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억해>는 매회 작은 제목을 내걸었다. 15회에 내걸은 제목은 '해피엔딩은 가능할까? 였다. 


대부분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 특히나 스릴러물, 그 중에서도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 중 하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생명을 앗아가는 범죄자들이 통렬한 댓가를 치르는 것이다. 아마도 스릴러 물의 해피엔딩이란 바로 그런 것이리라. 그런 면에서 <너를 기억해>는 매우 찝찝한 드라마이다. 결국 악의 최종 근원이었던 이준영, 혹은 이준호(최준영 분)은 결국 잡히지 않았으니까. 16부라는 길고 긴(?) 회차를 통해 이준영을 잡기 위해 발버둥치던 두 주인공 이현(서인국 분)과 차지안(장나라 분)는 처음과 다르지 않게 끝까지 이준영을 잡겠다며 의지를 다짐하고 드라마는 마무리된다. 도대체 이 드라마는 그렇다면 16부작 동안 뭘 한 거지? 이런 뜨뜨미지근한 결론 답게 드라마는 마지막 회까지 5.1%(닐슨 코리아 기준)로 별다른 반동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렇다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망드'의 대열에 합류한 것일까?



어른들이 저지레해놓은 세상에 던져진 아이들.
하지만 <너를 기억해>의 미덕은 분명하고도 통쾌한 결론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아니다. 누군가를 대놓고 벌주고 잡아넣고 하는 식의 단죄는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너를 기억해>가 내린 결론은 명확하다. 

<너를 기억해>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아이들'이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아이들, 아이들이란 말은 곧, 아직 성장하지 않아서, 어른들이 만든 세상을 뚫고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내지 못한 존재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른들이 만든 세상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절대 악으로 등장한 이준영이 그렇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 철이 들기 까지 방안에 갇혀서, 문자만을 상대하며, 우리든 갇힌 동물처럼 학대받으며 자라나던 아이, 그의 존재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어른들에 대한 복수와, 자신처럼 학대받는 아이들에 대한 동포애'로 정의내려진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타고난 뛰어난 두뇌와 학습된 지적 능력을 기반으로 실천해 나간다. 

그리고 악의 사도 이준영에 의해 부모를 잃은 아이들, 이준영의 유일한 어린 시절 친구는 이준영에게 말한다. 니가 누군가를 생각하면, 언제나 일이 잘못된다고. 그도 그럴 것이, 이준영은 자신처럼 학대받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그들을 학대했던 것으로 간주한 부모들을 살해하고, 자신이 대신 그들의 보호자연 했으니까. 그렇게 '이준영의 아이들'은 앨범을 가들채울 정도로 채워져 나갔다. 그는 이준영의 범죄 외에, 그렇게 이준영의 범죄를 기인하는 어른들의 부조리한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준영이 포악한 범죄자인줄 알면서도 이용하는 현지수(임지은 분)나, 강은혁의 아버지 경찰청 부청장같은 인물들이 존재힌다. 

드라마는 직설적으로 드라마 속 어른들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비유하지는 않지만,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마음대로 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이용하며, 자신들의 잘못이 밝혀진 이후에도 사죄를 하기는 커녕 덮으려고 전전긍긍하는 그 모습들에서 충분이 작가가 현재의 기성 세대를 상징하고자 함을 읽어 낼 수 있다.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방법
그렇다면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 던져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이준영은 악의 사도가 되어 그런 부조리한 어른들을 사적으로 징벌하고, 아이들을 구원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구원(?) 방식은 뜻하지 않게(?) 아이들에게 부모를 잃게 만들고, 형제간의 생이별을 하게 만든다. 

이현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고, 동생을 사라지게 만든 이준영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이준영에게 폭력을 가했지만, 그의 도피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딸 차지안 역시 복수를 지향한다. 그리고 이준영의 거짓말로 인해 형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정선호는 제 2의 이준영이 되어 나쁜 사람들을 사적으로 징벌하는 사이코패스가 되었으며 형을 최후의 목표로 설정하고 쫓는다. 그리고 경찰청 부청장의 아들로 유학까지 다녀온 강은혁(이천희 분)은 그저 자부심이 넘치는 수사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준영으로 인해, 그리고 정선호가 저지른 범죄로 인해 서로 얽혀 들어가며 과거의 사건과, 진실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서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나쁜 것이 무엇인지, 나쁜 것의 단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복수는 정당한 것인지, 벌을 받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너를 기억해>의 16부는 속시원한 사건 해결 대신 사건에 휘말린 이들이 던진 수많은 물음표로 채워진다. 

어떻게 보면 이준영과 이현은 다르지 않다. 물론 방식은 다르지 않지만, 그 둘은 모두 어른에 의해 밀실에 갇혀진 '학대'당한 경험을 가진 아이들이다. 그리고 본능적 상황에서 누군가를 죽였다. 그래서 이준영은 그런 이현을 구한답시고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과 같은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동생을 숨겼다. 하지만, 이현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사이코패스인 동생을 숨기는 대신 감수하려 했고, 진실에 다가가려 했다. 프로스트의 두 갈래 길에서, 이준영과 이현이 선택한 길은 서로 달랐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차지안이 선택한 길도 달랐다. 그리고 이현과 차지안이 선택한 길이 달라짐으로 해서, 이현의 동생, 정선호 변호사, 민이가 선택한 길도 달라졌다. 그리고 수사 기획관을 죽인 최은복(손승원 분)에 대한 동료 수사관들의 선택도 달랐다. 

이준영을 암묵적으로 방조한 아버지의 실체를 알게 된 강은혁은 말한다. 아버지를 사퇴하게 만들까, 하지만 경찰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경찰에서 나가도 공기업 이사직을 맡으며 그 부패한 권력을 유지해 갈 것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그러면 자신이 사표를 쓸까, 하지만 그것은 도망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강은혁이 선택한 길은 스스로 아버지 대신 차지안에게 사과를 할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가 선택한 사과는 '실천'이다. 앉아서 아빠를 원망하며 징징거리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고, 기꺼이 자신의 운명을 감내하고자 한다. 이준영을 잡기 위해 누구보다 솔선수범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너를 기억해>에서 가장 명확하게 제시된 어른들 세상을 사는 아이들의 방식이요,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가는 길이다. 

이현은 말한다. 이준영은 불쌍하지만, 그가 이해도 되지만, 그를 용인하지는 않겠다고, 차지안 역시 끝까지 이현과 함께 이준영을 쫓겠다고 한다. 분명, 이현도, 차지안도 1회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범죄자 이준영을 잡지 못했고, 그의 존재는 그들의 곁을 유유히 지나칠 정도로 여유롭다. 하지만, 16부의 과정을 거치며, 그들은 어른들 세상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신념에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야 비로소 흔들리지 않고 굳건해졌다. 그리고, '이준영의 아이들'로 잘못 자란 아이들을 설득할 내공조차 생겼다. 처음과 똑같지만, 똑같지 않다. 그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상처받은 아이들에 불과하던 그들은, 이제 부조리한 어른들의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너를 기억해>는 언뜻 모호해 보이지만 명확하게 부조리한 부모 세대가 만들어 놓은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 목소리를 분명하게 전달한다. 초반 '표절'시비 까지 불러 왔던 트릭이 가득했던 이야기와, 힘이 잔뜩 들어갔던 연기들을 뒤로 하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집중했던 후반이 진득했던 모처럼 보기드물었던 '수작'이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모두가 함께 하기에는 '접근성'이 떨어졌다는 점일뿐. 모두가 공감해야 한다는 과제는, 놓쳐버린 이준영처럼,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과제로 남기며. 
by meditator 2015. 8. 12. 15:36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고 메르스 등의 여파로 침체된 국내 경기의 진작 등을 위해 8월 14일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웬걸, 진작되라는 국내 경기 대신, '해외 여행'이 늘었단다. 각 항공사의 여행편은 작년 대비 현격한 증가세를 보이는 중이란다. 국내 여행 대신 가까운 동남아로 해외 여행을 가고 보겠다는 세태, 하지만 나서 지금까지 해외는 커녕 여행 한번 제대로 다녀보지 못한 청춘들이 있다. 그리고 그 청춘들을 위한 위로 여행 프로그램이 tvn에서 등장하였다. 바로 <여행해도 괜찮아>가 그것이다. 


고달픈 청춘에게 tv가 주는 선물
<여행해도 괜찮아>가 시작하자마자 화면에는 다짜고짜 면접 시험장이 등장한다. 떨리는 모습이 역력한 응시자가 자리에 앉자 등장하는 질문, '왜 우리 회사을 선택하였읍니까?'가 아니라, '정말로 해외 여행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냐?'였다. 그리고 너도 나도 해외 여행을 가는 세상에, 그 자리에 온 청춘들은, 각자 취업과 알바, 혹은 가정 사정으로 인하여 해외에 나갈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때로는 덤덤하게, 때로는 울먹이며, 때로는 다짜고짜 눈물을 터트리며, 그렇게 이 시대의 고달픈 청춘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tvn에서 방영하는 <여행해도 괜찮아>와 <가이드>는 모두 여행을 다룬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모두 일반인인 프로그램이다. <가이드>에는 연예인 가이드들이 합류하지만, 그리고 <여행해도 괜찮아> 역시 여행전문가 손미나가 함께 하지만, 온전히 그 여행의 대상자가 되는 것은 일반인, 그것도 해외 여행을 각자의 이유로 인해 한번도 가보지 못한 일반인이다. <가이드>가 그 대상이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각자 삶의 무게로 인해 해외 여행할 엄두도 내보지 못한 아줌마들이 대상이라면, <여행해도 괜찮아>는 청춘으로 대상이 달리 된다. 

예전같으면 아줌마와 청춘, 삶의 내공에서 감히 비교도 되지 않을 대상이지만, 실업과 비정규직의 시대가 어느새 아줌마와 청춘들의 삶의 무게를 비등비등하게 만든다. 그래서, 생전처음으로 미용실 문을 닫고 외국 여행을 떠난 아줌마의 사연만큼이나, 어린 시절 아빠를 잃고 취업 전선에 나선 엄마 대신 '엄마' 역할을 하며 살아온 이십대 청춘의 이야기는 또 다른 의미에서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렇게 엄마 대신 엄마 역할을 하며 엄마가 돈을 벌러 나간 사이 엄마 보다 더 엄마처럼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며 대학생이 된 청춘, 어느날 닥친 사고로 생과 사의 고비를 오가는 엄마로 인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였던 켈리그라프도, 직장에 들어가며 만들었던 비자를 한번도 사용해 보지 못했다는 삼십대의 청춘도, 알바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커피 전문점의 청춘도, <여행해도 괜찮아>가 베푼 난생 처음 해외 여행의 기회를 얻어 스페인으로 떠난다. 


 

그저 예능이라도 청춘들에겐 위로의 시간
그래도 해외 여행이라고 선글라스 등으로 한껏 멋을 부린 청춘, 혹은 해외에 나와서도 개량 한복을 입고 자신만의 텔리그라피를 알리느라 애쓰는 청춘, 그저 외양만 보면 그들에게 '삶의 짐'은 '청춘'을 가리지 못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스페인의 공기만으로 너무 좋아 몸을 흔들다가, 그래서 일분일초가 아까워, 그리고 돌아가서 변함없이 달라지지 않은 채 자신을 억눌러 올 일상의 무게에 몸서리치는 청춘들의 모습에서 이 시대 버거운 삶의 무게가 엿보인다. 

<가이드>가 '내 생전 잘 생긴 연예인과 여행을'이라는 호사를 한껏 누리게 해주었다면, <여행해도 괜찮아>는 대신 그녀 자신이 일찌기 해외 여행에서 낯선 노신사로부터 여행의 혜택을 입어 삶의 전환을 얻은 바 있는 여행전문가 손미나가 멘토로 나선다. 연예인 가이드와 여행전문가 멘토는 그래서 프로그램의 깊이마저 달리한다. 아줌마들은 잘 생긴 연예인들과 한풀들이 여행을 즐긴다면,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돌아갈 것이 두려운 청춘에게, 손미나는 '청춘'이 그런 거라 위로를 건넨다. 지금 당신들이 더 힘든 것이 아니라, 되돌아 보면, 청춘은 언제나 앞날을 알 길 없어 막막하고, 빛이 보이지 않는 상태처럼 느껴진다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지만, 여행지에서의 좋은 시간이, 이후의 삶도 달라질 수 있게 만들 지도 모른다며 가능성을 열어준다. 공영 방송 아나운서 자리를 대신하여 홀홀 단신 스페인으로 건너가 여행 전문가가 된 그녀의 여정이, 경험이 혼돈의 청춘들에겐 진지한 위로로 다가간다.

삶이 퍽퍽한 청춘들에게 주어진 해외 여행, 어쩌면 그것은 그저 한 방송국의 예능 프로그램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해프닝과 같은 예능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에 질식할 듯한 청춘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시간은 유의미하다. 비록 그들이 불안해 하듯, 그 '신기루'같은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시 앞날이 막막한 일상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지라도, 일찌기 프랑스 여행지에서 손미나에게 여행을 선물하여, 손미나의 삶의 궤도를 바꿔놓은 노신사처럼, 그저 예능의 일환이지만, 해외 여행은 엄두도 못냈던 청춘들에게 주어진 스페인에서의 며칠은 생각지도 못한 삶의 전환점이나, 지친 삶의 울타리가 되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가 못한다면 예능이라도 괜찮겠다 싶다. 굳이 구설수에 오른 연예인들과 함께 하는 해외 여행보다는 낫지 않은가 말이다.

by meditator 2015. 8. 11. 16:41

곧 광복70주년이 다가온다. 

우리에게 광복은 어떤 의미일까? <sbs스페셜>은 광복의 기쁨 대신에, 광복 70주년이 분단 70년이 된 우리의 현실에 주목한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이념에 따라 남과 북이 나뉘어 어언 70년이 흐른 지금 그 시간이 길어질 수록, 남과 북의 마음도 멀어져만 가는 그 현실을, 남과 북의 청년들을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그 현실을 짚어보기 위해 우선 우리에게 생소한 북한의 삶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북한 중산층의 가정집', 2006년 탈북한 새터민 정은심씨, 아버지가 음악 대학 학장이었다던 그녀의 기억에 따라 복원된 집, 그 집을 본 남한의 청년들은 놀란다. 늘 미디어를 통해 굶어 죽을 수준의 북한에 익숙한 남한 청년들은, 북한에도 남한의 아파트와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 이렇게 '한 민족'이면서도 서로에 대해 사실은 '무지'한 남북한의 청년들이 광복 70주년 '대기획'으로 한 자리에 모인다. 



남북 청년 통일 실험; 자본주의에서 함께 살아남기 
남북 청년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몇 단계에 걸쳐 실시된다. 그 첫 번째, 탈북 청년들의 남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190년대 중후반 식량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북한 내 배급 체계가 붕괴되고, 주민들은 스스로의 살길을 찾아 북한식 시장인 '장마당'에 나와 자급자족을 하기 시작하였다는데, 바로 그 북한식 자본주의인 '장마당'을 경함한 장마당 세대가 첫 번째 실험의 주체들이다. 장마당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모자를 팔았다던 승설향, 권력을 이용한 불법적 거래로 큰 돈을 만지기도 했다던 군 보위부 출신 장범철은 장사밑천 100만으로 이틀간 자유로이 남한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제작진이 돈을 건네 주기도 전에 미리 물품을 예약해 놓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던 이들은 정작 그 물건을 하나도 제대로 팔지 못한다. 생각과 달리, 그들이 내놓은 북한 사탕과 순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게다가 큰 돈을 벌어봤다던 장범철은 거리에서 호객 행위 한번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등, 남한식의 '장사'에 어설픈 티가 역력하다. 승설향은 눈물까지 보이고, 결국 물건은 그들이 아는 북한 새터민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두번 째 실험은 남과 북의 청년이 함께 이틀간의 장사 여정. 하지만 그 여정은 첫날 함께 식사를 하는 순간 부터 삐그덕 거린다.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장사 물품 마련, 장사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맞는 것이 없는 두 청년, 게다가 북한 장마당에서 땔감을 팔아봤다던 청년은 역시나 장범철처럼 거리에 나서 자신을 드러내고 무언가를 파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배달을 나선 길은 헤매기 일쑤, 고객의 한 마디에 물건에 대한 자신감은 뚝 떨어져 팔지 말자는 이야기까지 해버린다. 

그렇게 삐그덕거리는 그들을 위한 해법은 시간,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날, 남한 청년을 따라 주먹밥을 팔러 나온 북한 청년은, 그저 주먹밥을 파는 것을 넘어 출근길 시민들에게 '화이팅'을 외치며 밝은 기운을 전해주는 모습에 자신감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북한 청년에게 남한 청년은 '북한'이라는 이질감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의 그 어설픔을 느끼며공감한다. 

드디어 마지막 실험, 따로, 혹은 함께 장사를 하던 남과 북의 여섯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북한의 장마당'과 같은 까페를 연다. 남과 북의 청년이 번갈아 가며 리더가 되어 꾸려가는 까페, 손님은 오지 않고, 서로의 낯선 리더쉽에 남과 북의 청년 사이엔 불만만이 쌓여간다. 



통일을 논하기엔 너무 먼 남과 북의 거리 
탈북 청년들과 함께 남한 청년들이 남한에서 남한 식의 '장사'를 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실험, 그 실험은 이미 실험 자체에서 '남한',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장마당'을 경험하고, 북한에서도 노동당보다도 '돈'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탈북 새터민들의 입장은, 어쩌면 이미 우리가 깨닫고 있지 못하는 북한내 변화의 단면을 보고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한식 자본주의라는 한계적 상황이건, 그 한계적 상황에 기꺼이 적응하려고 내려온 새터민들이라는 제한적 조건임에도, <어서오시라요>가 보여준 상황은 분단 70년이 가져온 남과 북의 거리를 깨닫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남과 북의 청년이 함께 한다는 종이 간판을 내세운 남한 청년에게 북한 청년은 거부감을 보인다. 자신이 내려와 겪은 짧은 시간 동안 남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북한의 물건을 가지고 나선 거리에서 시민들은 냉랭하기 이를데 없다. 아니 그리고 그건 '북한'이라서라기 보다는, '내 이익'과 관련되지 않는 그 무엇에도 '무관심'한 남한의 분위기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터이다. 

그렇게 지극히 자기 중심적 '자본주의'가 팽배한 남한 사회에서 이벤트처럼 만난 남과 북의 청년들은 사사건건 부딪친다. 리더를 뽑는 방식에서, 리더에게 기대하는 것에서, 그리고 함께 무언가를 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그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서로의 샅샅이 다른 문화적 차이이다. 안그렇다 하면서도 상당히 서구적 '민주주의' 문화가 익숙한 남한과, 남한에 내려왔음에도 북한식의 상명하복에 익숙한 북한 청년들이 정작 곤란을 느끼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부터이다. 

당연히 '통일'은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한 민족'인데 하는 북한 청년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오히려 지금처럼 압도적인 인구와, 그보다 더 압도적인 자본을 가진 남한과의 '통일'은 그저 가지고 있는 자원을 내어줄 뿐 북한의 희생이라는 목소리가 우세를 점한다. 하지만 정작 무서운 것은, 그 둘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채 남의 집 이야기를 듣는 듯 멀거니 바라보는 남한 청년들의 아득한 눈빛이요, 남과 북의 만남이라는 '호객' 행위에 '일별하지도 않은 채' 각자의 길을 가기 바쁜 남한의 거리 사람들이다. 

<통일 실험 어서오시라요>는 다큐임에도 오히려 리얼리티 프로그램과도 같은 성격을 띤다. 하지만, 아름다운 북한 미녀의 소비도 아니고, 가난한 북한 주민에 대한 위로 프로그램도 아닌, 남한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북한 청년들의 적응기를 기반으로 한 다큐는 불가피하게 현실의 절박감을 내보인다. 그런 반면, 청년 실업에 시달리는 남한 청년의 현실은 거기선 드러나지 않는다. 월수 2500만원의 청년 실업가 수준의 청년과 국내 유수 대학, 대학원을 다니는 우리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의 청년들은 애초에 남한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새터민 북한 청년들과 그 마음 가짐이 다를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여유로운(?)  남한의 자본주의 속 여전히 낯설은 북한 청년들, 이미 전제된 아량의 제한선이다. 
by meditator 2015. 8. 10. 15:52

8월 8일 <마이 리틀 텔레비젼>의 시청률은 6.0%를 기록했다(닐슨 코리아 기준) 

백종원이 등장하던 회차들이 평균 8%를 넘는 시청률을 보였던 것과 달리, 8월1일 15회 7.2%, 그리고 8월 8일 6.0 %로 시청률은 떨어지고 있다. 
이런 <마이 리틀 텔레비젼>을 두고, '백종원'이라는 거품이 빠지자, '하락세'를 탔다는 분석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백종원의 '더 고급진 레시피'와 더불어 세간의 화제를 끌었던 <마이 리틀 텔레비젼>, 출연자들이 각자 자신만의 포맷을 가지고 실시간 채팅창에 출현한 인터넷 시청자들과 함께 인터넷 생방송을 꾸려가는 <마이 리틀 텔레비젼>, 하지만 실상은 60%를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는 신계 백종원의 압도적 점유와, 그에 대적하는 인간계 '미니언즈' 군상들의 고군분투였다. 최근 불거진 '백종원 아버지 백승탁씨의 성추행 사건 등이 불거지며, 백종원은 본의 아니게 하차를 하게 되었다. 실시간 채팅창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에서, 제 아무리 걸른다 해도 아버지와 관련된 잡음은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실시간 방송이 아닌 <집밥 백선생>이 계속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백종원이라는 트렌드에 무리수를 두며 기대어 가지 않고 용감하게 신계를 탈출한 <마이 리틀 텔레비젼>의 선택은 박수를 맞을 만하다. 



인간계의 신선한 고군분투 1; 김영만 아저씨의 '힐링' 종이접기 
'신계'라고도 칭해졌던, 점유율 60%가 넘는 백종원의 부재,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2%밖에 빠지지 않은 <마이 리틀 텔레비젼>은 '선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심지어, 15,16회에 보여진 <마이 리틀 텔레비젼>의 포맷은 이전의 포맷과 비교하여, 오히려 백종원이라는 '먹방' 트렌드를 탈피한 예능의 신선한 가능성을 보여준 회차로 평가할 만하다. 

'백종원'이라는 압도적 콘텐츠가 빠져나간 <마이 리틀 텔레비젼>에서 화제성을 이어간 것은 종이접기 김영만 아저씨였다. 아저씨와 함께 종이접기를 하던 '코딱지'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그 시절처럼 여전히 다정하고 친근하게 교감을 하며 종이접기를 하는 김영만 아저씨의 코너는, 백종원이 빠져나간 빈 자리를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채웠다. 더구나, 15회에 출연한 그 시절 아저씨와 함께 했던 어린 꼬마 신세경이 어른이 되어 그 시절과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성을 이어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김영만 아저씨의 출연은 그저 그 시절 '추억'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16회 김영만 아저씨의 방송분은 어른이 된 코딱지들과의 교감으로서의 '종이접기'의 가능성을 연다. 
무엇보다 김영만 아저씨의 코너에서 뭉클한 감동을 준 것은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몸을 90도를 꺽어 사과 인사를 하는 그 장면이었다. 이제는 회사를 다닐 정도의 나이가 된 코딱지들, 하지만 그 코딱지들은 여전히 '회사' 문턱에도 가지 못하거나, '회사'를 가도 그 속에서의 '갑을' 관계로 인해 쉴 여가도 없는, 심지어 회사 비품 하나 쓰는 것도 눈치를 보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코딱지들의 푸념에 아저씨는 눈시울을 적시더니 곧 허리를 굽혀 사죄를 한다. '미안하다'고, '이런 사회를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언제나 당신들이 살왔던 고달픈 시절을 강변하기에 급급하던 어른들, 그리고 그래서 당신들이 만들어낸 괴물같은 사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조바심을 냈던 어른들, 살면서 한번도 이런 세상을 만들어 내서 미안하단 말을 듣지 못하던 '코딱지'들은, 뜻밖에도 어린 시절 그들과 함께 동심을 호흡하던, 그 '피터팬'같은 종이접기 아저씨에게서, '사과'를 듣는다. 그리고 채팅창을 'ㅠㅠㅠㅠ'로 물들이며 '왜 아저씨가 사과를 해요'라고 급 착해진 목소리를 전한다. 어떻게 하면 딴지를 걸까, 갖가지 개구진 '드립'만을 연구하던 채팅탕의 코딱지들이, 여전히 종이접기를 하던 그 시절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아저씨와 함께 교감하며 'ㅠㅠ'한다. 

게다가 종이접기 아저씨는 '추억'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제는 어른이 된 '코딱지'들에게 색종이 대신 회사 비품인 서류 봉투로 새로운 종이 접기를 한다. 아저씨 옆에서 재롱을 부리던 뚝딱이 역시 20년째 10살인 뚝딱이의 현실 버전을 선보인다. 채팅창의 '갑을' 관계 운운에, 평생 계약직 신세를 토로하고, 아저씨가 만들어 준 움직이는 종이 여친에 '위아래, 위 아래'하며 운을 띄운다. 그저 그 시절 해보던 '종이 접기'가 어느새, '키덜트'가 된 세대의 눈높이에 맞춰 변주된다. 



인간계의 고군분투 2; 신선한 포맷이 열어준 가능성
그렇게 화제성을 이어간 분은 김영만 아저씨였지만, 뜻밖에도 16회에 1등을 차지한 것은 이은결이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듯, 후배 일루셔니스트들의 물량 공세를 펼친 이은결은 그 노력에 걸맞게 1위를 쟁탈했다. 그리고 이은결의 1위는 그저 우승이 아니라, 그가 주장하는 '일루셔니스트'의 다양한 세계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홍보의 장이었다. 그저 마술이 아니라, 마술이라는 기본을 변주하여, 환타지에서부터 코믹까지 다양한 변주를 연출해 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일루셔니스트의 세계를 1위 쟁탈로 증명해 내었다. 

그렇게 일루셔니스트라는 기존에 존재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세계를 끌어들임과 동시에, 이것도 예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16회는 보여주었다. 비록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그저 복면을 만드는 사람에서, 그 존재 자체가 예능인 듯한 황재근의 '왕실 디자인 스쿨' 역시 신선했다. 그런가 하면, '아이돌이야?'라고 반문하게 되는 에이핑크 남주의 몸을 던진 '배워서 남주기' 역시, 가능성을 연다. 

김구라의 '트루 맨즈 스토리'에서 선보인 '남자의 변신'은 이미 케이블을 통해서 선보인 남성의 트렌드를 복기하는 듯 했지만, 그 대상이 케이블에서 대상으로 삼은 젊은 남자가 아니라, 김구라나, 김흥국처럼 나이든 세대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이 코너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그저 앞치마 몇 개로도 패션쇼가 가능할 만한 옷들이 만들어 지고, 대학에서 배운 발성 연습만으로도 포복절도하게 만든 시간들은, 결국 '구하면 열릴지니'라는 예능의 신 세계를 연다. 

16회 <마이 리틀 텔레비젼>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했다. '힐링'이 되는 종이접기와, 코믹에서 부터, '마술'이 아니라 '마법'이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일루셔니스트의 세계, 그리고 김흥국도 멋진 남자가 될 수 있다는 남자의 변신 시리즈에서, 아이돌과 교수님, 그리고 피디가 한데 어우러져 가장 진지한 학습을 하는데 배꼽이 달아나 버리고 마는 코너까지, 오히려 신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들의 세상'은 왁자지껄 흥분의 도가니였다. 



되돌아 생각 해면 한때 유행하던 '밥아저씨'를 따라 그림을 그리던 그것 역시 특별한 무엇이 아니었다. 그렇듯이 '예능'이란 특별한 무엇이 아닌,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면 무엇이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오히려 백종원이 빠진 <마이 리틀 텔레비젼>은 증명한다. 

하지만 물론 과제도 남는다. 사람들이 백종원의 '더 고급진 레시피'를 들여다 본 이유가 무엇일까, 그래도 '고급지지 않은 더 고급진' 하지만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얻어 건질 수 있다는 '정보'에 대한 소박한 갈구였다. 그런 면에서, 평균 4위 김구라를 넘어서는 매혹적인 ' 정보'의 레시피에 대한 과제는 시청률 상승의 과제로 남겨진다. 
by meditator 2015. 8. 9. 15:38

아비가 아들을 죽인다. 그것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뒤주에 넣어, 고스란히 생매장을 한다. 

이 '엽기적 비속' 살해 사건에서 '뒤주'라는 단어만 등장하면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고개를 까딱한다. 누군지 알기 때문이다. 세세한 그 내막은 몰라도, 조선 조 역사에서 영조가 그의 아들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이 사건은 전대미문의 역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이 '비극적이고도', 드라마틱한 '엽기적' 비속 살해 사건은 당연히 이야깃거리에 솔깃한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와 문학에서부터 드라마,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로 변주된다. 그리고 변주를 하는 사람들마다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 서서 '사도'의 죽음을 해명하고자 애쓴다.

 

<영원한 제국>에서 <비문>까지 정치적 개혁 세력으로서의 사도 
2014년 12월 종영된 sbs사극 <비문>은 사도를 둘러싼 역사적 시각 중 한 편을 대표한다. 즉, 아비 영조로 대비되는 '노론'과 본의건, 본의 아니건 손을 잡게 된 '수구' 세력에 대비되어, 기존 정치 세력에 반발하는 '개혁' 세력이 대표자로서 '사도' 이선을 그려낸다. 이미 어미의 뱃속에서 태자가 되어 이십대가 되어 아비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까지 해낸 영특한 세자, 하지만 그의 '영특함'은 오히려 무기가 되어, 그를 아비와, 그리고 그 아비를 존립하게 만든 '노론' 세력에 반기를 들게 만들고, 결국 그것은 정치적 패배로서의 '뒤주에서의 죽음'을 기인하게 만든다.

여기서 그려진 사도 세자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집권 세력인 '노론'에 대해, 그리고 그 '노론'을 중용하는 '노회'한 아비 영조에 대해 '개혁'과 '진정한 탕평을 이루고자 했던 '개혁'의 주도 세력으로서, 그리고 실패한 '개혁'을 죽음으로 감수한 '낭만적 영웅'이요, '정치적 희생양'이다. 1994년 상영된 <영원한 제국> 역시 이런 개혁 세력으로서의 사도 세자를 그린다. 심지어 2011년 <무사 백동수>의 사도 세자는 북벌을 주장하다 청과 결탁한 집권 세력에 의해 '살해'된다. 

뱀파이어를 다룬 퓨전 사극 mbc의 <밤을 걷는 선비> 역시 '사도 세자의 죽음'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이다. 극중 '사동 세자'는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오랫동안 우물에 갇혀 죽음을 당한 인물로 그려진다. 사도와 사동이라는 받침 하나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희생양으로 아비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그의 아들인 세손이 아비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자 하는 이야기가 '사도 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역사적 정황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뱀파이어물답게, 정치적 희생양으로서의 죽음으로 알려진 사동 세자 죽음의 뒤에는 뱀파이어를 없애기 위해 '비기'을 손에 넣으려 했던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귀'(이수혁 분)라는 뱀파이어가 있었다는 식으로 변주된다. 



정신병력에 희생된 사도 
이런 정치적 해석의 또 다른 한편에서, 사도 세자가 '의대증'(옷을 잘 입지 못하는 정신병)'을 보였다던가, 동궁전의 인물들을 별다른 이유없이 죽인 일 등을 예로들어 개인적 고뇌의 상징으로 사도 세자를 그리는 방식이 있다. 

사도 세자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그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존해왔던 바가 컸기 때문에 이전의 역사적 사극들은 정신적 이상자로서의 사도 세자를 그려내는데 충실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선왕조 500년-한중록>이다. 이 작품에서 사도 세자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유약한 심성을 가진 인물로, 그로 인해 결국 정신병까지 얻은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후 그저 아비를 잃은 불쌍한 여인네로 <한중록>에서 자신을 그려낸 혜경국 홍씨가 당대 노론 대표적 명문가의 여식으로 아비 홍봉한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 했다는 역사적 해석이 등장하면서, 혜경궁 홍씨 자신에 당위성을 강조한 <한중록>의 시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 제기되어 왔다. 

8월 7일 방영된 드라마 스페셜<붉은 달>은 정신병력을 앓은 사도 세자 개인의 불행에 집중하지만, 그것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제 아무리 정치적 입장에서 '재조명'을 한다 하더라도 사도 세자가 말년에 비단 옷을 가져다 주면 찢어버리고,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거나, 무명 옷만 겨우 갈아입었던 병력이나, 동궁전의 인물들을 별다른 이유없이 죽였던 범죄 행각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덮을 수 없다. 그리고 공포물로서의 <붉은달>은 이런 사도 세자의 정신적 불안정을 숙종-경종-영조 연간의 비극적 왕실사로부터 길어 올린다. 

즉 마흔이 넘은 나이에 겨우 아들을 얻은 영조는 그 아들을 왕재로 잘 키울 욕심에 경종과 장희빈이 기거했던 저승전 아들의 세자궁을 만든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저승전에서 내시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붉은 달>이 주목하는 것은 뜻밖에도 정신병력을 보인 사도 세자 뒤에 숨겨진 배후, 한을 품은 장희빈이다. 즉 숙종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사약을 받고 숨져간 어미, 그리고 어미의 뒤를 이어 숙종의 또 다른 아들인 영조의 정치적 야망으로 인해 독살된 아들 경종, 이 두 모자의 억울한 죽음을 부각시킨다. 즉 정치적 욕망에 따라 자신의 아내와 형조차도 가차없이 죽여버리는 아비들의 무자비한 행각이 '장희빈의 한'을 낳았고, 그 한은 왕실의 저주가 되어 '사도'에게 드리워진다. 

'사도'의 눈에만 나타나 그를 뒤흔드는 장희빈, 안그래도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에 강력한 군주 아비 영조 눈에 들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그는, 귀신의 속살거림에 하염없이 무너져 버린다. 원망하는 아비의 관을 만들고, 자신보다 더 아비의 사랑을 받는 세손의 관을 만들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관을 만들며 미쳐가는 것이다. 

아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세손의 남바위를 쓰고 육친의 정을 호소하는 세자, 그러다 장희빈의 혼령 앞에 혼돈에 빠져 마구 칼을 휘두르고 마는 세자의 모습은 흡사 셰익스피어 비극 속 햄릿이 영혼 앞에 자신의 정신을 놓아버리는 장면처럼 처절하다. <미생> 속 김대리였던 김대명은 어느 틈에 소심하고 유약한 세자가 되어 때로는 안쓰럽고 무기력하고 섬뜩한 새로운 사도를 선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붉은달>이 신선했던 것은 그저 혼귀의 희생이 되어버린 인물을 넘어 비극적 조선 왕실사로 확장된 공포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서 비극의 당사자만이 아니라, '어미'대 어미'의 대결로 이야기를 확장시킨 점이다. 자신은 물론 아들까지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린 장희빈 모자, 그들이 그래서 이후 왕실의 후계를 '비극'으로 물들이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해 보인다. 사도는 물론, 그의 아들인 세손에까지 뻗치는 공포의 야욕, 거기에 맞선 것은 또 다른 어미의 한이다. 장희빈의 포한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만 아들 사도, 그의 무기력한 패배가 그의 아들 세손에게까지 이어지지 않기 위해, 한의 대물림을 막기 위해 사도의 어미인 선희궁이 나선 것이다. 

사도도,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도, 그리고 그 아들인 정조까지 사도의 죽음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로 늘 역사의 주목을 받았지만 단 한번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았단 선희궁 영빈 이씨를 <붉은 달>은 주목한다. 비천한 신분을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그 인물은 악귀의 제물이 된 아들의 희생이 더는 세손에게 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왕실에 드리운 한을 종식시키기 위해 나서는 용기있는 여성으로 그려낸다. 그저 아들을 죽음으로 종결시키는 당사자를 넘어, 장희빈의 한에 대결하는 또 다른 '어미의 한'을 지닌 귀신으로 화하기 위해 자신을 '살신성인'하는 실천하는 '어미'상으로 선희궁을 새롭게 창조한다. 비록 공포물이지만, 사도라는 인물을 통해 본 비극적 왕실사, 역사적으로 조명받지 않았던 인물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붉은 달>의 접근은 뻔한 그 어떤 퓨전 사극보다 신선했다. 
by meditator 2015. 8. 8. 15:54

kbs2의 미니 시리즈가 고전 중이다.

새로이 시작한 sbs의 수목 드라마<용팔이>는 첫 회 11.6%(닐슨 코리아 기준)로 너끈하게 동시간대 1위를 쟁취하였다. 하지만 <가면>의 종영 이후 새로이 펼쳐진 공중파 3사의 경합에서, <어셈블리>는 자체 최고 시청률 5.3%(닐슨 코리아 기준)를 기록하였지만 역시나 꼴찌의 자리는 면치 못했다.  
그런가 하면 역시나 동시간대 1위였던 <상류 사회>가 종영된 이후 뒷심을 노리던 <너를 기억해>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5.3%(닐슨 코리아 기준)의 시청률 상승을 보였지만, 동시간대 꼴찌는 따논 당상이었다.
이런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의 꼴찌 릴레이를 두고, 혹자는 '고전'중이라는 타이틀을 내건다. 하지만, 그건 이 두 드라마를 폄하하는 평가일 뿐이다. 그리고 '시청률'이라는 편협한 프레임 속에 드라마를 집어넣고, 드라마의 입지를 좁혀가는 시선일 뿐이다. 오히려,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는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뻔한 막장급 재벌 드라마들 사이에서 '고군분투', 분전 중이라고 평가되어야 하는 수작들이다.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의 첫 번째 공통점; 재벌이 없다. 
동시간대 1위를 기록하며 종영한 <가면>, <상류 사회>, 그리고 그 후속작인 <미세스 캅>, <용팔이>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바로 '재벌'스 월드이다. '재벌'에 의해 움직이며, 그들과 그들 주변 인물들의 이합집산과, 이전투구, 그리고 정의 실현이 세상을 채운다. 살면서 방송을 통해서가 아니면 만나지도 못하는 재벌들의 이야기, 최근 뉴스를 점하고 있는 롯데 그룹 사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혈육 간의 골육 상쟁이 시청률 상위의 드라마들을 접한다. 

그리고 이런 재벌들의 이야기는 바이러스와도 같이 어마어마한 번식력을 자랑한다. 그 시작이 주말 드라마부터였던가, 아니면 아침 드라마부터 였던가, 시청률 주도층인 3.40대 중장년 주부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상류 재벌 집안의 막장 스토리가 트렌드가 되기 시작하면서, 아침 드라마와, 주말 드라마을 잠식하더니, 이제 케이블과 종편의 다양한 프로그램의 공세와, 젊은 층의 외면으로 인해 낮아진 시청률로 고전하던 주중 미니 시리즈까지 잠식하고 말았다. 

종영한 <상류 사회> 계급 간 로맨스를 통해 사랑의 의미와 오포 세대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권두언은 뒤집으면 재벌 자제와 '평민'들간의 사랑 싸움과 집안 갈등으로 채우겠다는 말이었다. 작가 최호철을 임성한의 뒤를 이을 막장계의 후계자로 만든 <가면> 역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커녕, 갖다 붙이면 이야이가 되고 마는 어이없는 재벌가의 막장 해프닝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설픈 신인들의 연기가 어땠건, 말도 되지 않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스토리가 어땠건, 재벌가의 막장 급 이전투구는 여전히 '욕을 하면서' 보건 말건 시청률 1위의 자리를 고수한다. 

그런 '트렌디'한 '재벌'가란 소재가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에는 없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들 두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가장 큰 장벽 중 하나일 지도 모른다. 대신 <어셈블리>는 해고당한 노동자들의 농성 장면이 화면을 채웠다. 혹자는 바로 이런 시작이 <어셈블리>의 접근성을 낮춘 요인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게다가 정의롭기만 해도 될똥망똥한 주인공은 형제같은 사람을 배신하고 여당 국회의원이 되더니, 공천을 받겠다고 삼천포로 빠져서 여당의 돌격대가 되어 설친다. 그런가 하면 <너를 기억해>는 익숙한 사이코패스가 등장하지만, 그는 재벌이 아니다. 정체를 모를 연쇄 살인범,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주인공, 그리고 범죄 심리학자와 법의관, 형사, 변호사, 이렇게 전문직들이 등장하여 각자 자신의 전문적 용어를 즐비하게 나열하며 '추리'를 해대는 이들 드라마는 '접근성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소에는 만날 일 조차 없는 그들의 집안 내 막장 스토리는 뉴스를 통해서야 아는 하지만, 언제나 드라마만 보면 옆집 사람처럼 익숙하게 집안 속내를 까발리는 '재벌'이 없는 드라마, 사람들이 기피하는 노조의 이야기와, 정치의 협잡과 더러운 이면을 낱낱이 까발리는 드라마, 선과 악이 분명하지 않고, 사건의 추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하나의 사건을 통해 또 다른 사건이 꼬리를 물고, 그것을 통해 조금씩 과거가 드러나는 드라마, 이것이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이다. 이렇게 익숙하지 않고 낯설고, 생소한 이들 두 드라마, 그렇다고 '고전'이라는 말로 밀어 제치기에는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의 가치는 소중하다.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는 분전 중
여권 실세인 여당 사무총장 백도현(장현성 분)의 히든 카드로 국회에 입성한 진상필(정재영 분), 하지만 그의 행보는 여느 '히어로'물의 주인공과는 다르다. 애초에 더 이상 몰릴 곳이 없는 노조 위원장으로 선택한 행보였지만, '노조'라는 위치와 달리, 그가 선택한 곳은 '노조'의 성향과는 반대편인 '여당'이었다. 어떻게 중간이 없이 모 아니면 도냐며 볼멘 소리를 하는 최인경(송윤아 분)의 말처럼, 여당에 들어온 진상필의 행보는 롤러코스터를 탄다. 여당 국회의원 신분임에도 정부 추경 예산을 추인할 수 없다고 큰 소리를 치는가 하면, 어느새 백도현의 개가 되어 반청파를 물어 뜯는데 앞장 선다. 그러다, 이제는 살생부 속 한 인물이 되어, 정치 생명의 위기를 맞는다. 

그는 '배신자' 소리를 들어가며 국회의원이 되고자 했던 그 초심, 그리고 그를 '믿노라'며 죽어가던 배달수(손병호 분)의 유언처럼 노동자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국회의원이 되보고자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장벽이다. 정치 초년병인 그는 노회한 정치 고단자들에게 이용해 먹히기 십상이고, 그의 선의는 언제나 짓밟히곤 한다. '무관심'을 넘어. '혐오' 수준에 이른 정치에 대한 '희망'을 길어 올리기엔 아직 한참 '역부족'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셈블리>는 가치있다. 쉽게 환타지처럼 정의로운 히어로를 내세워 쉽게 희망을 들먹이지 않고, 오히려 철저히 현실에 천착하여, 갖은 우회로를 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치'를 놓아서는 안되는 목적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간다. 사람들이 쉽게 평가하고, 시청률을 내세워 험담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에 흔들리지 않는다. 

<너를 기억해> 역시 쉽지 않다. 아버지를 사이코패스에게 잃고 동생마저 잃은 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된 드라마는, 한 회, 한 회 하나의 사건들을 통해, 그와 그 주변의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풀어 나간다. 한 회의 이야기는, 하나의 퍼즐을 푸는 동시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그저 범인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그 이면의 진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차분하게 천착해 나간다. 이 놈이 나쁜 놈 하고 다같이 몰려가 두드려 패는 식의 사건 해결이라는 것은 없다. 통쾌한 한 방도 없다, 장군 하면 멍군이요, 멍군인가 하면, 또 다른 패가 등장한다. 하지만, 대신, 그 느리고, 퍼즐로 가득한 이야기들을 풀어가면, 고정 관념을 넘어선 사람과 사람의 관계, 선과 악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보게 된다. 역시나 그저 시청률이나, 범인 잡기로만 설명할 길이 없는 드라마이다. 


하지만 시청률 지상주의 드라마 시장에서, <어셈블리>나 <너를 기억해>는 그저 꼴찌일 뿐이다. 그나마 콘텐츠 영역 면에서 면피를 한다. 더구나 한 회만으로 그 흐름을 따라잡기 힘드니, 리모콘 돌리다 재밌어 자리 틀고 앉게 되는 '중간 유입'도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다세대의 다중'을 대상으로 하는 공중파 드라마로는 젬병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런 냉혹한 시청률 기중에 따른 평가는 처음으로 드라마판에 들어선 영화배우 정재영의 마지막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일까, <너를 기억해> 후속 작품은 가장 대중적 기호에 맞춘 '고부 갈등'을 내세운 <별난 며느리>를 택했다. <복면 검사>에서 <어셈블리>로 이어진 '사회 비판적'인 계보를 잇던 수목 미니 시리즈 역시 대하 드라마 <장사의 신-객주 2015>를 선택하였다. 

만약에 드라마에서 '재벌'을 등장하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통과된다면 어떨까? 아마도 우리 드라마계는 '개점 휴업'을 해야 할 형편에 빠질 것이다. 그만큼 현재 특히나 공중파 드라마들은 '재벌 중심의 막장 스토리'에 현격하게 편중되어 있다. <상류 사회>, <가면>의 후속작인 <용팔이>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자 하지만, 신선하지 않다. 역시나 재벌가의 이전투구가 빠지지 않는다. 제 아무리 시청률 1위를 수성하고 있다지만, 결국은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느낌이다. 시청률 지상주의를 내세우면 결국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뻔해진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익숙하지 않지만, 뻔하지 않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이어가는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의 가치는 소중하다. 그저 몇 %의 시청률로 설명할 수 없는, 귀 기울여 들어볼만한 이야기들이다. 
by meditator 2015. 8. 6. 17:20

8월 4일 방영된 mbc의 <pd수첩>에 대한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세간에 '김치녀'로 통칭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에 대한 남성 들의 반응, 거기서 부터 시작된 최근 두드러진 여성 혐오 현상에 대해 다루었기 때문이다. 



'김치녀' 현상으로 시작된 남성들의 '양성평등론'
시작은 '수 백만원을 호가하는 명품가방을 받고 수 천만원짜리 가방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자 친구에게 짜증을 내는' 속칭 김치녀 동영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김치녀'에 대한 사이트를 운영하며, '이들이 사회적으로 분란을 일으키며 문제가 되는 여성'이라고 지탄하는 '양성 평등' 주장을 하는 남성들이 등장했다. 

남성들이 주장하는 바 '양성 평등'은 이어진 '군 복무'에 대한 남성들의 억울함으로 이어진다. 2030 의식 조사에 따르면 남성 들 80.6%가 군복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 지지 않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또한 2015년을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군복무'에서부터 시작하여 학교, 연애, 사회 생활에서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최근 남녀 공학을 기피하는 남학생들의 조류에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여학생들의 '실력'에 밀리고 있다는 남성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그들 남성들에게만, '군복무'를 비롯하여, 데이트 비용, 결혼 비용 등 각종 사회적 부담을 지게 만듦으로써, '남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피력한다. 이에 일부에서는 '양성 평등'을 주장하며, 과격하게는 여성의 동등한 군입대, 혹은 그 보다는 완화하여 몇 주간이 군사 훈련, 혹은 군대에 비견되는 각종 봉사 활동에 여성도 '동등'하게 일정 기간을 '의무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달픔
<pd수첩>이 짚고자 하는 것은 조선 시대 이래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여전한 가운데,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남성'들을 우월적 존재로 인정하여, '군대'등의 사회적 의무를 비롯하여, 데이트 비용, 결혼 비용 등 각종 의무를 부담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현실적으로는 사회, 경제적으로 더 이상 '지배 계급'으로서의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보장 받을 수 없는 2030 세대 남자들이 느끼는 정서적, 현실적 괴리감이 '김치녀'를 비롯한 '양성 평등' 등의 극단적 주장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심리학자와 함께 '데이트'를 통해 짚어본 현실을 '웃프다'. 남성들은 '관계'에 의한 주도성을 강요받으며 의식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자 하며, 그 결과는 그들이 슬그머니 자기 편으로 땡겨 온 '영수증'으로 귀결된다. 문제는 이런 '시뮬레이션'이라도 된 것처럼 동일하게 드러난 남녀의 데이트 과정에서의 역할 관습이, 이후 결혼까지 이어지는 남녀간의 역학 관계를 규정짓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취직'보다는 '실업'과 '비정규직'이 익숙한 2030 세대에게 아버지 세대로부터 이어진 이러한 여전한 성역할은 이제 그들의 '딜레마'로 작동한다. 그들은 여전히 '아버지'처럼 '가부장'이 되어야 하는 정서적 각인에 시달리지만, 현실 속 그들은 그것을 버텨낼 만큼 '특권'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허지웅의 쾌도난마처럼, '남녀 갈등'이라는 인터넷 세상의 지옥도는 결국 계급 갈등 등 현실 갈등의 또 다른 현상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사회, 경제적으로 불안한 사회에서, 그 사회의 약한 고리인 외국인 노동자, 동성애자 들에 대한 반발이 드러나는 것처럼, '실업'이 일상화되어가는 2030 세대는 그 불만을 '남녀 평등'의 문제로 분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pd수첩>은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 이런 결론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방송 후의 논란을 촉발 한 것은?
하지만 <pd수첩> 측의 이런 선의의 의도와 달리, 8월 4일 방영분이 방송 된후 동 방송 게시판은 물론 각종 인터넷 사이트들은 방송 내용과 관련된 논란으로 활활 타올랐다. 

무엇보다 논란이 된 것은, '여성 혐오' 현상의 예로 등장한 '김치녀'와, 그에 대한 사이트를 운영하는 '양성 평등' 주장 운영자의 적절성때문이었다. '혐오' 현상의 두드러진 예로 부터 시작하겠다는 제작진의 선의의 의도는, 그와 달리, 오히려 '김치녀'에 대한 편견을 드러냈을 뿐이라는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남성 사이트 운영자 역시 보편적인 '양성 평등'의 예로는 부적절했다는 중론이다.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전개 과정에서, 남녀에게 가중되는 다른 부담을 설명하기 위해,  문제가 되었던 '김치녀'와 비슷한 실험 예를 등장시킨 것도 문제가 되었다. '김치녀'에서처럼 남성은 무릎을 끓고 여성에게 명품 백을 선물하고, 그것을 보며 반색을 하는 여성들과 난감해 하는 남성들의 반응을 일반화한 것 역시 논란을 촉발시켰다. 

이런 논란을 통해 역설적으로 짚어볼 수 있는 것은 평소같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다큐 프로그램조차, 그것이 '남녀갈등'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만큼 우리 사회 '남녀 갈등'의 수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비록 제작진이 적절치 못한 예를 들어 설명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래서 오히려 '남녀 갈등'을 조장시키는 측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남녀 갈등은, 오히려 '남성의 성 역할'의 과도기적 혼란과, 사회 경제적 부조응의 문제라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논란은 그런 결론의 적절성을 차치하고, 드러난 현상의 적절성 여부만을 놓고 들끓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다. 오히려, 그를 통해 한번쯤은 생각 해 볼만한 문제였던 사회적, 계급적 갈등을 내포한 '남녀 갈등'이, 쑤셔놓은 벌집처럼 되어버렸을 뿐이다. 이는 제작진의 어설픈 접근의 문제, 그리고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 대한 미약한 전개가 무엇보다 큰 이유이겠지만, 아직은 무르익지 않은, 아니 무르익으려고 조차 하지 않은 '남녀 갈등'에 대한 대중적 인식 역시 한 몫을 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다. 불쾌함을 억누르고 한번쯤 생각해 볼 사회적 성숙이 아쉽다. 
by meditator 2015. 8. 5. 16:12

8월2일 50회로 마무리된 kbs1의 대하사극 <징비록>, 최고 시청률 13.8%(22회), 마지막 회 시청률 12.3%(닐슨 코리아 기준)로 그 전작 <정도전>에 비하여 아쉬운 시청률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저 시청률, 화제성만으로 <징비록>을 이전의 <정도전>의 벽을 넘지 못했다라는 평가를 내리기에는 이 작품이 갑갑한 오늘의 현실에 남긴 시사점은 만만치 않다. 




시청률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에의 경계
이제 와 하는 말같지만 애초에 <징비록>은 시청률이 높이 나올만한 드라마라 보기는 어려웠다. 이미 대하 사극의 소재로 울궈먹을 대로 울궈 먹은 임진왜란이라는 소재, 제 아무리 <명량>이 인기를 얻었다 해도, 아니, 오히려 영화 <명량>이 인기를 얻어서 더더욱 어쩌면 식상해진 역사적 소재를 대하사극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징비록>은 애초에 그런 태생적 핸디캡을 가진 작품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징비록>이 붐을 일으킬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드라마가 '징비록'이기 때문이다. '징비록'은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간다'는 시경의 문구에서 따온 제목이다. 임진왜란 당시 정치 현장에서 난을 겪은 서해 류성룡이 드라마에서 나왔듯이 정권으로부터 소외된 이후 칩거하며 적어간 전란의 속살이다.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전란의 과정에서 겪은 경험을 풍부한 사료와 경험을 밑바탕으로 써내려간 징비록은, 말 그대로 '객관적' 서술에 방점이 찍힌다. 심지어 임진왜란에 대한 저술 중, <선조 실록> 등 실록이나, 중국과 일본의 그 어떤 사료보다도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저술로 인정받고 있는 저술이다. 

가장 정권의 중심에서 임진왜란을 겪었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그 역사의 소용돌이를 집필했다는 의미는, 결국, 징비록의 첫 글자 혼날 징처럼 자신이 몸담은 역사를 혼내고 경계하는 내용일 수 밖에 없다. 드라마의 마지막 회, 선조와 독대한 류성룡은 선조에게 일갈한다. 전쟁이 끝난 이 마당에도 선조는 한 치의 반성도 없이 구구절절 자기 변명만 늘어놓는다고.  바로 이렇게 자신의 주군과 독대한, 어쩌면 그에게 주어진 단 한번의 정치적 구원의 기회를 꾸짖음과 반성에의 독촉으로 마무리한 류성룡의 모습은, 바로 그대로 '징비록'의 입장이요, 드라마 <징비록>의 관점이다. 

드라마 <징비록>이 바라본 임진왜란은 어떤 것이었을까? 임금을 비롯한 정치 관료들은 자기 안위만 생각하고, 그런 지배층에 의해 정치는 이리저리 당파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스스로 국난의 위기로 빠져들어 간다. 심지어 전쟁의 와중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임금은 적이 눈앞에 오자 싸우는 대신 도망치기에 바빴고, 양반들은 적에게 나라를 넘겨줄 지언정 한 명의 군사라도 더 도모하기 위해 공을 세운 노비를 '면천'시켜 주겠다는 자구책에 몸을 던져 반대를 한다. 잠시라도 전쟁이 소강 상태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 사이에 정권은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다시 움직이고, 임금마저 뜻을 세운 의병들을 불의의 반란을 경계하며 제거하는 등 협잡을 일삼는다. 

이렇게 정권이 계파와 임금의 이해에 따라 춤을 추는데도 7년의 전란을 버텨낸 힘은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난 강직한 세력과 우국충절의병, 그리고 자신의 땅을 지키고자 떨쳐 일어난 양민과 노비들이다. 지배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적들과 소통하고자 할 때, 그들은 자신의 땅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심지어 정권에 반하며 국토를 지켜냈다. 하지만, 마지막 회, 도망치는 적군을 한 명이라도 살아보내지 않겠다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마지막 해전을 벌이던 이순신이 그곳에서 전사하고, 정권 내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기는 전쟁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류성룡마저 전쟁 후 '토사구팽'당하는 것으로, 그 '결사항전'의 의는 꺽이는 것으로 드라마 <징비록>은 끝난다. 

그렇게 드라마 <징비록>은 철저한 징계의 역사를 다룬다. 전쟁의 와중에서 잠깐의 승리보다, 전쟁의 와중에서 조차, 아니 전쟁을 코 앞에 두고, 적군을 코 앞에 두고서도 자기 계파의 이해, 자신의 이해에 따라 춤을 추는 정부 각료, 임금 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 냄으로써 오늘을 경계한다. 더구나 그것들이 현실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더더욱 현실감있게, 과거를 오늘에 되살려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최근 미중일 세 나라의 이합집산 속에 외교적 입지가 애매해지는 우리의 처지와 공교롭게도 비교되는 임진왜란 당시 왜와 명 사이에서 무능력한, 하지만 철저히 동아시아 세력 판도에 따라 그 운명이 갈려지는 한반도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냄으로써, 또 다른 현실의 반추를 삼았다. 



드라마 징비록 속에서는 강건한 류성룡이나, 우직한 이순신보다 노회한 선조가 돋보였던 이유이다. 또한 정직하고 강직한 의병장과 같은 인물들은 결국 역사와 정권의 희생양으로 마무리되어 비애를 남긴다. 그렇게 드라마는 쉽게 우리에게 숭앙하고픈 충신 대신,현실에서 쉽게 찾아 볼  역사 속 비겁자를 내세워 현실을 경계한다. 

그렇게 승리과 영광의 역사 대신, 실패와 치욕과, 비굴의 역사, 그럼에도 그 속에서도 잡초처럼 피어나는 끈질긴 힘을 그려내려고 했던 드라마 <징비록>은 애초에 다수 시청자들의 환호를 받기에는 고집스런 작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정권의 무능, 지배층의 자기 이익만이 우선되는 현 시점에서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현실에의 경계가 두드러졌던 '수작'이라고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징비록>의 의의가 짚어져야만 한다. 그저 얄미운 인간 선조가 아니라, 무능한 당파의 권신들이 아니라, 무기력한 조선의 외교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현실의 모습이 다름아님을 징비록은 내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by meditator 2015. 8. 3. 12:37

tvn<오 나의 귀신님>sbs<너를 사랑한 시간>은 모두 여성들의 로맨틱한 감성을 설레이게 하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다. 케이블 평균 3% 내외의 시청률, 압도적인 상대 주말 드라마를 상대로 한 5%를 겨우 넘는 시청률과 무관하게. 매회 이 드라마 속 사랑의 진도가 세간에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이제 <오 나의 귀신님> 10, <너를 사랑한 시간> 12, 중반을 넘어선 이 드라마는 자중지난에 빠졌다. 물론 로맨스물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의 갈등이지만, 최근 이 두 드라마가 빠지고 있는 사랑의 딜레마는 그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갈등이라기엔 주인공의 정체성조차 흔들 정도로 치명적이다.

 

 

 

 

 

 

<오 나의 귀신님>- 선우가 사랑하는 건 순애일까, 봉선일까

로맨스물에서 '연적'이야 사랑의 승화를 위한 아름다운 갈등 요소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연적이 귀신이라면?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깃든 귀신이라면?

 

아버지와 운전기사 식당을 하던 순애(김슬기 분)는 범인을 알아낼 수 없는 사고로 비명횡사한 처녀 귀신이다. 이제 이승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 한을 풀거나, 그게 아니면 남자를 만나 처녀의 한을 풀면 승천을 할 수 있지만, 기한 내에 그렇지 못하면 악귀가 되어 영원히 이승을 떠돌게 된 처지이다. 자신이 죽어간 이유를 알지 못하는 귀신 순애가 택한 방법은 애먼 여자들의 몸에 깃들어 남자들과 하룻밤을 보내고자 하는 것, 하지만 처녀 귀신 순애의 음기를 이겨내지 못한 남자들은 응급실행이다. 그러던 중 서빙고 보살에 쫓겨 우연히 들어간 봉선(박보영 분)의 몸으로 만나게 된 강선우(조정석 분)가 자신을 구원해줄 '양기남'인 것을 알고 결사적으로 매달린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고 봉선을 생각할 정도였던 강선우가 예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변한 봉선과 점차 가까워지고 결국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르자, 귀신 순애의 처지는 애매해진다. 강선우가 봉선과 키스를 한 순간 튕겨져 나간 순애, 그저 자신이 악귀가 되지 않기 위해 이용하려 했던 선우에게 점점 '연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선우를 짝사랑하던 봉선은 선우의 사랑을 얻고, 자신은 악귀를 피해 승천하는 길을 얻으면 된다 했던 귀신 순애가, 선우가 제안한 12일에 고심을 하며 귀신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오 나의 귀신님>의 딜레마는 여기서 생긴다. 처음 셰프 선우의 말에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봉선, 그녀는 선우를 짝사랑했지만, 정작 선우는 자신감없는 봉선을 답답해 하며 내쫓다시피했었다. 그러던 봉선의 몸에 순애가 들어오면서, 순애의 도움으로 방송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는 등 여러가지 사건을 겪으며 선우는 봉선을 달리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선우가 사랑하는 것은 봉선일까, 순애일까. 봉선은 사랑을 얻고 순애는 승천을 하면 된다했지만, 이제 순애가 선우를 사랑하게 되면서 문제는 간단치 않게 된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여주인공은 봉선인데, 실제 드라마 속 여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것은 봉선의 몸에 빙의된 순애다. 결국 드라마의 제목이 '오 나의 귀신님' 인것처럼 순애가 주인공이라는 것일까? 이것이 묘한 것이 분명 박보영이 연기하는 봉선과 순애가 빙의된 봉선이지만,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박보영이 보여준 연기의 절묘함때문인지, 설정의 애매함 때문인지, 마치 선우가 봉선과 순애 사이에 양 다리를 걸친 것처럼 느껴진다. 더구나 극중 실제 봉선의 비중은 현격하게 낮아지고, 그녀의 캐릭터조차 초반 자신없는 모습에서 갑자기 선우에게 적극적인 모습까지 개연성없이 들뛰다 보니, 더더욱 극중 여주인공의 위치는 봉선에 빙의된 순애에게 집중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녀가 그저 봉선에게 빙의된 귀신이란 것을 잊지 않는다. 이것이 그저 사연이 아니라, 이제 10에 들어선 <오 나의 귀신님>에서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 이 드라마의 딜레마이다. 결국 악귀가 되건, 승천을 하건 양단간에 결정이 날 순애, 그렇다면 남겨진 봉선, 그녀가 선우와 사랑을 이어가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이런 생각조차 들게 되는 것이다.

 

 

 

 

<너를 사랑한 시간> 17년의 우정을 우정이라 할 수 있을까?

대만 드라마 <연애의 조건>을 리메이크한 <너를 사랑한 시간>은 하지만 원작 대만 드라마보다는, tvn에서 방영한 <응답하라 1997>이 먼저 연상되는 드라마이다.

 

이제 삼십대 중반 나이가 지긋한 두 주인공들, 애초 원제로 삼으렸던 '너를 사랑한 시간 7000'처럼 17년을 넘게 '친구'로 지내왔던 이 친구들의 이야기는, <응답하라 1997>이 그랬던 것처럼 고등학교 시절 철없는 남녀 사이의 우정과 연인 사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서른 중반이 넘도록 여전히 친구 였다는 두 사람 오하나(하지원 분)와 최원(이진욱 분).

 

고등학교 시절 철없는 소꼽장난 같은 사랑과 우정의 딜레마는 <응답하라 1997>에서 성인이 된 후 바로 '사랑'의 딜레마로 승화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까. 더 이상 낯부끄럽게 '친구'니 하는 걸로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동성'간의 사랑이건, '이성'간의 사랑이건 다르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가는 가장 큰 일중 하나가 바로 '사랑'의 통과 의례를 겪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너를 사랑한 시간>의 두 주인공 최원과 오하나는 말만 서른 중반이고, 얼굴의 액면만 그렇지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의 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직장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오하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일에 대한 지시를 내릴 때 외에는 영락없는 고등학교 시절 오하나에서 하나도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최원 역시 마찬가지다. 아가능불회애니(我可能不會愛你)의 번안어 '너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야'라고 고등학교 시절 외친 이유, 뚜렷한 이유없이 오하나를 '친구'로 대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최원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나이가 서른을 넘어 중반을 지났지만, 고등학교 시절 서로 오해하고 친구라 눙치던 그 자존심센 청소년들이다.

 

마치 '키덜트'의 상징체'와도 같은 오하나와 최원은 하지만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오래 산 부부'와 같은 행동을 한다. 그들이 매번 보이는 똑같은 행동거지들은 마치 이혼한 부부들이 함께 살며 익숙해졌던 습관들을 되풀이 하며 보이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그렇게 서로에게 의존적인 두 사람인데, 굳이 서른 중반을 넘어서까지 '친구'가 꿋꿋하게 우기는 '퇴행'이나 '자기 기만'도 이해가 가지 않거니와, 삼년 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사라진 약혼자의 출현으로 오하나는 흔들리기 까지 한다. 그의 실종에 대해 묻고 따지지도 않고 믿어주고자 하는 오하나는 어떻게 17년간의 우정에 대해서는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외면하려 하는 것일까. 결혼까지 약속한 서먹한 사랑과, 17년산 부부 같은 우정, 그것이 바로 <너를 사랑한 시간>의 딜레마이다.

 

귀신에 빙의된 사랑이나, 사랑과 우정 사이에 여전히 흔들릴 수 있는 서른 중반 커리어 우먼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소재로는 솔깃하다. 시청률과 상관없이 조정석과 박보영의 설레이는 사랑의 연기와, 하지원의 화려한 패션과 그냥 서있기만 해도 설레일 듯한 이진욱과 윤균상도 좋다. 하지만, 구색만으로 16부작 미니 시리즈를 이끌어 가기에 <오 나의 귀신님><너를 사랑한 시간>의 스토리는 빈약하다. 심지어, 개연성에 의심이 가는 설정들이 마구 난무한다. 그저 여자들이 좋아할 이야기로 구색을 맞추지만 말고, 그 속에 한번쯤은 '사랑''인연'에 대핸 진진하게 들여다 보고 고민해 보게 만드는 '진심'이 담겨져야 하지 않을까. 사랑에의 '퇴행'이나 '탐닉'을 강요하지 않고, 사랑 속에서 '성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5. 8. 2. 18:00

1. tv 속 대한민국은 ‘철거중’

공교롭게도 10월 28일 tvn에서 방영된 두 편의 드라마에는 연달아 '철거'가 등장했다.

그 하나가 9시15분에 방영되는 <감자별2013QR3(이하 감자별)(극본;이영철, 장진아, 이광재 연출;김병욱)>이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그 다음 시간인 9시 59분에 방영되는 <빠스껫볼(극본;김지영, 장희진, 연출;곽정환)>이다. 드라마<빠스껫볼>의 시대 배경은 1930년대요, 시트콤<감자별>은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두 작품에서 모두 주인공, 그리고 그의 가족(그래봤자 엄마뿐이지만)은 '철거'를 당해 거리로 나앉는 신세가 된다. 근, 현대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은 '여전히 철거중'이다.

<빠스껫볼>의 시대 배경은 일제시대다. 드라마는 주인공 강산(도지한 분)이 사는 시대를 마치 '세밀화'처럼 묘사해간다. 그리고 그 묘사의 백미는 바로 강산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사는 움막촌이다. 그저 거적데기 하나 덮은 비, 바람이나 겨우 피할 거 같은 움막촌이지만, 강산과 그의 어머니에겐,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가난뱅이들에겐 그곳이 이웃과 얼싸안고 사는 삶의 보금자리이다. 일본이 식민지 토지 정리 사업을 전투적으로 벌이면서, 농촌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남부여대'로 그래도 굶어죽지는 않겠지 라는 마음을 가지고 서울로 밀려든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빠스껫볼>에서 묘사된 그대로 허름한 움막촌이다. 하지만 도시 개발을 시작한 일본인들과, 그 일본인들에게 '영혼을 판' 친일 자본가들은 자신의 부를 확장시키거나 보존키 위해 거리의 주먹패들을 동원해 움막촌을 ‘도시정비 사업’이란 명목 하에 쓸어버린다. 폭력적 철거를 통한 원시적 자본 축적이 시작된 것이다. 몽둥이를 앞세운 그들 앞에, 저항은 폭력을 낳을 뿐이다. <빠스껫볼>에서는 철거 과정에서 다친 노인이 주인공 강산의 죄책감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 대한민국 철거사의 시작이다.

<감자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로등조차 꺼져버린 시커먼 골목을 매일 밤 벌벌 떨며 지나가야하는, 산꼭대기에 있는 조그만 집은 나진아(하연수 분)가 세 살 때부터 살던 집이다. 하지만,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죽고, 나진아네 소유였던 집은 전세가 되고, 월세가 되고, 이젠 그마저도 '철거 대상'이 되어 집을 비워줘야 한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 가난한 모녀가 드리울 곳은 없다.

<빠스껫볼>의 거적데기만 두른 집에 비하면, 더운 물이 콸콸 나오는 뜨신 집은 많이 발전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된 철거가 2013년에도 지속되는 대한민국은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어미 혼자 자식 한 명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이라는 것에서는 말이다. 일제시대건, 2013년이건 누군가에겐 감지덕지 삶을 깃들여 갈 소중한 보금자리가, 다른 누군가에겐 '환금성의 투기 대상'일 뿐이다. 수십 년이 흐르고, 세기가 바뀌어도 그 어떤 것보다도 변함없는 대한민국의 진리이다. tvn의 두 드라마는 단 두 시간 만에 '철거사'를 요약한다.

2. 대한민국 ‘부’의 통과의례; ‘철거’와 ‘건설’

10월 20일 <sbs스페셜 철거왕(연출;박준우)>은 남해 작은 섬 마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무작정 상경, 불과 약관 28살에 '다원 건설'의 사장이 된 청년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겨우 공고만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지하 단칸방에 살던 청년, 회사에 들어가서도 하루에 세 시간을 잘까말까 성실하게 업무에 임해 사장의 눈에 들었던 청년, 28살에 사장이 되어, 불과 15년 만에 건설 재벌이 된 그야말로 현대판 '개천에서 용된' 케이스로 고향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마을에서 이렇게 출세한 사람이 없다며 입을 모아 칭찬을 한다.

하지만, 그의 성공 스토리에는 숨겨진 이면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철거왕'이라고 부른다.

일찍이 1970년대 '광주 대단지' 사건을 시작으로, '아파트 숲이 드리우고, 고층 빌딩이 즐비한 아름다운 서울'이 되기까지, 숱한 서울의 달동네들은 가차 없는 철거에 스러져 갔다. 특히 중동 건설 붐이 막을 내리고 건설사들의 밥줄을 대기 위해 치러 진 1980년대의 무차별 개발은, 공권력이 뒤로 물러나고 조합이 주체가 된 사적 영역이 되면서, '적준'등의 기업이 철거 현장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경찰이 멀뚱히 지켜보는 가운데, '용역'이란 이름을 내걸고 '철거 깡패'들이 거주민들을 폭력적으로 내쫓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 돋보인 활약을 보인 사람이 바로 <sbs스페셜>의 철거왕이요, 그는 폭력적 철거에 앞장서는 걸 발판으로 '적준'에 이어 철거의 대명사가 된 '다원 건설'의 사장이 되었다.

1998년 천주교 인권 위원회는 그가 만든 기업이 서울 곳곳에서 폭력적 철거를 일삼았던 내용을 담아 <다원 건설 철거 범죄 보고서>를 펴냈다. <sbs스페셜>은 그 보고서를 근거로 당시의 상황을 재연한다. 부모들이 철거를 막기 위해 밖에 나가 있는 동안 홀로 남은 아이들이 있는 집에 그들은 거침없이 불은 놓는다. 하지만 부모는 철거 깡패들이 막아선 바리케이트 밖에서 자기 자식을 구하지도 못한 채 그저 울부짖기만 할 뿐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망루에 올라 농성하는 사람들에게도 불을 놓는다. 불이 붙어 떨어진 사람에게 돌아온 건,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철거 깡패의 집단 폭력이요, 차가운 감방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막으려 했지만, 성폭력도,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폭거에 집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갈 곳을 잃었었다고 이제 와 <sbs스페셜>은 밝힌다.

'적준'의 직원으로 시작하여, '다원 건설'을 이루어 가는 한 청년의 입지전적 성공 스토리는 <황금의 제국(극본;박경수, 연출;조남국)>과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하 스캔들(극본;배유미, 연출;김진만, 박재범)> 주인공들의 성공 스토리이기도 하다.

<황금의 제국>에서 철거민의 아들 장태주(고수 분)가 '황금'에 자신의 영혼을 팔게 된 계기는 바로 '철거'다. 철거 현장에서 분신을 한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자 스스로 괴물이 되는 길을 택한 그는 결국 그로 인해 또 다른 철거민을 죽게 만드는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성진 그룹을 넘보는 또 한 명의 건설 기업인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고아 출신으로 장인의 천하 건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철거민들의 저항에 경찰조차 주춤거리자, 직접 포크레인을 밀고 철거를 감행하는 건설사 오너가 바로 태하그룹의 주인이 된 <스캔들>의 장태하(박상민 분)다. 어떻게 ‘폭력적 과정’을 거쳐 이 나라의 재벌들이 성장해왔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 낸다. 드라마 속 ‘철거’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넘어서야 할 ‘통과 의례’처럼 묘사된다. 대한민국 재벌의 성장사를 단적으로 상징해 내는 것에 ‘철거’와 ‘건설’만큼 도식적으로 명확한 것이 없다.

3, 2013년에야 밝힐 수 있는 건설 입국의 뒤안길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젼을 통해 등장한 인물들, 사건들의 이미지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야망의 세월(극본;나연숙, 연출;이종수)>이나, <사랑과 야망(극본;김수현, 연출;곽영범)>의 남자 주인공들은 그저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었음에도 사람들은 그의 모델이 된 누군가가, 정말 드라마 속 그 사람처럼, 의지의 입지전적 인물에, 정의롭고 양심적인 리더라 믿으며 한 표를 행사했다. 그리고 그 사람만큼, 그 사람이 모델이 되어 등장한 드라마 속 우리나라는 '수출 입국'에, '건설 입국'의 화려한 조명만 반짝거렸었다. 한강을 따라 즐비한 아파트를 세우기 위해, 신도시라는 신기루를 완성하기 위해 부서지고, 빼앗기고, 쫓겨난 삶의 흔적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전쟁의 상처와 가난을 딛고, 그 산동네를 탈피한 '개천에서 용난' 신화만이 부각되었었다.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각자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 시킨 승리자가 되어야 했고, 그 성공 가도에서 일탈은 곧 그저 가난이 아니라, '패배자'라는 단호한 낙인까지 감수해야 했다. 누구나 부지런히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면 성공해서 번듯한 내 집 한 칸에서부터 대통령까지 될 수 있는 시대였고, 그렇지 못한 이유는 게으르고, 술독에 빠져있고 노름이나 하는 모자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성공시대' 대통령의 5년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유행어는 되었지만, 히트작은 되지 못했던 영화 주인공의(사실은 실제 탈주범의)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현실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집을 가진 사람은 집을 가져서 '하우스 푸어'가 되고, 젊은이들은 부모가 부자가 아니라면 '88만원' 세대가 따 논 당상이기 십상인 세상이 되었다. '성공'이란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빈익빈 부익부'의 처절한 리그만이 현실이 된 시대에, 이제 드라마는 한때 영광과 승리로만 윤색되던 시대를 솔직하게 복기하기 시작한다. 누구나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 성공 뒤에 스러진 삶들이 있다고.

1988년을 배경으로 한 <스캔들>과 1990년을 배경으로 한 <황금의 제국>은 공교롭게도 '건설 입국'의 뒤안길을 다룬다.

<스캔들>에서 등장한 건설 자본은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안전 기준 따위는 무시하고 설계 도면을 고친다. 심지어, 그로 인해 건물이 붕괴될 위기에도, 그리고 붕괴된 이후에도 자신들의 죄과에 대한 반성이나, 사람의 생명보다는, 사업의 보전이 우선되는 도덕적 불감증과 자본 이기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88올림픽은 범국가적 축제가 아니라, 철거민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시위도 할 수 없는 준계엄령인 상황이요, 철거를 경찰과 공무원의 비호 아래 폭력적으로 밀어 붙일 수 있는, 그리고 건물 붕괴를 테러 위협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는 걸 보여준다.

<황금의 제국>에는 철거 대상인 건물과 거기에 남아 농성을 하는 사람들과, 철거 깡패들과, 그들을 부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또 다른 '건설 자본'이 등장한다. <황금의 제국> 주인공 장태주의 아버지는 60평생 열심히 일해 가게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권리금까지 주었지만, 그 가게는 단 한 달 만에 철거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에게 닥친 건, 철거 깡패의 무차별 폭력이요, 가게 주인이 분신으로 생명이 경각에 놓인 태주의 아버지에게 돌려 준건 입에 발린 '기도'뿐이었다.

철거민들의 시위, 분신자살, 철거 깡패, 경찰과 공무원의 비호, 건설 자본의 폭거, 이것이 이제와 무에 그리 새삼스러운 거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그 시절에는, 그저 대학생들의 유인물에서나 만날 수 있는 '진실'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비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혹은 신문 하단을 통해서만 단신으로만 전해지던, 절대로 방송을 통해서는 보여 지지 않던, 역으로 성공의 팡파레만 울려 퍼지던 그 시대의 사실들이, 2013년 드라마를 통해 이제야 버젓하게 그 시절 사실은 이랬다며 이야깃거리가 되어 나타난다.

그때만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여기의 이야기가 당장 등장하는 건 드물다. 하지만, 이 시대 '빈익빈 부익부'에 지쳐가는 사람들에게, 그 시절의 진실들은 묘한 위로가 된다. '성공'만이 삶의 바로미터가 아니라는 것을, '빈익빈'이 패배가 아니라, 제도적 부조리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통해 이 시절의 고단한 삶을 버틸 자존감을 심어준다.

4. 결자해지(結者解之)

<스캔들>이 방영되는 동안 두 번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첫 번 째, 부실 공사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 건물을 장태하는 폭탄을 사용해 부수어 버린다. 80년대 건설 입국의 시대, 자재를 빼돌리는 등 '부실'로 몸을 불리던 건설 재벌의 실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그리고 마지막 회, 다시 한 번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이번엔 부실로 인한 붕괴가 아니다. 부실을 덮기 위한 의도적 폭발도 아니다. 여전히 건설 자재를 빼돌리며 부실 공사를 한, 그리고 그것을 의롭게 알리려다 우아미의 남편 공기찬 대리가 죽어간 주상 복합 제우스가 '태하 건설'의 '결자해지'로 스스로 주저앉아 내렸다.

<sbs스페셜>의 입지전적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 철거왕은 그가 저지른 불법으로 인해 도망다니다 경찰에 잡힌다. <스캔들>의 장태하는 결국 자신을 대신해 벌을 받으려는 아들의 사랑에 감복해 그간 벌인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 <황금의 제국> 장태주는 또 한 번의 철거를 감행하며 성진 그룹을 넘보는 야망을 불태우는 대신, 홀연히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단죄의 길을 택한다. 2013년 드라마 속 주인공들 스스로 자신의 죄를 감당함으로써 ‘결자해지‘한다.

공교롭게도 2013년 개봉한 영화 <화이(감독;장준환)>는 원수의 아이를 유괴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건설 재벌이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스캔들>과 비슷하다. 영화 속 아버지들도, <스캔들>의 아버지 하명근도 아이를 유괴한다. 그 유괴는 그저 단순한 유괴라는 범죄만이 아니라, 충동적이었건 의도적이었건, '징벌'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아이는 유괴범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를, 그들을 닮으며 자라난다.

영화<화이>에서 자신이 유괴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화이(여진구 분)는 영화의 남은 시간을 몽땅 자신을 키워 준 아비들과, 아비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자들을 죽이는데 쏟아 붙는다. 영화 <화이>의 마지막 장면은 화이와 그의 아비 김윤석의 대결이 아니었다. 모든 아비들을 해치운 화이가 아비들에게 용역을 수주한 건설 재벌 진사장을 죽이는 장면이 마지막이었다. 그것은 그가 결국 이 모든 악의 시초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를 처치함으로써, <화이>는 상징적이지만, 즉자적으로 왜곡된 우리의 현대사를 청소한다.

<스캔들>의 화법은 좀더 은유적이다. 똑같이 유괴를 당한 하은중(김재원 분)은 다른 선택을 한다. 장은중이 된 하은중은 그의 아비들을 용서한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그저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피상적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장태하가 그의 아들을 되찾아 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가 사주한 살해 음모를 시인하고 감옥에 가고, 그 사건의 시발이 된 부실 건물을 무너뜨려야만 한다. 하명근 역시 마찬가지다. 장태하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 혈육과의 생이별을 가했지만, 그의 온 생애에 걸쳐 장태하의 아들을 사랑으로 키워 내야 하는, 그래서 그 아이가 '용서와 화해'의 전도사가 될 수 있게 키워내야 하는 형벌을 스스로에게 짐지웠다. <스캔들>의 사랑은 이상적이지만 난해하다. 그러기에 보다 환타지스럽고, 동화적이다. 드라마라는 보다 대중적 장르의 한계에서 오는 우유부단한 해법일 수도, 복수조차 극복한 ‘화해’를 고민한 작가가 찾아낸 지난한 고민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황금의 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복수를 되갚기 위해 ‘괴물’이 되었던 주인공은 괴물 왕국의 한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시대를 극복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이제 우리 시대 아들들의 몫이라고 드라마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by meditator 2015. 8. 2. 1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