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 밤 11시 30분 mbc를 통해 방영되는 <나 혼자 산다>는 이제는 번연히 우리 사회 가족 형태(?)의 한 유형으로 자리 잡아 가는 1인 가구, 그 중에서도 남자 들의 싱글 라이프를 지켜보는 '관찰'예능이다.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 드러나는 혼자 사는 삶은 홀로 살지만, 그런 삶이 누군가에게 측은함의 대상이 될 특수한 형태가 아니라, 당당하게 이 사회 삶의 유형으로 인정받아야 할 이미 존재하는 삶의 형태라는 암묵적 명제를 기반으로 진행된다. 기혼이더라도 기러기 아빠이거나, 혹은 일찌감치 이혼을 하고, 이제 아이들조차 다 커서 독립하여 혼자 살고, 미혼인 남자들은 홀로 사는 자신의 삶을 만끽하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러니 당연히 <나 혼자 산다>의 대부분은 그들이 보내는 '충만한' 시간들로 채워진다. 맛있는 걸 찾아가 먹고, 가고픈 곳을 찾아가 보며, 해보고자 했던 것을 즐기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는 여유를 즐기는 것이다. 

자, 이제 sbs스페셜은 그렇게 예능 속에서 만개해가는 싱글 라이프를 좀 더 현실적으로 들여다 본다. 현재 대한민국 네 가구중 한 가구, 그리고 2030년이 되면 세 가구 중 한 가구가 될 싱글턴(singleton, 1인가구), 예능의 환타지가 거둬진 싱글 라이프가 조명된다. 

▲ SBS <SBS 스페셜> ⓒSBS

방송 초반 등장한 용이 씨나, 염정필 씨는 mbc예능 <나 혼자 산다>에 나와도 좋을 만한, 예능의 캐릭터들과 유사한 삶을 살아간다. cf감독, 요리사 라는 이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혜택을 누릴만한 전문직을 가지고, 바이크를 타고, 자신의 집을 꾸미며 여유로운 싱글턴을 누리며 산다.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김경미씨나, 건축설계사 이길현씨 역시 혼자 사는 삶을 외로워하지 않는다. 이길현씨는 혼자 사는 삶은 '비루'할 것이란 선입관을 깨고자 날마다 산해진미를 만들어 블로그에 올림으로써 홀로도 여유로운 삶을 증명해 내기에 바쁘고, 몸 한번 제대로 뻗을 수 없는 좁은 소파이지만 홀로 남겨진 시간이 편하다고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김경미 씨는 자신의 삶을 만끽한다. 

하지만, <나 혼자 산다> 예능의 캐릭터가 될 만큼 여유로운 싱글턴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자녀들을 유학을 보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홀로 남아 기러기 아빠가 된 여유있는 가장들과 달리, 다가구 반 지하 주택에서 살고 있는 박경수씨는 사업이 망해서 가족이 해체되어 홀로 남게 된 경우다. 70의 나이에 지하철 퀵 서비스를 하는 이희애자 할머니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홀로 사는 삶은 지옥에서 받을 벌을 미리 받는 것과도 같다. 살면서 홀로 남겨질 것을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당연히 혼자 사는 삶의 미덕을 찾을 길이 없다. 경제적 위기로 인해 붕괴된 가족을 만날 수 없고,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여유로운 싱글 라이프 든, 불가피한 싱글턴이든, 그들이 모두 공감하는 것은 '고독사'이다. 이제는 잊을만 하면 뉴스를 통해 등장하는 홀로 남겨진 죽음,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삶에서 다가올 '병(病)'과 '사(死)'는 해결할 길이 없는 버거운 숙제요, 공포다. 뿐만 아니라, 공공임대 주택 등 싱글 라이프를 위한 사회적 기반이 매우 부족한 대한민국에서 웬만큼 경제적 기반을 누리고 사는 싱글턴이 아니고서는, 늘상 삶은 집값의 인플레이션을 따라잡기에 헉헉거린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싱글턴들은 주거, 의료, 장례 등 그 모든 것들을 홀로 고스란히 짊어져야만 한다. 

sbs 스페셜은 그런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 한 발 더 나아간 시각을 제시한다. 싱글턴, 즉 1인 가구란 지금까지 인류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실험이라는 시각이다. 즉, 부족등의 공동체적 형태의 삶에서, 대가족, 핵가족에 이어, 이제 1인가구까지 인간은 자꾸 분자화된 삶으로 진행되어가는 그 변화된 역사의 현장에 바로 우리가 놓여져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싱글턴이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려니 하지만,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대로 직장 등의 이유로 인해, 나이든 세대는 함께 사는 가족의 분가와 사별로 인해, 생애 주기 중 싱글턴이 불가피해지는 삶의 현장에 우리가 처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특수한 사정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불가피한 1인 가구의 현실을 고스란히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것을 마련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sbs 스페셜<싱글턴, 혼자 살아서 좋다?>의 입장이다. 

그리고 그걸 입증하기 위해 카메라는 복지의 천국이라 하는 스웨던으로 시선을 옮긴다. 정부에서 지어 싸게 공급하며 관리하는 공동 주택에서, 다수의 싱글턴들이 함께 중년 이후의 삶을 누리는 것을 보여준다. 홀로 사는 삶의 독자성은 충분히 보장하되, 함께 먹고, 함께 공동 주택을 유지해 가며, 개인이 고스란히 짊어져야 할 싱글턴의 부담을 줄이고, 고독사를 예방하는 삶을 제도적으로 사회가, 국가가 마련하는 것이다. 스웨덴의 싱글턴들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추레해 지지 않고,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도 않는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보장하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는 늙음을 걱정할 필요 없이 당당하게 나이듦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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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나이듦 이후의 삶의 문제만이 아니다. 어제 다시 일요일 밤으로 시간을 옮긴 <kbs드라마 스페셜- 나에게로 와서 별이 되었다>는 공교롭게도 고시원에서 삶을 이어가는 젊은 싱글턴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때문에, 불안한 직장 때문에 고시원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현재적 조건때문에 사랑에 있어서도 솔직해질 수 없고, 심지어 솔직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상대방을 위해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경제적 조건 때문에 사랑도 마음대로 못하는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다룬다. 창문 있는 방을 얻으려면 10만원이 더 필요한 고시원의 삶 때문에, 사랑을 위해서는 엄마가 빨리 죽기를 바래야 하는 아이러니한 현실 때문에 젊은이들은 사랑을 포기하려고 한다. 바로 <sbs 스페셜- 싱글턴, 혼자 살아서 좋다?>의 가장 현실적 예이다. 왜 사회가, 국가가, 그 곳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주거와 의료 복지를 좀 더 확충해야 하는 가를 감정적으로 호소한다. 

홀로 사는 삶이 특수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당당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와 국가는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1인 가구가 엄연한 현실이 된 사회와 국가의 몫이다.


by meditator 2013. 11. 4. 10:16

요즘 뉴스에는 꼭 유투브 인기 동영상을 소개하는 꼭지가 꼭 들어간다. 그런데, 이 인기 동영상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동물들 영상이다. 강아지, 고양이 등 각양각색의 동물들이 그저 문턱을 넘지 못해 안간힘을 쓰다 벌렁 자빠지거나, 먹고자 하는 욕구를 저어하지 못해 무심코 저지르는 해프닝에 사람들은 입이 벌어지고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다,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몇 가지가 있다. 아기, 동물 등, 고양이를 예로 들면, 아기 고양이들은 어릴 적에는 인형처럼 귀엽다가도, 성묘가 되면 인상이 '야생적으로' 확 바뀐다. 진화론적으로, 아기나 어린 동물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노골노골'하게 만들도록 귀엽게 생기고, 행동하는 이유를, 아직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어린 동물들이 자신을 보살펴 주는 '어른'에게 자신을 보호하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란다. 그도 그럴 것이, 동자로 가득찬 아기와 어린 동물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버리다니! 천벌을 받을 소리다. 

<아빠, 어디가>에 이어, <슈퍼맨이 돌아왔다>, <오마이 베이비> 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린 아이와 아기들이 예능으로 진출하더니, 이젠 동물 차례란다. kbs2는 천만 애견 시대를 맞이하여 최고의 모델견이 될 스타견을 뽑는 '슈퍼독'이란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매력 만점, 개성 폭발, 끼 넘치는' 개 중에 최고의 개를 뽑겠다는 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왜 하필 개일까까? 집에서 키우는 것들에는 고양이도 있고, 요즘은 돼지에, 햄스터에, 히한한 페릿에, 심지어 파충류까지 있는데 말이다. 

인간과 개의 '동거' 생활의 유래는 인간의 정착 생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들이 농사를 지으며 모여 살기 시작하자, 그 주위를 어슬렁 거리던 개들은 슬슬 인간의 가축화가 되어간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개'를 키우는 것이 인간에게는 큰 장점이 없다. 귀여운 짓을 한다거나, 사냥을 돕는다고 하지만, 소나 돼지처럼 막강한 식용 동물에 비하면 뭔가 한 끝이 떨어지는 위상이다. 그러기에, 최근의 진화론자들은 예전에 인간이 의식적으로 개를 길들였을거란 학설을 수정해, 오히려 야생의 늑대족이었던 개가 먹이를 용이하게 구하기 위해 인간의 영역 내로 의도적으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라는 학설을 내놓고 있다. 즉, 먹고 살기 위해서, 인간에게 의식적으로 귀여움도 떨고, 묘기도 부리고, 사냥에 앞장서서 스스로 가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에 따르면 결국 개의 묘기는 그들이 인간의 곁에서 살아가기 위한 자구 수단인 셈이다. 키우는 숫자가 비슷한 거 같음에도 불구하고, '슈퍼묘'라던가, 고양이 길들이기라는 건 낯선 이야기이다. 심지어,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을 '집사'라 한다. 즉, 키우는 사람과, 키움을 당하는 사이의 역학 관계가 반대라는 소리이다. 하지만, 개는 무리 동물로서의 우두러머리에게 충성하는 습성을 활용하여 인간들은 주종 관계의 위치를 확고하게 휘어잡음으로써 '슈퍼독'의 진기명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사진; tv리포트)

하지만, 과연, 잘 길들이는 것이, 정말 애견일까? '슈퍼독'은 도식적으로 훌륭한 묘기는 성숙된 개와 주인의 관계의 증거라는 듯 프로그램을 진행시킨다. 출연자 중 몇몇은 파양된 경험을 가진 '말썽꾸러기견'의 개과천선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사고를 쳐서 파양을 시켰던 전주인들에게 이제는 '멀쩡'해지다 못해 묘기까지 부리는 개를 데리고 나와 '버림'에 대한 후회를 추궁한다. 물론, 좋은 묘기를 얻기 위해서는, 개와 그 개를 길들이는 주인 사이에 믿음이 전제로 깔리는 것이기는 하지만, 좋은 묘기가 좋은 사이라는 도식적 정의는 문제가 있다. 

실제 이 글을 쓰는 사람의 집에도 개가 두 마리 있다.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 님이 두 분 계시다. 왜 이 개들이, 개님들이신가 하면, 우리 개님들은, '슈퍼 독'에 나오는 묘기 따위 정말 '개나 물어가라'이다. 개를 키우다 보면, 개들이 자신의 손을 아니 발을 누군가에게 주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발을 준다는 건, 자신이 싫어하는 걸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집 개들은 싫어하는 건 안한다. 어찌어찌해서 대소변은 지가 찜한 자리에 가서 싸는 정도이다. 막내 개는 한 겨울에도 베란다에 오줌을 싸서, 그 장소를 좀 바꿔보려 했더니, 며칠 동안 배변 배뇨 활동을 안하는 시위를 벌임으로써 주인의 두 손, 두 발을 들게 만들었다. 키우다 보면, 느낀다. 개나 사람이나 똑같다. 구르기? 두 발로 서기? 그딴 거 안해도 되면 안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굳이 '동거'하는데 묘기가 왜 필요한가. 

하지만 '슈퍼독'에 나오는 개들은 별별 걸 다 한다. 방송에 나오지 않는 대기실 미공개 영상 등을 보면, 어떤 주인은 개가 한번 구를 때마다 먹이를 준다. 참 그 개도 먹고살기 고달프다. 물론 꼭 먹이를 주지 않아도, 말을 잘 알아먹는 개들도 있다. 사람처럼, 개들도 천차만별이다. 지능도, 주인에 대한 순응도도, 개들에 따라, 묘기부리기를 좋아하는 개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묘기의 정도를 가지고, 훌륭한 애견의 표본인 양 프로그램을 꾸려가는 건 좀 보기 그렇다. 차라리, 굳이 동물을 끌어다 붙이려면, 개와 주인이 살아가는 '관찰 예능'을 하지, 왜 굳이 '수퍼'한 개를 뽑으려 개까지 경쟁을 시킬까? 유튜브 동영상에서도 보면, 개들이 재주를 잘 부를 때 보다, 온갖 실수를 저지르고, 넘어지고, 자빠질 때가 귀엽고 재밌는 건데 말이다. 아, 그건, 이미 ,<동물농장>에서 다 한 건가.

허긴,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별별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하다하다 못해, 이젠 개까지 끌어들이는 상황에서, 그게 개한테 좋네 나쁘네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노릇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집 '개님'들을 모시고 사는 입장에서, '슈퍼독'이 그저 즐겁게 즐겨보기에는 어딘지 껄쩍지근한 프로그램임에는 어쩔 수 없다. 


by meditator 2013. 11. 3. 10:54

11월 1일 <나 혼자 산다>에서는 김광규가 어머니에게 전셋집을 마련해 드리는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송도 산동네에서 아래짝 도심 아파트에 전셋집이나마 아파트를 마련하는데 47년이 걸렸다는 김광규의 감회, 그리고 듣고도 믿지 못하는 김광규 어머님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물이 핑 돌만큼 공감하는 내용이다. 
사람이란 동물이 늘 위를 바라보고 살다보니, 살면서 늘 저만큼만 갔으면, 저기 만큼만 나아졌으면, 평지에 사는 사람들은 전망이 좋은 아파트에 살았으면, 산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무릎 아프게 헉헉 거리며 걸어다니지 않는 평지에 살았으면, 겨울이면 한데서 시달리는 사람들은 그저 따신데 살았으면.......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속내가 김광규의 에피소드에서 고스란히 전달된다. 
거기에 더 마음을 짠하게 하는 것은 그런 아들의 성의를 받으면서도, 끝내 내가 해준 것도 없는데 민망해 하는 어머니의 내리 사랑이다. '오늘밤 잠을 어떻게 자겠노'하실 정도로 좋아하시면서도, 그에 앞서 '내가 이런 집 하나 너한테 사줬으면 장가를 갔을낀데' 하는 어머니의 노파심이 먼저 마음을 적신다. 

(사진; 뉴스엔)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이런 모자간의 애틋한 정이 발연되는 곳이 바로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 혼자 산다>에서는 혼자 사는 사람들의 혼자 살지 않는 모습이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더더구나, 11월 1일의 방송이 대비되었던 것은, 김광규와 어머니의 사연이 담긴 무지개 회원들의 이벤트에 앞서 진짜 혼자 사는 모습을 보여준 김도균이 사는 모습이었다. 
타 방송에서도 주차장까지만 촬영을 허락했던 기타리스트 김도균은 <나 혼자 산다> 제작진의 삼고초려 끝에 자신의 집과 하루 생활을 공개한다. 그런데, 정말 김도균은 혼자 산다. 
홀로 일어나 명상을 하고, 편의점에 들러 산 두부 등으로 홀로 아침을 먹고, 홀로 커피 전문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하고, 홀로 한강 고수부지에 가서 꽃을 감상한다. 유일하게 사람들과 어울린다 싶은게 후배가 하는 바이자 락 공연장이었지만, 거기서도 김도균은 홀로 술을 한 잔하고, 홀로 연주를 한다. 그리고 다시 홀로 분식점에 가서 음식을 먹고 사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간 <나 혼자 산다>라고 하면서 결코 혼자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무지개 회원들과, 많은 게스트들과 달리, 온전히 홀로 하루를 보내는 김도균의 모습은 이질적일 정도였다. 

언제부터인가 <나 혼자 산다>는 홀로 살지 않는다. 처음엔 혼자 생활하고, 먹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부터, 무지개 회원들은 늘 함께 모여 무언가를 '작당'하고 함께 활동을 한다. 다같이 못하면 끼리끼리 하다못해 둘씩이라도 뭉쳐서 무언가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무지개 회원들과 그들의 '측근'들이 항상 함께 한다. 텔레비젼을 통해 중계되는 류현진의 경기를 보는 것으로라도, 그들은 누군가와 함께 있다. 
<캐스트 어웨이>처럼 무인도가 아니고서는, 애초에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온전히 홀로 사는 삶을 누리기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 혼자 산다>는 처음 싱글 라이프의 삶을 보여주겠다는 취지와 달리, 언제부터인가 부터 무지개 회원들에겐 늘 누군가와 함께 하는 미션들이 프로그램을 채운다. 

(사진; 서울 경제)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관찰 예능으로 시작한 <나 혼자 산다>의 한계일 것이다. 1박2일처럼 어디를 가는 것도 아니고, 게스트 초청 토크 프로그램도 아니고, 자신의 삶을 보여주어야 하는 관찰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 혼자 만의 삶을 계속 보여줄 '꺼리'가 희박해 지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함께할 꺼리가 없는 고정 무지개 회원진도 변화를 줄 수 밖에 없고, 김민준이나 김도균처럼 게스트의 삶으로 영역을 확장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1월 1일자의 방송처럼 김도균의 일상을 보여주고, 이어 무지개 회원들이 측근들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나 혼자 산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가능치일 것이다. 

하지만 잠재적 자원을 상대적으로 무한정하게 가진 특별 게스트의 싱글 라이프와 달리, 무지개 회원들의 이벤트성 행사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김광규가 어머니를 위해 전셋집을 마련해 드린 것은 자연스런 그의 싱글 라이프의 일부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이성재가 친구 이봉주를 위해 치킨집 홍보를 나간 건, 그다지 그의 자연스런 삶의 일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봉주 치킨집을 홍보해주나 이러고 가재미 눈을 뜨게 만든다. <인간의 조건>에서 쓰레기 무단 투기 방지 홍보를 위해 동물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선 것이랑은 경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무지개 회원의 충원에도 불구하고, 무지개 회원들의 자가 발전의 한계가 여전히 <나 혼자 산다>의 발목을 잡는다. 아니, 결국은 쳇바퀴같은 삶을 반복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인간 삶의 행태가 <나 혼자 산다>의 근원적 한계일 것이다. 


by meditator 2013. 11. 2. 10:09

축제로 시작한 <드라마 페스티벌>이 벌써 5회를 넘겼다. 하지만,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드라마 페스티벌>이란 걸 하는 지로 모를 성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첫번 째랑, 두번 째 작품이 <투윅스>와 <메디컬 탑팀>의  방송 중간에, 다른 방송국의 수목 드라마 스케줄을 맞추기 위한 희생 번트처럼 소용되었기 때문이다. 2007년 <mbc 베스트 극장> 종영 이후, 모처럼 벌인 축제 치고는 '뻘쭘한' 출발이다. 더구나, kbs의 <비밀>이 한참 탄력을 받으며 치고 올라가는 시점이었으니, 더더욱 1회성 단만극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햇빛 노인정의 기막힌 장례식>과 <불온>은 조용히 사라져갔다. 

다행히도, <소년, 소녀를 만나다>이후부터는 임시직이나마 고정적으로 목요일 밤 11시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어제는 그 11대마저 사수하기가 참 힘들었다. 코리안 시리즈가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밤에 했다가 수요일 밤으로 왔다가, 다시 일요일 밤으로 쫓겨가는 kbs의 <드라마 스페셜>이나, mbc의 <드라마 페스티벌>이나, 참 스페셜하지도, 페스티벌 답지도 않게 이리저리 쫓겨다니느라 옹색하다. 
언제나 이런 단막극들을 통해 좋은 작가와, 제작진이 배출된다는 원론적 정의에는 이견이 없으면서도, 결국, 좋다는 드라마들은 보따리를 싸들고 이리저리 휘돌리는 신세에서 한 치도 나아지지 않는다. 결국 kbs는 제작비로 인해 편수를 줄이기에 이르렀다. 출연진들이 거의 '무료 봉사'를 하는 것으로도 줄어든 제작비 충당이 되지 않는다니. '창조 경제'라는데, 창조적인 베이스를 만드는 데 인색한 방송국들이, '창조 경제' 공익 광고는 펑펑 해댄다. 


느지막히 시작한 10월의 마지막 밤의 <드라마 페스티벌- 상놈 탈출기>는 버릇없는 양반집 자제가 상놈이 되어 고생하다 개과천선한다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가졌다. 하지만 그 익숙한 이야기 구조는, 자신이 사랑하는 기생의 첫날 밤을 사려는 양반집 도령을 그 종이 팔아먹는다던가, 알고보니 팔려간 주인집의 주인과 노비가 사실은 노비와 양반의 신분이었다는 기막힌 우연을 통해 뻔하지 않으면서도 주제를 향해 돌직구처럼 꼿히는 에피소드들로 풍성해진다. 

버릇없는 양반 길들이기는 자신을 팔아먹은 '점백이'라 놀리듯 부리던 종놈과의 '우정'에 이르면 지금까지 달려왔던 이야기는 풍성해지다 못해 깊어지기 시작한다. 그저 기생과의 사랑을 위해 상전을 팔아먹은 줄 알았더니, 종놈은 어린 시절 자신의 얼굴에 상처까지 낸 상전을 늘 미워했었고, 결국 팔아먹은 결과는 사필귀정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연은 또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을 팔아먹은 줄 알면서도 상전인 양반은 같이 광에 묶여있는 처지가 된 종놈을 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두 사람은 서로 이름을 부르던 '친구' 사이였었고, 우연히 지른 불에 야단을 맞는 것이 두려워 친구에게 그걸 돌린 양반은, 그때부터 친구를 잃고 노비 점백이를 부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상전인 양반이, 한낮 놀림거리이던 점백이가, 어린 시절 친구인 귀남이라는 걸 깨닫는 과정은, 그가 자기 자신이 양반임에도 얼굴에 숯검댕이를 묻히고, 허름한 복색을 하니 그 누구도 양반이라는 걸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즉 신분의 고하가 결국은 별 의미가 없다는 '혁명적 사고'에 이르는 과정이 된다. 

옛이야기에서 보던 망나니같은 양반집 도령 길들이기는, 그것이 현대적 시각의 '인간 평등론'을 입혀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된다. 물론, 조선시대인 듯한 배경에서, 양반과 노비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친구가 된다는 사실은 역사적 재해석이라기에도 제법 많이 모던하지만, 단막극이기에 가능한 환타지로서 충분히 흔쾌하다. 시대적 배경이 조선 후기인 듯 돈으로 신분을 사서 양반보다도 더 양반인 듯이 행세하는 강진사의 모습과, 돈이 없어 양반임에도 그의 노비가 된 벙어리 부자의 신세는 이상하게도 그저 과거의 모습만으로 지워지지 않는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노비가 되어서도 여전히 쩌렁저렁 울리는 목청으로 양반입네 하는 박기웅의 호연과 그에 못지 않는 점백이 서동원의 연기의 합은 상놈 탈출기의 재미를 더한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투자하기에 아깝지 않은 조촐한 페스티벌이다. 


by meditator 2013. 11. 1. 10:09

공교롭게도 10월 28일 tvn에서 방영된 두 편의 드라마에는 연달아 '철거'가 등장했다. 

그 하나가 9시15분에 방영되는 <감자별2013QR3(이하 감자별)>이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그 다음 시간인 9시 59분에 방영되는 <빠스껫볼>이다. 드라마<빠스껫볼>의 시대 배경은 1930년대요, 시트콤<감자별>은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두 작품에서 모두 주인공, 그리고 그의 가족(그래봤자 엄마뿐이지만)은 '철거'를 당해 거리로 나앉는 신세가 된다. 근, 현대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은 '여전히 철거중'이다. 

<빠스껫볼>의 시대 배경은 일제시대다. 그런데 일제시대에도 철거라니! 
드라마는 주인공 강산이 사는 시대를 마치 '세밀화'처럼 묘사해간다. 그리고 그 묘사의 백미는 바로 강산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사는 움막촌이다. 그저 거적데기 하나 덮은 거 같은 비, 바람이나 겨우 피할 거 같은 움막촌이지만, 강산과 그의 어머니에겐,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가난뱅이들에겐 그곳이 삶의 보금자리이다. 
일본이 식민지의 토지 정리 사업을 전투적으로 벌이면서, 농촌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남부여대'로 그래도 굶어죽지는 않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서울로 밀려든다. 하지만 서울에서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빠스껫볼>에서 묘사된 그대로 허름한 움막촌이다. 그나마 그마저도 도시 개발을 시작한 일본인들과, 그들의 앞잡이에 의해 몽땅 철거되고 만다. 대한민국 철거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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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로등조차 나가 시커먼 골목을 매일 밤 무서워 벌벌 떨며 지나 산꼭대기에 있는 조그만 집은 나진아가 세 살 때부터 살던 집이다. 하지만,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소유였던 집은 전세가 되고, 월세가 되고, 이젠 그마저도 '철거 대상'이 되어 집을 비워줘야 한다. 갈 곳이 없는 나진아 모녀는 가지고 있던 세간 살이를 하나둘씩 팔며 결국은 팔아도 그 누구도 사갈 것 같지 않은 냉장고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마루에서 박스를 엎어놓고 식사를 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그나마도 호사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대한민국이 삐까뻔쩍하게 좋아졌다하는데, 여전히 가난한 모녀가 드리울 곳은 없다.  

일제 시대이건, 2013년이건 누군가에겐 감지덕지 삶을 깃들여 갈 소중한 보금자리가, 다른 누군가에겐 '환금성의 투기 대상'일 뿐이다. 그것은 수십년이 흐르고, 세기가 바뀌어도 그 어떤 것보다도 변함없는 대한민국의 진리이다. 그리고 tvn의 두 드라마는 단 두 시간만에 그 '철거사'를 요약한다. 

<빠스껫볼>에서 보여지듯이 폭력적 철거를 통한 원시적 자본 축적의 시작은 일제 시대이다. 일본인들에게 '영혼을 판' 친일 자본가들이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 거리의 주먹패들을 동원해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확 쓸어버린다. 당연히 저항이 따르지만, 몽둥이를 앞세운 그들의 앞에, 저항은 폭력을 낳을 뿐이다. 결국 <빠스껫볼>에서는 철거 과정에서 다친 노인이 강산의 죄책감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주인공 강산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게 된다. '그저 농구만 그만 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많은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드라마에서 '철거'는 주인공의 각성을 위한 유효한 도구이다. 
<황금의 제국>에서 철거민의 아들 장태주가 '황금'에 자신의 영혼을 팔게 된 계기는 바로 아버지가 분신 자살로 가게를 지키려고 했던 '철거'다. <스캔들>에서 강직한 하명근 형사 캐릭터를 설명해 낸 것도 협잡꾼이나 방관자가 되어버린 다른 경찰들과 달리 철거 현장에서도 흔들림없는 정의로움이었다. 

반대의 효과를 낳기도 한다. <스캔들>의 장태하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캐릭터라는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장치도 바로 철거 현장이다. 철거 용역들 조차 주춤거리는 철거민의 저항 앞에 장태하는 직접 포크레인을 밀고 들어감으로써 그가 어떤 '폭력적 과정'을 거쳐 재벌로 성장했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 낸다. <황금의 제국>의 장태주도 마찬가지다. 철거민의 아들이었던 그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맞닦뜨리는 건 또 다른 철거민이요, 그들의 저항이었다. 드라마 속 '철거'는 마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넘어서야 할 '통과 의례'처럼 묘사된다. 즉, 대한민국 재벌의 성장사를 단적으로 상징해내는 것에 철거와 건설만큼 도식적으로 명확한 것이 없다. 

<빠스껫볼>과 <감자별>에는 또 한 가지의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두 작품 다 시대를 막론하고 홀로 된 엄마와 자식의 편모 가정이라는 것이다. <빠스껫볼>의 어머니는 일본인 집에 식모 살이를 하며 아들 하나를 어떻게든 고보나마 졸업시켜 보려고 한다. 하지만 갖은 구박을 다 참으며 돈을 모으지만, 결국 아들은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를 쫓겨난다. <감자별>도 마찬가지다. 나진아의 엄마가 게으른게 아니다. 엄마는 열심히 돈을 벌려고 해보았지만, 집은 자꾸 전세로, 월세로 멀어져만 갔다. 시트콤 속 엄마는 뻔히 보기에도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피라미드 판매를 하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진아의 표현대로 남는 건 오히려 빛이다. 수모를 감내해가는 노동이나, 해볼만한 일이래 봐야, 찜질방을 돌아다니며 자석요나 파는 헛발질을 하는 엄마나, 대한민국 엄마들 삶의 조건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자식 건사하며 내 집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좋아졌다. <빠스껫볼>의 거적데기만 두른 집, 한겨울에도 맨발에 신겨진 짚신에 비하면, 어쨋건 물이 콸콸나오는 뜨신 집에, 유행을 따른 그럴 듯한 복색으로 보면 많이 발전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된 철거가 2013년에도 지속되는 대한민국은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한다. 어미 혼자 자식 한 명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이라는 것에서는 말이다. 삶의 기본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은 여전히 '원시적'이다. 


by meditator 2013. 10. 29. 09:24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스캔들;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 방영되는 동안 두 번이나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첫 번째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은, 바로 이 드라마 속 사건이 시작인, 장태하가 만든 상가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부실 공사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 건물을 장태하는 폭탄을 사용해 부수어 버린다. 80년대 건설 입국의 시대, 그 속에서 자재를 빼돌리는 등'부실'로 몸을 불리던 건설 재벌의 실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그리고 그 무너진 건물 더미 아래서 하명근의 어린 아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회, 다시 한번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이번엔 부실로 인한 붕괴가 아니다. 부실을 덮기 위한 의도적 폭발이 아니다. 하염근이 알아낸 여전히 건설 자재를 빼돌리며 부실 공사를 한, 그리고 그것을 의롭게 알리려다 우아미의 남편 공기찬 대리가 죽어간 주상 복합 제우스가 '태하 건설'의 '결자해지'로 스스로 주저앉아 내렸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그토록 많이 접한 '부실'이란 단어가, 이렇게 해결될 수도 있구나, 보고 있는 내 눈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해결되어야 하는구나. 하지만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그저 재밌는 드라마라기며 박수쳐 주기엔 많은 생각이 오간다. 하지만 도저히 현실에서 불가능할 거 같은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구나. '사람'이라면 해낼 수도 있겠구나 라는 깨달음이 두렵다. 


두 갤의 건물이 무너지는 '수미상관'의 어법 사이에, 또 하나의 '수미상관'의 장면이 겹쳐든다. 아들의 손을 잡은 아버지이다.
처음 노란 유치원복을 입은 아들의 손을 잡은 아버지는 나쁜 놈이다. 사실은 아버지가 아니다.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태하를 죽이기 위해 그의 집에 갔다가 얼떨결에 그의 아들을 유괴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유괴범이었던 아비와, 유괴를 당했던 아들은 다시 손을 잡고 간다. 예전에는 조그마한 아들과 커다란 아비가 쫓기듯 길을 걸었지만, 이젠 반대로 쪼그라든 아버지와 듬직해진 아들은 웃으며 손을 잡고 산길을 오른다. 허정거리는 아비의 걸음에 아들은 다가와 손을 잡아 지탱해 준다. 
영화<화이>에서 자신이 유괴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화이는 자신을 키워준 아비들을 모두 죽인다. 그 아비들과 함께 했던 시절을 추억할 여지도 남기지 않고, 영화의 남은 시간을 몽땅 아비와, 아비가 그렇게 되도록 만든 자들을 죽이는데  쏟아 붙는다. 
하지만 똑같이 유괴를 당한 하은중의 결말은 다르다. 이제는 장은중이 된 하은중은 그의 아비를 용서한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한다. 
'내리 사랑'이라고 거기엔 아비들의 삶이 있다. <화이>에는 유괴를 한 아이를 자신과 같은 괴물이 되도록 키울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친부를 살해하게 만든 다섯 아비들의 현실적 역사가 있다면, 드라마<스캔들>은 아름다운 동화로 마무리된다. 
애증의 세월을 거쳐 이제는 화해를 해가던 아버지가 사실은 자신을 유괴한 사람이라는 걸 안 아이는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결국 그 아버지가 오랜 세월을 거쳐 자신을 '사랑'해온 마음에 감복한다. 은중은 말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라고. 
그리고 절대 해결할 수 없었던 부실 재벌의 패악의 고리를 푼 것도 '사랑'이다. 유괴범 아버지가 아들인 자신을 사랑했던 방식으로, 돌아온 아들 은중은 그에게 총을 겨누었던 아비 장태하를 돌아서게 만든다. 그리고 그 속죄의 방식으로, 제우스는 무너져 내렸다. 

MBC 주말특별기획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하 스캔들)이 27일 오후 종영한 가운데 정통드라마로서 성공적인 행보를 보여 호평을 받고 있다./MBC 제공


영화 <화이>의 마지막 장면은 화이와 그의 아비 김윤석의 대결이 아니었다. 모든 아비들을 해치운 화이가 아비들에게 용역을 수주한 건설 재벌 진사장을 죽이는 장면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결국 이 모든 악의 시초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를 처치함으로써, <화이>는 상징적이지만, 즉자적으로 왜곡된 우리의 현대사를 청소한다. 

<스캔들>의 화법은 좀더 은유적이다. '사랑'을 논하지만, 그 사랑은 그저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피상적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장태하가 그의 아들을 되찾아 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가 사주한 살해 음모를 시인하고 감옥에 가고, 그 사건의 시발이 된 건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다. 하명근 역시 마찬가지다. 장태하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 혈육과의 생이별을 가했지만, 그의 온생애에 걸쳐 장태하의 아들을 사랑으로 키워내야하는, 그래서 그 아이가 '용서와 화해'의 전도사가 될 수 있게 키워내야 하는 형벌을 스스로에게 짐지웠다. 
<화이>의 청소는 명쾌하지만 깨림찍하다면, <스캔들>의 사랑은 이상적이지만 난해하다. 적을 내 사람으로 품어낼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의 이름으로 희생할 수 있는 한계를 묻는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왜곡되고 꼬인 현대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에 용기를 내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낸다. 더구나, <스캔들>은 혈연으로 꼬아붙인 건설 입국의 모순을 응징과 보복도 아니고, 어설픈 혈연주의나, 인지상정도 아닌, '진정한 화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드라마가 끝난 후 각자 어려운 숙제 하나를 얻어든 듯 묵직하다. 

마지막 회 현실의 '채동욱 검찰 총장'사건이 연상되는 사건이 등장한다. 현실의 채동욱 검찰총장은 찍어내 졌지만, 드라마에서는 그 일을 설계한 사람이 용기있게 나서 증언한다. '찍어내기' 시도는 누군가의 용기로 허사가 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일의 결과는 천양지차다. <스캔들>이 희망이 잦아드는 시대에 독려하고픈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즉자적 현실 비판을 넘어, 우리 시대의 문제 해결을 위해 작가가 피나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훌륭한 대본, 그것을 결코 훼손하지 않은 좋은 연출에, 심지어 적재적소에서 탄성을 자아낼 만한 기막힌 ost까지 제작진의 합이 <스캔들>이 마지막 까지 있었다. 어느 한 회도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묵묵히 자기 할 말을 다한 보기 드문 드라마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완주에 톡톡히 제 몫을 한 것은, 역시나, 조연 누구 한 사람까지 빠지지 않는 캐릭터에, 그 캐릭터를 멋지게 연기해 낸 배우들이 있겠다. 아버지의 세대건, 아들의 세대건, 심지어 곁다리로 끼어든 인간 군상들까지, 누구 하나 그냥 넘어갈 연기가 없었다. 박수를 보낸다. 


by meditator 2013. 10. 28. 10:01

'당신은 언제 첫사랑이 그리운가요?'

첫사랑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첫사랑을 추억하는 방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을 들여다 보는 건 언제일까? 내 주변의 사람들과 행복하게 희희낙락할 때는 첫사랑을 추억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살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지금 내가 사는 삶의 무게에 허덕일 때, 이상하게도 사람은 내 마음 속에 숨겨둔 순수했던 지난 날의 추억을 꺼내들게 된다. 그건 단지 첫사랑이 아니라, 그 시절의 아직은 많은 가능성을 품었던 나를 꺼내보는 것이니까. <응답하라 1997(이하 응7)>에 이어, 호응을 얻고 있는 <응답하라 1994(이하 응4)>는 흡사, 이렇게 다시 꺼내보는 첫사랑과도 같다. 

한때 우리 문단에서 '후일담 문학'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질풍노도와도 같은 80년대를 살아낸 386세대들이 그 시절을 마감하고 90년대에 들어서서 그 시절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내용을 문학의 형식을 담은 것이었다. 공지영을 필두로 해서, 그 시절의 386 문인이라면 누구나 '후일담 형식'의 작품들을 배출해 냈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의 세대에게는 생뚱맞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은 '혁명'을 꿈꿨다. 가장 전선에 서서 '투쟁'을 하던 사람들이건, 그들의 뒤에서 묵묵히 따라가던 사람들이건, 아니 그 마저도 하지 못한 채 뒤쳐져 바라보던 사람들이건, 19세기의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그 역사적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며 세상을 뒤바꿀 꿈을 꾸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걸 버리고 현장으로 들어가고, 그게 아니라도 넥타이를 매고 거리로 나서고, 박수를 보냈고, 묵묵히 그런 그들을 지켜보아 주었다. 
그러던 시절이 흘렀다. 세상이 얼마나 변혁되었는가와 상관없이, 순수한 이상으로 자신을 헌신하던 젊음은 나이가 들고, 이제 그저 생활인이 된 한 개인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줄 무언가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한 게 바로 '후일담 문학'이었다. 


그리고 이제, 90년대의 젊음을 살아낸 세대에겐 또 다른 형식의 '후일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왜 그게 '문학'이 아니라, '드라마'냐고?
우리 문화에서 90년대는 대중 문화의 '르네상스'와도 같았던 시대다. 80년대에 청춘들은 '들국화'를 좋아했지만, 텔레비젼을 통해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015B', '서태지' 등 90년대 세대들이 즐겨 듣던 노래는 브라운관을 통해 흔쾌히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이 즐기던 운동은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되어 공감을 얻었다. <응4>와 <응7>에 나오듯이그들은 '책' 대신에 컴퓨터 게임을 하고, 음악을 듣고, 운동 경기를 관람하고, '삐삐'나 '핸드폰'을 통해 교류하였다. 드라마에서도 나온다. 강의에 들어오는 학생에게 교수님이 제발 '책'좀 가지고 오라고. 그렇듯이, 이제 그 세대는 더 이상 2차원의 종이를 차치하고, 보다 역동적인 '대중문화'의 호혜를 듬뿍 누린다. 

<응7>에서 드라마의 시작이 아이돌 그룹의 '빠순이'로 시작되고, <응4>에서 농구 '빠순이'로 시작되는 건, 그 시대의 일반이 그러했다기 보다는, 바로 그런 정체성을 가졌던 그 시대의 젊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낱 '빠순이'가 아니라, 그런 문화에 열광했던 젊음을 정당한 '문화'의 수혜자이자, 담당자로 재정립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캐릭터를 보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90년대의 그 시절에는 한없이 철없어 보이는 '빠순이'요, 서울에 와서 하숙집조차 제대로 못찾아가고, 패스트 푸드점에서는 주문 조차 못하는 '모질이'로 시작된다. 그런데, <응7>에서도 그랬듯이, 그런 그들이 현재로 오면 대단한 사람들이 되어있는 것이다. 연세대가 분명해 보이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한없이 부족해 보이던 그들이, 2013년의 현재로 오면, 강남의 고층 주상 복합인 듯한 아파트에 살며 넥타이를 맨 그럴 듯해 보이는 '성공'한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엘리트주의'를 조장하는 환타지라는 부정적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로 대변되는 그 시대의 상징성을 의미하는 바가 더 클 것이다. 그렇게 가수만 쫓아다니고, 농구장이나 들락거리고, 뭐 하나 제대로 한 거 없어 뵈는 철없는 아이들이 자라서, 대통령 후보도 되고, IT강국의 주체가 되고, 그럴 듯한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는, 그런 인물들을 만들어 냈다는 세대적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이다. 


90년대의 세대가 누구인가, 고단했던 정치적 격변기를 살아낸 선배 세대와 달리, 정치적으로는 상대적 안정기를 겪으며, 경제적으로는 그 어느 세대보다도 풍족하게 젊음을 누렸던 세대다. X 세대다 뭐다 라며 유별난 별칭을 가질 수 있었던 것, '빠순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문화를 누릴 여건을 지녔던 세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는데, 오히려 그들이 지금 이 사회의 중추가 되어 살아가는 삶은 고달프다. 
경제는 장기적 불황기에 들어서, 앞선 세대와 달리 직장도, 집도, 그 어느 것도 녹록하게 내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 풍족치 않다. 풍족치 않을 정도가 아니라, 불안한 사회 안전망으로 인해 늘 위태롭고 흔들릴 뿐이다. 정치적으로는 어떤가, 지난 대선이 세대 대결이라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온갖 첨단의 SNS등을 통해 '투표'를 독려했으나, 최근 불거진 대선 결과를 둘러싼 부정 음모들처럼, 그 수단은 오히려 역으로 이용당했으며, 나이든 세대들의 일사불란한 결사에 밀려, 처참한 패배 의식을 떠안았을 뿐이다. 획일적 문화와 조직적 사고 방식에 물든 세대들을 지양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개인을 흔들고 나락에 빠뜨리려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세대적 불안함과 허무함을 위로한 것이 <응답하라> 시리즈이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노리고 있는 것은 단지 추억팔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추억을 길어 현실의 고단함을 툭툭 위로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그 옛날 나탈리 우드가 나왔던 영화 <초원의 빛>처럼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라며 그 시절의 아름답고 화려했던 젊음을 다시금 조명해 준다. 현실에 지치고 고달픈 이 시대의 주역들에게, 너희들에게 이렇게 빛나고 아름다운 청춘이 있었어. 그리고 그런 시대를 지나, 너희는 이만큼 성장하고 이루어 내었어, 라며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자존감'을 가지라고, 첫사랑을 꺼내보듯, 그 찌질하지만 순수하고 아름답던 청춘을 되새기며 위로 받으라고.

물론 '추억'은 위험하기도 하다. 첫사랑과의 추억에 빠지다 지금의 사랑을 놓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주저앉아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 때, 때로는 빛이었던 자신의 젊은 날이 다시 한번 일어설 힘이 되어 주기도 할 것이다. 부디,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는 90년대 세대에게 위로가 되기를.


by meditator 2013. 10. 26. 10:41

10월 24일 mbc 새 월화극 <기황후>의 제작발표회가 있었다. 

<기황후>는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황후에 자리까지 오르는 여인의 일대기를 다룬 사극으로, 이미 제작에 들어간다는 발표가 있는 시점부터, 그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계속 논란이 있어왔다. 
24일 제작 발표회에서는 다른 제작 발표회와 달리, 이 작품의 역사관이 논란이 되는 것과 관련하여, 배우, 피디는 물론 작가인 장영철, 정경순 작가까지 참여해 논란을 불을 끄고자 했다. 

우선 기획안 초반 원에 맛서는 매력남으로 설정되어 가장 문제가 되었던 악행과 패륜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충혜왕이란 캐릭터를 '왕유'로 변경하였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기록된 기황후와 그 형제의 패악에 대해서, 장영철, 정경순 작가는, 실제 역사적 사실이 부족하다며, 그 행간을 메꾸어 가는 것이 드라마의 몫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덧붙여, 기황후라는 역사적 인물의 입지전적 성공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 인물의 흑역사 조차 후반부에 다룰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어디까지나, 이 드라마가, 사실과 역사를 퓨전한 '팩션 사극'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최근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에, 드라마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재해석한 '팩션 사극'이 사극의 주를 이루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왕조 실록]과 같은 세세한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라면 몰라도, 그보다 시대를 더 앞선, 고려, 삼국 시대의 이야기는 사실 역사적 기록도 미비하고, 그 사이에 비어있는 행간이 워낙 많다보니 재해석의 여지가 그만큼 많을 수 밖에 없다. 

mbc의 경우 논란에 빠진 경우는 <기황후>만이 아니다. 이미 방영을 하고 있는 <수백향>도 방영하기 전에 일본 제24대 인현왕(일본명 닌켄 덴노)의 공주이자 제25대 무열왕(부레쓰 덴노)의 누이이며 제26대 계체왕(게이타이 덴노)의 정실부인인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 걸쳐 생존했던 인물을 백제 무녕왕의 공주로 그리려 했다는 것에서 문제가 되었다.  
<수백향은 정말 백제의 공주였을까 (오마이뉴스)>라는 김종성 기자의 상세한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백향이 백제의 공주라는 근거는 문정창의 <일본 상고사>에서 제시된 가설에 불과하고, 문정창 본인도, 그 이후 저술된 자신의 책에서 그조차도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데서 부실한 역사적 추론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자, <수백향> 제작진 측은 <기황후> 제작진과 같은 길을 걷는다. 주인공의 한자 이름을 手白香에서, 守百香으로 바꾸고, 일본의 역사적 인물과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낼 것이라 역사 왜곡은 없을 것이라 다짐하였다. 

하지만 <수백향>의 문제는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드라마 상에서, 실제 무녕왕의 아들인 성왕을 동성왕의 적장자로 둔갑시킨다. 그리고 무녕왕이 이복 형제였던 하지만 왕좌의 정통성을 지닌 동성왕의 가계를 유지시키고자 자신의 아들과 동성왕의 아들을 바꿔치기 한다. 덕분에, <제왕의 딸, 수백향>은 이중의 출생의 비밀을 가지게 된다. 덕분에, 남녀 주인공은 서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혈연지간이라는 운명의 장난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유교적 가계가 엄격한 조선 시대도 아니고, 아직 아비와 아들의 왕좌 계승조차도 자리잡지 않아 이복 형제의 혈통을 이어받는 백제 시대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복 형제의 아들을 왕의 자리에 올리겠다는 '유교적 발상' 역시 '역'시대착오적인 것임은 물론, 엄연히 사료 상으로, 무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성왕을 동성왕의 아들로 둔갑시킨 것은, 수백향을 한자 이름만 바꿔 동명이인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팩션 사극의 한계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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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 아무리 '퓨전'이라고 해도, 이미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뛰어넘는 재해석은 언제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미 제작에 들어가기도 전에, 패륜왕으로 알려진 충혜왕을 원에 저항한 왕으로 그리려 한다던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고려를 수탈한 세력으로 알려진 기황후를 입지전적 인물로 그리려 한다는 건, 무리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논란이 되자 이름자를 바꿔 다른 사람이요 하는 것이나, 아비를 원수로 만드는, 이미 부족하나마 알려진 사실을 제 멋대로 그려낸다는 건, 재해석이 아니라, 그나마 또 한번의 왜곡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해를 품은 달>처럼 드라마를 보면 조선시대같은데도, 가상의 왕조와, 가상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성공한 예가 있는데, 굳이 역사적 인물을 가져다 쓸 필요가 있겠는가란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굳이 역사적 왜곡의 혐의를 받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무모한 팩션 사극을 시도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드라마를 제작하는 측에서는, 사극을 만들 수 있는 역사적 자료는 빈약하고, 사극은 많이 양산되어야 하는 현실에서, 요즘의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들려다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기황후> 제작진은 21세기에 해외에 나가 성공하는 한국인들이 많은데, 그런 한국인들의 표본으로써 기황후를 의욕적으로 그려내 보이겠다고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야심찬 의도를 그저 곱게만 볼 수 없는 것이, 이미 드라마라는 것이 그저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사업'이 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쪽 나라에서 친숙한 누군가를 드라마로 제작하면 조금 더 쉽게 팔릴 수도 있겠다는 꼼수가 현실의 과도한 재해석 내지는 왜곡을 낳은 게 아닐까 라는 시선 역시 항존한다. 변발조차 하지 않는 원나라 황제를 꽃미남으로 그려내는 <기황후>이기에 그런 의심은 더더욱 피할 수 없다. 

이미 장영철, 정경순 작가는 유신 시대를, 개발 독재시대를 미화한다는 오명을 무릎쓰고 <자이언트>라는 걸작을 만들어 낸 전례가 있었다. 이번 <기황후>도 그런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는 듯하다. 부디,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버린, <기황후>를 잘 거둬 담아가길 바란다. 그저 찬미가 아닌, 명과 암이 있는 입체적 인물로 재탄생되는 기황후를 기대해 보겠다. <수백향>도 마찬가지다. 중년의 여성층을 사로잡기 위한 이중의 출생의 비밀과 얽힌 연인 관계가 아니라, 고뇌하는 역사적 인물의 속내를 제대로 펼쳐내 주길 바랄 뿐이다. 


by meditator 2013. 10. 25. 10:11

10월 23일에 방영된 <드라마 스페셜>은 여러 의미로 뜻깊은 시간이었다. 

우선은 <마귀- 파발을 달리다>는 2012년 극본 공모의 최우수 당선작이라는 것이다. 최우작이었던 만큼, 기존 드라마 스페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스케일의 역사극을 '추노'못지 않은 긴박감을 자아내는 촬영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날의 드라마 스페셜은 극본 공모 당선작을 방영하는 나름 드라마 스페셜로써는 축제의 날이었지만, 동시에, 수요일로 시간대를 옮겨 심기일전을 꾀하던 드라마 스페셜이 다시 일요일 밤 11시 50분이라는 '외진' 자리로 쫓겨나기 전 마지막 시간라는 비감한 의미도 띠고 있다. 
차라리 늘 그 한갓진(?) 시간이었다면, 그 자리에서의 고고한 고군분투로서 의미가 있었겠지만, 굳이 드라마에 드라마를 얹는 '옥상옥'의 어색한 자리에 끌어다 앉히더니, 그러기 반년이나 됐을까 하는 시간에 다시 물리는 건, 노골적으로 드라마 스페셜을 '개밥에 도토리'취급을 한 셈이다. 더구나, 외주가 아닌, 자체 제작인 드라마 스페셜은 경영 상태로 말미암마, 제작비를 줄이다 못해(이미 드라마 스페셜의 자체 제작비가 배우들의 경우는 거의 수고비 조의 출연료만을 받고 출연하는 정도로  다른 드라마에 비해 낮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 편수까지 줄이겠다고 하니, 이날의 드라마 스페셜을 그저 기꺼운 마음으로만 볼 수 만은 없었다. 

그래도 <마귀-파발을 달리다>는 근래에 보기 드문 사극이었다. 
그것은 우선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그저 역사 속에 스쳐지나가던 '파발꾼'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 산성 밖으로 파발을 전달하는 중책을 맡은 파발꾼,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마는 그들의 시도로 인해, 역사는 보기드문 치욕의 역사를 남기고, 문복 개인은 평생의 절름발이가 되어 노름판을 전전하게 된다. 
자신의 실수로 왕명도 수호하지 못하고, 아내도 죽게 했다는 문복의 죄책감과 청 앞에 왕이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이라는, 그저 보잘 것 없을 거 같은 개인의 삶과 역사를 등치시키는 시선이 이 드라마의 첫 번째 빼어난 점이다. 

(사진; 스포츠 월드)

치욕의 역사는 반격을 준비한다. 
인조의 아들 효종은 아비의 치욕을, 그리고 이 나라의 수치를 되갚기 위해 북벌을 준비한다. 그리고, 치욕의 과정에서 희생당한 임경업 장군의 딸 서연도 복수를 하기 위해 문복을 찾는다. 하지만 문복은 아직도 뻘밭에 나뒹그러진 자신의 삶을 줏어올리지 못한다. 그를 일으킨 것은, 자신의 노름빛때문에 팔려간 딸이다. 딸로 인해, 서연을 다시 찾게 되고, 그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던 과거의 자신의 파발 임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결국, 아내를 홀로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파발 임무를 완수하고자 길을 떠난다. 

익히 역사가 김자점을 역신으로 기록하였듯이, 그의 아들 김의에 의해 시도된, 역모, 그리고 왕의 시해는 실패로 끝난다. 그리고 그 실패 안에는, 바로 '마귀'라고 불리는 문복의 활약이 있었다. 단연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파발꾼으로, 동료파발꾼과의 죽음을 건 레이스에서 홀로 살아남아 임무를 완수한다.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딸을 구할 것인가, 왕의 목숨을 구할 것인가라는 기로에서, 문복은 왕의 목숨을 구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몫에 충실한다. 생명의 촌각을 다투는 아내를 놔두고 말을 탔던 병자호란의 그날처럼 문복은 다시 같은 선택을 하고, 이번에 그의 선택은 왕도, 자신의 딸도 살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 절묘한 수미상관의 스토리가 <마귀-파발을 달리다>의 묘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면 <마귀-파발을 달리다>는 그저 좀 색다른, 그저 좀 잘 짜여진 역사극이 되었을 것이다. <마귀>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그 다음이다.
죽음을 걸고 전한 사초와 표문, 하지만, 왕 앞에서 열어본 그것들은 이미 물에 젖어 얼룩에 불과했다. 그가 죽도록 노력한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또 하나의 카드가 있었다. 바로 김의가 왕을 시해하려고 한다는 것, 덕분에 왕은 목숨을 구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문복에게 고맙다고 말 한 마디를 전한 왕은 곧 궁궐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그를 수행했던 무관은 오히려 문복을 윽박지른다. 오늘 있었던 일을 발설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김의에게 서체를 알려주고 죽임을 당한 공씨와 같은 처지에 빠진 것이다. '토사구팽'이다. 

물에 젖어 쓸모 없어진 사초 등은 이전의 병자호란 때 문복의 파발 역시 성공했어도 결과에는 별 상관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목숨을 살린 문복의 노력은, 그의 역사적 선택의 의의의 또 다른 상징 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저 문복과, 문복이 파발을 전하는 과정에서 죽어나간 경출이나 강계 따위랑은 상관없는 저들의 역사로 남는다. 모든 일이 끝난 후 머리를 내리고 참한 규방 처녀로 가마를 타고 가던 서연의 모습에서 보듯이, 양반님네의 일인 듯하여 허무하다. 

그러나, 문복이 가장 당당했던 순간이 왕이 저 멀리 도망치듯 가고, 그의 무관이 문복의 입을 막으려 닥달했을 때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제 아무리 자신의 것인 양 치부하려 해도, 그들이 껍질만 가져간 그 역사의 알맹이는 문복의 '것'이라는 사실이, 조아렸던 그의 어깨와 허리를 펴고, 그를 당당히 되돌아 서게 만들도록 하는 것이다. 여전히 그와, 그의 딸의 사는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문복은 그 예전의 아내를 죽인 죄책감에, 그리고 자신의 파발을 완수하지 못한 자괴감에 시달리던 문복이 아니다. 더구나, 저들의 앞에서 쩔쩔매는 그저 '천민'은 더더욱 아니다. 양반님네 서연을 당당하게 마주 쏘아볼 자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저 밟히면 밟히는 대로 스러지는 민초가 아니라, 유유히 흐르며 역사를 지탱해 왔던 민중의 삶을 상징한다. 

명예도, 금전적 보상도, 아무 것도 쥔 것이 없는 문복의 삶이 허무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와 같이 달리던, 하지만 그와 다른 선택을 했던, 늘 그의 화살받이였던 강개의 삶을 대비해 보면 삶의 각도는 조금 달라진다. 그토록 위악을 부리며 돈에 욕심을 부리던 강개는 돈 2000냥에 결국 자기 목숨을 내놓았다. 죽어가던 강개가 문복을 비웃자, 문복을 되묻는다. 그래, 너는 그래서 돈에 목숨을 내놓았냐고. 인간의 '자존'이 구체적 물질이나, 성취로 상치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시대에, 문복의 선택과 그의 결말은 여러가지 해석과 상념을 낳는다. 

안타까운 것은, 이제 이렇게 좋은 관점과 만듬새를 가진 작품이, 제작진 운운하며 편수가 줄어들고, 그나마 시간 역시 일요일 밤 자정으로 쫓겨나야 한다는 사실에서, <드라마 스페셜>이 kbs의 '민초'처럼 느껴진다. <마귀>의 채승대 작가는 올 하반기 <감격시대>를 집필 할 예정인 것처럼, <드라마 스페셜>을 통해 지금의 kbs를 있게 한 많은 좋은 작가들과, 피디들이 이 시간을 통해 배출되었고, 기회를 부여 받았었다. 하지만 공영방송 kbs2의 경제적 논리는 한 치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by meditator 2013. 10. 24. 10:20

만약 당신의 자녀가 시험 기간인데, 하라는 시험 공부는 안하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려다닌다면 뭐라고 말을 하실텐가?

우선 점잖게는 '학생의 본분으로 돌아가라'에서 부터, 가장 극단적으로는 '욕'부터 나오지 않겠는가.
10월21일 <적과의 동침>이 딱 그꼴이다.

방송 초반, 지금이 '국감 기간'인 것이 눈치가 보이는 듯, 김구라는 바쁘신 국감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와주셔서 고맙다고 한다. 그에 대해 국회의원들은 이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다는 듯, 웃는 낯으로 맞대응을 한다. 
김구라도 말한다. '국감'이라는게 국회의원들로 치면 시험 기간 같은 건데, 그 촌음을 아껴 자리를 해주었다고. 

그런 시험 기간 같은 '국감' 기간에 나랏밥을 먹는 국회의원들이, 자기 개인의 인지도에 목말라, 예능 출연을 하는 건, 그들이 허허거리며 허락할 일이 아니다. 국민들이 허락해 주어야 할 일이다. 내 새끼라면 두들겨 패서라도 가르치지, 이건 뭐 다음 선거에 '낙선'이라도 시켜? 아니 오히려, <적과의 동침> 덕분에 그들의 재선은 따논 당상이 되어간다. 

더구나, 그 '시험'이나 잘 보고 있으면, 애교로 넘어가 주기라도 하겠다. 
같은 날 <jtbc뉴스9>에서는 허술한 국감 현장을 다뤘다. 그것도 직접 1년 전의 '국감' 현장과, 요즘의 '국감'을 비교하면서 1년 여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니 언제나 늘 그랬듯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부실한 국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심지어, 새누리 당 박민식 의원은 정색을 하며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된 외압을 폭로한 윤석렬 여주지검장을 '불충'이라도 한 것 마냥 몰아가다가, <적과의 동침>에 나와서는 생글생글 웃는다. 

적과의 동침

그런데, 정말 '인지도'라는 게 무섭다. 
<적과의 동침>을 몇 번 봤더니, 정말 '듣보'였던 김성태니, 박민식이니 하는 의원들 얼굴이 텔레비젼에서 눈에 띈다. 김재윤 의원이 과거의 '책박사'였다는 사실도 복기하게 된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 주목해 보게 되고, 한번이라도 더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서울 시장이 되겠다는 야망을 숨기지 않는 김성태 의원이나, 부산 시장을 노리는 박민식 의원이 개근하듯 <적과의 동침>에 나오는 게 이해가 된다. '국감'이든 어디든 도대체 정치판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보기 조차 힘든 김영환 의원이, '국감' 등 열일을 제치고 <적과의 동침>에는 꼭 나오겠다는 다짐이 실감이 난다. 전통있는 정치 가문의 출신으로도 부족하여, '잡어'에서 '도다리'라도 되기 위해 까마득한 젊은 개그맨에게 질문 공세를 던지는 게 몹시도 현실적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까이꺼 대~충'해도 되거나, 빼먹어도 되는 '국감' 따위보다도, <적과의 동침>에 나와 얼굴 한 번 알리는 게 더 실속있는 '장사'인 것이다. 
'인지도'를 쌓기 위해, 그럴 듯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나온 그들에게 정치인5 앙케이트를 두고 갑론을박 하는 설전은 부담스럽다. 이게 시사 프로그램이냐며 볼멘 소리를 한다. 미소 짓고, 말 한마디라도 못해 안달이던 사람들이 말을 아낀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장사'를 하는데, 국민들은 그들에게, 장사꾼이 아니라,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일꾼이 되기를 원하는데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10월 21일 <적과의 동침>에서는 여, 야의 지지자들이 존경하는 정치인 5명을 앙케이트 조사로 뽑았다. 야당의 후보였던 문재인 의원이 안철수 의원보다도 순위가 낮다는 현실도 충격적이었지만, 현직 대통령이 여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1위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도 역시나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앙케이트 결과를 놓고, 부녀가 함께 후보라서 표가 갈렸다거나, 혹은 젊은 사람들이 조사 대상에 들어가다 보니 '미래 지향적'이라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김재윤 의원 말 그대로 아전인수 식 '용비어천가'를 보고 있는 건 곤욕이다. 국민의 생각에 귀기울이기는 커녕, 암기했던 답안을 외워대느라, 땀을 흘린다. 야와 야를 지지한 사람들을 서로 다른 외계인이라도 되는 양 폄하하고, 편가르기에 바쁘다. 일꾼은 없다. 연예인이나, 모리배같은 사람들만 있어 보인다. 

그나저나, <적과의 동침>의 의도도 궁금하다. 
김성태 의원이나, 박민식 의원처럼 결석 한번 안하는 의원들을 계속 출연시키는 건, 그들의 예능감이 뛰어나고, '꽃미남'이라서 인가? 아니면 앞으로 서울 시장이나, 부산 시장이 될 지로 모를 그들을 미리미리 밀어주겠다는 심사인가? 뻔히 예능 출연이 가져오는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알면서도 특정 정치인을 거의 고정이다 싶게 출연시키는 건, 그저 '예능' 목정이 아니라, 고도의 불순한 정치적 후원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적과의 동침>에 출연했던, 그 중에서도 나와서 좋은 반응을 얻었거나, 다수의 출연분을 가진 의원들이 특정한 직위를 얻는다거나, 재선을 한다면, 그건 상당수 <적과의 동침>몫일 것이다. 말이 국민 욕받이 방송이지, 지금의 <적과의 동침>은 '인지도 상승' 홍보 프로그램의 성격이 더 짙다. 


by meditator 2013. 10. 22. 0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