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를 만나니 몹시 화가 나있다. 

함께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보신과 안위를 위해, 또 다른 함께 하는 사람을 쳐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목도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그 일을 교묘하게 합리화하기 까지 하면 자신의 입장에 반대하는 친구를 공격하기 까지 했단다.
분노한 친구를 그 사람이 혼이 쏙 빠지게 한번 들었다 놔야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라며 한바탕 할 궁리를 한다. 그런 친구에게 말했다. '얘야, 자기가 무얼 잘못한 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백날 이야기 해봐라, 어디 동네 개가 짖나 할 꺼다. 아니 오히려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면서 길길이 날 뛸 수도 있어. 지가 깨닫지 못한 사람한테 한바탕 해봐야, 니 입만 아퍼'

14일 16부작으로 종영된 드라마 <비밀>을 보니, 친구에게 했던 이 말이 떠오른다. 유정이에게 결혼 신청을 할 생각에 설레이며 집을 나서던, 아니, 심지어 사랑하는 유정이가 자기 대신 감옥에 갈 때만 해도 검사 안도훈이 꿈꾸던 행복은 '정의로웠다'. 그리고 가진 것 없는 자기 부모와, 유정이의 희망을 걸고, 그 정의를 실현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미 엄밀하게는 자신의 차로 친 것도 아닌, 피흘리는 지희를 버려둔 채 떠나는 그 순간부터 안도훈은 명예로운 검사직 대신에, 검사라는 직위가 이 사회에서 누리는 입신양명의 유혹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지희를 눈감은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유정이의 가석방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또 한 발 더 나아가 유정이의 아버지를 죽게 방기하는 수준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려 했던 그 검사직이 무위로 끝나는 순간, 안도훈은 가속 패달을 밟은 사람처럼, 이 사회 상층부의 그 무엇이 되기 위해 치달아 간다. 

16부작이 마무리되었을 때 어쩐지 한켠에서 속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바로 <비밀>이란 드라마 내내 오로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유정이를, 그리고 유정이의 아버지를, 해치고 죽음으로 몰아가며 모든 짓을 저질렀던 안도훈의 결말이, 유정이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조민혁의 처절한 복수로 마무리되지 않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계급 에스컬레이션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안도훈의 결말은 결국 감옥행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좀 더 처절한 복수의 결말로써의 그것이기를 바랐던 또 다른 시청자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굴에 점을 찍고 나타나 다른 사람이라 우겨도, 그의 복수가 통쾌하면 박수를 쳐주던 우리나라 드라마의 주된 '맥거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대리 만족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드라마<비밀>은 그런 '복수'로 점철되었던 우리나라 드라마의 방식을 탈피한다. 대신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만드는 '참회'의 방식에서 해법을 구한다. 되돌아 보면, 이 드라마가 중반 이후 많이 던져진 질문이 바로 '너는 니가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지?'가 아니었을까? k그룹 옥상에서 조민혁이 안도훈에게 이 말을 던졌을 때, 안도훈은 부정한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궤멸되어가기 시작한다. 그는 단지, 유정이를 포기했을 뿐이라고 자신의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여자와 그의 아버지를 제거했을 뿐이라고 치부했지만, 조민혁의 그 질문에는, 그 사실 뒤에 숨겨진,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넘긴 파우스트처럼,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순수한 시절'의 안도훈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게 피부에 와닿는 안도훈의 표정 역시 일그러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일그러진 표정을 악으로 버틸 수 있었던 안도훈도, 자신의 모친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신의 혈육조차 지우려 했던 지점에 도달해서는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참회를 한 건, 비단 안도훈만이 아니다. 이미 조민혁은, 그가 유정이가 자신을 죽인 여자라며 집요하게 괴롭히다, 뜻밖에 마주한 유정이의 순수함을 조우하며, 그리고 혹시나 자신이 그토록 스토커처럼 괴롭혔던 유정이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에 맞딱뜨리게 되면서, 증오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조민혁 식의 참회 과정을 겪어 왔다. 자기 자식 산이를 결국 품안의 자식에서 놓아주는 유정이 역시, 사랑하는 아버지를 홀로 두고 또 다른 사랑을 쫓았던, 안도훈의 부정을 눈감아주는 과정에 동참했던 자기 과거에 대한 그녀만의 참회이다. 

<비밀>의 작가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해오던 말귀 못알아 먹는 얘들 실컷 때려주는 대신에,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게 만드는 방식을 택한다. 
결국 자기 자식조차 유기했던 안도훈은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감옥행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단말마의 저항을 포기한 채 미소를 띠며 재판에서 자신의 죄를 시인한다. 조민혁은 애초에 깜냥조차 되지 않았던 재벌 가문의 승계자 지위를 내려 놓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드라마 시작 즈음에 가장 첨예하게 우리 사회의 계급 구조의 대립각을 드러내던 <비밀>은  각자 자신의 분수에 맞는 행복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마도 이 드라마의 해피엔딩에 이런 해결 방식도 있구나 감동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괜히 껄쩍지근한 한 구석이 남는 것은, 그런 실컷 때려주는 복수극을 기대했던 습관에 기인한 것이요, 또 한편으론, 유정이의 복수를 통해, 안도훈은 물론, 검사 등의 관료 엘리트 계층과, 재벌, 그리고 정치로 이어지는 커넥션의 전복을 꿈꾸어보던 일말의 기대를 접어야 하는데서 오는 아쉬움일 수도 있겠다. <비밀>의 비밀이 폭로되면서, 안도훈만이 아니라, k그룹이라는 거대한 그 무엇이 뒤틀리는 광경을 보고싶은 욕구 그것 말이다. 아니 어쩌면 하수인에 불과했던 안도훈이 아니라, 그 뒤에 음모의 시작으로 부도덕의 결정체 k그룹의 실체가 드러나는 보다 큰 구도로서의 드라마 <비밀>을 기대했던 야무진 기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친자 문제로 물러나는 검찰 총장의 후임으로, 여전히 땅뙈기를 몰래 거래하고, 자기 자식을 몰래 군대 안보내고 좋은 회사에 들여보내는 또 그저그런 사람이 후임이 되는 세상에 대한 비감이 괜히 비밀의 해피엔딩을 지레 김빠지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민혁의 말대로, 생각보다 k그룹은 견고했다. 대신 자각한 조민혁이 있을 뿐이다. 마치 드라마는 어설픈 전복보다는, 자각한 이성적인 인간들이 꾸려가는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를 선택한 듯하다. 

결국 <비밀>은 말한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by meditator 2013. 11. 15. 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