다녀 보셨기에, 수업 시간마다, 그저 교과서에 나온 '사실'에 그곳에서 겪은 생생한 체험담을 얹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겐 그저 '암기'의 내용이었던, 그랜드 캐년 등이 아들에게는 선생님이 가본 세계에서 제일 멋진 장관으로 기억된다. 무엇을 배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배우느냐의 문제이다. 


그동안 입시 교육에서 천대받아, 서울대를 가는 학생들만 선택하는 과목으로 대접받던 국사 교육이 다시 정규 교육의 필수 과정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수능 교육 현장에서, 필수로 돌아온 교육이란게 어떤 의미일까? 그저 외워야 할 것을 더하는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심지어, '검정교과서'를 둘러싼 논란 등은 과거의 역사 인식에서 조차 합의를 도출해 내지 못하는 21세기의 후진적 역사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낼 뿐이다. 일본에게 역사를 왜곡했다고 욕할 것 없이,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놓고도 '왜곡'과 폄하'가 횡행하는 역사 교과서에서, 아이들은, 그리고 그들을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들은 또 얼마나 방황할까. 

그런 의미에서 매주 월,화 tvn에서 방영되고 있는 <빠스켓 볼>은 청소년들에게 한번쯤은 보라고 권하고 싶은 드라마이다. 


’빠스켓 볼’? 아니죠~ ‘빠스껫 볼’ 맞습니다! 제목에 실린 시대정신

물론 이 드라마는 어설픈 부분이 많다. 스토리는 전형적인 가난한 남자와 부잣집 여자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거기에 끼어든 또 다른 잘나고 멋진 부잣집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들의 사랑과 갈등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생뚱맞게도 '농구'라는 종목을 통해 빚어진다. 게다가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아직 신인인 탓에, 단 하나의 표정으로 모든 연기를 하며, 감정이 늘 차고 넘쳐 손발이 오그라드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처음엔, <추노>의 감독이었던 곽정환 감독이 추노같은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를 찾다가, 일제시대에 '농구'라는 소재를 어겨 넣은 게 아닌가 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렇기도 한게, 농구장의 경기 장면은 드라마의 그 어떤 순간보다도 빼어났으며, 추노의 추격씬만큼 박진감이 넘치지만, 그것에 홀려 드라마를 보기에는 배우들의 연기나 스토리가 너무 인내를 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를 거듭하면서, 드라마는 조금 다른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오히려, <빠스켓 볼>에서 볼거리를 제공하며 시청자들을 낚는 농구장 씬은 떡밥이요, 그것을 통해 제작진이 보여주고픈 것은 바로 일제 시대의 '세밀화'가 아닐까 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빠스켓 볼>에서는 다른 일제시대를 다룬 드라마에서, 대표적으로는 지난 해 인기를 끌었던 <각시탈> 등에서 등장했던 일제 시대의 클리셰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일제시대가 그려진다. 
일본 군부, 그 아래 붙어가는 어용 귀족,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빌붙어 자신의 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본가, 그리고 다시 거기에 빌붙어 자시의 이익을 챙기는 스스로를 '빼앗는 것 밖에 모른다는 식민지 시대 하자품' 공윤배, 그리고 그런 공윤배에게 핍박을 당하는 강산과 그의 이웃들과 같은 일제 시대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가 상세히 설명되어진다.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그저 도식적으로 '친일파'와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이라는 그 시대의 이분법이 '팜업 북'처럼 상세하게 펼쳐진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시작된 철거가 일제 시대부터 였다는 것도, 드라마에서 보여지듯이 철거랄 것도 없는 거적데기 덮은 움막도 감지덕지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이, 그리고 그 보금자리가 때로는 생명과 함께 부질없이 날라가 버리는 것도 드라마를 통해 알 수 있다. 일제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웠다는 현실이 구체적 상황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고생'을 했다는 사실들도 세세하게 그려진다. 일본의 국화를 비로 쓸었다고 갖은 수모를 겪고 꽃잎을 손으로 하나하나 담아야 하는 모습에서, 아비를 징용으로 잃고 똥지게를 지며 살아가다 그 자신 마져도 보리쌀 한 됫박에 끌려가게 생긴 소녀까지 '조센징'도 모자라, '요보'라 불리는 당시 사람들의 처지가 구구절절하게 그려진다. 

그러다 보니 뻔해보이던 주인공들의 캐릭터조차도 회를 거듭해 갈 수록 색깔이 입혀진다. 그저 일제 시대 잘 나가던 연희전문의 스타 농구 선수였던 민치호는 자신의 무신경한 친일 행각으로 아비를 잃었다는 소녀를 통해 각성한 지식인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의 각성은 우리가 책에서 배웠던 '황국 신민 서사'를 거부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저 읊으라는 걸 읊지 않고, 고개를 숙이라는 걸 숙이지 않았을 뿐인데, 민치호는 끌려가고 징역을 살게 될 처지에 이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기장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 민치호에게 동조하던 관객들도 무차별적으로 경찰에게 끌려나가는 시대라는 걸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목격하게 된다. 
그에 대적하는 주인공 강산의 처지도 만만치 않다. 천재 농구선수이지만 가난때문에 기회를 잃은 그는 거짓된 신분으로 여주인공 신여성 신영을 만나다 '경성 방적' 농구 선수에 민치호를 대신할 스타가 되지만, 그를 둘러싼 시대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일본인에게 조아리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사랑하는 신영을 생각하면 불의에 눈감고 오로지 농구만 생각하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일제에 짓밟힌 경험을 가진 밑바닥 삶을 살았던 강산에게 일제에 대한 반감은 그저 '자각'을 넘어선 삶의 '절감'이기 때문이다. 


11월 5일  4강에 올라간 강산을 보러 경기장에 와, 강산을 활짝 웃게 했던 신영이 강산이 자랑스럽게 황국신민 서사를 읊는 모습을 보다, 이건 아닌 거 같다며, 민치호가 감옥으로 이송되는 곳, 그를 지지하기 위해 연희, 보성 전문의 젊은 농구 선수들이 모인 그곳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빠스켓 볼>이 그저 사랑 이야기나, 농구 이야기를 넘어선 그 무엇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대표적 예이다. 교과서를 통해, 도식적으로, 혹은 그저 몇 줄의 암기 사항으로 외웠던 사실들이, 그 시대 젊은이들의 처절한 고뇌와, 현실로 드라마를 통해 전해진다. 

종종 인터넷을 통해 웃지 못할 요즘 아이들의 역사 인식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유관순이 누구냐던가, 안중근은 아는데, 윤봉길이 누구냐던가, 선생님은 그저 교과서를 외우듯 가르치고, 그 앞에서 고개 박고 자는 아이들이 무얼 제대로 기억하겠는가.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역사적으로 번연히 우리나라를 핍박한 인물로 기록된 '기황후'를 재해석하겠다며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세상에서, 몇 년 뒤에, 이완용을 재해석하겠다는 드라마가 만들어 지지 말란 법이 어디있겠는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2종 교과서 중 어느 곳에서는 노골적인 역사 왜곡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있는 해방 전후사를 그려내겠다는 야심을 보여준 <빠스켓 볼>의 시도가 고맙다. 대학 시절 송건호 선생의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읽고 받았던 충격이 떠오른다. 죽어있던 역사가 살아움직이던 느낌이었다. 뭐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빠스켓 볼>을 보며, 수업 시간에 졸며 귀등으로 넘겼던, 그 시대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by meditator 2013. 11. 6. 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