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10월 28일 tvn에서 방영된 두 편의 드라마에는 연달아 '철거'가 등장했다. 

그 하나가 9시15분에 방영되는 <감자별2013QR3(이하 감자별)>이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그 다음 시간인 9시 59분에 방영되는 <빠스껫볼>이다. 드라마<빠스껫볼>의 시대 배경은 1930년대요, 시트콤<감자별>은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두 작품에서 모두 주인공, 그리고 그의 가족(그래봤자 엄마뿐이지만)은 '철거'를 당해 거리로 나앉는 신세가 된다. 근, 현대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은 '여전히 철거중'이다. 

<빠스껫볼>의 시대 배경은 일제시대다. 그런데 일제시대에도 철거라니! 
드라마는 주인공 강산이 사는 시대를 마치 '세밀화'처럼 묘사해간다. 그리고 그 묘사의 백미는 바로 강산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사는 움막촌이다. 그저 거적데기 하나 덮은 거 같은 비, 바람이나 겨우 피할 거 같은 움막촌이지만, 강산과 그의 어머니에겐,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가난뱅이들에겐 그곳이 삶의 보금자리이다. 
일본이 식민지의 토지 정리 사업을 전투적으로 벌이면서, 농촌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남부여대'로 그래도 굶어죽지는 않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서울로 밀려든다. 하지만 서울에서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빠스껫볼>에서 묘사된 그대로 허름한 움막촌이다. 그나마 그마저도 도시 개발을 시작한 일본인들과, 그들의 앞잡이에 의해 몽땅 철거되고 만다. 대한민국 철거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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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로등조차 나가 시커먼 골목을 매일 밤 무서워 벌벌 떨며 지나 산꼭대기에 있는 조그만 집은 나진아가 세 살 때부터 살던 집이다. 하지만,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소유였던 집은 전세가 되고, 월세가 되고, 이젠 그마저도 '철거 대상'이 되어 집을 비워줘야 한다. 갈 곳이 없는 나진아 모녀는 가지고 있던 세간 살이를 하나둘씩 팔며 결국은 팔아도 그 누구도 사갈 것 같지 않은 냉장고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마루에서 박스를 엎어놓고 식사를 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그나마도 호사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대한민국이 삐까뻔쩍하게 좋아졌다하는데, 여전히 가난한 모녀가 드리울 곳은 없다.  

일제 시대이건, 2013년이건 누군가에겐 감지덕지 삶을 깃들여 갈 소중한 보금자리가, 다른 누군가에겐 '환금성의 투기 대상'일 뿐이다. 그것은 수십년이 흐르고, 세기가 바뀌어도 그 어떤 것보다도 변함없는 대한민국의 진리이다. 그리고 tvn의 두 드라마는 단 두 시간만에 그 '철거사'를 요약한다. 

<빠스껫볼>에서 보여지듯이 폭력적 철거를 통한 원시적 자본 축적의 시작은 일제 시대이다. 일본인들에게 '영혼을 판' 친일 자본가들이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 거리의 주먹패들을 동원해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확 쓸어버린다. 당연히 저항이 따르지만, 몽둥이를 앞세운 그들의 앞에, 저항은 폭력을 낳을 뿐이다. 결국 <빠스껫볼>에서는 철거 과정에서 다친 노인이 강산의 죄책감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주인공 강산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게 된다. '그저 농구만 그만 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많은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드라마에서 '철거'는 주인공의 각성을 위한 유효한 도구이다. 
<황금의 제국>에서 철거민의 아들 장태주가 '황금'에 자신의 영혼을 팔게 된 계기는 바로 아버지가 분신 자살로 가게를 지키려고 했던 '철거'다. <스캔들>에서 강직한 하명근 형사 캐릭터를 설명해 낸 것도 협잡꾼이나 방관자가 되어버린 다른 경찰들과 달리 철거 현장에서도 흔들림없는 정의로움이었다. 

반대의 효과를 낳기도 한다. <스캔들>의 장태하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캐릭터라는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장치도 바로 철거 현장이다. 철거 용역들 조차 주춤거리는 철거민의 저항 앞에 장태하는 직접 포크레인을 밀고 들어감으로써 그가 어떤 '폭력적 과정'을 거쳐 재벌로 성장했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 낸다. <황금의 제국>의 장태주도 마찬가지다. 철거민의 아들이었던 그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맞닦뜨리는 건 또 다른 철거민이요, 그들의 저항이었다. 드라마 속 '철거'는 마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넘어서야 할 '통과 의례'처럼 묘사된다. 즉, 대한민국 재벌의 성장사를 단적으로 상징해내는 것에 철거와 건설만큼 도식적으로 명확한 것이 없다. 

<빠스껫볼>과 <감자별>에는 또 한 가지의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두 작품 다 시대를 막론하고 홀로 된 엄마와 자식의 편모 가정이라는 것이다. <빠스껫볼>의 어머니는 일본인 집에 식모 살이를 하며 아들 하나를 어떻게든 고보나마 졸업시켜 보려고 한다. 하지만 갖은 구박을 다 참으며 돈을 모으지만, 결국 아들은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를 쫓겨난다. <감자별>도 마찬가지다. 나진아의 엄마가 게으른게 아니다. 엄마는 열심히 돈을 벌려고 해보았지만, 집은 자꾸 전세로, 월세로 멀어져만 갔다. 시트콤 속 엄마는 뻔히 보기에도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피라미드 판매를 하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진아의 표현대로 남는 건 오히려 빛이다. 수모를 감내해가는 노동이나, 해볼만한 일이래 봐야, 찜질방을 돌아다니며 자석요나 파는 헛발질을 하는 엄마나, 대한민국 엄마들 삶의 조건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자식 건사하며 내 집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좋아졌다. <빠스껫볼>의 거적데기만 두른 집, 한겨울에도 맨발에 신겨진 짚신에 비하면, 어쨋건 물이 콸콸나오는 뜨신 집에, 유행을 따른 그럴 듯한 복색으로 보면 많이 발전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된 철거가 2013년에도 지속되는 대한민국은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한다. 어미 혼자 자식 한 명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이라는 것에서는 말이다. 삶의 기본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은 여전히 '원시적'이다. 


by meditator 2013. 10. 29. 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