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미스터리 격정 멜로드라마'를 표방한 tvchosun의 새 드라마 <바벨>의 출발은 3.5%(닐슨 코리아 유료가구 기준)로 순조롭다. <바벨> 제작진은 복수를 위해 인생은 내던진 검사(박시후)와 결혼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진 여배우의 사랑, 그리고 살인과 암투 속에 드러나는 재벌가의 탐욕스런 민낯과 몰락을 그려내겠다고 밝혔다. 미스터리 격정 멜로드라마답게 4부까지는 '19금' 드라마로 방송된다.




<각시탈> <최고다 이순신> <화랑> 등을 연출했던 윤성식 감독은 지난 24일 제작발표회에서  "그간 연출을 해오며 절절한 멜로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라며 "완성도 높은 대본에 배우들의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호흡으로 자신감을 얻었다. 끝까지 긴장감과 재미를 놓치기 않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어 박시후, 김해숙 등 캐스팅에 대해서 "대본을 본 뒤엔 그림을 그려보게 되는데... (촬영을 진행해 보니)이들 배우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라고 말했다. 이어 "배우들이 완결성 있는 연기로 탄탄한 대본을 잘 살려냈다"라고 출연진에 대한 믿음을 피력했다.

그는 미스터리한 장르적 요소가 많지만 무엇보다 차우혁(박시후)과 한정원(장희진)의 이루기 힘들 것 같은 사랑, 하지만 그것을 향해 투쟁하는 두 사람의 예측불가하고 변화무쌍한 운명을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로 꼽았다. 또한  "흔한 재벌가의 권력 암투가 아니라, 색다르고 파격적인 신현숙, 태민호, 태수호의 캐릭터 변주에 주목해 달라"라고 부탁했다.





<바벨> 관전 포인트는? 

전작인 <러블리 호러블리>가 미처 끝나기 전에 몰입감 있는 대본과 감독-배우들에 대한 믿음으로 출연을 결정했다는 박시후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대해 "전작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냉철한 카리스마를 표현하기 위해 차갑고 묵직한 남자다운 매력을 선보이겠다"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멜로의 장인이라고 불리지만, '격정 멜로'는 처음이라 걱정이 된다"라면서도 "첫 촬영부터 키스신을 찍었다. 하지만 덕분에 상대 배역인 장희진과 친숙해져 작품에 매진할 수 있었다"라며 웃었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 여배우였지만 신문기자 차우혁의 기사로 인해 결국 태민호와 결혼, 거산 그룹의 며느리가 된 한정원 역할을 맡은 배우 장희진은 "기존에 내가 했던 역할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보다 감정 표현이 다양하며 적극적인 성격"이라고 캐릭터의 차별성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바벨>은 출연 배우들이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아 그들의 연기 변신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연과 비밀이 많은 거산가의 안주인 신현숙 역할을 맡은 김해숙은 "배우라면 언제나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변신에 설렌다"며 "아들에 대한 그릇된 모정으로 욕망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나를 주목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버드 대학 경영학과 수석 졸업이지만 태 회장의 외도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 때문에 30여 년 동안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온 태민호 역할을 맡은 김지훈은 "악역은 거의 처음이다시피 한데, 기존의 악역과는 다른 역대급 악역인 자신의 캐릭터를 주목해 달라"라고 말했다.


태민호 캐릭터와 상반된, 소심하고 유약한 마마보이 태수호 역을 맡은 송재희는 "대본을 읽고 '이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연기 변신에 대한 갈증을 드러냈다.


by meditator 2019. 1. 31. 13:31

선견지명이다. 지난 2013년 ebs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통해 '미세먼지'의 위험성, 그 중에서도 특히 자라나는 성장이 아이들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 다루었다. 그로부터 햇수로만 6년, 다큐가 제시한 해법에 우리는 얼마나 접근했을까? 무려 6년 전의 다큐를 통해 '미세먼지' 해법에 있어 여전히 지지부진한 우리의 현실을 실감해 본다. 

 

   

 

2013년, 초미세먼지를 주목하다 
2013년의 다큐는 '미세먼지'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인한 연무가 아직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던 시절, 정연신 국립 기상 연구소 황사 연구과장은 토양 입자가 주성분인 1~20 ㎛(마이크로미터)의 '흙비'로 중국 북부나 몽골 사막으로 부터 우리나라로 날아오는 건 주로 1~10㎛로 '계절적' 요인이 크다. 2013년 기준 한 해 130일 이상 연중무휴로 한반도를 뒤덮은 '연무'는 지름 pm2.5(2.5㎛) 이하의 초미세먼지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1㎛은 1m의 백만 분의 1, 초미세먼지 pm 2.5는 머리카락의 1/20~1/30분의 1정도이다. 이 상상하기 힘든 사이즈의 가장 비근한 사례를 들자면 '담배 연기'가 가장 흡사하다. 인간 문명이 만들어 낸 화석 연료의 연소 과정, 즉  '난방, 자동차, 공장'등 우리 문명의 결과물이 주원인이 된다. 

왜 이 '미세한' 먼지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대부분 큰 먼지들은 우리의 목에 걸리고, 인후부에서 제거되지만, 이 '미세먼지'들은 이러한 호흡기의 장막들을 거뜬히 통과하여 우리 몸 깊숙이 스며들어 온몸 구석구석 영향을 미친다. 코털을 거쳐 기관지 섬모를 넘어 폐포에 흡착하여 염증과 각종 폐질환의 원인이 되는가 하면, 혈관에 스며들어 모세 혈관을 수축시키는 등 심혈관계에도 문제를 발생시킨다. 지금까지 비소 세포 암등 비흡연환자의 폐암에 대해 간접 흡연이나 라돈 등의 영향이라 알려졌다면 최근에는 미세먼지의 영향을 주목한다. 다큐는 그 대표적 예로 울산 화최근의 새로운 학설에 따르면 치밀 조직이라 외부 물질의 유입이 힘들다고 알려진 뇌에 조차 미세 먼지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즉 후신경을 통해 후점막에 침적된 미세먼지는 행동기능 장애 및 각종 뇌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성장기라서 더 치명적인 
이렇게 우리 몸 구석구석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미세먼지, 다큐는 특히 아이들을 위협한다고 밝힌다. 흔히 오해를 하는 게 아이들을 어른의 축소판이라 하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 의사들은 우려를 표명한다. 아이들은 그저 덜 자란 어른이 아니라, 성장기의 아이들은 모든 신체 조직이 급격한 성장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로, 그만큼 외부적 요인에 대한 흡수가 빠른 시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좋은 것들 뿐만 아니라, 미세 먼지와 같은 나쁜 환경적 요인에 대해서도 성장기의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빨리 많이 흡수하게 되며, 이런 측면에서 아이들에 대한 미세먼지의 습격은 보다 '민감하고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다큐는 밝힌다. 

찻길 옆 아파트에 사는 두 살의 승찬이와 다섯 살의 민찬이는 환절기가 아닌데도 비염 약을 달고 산다.  이렇게 계절성 질환으로 알려졌던 비염 등의 호흡기 질환이 이제는 1년 내내 기승을 부린다, 대표적인 알러지 질환인 소아 천식 등도 늘어나는 추세다. 

아이들만이 아니다. 임산부의 태아에 대한 영향도 심각하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세먼지가 10㎛ 증가할 때마다 태아의 좌우 머리뼈가 0.16㎛ 감소되며 대퇴골의 길이 역시 줄어들고, 조산의 위험성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해결을 위해 노력한  '청정국가'
외국의 사례는 어떨까? 청정 국가로 스웨덴으로 시선을 옮긴다. 청정국가로 알려졌지만 스웨덴이 첨부터 청정국가였던 건 아니었다. 수도 스톡홀름의 훈스가탄 거리, 하루 300만 대의 차량이 이동하는 우리나라로 치면 테헤란로 같은 거리, 이곳 역시 한 때 미세먼지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추운 나라인 스웨덴은 스노우타이어의 징이 도로 바닥과 마찰하며 생기는 미세 먼지의 폐해가 심각했다. 2011년 스웨덴 정부는 이 지역을 다니는 차량에 스노우 타이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 그러자 미세먼지 배출이 반으로 줄었다. 

그런가 하면 청정 도시로 알려진 하마비 시의 경우 미세 먼지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민 중 30%가 알러지 환자인 하마비 시는 알러지와 관련된 제품을 '인증'하며, 특히 '미세먼지'와 관련하여 청소기 필터의 '인증'에 있어 까다로운 조건을 거치도록 한다. 

전세계적으로 미세 먼지가 심하기로 소문난 미국의 뉴욕시, 뉴욕시의 퀸즈 중학교 앞에는 애즈마(asthma; 천식) 프리 스쿨 존 표지판이 놓여져 있다. 대표적인 알러지 질환인 천식 환자, 나아가 미세먼지로 부터 학교를 보호하기 위해 애즈마 프리 스쿨 존 법을 만들어 실천하다. 우선 미세먼지가 심한 낮시간, 창문을 열지 않고 대신 에어컨을 켜며, 스쿨 버스는 주차와 동시에 시동을 꺼야 하며, 이를 어길 시 벌금과 위반 티켓을 끊고,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오전 7시에서 오후 4시까지 학교 앞에 주차를 금지하는 등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법의 실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학부모 교육에 주력한다. 

미국, 스웨덴의 사례를 통해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건, '실천'이다. 즉 스웨덴과 같은 국가가 청정 국가가 된 건 애초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했기 때문이라는 그 '실천'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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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음벽만 있어도 
다큐는 우리나라의 사례를 돌아본다. 우리나라 전체가 이런 미세먼지의 습격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곳이 동일하지는 않는다. 탄소의 불완전 연소로 인한 발생하는 대표적 발암물질인 블랙 카본이 미세먼지의 핵심 물질로 추정되는 가운데, 당연히 차량이 많은 곳의 미세먼지가 더 심하다. 버스 터미널은 기준치의 3배를 넘으며, 4차선 도로 옆 공원은 말뿐인 공원이다.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다큐는 두 표본 사례의 초등학교에서 실험을 한다. 운동장의 2면이 차도와 맞닿은 A학교, 또 하나는 산과 인접한 B학교, 학교 주변을 돌며 작성한 오염지도에서 미세 먼지를 만들어 내는 질소 산화물이 당연하게도 A학교가 평균보다도 높았으며, B학교는 낮았다. 심지어 A학교 교실의 미세먼지 농도는 낮시간에 환기를 하면 안될 정도로 표준치의 두 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지어진 학교를 옮길 수도 없고, 다큐는 그 해법을 '방음벽'에서 찾는다. 차도 주변이지만 방음벽이 둘러쳐진 C학교,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음벽이지만, 이 방음벽이 미세먼지를 10배까지도 차단하는 고무적 실험 결과를 얻었다. 즉 '방음벽'이라는 어찌 보면 원칙적인 대안만으로도 우리 아이들을 미세먼지로부터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방비책이 된다는 것을 다큐는 보여준다. 

즉, 사소한 듯 하지만 미세먼지가 심한 시간 '환기'를 한다며 창문을 열지 않는다던가, 미세먼지가 심한 시간을 체크하여 교실 내 환기 시간을 조절한다던가, 반면 미세먼지를 일으키는 청소 시간 함께 꼭 환기를 한다던가 하는 사소한 실천에서부터, 학교 앞 방음벽 설치 등 자라나는 성장기 아이들을 위한 '노력'이 우리 아이들을 미세 먼지의 습격으로 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다큐는 강변한다. 


by meditator 2019. 1. 28. 17:32

삼한사온이 아니다. 삼한사 아니 오미라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회자된다. 맞다, 여기서 '미'는 미세먼지의 그 '미'다. 예전이면 황사와 함께 '봄철'의 특별한 연례 행사였던 미세먼지가 '연중 관례'가 되어간다. 날이 추워지면 좀 나아지려나 했더니, 웬걸 겨울 하늘이 뽀얗다. 추워서 마스크를 쓰는 게 아니라, 미세먼지를 피하기 위해 마스크를 쓴다.  특히 초미세먼지(PM 2.5)농도가 2017년기준 연평균 초미세 먼지 농도 25.1㎍/㎥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미세먼지를 30% 감축하겠다'는 대통령의 공약이 무색한 결과다. 

 

 

미세먼지, 초미세먼지의 습격
미세먼지는 공장, 건설 현장, 자동차 등에서 고체 상태로 직접 배출되는 1차 미세 먼지와 가스 상태로 나와 공기 중의 다른 물질과 화학 반응을 일으켜 생성되는 2차 미세 먼지로 나뉘어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72%가 2차 미세 먼지이다. 또한 이러한 미세 먼지 발생에 자동차의 기여도가 27%나 된다. 

특히 최근에는 직경 2.5㎛ 이하의 초미세먼지(미세먼지 PM2.5)의 심각성이 대두되고 있다. 머리카락의 1/30 정도되는 초미세먼지는 주로 자동차나 발전 기관 등의 내연 기관에서, 즉 연료 등의 불완전 연소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들로 입자가 작은 만큼 우리 몸에 흡수될 가능성이 더 커서 폐 질환 등의 발병 가능성을 한층 더 높인다. 

최근 심각해지고 있는 우리 나라의 미세 먼지는 그 '원인'에 있어 최악의 미세먼지 보유국 중국(초미세먼지 기준 53.5㎍/㎥)을 빼놓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스모그가 발생하면 서풍을 타고 2,3일 후 우리나라 서쪽을 중심으로 그 영향력이 미치는 것이 영상 관측을 통해 한 눈에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미세먼지에 있어 평상시에는 국내적 요인이, 고농도의 미세 먼지일 때는 중국 쪽의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다. 양쪽의 비율로 봤을 때 어느 한 편이 우세하다 말하기 힘든 5;5 정도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제 아무리 엄마가 공기 정화 식물을 키우고 집안을 소독용 에탄올로 닦아내도 미세먼지 속에서 등하교를 하는 아이의 아토피는 나날이 심해져 물집이 생기니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정부의 미온적인 대책에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미세먼지 속에서 운전을 하는 아버지는 마스크를 써도 숨쉬기조차 힘든 고통을 겪는다. 호흡기와 피부, 안과 질환을 넘어 자율 신경계 조절에 까지 문제를 일으키는 미세먼지, 과연 해법은 없을까? 

 

 

공장을 부쉈다. - 중국 
그 '역지사지'의 사례를 우선 당사국 중국으로 부터 찾아본다. 베이징 뿌연 하늘이 구슬 장식품이 되고, 혼탁한 공기가 고향을 그리는 향수 상품이 되는 곳, 2017년 기준 보건기구의 기준치를 20배나 훌쩍 넘었던 곳, 하지만 미세먼지와의 전쟁을 벌이는 지금 이곳에서 미세먼지는 35%나 줄었다. 

그 시작은 시민들로부터이다. 사진작가는 미세 먼지를 적나라한 실상을 한 컷에 담았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항의했다. 그리고 이런 시민들의 분노에 정부가 움직였다. 

허이짱후 마을, 미세먼지가 심하던 시절 10M 앞도 보이지 않던 곳, 시민들은 공기청정 모터가 달린 6만원 짜리 마스트를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마을의 거리엔 빨래가 걸려있다. 마스크들은 서랍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곳 사람들이 주로 쓰던 석탄 보일러가 물로 순환하는 전기 보일러로 거의 교체됐다. 비용의 90%를 국가가 보조했다. 이곳 마을에서 조금 나가면 있던 물류 회사, 하루의 시작을 자동차의 시끌벅적한 배기음으로 시작됐던 곳, 하지만 이젠 허물어진 공장터만이 남겨져 있다. 

중국이 미세먼지와의 전쟁은 '적극적'이다. 허이짱후 마을만이 아니다. 공장들이 즐비했던 헤베이선 랑팡시 역시 공장을 폐쇄하고, 건물을 부수는 중이다. 석탄 보일러들은 LPG 보일러로 교체시켰다. 당연히 공기의 질이 좋아질 밖에. 

 

 
 

 

경유차는 NO - 파리 
여행자들의 천국 프랑스는 어땠을까? 프랑스하면 상징인 에펠탑, 하지만 이곳이 2016년만해도 스모그에 가려 보이지 않았었다고 한다.  미세먼지로부터 정부가 시민을 보호하지 않았다하여 몇 년간 미세 먼지로 인한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받은 시민 등으로부터 보상 소송까지 벌어졌고, 4만 8천 여명이 미세 먼지로 인해 조기 사망에 이르렀다며 르몽드 지 등이 사회적 이슈로 미세 먼지를 제기하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프랑스는 푸른 하늘을 되찾았다. 에펠탑은 우뚝 파리의 상징으로 잘 보인다. 

2012년 국제 암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특히 경유차의 엔진이 불완전 연소할 때 발생하는 블랙 카본, 전체 미세먼지 유해성 중 경유차의 발암 기여도가 84%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동차 유형별로 따졌을 때 LPG 차에 비해 10배나 많다.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2016년 6월 미세 먼지를 잡기 위해 '자동차 배출가스 등급제'를 실시했다. 하이브리드 차량이나,  2011년 이후 출고한 LPG 겸용 차량을 0등급으로 하여, 경유차나 연식이 오래된 차들의  4,5등급까지 나누고, 미세 먼지가 심한 날 4.5 등급의 파리 진입을 불허했다. 그리고 이를 어길 시에는 3.5 유로, 우리 돈으로 약 4만 3천원의 벌금을 물렸다. 

또한 2~300유로에 해당하는 번호판 등록세를 무료로 하는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며 LPG 차량을 사도록 유도했다. 당연히 시민들도 운행 제한 등이 없는 LPG 차를 선호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기 오염에 보탬이 되기 위해 차 한 대를 더 보태지 말자'는 슬로건 아래  2007년 이래 프랑스 100여 개 도시에서 택시보다 1/5~1/6이나 싼 전기 자동차 대여 서비스를 활성화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저감 정책에도 불구하고 2500 여명이 미세 먼지로 인해 사망한 결과가 드러나자 프랑스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실시한다. 차도를 폐쇄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도를 없애고, 대신 자전거나 보행자 전용 도로를 늘린 파리 시, 이러한 강력한 교통 정책은 시민들의 라이프 스타일마저 변화시키며 파리에 푸른 하늘을 되찾아 주었다. 

 

 
다큐가 찾아본 중국과 프랑스의 사례, 이는 결국 '미세 먼지'의 습격이 우리 사회 공기 오염의 원인은 되겠지만, 그게 '운명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정부와 지자체가 어떤 결의와 각오로 이 문제에 대처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맑은 하늘과 공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 바로 이것아야말로 2019년 새해부터 혼탁한 하늘과 숨쉬기 힘든 공기로 인해 고통받는 우리들에게 가장 반가운 희소식이다 

by meditator 2019. 1. 21. 16:20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아이를 학대하다 죽인 엄마의 주검 앞에 남겨진 시fh 시작되었던 드라마, 그 문학적 상징성의 함의가 모처럼 좋은 드라마를 만났다며 드라마 덕후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그 설레임을 배반치 않고, 1월 16일 종영을 맞이한 <붉은 달 푸른 해>는 한 편의 명작처럼 묵직한 물음을 던지며 깊은 여운을 드리운다. 전작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을 뛰어넘은 도현정 작가의 치밀하고 밀도깊은 극본, 그 극본을 문학적으로 구현해낸 최정규 연출과 제작진, 이 드라마에게 시청률이 몇 프로인지는 의미가 없다. 마치 대학생 권장 도서를 사람들이 즐겨 찾지 않듯이, 하지만 그 권장 도서 목록 속의 명작들처럼 아마도 지금 시청률이 좋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오래오래 좋은 드라마로 사람들이 찾게 될 드라마가 될 터이니. 

 

 
차우경이라는 씨실로 풀어간 시가 있는 죽음들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번듯한 남편과 이쁜 딸과, 그리고 조만간 태어날 아이까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나마 걱정이라면 교통사고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동생 정도. 하지만 그 행복의 시간은 그녀 앞으로 뛰어든 어린 소년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아니, 어쩌면 그 소년은 매개였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녀의 행복했던 삶 자체가 신기루같은 것이었을지도. 

그렇게 <붉은 달 푸른 해>는 차우경(김선아 분)의 궤멸되어져 가는 행복한 삶을 씨실로 엮으며 시작된다. 사고, 유산, 드러나는 남편의 외도, 그리고 그녀 앞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초록색 원피스의 소녀, 그녀를 뒤흔드는 사건들 속에서 우경은 그 무엇보다 초록색 원피스의 환영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 환영을 따라가는 곳에서 그녀는 이 드라마의 날실인 살인 사건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시작은 감옥에서 죄를 다 치루고 나왔다는 한 여성이다. 아이를 죽인 남편을 방조했다는 혐의를 받은 여성은 몇 년의 형을 치루고 감옥 앞에서 달걀 세례를 받으며 그래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가 집에 머무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얼마 뒤 그녀는 불탄 시체로 발견되었고, 이 사건은 강지헌 경위(이이경 분)를 사로잡는다. 

이어서 발생한 또 다른 불에 탄 시체, 사건에 등장한 상징성 가득한 한 편의 시구들을 통해 이 사건이 '아이'를 매개로 한, 학대받은 아이로 인한 연쇄 살인 사건임이 드러난다. 시를 품은 사건의 뒤를 집요하게 쫒은 지헌과 특별 수사팀, 사건 속에서 '밤새 울었다던' 붉은 울음을 건져낸다. 첨단의 사이트를 활용하여 아동학대 피해자들에게 접근하여 그 가해자들을 '단죄'해주는 이, 혹은 이들의 꼬리를 쉽게 밟히지 않는다. 스스로 드러내기 전 까지는. 

차우경이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를 따라 찾아간 곳에서 발견되 시와 엄마의 죽음, 그리고 방치된 채 자란 아이, 그 모든 비극의 원흉으로  '처단'되는 개장수 아빠, 그리고 그 잔혹한 사적 복수의 끝에서 등장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은호,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하고 나아가 은호의 세계를 온전히 지배했던 상담센터 전 원장를 죽이며 스스로 붉은 울음이라 밝혔던 은호의 타살이지만 자살과도 같은 죽음은 시청자들을 한껏 연민 속으로 밀어넣으며 '아동 학대'의 뿌리깊은 연원에 몸서리치게 만든다. 

모든 사건의 주범이라 스스로 밝혔던 은호의 죽음은 하지만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고, 결국 은호의 공범이자, 이 모든 사건의 설계자인 진짜 붉은 울음의 정체가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토록 우경을 괴롭혔던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비극적 사연이 비로소 베일을 벗는 시간도 다가오며 16부의 큰 그림이 완성된다. 

우리 사회의 짙은 그늘, 아동 학대의 갖가지 모습들
차우경의 환영과 붉은 울음의 거대한 음모와 그 실행이 주도면밀하게 직조되어 도달한 곳에는 우리 사회의 그늘로 짙게 드리운 '아동 학대'가 있다. 처음 여자 친구의 임신을 외면했던 지헌이 지나가듯 말했듯이 중학교 때까지 맞았다던 그 경험이 여전히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는 새삼스러운 경험이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지헌의 경험은 아이를 낳아 기를 자신이 없는 것으로 되었지만, 아이를 학대하고 때리면서 그걸 사랑이라고 항변했던 민아정, 그리고 16회에서 우경의 새엄마의  '아이를 키우다 보면 때릴 수도 있다'는 뻔뻔한 자기 고백의 살인이 되기도 한다. 

그저 아이를 키우다 보니 때리는 것만이 아니다. 대놓고 가정 폭력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아내는 물론,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권위'를 '폭력적'으로 행사한다. 그가 번드르르한 사채업자건, 개장수건. 일용직 노동자건. 그 수직 피라미드 가정 폭력의 가장 하부에 놓인 아이는 폭력에 무방비하게 그것을 감내하거나 죽어갈 수 밖에 없다. 

가부장적 구조는 가정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입양간 형과 떨어져 보육원에 맡겨진 어린 은호는 원장의 방에 불려가 시를 읽으며 또 다른 폭력의 학대를 당한다. 그 어린 시절의 학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를 원장과 그 아들의 세계 속에 볼모로 잡아 그의 세계를 조종하기까지 한다. 개장수가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라나, 시완이 아빠가 엄마도 죽어라며 협박한 거나, 우경의 왜곡된 기억까지 미성숙한 아이의 세계는 무방비하게 어른의 '포로'가 된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저 아이의 학대가 전근대적인 가치관이나 가부장적인 패러다임의 문제만은 아니라며 덧붙인다. 우경이 본의 아니게 죽음에 이르게 한 일곱 살 소년, 그 소년의 정체를 찾아 헤맨 우경이 만난 부모는 이 시대의 젊고 무책임한 부모들이었다. 두 아이를 놔두고 피씨방에 사는 아빠, 그런 가정을 버리고 나온 엄마, 그들에게는 자신의 즐거움과 현생이 두 아이에 대한 보육보다 우선인 이 시대의 또 부모의 또 다른 표상이다. 그렇게 드라마는 '붉은 울음'의 단죄를 통해 우리 사회 갖가지 아동 학대의 양상들을 폭로한다. 

차우경과 붉은 울음의 서로 다른 선택 
과연 이 학대받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아이들을 학대하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붉은 달 푸른 해>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을 찾아온 은호의 치료 과정에서 은호의 학대를 알게 되고 분노한 정신과 의사 윤태주, 붉은 울음은 은호와 함께 '학대의 처단자'가 된다. 사이트를 통해 동조자를 규합하고 블랙 챗을 통해 피해자를 유도하여 사건을 기획하고 실천한다. 윤태주는 설계하고 은호가 실행에 옮겼던 아이를 죽였던 엄마를 죽이고 서정주의 문둥이를 남겼던 사건부터 시작하여, 소라 아빠 살해, 민아정 자살 유도, 하나 엄마, 개장수 살해 등을 통해 학대받던 아이를 구하고, 가해자를 '단죄'한다. 그리고 그 '단죄'의 정점은 자신을 학대했던 원장의 입에 그가 읽도록 했던 시집을 물려 죽였던 은호의 복수를 건너, 시완의 아빠 살해와 우경의 엄마 살해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한다. 

하지만 붉은 울음이 의도했던 설계는 그를 알아보고 그가 종용한 선택을 포기한 차우경으로 인해 어긋나 버린다. 붉은 울음이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종용했던 그 '복수'를 우경은 포기한다. 덕분에 가열하게 폭주했던 '단죄'의 기관차는 마치 엔진이 식은 듯 멈춰선다. 여전히 '아픈 사람들'은 많은데. 

우경의 선택은 곧 <붉은 달 푸른 해>가 남긴 질문이다. 자신의 동생을 죽여서 거실에 묻은 엄마, 그리고 그걸 방조하고 묵인한 아빠. 그런 엄마에 분노하며 쇠망치를 들었던 우경을 환영 속의 동생 초록색 원피스의 소녀가 막는다. 그런 그녀를 다시 붉은 울음이 사주했지만 끝내 우경은 엄마를 '단죄'하지 않는다. 이건 딜레마다. 우경은 자신의 딸 은서가 할머니를 너무 좋아한다 했지만 그 말은 새엄마가 당당하게 말했듯 그녀를 키워준 30년의 세월 그 무게이기도 하다. 이미 은서의 할머니가 되어버린 새엄마, 자신이 친동생인 줄 알았던 가짜 세경의 엄마, 그녀는 붉은 울음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여전히 아프고 괴롭다. 그리고 그 '여전히 아프고 괴로운 건' 이제 우리의 몫이다.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야'라던  그 짐은 고스란히 남는다. 드라마는 '카타르시스' 대신, 여전히 드리워진 우리 사회 '학대'의 그늘에 대한 딜레마를 숙제로 떠맡긴다. 붉은 울음은 '환타지'였지만, 우경의 고민은 우리의 현실이다. 

by meditator 2019. 1. 17. 06:15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상해로 가서 당시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생활 상을 직접 체험해 보는 <독립원정대>의 하루살이, 1부 <독립자금을 벌어라>에서는 출연자 김수로, 박찬호, 강한나, 김동완, 공찬 등이 직접 윤봉길, 백산상회 등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뛰어든 생활전선을 체험해 보았다. 그에 이어 1월 14일 방영된 2부는 <임시정부를 구하라>이다. 왜 임시정부를 구하라였을까? 그 내막과 결국 자신을 던져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구한 윤봉길, 이봉창 두 의사의 행적을 따라가본다. 

 

 

위기에 빠진 임시정부 
1919년 국제적 금융 도시 상해에 첫 임시정부 청사가 세워졌다. 3.1 운동의 열기가 남아있던 시절, 전남 함평의 지주 아들 김철이 자신의 가산을 정리해왔고, 해외에 세워진 첫 임시 정부이기에 각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이 답지해왔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1930년대 임시 정부는 이제 집세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이 한반도 내 식민지 체제를 갖춰가는 것과 함께 해외로 팽창 정책을 벌이며 만주로 중국으로 그 야욕을 한껏 펼치던 시기였다. 일본의 토지 조사 사업으로 땅을 잃은 농민들은 대다수 만주 등지로 이주를 했다.  지린성 창춘의 만보산(완바오 산)에 일본이 개간을 계약한 땅을 조치하기로 한 우리 농민들, 수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곳의 중국인들과 충돌을 빚게 된다. 실제 사건은 크지 않았지만 이 사건이 일본의 사주를 받은 <경성일보>가 부풀려 보도하는 하는 바람에 전국에 반중국인 정서가 한껏 들쑤셔졌고 중국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이 행사하며 다수의 중국인 사상자가 생겨났다. 결국 <동아일보>가 사건을 바로잡으면서 국내의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이는 다시 중국내 반한 감정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만보산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중국내 반한 감정, 중국 전역에서 이루어진 조선인 박해는 상해 임정에 직접적인 타격이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등으로 중국내 일본의 영향력이 커져가면서 청사의 운영자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 


이렇게 임시정부의 운영, 나아가 독립 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구 선생을 비롯한 상해 임시 정부가 생각한 타개책은 이런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일본에 대한 강력한 한 방의 타격이었다. 이를 위해 1931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 선생을 비롯한  80여 명의 비밀 요원들이 모여 <한인애국단>을 결성한다. 

<한인애국단>은 첫 의거로 난징을 방문하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우치다 총재 암살을 준비하였지만 방문이 취소되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한다. 그에 따라 첫 의거는 이봉창 의사에게 맡겨졌다. 1932년 1월 8일 신년 연병식을 위해 가던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비록 일왕의 암살에는 실패하였지만 이 사건은 중국 내 팽배해있던 반한 감정을 잠재웠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의 활로를 열어주었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로 그동안 중단되었던 독립자금이 하와이 등 전세계에서 답지하기 시작했고, 중국의 호의적인 협조로 무기를 구하기가 한결 용의해졌다. 이런 이봉창 열사의 의거로 인한 분위기의 반전이 있었기에 그로 부터 1년 뒤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가능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의 행적을 따라 
<독립원정대의 하루살이-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에서 출연진은 <한인애국단> 숙소를 '길을 잃을 것같으면 ㄹ 자를 길에 뿌려 찾아오도록 했다는 이화림 선생의 회고록에 따라 찾아본다. 또한 <인민영웅기념탑> 이 세워진 황포탄 부두를 찾아가 '나는 적성(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였나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이곳을 떠나 일본으로 떠난 이봉창 의사의 행적을 짚어본다. 이곳은 또한  11개월 후 이봉창 의사가 독립에의 결심을 가지고 떠난 것과 달리, 항저우 공원에서 의거 후 체포되어 윤봉길 의사 역시 이곳을 통해 압송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독립원정대의 하루살이-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는 노란손수건을 찾아 의거 전 윤봉길 의사의 행적을 따른다. 1930년 청도를 거쳐 상해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을 처음 만난 '사대 다관', 4월 27일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안공근 선생의 집터, 이력서와 유서를 남겼던 <중국기독청년회관(YMCA)>, 의거 당일 아침 '농부가 논밭에 나가듯 태연자약했던'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과 아침 식사를 하고 가지고 있던 돈을 주었던 <김해산의 집> 등을 둘러본다. 또한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상해 <매헌 기념관에 들러> 죽음에 이르러서도 강직했던 윤봉길 의사가  '강보에 싸인 두 병정, 너희가 피가 있고 뼈가 있거든 조선을 위한 용감한 투사가 되라'며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을 다시금 아로새겨 본다. 

 

 

막연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남겨졌던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하지만 출연진들이 직접 그곳을 찾아보고, 윤봉길 의사가 담담하게 걸어가셨다던 항저우 공원으로 향한 길을 걸어보는 여정은 그 자체로 한 세기의 간극을 넘어 출연진을 울컥하게 만든다. 거기에 자신이 가졌던 6원의 시계가 더는 필요없으니 2원짜리 김구 선생의 시계와 바꾸셨다던 에피소드,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도시락 폭탄이라 알았지만 사실은 그날 던져진 건 물병 폭탄이었으며 도시락 폭탄은 윤봉길 의사의 자폭용이었다는 예외적 진실, 그리고 무사히 폭탄을 옮기기 위해 바짓가랑이 사이에 숨기고 일본으로 떠났던 이봉창 의사의 행적 등을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잘못알았던 사실을 퀴즈를 통해 새롭게 알아간다. 

또한 두 의사 뿐이 아니다. <독립원정대의 하루살이 -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는육삼정을 찾아 같은 날 윤봉길 의사와 같이 의거를 준비했던 또 다른 열사의 행적도 소개한다. 일찌기 3.1운동부터 독립운동에 매진해오셨던 백정기 열사는 , 같은 시기 김구 선생과 같은 취지로 상해 흑색 테러단을 조직하고 홍커우 공원에 들어가려 했지만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1933년 일본 공사 암살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어 옥사하셨던 우리가 몰랐던 위인이다. 

by meditator 2019. 1. 15. 16:55

<꺼삐딴 리>는 전광용의 1962년작 소설이다. 일제 시대 잠꼬대도 일어로 할 정도로 열성 친일이었던 의사 이인국은 해방이 되자 당연히 친일로 몰린다. 그를 구해준 건 뜻밖에도 진주한 소련군, 대세는 소련이라 생각했던 그는 감옥에서 매를 맞으며 러시아어를 익히고 아들을 모스크바로 유학시키며 친소 노선을 걷는다. 그러다 발발한 6.25로 아내를 잃고 아들조차 소식이 끊기자 청진기 하나를 들고 월남하여 병원을 미군 및 남한의 고위층을 고객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이제 미국인과 결혼한 딸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의 성공을 기약하며 비행기에 오른다. '카멜레온'이란 단어에 딱 어울리는 소설의 주인공, 그를 통해 전광용은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기회주의적 인물의 전형을 그려낸다. 하지만 이 기회주의적 인물은 소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1월 10일 방영된 <다큐 시선- 우리 곁의 친일 잔재, 2부, 미술, 친일을 그리다> 속의 미술가들 역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꺼삐딴 리이다. 소설 속 꺼삐딴 리는 일신의 보신에만 급급했지만, 문제는 미술계의 이 꺼삐딴 리들이 바로 우리 현대 미술계의 중추적 인물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미술계의 딜레마가 되고 있다. 다큐는 이를 추적한다. 

 

   

 
만원짜리 속 세종대왕의 딜레마 
다큐의 시작은 만원 짜리 지폐다.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는 만원 짜리 지폐를 들고 시장으로 간 제작진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많이 쓰는 이 지폐를 '친일 미술가'가 그렸는데 어떻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격적이다. 화가 난다. 처음 알았다 라며 놀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외려 짜증을 내신다. 그 옛날 밥먹고 살기 위해 친일 안했던 사람이 어딨냐며, 이제 와서 그걸 왈가왈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구. 이미 생존하지도 않는 친일파 미술가들을 이제 와서 들추는게 정말 의미가 없을까?

만원 짜리에 그려져 있는 세종 대왕 영정을 그린 이는 다름 아닌 천재 화가로 알려진 운보 김기창 화백이다. 김 화백이 그린 건 세종 대왕만이 아니다. 신라 문무왕, 무열왕, 을지문덕, 임진왜란의 의병장 조헌 등이 그의 손을 통해 구현되었다. 위인들의 영정을 그린 건 김기창만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대표적 미술인 이당 김은호 화백, 그 역시 친일 인명 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는 대표적 친일파로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이 그의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월전 장우성은 이순신을 비롯하여 정약용, 강감찬, 김유신, 정몽주 내로라하는 위인을 비롯하여 심지어 유관순, 윤봉길 의사까지 그의 손을 거쳤다. 남산 공원의 백범 김구 동상이나 도산 안창호, 안중근 열사의 동상, 그리고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만든이는 김경승, 우리 조각계의 독보적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형 화가 김인승과 함께 일제 동아시아 건설에 앞장섰던 이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과연 친일파가 자신의 동상을 만들 줄 아셨다면 돌아가신 백범 김구 선생은 어떻게 하셨을까?

 

 

도대체 입도선매도 아니고 이들 위인들의 영정이 모두 대표적 친일 미술인들의 손에 의해 그려진 사태는 무엇때문일까? 바로 미술계판 국정 교과서라 할 수 있는 표준 영정 때문이다. 우리가 이 위인들을 생각할 때 떠올려지는 대표적 이미지는 박정희 시절 국가에서 정한 표준 영정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이 표준 영정 97위중 14위를 저 세 사람을 비롯한 친일 미술인들이 그렸다. 아이러니한 건 이들이 왜군과 싸운 장군, 일본에 저항한 독립 투사들까지 그렸다는 사실이다. 

운보 김기창, 이당 김은호, 월전 장우성은 우리 근대 화단의 대표적인 미술인들이다. 월전 장우성은 문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시서화에 능숙, 한국화의 전통에 기반한 이른바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화의 전형이라 할 <승무>, <귀로> 등이 그의 작품이다. 순종 황제 어진을 그린 이당 김은호는 <성춘향>, <논개> 등 근대기 채색화단의 대표적 인물로 한국 미술을 발전시킨 장본인으로 대접받는다. 이당 김은호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민화풍의 과감한 붓질로 우리나라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그 명성을 알린 그의 작품 세계는 청년기에서부터 만년 걸레 그림까지 한국 미술계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일본이 만든 전시회를 통해 이름을 알린 대가; '채관보국'
이들 인물들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일제 시대이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1931년 일본이 만든 10회 조선 미술 전람회(이하 선전)에서 입선을 하며 등장했다. 이어 16,7,8,9회까지 화려한 수상 경력에 40년 추천 작가로 화려한 이력을 채워나간다. 장우성 역시 비슷한 시기인 1932년 입선으로 시작하여 전람회 연속 특선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들 두 사람의 스승이기도 한 이당 김은호 화백은 일찌기 1919년 서화협회 회원이 된 이래 1922년 제 1회 선전에서 입선을 한 이래 30년까지 다섯 차례의 입선과 두 차례의 특선을 거치며 명실상부 조선의 대표적 미술인이 되었다. 
 

   

   

 
이렇게 일본이 자국의 문전(문부성 미술 전람회)을 본뜬 선전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린 이들이 과연 자신들에게 입신양명의 기회를 준 일본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은 전시 동원 체제가 되었다. 각종 공출과 수탈이 횡행했으며, 학병 등의 강제 징용과 근로 정신대가 본격화되었다. 이때 일본은 전문가들에게 '직역봉공'을 요구했다. 즉 각자의 직업을 통해 나라에 공험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미술인들에게 요구된 것이 바로 '채관보국', 그림을 그리는 능력으로 나라를 도우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노골적인 친일 작품이 요구되었다. 

김은호는 일본이 직역봉공을 위해 만든 조직인 조선 미술가 협회 회원으로 친일파 귀족 윤덕영의 처가 만든 애국 부인회가 금붙이 등을 모아 일본에 헌납하는 과정을 그린 <금차봉납도>등 친일적 내용을 그렸다. 그런가 하면 장우성은 일본 호국 불교의 수호신인 부동명왕을 친일 잡지에 그리는가 하면 한국인 최초로 1943년 선전에서 국민 예술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하고, 미영 연합군에 대항하는 내용의 <항마>로 일본이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만든 '결전미술 전람회'에서 입선을 하였다. 운보 김기창 역시 식산은행 사보 표지로 등장한 1944년작 <총후병사>,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의 친일 혐의가 농후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친일 인사가 받은 3.1 문화상 
이 당시 김기창이 그린 작품 중에는 1934년 <소국민>이라는 어린이 잡지에 발표된 <적진육박>이라는 작품이 있다. 남양군도 밀림에서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군인을 그린 이 작품,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품의 구도나 설정이 그로부터 30년후 베트남 파병 국군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적영>과 흡사하여 '자기 표절'논란이 일었다. 
이 '자기 표절'의 30년, 거기엔 바로 일제 시대에 이어 해방 후, 심지어 박정희 시대에 까지 승승장구했던 미술인의 초상이 있다. 

지난 주 일제 하 교육 영역에서 친일에 앞장섰던 대표적 인물들이 해방이 되고 자신들의 친일 행각에 대한 반성없이 기존에 일궈놓은 업적과 명망에 기대어 '입신양명'의 길을 매진했듯이, 이들 미술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해방 이후 운보 김기창은 국립 민속 박물관장을 역임하고, 홍대 교수로 부임하여 우리 미술계의 중추가 된다. 김은호 역시 선전을 그대로 뽄따 만든 '국전'의 추천 작가(1949)를 거쳐 국전의 심사위원이 되었으며 1966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월전 장우성은 우리나라 미술계를 이끈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가 되었고, 역시나 국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미술계의 중추적 인물이 된 이들, 여기서 심각한 건 일제에 자의건 타의건 협조하거나 친일에 앞장섰던 이들이 1960년대 다른 상도 아닌 3.1정신 선양에 기여한 인물에 수여하는  '3.1문화상'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건 바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폐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금관 문화 훈장, 해방 기념 문화 훈장 등을 받으며 대한민국 미술계 원로로 대접받았다. 

 

  

 

친일 미술인에 대한 평가, 그 딜레마 
과연 이 반성하지 않은 친일에 대해 후대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는 서정주의 고백처럼 팽창 정책을 노골화시켜가던 일본의 식민지민에게 일본의 패망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예술로서 국가에 충성한다는 시대 정신을 가진 이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들의 친일을 그 시대를 살아냈던 고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은호 의 경우 3.1운동 때 독립 신문을 돌리다 핍박을 당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한 전력을 들어, 또한 월전은 적극적으로 친일에 앞장 선 전람회에 참여하지 않는 등  친일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들이 일제에 협조하여 창작해 낸 산물이 일제 하 대중에게 미친 '이미지의 힘'(조각이나 그림을 통해 전한 사상, 즉 일본 군국주의의 전파)이 너무도 심대하며, 그들이 '친일'을 도모하며 부와 명예를 누리는 동안 '독립 운동'에 헌신한 이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우리 사회에서 누리지 못한, 심지어 빼앗긴 권리와 혜택에 대한 후손에 대한 교훈적 각성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친일은 정죄되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현실은 비판조차 여의치 않다. 이들이 일제 하 자신의 업적과 명예를 해방 후로 이어가며 대한민국 미술계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고, 이들이 기른 제자들이 우리 미술계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 행적에 대한 제기는 '은덕에 대한 배신'으로 취급되며 불이익을 받기가 십상이다. 정부 역시 친일 작가의 표준 영정 문제에 대해 해지할 근거가 없다며 발을 빼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여전히 우리 안의 '친일'의 뿌리는 깊고, 극복은 쉽지 않다. 






by meditator 2019. 1. 12. 04:41

kbs2의 드라마가 제일 바닥을 튼튼하게 깔아주며 한가롭던 월화 드라마가 kbs2가 <동네 변호사 조들호2; 죄와 벌(이하 조들호2)>로 승부수를 던지며 격전장으로 변했다. 당연히 첫 방송이 끝나고 승자의 미소를 띤 건 박신양, 고현정의 <조들호 2>이다. 하지만 그 승리의 미소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화요일 밤이 지나고 뜻밖의 복병 tvn의  <왕이 된 남자>의 상승세나 반응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왕이 된 남자>가 사극이기 때문일까? 그러기엔 <조들호2>란 드라마가 그 자체로서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박신양에 의한 시즌 2 
시즌 1에서 '동네 변호사'로 그 이름을 떨친 조들호(박신양 분), 그 다혈질의 성격답게 tv 방송에 나가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던 강직한 이 캐릭터, 하지만 그런 그가 뜻밖의 '온정'으로 맡은 사건으로 인해 시즌1에서처럼 다시 한번 추락하고 만다. 잘 나가던 검사에서 하루 아침에 아내조차 잃은 거지꼴 변호사로 추락했던 조들호는, 시즌2의 시작을 감지 않아 떡진 머리에 언제 갈아입었는지도 모를 츄리닝에 껴입은 파카, 쓰레빠(슬리퍼가 표준 말이지만 박신양이 신은 건 어쩐지 쓰레빠가 어울린다) 신세의 거지꼴로 돌아왔다. 마치 그런 모습이 시즌의 통과 의례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만사 다 포기하고 사는 듯한 그의 앞에 그의 아버지같은 검찰 수사관 윤종건(주진모 분)의 실종 사건이 던져진다. 쓰레빠를 신고 그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조들호,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 그의 앞에 나타난 건 '자살'이라는 윤종건 수사관의 시신, 그리고 자폐증의 딸 뿐이다. 

그렇게 추락과 추락의 나락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사건을 계기로 조들호의 포문을 연다. 동네 변호사답게 그를 추락시킨 것도 예의 조들호의 인정, 그리고 이제 다시 조들호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그의 '인지상정'이다. 그를 아들처럼 여겨주었던 검찰 수사관의 실종,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딸의 무죄를 입증하려다 온 몸을 두드려 맞은 어머니, 그렇게 드라마는 조들호의 '휴머니즘'을 부각시키며 동네 변호사 조들호를 소환한다. 

 

 

고현정이라는 화룡점정 
그리고 그런 그의 맞은 편에 '휴머니즘'의 반대편인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 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아니 외려 그 사람의 죽음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한 이자경(고현정 분)이 있다. 시즌 1이 법무법인 금산과 그와 얽힌 검찰의 권력이라는 조직적인 거악을 상대해 서민들을 위한, 서민들의 변호사 동네 변호사 조들호라는 전선으로 드라마가 구성되었다면 시즌 2는 첫 회에서부터 휴머니티한 조들호와 그와 정반대의 사이코패스라 하는 게 딱 어울릴 극한의 악인 이자경을 포진시켜 선과 악의 대결로 전선을 변주한다. 

이러한 전선의 변화를 위해 등장시킨 첫 사건이 바로 조들호를 나락으로 빠뜨린 부패한 정치인 백도현의 아들 백승훈의 성폭행 사건, 정치인 따위의 사건, 심지어 스쿨 미투에 대해 방송에 나가 고성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혔던 그이기에 더욱이 맡고 싶지 않았던 사건을 백승훈의 자해라는 사건을 계기로 조들호의 마음이 흔들린다. 하지만 법조문의 헛점을 찌른 그의 판결은 피해자의 자살로 이어지면 그를 파멸로 이끄는데, 문제는 최근 법조 드라마에서 이런 성폭행 피해의 진실이 뒤바뀌는 사건이 너무도 빈번해, 이제는 '클리셰'로 마저 느껴진다는 것이다. 

 

 

과연 박신양과 고현정만으로? 
거기에 초반 가장 추레한 차림으로 동분서주하는 조들호는 2016년으로 부터 무려 햇수로 3년만에 돌아오건만 2회가 되기도 전에 예의 박신양 표 연기가 너무 익숙해 진다는 점 또한 아쉽다. 물론 <조들호 2>라는 시즌 자체가 이 익숙한 박신양 표 연기의 친숙함에 기대어 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질구레한 그와 강만수(최승경 분), 윤소미(이민지 분)의 씬들이 어제 본듯하다는 건 분명 16부작의 정주행에 장점만은 아닐 터이다. 

뿐만 아니라,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캐릭터의 함정인 것인지 조들호 캐릭터의 불균등성이 처음 부터 눈에 띈다. 윤정건이 납치되었을 장소를 눈으로 스캔하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거기에 떨어진 이자경의 사탕 껍질 하나 만으로도 사건의 윤곽을 잡아내는 이성적인 능력자가, 정작 백도현의 아들 사건에 있어서는 그 혜안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건 작위적이거나 불균등한 서사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극 초반부터 소리지르고 물불 가리지 않고 사건으로 뛰어드는 조들호의 캐릭터를 보여주며 질주한다. 문제는 그렇게 포르티시모(매우 강하게)의 캐릭터인 조들호를 드라마의 전열 제일 앞에 내세우고서는, 그와 함께 등장한 인물 들 역시 '포르테'의 연기를 보인다는 것이 시즌 2의 뜻밖의 복병이 된다. 조들호와 한 몸인 듯 움직이는 강만수도, 이자경의 배후인 시즌 2의 거악인 국일그룹의 국현일(변희봉 분) 회장도, 조들호의 사무실에 들이닥친 빚쟁이 부부 안동출(조달환 분)과 오정자(이미도 분)도 마치 무슨 성질내기 시합이라도 하는 것마냥 드라마는 극 초반부터 서로 아귀다툼을 벌인다. 

그러기에 이런 고음의 향연에서 낮은 목소리로 깔리는 이자경의 포스는 더욱 빛난다. 아마도 조들호의 캐릭터와 대조를 이루기 위해 더욱이 그렇게 설정했을 터이다. 그런 이자경이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사람을 죽이고, 깔깔거리고 웃거나, 짜증스럽게 마약에 취한 국일 그룹 아들을 샤워기로 마구 때릴 때 드라마의 집중도는 높아진다. 하지만 그런 이자경의 캐릭터는 이미 <리턴>, 아니 그 이전 <선덕여왕>, <여광의 교실>이래로 고현정에게 익숙한 것이니 고현정의 연기를 지켜보아 왔던 팬들에게는 새롭다기 보다는 또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새롭기 보다는, 마치 고현정이 가장 잘하는 걸 더욱 극단적으로 강조한 느낌이 강한 악역 캐릭터는 맛을 내기 위해 설탕을 몇 스푼 더 넣은 듯하다. 

결국 4회에 이른 <조들호2>는 포르테시모의 박신양과 목소리는 피아니시모인 하지만 그 악행에서는 포르테시모인 고현정의 '포스' 대결, 그리고 그 행간을 메우는 익숙한 클리셰의 사건들로 귀결된다. 

여기서 생각해 볼 건 과연 <조들호 1>이 어떠했는가 라는 것이다. 과연 <조들호 1>이라는 드라마가 박신양 표 연기를 차치하고 리바이벌 할 만한 내용이었는가 라는 의문을 뒤늦게 해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시즌 1 역시 박신양의 연기를 제외하고, 그 연기에 힘입은 시청률을 빼놓고는  드라마 적 내용에 있어 이렇다 하게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을까란 반문을 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돌아온 시즌2 역시 성긴, 혹은 어느 법률 드라마, 혹은 장르 드라마에서 본듯한 익숙한 서사는 차치하고,  박신양, 고현정이라는 두 배우의 연기와 분위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듯 보여진다. 무엇보다 시즌 1의 미덕이었던 동네 변호사라는 그 특성은 4회까지에서 쉽게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그럼에도 두 배우가 등장하면 드라마적 흡인력은 높아진다. 그저 거리의 버스 정류장에서 박신양이 나즈막히 몇 마디 했을 뿐인데도 설득이 되고, 쓰레빠로 경호원 두 명을 무찔러도 통쾌하다. 심지어 다음 회차에서 그 냄새날 것같은 옷을 벗어던진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된다. 고현정도 마찬가지다. 어눌하고 나즈막한 목소리의 그녀가 진짜인 듯 신경질을 내며 샤워기로 사람을 패는데 그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마지막 장면 차 드실래요 하는 고현정의 목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지고, 그런 그녀 앞에 자신이 발견한 사탕 껍질을 내놓는 박신양을 보며 다음 회를 기약하게 된다. 과연 <조들호 1>처럼 아니 거기에 고현정이라는 화룡점정을 얹은 <조들호 2>는 이번에도 배우의 힘만으로 시즌을 성공시켜낼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by meditator 2019. 1. 9. 17:06

2019년은 삼일 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그리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된 해이다. 이 100년의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각 방송사는 저마다 '특집'이란 이름으로 다양하게 이를 기념하고자 한다. 지나간 역사의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이기에 대부분 그 시절의 사건들을 '다큐'의 형식으로 소환한다. 그런 가운데 mbc는 독특한 시도를 한다. 바로 '옛 것을 오늘에 되살리'는 방식이다. 김수로, 박찬호, 강한나, 김동완, 공찬 등 연예인들과 함께 '예능'의 형식으로 임시정부의 시간을 떠올린다. 즉, 이들이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해, 충칭 등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선열들이 살았던 방식을 재현해 내는 식이다. 1월 7일 그 첫 번째 시간은 상해 임시 정부를 방문하여 어려운 형편에서 임시 정부를 운영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그 시절 선열들의 행보를 따라본다. 

 

 

박찬호 등이 도착한 상해, 이들을 맞이한 건 단대 사학과 양지선 교수이다. 우리의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주인인 나라, 그것이 바로 상해 임시 정부라며 임시 정부의 의의를 정의내려준 교수는 그와 함께 임정의 역사, 임정의 수난사를 알려준다. 

임정의 수난사, 그를 함께 한 2019년의 사람들 
전남 함평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김철, 그는 1917년 가산을 정리해 상해로 왔다. 그렇게 그가 마련한 자금을 기반으로 하비로에 1919년 첫 임시정부 청사가 세워졌다. 하지만 프랑스 조계지였던 이곳의 하비로 청사는 결국 일본의 압력에 굴복한 프랑스의 폐쇄 명령으로 문을 닫게 된다. 그리고 옮기게 된 보경리 청사, 거기엔 피땀 흘려 모은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보내준 미국과 멕시코 동포들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 이렇게 임시 정부는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내세우며 첫 근대적 정부를 구성했지만 현실에서의 행보는 팍팍했다. 하비로 청사 이래 임정 첫 7년간 무려 12번이나 이사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1920년대에는 끼니를 잇기 힘들 정도였고, 불과 30원이 집세를 내지 못해 집주인에게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어려웠던 시간은 천황이 눈 앞에 지나가는데 폭탄이 있었다면 던졌을 텐데 하며, 돈이 생기면 먹을 걸 사들고 왔던 철공소 직원 이봉창의 소회가 거사로 움트던 독립 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이렇게 고난의 장정, 그 장정에 2019년에서 온 출연자들이 참여한다. 함께 여성 독립운동가로 임정의 안 살림을 책임졌던 정정화 여사의 <장강일기>, 그리고 김구 선생의 어머니이신 곽낙원 여사의 회고에 등장했던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이 먹었다던 쫑즈(찹살떡), 두부탕, 짠지 등을 맛본다. 지금이야 부드러운 쌀떡이지만 당시 추위 속에 얼음덩어리같았을 떡,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주로 사먹었다던 중국 국수 찌꺼기, 시장에서 팔고 남은 배추 시레기 등만으로도 출연자들은 당시의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출연자들은 저마다 맡겨진 미션에 따라 임정 시절 독립 운동가들의 삶 체험에 나서는데, 김수로와 강한나에게 맡겨진 건 상해의 거리에서 '수로 상회'와 '한나 상회'를 열어 물건을 파는 것. 

이들인 연 '상회'의 모티브가 된건 백산 안희제 선생의 '백산 상회'이다. 임정 당시 독립 자금의 60%를 책임지셨다는 안희제 선생은, 경남 의령 분으로 영남 지역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힘을 모아 '백산 상회'를 열어 그 운영 자금을 모아 중경 임시 정부로 보내셨다고 한다. 그 시절 그의 집안과 집안 끼리 가까운 사이였던 경남 진주 출신 lg의 창업주 구인회 회장도 구인회 상점을 해서 번 돈 만 원을 안희제 선생 편에 임정으로 보내기도 하셨다. 하지만 1927년 결국 백산 상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그럼에도 안희제 선생은 1942년 광복군에 거액의 자금을 대는 밀명을 수행하는 등 독립 운동의 안살림에 혁혁한 공험을 하셨다. 

윤봉길 의사가 일한 세탁소로 간 박찬호 
박찬호가 불려간 곳은 세탁소, 힘 쓰는 일이라면 자신있다던 박찬호, 하지만 그를 맞이한 2019년의 세탁소는 버튼 하나로 작동되는 기계식, 하지만 박찬호의 호언장담을 기계가 듣기라도 한 양 고장이 나고, 박찬호는 일일이 손으로 세탁을 하는 처지에 놓인다. 힘이라면 자신있다던 박찬호지만 이불을 하나 빨고는 두 손을 들고 싶은,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이불이었다. 

왜 세탁소였을까? 세탁소에서 일했던 독립운동가는 다름아닌 윤봉길 의사였다.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임정으로 가고자 했던 청년, 하지만 청년은 그곳까지 갈 여비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청도의 세탁소에서 일을 해 그 돈으로 임정을 갔고 기꺼이 의거의 주인공이 되셨다. 

 

   

 

2019년의 김염이 된 김동완 
이른 새벽 제일 먼저 길을 떠난 김동완을 맞이한 곳은 영화 촬영장, 단역이려니 했는데 그가 해야 할 역할은 서거 30주년을 맞이한 레이먼드 킴, 김염을 기리는 영화의 김염 역할이었다. 

<야초한화>로 1930년대 중국의 청춘 스타로 떠올랐던 김염, 하지만 1934년 가장 잘 생긴 남자 배우, 가장 사랑받는 남자 배우 1위였던 김염, 하지만 그는 일본이 자신들을 선전하기 위한 영화에 출연을 거부하고 위대한 항일 영화로 선정된 <대로> 이후 40여 편 항일 영화를 찍으며 중국의 영화 황제가 되었다. 이런 그의 선택에는 그의 집안 배경이 큰 몫을 한다.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으로 탄탄대로의 성공을 뒤로 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진료소를 열고 동포를 진료하며 독립자금을 대던 중 밀정에 의해 독살당하신 아버지 김필순, 이후 그를 맡아 키운 고모부 김규식과 김순애 역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우리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셨다. 7명의 형제들 중 4명이 독립 운동에 참여한 집안, 김염의 선택은 항일이었고, 그 선택에 중국인들은 2019년에도 그의 죽음을 기린다. 

세탁소에서 허리가 아프도록 빨래를 한 박찬호는 이어서 공찬과 함께 인성학교를 방문한다. 1917년 여운형에 의해 상해에 세워진 초등학교, 이역만리 중국에서도 한국어와 한국혼을 불어넣기 위해 만들어진 이 학교는 초등학교였지만 당시로서는 내로라하던 김태연, 이광복, 현정건, 선우혁, 여운홍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선생님으로 독립정신을 고취, 이 학교 출신 학생들 상당수가 이후 독립운동 단체인 상하이 소년 척후대의 주요 인원으로 성장했다. 이런 인성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1999년 상해 한국인 학교가 만들어졌고, 공찬은 이곳의 1일 교사로, 박찬호는 이곳 학생들을 상대로 자신이 이룬 꿈에 대해 설파한다. 

 

 

<독립 원정대의 하루 살이>는 두 가지 플랫폼의 형식을 띤다. 1월 7일 tv를 통해 방영된 프로그램에서는 상하이로 간 연예인들의 1일 독립운동가의 삶 체험을 중심으로 한 '예능적 형식'에 방점을 찍은 반면,  웹 사이트에 올려진 웹 다큐는 <그 남자의 집 대한민국>, <백산 안희제와 독립 자금의 비밀> 등,  tv 판에서 부족했던 역사적 사실을 다큐 형식으로 구성,  tv를 통해 독립 운동가들의 삶에 대해 궁금증을 보다 상세하게 소개한다. 그러기에 예능적 접근이 아쉬웠던 사람들이라면 <독립 원정대의 하루살이> 사이트를 방문하면 김수로, 강한나, 박찬호, 김동완이 했던 체험의 본연을 만날 수 있다. 

by meditator 2019. 1. 8. 17:12

1월 6일, sbs는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특집하는 취지에서 <신년 특집 다큐멘터리 의렬단의 독립 전쟁>을 방영했다. 이 다큐가 주목할 만한 이유는 바로 그 주인공이 의렬단이기 때문이다. 이하 다큐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일제 시대 가장 비타협적이고 강고하게 일제에 저항했던 단체, 하지만 우리는 이 단체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단체와 그 단장인 김원봉이 우리 독립 운동사의 접혀진 부분인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택한 단체이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에게 김원봉은 '나 밀양 사람이오'하던 대사와 함께 등장한 <암살>의 조승우가 분한 역할로, 그리고 또 다른 영화 <밀정>에서 이병헌이 분한 정채산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며 다가왔다. 그 영화 속 신출귀몰 바람같던 독립운동의 전설 김원봉, 그리고 그가 단장으로 있던 의렬단을 sbs가 복원한다. 

다큐를 연 건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오지 태항산맥 그곳 운두저촌에 남겨진 한글 문구이다. 

왜놈의 상관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조선 말을 운두저촌 주민들은 칠을 더하며 지켜왔다. 왜 이곳 주민들은 조선의용군의 저 문구를 지켜주려 했을까? 심지어 나이든 주민들 중에는 조선 의용군의 우리말 군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있다. 도대체 이역만리 이 외진 곳에서 조선 청년들은 무엇을 했던가? 그 의문으로 부터 다큐는 시작된다.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그리고 다큐는 1923년 경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월 종로 경찰서에 폭탄이 던져졌다. 일제, 그 중에서도 그 폭압적 권력의 핵심부인 종로 경찰서를 공격하다니.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미와 경부는 사건의 용의자로 김상옥을 추정하고 그의 주변 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왜 김상옥이었을까? 그는 철물점을 하는 상인이었지만, 사실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거기에 명사수에 비호장군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신출귀몰하다는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1920년 미 의원단이 경성을 방문하고 사이토 총독이 이들을 영접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상옥은 이곳에 폭탄을 던지고자 했다. 하지만 그만 하루 전 예비 검속에 폭탄 등의 다수를 가진 채 걸려 버린다. 비호 장군답게 검거를 피해 잠적했던 김상옥, 그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에 당연히 종로 경찰서 사건의 주범으로 추정된 것이다. 

그리고 1월 22일 그가 효자동 민가에 숨어있다는 소식을 접한 일경은 무려 김상옥 한 사람을 잡기 위해 1000 여 명을 동원하여 집중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겨우 총 두 자루, 하지만 명사수였던 그는 무려 3시간 동안 일경과 대치했고 총알이 떨어진 걸 확인하고 동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결을 택한다. 이는 김장옥이란 이름으로 일경과 대치하다 죽음을 맞이한 김장옥의 영화 <밀정> 속 첫 씬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김상옥의 죽음 이후 무려 2달 동안이나 보도 통제를 하며 수사를 하던 일경은 이 사건에서 '김원봉'이란 인물을 찾아낸다. 바로 김원봉이 단장으로 있던 의렬단의 의거였던 것이다. 

 

 

김원봉과 의렬단 
1919년 11월 상해, 조선의 청년들은 비폭력 투쟁이었던 3.1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광복을 이루기 위해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고자 무력을 수단으로 암살을 정의로 삼아 5개의 적 기관(조선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 신보사, 각 경찰서 등) 파괴와 7악(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 수뇌부,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의 제거를 목표로 하여 결성되었다.

그에 따라 앞서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을 비롯하여,
1920년 부산 경찰서장 폭사 사건,
같은 해 밀양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1921년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내 폭탄 폭파 사건,
1922년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의 일본 육군 대장 암살 시도, 
1924년 김지섭 일본 천황궁 앞 폭탄 투척 시도
1924년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의 친일파 정갑주 일가족 사살, 밀정 배정자 암살 시도, 일진회 이용구 회장 부상,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 투척, 
1926년 나석주의 동양 척식 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 습격 등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미처 알지 못했던 일제 시대 국내 혹은 국외 무장 투쟁들을 벌여왔다. 

혁혁한 활동을 벌였지만 동시에 김상옥, 나석주의  자결, 김병현의 순국, 김광추, 박희광, 김지섭 등의 체포 등을 겪으며 개인적 테러활동에 한계에 도달하고 독립 운동 내에 불기 시작한 사회주의 물결과 함께 의열단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종적을 감춘 김원봉,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6년 중국 남경의 천녕사에서 였다. 

 

 

조선 의용대와 의용군 
개인적인 투쟁을 본격적인 무장 투쟁으로 승화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1932년 조선 혁명 정치 간부학교가 개교되었다. 또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위해 김원봉은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중국 혁명 엘리트의 산실인 황포 군관 학교에 입교하였다.

1938년 중일 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조선 의용대가 창설, 이들은 조선 민족 해방과 국제적 동맹으로서 중국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2가지 임무를 내걸고 중일 전쟁에서 선전전, 심리전 등을 비롯한 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거기에 좀 더 동포들이 많은 지역으로의 투쟁 거점을 옮기고자 하는 열망에 조선 의용대 상당수가 화북으로 옮겨 1042년 조선의용군으로 호가장 전투 등에서 앞서 운두저촌의 중국인들이 기릴 정도로 혁혁한 활약을 보였고 이들의 활약 덕분에 팽덕회, 주석, 등소평 등 중국 혁명의 주역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한편 남경에 남아있던 김원봉 등은 1942년 중국 임시 정부에 합류 한국 광복군 제 1지대가 되어 조선 진격의 준비를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한다. 

의의와 한계 
다큐는 1919년에  결성한 의렬단의 궤적을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다룬다. 무엇보다 우리 독립 운동사의 존재하지만 말할 수 없었던 영역을 봉인 해제하고자 했던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굳이 조승우나 이병헌이 아니었더라도 영화 <암살>이나 <밀정>에서 등장한 김원봉, 혹은 김원봉으로 추정된 인물의 존재감은 컸다. 하지만, 그 큰 존재감을 가진 인물을 우리는 드러내어 말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여전히 아쉽다. 다큐는 의렬단의 존재적 계승을 1935년 해체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에 촛점을 맞추어 조선 의용대, 조선의용군으로 이어 서술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전히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딜레마가 되고 있는 '사회주의 노선'에 대해 다큐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함구하고 있다. 

과연 의렬단과 아나키즘, 그리고 조선 의용대, 조선 의용군과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노선을 분리하여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다큐는 스스로 자충수를 두고 만다. 다큐에서는 마치 김원봉이 그의 친구 윤세주에게 부탁하여 조선 의용대의 일보를 화북으로 옮긴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엄밀하게 조선 의용군 내 분파적 결정이었다. 즉 국민당 정부와의 협조적 관계를 선택했던 김원봉과, 물론 우리 주민이 많은 만주로의 이주도 있지만 중국 공산당 내 팔로군으로 귀속한 조선 의용군의 행보는 엄연히 다른 길인 것이다. 이들은 김원봉과 이른바 '연안파'로 나뉘어 졌으며  광복군과 북한의 조선 의용군의 모태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들은 모두 이후 자진 월북이후 숙청이라는 사건을 겪기도 하였다. 과연 역사를 어디까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역사적 행보에 대한 과욕이 겉훑기식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점에서 아쉽다. 

이러한 객관적 사상적 궤적에 대한 사실을 드러낼 자신이 없었다면 차라리, 1920년대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폭력 투쟁의 의렬단만을 충실히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실하게 했다면 다큐의 한 시간을 채우고도 넘쳤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의렬단의 독립 투쟁>은 의의와 한계를 가진, 어쩌면 일제하 독립 운동사에 대한 방송의 과제를 남긴 시간이 되었다. 


by meditator 2019. 1. 7. 16:44

<다큐 시선>은 삼일운동 100주년, 임시 정부 10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곁의 친일 잔재 3부작을 마련했다. 1월 3일 방영된 첫 번 째 친일 잔재는  '교육'이다. 

지난 2014년 2월 미쓰비시 근로 정신대 피해자 네 분은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재판부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불법적인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 수행에 동참한 반인도적 행위까지 일일이 개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포함할 수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미쓰비시는 이에 불복 계속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며 재판의 결과 이행을 지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12월 5일 대법원 앞에는  근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 모임 사람들과 함께, 91살의 김정주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나와 더 늦기 전에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중학교에 보내준다 하고 일본의 공장으로 보낸 선생님들 
김정주 할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칠 무렵 중학교를 보내준다는 담임과 교장의 꼬임에 넘어가 일본으로 갔다. 놀라운 건 이제 81살 된 여동생 김성주 할머니 마저 언니처럼 동생을 꼬드겨 근로 정신대로 보냈다. 후지코시에 강제 징용된 동생 김정주 할머니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공장과 기숙사 생활은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배가 너무 고파 기숙사의 이름모를 푸른 풀들을 뜯어 먹어야 했던 시간, 지진으로 다리를 다치고 기계에 손가락을 잃은 채 돌아온 고국, 하지만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은 파탄났다. 

이 두 어린 여학생에게 상급 학교를 미끼로 일본 행을 권했던 건 75년전 순천 남초등학교의 오오가끼 선생님, 근대화된 일본을 배워야 한다. 이제 곧 만주, 중국 등을 손아귀에 넣어 대동아 공영권의 주인이 될 일본 밑에서 식민지인 게 , 2등 국민이라도 하는게 행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벌이는 성전과도 같은 전쟁에 기여를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교장은 학생들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논리를 설파했을 것이다. 

 

 
일제의 동원령에 앞장선 민족 교육의 선각자들 
그런데 당시 일본인 선생님만이 그랬던 게 아니다. 1938년 3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일본은 우리 말과 글을 못쓰게 하고 일본에 충성하겠다는 황국 신민 서사를 강요 하는 등 새로운 식민지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는 전쟁으로 가는 일본의 체제에 식민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정책의 변화였다. 이어 1943년 교련 등 군사 교육 분야를 도입하는 등 지원병과 학도병에 맞는 교육을 변질시켜 나갔고, '일한 병합'의 취지로 한국, 한국인, 한국 역사, 한국의 문화 모든 것을 '폐멸'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교육, 식민지 정책에 우리의 교육인들이 동조를 넘어 앞장섰다. 

의친왕에게서 하사 받은 땅에 추계 학원을 만든 황신덕은 1937년 중일 전쟁 직후 김활란 등 대표적인 사학 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전쟁 지원 단체에 가입하여 근로 정신대를 독려하는 선동을 하고 글을 썼다. 

더 충격적인 건 민족 사학의 거두로 알려진 인촌 김성수의 다른 선택이다. '조선의 징병령 쾌보는 실로 반도 2천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 등등 1942년 이후 총독부 기관지를 비롯 여러 신문에 학도병 독려의 글을 쓰는 등 친일에 앞장 선 것이다. 

이화 여전을 세운 김활란, 지금의 서울 음대 전신인 경성 음악 전문 학교를 세운 현제명 등 민족 교육의 대표자들은 일제 말기 얼굴을 바꾸고 일제의 동원령에 앞장 섰다. 

 

 

물론 이들의 변절에 대한 변명도 있다. 황신덕의 경우 1927년까지 근우회를 조직하고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 섰고, 인촌 김성수의 경우 변절을 한 1930년대 말까지 25,6년간 민족 교육의 거두로 헌신해왔었다는 점이다. 학교와 신문사, 경성 방직을 지키고자 하는 시대적 고육책이었음을 고려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변절보다 그 변절을 덮고자 했던 이후의 행동들이다. 친일에 대한 반성과 자신들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동포에 대한 사죄는 커녕 해방 후 반공주의 정권의 기득권으로  자기 보전에 연연했다는 점이다. 여전히 고대 앞의 거리는 인촌로이고, 대법원 판결로 서훈이 박탈된 현재에도 고려대학교 인촌 기념관에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설명이 단 한 줄도 들어가 있지 않다. 추계 학원에도, 고려대학교에도 여전히 황신덕과 김성수의 동상은 세워져 있다. 

이런 민족 사학의 결과물로 인한 소송과 분쟁도 이어진다. 최근 연극계의 화두는 남산 드라마 센터가 누구의 것이냐는 것이다. 학도병 지원은 물론, 만주 한인 이민 등을 적극 권장했던 대표적 친일파 동랑 유치진, 그 역시 해방후 반공주의 정권과 결탁하여 미군정 귀속 재산을 불하받아 그 자리에 남산 드라마 센터를 지었다. 귀속 재산은 국가에 환수되어야 한다는 법에 의거 더 이상 유치진 일가의 남산 드라마 센터, 서울 예대 소유는 불가하다는 반발이 일고 있다. 역시나 대표적 친일파 민영휘가 만든 휘문고는 상속되며 족벌 사학이 되었고 최근 사학재단 임대 보증금 횡령 사건 등에 휘말려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일제 하 민족 사학들 중 상당수가  일제 말 자신의 재산과 직위를 보전하기 위해 '친일파'로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명목이야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교육을 보전하기 위해서라지만, 그를 위해 그들은 비행기를 헌납했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데 앞장섰다. 심지어 내선일체의 선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그런 과오에 대한 반성과 속죄의 시간은 없었다. 대신 해방 이후 미군과 정권에 유착하여 다시 한번 기득권이 되어 이제 ''족벌 사학'이 되었다. 친일파가 해방 이후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가는 이 '단죄되지 않고 속죄하지 않은 시간'이 이것이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이 되었다. 

일제 시대 교과서 속 식민지 교육 
이렇게 교육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결국은 '변절'로 그들의 선각자적 활동을 얼룩져버리는 동안, 교육이라고 달랐을까. 전남대 일문과 김순전 교수는 식민지 시절 교과서를 번역하여 식민지사의 내막을 파헤치고자 한다. 

그저 두 친구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그 두 친구가 일본인이고 한국인인 한 달라진다. 수례를 끄는 일본인과 미는 조선인이라는 식이다. 이처럼 주도적인 일본인과 수동적인 한국인 상이 은연 중에 교과서 곳곳에 심어져 있는 것이다. 

역사 교육은 보다 고등적 암시가 담겨있다.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을 설명하되 갈등 구조를 더해 한계를 드러내는 식이라거나, 박혁거세, 석탈해가 일본에서 왔다는 식으로 하여 일본과 한국이 원래 하나 였으며 나뉘어 졌던 것이 합쳐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내선 일체론', '동화론'을 유도하는 식이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식민 사학 논쟁 
1925년 자국 역사학자들 중심으로 조선사 편수회를 만든 일제, 37년 조선사 편수회가 만든 조선사가 편찬된다. 식민지적 관리 방식으로서의 조선 역사이자, 역사적 자료의 독점, 관리 체계 정립을 이룬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일본의 지방사로,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지배 논리가 관철된 역사로 새롭게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제에 의한 역사, 그 그림자는 생각 외로 길다. 지명으로 압록강은 두 군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랴호허 강의 지류인 압록강(鴨淥江)이 그 둘이다. 고려 역사 속 강동 6주가 있는 곳을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으로 역사 책은 기술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는 이의를 제기한다. 외려 중국의 역사서 등을 조사해 보면 후자의 압록강이 더 맞고, 그에 따르면 고려가 세운 천리장성의 위치도 한참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윤관의 9성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위치가 아닌 '두만강 너머 700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연구소 측은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인하대 연구소 등이 주장하고 있는 건 지금의 역사서들이 일본의 실증사학자 쓰다소키치의 제자인 이병도가 만든 진단학회에 의한 교과서가 가진 식민지 사관의 흔적들을 지우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서울대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이병도의 제자들, 그 학파에 의한 한국사관의 점령, 이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학계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 만큼이나 어려운 숙제라 입을 모은다. 
 

 
카톨릭 대 기경량 교수는 일제 시대 펴낸 조선사는 하나의 사료집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물론 식민주의적 흔적은 극복해야 하지만 그 사료집에 불과한 조선사에 대해 무조건 배척하는 건 또 하나의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이라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김세연 동북아 역사 왜곡 대책 특별위원 역시 주류는 잘못됐고 비주류는 옳다는 흑백 논리를 경계한다.  과학의 발달에 근거하여 탄소 동위원소 등 고증학적 관점에서 학문적 공론의 장이 펼쳐져야 하며 정치적 목적의 왜곡을 우려한다. 

이렇듯 아직도 우리 역사 학계는 일본이 만든, 혹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만든 역사의 긴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혹은 각각의 사관에 따라 역사학계는 나뉘어지고 학문적 공론의 장을 통한 진솔한 토론과 합의는 쉬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교과서 개정 때마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by meditator 2019. 1. 5. 0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