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응답하라 1994> 13화, 먼저 고백을 하고 마음 조리던 나정이(고아라 분)에게 드디어 쓰레기(정우 분)가 답을 했다. 자신을 밀어낼까 쓰레기 곁에 다가가지 못했던 나정이에게 달려와 그녀의 입에 키쓰로 답을 했다.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거의 첫 회부터 줄곧 쓰레기만을 바라보던 나정이의 일편단심이 보답을 받았는데, 그래서 이 둘의 키스씬을 보는 마음이 행복하고 설레여야 하는데, 어쩐지 찜찜하다. 심지어 불안하기 까지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응답하라 1997>에서 남녀 주인공 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 한 것은 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한참 후, 다 큰 어른이 된 후, 드라마가 거의 끝날 때쯤이었다. 그런데, 1회를 연장한다는 <응답하라 1994>는 이제 겨우 중반을 넘어 13회다. 그런데 남녀 주인공의 교감이라니? 불안하다. 이러다 결국 헤어지는 거 아냐?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텔레비젼 화면에 나와 인터뷰를 하는 칠봉이가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그러자, 이제까지 쓰레기가 남편감이라고 철썩같이 믿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럼 칠봉인가?


	응답하라 1994 키스신, 쓰레기 나정 키스/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94’ 캡처
(사진; 조선.COM)

<응답하라 1994>를 보는 시청자들은 매회 자신들이 낚시 바늘 앞에서 무기력하게 입질을 하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라는데 동의할 것이다. 난 쓰레기가 좋다. 난 칠봉이가 좋다. 우겨봐야, 매회 제작진이 던져주는 떡밥에 따라 이리 휘돌리고, 저리 휘돌리는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의 사랑에는 철칙이란 게 없으니까. 우리는 첫사랑을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한다. '첫사랑은 다 안이루어지는 거라야'라고, 하지만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의 뇌리 속에 첫사랑이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사는 커플이 떠오르는 건 어쩐담. 지난 회, 뜬금없이 남편감의 다크호스로 해태가 등장했을 때도 그렇다. 그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이해해 주던 친구가 남편이 될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지금까지는 쓰레기와 엮이던 빙그레가 마음을 돌이켜 나정이가 좋다는 설정으로 바뀌어 등장하면, 시청자들은 아마 욕을 하면서도 또 혹시나 빙그레야? 할 수도 있겠다. 천 쌍의 커플에, 천 개의 사연이 있듯이, 사랑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기에, 그 누구라도 나정이의 인연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파닥파닥 그저 제작진의 처분에 따라 낚이게 되는 것이고. 

1994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는 <응답하라 1994>를 추동하는 동인은 바로 나정이의 남편 찾기이다. 이것은 이미 <응답하라 1997>에서 주효했던 전략이기에, 보다 능수능란하게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떡밥을 던지며 유인해 내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응답하라 1994>가 여느 멜로 드라마처럼 주인공의 심리에 천착하며 관계를 추동중이지는 않다. 회마다, 한 계절을 건너뛰는 드라마는, 주인공들의 감정선도 함께 건너뛴다. 

지난 겨울 한 해의 마지막 날 추운 터미널에서 나정이에게 입을 맞추며 사랑을 고백했던 칠봉이의 외사랑은 내내 대답이 없다. 나정이의 방문을 수시로 열어제끼며, 들락이는 칠봉이에게 나정이는 그저 덤덤하다. 기껏해야 드러난 반응이란게 너랑 둘이서 뭐 먹으러 가지 않겠단 말로 친구 사이 이상을 넘어가지 않겠단 답을 13회에 이르러서야 시청자들은 겨우 얻어낼 수 있다. 
아니, 그보다 더 답답했던 것은, 나정이가 그렇게 애태워하던 쓰레기의 반응이었다. 칠봉이가 신촌 하숙에 등장하고, 나정이를 좋아하게 되기 까지, 쓰레기는 나정이의 감정에 묵묵부답이었다. 오죽하면 쓰레기를 연기하는 정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부러 그의 감정을 누른다는 음모론이 퍼질 만큼. 

(사진; 스포츠 월드)

하지만 계절을 건너뛰듯 감정선을 잘라먹는 <응답하라 1994>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13회에 이르러 정우가 자신의 감정을 한껏 내보이고, 그걸 다시 칠봉이가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라고' 맞받는 것처럼. 제작진이 던진 떡밥을 언젠가는 회수하는 <응답하라 1994>의 묘미 때문이다. 어쩌면 쓰레기와 나정이가 저렇게 한껏 키스를 하고도, 다음 회에서 두 사람은 여전히 개와 고양이처럼 아웅다웅하는 남매처럼만 그려질 지도 모른다. 그러다 또 성큼 곤충이 변태를 하듯, 관계가 진전되고. 그렇게 언제 어디서 어떤 관계의 진전이 이루어 질지도 모르기에 시청자들은 뻔히 알면서 <응답하라 1994>에 낚인다. 마치 그것은 청춘의 열병은 교통사고와도 같다는 문구를 되새기게 만들듯이 말이다. 사고처럼 맞닦뜨리는 주인공들의 연애 사건에 우리는 당황해 하면서도, 거기서 빚어지는 뜻밖의 '낭만성'에 또 환호하며 드라마를 열시청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매회 낚이고 낚이다 보니, <응답하라 1994>가 끝나고 나면 허무해 지는 경우가 점점 빈번해 진다. 뭐 그렇다고 별 다른 이야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새삼 1994년의 청춘이 이랬는가 되돌아 보게 된다. 
우스개로 80년대의 대학 생활을 한 나는 아들에게 엄마의 시대는 결코 <응답하라 1994>와 같은 드라마로 만들어 질 수 없을 거라는 말을 했었다. 처음 대학에서 만난 것이 강의실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형사들이요, 교정에서 만난 것은 매캐한 최류탄에, 선배를 만나 곳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던 건물 옥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응답하라 1994>를 보면 어쩌면 이 제작진이 80년대의 시대를 드라마로 만든다면, 저런 이야기가 아니라, 음악을 신청하면 들려주는 DJ가 있는 음악 다방에, 고고장에, 민속 주점에,  그리고 거기에서 흐르던 이선희 'J에게', 정수라의 '바람이었나'에, 퀸과, 스팅, 에어서플라이의 팝송이 흐르는 또 다른 청춘 연가가 될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응답하라 1994>의 연세대 학생들이 다니던 바로 그 연세대 캠퍼스에서 1996년 '등록금 인상 반대와 김영삼 정권 대선자금 공개' 데모를 하던 학생 노수석 학생이 죽었다. 여전히 대학에서는 매캐한 최류탄 연기가 떠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응답하라 1994>의 캠퍼스에는 그런 자욱이 없다. 
물론, 꼭 추억을 논하는 드라마가 당시의 모든 것을 그려내야 할 의무는 없다. 더더구나, 대학을 다녔다 해도 다 똑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제작진의 눈으로 본 90년대의 대학 생활은 드라마와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90년대는 운동을 했던 학생들 조차도, 자신들의 세대는 80년대처럼 운동권이 주류도 아니었으며, 끼인 세대라고 자조적으로 평가하는데, 굳이 그걸 다 그려야 한다고 강권할 이유도 없다. 누군가의 대학 시절에는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투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일 수 있으니까. 아니 꼭 그 시대 화두를 다루지 않아도 좋다. 어쩌면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어쩌면 더 중요한 그들의 젊은 시절의 고민들은, 정작 드라마에서는 쉽게 쉽게 넘어간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던 빙그레의 고민이 13회나 될 동안 그저 아르바이트를 하면 떠돌듯이. 사랑을 빼놓고서는 드라마의 중반을 넘긴 지금까지 <응답하라> 젊은이들의 젊은 날은 순탄하다. 

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세세한 물품 하나가 그 시대의 것이 맞느냐 아니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나정이의 남편 찾기에 골몰하다 허무해지면, 문득, 우리가 보는 1994년이 정말 1994년이 맞는가 싶은가 반문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건 '젋은 날의 치열했던 고민의 흔적'이 아니라, '첫사랑의 희미한 그림자'뿐인가 싶은 거다. 


by meditator 2013. 12. 1. 10:26

여행을 떠나야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일까?

여행에 가지고 갈 것들 빠뜨리지 않기? 여행지의 정보? 편안한 숙박 시설, 볼만한 풍경, 맛있는 먹거리, 그리고 원활한 교통 수단?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혹은 여행 과정에서 순탄하게 마련되어야 할 것들이지만, 그 모든 것들에 우선하여 마련되어야 할 것들은 바로 함께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아닐까? 즉 나와 함께 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내 맘에 드는가 아닐까 말이다. 제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한 여행이라도 여행지에서는 별 일이 다 생기고, 그래서 인생을 길고 긴 여행에 빗대듯이, 짦건 길건, 여행이라는 행로에서 함께 하는 사람이 우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산해진미가 차려지고, 화려한 볼거리가 넘쳐나는 여행이라도 내내 불편하기가 그지 없을 것이다. 
<꽃보다 누나>를 만든 제작진은 바로 이 여행의 가장 큰 관건을 제대로 아는 듯하다. 아니 <꽃보다 할배>의 여행 과정을 통해 더더욱 여행의 결정적 요소가 무엇이라는 걸 확실히 절감한 듯하다. <꽃보다~> 시리즈는 출연하는 배우들이 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이지만, 시청자들 역시 그들과 내내 함께 여행을 하는 마음이 드는 프로그램이다. 그러기에, 누구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꽃보다 할배>에 이어, <꽃보다 누나>시리즈 첫 회를 보고 있노라면 누구를 데리고 어디를 여행해도 재미있는 여행기를 만들어 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꽃보다 할배>가 많은 시청자들의 호응을 받은 건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할배들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여행이라는 컨셉이었다. 다리가 아픈 걸 꾹꾹 참으며 어쩌면 다시 못볼 지도 모를, 젊어서는 일하느라 차마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을 풍광에 감탄하며 바라보는 할배들의 모습은, 많은 설명이 필요없이 감동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투덜거리면서도 할배들이 부르면 그 어떤 토를 달지 않고 '네'하며 달려가는 말 그대로 국민 짐꾼 이서진의 매력 또한 할배들의 여행의 조력자로서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할배들의 여행은, '할배들'이란 말 그대로 특수한 사정을 지닌 것이었기에 일단 접어 주고 들어가는 것이 있었다. 그에 이어 '할매'도 아니고, '누나들'의 여행을 그것도 윤여정, 김자옥, 김희애, 이미연 등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 이질적인 조합의 여행을 한다고 할 때 과연 저 여행도 할배들 만큼 성공할까란 의구심이 든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무려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두 달 전부터 '짜~'하게 반복되는 프로그램에 대한 홍보는, 케이블의 불리함을 홍보로 이겨내겠다는 시도를 넘어, 마치 빈수레가 요란한 거 아냐 라는 의구심을 살 정도였었다. 

그렇게, 아직도 이 프로그램이 시작조차 하지 않았어? 라는 반문을 할 정도로, 몇 번의 티저와,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기사들을 뒤로 하고, 드디어 11월 29일 <꽃보다 누나>의 첫 방송이 방영되었다. 아마도 이 프로그램을 지켜본 사람들은, <꽃보다 할배>를 보았던 그 감동을 다시 누리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고, 어디 그만큼 재미있을까? 라며 가재미 눈을 뜨고 바라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함께 한 멤버 중 누군가는 일전에 다른 여행에서 여행 컨셉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바도 있었으니 더더욱 그러했으리라. 

하지만, 의심은 무색하게 <꽃보다 누나>는 <꽃보다 할배>만큼 재미가 있을 듯하다. <꽃보다 할배>가 그러했듯 <꽃보다 누나> 역시 방송 첫 회만에 함께 여행을 떠날 멤버들의 캐릭터를 분명하게 시청자들에게 각인시켰으며, 심지어 그 캐릭터들에게 애정을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롱이 다롱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저 마다 생긴 것이 다른 만큼, 성격도 다 다르다. 그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함께 만나면 부딪칠 일이 생기는 건 당연지사. 그런데 <꽃보다 ~> 제작진이 어느 누구를 데려다 놔도 푸근하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건 바로 그들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인간미 넘치는 관점이다. 


투덜거렸지만 능수능란했던 짐꾼 이서진과 달리, 제작진이 '짐'이라고 명쾌하게 정의내린 이승기는 여행 가이드로서는 서투른 게 첫 방송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고등학생 시절 연예계에 들어와서 본인 말 대로, 늘 남들이 준비해놓은 것을 착실하게 한 것으로 이 자리에 온 사람이었지만,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만으론 이국의 공항에서 맞닦뜨린 상황은 스타로 살아온 그의 이력을 넘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진은 그걸 여행의 불편함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짐꾼'이 아니라, '짐'이라는 애교 섞인 정의를 내리더니, 곧 이 여행이 이십대 후반의 젊은이 이승기의 홀로서기의 과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다. <꽃보다 누나>의 관전 포인트가 또 하나 생긴 것이다. 그저 못하는 애을 짜증내며 보는 게 아니라, 저 애가 얼마나 성장할까 라며 관점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시청자들이 그를 응원하며 지켜보게 만드는 것이다.

누나들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 보다 깐깐 할 거 같은 여정쌤이 승기가 나타나지 않자, 스스로 길을 물어 나선다. 가장 연장자이지만, 연장자로써 우세란 찾아볼 수 없다. 30분을 넘게 걸어야 한다는 승기의 난감한 안내에, '난 누나가 아니라, 할머니야'라며 그저 지긋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드라마 속 펄펄 뛰던 할머니는 없다.
알듯 모를듯 우아한 미소를 띠며 여행을 함께 하던 김희애는 호텔로 가는 교통편을 결정하는 과정만으로 그녀의 모든 매력을 어필했다. 이미연과 윤여정이 승기가 오지 않는다고 걱정이 늘어질 때도 가만히 있던 그녀가 시간이 지체되자 조용히 인포메이션을 찾아 정보를 알아내더니 다시 가만히 있는다. 결국 나타났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쩔쩔매는 승기를 은근히 인포메이션으로 안내하고, 다시 결정을 하지 못하는 승기를 도와주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도움을 줄  뿐이다. 지쳐가는 급한 상황 속에서도, 가이드 승기의 낯을 세워주는, 처음 여행을 하니 당연히 서툴거라고 두둔해 주는 김희애의 모습은 그 한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반면 김희애와 다르게 이승기처럼 처음 홀로서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미연은 괄괄하다. 늦는 이승기를 제일 못기다리는 것도 이미연이요, 그 감정을 참지 못하고 쏟아내는 것도 이미연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그런 이미연의 다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미연의 괄한 성격을 상쇄시킨다. 그녀가 이승기만큼이나 허당이라는 것과, 괄한 성격만큼이나 씩씩하게 앞장서 짐도 들고, 나이든 언니들도 챙기려 애쓴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는 그저 이승기를 못미더워하지 않고 그의 옆에서 힘이 되 줄 거라는 예고를 보여줌으로써, 이미연에게 혹시라고 가질 수 있는 '미움'을 불식시키려 한다. 
제일 압권은 김자옥이다. 연기 생활을 쉬어야 할 정도로 재발된 암으로 인한 투병 생활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된 건강은 둘째치고, 다른 멤버들이 난리법석을 부리는데도 고요히 앉아서 글을 쓰는 그녀의 캐릭터는 독보적이다. '공주'라는 별명이 그저 얻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데, 그게 또 미워보이지 않는다. 모두다 법석을 떨어봐야, 사실 어수선하기만 한 상황에서 누구 한 사람, 잘 되겠지 하는 그런 사람 한 사람 정도는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모습들은 보기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짐꾼일 줄 알았는데, 짐이 돼! 라며 한심해 하던가, 뭘 이승기를 기다려 빨리빨리 결정해 버리지 라든가, 어린 동생 시켜놓고 참을성이 없다던가,  혼자 한가하게 뭐하고 있어? 등등 보기에 따라 얼마든지 싫어질 수 있는 꺼리들이다. 백 사람이 백가지 미운 짓을 할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마치 언제나 '허허' 거리는 나영석 피디와, 슬몃슬몃 비칠 때마다 언제나 웃는 낯인 이우정 작가의 모습처럼, <꽃보다 누나> 첫 회의 모든 좌충우돌은,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 라며 넉넉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람사는 냄새가 난달까. 
그러고 되돌아 보니, <1박2일>의 까나리 볼불복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냄새조차 역해서 마실 수 없는 그것을 전국민이 해보고 싶은 게임으로 만든 그것으로 만든 역사 역시 '까나리'를 먹는 게 결코 '패배'라거나, '나쁜 것'으로 느껴지지 않게 만들었던 제작진의 기막힌 노하우였었단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저 세상의 모든 고됨이, 이 제작진과 함께라면 그 어떤 것도 해볼 만한 것이 되는 듯하다. 그래서 <꽃보다 누나>의 크로아티아 여행도 새삼 기대가 된다. 


by meditator 2013. 11. 30. 09:06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에 총독부 기관지 표지 공모에 당선될 정도로 재능을 보였지만, 각혈로 퇴직한 후 '제비'등을 경영하며 소설 [날개]와, 시 [오감도]등 실험성이 강한 작품을 발표했다.

이상이 드라마 페스티벌에 등장한 이상에 대한 가장 적절한 약력일 것이다.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이상의 [날개]나 [오감도]쯤은 접해봤을 것이지만, 또 그것을 접해봤음에도, 철이 들어서도 여전히 이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의 삶도, 그의 작품도 미스터리한 채 남아있다. 그래도 '날개'를 펴라는 소설까지는 이해가 되겠지만, 제1의 아해가 뛰어간다오, 제2의 아해가 뛰어간다오 라는 식의 시에 이르르면 범인의 이해도는 그의 시 앞에서 주눅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작가들은, 그 이해할 수 없는 이상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풀어내려고 했다. 일찌기 이상의 삶과 미스터리한 작품을 대상으로 한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이 1999년 유상욱 감독의 영화로, 그리고 2007년에는 장용민이 발표되었다. <훈민정음 살해사건(2012)>의 김재희 작가는 아예 <경성 탐성 이상>이란 작품을 통해 이상을 탐정으로 전직을 시키기도 했었다. 

<드라마 페스티벌- 이상 그 이상>은 바로 이런 미스터리한 이상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작품이다. 드라마 속 이상(조승우 분)은 자신의 작품 오감도를 게재하는 신문사 앞에서 시위를 하는 군중들에게 라이터를 빌려주고 스스로 그의 작품이 실린 신문더미를 불태우는데 앞장서는 기인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 기행은, 경혜의 언급을 빌어 나타나듯이, 청계천 다리 밑의 굶주린 빈민들과, 화려한 경성 거리를 활보하는 '모던'걸, '모던'보이의 괴리감 속에서 스스로 자학하며 미침을 선택한 자의식 가득한 천재로 그려진다. 일찌기 뮤지컬을 통해 무대에서 빛을 발하던 조승우의 연기는, 자학을 숨긴 채 자신을 희화화시키는 이상을 그려내는데 그보다 더 적역이 없는 듯하다. 

<이상, 그 이상> '비운의 천재시인'으로 돌아온 조승우! 이미지-3

그런 그에게 총독부 동료였던 히야시가 고종의 밀지가 담긴 서찰을 전하고, 히야시의 죽음 이후 묘령의 여성 경혜(박하선 분)까지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고종이 숨겨두었다는 황금 찾기에 돌입한다. 

<이상 그 이상>은 이상의 신비로운 캐릭터를 진작시키기 위해, 당시 제비의 사환이었던 수영(조민기 분)이 나이가 들어 이상의 그림을 들고 표구상에 등장하는 것으로, 과거와 현대를 오가며 전개된다. 하지만 나이든 수영의 등장이 미스터리함을 배가시키기는 했지만, 과연 그의 부연 설명이, 드라마의 스토리에 보탬이 되었는가는 미지수일 정도로, 한 시간 여의 짧은 런닝 타임 동안 꾸겨넣은 이상의 탐정기는 버거워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상이라는 캐릭터에 방점을 찍는데는 성공했음에도, 이상을 제외한 그가 탐정으로써 고종 황제의 밀서를 통해 황금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어설프기가 그지 없었다. 탐정물의 기초는 시청자로 하여금 극의 진행에 따라 함께 머리를 쓰도록 만드는데 있다. 방위를 이용한 추리의 과정은 그럴 듯했지만, 그것조차 대사로 나열하는 것에 그치고, 경혜의 등장과, 히야시가 알고보니 이상을 좋아했다던가의 결정적 힌트를 말로 설명해 버리는 식의 추리극은 매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숨겨진 고종의 황금 찾기가 결국은 '살아있는 민비'라는 또 다른 대한 제국의 미스터리로 전환해 가는 과정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극의 절정에서 조승우의 '뒷방 늙은이가 결국 생각했던 것'운운의 분노 작렬하는 연기가 없었다면, 동굴 속 반지를 발견하는 장면은 실소가 나올만한 장면이었다. 

민비가 살아있다는 스토리는 김재희 작가의 [경성 탐정 이상] 중 '그녀가 살아있다]를 통해 이미 차용된 이야기이다. 물론 이 스토리 자체가 망해가는 대한제국에 대한 백성들의 열망이 자아낸 미스터리로 구전되었던 것이기에, 또 한번 차용되었다는 것에 문제제기를 삼을 것은 아니라 본다. 하지만, [경성 탐정 이상]에서는 여전히 민비가 살아있어 그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하지만, <이상 그 이상>의 결론은 허무하다. 그래서 민비가 살아서 뭐 어쨌다는 건가?란 의문이 든다. 작가는 고종 황제 황금 미스터리를 살아있는 민비의 미스터리로 전환시킨 것이 큰 열쇠인 양 의기양양 했겠지만, 그것만으론 황금을 향해 폭주하던 스토리를 진화시키기엔 역부족인 듯 싶다. 그것이 애초에 없을 거란 이상의 대사를 복선으로 깔았다 해도 말이다. 한 시간 안에 이상의 활약상에 집중하다 보니, 결국 스토리의 개연성을 깍아먹은 결과가 되버린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의식 가득한 조선의 지식인 이상의 캐릭터를 텔레비젼을 통해 만나는 건 즐거웠다. 어설픈 사건의 전개, 황당무개한 추격전에도 불구하고, 이상이란 인물을 다음에 또 만나고 싶으니까. 마치 어설픈 소극장 무대의 풋풋한 작품을 만나듯, 잔뜩 의욕이 앞선 이상의 탐정물은 그 실험 정신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뭐 이런 어리숙한 맛이 드라마 페스티벌의 강점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하는 드라마들이 뭐 그렇게 개연성이 있는 것도 아니잖는가. 


by meditator 2013. 11. 29. 09:59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촌의 한 소년이 발레리노가 되어,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11월 26일 방영된, <감자별2013QR3(이하 감자별)>에서, 여주인공 나진아 역시,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처럼 무대 중앙을 향해 드높게 도약하며 시트콤은 끝이 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3년의 나진아는 자신의 꿈을 이룬 발레리노가 아니다. 클럽으로 간 21세기의 '빌리 엘리어트' 나진아는 그래서 더 애잔하다.



대처 영국 총리의 죽음이 알려지자, 영국 탄광 노조는 '대처의 자유주의 시장의 상징이었지만, 그 이익을 취한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며 혹독한 부고의 성명을 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처의 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이 바로 영국의 탄광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바로 그런 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대량 감원과 사업 축소가 휩쓸고 간 영국의 탄광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빌리는 바로 그 마을에서 노조 일을 맡고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시피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산업 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영국의 석탄 산업이다. 바로 그 석탄 산업이 자유주의란 미명 하에 정리 대상이 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없는 나진아의 아버지는 삽자루를 타고 놀던 시절의 아이디어를 살려 (주)콩콩의 오늘을 만든 견인차 역할을 한 사람이다. 하지만, 역시 나진아의 아버지 역시 토사구팽의 처지다. 먹고 살 걱정없이 해주겠다는 장담은 겨우 1년에 쌀 한 푸대요, 길거리에 나앉게 된 나진아와 그의 엄마에게 베풀어준 온정이란게, 냉기가 도는 차고요, 노수동네 집의 가정부 몫이다. 

빌리의 아버지이건, 나진아의 아버지이건, 영국과 한국이라는 국적을 달리하건, 상관없이, 그들의 청춘과 아이디어와 노동을 곳감 빼먹듯 한 후에,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처분은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그들의 자녀들은 가난을 대물림한다. 

(사진; 스포츠 경향)

빌리는 남자라면 축구와 권투만이 최고인 마을에서 발레에 매료되어 아버지의 원망을 산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결국 배신으로 남은 아버지와 같은 '블루 칼라'가 아닌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빌리는, 그런 아버지의 소망은 애저녁에 제껴버리고, 거기서 한 술 더 떠, '게이'라 오해받기 십상인 발레를 택했다. 당연히 아버지는 반대를 한다. 때리기도 하고, 가두기도 하고, 하지만 빌리의 소망을 꺽을 수 없다. 결국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원론에 충실한 영화는, 자식을 위해 노조원들에게 등을 돌리는 아버지를 그린다. 그리고 결국 아들이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던 아버지의 소망은 성공을 거둔다.

나진아 역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진 무대를 향해 도발적 표정을 짓고 달려나간다. 하지만, 나진아는 빌리처럼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섹시 댄스 대회 상금을 위해 나진아는 영화 속 빌리와 같은 혹독한 댄스 수업에 불철주야 충실한다. <감자별>은 빌리 엘리어트을 빌어오되, 빌리가 꿈을 향해 매진하는 상황을 섹시 댄스 대회 출전이라는 상황으로 비틈으로써, 21세기 청춘의 고달픔을 극대화시킨다. 

누구하나 돌보아주지 않는 가정 환경에, 열악한 탄광촌이라는 배경 속에서 그래도 빌리는 '발레'라는 자신의 꿈을 키운다. 그래도 그 무능력해 보이던 아버지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 가면서 아들의 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하지만 나진아에겐 그런 아버지가 없다. 노수동네 가정부로 들어간 어머니는 '은혜'를 빙자한 노수동네 식구들의 '홀대'를 감수하기도 바쁘다. 하루 아침에 노수동네 아들이 되어버린 홍버그, 준혁이도 아버지가 준 '골드카드'로 나진아에게 꽃등심을 살 정도가 되었는데, 나진아에겐 그저 얻어먹으며 민망해 할 자유만이 있다. 자신의 꿈은 아버지같은 멋진 아이디어를 내서 (주)콩콩의 일원이 되겠다는 것이지만, 현실은 회사가 '인턴'이란 이름으로 그의 노동을 날로 먹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진아가 비상할 수 있는 곳은,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클럽 섹시 댄스 대회이다. 그저 돈 300만원을 잡기 위해 날아오른다. 바로 2013 대한민국 청춘의 현실이다. 




by meditator 2013. 11. 27. 09:46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남편/문정희


11월25일 <네이웃의 아내> 중 채송하(염정아 분)는 친구 지영이 들려주는 문정희 시인의 남편이라는 시를 듣다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만다. [남편]이라는 시 속에서 문정희 시인은, 자신에게 이제는 남자같지도 않은, 자신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편에게 그래도 여전히 밥을 해서 나누어 먹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채송하는 그 남편과 더 이상 함께 마주앉아 밥을 먹지 않기를 결심한 터이다. 


누가 보건 말건 밖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민상식(정준호 분)과 호텔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채송하, 그런 그녀의 집에서는, 그녀의 남편 안선규(김유석 분)와 홍경주(신은경 분)가 다정히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다. 

분명 채송하와 안선규가, 그리고 민상식과 홍경주가 공식적 부부사이인데, <네 이웃의 아내>에서 사랑의 작대기는 어긋나버렸다. 드러난 사실로만 보면, 이건 뭐 암묵적 스와핑 방조 드라마인가 싶게,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하지만, <네 이웃의 아내>를 꾸준히 지켜 본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에 섣부르게 '막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중년의 권태와 외로움에 대한 보고서에 가까운 드라마라 할 수 있다. 


마흔을 공자는 '불혹(不惑)'이라고 하셨다. 세상사 그 어느 것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2013년 대한민국의 마흔은 어떨까? 팔십을 넘는 나이가 평균 수명이 되는 세상에 마흔은, 삶의 한 가운데, 아직 한참 피가 뜨거운 나이다. 세상의 유혹에 눈감기에는 너무 팔팔하다. 하지만, 일찌기 이십대에 한 결혼은 한 고비를 넘겨, '권태'라는 수식어가 붙어 나른해져만 간다. 아내는 더 이상 여자 같지 않아, 함께 잠자리를 할 수 없게 되고, 남편은 그저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동거인일뿐, 아버지와 오빠의 중간 정도의 애매모호한 존재가 되었다. 시인의 시에서처럼, 제일 먼저 의논하고 싶은 사이라도 되면 다행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부부에게 서로는 가장 가깝워야 하는 강박은 가지지만, 기실은 가장 먼, 그래서 가장 상대방을 외롭게 하는 존재라는 걸 드라마는 그려내고 있다. 채송하는 말한다. '외롭지 않으려고 결혼을 했는데, 왜 점점 더 외롭니?'라고.


(사진; 서울경제 신문)


그래서 그 외로운 사십대의 중년에게 '미혹(迷惑)'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늘상 홀로 가부장의 자리를 버텨온 민상식에게는 당당한 커리어 우먼 채송하가 다가왔다. 그런가 하면 채송하 역시 마찬가지다. 강직함을 무기로 경제적으로는 무능한 남편 안선규 대신, 책임감있는 민상식이 듬직해 보였다. 이 커플에게 사랑은, 그들의 삶에서 채워지지못했던 그 무엇이었다. 

반면, 안선규와 홍경주 커플에게는 '첫사랑'이란 로망의 완성이다. 아내로 인해 완성되지 못했던 첫사랑, 채송하로 인해 빼앗겨버린 첫사랑에, 두 사람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다. 물론 첫사랑이라고 하지만, 두 사람 역시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 결코 채워질 수 없었던 그 무엇을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대신 적어넣고 있는 중이다. 


결혼이란 게 특정한 사람과 또 다른 특정한 사람의 만남이니만큼, 처음엔 특정한 누군가 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나를 매료시켜 그와 '백년가약'을 맺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 보면, 그 '매력'이 가장 증오할 대상이 되어버리곤 한다. 더구나, '사랑'을 전제로 한 부부라는 제도는 오히려 그 사랑이 짐이 되어, 사랑을 해야 한다는 명제에 매달려, 서로를 할퀴고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응답하라 1994> 6회에서 나정의 어머니(이일화>는 생리가 끊긴 걸 페경인 줄 알고 우울증에 빠져든다. 그걸 눈치 챈 아버지(성동일 분)가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에게 다가간다. 그런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인제 내는 여자도 아니다. 괘안나?'라고 묻고, 그런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다정하게, '임자, 그러면 이제 의리로 살면되네.'라고 대답해 준다.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 섭섭하지 않냐라는 질문에, 의리로 살면 된다는 질문은 생각하기에 따라 여전히 외양은 여자인 어머니에겐 섭섭할 수도 있는 대답이다. 하지만, 자식 하나를 먼저 보내고서도 여전히 금술이 좋은 나정이 부모님에게는, 그 말이 동문서답이 아니라, '아'하면 '어'하는 선문답같은 거였다. 

하지만, <네 이웃의 아내>의 부부에겐, 그 '아'하면 '어'할 수 있는 교감이 빠져있다. 오회려, '아'하면 '왜?'할 정도로 서로가 , 서로에게 날카로워져 있을 뿐이다. 각자, 자신이 지고 있는 나이의 무게에 눌려 상대방을 보지 못한다. 홀로 외로워 하는 네 사람을 보면,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우정'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네 사람은, 응답하라의 나정이 부모님이 세월로 채워왔던 '의리' 대신에, 지금의 헛헛함을 새로운 '사랑'에서 구한다. 응답하라 나정이 부모님의 해결 방식이 구세대의 그것이라면, <네 이웃의 아내>의 도발은, 2013년, 부부이지만 외로운 중년의 부부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십 여년을 살아, 이제는, 덤덤해지다 못해, 원수같은, 당신의 부부 관계를 어쩌시렵니까? 그 허함을 첫사랑으로 달래보시렵니까? 내 파트너가 갖지 못한 그 무엇을 가진 새로운 사랑으로 달래보시렵니까? 라고. 

문정희 시인이 돌아본 남편은, 그래도 내 아이들을 가장 사랑하는 이였다. 2013년 위기의 중년 부부들 갈라진 틈을 메우고 여전한 아이들의 부모로써 남을  수 있을까? 

by meditator 2013. 11. 26. 21:04

지난 주까지 2주에 걸려 방영된 <최후의 권력>이 인류 최초이자, 최후의 완벽한 권력의 형태로 인정받고 있는 원시공동체의 '빅맨'을 반면교사로 삼아, 실제 정치인들의 '빅맨'실험을 해보았다면, 11월24일 5부작 <최후의 권력>은 세 번 째 시간으로 현대까지 유지되고 있는 왕권제도의 존재 이유를 통해 권력의 또 다른 존재 이유를 살펴본다. 


<3부 왕과 나>에 등장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왕권 국가에는 브루나이와, 스와질랜드, 그리고 부탄이 있다. 

카메라는 스와질랜드에서 벌어지는 '갈대축제'를 집중 조명한다. 스와질랜드 전국에서 성년이 된 여자들이 모여 왕의 여자로 간택받기 위해 반나의 모양새로 춤을 추며 벌이는 '갈대 축제'가 21세기에도 여전히 벌어지는 것을 두고 이견이 분분하다. 그에 반대하는 혹자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왕의 여자 간택 과정을 매년 수행한다는 과정 자체가 전근대적이며 여성 비하적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에 반해 찬성하는 측은, 만약 그 과정에서 진짜로 왕비가 간택되었다면 지금까지 왕의 왕비만 40~50명에 이르렀을 것이라며, 그것은 그저 성년에 들어선 여성들의 성인식 같은 통과의례이자, 전통 축제라고 선을 긋는다. 이런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되는 가운데, 젊은 여성들은 그 며칠 동안 축제 분위기에 들떠 흥겨워하며, 왕을 실제 만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에게 행운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들떠있는다. 

(사진; 스와질랜드 국왕, 스포츠 월드)

하지만 13번 째 왕비가 뽑힌 이후로, 축제는 그저 축제일 뿐이었다. 사실 13번째의 결혼도 기실 알고보면 축제를 통한 간택이 아니었고, 우리가 역사를 통해 보아왔던 왕권 제도의 결혼들처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약한 왕권을 다지기 위한 정치적 제휴의 한 형태일 뿐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스와질랜드에서 '갈대 축제'를 둘러싼 논란의 본질은, 왕의 여자가 간택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국민 소득과, 에이즈 세계 1위라는 치명적인 삶의 조건의 문제다. 그런 현실 속에서 여전히 희희락락 축제나 벌이고 있을 때냐는 반문이 축제를 반대하는 측 목소리의 본질이다. 

스와질랜드와 같은 처지에 놓인 왕권 국가가 또 있다. 바로 희말라야 산속의 이상향 부탄이다. 가난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삶의 만족도 1위인 국가 부탄도 여전히 6대째 왕권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나라 역시 지표상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과 상관없이 국민들의 가난을 구제하지 못하는 문제가 왕권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스와질랜드와 부탄은 왕이 스스로 근대적 의회제도를 도입하는데 앞장을 선다고 다큐는 설명한다. 스와질랜드에는 군주제와 투표제도를 결합한 독특한 정치 시스템 틴쿤들라(Tinkhundla)가 있다. 총 95명의 상하원 의원 중, 30명은 왕이 임명하고 65명은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 ‘군주 민주주의’라고 설명되는 이 시스템을 통해, 국왕은 민의를 반영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의회에 행사한다. 부탄의 4대 국왕 지그메 싱예 왕추크가 시작했고 그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정체의 변화를 꾀한 5대 국왕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추크. 백성은 파도와 같고, 왕은 그 파도 위에 띄워진 배와 같기에 백성을 따르기 위해, 왕은 앞장서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최후의 권력>이라는 프로그램의 관점에 대해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미 역사를 통해 누누히 학습해 왔듯이, 권력을 가진 자가, 스스로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나누어 주는 경우가 있었던가? <최후의 권력>은 왕이 앞장서 근대적 의회제도를 도입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21세기에도 여전한 전근대적인 제도를 고집하는 정치 제도의 퇴행에 불만을 느낀 국민들의 움직임에 불안을 감지한 국왕이, 그런 제도의 도입을 통해,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고자 한 타협의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징후는 스와질랜드와 부탄과 함께 조명된 브루나이 왕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강고한 왕권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브로나이는, 왕의 재산으로 된 오일머니를 국민 복지에 쏟아부음으로써, 서유럽 어느 국가 못지않은 복지국가의 면모를 보인다. 자식이 열 댓 명이 넘어도 브로나이 사람들은 걱정이 없다. 나라에서 다 해결해 주니까. 반면, 가난에 시달리고 에이즈에 시달리는 스와질랜드와, 행복하다고는 하지만 가난은 구제하지 못하는 부탄은 왕이 앞장서 근대적 정치 제도와의 제휴를 실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 브루나이 술탄 하사날 볼키아; 스포츠월드)

하지만, 그것마저도 인터뷰에 등장한 스와질랜드 국회의장이 국왕 형이라는 사실로 볼 때, 과연 왕에 의한 근대적 정치 제도가 프로그램 중에 등장한 스와질랜드 국민들의 희망처럼 제대로 된 정치를 구현해 낼까 역시 미지수다. 

즉 21세기로 오면서, 세상의 권력은 그 주체가 왕의 권력의 유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듯이, 1인 왕권에서, 다수의 '백성'의 품으로 그 주체가 바뀌어 갔던 것이다. 그런 역사적 흐름을 브로나이는 오일 머니를 통한 복지를 통해 변형시켜 가지만, 그것마저 할 수 없는 스와질랜드와 부탄은 왕이 앞서, 근대적 형태의 민주주의를 이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결코 왕의 '은덕'이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역사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도 여전한 '왕권'이라는 권력 형태를 조명해 보고자 하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관점이 '왕'에 머물러서는, 또 다른 나라의 '용비어천가'가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11. 25. 09:56

'서로 가까이에 인접하여 사는 집'을 이웃이라고 한다. 가족애가 우월한 우리나라 사람들이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웃을 '이웃 사촌'이라며 혈육만큼 진한 사이로 인증하고 있다. 하지만, '이웃 사촌'도 옛말이다. 간간히 뉴스에 등장하는 '주차 문제'나 '층간 소음 문제'로 인한 시시비비 혹은 심지어 살인까지도 초래하는 사건들은 '이웃사촌'이라는 단어가 무색해 지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허긴 가까운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세상이다. 그렇게 변화된 의미(?)의 '이웃 사촌'의 세상에서, kbs2의 <인간의 조건>은 '이웃의 도움으로만 살기'라는 난해한 미션에 도전했다. 


그간 주어진 <인간의 조건>의 미션들이 그 어느 것하나 호락호락한 것이 없었지만, '이웃의 도움으로만 살기'라는 미션이 더더욱 난감해 보였던 것은 바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곤란함에 있다. '핸드폰, 텔레비젼, 컴퓨터 없이 살기'나 '쓰레기 버리지 않기' 같은 것은 나 하나 잘 하면 되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친구'를 찾고, 돈없이 사는 데 필요한 '물물교환'을 위해 측근 누군가를 찾거나, 간혹 이웃의 도움을 받는 정도였다. 그런데 온전히 이웃의 도움으로만 6일을 살아야 한다니! 그것도 '요즘'같은 세상에!

여섯 멤버들에게 주어진 미션이 더더욱 난제인 이유는 그들이 미션 때마다 이용해 왔던 연남동 게스트 하우스 때문이기도 하다. 그간 미션 과정 중에 가장 많이 이용했던 연남동 게스트 하우스는 그만큼 촬영으로 인한 이웃들의 피해 정도가 가장 심한 곳이었다. 촬영이라는게, 그저 출연자들만이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을 촬영하기 위한 스텝에, 출연자 개인 스텝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대공사(?) 이다 보니,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자리잡은 연남동 게스트 하우스가 그간 촬영으로 인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번잡했으며, 그로 인해 주민들의 피해가 작심했을 것이며 그로 인한 주변 이웃의 불만도 종종 표출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진; tv리포트)

그런 난감한 상황을 제작진은 역설적으로 활용한다. 그저 주변 이웃에게 입에 발린 사과 몇 마디를 전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조건>의 미션으로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를 제시한 것이다. 
왜 이 미션이 기발한 것인가는 3주에 걸쳐진 미션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으로 설명된다. 당장 한 끼조차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 <인간의 조건> 멤버들은 어쩔 수 없이 연남동 동네 속으로 들어간다. 다짜고짜 이웃집의 문을 두드려 아침 밥을 구하고, 집에 남은 멤버들을 위한 음식 적선을 부탁한다. 거기서 조금 더 진화하면 체계적인 끼니 구하기에 돌입한다. 동네 문화센터에 들러 거기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문화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이웃들 얼굴을 익혀가며 먹거리를 구하거나, 그곳 직원들의 식사에 숟가락을 얹는 식이다. 한 발 , 한 발 연남동 동네 주민의 삶 속으로 <인간의 조건> 멤버들이 스며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뜨네기 연예인들이, 야곰야곰 들어와 동네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말 신기한 것은,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들어와 밥을 적선하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끼니를 나누어주는 이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이 먹는 밥상에 수저 한 벌을 더 얹어 식사를 함께 하고, 곳간을 열어 가진 음식을 나누어 주고, 심지어 깨질지도 모를 그릇까지 선뜻 빌려주는 이웃이 여전히 서울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을 여섯 멤버들은 알아간다. 물론 연예인이라는 친근감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집 문을 열어 무언가를 나누어 주는 스스럼없는 행동을 하는 '이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 미션은 일정 정도 성과를 얻은 것이라 보여졌다. 가까운 사람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따뜻했다. 여섯 멤버가 6일을 이웃의 덕분으로 살아갈 만큼. 

물론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가 그저 이웃집에 숟가락 하나 얹는 미션이 아닌 만큼 여섯 멤버들은 이웃에게 받은 도움을 갚아나간다. 밤늦은 시간 집에 돌아오는 여성들과 함께 늦은 밤길을 걸어주기도 하고, 홀로 사시는 할머니를 위해 도시락 배달에 나서기도 한다. 그저 밤늦은 시간에도 시끌벅적한 촬영을 견뎌준 이웃에게 '떡 한 덩이'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고 벌였던 행사를 결국 연남동 동네 잔치까지로 확장하여 멤버들의 감사는 진화한다. 40여년을 한 곳에서 살아온 분들이 계신 곳이지만, 이제는 얼굴을 아는 이웃보다 그렇지 않은 이웃이 더 많은 곳이 된 연남동에서 동네 잔치를 통해 주민들은 이제는 서로 거기를 지나다 인사라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간다. 그저 동네에서 자주 민폐를 끼치던 연예인들이었던 <인간의 조건> 멤버들도 이제는 떠나는게 아쉬운 동네 주민이 되었고. 이웃에게 끼치던 폐를 갚기 위해 시작한 미션이었지만, 지금까지 미션 중 '자각'과 '계몽'을 넘어선  '뿌듯한' 결과물이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성과을 얻어냈다. 

물론 아쉬운 점도 남는다. 연남돈 주민 잔치와 함께 병행하여 보여졌던 박성호가 벌였던 구미시 동네 잔치는 상대적인 초라함의 기억만으로 남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 동안 연남동 주민들 사이에 스며들어 차곡차곡 관계가 쌓여진 행사와 그렇지 않은 행사는 다를 수 밖에 없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차라리,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 지방판으로 속편의 형식으로 기획했다면 더 좋았을 부분이다. 

또한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의 과정이 연남동 주민들과의 관계 설정에 치중한 부분도 아쉽다. 그간 <인간의 조건>이 매 미션마다 그 미션에 어울리는 공공부분의 견학을 했던 분량이 꼭 들어갔었는데, 이번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 미션에서도 실제 마을 공동체를 잘 꾸려내고 있는 '성미산 공동체 마을'이나 실제 <다큐3일>을 통해 방영된 '산새마을'같은 곳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아예 '성미산 마을 공동체'같은 경우는 '공동체로 살아보기'란 미션으로 권장해 보고 싶다. 

멤버간 대화에서도 등장했듯이 파일럿으로 잠깐 방영된 <인간의 조건> 여성편이 기대 이상의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결국 남성판 <인간의 조건>의 숙제로 남는다. 이제 멤버별 개성이 충분히 알려진 상황에서, 결국 미션 별로 진행되는 <인간의 조건>이 계속 승승장구할수 있는 방향은, 탁월한 기획력 밖에 없을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웃에게 끼쳤던 민폐를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란 미션을 통해 연남동 동네 잔치로 승화시킨 이번 미션은 성공적이다. 더더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다시 멤버 개인으로 돌아가 자신이 실제 사는 곳의 이웃을 방문하는 후일담까지 곁들인 마무리는 '화룡점정'이었달까.


by meditator 2013. 11. 24. 10:57

<웃음을 찾는 사람들2(이하 웃찾사)> 의 한 코너 '굿닥터' 중에서,

연애 상담을 하려고 찾아온 남녀, 여자는 매사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남자에게 짜증을 낸다. 남자; 알았어, 알았어, 담배 끊을게
여자; 그래? 그러면 대신 사탕 먹어
남자; 사탕? 무슨 맛 먹을까?
주원 선생; 안됩니다. 안됩니다. 사탕은 안됩니다. (목소리가 바뀌며)사탕보다 달콤한 네가 필요해~
여자와 간호사, 동시에 격렬하게 환호하며 주원 선생에게 매달린다. 

(사진; tv리포트)

이 코너의 상황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여자와 남자는 동일하게 한국말을 사용하지만, 여자가 쓰는 한구말에는 통역이 필요하다는 것과,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이 쓰는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웃찾사>의 또 다른 코너, '내남자'는 남자들의 상황을 개그로 풀어낸다. 등장한 네 명의 남자들은 몸이 아프다며 누워있다. 친구가 만나자고 놀러 나가자고 해도 다 귀찮단다. 그러던 남자들이,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는 소리에, 그 여자가 혼자 산다는 소리에, 벌떡벌떡 일어선다. 여기서 남자들은 오로지 '여자'와 그 여자와의 스킨쉽 등 맹목적인 메뉴얼에만 반응하는 외계에서 온 독특한 생명체이다. 

굳이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찾아보지 않아도 요즘 텔레비젼을 틀면 이렇게 서로 다른 별에서 사는 외계인같은 여자와 남자에 대한 담론들이 차고 넘친다. 개그 프로그램이라면 한 코너 이상은 여자와 남자의 다름에 대한 것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다. jtbc의 <마녀 사냥>은 아예 프로그램 내내 서로 다른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을 이루어 가는가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벌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마녀 사냥>을 비롯한 프로그램들의 목적이 서로 다른 여자와 남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일 터인데, 보고 있노라면 여자나 남자를 이해하게 되기 보다는, 공부해도 늘지 않는 외국어처럼, 점점 요지경 속에 빠져버리는 느낌이다. 매주 나오는 다양한 사례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여자와 남자는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라고 소리를 높인다. 과연 이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종족을 하나의 인간종에 묶어도 될까 라는 회의가 들 정도로. 

게다가 이해를 돕는다는 전제를 깔며, 오히려 차이를 부각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위에 제시한 예처럼, <마녀 사냥>의 패널들은 친절하게, 자기 여자 친구의 속마음을 몰라 우물쭈물하는 남자 상담자에게, 여성의 그런 반응은 이런 것이라면 친절하게 해석을 해준다. 그런데 그 해설이 더 오묘하다. 사탕을 주겠다는 여성의 속마음이 사실은 네가 더 달콤해 라는 대답을 원한다는 걸 이해할 남성이 몇이나 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녀 사냥>이든, <웃찾사>나, <개그 콘서트>의 몇몇 코너들에서 등장하는 남녀의 모습이 점점 더 전형화되어간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웃찾사>의 '내남자'들처럼 앉으나 서나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여자들은 호시탐탐 밀땅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난. 

'여성학'의 입문 과정에 전제로 깔리는 것이 있다. 실제 조사를 해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여성과 남성 간의 차이보다, 동성간, 즉 여성이면 여성, 남성이면 남성 간의 차이의 편차가 훨씬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방송 속 여성과 남성은 전형적이다. 최근, 저런 식으로 여성과 남성의 심리를 소재로 삼는 프로그램들은 더더욱 그런 경향이 강하게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마녀 사냥>의 경우,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기는 하기만, 거개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식이다. 

(사진; osen)

아마도, 차이가 더욱 부각되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과정의 맹목성에 있겠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이라는 동질의 감정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맹목적 열정이, 여자와 남자의 다름, 아니 기본적으로는 성의 차이가 아니라, 나고 자라나고 교육받아온 과정 속에서 빚어지는 인간적 차이를 고까워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 텔레비젼 속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들은, 지구별에서 함께 살아가야하는 인간의 다름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서로 다른 외계의 자기 별에만 머무르려는 이방인의 관점만을 부각시키는 듯하다. 그래서 보면볼수록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낯설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마치 수능 문제집을 더 많이 푼 학생이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따르듯, 남녀의 심리에 천착하게 된다. 

논어에 나오는 대표적 이념이 바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이 자구에 대해 신영복 선생은 다름을 인정하며 화합한다는 것으로 해석하신다. 그 말에 반대말이 동이불화(同而不和)이다. 남녀 관계도 결국 인간 관계다. 사실 가장 문제는 서로 다른 외계별에 살았던 과거가 아니다. 이제는 지구별에서 함께 사랑을 꾸려가야할 현재인 것이다. 다른 별의 언어는 제 아무리 독해를 해도, 외계어일 뿐이다. 그런데 남녀의 심리를 다루는 프로그램들은 시시콜콜 그 다른 외계어를 독해해주는데 골몰한다. 제 아무리 많은 문제집을 풀어도, 그것을 관통하는 원리를 꿰지 못하면, 조금만 틀어놓은 문제가 나오면 틀리는 건 당연지사다. 아니, 애초에 남녀관계가 서로 문제를 내주고 풀어보라는 식이어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 


by meditator 2013. 11. 23. 10:06

정말 이상한 논리같겠지만, '꽃보다 남자'까지는 참겠는데, 왠지 그 말 자체부터 '예쁜 남자'는 견디기가 힘들다.

'꽃보다 남자'는 언어적 유희로 볼 때 '비교법'이자, '상징법'이다. 즉 여성들이 가장 좋아할 대상인 꽃보다도 '남자'가 더 좋다는 직접적 표현이자, 남자가 꽃보다도 아름답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에 반해, '예쁜 남자'는 어디 상상의 나래를 펼 여지도 없이 다짜고짜 남자가 이쁘단다. 이쁜 거야, 꽃도 이쁘고, 남자도 이쁠 수 있지만, 꽃보다 남자라고 하는 거랑, 그냥 남자가 이쁘다고 하는 거랑은, 그 말이 전달되는 당사자에게 닿는 느낌이 천양지차다. 물론 처음 '꽃보다 남자'라는 단어가 등장했을 때도, 남자가 꽃보다 낫다니 하며 면구스러웠지만, 이쁜 남자 쯤되면, 그 어떤 상상도 닫아버린 그 직설적 표현에 선제 공격을 당한 듯 움칠하게 된다. 즉 꽃보다 남자가 그래, 남자가 꽃보다 어떻다고? 하며 도전해 볼 여지가 있다면, 이쁜 남자는 듣는 즉시, 내가 그 편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노선을 정해야 할 것만 같다. 그렇게 드라마 <이쁜 남자>는 드라마를 보기도 전에, 궁금증을 유발하기 보다는 '선험적 정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기를 강요한다. 이쁘다는 남자를 볼 것인지, 말 것인지.

드라마 <이쁜 남자>도 마찬가지다. 대번에 주인공 독고마테(장근석 분)의 아름다움과, 그에게 반한 여자들을 나열한다. 부동산 재벌 잭희도, 여주인공인 김보통도, 그리고 독고마테가 가는 곳이 버스든 어디든 모든 곳의 여자들은 그에게 반한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대놓고 아름다운 남자들을 들이대며, 호객 행위를 하는 방식은, 사실 이미 <꽃보다 남자>을 통해 증명된 방식이다. 왜 <꽃보다 남자>가 꽃같은 남자를 네 명이나 내세웠을까? 마찬가지로 <이쁜 남자>와 동시간대 방영되는 <상속자들>이 그들의 사연을 제대로 엮어주지도 못하면서 각 드라마에서 내로라 하던 꽃미남들을 긁어 모았는가 말이다. 말 그대로 취향대로 골라 감상하시라다. 그래서 늘 꽃미남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둘러싸고 치열한 지분 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물론, 독고마테를 연기하는 장근석은 이제 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연기도 제법 한다. 하지만, 인간의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물론 여전히 미스코리아도 뽑고, 미스 유니버스도 뽑지만, 길을 걷는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다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장근석은 아름답지만, 드라마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장근석을 아름답다고 동의하기는 힘들다. 그러기에, <이쁜 남자>의 오프닝은 장근석이 이쁘다고 동의하는 사람만 모여라~ 하는 듯하다. 물론 2회 말미 이장우가 합세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는 다수의 여성들을 홀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뭐 그래도 장근석이 이쁘다고 동의한다고 치자. 그가 가는 곳이면 여자들을 홀리고 다닌다는 설정도 그렇다고 치자 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스토리가 발목을 잡는다. 동생이랑 악을 빾빽쓰며 싸워대는 주인공 아가씨가 고등학생인가 했더니, 대학도 졸업한 백수란다. 그런데, 이 보통이 아가씨 첫 눈에 독고 마테를 보고 반했던 고등학교 시절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백수처럼 지내다가 마테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쏜살같이 달려간다. 자기가 마테 오빠를 지키는 슈퍼 우먼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껏 하는 일이 오빠 창고에 쌓인 양말을 내다, 이상한 마네킹 다리를 어깨에 걸고 세 개 천 원씩에 파는 식이다. 남자 주인공이 한심하면, 여자 주인공이라도 좀 인간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저 귀엽게 생긴 걸루 봐주기에는 하는 짓이 역시나 한심하다. 

1회 말미, 홀로 투병을 해오던 마테의 어머니는 결국 마테에게 '암호'도 알려주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불현듯 나타난 유라(한채영 분)는 마테가 MG그룹의 서자란다. 그 사연을 들은 마테는 당연히 MG 그룹을 찾아가지만, 나홍란(김보연 분)에게 수모만 당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복수를 꿈꾼다. 그때 다시 유라는 복수의 칼을 갈기 위해 여자들을 잘 이용하라고 충고한다. 부동산 재벌 잭희를 통해 부자가 되는 수업을 받으라는 식이다. 
헷갈린다. 과연 이 드라마에서 마테가 지닌 출생의 비밀이 본류인가, 아니면, 그 조차도, 마테가 여자들과 어울리는 스토리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인가? 즉 본격 '제비'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드라마 사상 최초로 출생의 비밀을 이용한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냥 대놓고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는 이야기로 이어가기 민망하니까, 어거지로다가, 같다 붙인 게 MG그룹의 서자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오빠에게 민폐를 끼쳤다며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다 들고 나와 좌파을 꾸린 보통이가 우연히 최다비드(이장우 분)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개연성없어 보이는 것이다. 

<이쁜 남자>는 정말 참 만화같다. 하지만, 진지한 듯 하다가, 어느새 보면 찌질해져 버리는 주인공들 캐릭터는 딱 만화의 그것이고, 얼토당토않은 스토리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만화도 종류가 있다. 만화 같다고 해서, 만화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만화같은 드라마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쁜 남자>가 그 전략을 차용하고 있는 <꽃보다 남자>에서 정작 주인공들은 더할 나위없이 진지했다. 이른바 '병맛'코드는 찾아볼 수 없다. 종종 '병맛'코드가 등장하는 그 인기있다는 '원피스'조차, 그 병맛을 참아넘길 만큼, '해적왕이 될꺼야'라는 허무맹랑한 희망을 지지하게끔 만드는 설득력있는 논리적 전개가 있다. 그런데, <이쁜 남자>에서는 장근석이 이쁘고, 아이유가 귀여운 것을 넘어 선 그 어떤 것들을 찾아내기 힘들다. 진지한 듯 하다가 찌질해지다가도, 그들의 이야기에 설득당해 넘어가 줄 그 무언가가 없다. 

1,2회 <이쁜 남자>를 보며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일렉 선녀가 등장했던 부분이다. 전기가 흐르는 막대를 부딛치며 전기를 발생시키며 뒤에 수많은 원숭이들이 울부짖는 장면은 그 예전 <얼렁뚱땅 흥신소>를 연상시키는 괴기스러운 '병맛'의 최고봉이었다. 그 밖에도 소소하게 만화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장면들은 더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스크롤을 내리고 끝내 버리는, 혹은 뒤적이다 덮어버리면 그만인 웹툰이나 만화가 아니다. 드라마가 십여부작을 넘는 동안 시청자들을 사로잡아 두기 위해서는 순간 반짝이는 매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by meditator 2013. 11. 22. 10:27

국가적 차원의 중차대한 시책이라고만 생각되었던 인공위성을 한 개인이, 그것도 티셔츠를 팔고 모금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출까지 해서 우주로 띄웠던 송호준은 물론 그 이전에도 화제를 몰고 다녔지만 <라디오 스타>에 나온 후 그의 행보가 대중적으로 보다 더 각인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에 고무된 <라디오 스타> 제작진은 송호준에 이어, 로봇을 만드는 한재권 박사를 게스트로 초빙하였다. 이로써, 그저 해프닝이었던 인공위성을 만드는 송호준은, 로봇을 만드는 한재권으로 이어지면서, 그저 연예인들만이 출연해왔던 <라디오 스타>에 신선한 모색으로 자리잡고 있다. 11월 20일 방송의 주제가 '중독'이었던 것처럼, 누가 개그맨이고, 가수이고가 아니라, 다종다양한 레고 조립 장난감과, 피규어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거기서 시작해 이제는 로봇을 만들 게 된 사람이라는 동질성을 부각시켰다. 물론 방송 초반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아끼는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호빵맨 피규어를 출연시켜 의기양양했던 김신영이, 한재권 박사가 데리고나온 로봇 군단의 '빠빠빠' 율동과, 재난구조 시범을 보면서 기가 죽기는 했지만, 정작 시청자 입장에선 그게 무안하다기 보다는, 저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로봇까지 만들게 되는구나라는 공감대를 충분히 느끼도록 했다. 
이미 <라디오 스타>를 비롯하여 다수의 집단 게스트 토크쇼가 범람하고, 게스트들간의 중복 출연이 불가피해지면서, 신선한 기획의 주제조차도 점점 그저 또 그 사람이 나와 돌려막기 식의 토크의 재연이 되는 경우가 많아, 이제는 한계에 봉착한 듯한 상황에서, 연예인과 일반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그 무엇을 가지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신선했다. 

(사진; tv리포트)

하지만, 그 신선한 모색을 담아내는 내용조차 신선한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번 송호준의 출연에서도 그가 인공위성을 쏘아올림으로써, '지식과 정보의 공개'라는 화두를 실천하고자 했던 송호준을 동대문 티셔츠 장사로 폄하하며 우스개로 만드는 과정은 웃자고 하는 방식이었음에도,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 들었었는데, 20일 방송분을 보면서, 그건 단지 송호준이 출연했던 회차가 아니라 최근 일련의 <라디오 스타>의 흐름의 경향성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엄밀하게 <라디오 스타>에서 '본말이 전도된다'라는 문제 제기는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라디오 스타>는 출연했던 게스트가 하고자 하려고 했던 말보다는, 그가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끄집어 내는 것이 장기인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작가진의 '국정원'이 울고갈 정보력은 출연자조차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 당황시키곤 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틀에 박힌 언론 플레이를 넘어, 출연자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라디오 스타>가 과연 그럴까? 20일 방송에서 김신영과 케이윌이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조립식 장난감과 프라 모델을 들고 나왔을 때, mc들의 반응은 '웬 장난감이야'라는 식이었다. 심지어, 그것이 애써 어렵게 만든 것들이었는데도 함부로 덥석 덥석 만지다, 부숴뜨리고,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키덜트'라는 용어까지 등장했을 정도로 이제 어른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취미 생활이 된 것이 이젠 하등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라디오 스타>의 mc진은 한결같이 그들이 들고나온, 심지어 구하기 힘든 한정판을 그저 한낱 장난감이려니 한다. 
그리고 그런 흐름은 김구라에 의해 주도된다. 그런데 그 방식이 익숙하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세바퀴>에서 하던 식이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그들의 세대에게 낯선 그 무엇을 보았을 때, 우선 '뭐야?'하면서 반응하며,  호시탐탐 '별 거도 아닌게' 하다가, 비싸거나, 대단한 것이며, '어, 그랬어?'하며 꼬리를 내리는 식이 고스란히 재연된다. 심지어, 지난 번에 나온 송호준을 한재권과 비교하기를 무람없이 해버린다. 마치 옆집이 우리집보다 넓은 평수에 사니, 더 행복한 집이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렇게 주도적으로 흐름을 끌고가버리는 김구라의 방식에 김국진은 물론, 윤종신도, 심지어 젊은 규현조차 어깃장을 놓지 못한다. 기껏해야 김구라가 실수를 해야, 말꼬리를 잡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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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wow한국 경제)

<라디오 스타>의 정신은 'b급 정신'이었다. 좀 모자르고, 찌질해 보여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라디오 스타>의 기획을 보면, 20일의 '중독'특집처럼 여전히 <라디오 스타>만의 b급 정신이 살아있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기획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라디오 스타>의 정신은 '속물 정신'의 한 색깔로만 칠해지고 있는 듯하다. 가진 것이 부족한 b급들이,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나은 그 무엇 앞에 한없이 약해지고 비겁해 지는 것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반응일 뿐이었다. 거기에 최고의 mc가 되기 전에 김구라가 일관되게 속물주의노선을 추구했다면, 거기에 어깃장을 놓는 누군가가 있었었다. 세상이 '자본'과 '주류'에 함락되어도, 여전히 자기 멋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게 <라디오 스타>였었다. 그러기에, 송호준의 인공위성 해프닝도, 다르파 로봇 챌린지에 출전하는 한재권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김구라는 mbc연예 대상을 노릴 만큼 mc계의 대세가 되었다. 윤종신도 이제는 자신의 소속 가수를 출연시키는 제작사 사장이다. 규현 역시 아이돌계의 대세다. 대세가 되어버린 그들의 눈에, 찌질한 b급들은 그저 찌질함으로만 규정된다. 그 예전에 함께 모자르고, 부족하던 시절, 하지만 각자 자신만의 자부심으로 가득찼던 그 시절의 느낌이 아니다. 대세가 되기 전의 김구라의 속물주의는 애잔하고 보호해 주고 싶었지만, 이제 비싼 시계를 찰 수 있는 김구라의 속물주의는 불편하다. 윤종신이 공감해주는 다양함에 어쩐지 힘이 빠진 듯하다. 예전에는 게스트들을 물어뜯고 흠집내도, 그것이 결국은 그들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그 무엇이 되곤 했었는데, 최근의 <라디오 스타>는 비범한 것조차 평범하고 속물적으로 만든다. 

아마도 예전의 (이제는 그 예전이 언제인가조차 까마득) <라디오 스타>였다면, 김신영과 케이윌의 취미들을 그저 장난감으로만 치부해 버리지는 않았을 듯하다. 조금더 그들이 '홀릭'한 그것들에 함께 심취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 등산 좀 가본 김구라가 등산 용품을 들고 나온 이봉원의 취미생활을 대하는 자세와, 김신영과 케이윌의 취미 생활을 대하는 자세에서 그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로봇이라는 존재감만으로 출연자를 제압시킨 한재권 박사의 경우를 차치하고, 애지중지한 자신의 소장품을 어렵게 들고나온 김신영과 케이윌이 20일의 방영분을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by meditator 2013. 11. 21. 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