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방송이 되겠어?'

이 대사는 첫 방송을 앞둔 <이적쇼>를 두고 이적이 <방송의 적> 도중에 한 말이다.  주변의 친구들이 너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사람이 단독으로 토크쇼를 하면 누가 보겠냐는 조언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에 앞서 가장 먼저 회의을 표명한 사람은 이적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비슷한 대사를 이적은 <힐링 캠프>에서 또 읊조린다. 왜 힐링 캠프가 자신에게 출연 요청을 했을까? 혹시 누가 펑크를 냈나? 과연 이게 방송이 될까? 이제 곧 한혜진이 영국으로 가는데 지금 방송이 안되면 자신의 방송분은 영원히 묻히는데? 
하지만 이게 방송이 되냐는 회의에도 불구하고, 세상 듣도보도 못한 희한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방송의 적>과 그 안의 코너 <이적쇼>는 순항중이고(물론 때로는 존박쇼가 되기도 하지만), 시청률이 낮건 어떻건 힐링 캠프 이적 출연분은 방영이 되었다. 

(사진; 스포츠 월드)


<힐링 캠프>의 도입부 게스트 소개에서, mc들은 이적을 소개하기에 앞서 '국민 가수'라는 호칭을 들먹인다. 하지만 '국민가수'에 걸맞는 사람으로 mc 자신들도 '조용필'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냐며 자평을 한다. 이승철은 끼워넣어 주고, 부활은 이경규가 친분으로 어거지로 갖다 붙이고. 그러더니 뜬금없이 이적 소개로 넘어간다. 나오는 이적 자신도, 자신 정도의 게스트로 방송이 될까를 걱정하며 소심하게 처신을 하고. 
<sbs 스페셜-대한민국 가수, 조용필> 편을 보면, 국민 가수란, 그저 팬이 많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필과 동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이, 기쁠 때, 외로울 때, 그리고 사랑을 할 때 조용필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왔던 것처럼,  그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했던 노래를 불렀던 가수를 말하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거위의 꿈'을 비롯해, '달팽이', '왼손잡이', '하늘을 달리다', '다행이다' 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낸 이적이야 말로, 차세대 국민 가수감이라 해도 크게 무리가 없지 않을까.

그런데, 조용필이나, 이승철과 달리, 이적에게 '국민 가수'라는 타이틀은 어쩐지 버거워 보인다. 그가 그렇게 수많은 노래들을 통해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도 어쩐지 그는 그의 세대인 유희열이나, 김동률, 심지어 윤종신보다도 이른바 포스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심지어, 그의 이름을 걸고 하는 <방송의 적>이란 프로그램을 보면, 포스는 커녕, 한참 아래 후배 존박과 존재감을 놓고 아등바등거리는 그가 만만해 보이기 까지 한다. 
그건 <힐링 캠프>에서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그만한 '엄친아'가 어디 있겠는가. 형제들과 함께 서울대를 나오고, 어머님은 1세대 여성학자에, 때로는 안쓰는 근육을 쓰는 느낌으로 원서를 읽으며, 13만부가 팔린  베스트 셀러 작가이기도 한 그다. 
그런데, 서울대를 나온 수재는 학창시절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처음 작곡을 한 소년의 이미지에, 학자인 어머님의 존재는, 이분들이 나를 지켜주지 않겠구나란  세속적 깨달음으로, 책을 많이 읽는 지식인은 음담패설을 즐기며, '낯선 여자'를 좋아하는 속물의 풍모에 밀려버린다. 심지어, <나는 가수다>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은 노래가 불려진 아티스트가, 방송 분량을 걱정하며, <다행이다>를 이경구의 심장 수술 버전으로 바로 바꾸어 불러주고, 낯선 여자를 주제로 한 즉흥곡을 만드는데 거침이 없다. 
김동률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거위의 꿈' 가사를 단숨에 써버렸다는 걸 보면, 말만 하면 말하는대로 툭툭 만들어 내는 걸 보면, 천재는 천재인 거 같은데, 그 예전 살리에르가 보고 분노했던 천박한 천재 모짜르트를 보는 것처럼, 어쩐지 천재로 인정하기엔 너무 범상하다. '아우라' 따위는 개나 줘라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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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이 가수의 본업에 충실하라 조언을 할 정도로 개가수가 되어가는 이적의 장점은 아마도 그 평범함이 빗어내는 친근감일 것이다. 
<방송의 적>에서 이적은 늘 자신을 한껏 드러내고, 부풀려 보이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언제나 신인 가수 존박에게조차 밀릴 정도로 보잘 것 없다. 한껏 허세를 부려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보잘 것없고, 하지만 이적은 그 보잘 것 없는 것조차도 결코 마다치 않는다. <힐링 캠프>에서 방송이 될까를 걱정하는 이적의 캐릭터와 겹쳐지는 부분이다. 이경규가 늘 누군가에게 묻혀간다는 지적에, 그렇게라도 살아남는게 어디냐는 담백한 토로가 어울리는 지점이기도 하고. 

그런데 리얼리티 쇼에서의 어설픈 허세어린 모습이, 그리고 토크쇼에서의 전전긍긍하는 소심한 모습이, 그의 동년배들, 그리고 이제 서른 중반을 넘긴 그보다 어린 세대들에게는 공감대를 자아낸다. 
그 세대가 그렇다. 자식 하나나 둘 낳는 시절에, 누구나 다 나름 '엄친아'였고, 한 가닥씩 하면 사회에서 자리잡아 가려고 하는데, 영 포스가 안 나는 세대인 것이다. 그 앞전의 세대는 민주화다 뭐다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경제 발전기의 떡고물로 그런대로 잘 먹고, 잘 나갔는데, 이제 이적으로 대변되는 세대는, 나름 배울만큼 배우고, 이룰만큼 이루었는데, 영 때깔이 안나는 것이다. 경제는 불황이라 하니 내일을 알 수 없고, 자신이 이룬 것들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것이다. 반면, 별로 내세울 게 없으니 어깨에 힘 좀 넣으려 해도 넣어지지 않는, 그래서 눈 앞의 조그만 행복, 조그만 욕망에 솔직한 그 세대의 전형적 캐릭터로써의 이적을 친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캐릭터가 발견되기 시작한 곳은 일찌기 캐릭터 발견의 귀재였던 <라디오 스타>였다. 그것을 증폭시킨 것은 <무한도전>이었고, 이제 그는  <방송의 적>을 통해 게스트가 아닌 호스트가 되어, 이적이란  세속적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소비시키는 중이다. 이 황당무개하고 어의없는 리얼리티 쇼에서, 얍삽하려 노력하지만 늘 별로 건지는 것 없는 '이적'을 연기하는 이적이 그럴 듯해 보이는 건, 방송의 적 이적과 실제의 이적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소탈하고 소박한 유형의 '이적'을 동시대의 표상으로 예능은 적극적으로 사용하려 하고 있다. 
아마도 이담에, 이적이 '국민 가수'가 된다면, 그때의 국민 가수는 조용필이나, 이승철의 아우라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국민 가수일 것이다. 


by meditator 2013. 8. 6. 10:08

일반적인 중년 남성들이 텔레비젼을 보는 특징 중 하나는 어떤 프로그램도 집중해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번 마누라의 리모컨을 강탈하여 모 프로그램을 보는가 싶으면, 어느새 리모컨 사냥에 나선다. 공중파에서 종편을 거쳐, 뉴스전문 채널에서, 여행, 낚시 채널까지를 종횡무진 한 채널에 정착하기 힘들어 한다. 마누라와 아들이 깔깔깔 거리며 보고 있는 프로그램을 지그시 바라보는가 싶으면 어느새 쓴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가 십상이다.  우리집만 그런가 싶어서 하소연을 하니, 다른 아줌마들도 공감 백배인 걸 보면 일반적이란 전제를 달아도 그리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런 남편이 드라마를 다 보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고 있는 마누라의 리모컨을 고정시킨다. 조용필이 나온다! 그리고 한 시간여, 추억을 공유한 사람만이 가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sbs스페셜- 대한민국 가수, 조용필>을 지켜본다. 

(사진; sbs)

프로그램 중간에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조용필은 야광봉을 흔들며 그를 '오빠'라 연호하는 팬들에게 엎드려 손을 뻗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터뷰, 조용필은 말한다.
"오빠는, 조용필의 다른 이름과도 같다"고.
그렇다, 그의 노래, <비련>의 첫 마디 가사, '기도하는~'의 다음 가사는 '꺄악!'인 것처럼, 조용필은 '오빠부대'라는 말을 처음 말들어낸 가수이다. 그의 19집 <hello>가 발매되었을 때 수그리고 있던 그의 오빠 부대들은 다시 떨치고 일어나, 조용필의 사진을 들고 앨범을 사기 위해 줄을 섰다. 그의 말대로, 한번 오빠는 영원한 오빠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조용필이라는 것을 프로그램은 여러 가수들과 평론가의 입을 빌려 증언한다. 

63세의 조용필이 무려 19집 <hello>를 들고 나왔을 때, 입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 그의 행보에 대해 한 마디씩을 거들었다. 외국 작곡가의 곡을 받은 '바운스'나 '헬로'를 듣고, 조용필답다라던가, 젊은 세대조차 매료시킨 능력이라던가, 혹은 조용필이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하지만 굳이 '가왕'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떼어놓고 보면, 그리고 나이를 또한 지워버리고 보면, 한 사람의 가수가 기존의 자신의 색깔과는 다른 새로운 앨벌을 들고 나와, 세간의 이슈가 된 것만으로도 어쩌면 일정 정도의 성공을 얻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크레용 팝이라는 여자 아이돌 그룹이 처음에 "빠빠빠'라는 곡을 들고 나왔을 때 그 낮은 지명도로 인해 음악 방송 무대에 조차 서기 힘들다가, 호불호가 갈리든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니 방송 출연의 기회가 보다 많이 주어지는 것처럼. 조용필의 19집 앨범이 조용필다웠던 그렇지 않던 젊은 세대조차 그의 노래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큼 화제가 되다보니 sbs스페셜>의 주인공이 되지 않는가 말이다.

(사진; tv 리포트)

하지만 <sbs스페셜>은 2013년의 조용필에 대한 논란이 1회성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통해 이른바  '뽕짝', 트로트 장르에서 확고한 인기를 얻었던 조용필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도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전자 드럼을 활용한 '단발머리'라는 곡을 들고 나왔던 것처럼, 이미 그는 국악, 재즈 등 특정 장
르에 자신을 가둬두지 않는 실험을 계속 해왔다는 것을 후배들과 평론가의 입을 빌어 확인해 준다. 

장르만이 아니다. 그 예전에 젊은 사람들이라면,'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화려한 거리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에 공감을 얻고,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에 젊음의 다하지 못한 열정을 담아냈었다. 심지어, 시위를 하다 잡혀간 친구를 생각하며 운동가요가 아닌  '친구여~ 모습은 어디갔나~ 그리운 친구여~'를 부르기도 했었다. 머리가 희끗해진 남편이 계면쩍은 미소를 띠며 <sbs스페셜>을 지켜보는 이유 역시 그의 노래를 즐겨 불렀던 지난 날이 떠올라서 였을 것이다. 
조용필 자신이 불순한 젊은이들이 그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 하여 수사기관에 끌려 갔었다고 증언하듯, 아니 그 증언의 협소한 범위에 머무르지 않고 당시 젊은이들이라면 사상과 노선을 가리지 않고, 조용필의 노래에 심취했었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같이한 노래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만큼. 
그리고 거기서 좀 더 나아가,  조용필은 세간에 회자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자신의 노래와 함께 호흡해준 사람들의 삶에 천착한 노래를 만들고자 했다는 것도 프로그램은 짚고 넘어간다. 광주 항쟁을 배경으로 한 '생명'이나, 6월 민주 항쟁을 직접적으로 그린 '서울 1987'같은 곡들이 바로 그것이다. 

프로그램은 조용필의 전국 순회 마지막 공연에서 '설렘'을 부르는 조용필의 모습을 노래의 자막과 함께 담는 것으로 끝난다.
'너에게 간다. 설레임 그대로야'라고.
<sbs스페셜>은, '가왕' 조용필의 전설을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보다는, 19집이 생뚱맞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여전한 현재 진행형의 실험맨 조용필의 진가를 보여주는 것, 아직도 노래방에 가서도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자신에게 노래를 시켜주지 않으면 서운해 하는, 노래하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 조용필의 매력을 다시 확인 시킨다. 여전히 '오빠'인 그를 통해,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외롭게 늙어가는 노인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본질적 의미의 '청춘'을 환기시킨다. 보는 늙수그레한 시청자들조차 지레 눌려버린 나이가 무색해질 만큼.


by meditator 2013. 8. 5. 10:11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몬스타> 마지막 회, '니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들려달라던 나나(다희 분)에게 선우(강하늘 분)가 들려준 노래이다. 세이를 아직 정리하지 못하는 선우의 마음을 담은 노래이자, 선우를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나나에 대한 선우의 마음을 담은 노래로, 그냥 그 노래를 선우가 부른 순간, 나나가 울음을 터트리며 가버렸듯 모든 것을 노래 가사로 다 설명해 줄 수 있는 노래였다. 


그런데 노래가 나오는 동시에 함께 자연스레 함께 읊조리는 엄마와 달리, 현직 고등학생인 아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저 노래가 뭐지? 하면서.
그도 그럴 것이, 이영훈 작사, 작곡, 이문세 노래의 <사랑이 지나가면>이 첫 발매된 것이 1987년이다. 무려 26년 전 노래를 2013년의 고등학생이 사랑의 슬픔을 대변하는 곡으로 부르고 있다. 엄밀하게 이건 넌센스다. 하지만, <몬스타>를 시청했던 그 누구도 그 장면에서 선우가 부른 그 노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비단 <몬스타>에 그치지 않는다. 굳이 시작을 따지자면 영화 <건축학 개론>을 들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본격적인 계기라면 <응답하라 1997>을 들어야 하나, 하지만, <건축학 개론>이나, <응답하라 1997>의 OST들은 90년대라는 특정 시점을 상징적으로 담보해 내기 위한 의도적인 도구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청춘 드라마의 OST 들은 굳이 특정한 시대적 배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혹은 20세기적인 곡들인 경우가 많다. 

'처음엔 미처 몰랐어. 눈부신 사랑에 빠질 줄은
멀리서 전학온 이상한 아이가 너란걸 누군가 얘기했을 뿐
그러던 어느날인가 조금씩 내눈에 띠더라구'
이것은 2013년에 발매된 불독 맨션의 스타걸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2013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무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불독 맨션이 처음 활동하던 당시에 발표했던 노래다. 드라마 스페셜 <사춘기 메들리>에 등장한 이 노래는, <사춘기 메들리>의 내용을 그대로 축약해 놓은 듯해 화제가 되었다. 또 제이레빗의 목소리에 실린 또 다른 OST인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고 김광석이 1996년에 발표한 곡이었고, 극중 고등학생인 정우(곽정연 분)이 전국 노래자랑에 나가 부른 곡은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였다. 그뿐이 아니다. 제목은 <사춘기 메들리>였지만, 드라마는 <20세기 메들리>인 것처럼, 불독 맨션을 비롯해, 젝스키스까지, 그리고 커피소년처럼, 20세기의 정서와, 그들이 정서의 계보를 잇는 아티스트들의 노래로 푸짐하게 한 상을 차려 내었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빈 풍경이 불어온다
.......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몬스타>란 드라마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1회 '라디오'란 별명으로 왕따를 당하는 박규동(강의식 분)이 눈물젖은 목소리로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아니었을까? 이 노래 역시 1990년 이소라의 6집 <눈썹달>에 실린 곡이다. 뿐만이 아니다. <몬스타>는 유재하의 <지난 날>로 시작하여, 신승훈의 <날 울리지마>, 이지연의 <바람아 멈추어다오>, 루시드 폴의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이승철의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그리고 들국화의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까지, 20세기 뮤지션의 향연이었다. 물론 그들만은 아니다. 커피 소년, 제이레빗,  M.O.T 등 역시나 20세기적 정서를 유지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이 풍성하게 담겼고, 이런 음악들은, 스토리만큼이나 극으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음악이 ost화 되어 가고 있다는 자탄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블로그의 배경음악으로, 핸드폰의 벨소리로 음악을 소비하기 시작했고, 드라마의 ost가 되어야 귀를 기울여 듣고 찾아듣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ost 공해라고 할 만큼 드라마에서 음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중이고 깔리는 곡의 수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응답하라 1997>을 기점으로, 이제 음악은 드라마의 배경을 장식하는 수준을 벗어나, 당당하게 극의 주인공으로 한 자리를 꿰어하는 경우도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특히나 최근 제작된 <몬스타>나, <사춘기 메들리>의 경우는 음악이 없이는 드라마 자체가 완성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거기에 사용된 음악들이, 2013년의 청춘들이 즐겨듣는 곡들이 아니라, 때로는 그들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의 곡들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편의적으로는, 그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청춘을 상징하던 시점이 바로 그 20세기 였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거기다 <응답하라 1997>의 성공 사례처럼, 2013년의 청춘도 잡고, 20세기의 어른의 관심도 끌어보자는 양수겹장의 전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한껏 위축되었던 80년대를 지나, 이른바 x세대로 상징되는 자유로운 청춘의 문화가 만개된 90년대야 말로 평론가들이 르네상스라 지칭하듯, 다양한 장르의 풍성한 음악들이 창조되었고, 지금 우리가 드라마에서 조우하듯 예전 노래라는 시대적 한계에 가둬두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명곡들이 많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름이 뭐예요? 전화 번호 뭐예요?'
'다같이 원/ 빠빠빠빠빠빠'
위의 두곡은 2013년 8월까지 가장 이슈가 된 포미닛의 <이름이 뭐예요>와 크레용 팝의 <빠빠빠>의 가사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후크송'이라며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단순한 가사의 곡들이 화제가 되더니, 올해 들어서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가사랄 것도 없는 단순한 어구들의 반복으로 만들어진 노래들이 유행 중이다. 그런데 제 아무리 이런 노래가 화제가 되기로 서니, 설레이는 첫사랑의 섬세한 감정에 '이름이 뭐예요?'라고 어겨다 붙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쩌면 최근 청춘 드라마의 노래들이 그 예전 노래를 자꾸 가져다 쓰는 것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요즘 노래 중에 풋풋한 청춘의 정서를 대변할 노래가 없어서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당연히 기승전결의 개연성있을 뿐만 아니라, 감정을 시적으로 맛깔나게 풀어준 노래들을 찾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거슬러 올라가 20세기까지 에돌아 가게 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8. 4. 10:36

화면 위쪽에 <최종회>라는 자막이 선명하게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몬스타>12회를 보는 내내 과연 이 드라마가 마지막 회 맞어? 라는 의문을 숨길 수 없었다. 심지어, 11시가 넘어가면서 부터는 내가 제작진도 아닌데 초조해지기 까지 한다. 도대체 남은 시간은 20분도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지? 

결국 마지막회 <몬스타>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어 11시 반을 넘어 엔딩 크레딧을 올려야만 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은, 호, 혹시, <몬스타 시즌2>를 만들려고 하나? 라는 의구심까지 든다. 뭔가 12회에 마무리를 짓기 위해, 허겁지겁 꾸겨넣은 느낌이 너무 강해서이다. 

물론 마무리는 지어졌다. 하지만 찬찬히 되돌아 보면, 이걸 마무리라고 해야 하나? 그저 '봉합'이라고 해야 하나?  휴지없이 화장실 다녀온 듯 어딘가 찝찝하다. 


음악 드라마니, 성장 스토리니 해도, 결국 <몬스타>를 이끌어 갔던 기본 줄기는 설찬(용준형 분)과 세이(하연수 분)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이다.  거기에 얹힌 그들의 가족사까지. 

그런데 두 사람은 이미 일찌기 키스까지 해버렸다. 마지막 회, 몰래 한지웅(안내상 분)에게 기타를 배운 설찬이 세이에게 노래를 들려 주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성숙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설찬과 세이의 관계는, 사귀기 전에는 자신의 맘을 몰라서, 사귀고 난 다음에는 혹시나 세이가 자신보다 선우와 더 가깝게 지낼까 찌질하게 앙탈을 부리는 설찬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찬은 가끔 멋있다.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돌답게 음악을 창작하는 능력이 뛰어나, 칼라바의 음악을 프로듀싱하거나, 키스씬처럼 임팩트있게 여주인공에게 들이댈 때는 멋있어 보인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런 설찬의 모습은 아주 가끔 등장할 뿐이고, 늘 주인공 설찬은 마치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칭칭거리는 아이처럼, 보챈다. 그런 모습을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는 남자 아이의 사랑의 방식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극을 이끌어 가는 매력은 반감된다. 12회가 마무리 되어도 설찬은 여전히 처음의 설찬 그대로인 느낌이다. 자신의 그룹 일을 포기하면서 칼라바의 일원으로 무대에 서도. 그의 선택이 그리 빛나지 않아보인다. 



그러기에, <몬스타>는 마지막 회에 이르기까지, 이미 11회 세이가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혀  확연해진 삼각 관계임에도, 정리하는 과정이라는 어색한 명목 하에, 서브남인 선우의 캐릭터 비중을 높일 수 밖에 없었다. 늘 설찬이라는 캐릭터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태클에 대해 도발하는 캐릭터이기에, 그를 도발시켜 주는 누군가가 끝까지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에 <몬스타>의 캐릭터 설정을 보았을 때, 소녀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우상처럼 좋아하는 아이돌 설찬이 학교로 돌아와, 학교 안의 평범한 소녀를 사랑한다는 스토리는, 설찬의 아이돌이란 존재와의 충돌을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12회에 이르러, 가장 본질적인 그 갈등은, 소녀 떼들 사이에서 세이의 손을 잡으려는 설찬의 노력 정도로, 그리고  그 마저도 해프닝으로 만든 채 어물어물 넘어가 버린다. 아이돌의 사랑 만들기가 아니라, 아이돌이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극복하는 설찬의 성장통은 설찬의 찌질한 캐릭터에 빛을 잃었다. 


뿐만 아니다. 이 드라마의 대표적인 두 남자 캐릭터 설찬과 선우는 어린 시절 한 때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으며, 어린 시절의 오해로 인해, 이제는 철천지 원수처럼 으르렁대는(물론 그 마저도 설찬의 일방적인 감정인 경우가 많지만) 사이이다. 아마도 <몬스타>가 풀어내야 할 과제 중 순번을 매긴다면 결코 다섯 손가락의 바깥으로 넘어가지 않을 갈등이었다. 그런데 12회로 마무리된 <몬스타>에서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의 오해로 미워하는 사이였지만, 칼라바로 뭉쳐서 음악을 할 정도인 사이? 여전히 세이를 사이에 두고 견원지간 같은 사이?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남자 캐릭터 사이의 관계가 어물어물 넘어가 버렸다. 늘 너는 하지 말아야 될 오지랖을 부린다며 막말을 하던 설찬과 그런 설찬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선우의 관계는, 설찬이 선우가 좋아하는 세이를 좋아하는 걸로 퉁친 게 되는 건가? 

차도남과 박규동의 오랜 해원을 멋들어 지게 풀어낸 것에 비해, 정작 두 주인공의 오해와 갈등은 해결이 되었다는 건지, 그저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라는 식인건지, 12회가 끝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두 주인공의 발목을 잡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세이가 쥐방구리 드나들듯 하던 집의 주인 한지웅이 사실은 부모님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이자, 엄마를 첫사랑으로 못잊어 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몬스타>의 12회를 끌고오던 주요 갈등 요인 중 하나였다. 거기에 보태 세이는 엄마가 아빠가 아닌 사람을 좋아해 아빠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오해를 하는 것이고. 

설찬의 경우는, 입양과 파양을 거듭하면서 엄마를 늘 어머니라 깍득하게 부르고, 폐를 끼지고 싶지 않다고 말할 만큼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처지이다. 

즉 두 사람 모두, 어른들의 일, 잘못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 캐릭터인 것이다. 


그런데, 그 상처에 대한 해결을 <몬스타>는 어떻게 풀어내었을까?

가장 조마조마하게 시청자들을 만들던 엄마와 한지웅이 잘 알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드라마는 엄마가 그 모든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으로 넘어가 버린다. 시청자들은 저게 터지면 어떻게 될까 이러고 있는데, 됐어, 세이는 더 이상 상처받으면 안돼 라며 꿀떡 삼켜버린다. 12회 설찬의 방송 출연이 어려워지자, 칼라바의 사연 팔이를 통해 이슈를 만들려던 피디가 올포원의 리더 말 한 마디에 아이템을 꿀꺽 삼켜버린 것보다 더 우스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아빠의 죽음은 알고 봤더니, 어린 세이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서라는 예상 밖의 스포를 12회 마지막이 되어서야 터트려 버린다. 이런 것도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시청자들은 극의 흐름을 이쪽에서 예상하고 지켜보며, 과연 저걸 어떻게 주인공들이 지헤롭게 극복해 내어 성장을 하게 될까 이러고 있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책임을 지우며, 그리고 그 조차도 극복을 한 것인지, 그냥 울고 만 것인지도 분명치 않게 마무리지어 버렸다. 엄마 때문에 아빠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엄마를 보지 않겠다고, 호주에서 혼자 한국으로 날아온 세이가, 정작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이 과연 울면서 노래 한 번 부른다고 해결 될 수 있을까? <몬스타>를 지켜본 시청자라면 그런 의구심은 당연히 드는 것이다. 

설찬과 엄마의 관계도 그렇다. 설찬이 그렇게 엄마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이유가, 엄마의 파양 때문이었다는 걸, 마지막 회에 가서야 밝히고 그저 엄마의 사과 한 마디로 넘어가 버린 이 모자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러니, 혹시 시즌2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몬스나>는 정작 가장 명확하게 해결하고, 혹은 해명하고 넘어가야 할 갈등들은 두루뭉수리하게 혹은 마지막 회에 가서야 어거지로 마무리를 지은 반면에 차도남과 박규동, 심은하, 김나나 등 조연들의 이야기는 현실감과 개연성, 그 어느 것에서도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잘 그려내었다. 그리고 이것이 12회라는 회차의 한계라기엔 그간 2회를 끌고오면서 그저 별 극적인 사건 없이 주인공들을 투닥거리다 끝낸 회차가 꽤 됐었다. 12회가 부족하다기 보다는, 12회라는 회차의 분량 조절이라는 평가가 더 적절할 듯하다. 또한 청소년의 성장통에 대한 고민이 주인공 커플과 선우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성장이란 그저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고 넘어간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왕의 교실> 아이들이 선생님과의 전쟁과도 같은 성장통을 겪으며 선생님과의 이별 조차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 지듯이, 속되지만, 아픈만큼 성숙해지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몬스타>의 성장통은 무엇이었나 12회가 끝난 지금도 묘연하다. 



by meditator 2013. 8. 3. 10:16

"찌질대지마! 언제까지 어리광만 피울거야!"

마여진 선생님의 마지막 말을 역시나 마여진 선생님다웠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그렇게 닦아세우는 선생님에게 상처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여기는 너희 교실이 아니라며 냉정하게 돌아서서 가서 선생님에게 '스승의 은혜'를 눈물을 흘리며 불러준다. 

언제나 그렇듯, <여왕의 교실>의 마지막은 감동적이다. 성큼 커버린 아이들이, 이제는 응석받이가 아닌 아이들이, 냉혹한 선생님의 속내조차 읽어낼 줄 아는 한 마디, 한 마디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 뭉클하게 눈물이 흐른다. 아마도 그 눈물의 의미는, 진실과 진실이 맞닿아 빚어지는 지점에서 자연스레 발산되는 화학작용일 것이다. 


물론 좀 더 따지고 들어가면 <여왕의 교실>의 엔딩이 그리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악역을 자처하는 마여진 선생님의 교실에서 아이들의 변화는 이해가 가지만, 길거리에서 패싸움을 벌이고, 마여진 선생님 대신 들어온 교감 선생님 앞에서 단체로 일어서서 한 명, 한 명이 잘못했습니다를 복창하며,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는 방식처럼, 일사분란하게 무리의 아이들이, 혹은 25명의 아이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전형적인 일본 드라마의 교훈적 결말을 향한 '집단주의' 클리셰를 보는 듯해서 불편했다. 

또한 마여진 선생의 역설적 교육 방식에 의한 아이들의 변화를 감동적으로 그려내려고 했던 의도는 알겠지만, 하루 아침에 아이들이 선생님이 그리워요, 선생님이랑 함께 하고 싶어요 라는 식의 변화는 작위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 위원의 소신어린 결정처럼, 제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과연 교육의 현장에서, 마여진 선생과 같은 역설적 교육 방법이 지닌 수단의 비윤리성 역시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다 라고 넘어갈 수 없는 지점 역시 여전히 남는 것이다. 


<여왕의 교실> 고현정, 드디어 웃었다 이미지-1

(사진; mbc)


하지만 그러기에 <여왕의 교실>은 많은 질문을 남긴다. 

우선은 마여진 선생님처럼 해야 겨우 자생적 능력을 가지고 독립적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왜곡된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 아이들의 모습이다. 간에 무리가 갈 정도로 자신을 혹사하며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고자 했던 마여진 선생님이라면 왜 아니 정상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자기 밖에 모르는 아이들, 호시탐탐 친구들을 왕따나 만들려는 아이들,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로봇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강력한 충격 요법만이 아이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오늘날의 교육 현실을  <여왕의 교실>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부모들에게 묻는다. 과연 여러분들은 당신의 자녀가 진정으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라나기를 원하느냐고?

마여진 선생과 대립적 위치에 있던 부모들이나, 교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무엇일까? 그건 바로 '어리다'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 어리니까, 어른들 말을 들어라. 어른들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마여진 선생님의 교육에 의해 달라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꿈을 찾아나선 아이들은 어른들이 너희를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만들어진 마스터 플랜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글로벌 리더가 되라던 고나리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위한 모금에 앞장서는 전혀 다른 방향의 글로벌 리더가 되었고, 가업을 이어 받아 의사가 되라던 아이는 기자가 되겠다고 한다. 아이들은 공부를 하겠다고 하지만, 이제 아이들을 하려고 하는 공부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막연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위한 공부가 아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들은 마여진 선생님을 구하기 위해 플랜카드를 들고 교육청을 방문하려고 까지 한다. 


<여왕의 교실>은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아이, 스스로 자신의 꿈을 찾으려고 하는 아이, 과연 그런 아이를 당신은 진짜 원하시냐고? 혹시 그간 당신이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이들을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길들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냐고? 어른들이 만든 세계관을 세뇌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냐고? 그리고, 어른들 말을 잘 듣는 그래서 말로는 니가 언제 혼자 헤쳐나갈 수 있니?라면서도, 끝까지 어른들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사는 아이를 원한 것은 아니었냐고? 묻는다. 


이제 교육을 통해 독립적 인간으로 자라난 아이들은, 키우던 장수 풍뎅이를 자연으로 돌려보내주듯, 선생님을 그리워하면서도 선생님과 이별을 받아들일 줄 아는 아이로 자라났다. 과연 내 아이가 그렇게 담담하게 내 품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자신의 꿈을 향해 떠나보낼 수 있는 부모가 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는지, 아이들이 자신들이 믿는 것을 믿는 독립적 인간이 되어도 되는지, 남겨진 질문이 묵직하다. 







by meditator 2013. 8. 2. 01:59

이수(김남길 분)가 죽었다. 김준으로 돌아왔던 이수가 죽었다. 

한 조각의 생존에 대한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총알은 목을 관통했다. <상어>란 드라마를 따라왔던 사람이라면, 이승의 세계에 이수를 위한 자리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년만에 만난 해우(한예진 분)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그녀를 여전히 지키고자 하는 준영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수는 복수를 하기 위해 살인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게다가 동생에게는 '간'이 필요하다. (물론 꼭 간은 죽어서 주는 건 아니다) 동생과 다시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수의 삶을 견인해온 복수도, 사랑도 이젠 이수의 몫은 끝났다. 그저 담담하게 죽을 사람이 죽었으니 하며 드라마를 바라보다, 이제야 이수가 친구라는 걸 안 오랜 친구 동수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이수의 손을 잡고, 이수를 목놓아 부르는데 울컥한다. 해우가 '이수야, 사랑해'라던 순간에도 올라오지 않던 감정이 솟아오른다. 비로소, 헤짚어 보게 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복수를 위해 살아갔던 한 남자의 삶을. 드라마 내내 김준이 되어, 온갖 감정을 드러내 보였던 이수였지만, 정작 드라마를 통해, 그의 삶이 안쓰러워진 건 동수의 통해 이수의 이름이 불리워졌을 때다. 


해우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회 해우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 자신의 가계, 할아버지가 저지른 엄청난 죄과를 대신 사죄하기 위해, 호텔과 자신의 직업이 날라갈 지도 모를 할아버지의 과거를 세상에 알린다.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가진 할아버지가 공식적 채널을 덮자, 비공식적 채널을 통해 알리고, 증거가 부족하다 하자, 할머니의 유품 속 사진마저 세상에 던진다. 주저함도, 거칠 것도 없이, 자신의 가계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사진; tv리포트)



1회의 1떡밥이라는 그간의 대전제를 무시하고, <상어> 20회는, 죽은 줄 알았던 이수의 생존(사실 죽였다라기엔 김준과 수현의 연기가 너무 어설프긴 했다)과 할머니의 비녀 속 사진, 암살자 부인 목의 열쇠에, 마지막 박여사가 빼놓은 총알까지, 많은 사건과 그 사건의 해결들이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심지어 1회부터 진짜 그림자처럼 암약하던 요시무라 회장의 존재감도 이수의 명쾌한 한 마디로 정리해 버린다.  덕분에, 이수는 죽음의 순간을 숨가쁘게 맞이했고, 결국 위너는 새로운 암살자가 된 형사가 되었으며, 해우는 기계처럼 자신의 가계 청산 작업을 하느라, 고뇌에 빠질 틈 조차 없었다. 죽음의 순간에도, 죽어가는 순간에도, 죽은 이후에도, 복수를 위해 10여년을 헌신한 이수의 삶에 대한 여운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이수를 사랑해, 그로 인해 자신의 가계를 무너뜨릴 용기를 가지게 된 해우의 결단도 드라마 내에선 그리 큰 자리를 얻지 못한 채 담백한 그녀의 소회로 넘어간다. 


<상어>가 20회를 통해 결국은 성취하고자 했던, 해우가 자신의 집안을 무너뜨리면서까지도 속죄해야만 했던 의미는 묵직하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청산되지 않은, 과거라는 어둠 속에 묻혀진, '역사'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잡혀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한 할아버지의 외침처럼,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후손들의 더 나은 삶이란 미명 하에 포장된, 왜곡된 역사는 바로 잡아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틈만 나면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감정적 분통을 터뜨리는 건 자연스럽지만, 숨겨진 '학살'과 약탈의 기록들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리없이 스러져 가는 것에는 무감한 현재의 우리에게, 잘 살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의 '사실'인 과거 조차 눈감고 외면하려고 하는 현재의 우리에게, 뒤틀린 역사의 왜곡이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조명국'이란 상징적 근대인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끝내 이수조차도 죽여버리고 미소를 짓는 그를 통해, 과거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의 악이 되어 우리 곁에서 숨쉬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데, 마지막 회를 통해 완결된 <상어>의 주제 의식은 이해는 되지만, 감동이 부족하다는 데 이 드라마의 딜레마가 있다. 이수와 해우의 사랑이 그렇듯 하지만, 그 치명적인 운명에 공감하기 힘들 듯, 드라마 속 인물들은 묵직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치명적 스토리에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듯하지만, 그것이 가슴을 떨리게 하는데는 어딘가 1% 부족한 듯한 느낌인 것이다. 


천영보는 조상국이 되어가는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 이제와 이수의 아버지나, 이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쯤은 눈도 끔적할 정도가 아닌 만큼, 하지만, 그걸 천영보를 연구한 학자가 말하듯,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저지르는 위인이라던가, 조국을 위해서나, 너희를 위해서였다는 잡혀가면서 조차 뻔뻔한 조상국 회장의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고문 기술자였던 이수의 아버지 한영만과 암살자가 조상국과 함께 한, 과거의 학살자가 현재의 압제자가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다. 뚜렷한 역사에 대한 전제는 분명했지만, 그것을 살아있는 인물로 풀어내는데 구체성을 더하지 못한 것이, 전형적 인물의 딱딱함으로 남은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드는 지점이다. 

이수와 해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복마전과도 같은 역사적 인물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의 손녀가 그가 없애고자 하는 인물과 사랑을 하게 되는 설정이 가장 극적이긴 하지만, 과연 두 사람이 살아있는 캐릭터로 펄떡거렸는지, 혹시나 가장 극의 중심에서 운명을 고뇌하며 고난에 빠져들었던 주인공들 조차, 그저 묵직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효율적 수단으로만 이용된 건 아닌지, 이수의 죽음을 당연시하며 받아들이고 있는 이 지점에서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7. 31. 10:04

아마 오늘 글의 더 적절한 제목은 '고3 아들도 텔레비젼에 달겨들 게 만든 국민 첫사랑 수지'가 맞을 지도 모른다. 고 3이라는 이유만으로 보고 싶은 텔레비젼도 소파 곁에 서성이며 초조하게 들여다 보는(옆에서 텔레비젼 보는 엄마가 미안할 정도로) 아들이, <힐링 캠프>에 수지나 출연한다고 하자, 소파를 장악하고 앉았다. 역시 국민 첫사랑의 힘이다. 


아니, 아들이 권해준 다른 제목도 있다. '수지 웃어서 이뻐요' 라고. 

'낙엽이 구르는 것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나이 스무 살, 무슨 말을 듣기가 바쁘게 '꺄르르~' 웃어대는 싱그러운 웃음의 수지가 이쁘긴 정말 이쁘다. 아들 말대로 한 시간 내내, 수지 웃는 것만 봐도 힐링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어떡하나, 저렇게 이쁜 수지는 사람들이 자신이 이쁘다고 하는 댓글이 제일 싫단다. 

운이 좋다고 본인 입으로는 말하지만, 초등 학교 4학년 때부터 춤과 노래가 좋았고, 중학교 때부터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춤에 열중하던 당찬 소녀 수지의 모습은, 책상 머리에 붙어서 대학을 목표로 불철주야 공부에 매진하는 열공 학생 못지 않은 또 다른 꿈의 열공생이었다. 운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쁘다는 댓글을 불편해 할 만큼 스물 살 나이에 자신의 직업에 투철한 프로의 모습이다. 


(사진; 서울 경제)


그런 그녀가 눈물을 흘린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한 마디에, 엄마의 소감에, 자꾸만 눈물을 흘린다. mc들이 너무 바쁘지 않냐? 힘들어서 그러냐? 라고 묻자, 바쁜 건 괜찮단다. 힘든 건 참을 수 있단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일들로 인해 하고자 하는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아이처럼 마구 다루다가, 어른처럼 견뎌내기를 원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한다. 부침이 심한 연예계에서 인기의 부침으로 자신이 받을 상처는 감내해야 하지만, 자신의 가족들이 앞으로 받을 지도 모른 상처는 두렵다고 한다. 우울증인가 싶게, 웃다가도 웃음이 나온단다. 국민 첫사랑의 뒤안길이다. 그걸 본 아들은 마음이 아파한다. 


얼마 전 수지가 출연한 <구가의서> 종방을 하던 날, 수지는 바쁘게 어떤 영화의 시사회에 모습을 드러내 사람들이 혀를 찼었다. 그저 지켜보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심하다 할 만큼, 국민 첫사랑이란 타이틀이 멍에로 보일 만큼, 여러 행사에 수지의 출연 빈도가 높다. 흔히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말하듯, '물 들어올 때 노젓는' 방식일까? 소속 기획사의 여러 기획이 생각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이즈음, 사람들은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얼굴을 비추는 수지를 때로는 '기획사 소녀 가장'이란 이름으로 안쓰러워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쩌면 지금 '국민 첫사랑'이름으로 한창 사랑을 받고 있는 수지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수지는 그녀의 혹사를 안쓰러워하고, 그녀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불공정한 분배를 걱정할 만큼, 그리고 <힐링 캠프>에 나와서 자신의 속내를 얼핏 비추고 눈물을 흘릴 만큼의 위치가 된, 위너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연예계에는 '국민첫사랑'이 되지 못한, '국민 첫사랑'이 되기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 자세가 되어있는, 수지들이 얼마나 많을까. 또래의 평범한 청소년들이 부모의 온갖 보살핌과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편안한 환경에서 공부를 할 때, 또 다른 꿈을 향해, 그들 못지 않게 땀을 흘리는 누군가들은, 보장받지 못할 미래를 향해, 자신의 시간을 혹사당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수지의 말대로 운이 좋아, 국민 첫사랑이 되어 기획사와 수익 배분도 다시 하고, 속상하다 사람들 앞에서 토로도 할 수 있지만, 다른 수지들은 부당한 대우도, 가혹한 처사도 혼자 삼켜야만 한다. 


(사진; 데일리안)



재판도 끝나고, 공정위판정도 끝났지만 여전히 방송에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소속사의 부당한 대우를 항거해 나온 jyj 김준수의, 잠도 제대로 못자고 스케줄에 맞춰 김밥 한 줄러 겨우 때우며 보내던 만족할 수 없었던 무대를 보일 수 밖에 없었던  지난 시절에 대한 회고와, 수지의 고민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인기를 끌면, 그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려지는 아이돌, 그리고 인기를 얻지 못하면 그 인기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 아이돌, 아직은 청소년, 혹은 이제 막 어른의 문턱에 들어선 갓 새내기 청춘들이, 꿈이라는 미명 하에, 스타라는 허울 아래 질식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그 아픔의 단편을 수지를 통해 확인했을 뿐이다. 

by meditator 2013. 7. 30. 09:54

장태하로 인해 죽은 자신의 아들의 복수를 하러 갔다가 부지불식간에 장태하의 아들 장은중을 유괴하고 말아버린 하명근 형사는 그 아들을 돌려주려 했지만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 또 다른 장은중때문에 결국 장태하의 아들을 하은중은 만든 채 십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 세월동안, 하명근 형사는 선배 형사였던 그리고 지금 하은중 형사의 상사를 만나 아직 하은중이 자신으로 인한 상처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 것처럼, 장태하의 아들에게 자신의 성, '하'씨를 물려주었지만, 그 아이의 이름 은중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아들이면서, 원수의 자식이라는 애증에 휩싸여 10년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 하명근 형사는 죽어가면서도 까먹던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기일을 맞이하여 사놓은 카라멜을 은중이가 동생과 신이 나서 까먹었듯이, 하명근 형사의 마음은 기른 정이라는 말로 놓여지지 않는, 은중이의 아비에 대한 10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증오와, 그의 아들을 '유괴'했다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자책으로 인해 늘 요동칩니다. 그리고 그 요동치는 마음은 고스란히 이제는 '하'씨가 된 은중에게 전달되어 아물지 않은 상처가 되었지요. 아들이 들어오지 않는 날을 체크하는 아버지가 된 하명근씨와 아버지의 옛날 경찰 복을 잊지 않고 세탁해 놓는 속정 깊은 아들 은중이는 여전히 어딘가 서먹한 그늘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진; 뉴스엔)


하지만 그뿐일까요? 가끔은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이지만, 그 아이의 어떤 부분이 내가 참 싫어하는 배우자의 어떤 부분을 닮았을 때, 더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괜히 넘어갈 거 한 소리 더 하게 되고, 심지어 어떤 분들은 대놓고, 넌 꼭 꼴보기 싫은 것만 닮냐고 지청구를 주기도 한다지요. 

아마도, 하명근씨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이제는 내 자식이려니 키우려고 해도, 문득문득 그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낯설음 혹은 어떤 익숙함이 하명근 씨로 하여금 은중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그런 면이 있지 않았을까요. 하명근씨에게 어딘가 친근함을 느끼며 다가서는 윤화영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내 자식이 살아있는 걸 알면서도 내 자식처럼 키우고 있는 장은중, 그리고 버젓이 생모가 있음에도 역시나 내 자식이려니 하고 키우고 있는 장주하, 때로는 집이 더 낯설 때가 있다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한 솔직한 고백일지도 모릅니다. 


9, 10회,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의 장태하, 하은중 두 사람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참 비슷합니다. 

두 사람 모두 심하게 무뚝뚝합니다. 장태하의 무뚝뚝함은 '불도저'로 상징되는 고도 성장기의 건설 산업의 오너 그 자체입니다. '살인'을 불사할 정도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가로막는 누군가를 견디지 못하지요. 하지만, 냉랭한 아내가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술잔을 나눠준다는 말에, 밖에서 밥을 먹었어도 앉아서 봐주겠다는 말에 풀어지는 얼굴에서, 장태하의 또 다른 이면이 보여집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아들 장은중이 놀릴 정도로 천하의 장태하 회장이 세상에 둘도 없는 아들 바보랍니다. 

그런데, 하은중 형사도 무뚝뚝하기가 장태하 저리가라입니다. 기업 회장이고, 그 일가이건 눈치고 뭐고 내가 하겠다면 하는 사람이 장은중입니다. 똑같은 스타일인데, 누군가는 그 스타일로 비리로 탑을 쌓아올린 기업인이 되고, 그 아들은 그 스타일로 돌직구 형사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시나, 아버지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자신에게 애증의 태도를 놓지 않았는데도, 하은중 형사는 그 아버지의 직업인 형사를 하고 있고, 아버지의 옛날 제복을 세탁합니다. 심지어, 동생 바보랍니다. 툭툭 막말을 하는 듯 하면서도, 동생 옷을 만들어 입히고 싶을 정도로 동생 걱정이 앞서고, 잠은 못자도 동생 입사 선물을 사는 바보 맞습니다. 


김재원 박상민 스캔들

(사진 ; tv데일리)


이런 장태하를 가장 닮은, 이른바 '물보다 진한', '피는 못속이는' 하은중 이기에 아버지 장태하와 더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것입니다. 동생 바보 였던 그 마음이 어느새 슬그머니 우아미 바보로 옮길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하은중은 우아미를 집에 데려다 주면서 이미 우아미 남편인 공기찬의 사망 사건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우아미의 집이 날아가고, 우아미는 다쳤으며, 그녀의 손에서 'th'의 이니셜이 새겨진 커프스가 발견되었으니 하은중은 더욱 그 불도저처럼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겠지요. 


최근 드라마를 통해 재벌들의 이야기가 많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드라마 속 재벌들이 대부분 좋은 사람만은 아닙니다. 고도 성장기의 신화 속에 가려져 있던 그 모습들이 여러 드라마를 통해 낱낱이 까발려지고 있으니까요.

배유미 작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내 아들을 죽인 재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재벌의 모습을 통해, 논리적인 분노를 넘어, 인간적으로 분노하게 만드는 재벌의 모습을 통해, 공분을 느끼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웃 이야기는 세상에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꺼리가 되지만, 그게 내 처지가 되면 사정이 달라지듯이, '피'로 얽혀지며 아비와 자식이 서로를 겨누는 이야기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공감을 낳을 수 있을테니까요. 


by meditator 2013. 7. 29. 10:03

'어휴, 덥겠다~'

이번 전기 없이 1주일 살기 미션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저런 말이 튀어나온다.  비만 안오면 사람을 구워먹을 듯이 푹푹 찌는 날씨에, 비오듯 흐르는 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자전거를 돌려 전기를 만들어 봐야, 불 켜고, 기껏해야 조그만 선풍기 한 대 겨우 돌리는데 그 조그만 선풍기 앞에서, 그게 아니라도 늘 땀을 흘리는 김준현을 비롯한 여섯 남자들의 호구지책은 궁색하다 못해 안쓰럽기 까지 하다. 게다가 전기 없이 살기라고 해서, 그저 불만 안들어오는 줄 알았더니, 냉장고에, 엘리베이터에, 에어컨에, 전기 밥솥에, 역대 최강으로 멤버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심지어, 자동문은 불가항력이다. 




이제는 '~없이 살기' 미션에 제법 적응한 멤버들은 언제나 그렇듯 전기없이 살 수 있는 여러가지 도구들을 찾아낸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자전거를 타서 전기를 만드는 수동 발전기를 비롯하여, 태양열로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는 충전기, 그리고 태양열 충전 가방 까지 '궁즉통'이라고 당장의 전기없는 최악의 상황은 피해간다. 

제작진은 '이열치열'이라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더운 여름에 전기 없이 살기라는 무모한 미션을 제시했을 것이다. 더울 수록 에어컨 등 전기에 의존도가 높으니까. 미션의 효과도 극명하게 드러날 테니까. 마지막날 멤버들이, 그간 사용한 도구들을 앞에다 쭈욱 늘어놓고 총평을 하듯이, 언제나 그렇듯, '~없이 살기'의 1주일은 역설적으로 그 미션 대상이 얼마나 내 삶에 밀착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전기 없이 살기 1주일의 결론, 전기는 소중하다는 다른 미션의 결과물과는 좀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처음, 삼무, 핸드폰, 텔레비젼, 컴퓨터를 없이 살기의 경우 처음엔 멤버들이 금단 증상으로 고생은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오히려 문명의 이기에 노예가 되었던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동차 없이 살기 역시 연예인으로서는 무모하다 싶었지만 걷고, 함께 차를 타며 이루어 나가는 잊혀졌던 아날로그한 삶의 잔상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최근의 물 없이 살기조차, 겨우 20L라는 소량의 물로도 너끈히 살아내는 이제는 '~없이 살기'에 제법 적응한 멤버들의 내공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며,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물을 아끼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런데, 이번 '전기 없이 살기'의 경우, '전기 보안관'을 자처하며 혹은 '빛돌이' 분장까지 감수하며 캠페인을 벌인 다양한 전기를 아껴쓰는 방법들도 유의미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보다는 '전기가 없으면 안되겠구나!'란 뼈저린 깨달음이 좀 더 앞선 시간이 돼버렸다. 여섯 멤버들은 코요테의 노래에 맞춰 각각의 개인기까지 얹어 율동과 노래를 하며 즐겁게 자전거 발전기를 돌리려 애썼지만, 마지막 날 김준현이 몇 번 목에까지 울컥 차올랐다는 고백이 전혀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전기 없이 살기 1주일은 전기 의존의 불가항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시간처럼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가장 결정적으로는 정말로 겨루어 볼 만했던 다른 미션과 달리 '전기'라는 존재가 우리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조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더운 여름날 너무 무모하게 밀어붙인 제작진의 야심(?) 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사진; TV리포트)


실제 멤버들이 찾아간 친환경 마을처럼, 여러 곳에서 '전기 없는' 생활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이, 멤버들이 찾아간 그 마을처럼 음식 하나를 하려면 우선 아궁이부터 만들고, 장작부터 패야 하는 원시적 상황일까? 전기가 없이도 살아낼 수 있는 여건을 보여주려면 조금 더 현실에 와닿을 수 있는 여건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멤버들이 일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전거 발전기를 상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나, 태양열 조리기처럼, 전기 없이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도구 등을 좀 더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더운 여름에, 무지막지하게 땔감부터 해대며 원초적인 방식으로 하루종일을 투자해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안타깝게도 전해주려는 메시지의 왜곡을 낳을 우려가 큰 것이다. 


또 하나, 최근 <인간의 조건>에서 여러가지 캠페인 성 미션을 시도하다 보니, 그와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전기 없이 살기' 미션의 경우는 그 찾아가는 장소가 좀 잘못 선정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기 없이 살기'를 한다면 물론 소중한 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기를 없이, 혹은 전기에 덜 의존을 하고 살려는 시도들을 좀 더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즉, 전기가 만들어지는 발전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체 에너지를 활용하는 사례들을 좀 더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태양열 난방 시스템을 마련한 광명시라던가,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걸음 에너지를 모아 전기를 만드는 외국 사례 등, 대체 에너지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는 노력이 아쉬웠다. 그토록 멤버들을 고생시킨 더위의 경우도, 실제 일본에서는 지열을 이용한 냉난방을 하는 걸 보면, 찾아보기만 하면, 무식하게 견디는 게 능사가 아닌 사례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실제 태양의 도시로 알려진 독일의 프라이브르크의 경우를 보면, 도시 전체가 태양열을 통해 움직이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전기가 없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인간의 조건>이 제시하는 미션은 두 얼굴을 가진다. 한 면에서는 문명의 수단인 미션 대상을 '~없이 살기'의 1주일을 통해, 완전한 독립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덜 의존적인 삶에 대한 여지를 고려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또 한 가지는 미션 대상의 부재를 통해, 그 소중함을 깨닫고 그것을 좀 더 아끼도록 노력하자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번 전기 없이 살기의 1주일은 어쩐지, 첫번 째 목적에서, 더운 날씨로 인해, 백기를 들고 항복한 느낌이 나는 것이다. 다음에, 조건이 극악하지 않을 때 차분하게, 대체 에너지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해봐가면서 보는 사람도, 저 정도면 나도 해볼만 한데 하는, 여유로운 전기 없는 1주일의 재시도는 어떨까?  '전기없는'이라는 말만 들어도 멤버들이 기함을 하고 도망가 버릴까? 






by meditator 2013. 7. 28. 10:07

"개라도  키워서 다행이야"

서인국이 바쁜 스케줄로 인해 잠시 하차를 하고 대체 멤버로 강타가 등장했다. 최근 '핫젝갓알지'등 1세대 아이돌의 '역습(?)' 에도 불구하고, 뜬금없다는 세간의 평처럼, 그의 등장은 최근 연예계 흐름에서 그닥 화제성도 없었고, 캐릭터로도 그닥 신선하지도, 산뜻하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강타보다, 그가 키우는 개가 더 화제가 되었을까. 이제는 하나의 제국이 되어버린 sm 소속의 강타는 언제나 그 소속사의 스타일대로 소속사 후배들을 등장시키며 sm버전 <나 혼자 산다>를 만들어 가려 했지만 오히려 지금까지의 <나 혼자 산다>의 흐름과는 이질적이라는, 혹은, sm이 그러면 그렇지 라는 평을 얻었을 뿐이다. 

그러니, 새로운 멤버의 등장으로 프로그램이 활기를 띠어야 하는데, 오히려 < 나혼자 산다>는 안그래도 멤버간의 조합을 통한 시너지의 발휘가 잘 되지 않는 프로그램인데다, 이질적인 멤버의 등장으로 더더욱, 프로그램 자체가 붕뜬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나 혼자 산다>의 구세주가 등장한다. 바로 특급 게스트 김제동과 김용건이다.


(사진; tv리포트)


사실 <나 혼자 산다>의 자원은 무궁무진하다. 17년째 혼자 사는 김용건에, 세상이 다 아는 노총각 김제동뿐만이 아니라, 연예계를 뒤져보면 얼마나 혼자 사는 사람이 많겠는가. 그 자원을 적절히 활용만 한다고 해도, <나 혼자 산다>의 롱런은 떼놓은 당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멤버의 충원에도 불구하고 정체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특급 게스트를 등장시킨 <나 혼자 산다> 제작진의 묘수는 11.4%(닐슨 코리아)의 자체 최고 시청률로 성공을 입증한다.


26일 <나 혼자 산다>는 하루 종일 두 게스트와 함께 한 일정을 담았다. 

김제동, 김용건 두 게스트의 캐릭터를 한 마디로 정의내리자면 '반전'이 아닐까? 불쌍한 노총각으로만 알려진 김제동이 처음 멤버들을 데리고 간 곳은 '진관사'라는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절이었다. 여자들이 많다는 말에 가슴이 부풀어 기대했던 김광규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게, 그곳에서 멤버들을 맞이한 것은 중년의 여승들이었다. 게다가 이어서 간 곳은 승마장. 찌질하고 궁상맞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노총각 김제동은 스님들과 차의 훈향을 음미하고, 비록 아직은 뻣뻣하지만, 말과의 교감을 즐기는 멋진 독거남의 반전 묘미를 보여주었다. 

17년차 독거남 김용건은 한 술 더 뜬다. 후덥지근한 장마철에, 흰 바지에, 와이셔츠, 양복, 심지어 보라색의 버버리까지 장착한 김용건은 그가 즐겨찾는 청담동의 외국 서적이 전시되어 있는 분위기 있는 카페로 후배들을 불러들인다. 게다가 그 후배들과 함께 한 첫 여정이 그림 전시회요, 어머니의 묘소를 들렀다 이어 들린 곳은 패션을 즐긴다는 그가 자주 찾는다는 아울렛 매장이다. 꼭 옷을 사지 않더라도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보며 한 매장에서 30여분을 보내는 그의 모습에, 느긋하게 그림을 음미하는 김용건의 모습에서, 17년을 혼자 견뎌온 삶의 처량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제동, 김용건 두 게스트가 보여준 모습은, 마치 '세상은 넓고 즐길 것은 많다'라는 삶의 숨겨진 또 다른 명제와도 같다. 정해진 멤버들의 미션을 통해 보여지는 것과는 다른,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체득하여 즐기는 것들에서 빚어지는 즐거움은 그 사람의 체취처럼 많고 많은 취미 중 그만의 색다른 색깔로 다가온다. 

어려운 시절 꼭 종교란 범주를 넘어서 찾아가 스님을 붙잡고 울다가 이제는 정이 들어 즐겨 찾게 되는 절, 사지 않더라도 그저 좋아서 입어보고 거울을 통해 그런 자신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는 시간이 좋은 옷 쇼핑, 그리고 아들조차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던 그림 감상처럼, 김제동, 김용건이라는 사람을 통해 다가온 취미들은, 꼭 혼자 사는 삶이 아니더라도 찾아보면 인생을 다채롭게 만들 것들이 많이 있구나라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나 혼자 산다 김광규 이성재

(사진; tv데일리)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굳이 왜 한 회에 두 명의 게스트를 초대해 흐름을 끊어가면서 주마간산격으로 보여주기에 급급했는가 하는 것이다. 김제동이면 김제동, 아니 김제동과 함께 한 산사, 혹은 승마장 처럼, 한 사람 별로, 혹은 한 아이템 별로, 충분히 천착하며 즐길 요소들을 소개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은, 게스트와 아이템의 문제라기 보다는, 멤버들의 한계에 기인하는 점이 클 것이다. 중복되는 것이 뻔함에도, 김광규라는 멤버를 김제동, 김용건 두 사람의 일정에 동행시킬 수 밖에 없는, 게스트와 멤버 사이의 시너지를 만들어 낼, 혹은 예능 포인트를 찾을 멤버가 김광규 밖에 없다는 한계를 드러내 보인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김광규가 더 많이 리액션을 보인 곳은 분량이 많고, 그렇지 않은 곳은 적어지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림처럼 김광규가 문외한이라거나, 패션 매장처럼 김광규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곳은, 찾아낼 많은 볼거리가 있음에도 그것을 발굴해내지 못한 채 이러고 살아요 수준의 소개에 그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금요일 밤에 안정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나 혼자 산다>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딜레마이다. 노홍철이나 김태원은  재밌지만 신선하지 않고, 데프콘은 먹방이 아니면 재밌지 않고, 이성재는 기복이 있고, 새로 들어온 강타조차 심심하니, 제작진의 포인트는 자꾸 모든 지점에서 재미를 유발해 낼 수 있는 김광규에 의지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을 개선하지 않는 한에서 <나 혼자 산다>는 게스트가 아니고서는 지루한 프로그램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무궁무진한 게스트가 포진해 있다는 점이 타고난 흥복이라면 흥복일까. 

그런 의미에서 김제동, 김용건 두 게스트가 방문한 26일의  <나 혼자 산다>는 프로그램의 명과 암을 극명하게 보여준 한 회였다. 





by meditator 2013. 7. 27. 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