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응답하라 1988> 자체 최고 시청률 (15.472% 닐슨 코리아)을 찍으며 쌍문동 골목길의 아이들은 저마다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80년대가 저물었다. 7수를 하며 사랑하는 여자 애를 위해 학 400마리를 접던 정봉이 마저 성균관대 법대에 들어서며 화려한 90년대를 시작한 '쌍문동 서민'들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90년대에 접어든 <응답하라 1988>을 보며 문득 질문 하나가 던져진다. 그래서 도대체 19080년대, 그 중에서도 1988년은 어떤 시대였던건가요? 라고.

 

 


핏줄과 우정만 남은 시대?

기꺼워하지 않는 동생을 데려다, 국방색 담요까지 씌운 의자에 앉혀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자는 정봉, 그리고 그런 형의 해프닝에 언제나 그랬듯이 군말없이 따라주는 동생 정환. 그리고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정봉이 빌던 소원, '정환이 너는 (심장 수술을 한 자기처럼 못하는 거 없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런 정봉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정환은 영화 <탑건>을 보며 파일럿이 되고 싶었던 형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공사를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정환의 마음을 눈치채고, 형을 위한 것이 아닌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다고 한 정봉의 말에, 정환은 형의 시선을 피하며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 이 장면이 '헐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애초에 정환은 '형'의 소원을 알았어도,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형은 흔쾌히 그런 동생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아마도 두 형제의 엔딩은 각자 자신의 길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하지만, 2016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하다는 <응답하라 1988>의 선택은 기승전 '가족'이다. 그들은 '가족'으로 '금의환양'한다.

 

어디 정환뿐인가? 17회에 마무리는 부모들이었다. 도란도란 모여앉은 아빠들, 엄마들은 각자 자신들의 꿈을 떠올리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이, '가족'과 '가정'으로 회귀되었음을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그들의 수다는 그들이 한때 '가수'를 꿈꿨던, '화가'를 꿈꿨던, 심지어 '한 춤'을 했건 기승전 '가족 걱정'으로 귀결된다. 덕선과 보라의 엄마는 보내지도 않은 딸내미들의 결혼 생각에 눈물짓고, '개딸'이라며 버럭거리는 '동일' 아빠는 '꿈'이 없다는 딸을 다독이며, '아버지'로만 살아온 삶에 자부심을 내보인다.

 

부모들만이 아니다. '남편찾기'라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최대 과제를 풀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부모의 재혼 덕분에 하루 아침에 호형호제하게 될 선우와 택이가 서로 이물감없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걱정을 나눌 수 있듯이, 어쩌면 핏줄보다도 더 가까웠던 쌍문동 골목길 아이들은 그 '핏줄보다 진한 우정'때문에 덕선에 대한 사랑조차도 내보일 수 없었다. 자신보다 친구를 더 생각하는 '우정'의 시대다.

 

 


 


대한 뉘우스같은, 트루먼 쇼같은

이런 <응답하라>의 화법은 죽은 동료의 시신을 찾아 히말라야로 떠나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떠나는 산악대의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우정과 다르지 않고, 역사의 격동기에 자신을 버리고 '가족'을 위해 살아왔던 <국제 시장>의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아니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가족'의 눈물어린 후원 뒤에 '성공'을 일군 우리 앞선 세대들의 영광을 찬란하게 '홍보'했던 ,대한 뉘우스>에 더 가깝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응답하라>에 없는 것이 있다. 거기에 공중파 시청률 고공 행진을 벌이는 드라마들에 필수 요소인 질투와 질시, 그리고 협잡이 없다. 쌍문동 골목길 아줌마들은 그 아줌마들의 전매 특허라는 뒷담화가 없고, 한결같이 '이웃집을 질투하는 대신' '내집처럼 이웃집을 걱정한다', '부러워는 할 지언정,' 사촌이 땅을 사도 배아프다는 속담이 무색하다. 그래서, 눈물과 감동이 넘쳐나느 대신, 회를 거듭할 수록, 그 눈물과, 가족애와 우정이 공허해진다.

 

마치 가상의 80년대 같다. 드라마 속 80년대에는 80년대의 광주 사태 이후, 깊어질 대로 깊어진 지역 간의 골은 드러나지 않은 채,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격의없는 이웃으로만 등장한다.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심화되기 시작한 사회적 빈부격차는 서울 변두리 쌍문동 골목길은 피해간다. 저마다 아파트니, 땅을 향해 달리던 부를 향한 열망도 그저 tv 배경 화명일 뿐이다. 그저 경제 융성기의 세례를 받고, 재수를 거쳐 다들 무난하게 저마다 화려한 스펙을 얻는다. 공무원 시험 10년이라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꿈도 꾸기 힘들.

 

허긴 화려한 꽃구경같은 <응답하라> 속 진실은 있다. 광주 사태가 나건, 지역 감정의 골이 깊어지건, 사회적 빈부 격차가 심해지건, 그저 붙잡고 매달리 수 밖에 없는 것은 '가족'밖에는 없었던 것이 우리의 현대사라는 '빈곤함'이다. 아버지 세대건, 어머니 세대건, 그저 그 시대를 이야기할 때, 6.25세대건, 4.19세대건, 70년대 세대건, 이구동성으로 자식을 위한 희생외에는 말할 것이 없는 우리 현대사에 대한 증명이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건 내 새끼, 내 식구 먹고사니즘이 최대 과제였던 '가족주의'라는 구심점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는 우리 현대사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국회 청문회 자리에 앉은 높은 분들이 내 가정의 보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그라지 않는 것이 범사가 되어버린 세대인 것이다. 그리고 한때는 의식이 있건 어떻건 결국은 개인의 '입신양명'으로 귀결되는 서사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보라처럼 의식있는 아이들도 결국은 '사법시험'을 통해 금의환양의 길을 택하고, 홀어머니 밑의 선우는 의대 전액 장학금이라는 화려한 성공으로 보상해야 하는, 하다못해 공부 못하는 보라도 비행승무원으로 제 앞가림 정도는 번듯하게 했다 해야 사람대접을 받는 시대인 것이다. 그게 평범한 서민의 삶이라고 <응답하라>는 은연중에 강요한다.

 

by meditator 2016. 1. 9. 15:52

고증으로부터 매우 심하게 자유로운 '퓨전 사극'이 대부분인 세상에 kbs1의 대하 사극의 존재감은 남다르다. 제 아무리 <육룡이 나르샤>의 김명민이 피를 토하듯 소리를 높여도, 2014년 50부작으로 방영된 본격 정치 사극 <정도전> 속 정도전를 따를 수는 없다. 비록 그 후속작인 <징비록>이 '임진왜란'이라는 이제는 역사극에서 진부한 소재로 인해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말 그대로 '역사'를 징계하는 입장에서, 선조를, 그리조 당시의 지배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점에선 <징비록>의 의의 또한 어설픈 퓨전 사극의 주제 의식을 뛰어넘는다. 그런 kbs1의 사극이 2016년을 맞이하여 들고 나온 것은 분야도 생소한 '과학' 사극, 우리 역사에서, 특히나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빛나는 과학 문화 유산을 남긴 주인공 장영실과 장영실이 살았던 시대를 '과학'을 통해 조명하고자 한다.

 

'과학'사극,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부모들이 손에 손 잡고 극장으로 향해 <인터스텔라> 등의 우주 과학 영화가 한국에만 오면 흥행을 기록한다지만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수포(수학 포기)', '과포(과학 포기)'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닌 현재의 현실에서 단발성의 영화가 아닌 긴 흐름의 '과학'의 콜라보레이션 대하 사극은 무모한 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첫 회를 방영한 <장영실>은 정통 사극으로써의 클리셰를 적절하게 배합하면서, 거기에 낯선 '과학'이란 장르를 태종의 구식례를 통해 섦명해 냄으로써 명쾌하게 엮어간다.

 

 


 

출생의 비극, 그 평이한 사극의 클리셰

첫 장면 늙고 노쇄한 몸을 이끌고 벌판을 헤매는 노년의 장영실, 하늘을 보며 쓰러져간 그의 손에는 그의 말대로 그가 이루려 했던 '세상의 법칙' 혹은 '이치'를 밝혀내고자 애썼던 흔적이 들려있다. 그렇게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과학'에의 열정을 거스를 수 없었던 노학자의 집요한 열정에 대한 '물음표'로 시작된 이야기는 그 노인의 어린 시절, '은복'이었던 시절의 장영실로 돌아간다.

 

그리고 뛰어노는 말을 섬세하게 조각하는 어린 은복이 등장하고, 그런 천진한 은복을 끌고, 그가 장씨 가문의 핏줄이라며 부득불 우기며 장씨 집안 제사에 들이닥치는 그의 어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은 사극에서 그래왔듯이, 기녀의 몸에서 난 이제 관노가 될, 환대받지 못한 장씨 집안 핏줄 은복의 수난사라는 사극의 클리셰가 전개된다. 사촌인 장영제가 만든 해시계에 뱀 조형물로 절기의 변화까지 더하려 했던 은복은 그의 재능을 시기한 사촌의 발고로 인해 멍석말이에 처해진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순간 기가 막히게 등장한 그의 아비로 추정되는 인물 장성휘(김명수 분)는 장영실을 매타작으로부터 구해줄 뿐 아니라, 장씨 집안 모두가 부인한 은복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장씨 집안 자식임을 인정하는 항렬에 따른 '영실'이란 이름마저 지어준다.


뿐만 아니라 장성휘는 고려 시대부터 천문에 조예가 깊었던 그답게 어린 영실의 재능, 그리고 자신을 쏙 빼어닮은 듯한 열정을 눈밝게 알아본다. 그리고 그런 아들에게 자신의 연구 성과인 천문도를 주고, 일식을 함께 관찰하며 그 원리를 설명해 준다.

 

하늘을 보기를 즐겨하고, 별자리에 관심이 많은 아비와 아들, 그리고 그 연구의 열정을 통해 부자의 연과 유대가 이어지는 장성휘, 영실 부자의 이야기는 비록 '과학'에 문외한인 시청자라 하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막상 컴퓨터 그래픽까지 등장하며 설명해 내려간 부자의 관심 분야는, 아비와 아들이 밤 하늘에 함께 그려간 별자리를 빼놓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저, 저게 당시의 '과학'이로구나, '천문'이라는 거구나 정도였다. 해시계와 거기에 절기를 더한 영실의 도발에 분노한 장영제의 모습은 그게 성리학에서 과학으로 바뀌었을 뿐 정도로 이해될 뿐이었다.

 

 


태종의 구식례를 통해 단번에 설득해낸 조선 시대의 과학

하지만 좀처럼 쉬이 섞여들지 않던 '과학'이 명쾌하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영실로 인한 장씨 집안의 소동이 아니라, 그들이 살던 동래와는 한참 떨어진 개경의 이방원, 이제는 임금이 된 태종의 구식례로 부터이다. 이미 <정도전>과, <육룡이 나르샤>에 이어 또 한번 등장한 태종은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인물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장영실>은 그 익숙함을 진부함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과학을 설명하기 위한 적절한 도구로 절묘하게 이용한다. 즉, 이미 타 드라마를 통해 아비인 태조와 함께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 인물, 나아가 자신의 동복, 이복 형제들을 제거하고 왕자를 차지한 태종의 전사가, 바로 <장영실>에서 이제는 왕이 되었으나 정통성에 초조한 중년의 태종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 왕조가 시작되고 무려 세 명이 왕좌에 오른 1401년, 하지만 조선의 3대왕 태종은 조선 건국의 최대 공신인 정도전을 비롯하여 자신의 형제들을 죽음으로 몬,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친한 벗이었던 영실의 아비 장성휘가 태종을 다시 볼 수 없는 벗이라 칭하듯, 이미 조선을 건국할 당시부터 조정을 멀리했던 고려 유신 세력을 비롯하여,

이제는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를 쟁탈한 태종을 못마땅하게 하게 광범위한 반대 세력들이 조정 내에 조차 암약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태종 자신 역시 '살기 위해서'라는 변명처럼, 형제들을 제거하고 오른 왕위 자리에 내내 부담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전제로 하여, 드라마 <장영실>은 태종의 구식례를 준비한다. 해가 잠시 가려졌다 돌아오는 일식은 당시 전통적 관습에서 하늘이 왕의 죄를 사해주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졌고 태종은 다가올 일식, 구식례를 통해 자신의 죄를 하늘이 사해줬다는 이벤트화 하려는 열망을 가졌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미 시청자들이 타 드라마를 통해 익숙해진 태종의 역사적 전과와, 그런 전과를 구식례라는 이벤트를 통해 뒤집으려는 태종의 정치적 제스처를 통해, 그리고 거기서 등장한 일식의 측정의 정확함에 대한 해프닝을 통해, 드라마 <장영실>은 막연했던 장씨 부자의 과학적 흥미와 열정을 조선이라는 시대적 공간에 구체적 입지를 가지도록 풀어낸다. 마치 마법사처럼, 태종의 구식례가 실패할 것이라 예언하는 영실의 아비 장성휘는, 마치 <해를 품은 달>의 성수청과 하늘의 신탁을 받은 듯한 무녀들을 연상케 한다. 그렇게 단박에 정치적 혹은 극적 개연성을 얻은 '과학'의 존재감은 구식례의 실패를 예견한 아비 장성휘와, 그 아비의 재능과 열정을 그대로 본딴 아들 장영실을 통해 흥미진진한 조선 시대의 과학사를 맞이할 자세를 시청자로 하여금 갖추도록 한다.

by meditator 2016. 1. 3. 14:19

12월 6일 방영되었던 28회 <애인있어요>의 마지막 장면은 은솔이를 죽인 범인이 출소한 후 도해강을 찾아와 오히려 도해강을 몰아붙이다, 그만 도해강을 쓰러지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정신을 차린 도해강의 뇌리에 그녀가 독고 용기로 살던 지난 4년간 잊었던 기억, 바로 그녀의 '핵심 기억'인 최진언과의 이별 과정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런데 13일 방영된 29회에서 다시 되풀이된 그 장면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도해강은 그녀가 사고를 당하기 전 바로 그 시간으로 돌아가 바렸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즉, 그녀는 도해강으로서의 기억을 되살린 대신, 지난 4년 독고용기로 살아왔던 기억을 지웠다. 




파렴치범 최진언에 대한 속 시원한 도해강의 복수 
50부작 <애인있어요>의 초반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바로 남자 주인공인 최진언의 불륜이었다. 아니 불륜도 불륜이지만, 비록 아이가 죽었다지만, 오랜 시간 함께 살아왔던 아내에게, 아이의 죽음에 대해 태연하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모진 말을 퍼붇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이 여자만 치워준다면 어떤 것이라도 하겠다'는 폭언을 최진언은 서슴치 않았다. 그래서, 그가 시간이 흘러 4년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해강을 잊을 수 없고, 도해강과 다시 사랑을 하기 위해 '순애보'를 펼침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최진언을 연기하는 지진희의 설레는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선뜻 그에게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29회를 통해 배유미 작가가 왜 그토록 극 초반 최진언에게 그 모진 말을 도해강에게 퍼붓도록 했는지 설명한다. 바로 독고 용기로 살아왔던 지난 4년을 잊은 채, 그 4년 전 최진언에게 갖은 수모를 당한 채 시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도해강의 기억으로 돌아간 현재의 도해강은, 최진언에게 예전의 그가 그녀에게 그랬듯이, 치를 떨어한다. 그래서 극 초반 최진언이 도해강에게 퍼부었던 그 '혐오'의 대사들은 29회를 통해 통쾌하게 최진언에게 돌려진다. 도해강은 결혼 생활 동안에서 듣지 못했던 '사랑해요'라는 말까지 들으며 가슴이 설레이던 최진언에게, 4년 전 최진언이 그랬듯이 당신에게 질렸으며, 당신을 보면 가슴이 떨리는 대신 소름이 끼친다며, 자신의 앞에서 최진언을 치워달라 최진언에게 퍼붓는다. 그래서, 독고 용기가 되어도 여전히 최진언을 보고 가슴이 떨리던 그녀는 그 기억을 지운 채 마치 체증이 풀리듯 도해강의 묵은 분노를 맘껏 표출한다. 



원죄의 주인공으로 돌아온 도해강
물론 도해강으로 돌아온 그녀로 인한 아픔도 있다. 마치 1인 3역처럼, 도해강, 그리고 독고 용기, 독고온기로 도저히 한 사람의 연기로 보여지지 않은 김현주의 연기력에 의해, 다시 도해강으로 돌아온 그녀는, 지난 4년동안 독고 용기로 살아온 도해강이 떠올려지지 않을 만큼 찬바람이 씽씽 분다. 그래서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던 독고 용기는 울화통이 터져 술잔을 기울이고, 지난 4년간의 순애보를 접지 못해 애태우던 백석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 주저앉아 버린다. 

또한 도해강으로 돌아와 극의 긴장감은 배가되었다. 백석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으로, 그리고 백석의 동료 변호사로서, 도해강으로서 살아온 지난 날의 '속죄'에 매진하려 했던 독고용기였던 도해강은, 이제 다시 그 예전의 피도 눈물도 없는 도해강이 되어 '천년 제약'으로 복귀한다. 그녀의 복귀에 천년 제약 측 민태석과 최진리, 그리고 최진언바라기인 설리의 셈은 저마다 복잡해졌다. 

<애인있어요>의 묘미는, 쉽게 그 누구의 편도 들수 없는 반전의 반전, 그 연속에 있다. 극 초반 불륜파렴치범이었던 최진언은 4년 후 도해강 바라기의 '순애보'로 변모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천년 제약의 개 도해강은 사고 후 의협심강한 독고용기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다시 그 기억을 지운 채 도해강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마치, <송곳> 속 구고신의 '사는 데가 바뀌면 사람이 바뀐다'라는 말의 극화처럼, 드라마는, 요동치는 운명 속에서 자신의 업보에 허우적거리는 남녀 주인공의 행보가 시청자을 쥐락펴락한다. 이제 최진언의 순애보 앞에 쉽게 가슴을 열었던 도해강은, 그녀가 4년 전 미처 못했던 복수의 말들을 퍼붓는다. 아니 그 보다도 더 잔인한 복수는, 바로 최진언의 사랑을 잊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고용기였던 도해강이 제 아무리 자신의 지난 기억이라 해도 도해강의 지난 원죄에 대해 제 3자적 입장이었다면, 이제 도해강은 그 원죄의 주인이 되어 돌아오게 된 것이다. 과연, 사랑도,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지난 시간의 원죄도 어떻게 풀어갈 지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 
by meditator 2015. 12. 13. 01:05

로맨틱 코미디(이하 로코)는 가장 트렌디한 장르이다. 당대 젊은이들의 로망을 담은 이 장르는 그래서 가장 당대적 편균 시선을 검증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기도 하다. 11월 11일 종영한 최고 시청률 18%를 기록하며 붐을 일으켰던 <그녀는 예뻤다>나, 시청률의 늪을 헤어나오지 못했던 kbs2의 월화 드라마의 부진을 극복하기 시작한 <오 마이 비너스>는 그런 면에서 2015년 의 평균 시선을 알아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드라마, 전혀 다른 배경의 전혀 다른 이야기임에도 기본 이야기의 구조 면에서 유사하다. 마치 이란성 쌍둥이처럼.  




얼굴도 안되고, 몸매도 안되는, 심지어 가진 것도 없는 여주인공들
두 드라마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지점은 바로 '육체 미흡'의 여주인공들이다. <그녀는 예뻤다>의 여주인공 김혜진(황정음 분)은 강력한 곱슬 머리에 안면 홍조를 지닌 오래전 남자 친구에게 자신을 내보이기조차 미안해 하는 '얼굴'에 자신이 없는 인물이다. <오 마이 비너스>의 강주은은 77kg의 거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몸매'가 과다한 여성이다. 물론 초등학교에서 전교생의 주목을 받았거나, 대구에서 비너스라 날렸던 '한때'의 시절이 있지만, 그 시절을 뒤로 하고 이제는 남 앞에 선뜻 나서는 것에 자신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육체'만이 아니다. 입사 면접에서 씩씩하려고 하지만 번번히 낙방을 하고마는 만년 취준생이었거나, 겨우 취준생 딱지를 띤 인턴이며, 말이 변호사지 은행 융자때문에 로펌에서 눈칫밥을 먹는 명색만 변호사지, '을'의 처지이다. 이렇게 2015년 로코 속 그녀들은 2015년의 화두였던 부와 육체 모든 면에서 미흡한 '을'들이다. 그것은 곧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같은 처지의 '을'이라 생각하는 시청자들의 공감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환타지'를 기반으로 한 이들 로코는 이런 '을'들의 인생 역전을 '사랑'을 매개로 이루어 나간다. 

트라우마에 갇힌 백마 탄 왕자들
그렇게 이쁘지도 않고 뚱뚱한 그녀들 앞에 '그'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 앞에 나타난 그는 참 번듯하다. 김혜진의 오랜 친구이자 첫사랑인 뚱보였던 지성준(박서준 분)은 이제 훤칠한 인물이 되어 그녀가 인턴으로 몸담은 '모스트'의 해와 파견 부편집장으로 금의환양했다. 그런가 하면 <오 마이 비너스>의 김영호(소지섭 분) 역시 만만치 않다. 골수암을 앓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나서서 절을 하지도 못한 채 숨죽여 흐느껴야 했던 소년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는 트레이너가 되었고, 이제 곧 그룹 가홍의 신임 이사장이 될 터이다. 

'그'들의 스텍은 잡지사 부편집장에, 트레이너에 그룹 이사장까지 화려하기 이를데 없다. 그런 그들에 비하면 일개 월급받는 변호사나 인턴 사원인 그들은 초라하기 그지 이를데 없다. 과연 이런 언밸런스한 스펙의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스펙의 남자들을 매료시킬 그녀들의 무기는 그녀들의 씩씩하면서도 소탈한 인간성이다. 그들은 번듯하지만 하지만 그 번듯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에게는 각자 숨겨진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다. 김혜진과 같이 초등학교 다녔던 지성준은 그 시절 몹시 뚱뚱해서 학교 친구들의 놀림감이었고, 그런 '왕따'는 그가 이민을 간 미국에서도 이어졌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매달린 끈은 놀림받던 시절 유일하게 자신의 친구가 되준 김혜진이었지만, 김혜진네 집안 사정으로 그 마저도 끊어지게 되자, 생존하기 위해 혹독한 다이어트를 감행한 것이다. 김영호 역시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숨죽여 울어야 했던 소년, 그런 그를 나약하다며 외면했던 아버지로 인해 '단맛'을 보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뒤로 하고, 역시나 살아남기 위해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지금의 '존킴'이 탄생되었다. 지금의 그들은 번듯하지만, 그 번듯함을 얻기 위해 그들은 '인생의 단맛'을 삼켜야만 했다. 

즉, 두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은 사회적으로 그럴 듯한 스펙을 챙겼지만, 그 스펙을 얻기 위해 인간적으로 소중한 것들을 놓친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은 비록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외모와 몸매를 지녔음에도, 즉 자신들이 '희생'했던 그 요건을 비록 갖추지 못했음에도 여전히 '당당'한 그녀들에게 자신들도 모르게 빠져들어 간다. 즉, 그들은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스펙'을 얻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그녀들로 부터 보상받게 된다는 것'이 이들 드라마의 사랑 코드가 된다. 외적으론 그들이 가졌고, 그녀들이 갖지 못했지만, 사실은 그녀들이 가졌고, 그들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그녀들로 인해 회복하거나 치유한다는 것이 두 드라마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공교롭게도 지성준, 김영호, 두 주인공은 '어머니를 상실'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육친으로서의 '어머니'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지성준이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신 비오는 날 운전을 못할 정도로 혼란에 빠지듯이 그로 인한 상실의 늪에 빠져있다. 그 늪에서 그들을 건져 올리는 것은, 바로 그 '어머니'같은 모성성을 지닌 그녀들이다. 



그녀들의 연적 혹은 잃어버린 친구'
그녀들이 건져올릴 것은 심지어 그들 뿐이 아니다. 두 드라마의 연적은 공교롭게도 그녀의 친구들이다. <그녀는 예뻤다>에서 김혜진과 한 집에 사는 오랜 친구 민하리(고준희 분)는 남자들이 줄줄 따르는, 거기에 직업 조차도 호텔리어다. <오 마이 비너스>의 오수진 역시 강주은의 대학 시절 친구에 서울 법대 수석 졸업 사시 조기 패스의 수재로 이젠 강주은이 일하는 법률 로펌의 부대표이다. 당연히 몸매도 얼굴도 이쁘다. 그런데 그녀들이 이 못나고, 뚱뚱한 여주인공들의 남자들을 못 뺐어서 안달이다. 

두 드라마는 이 두 연적들의 불량한 연애관에 대해, 정신병리학적으로 다가선다. 가정적으로 불우한 민하리의 라이프 스토리를 구구절절 설명하며, 그녀의 불완전한 자존감이 친구의 애인 앞에서 솔직하지 못한 그녀를 대변한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로펌의 부대표에 멋진 몸매를 지닌 오수진은 여전히 과체중의 그 시절 사랑받지 못해 상처받은 오수진의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자신들에게 따스한 말 한 마디를 던져준 친구의 남자 친구에게 부도덕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의리있는 친구 앞에 자신을 속인다. 아니 근본적으로, 두 사람 모두 그럴 듯한 스펙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스펙'은 여주인공에 비해 한참 딸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 그리고 연적들은 경쟁 사회가 요구하는 그럴 듯한 '스펙'을 가졌음에도, 동시에 그 '스펙'의 부작용들도 모조리 가지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지워낸 이들은,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 '지워버렸던 것'이다. 그들이 그런데 비해, 여주인공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지워가며 그럴 듯한 '스펙'을 갖춘 동안 이뻐지지도 못하고, 뚱뚱해 졌지만, 그들이 잃은 것 놓치지 않고 지켜냈다. 이렇게 2015년의 두 로코는 2015년을 살기 위해 자신을 내던져가며 사람들을에게 그렇지 않고서도 여전히 인간적인 면을 잃지 않는 그녀들의 환타지를 통해 위무한다. 그녀들의 사랑과 아름다움은 덤이다. 김혜진이 이뻐지자 급격하게 바람빠진 듯 되어버린 드라마가 그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뚱뚱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주은이 매력적인 것이다. 비록 드라마는 겉으로는 백마탄 왕자가 가진 것 없고, 이제는 심지어 못 생기고 뚱뚱한 그녀를 구원하는 듯하지만, 기실, 구원을 받는 것은 그들이다. 못생기고, 뚱뚱한 그녀들이 '어머니'처럼 그들을 심지어 그녀들의 연적마저 사랑으로 '구원'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5. 12. 9. 14:32

2003년 11월 21일 방영된 도현정 작가가 쓴 mbc베스트 극장<늪>의 엔딩은 충격적이다. 남편의 불륜을 알고 난 후 집요하게 복수를 해오던 여주인공 윤서(박지영 분)가 불륜 내용이 담긴 테이프를 듣고 당황해 하는 남편의 차 위로 자기 자신을 던지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깨진 유리 위로 눈을 부릅뜬 채 남편을 노려보던 여주인공의 표정은 오래도록 시청자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복수의 마지막을 자신을 '산화'시켜 완성하던 <늪>의 여주인공처럼 12월 3일 종영된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속 비극의 주인공인 김혜진(장희진 분)은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을 '단죄'하고자 '자신'을 던졌다. 


우리 드라마에서 자고로 '복수'는 익숙한 코드이다. 아침 드라마에서부터 주말 드라마까지 억울한 사연을 가진, 주로 여주인공이 입지전적 성공을 배경으로 삼아,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 이른바 트렌디한 스토리의 주를 이룬다. 드라마 속 그녀들은 대부분 '권선징악' 복수도 성공하고, 자신의 일과 사랑에 성취를 하며 '해피엔딩'을 이룬다. 현실 속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을 통해 한껏 '환타지화'되어 시청자들의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자신을 던져 '단죄'하는 여주인공
그런데 2003년작 <늪>의 여주인공은 달랐다. 부유한 집안의 잘 나가는 정형외과 의사이던 여주인공은 남편과 불륜에 빠진 여자를 정신병원에 보내고, 남편을 남자 구실을 못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결국 자신의 목숨을 던져 '복수'의 정점을 이룬다. 왜? '복수'를 하고 잘 살면 되지? 여기서 도현정 작가의 시선이 드러난다. 남편의 불륜을 통해 산산히 조각난 그녀의 가정, 그리고 남편의 불륜 과정에서 죽어간 아버지, 심지어 불륜의 상대방은 그녀가 가장 아끼던 동생 뻘의 여자, 그건 그냥 불륜이 아니라, 그녀가 의지하고 믿었던 세계의 파괴라고 작가는 <늪>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의 세계를 파괴한 사람들을 '단죄'하기 위해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그녀 자신 또한 '피폐해져갔음'이 결국 그녀 자신을 던진 또 다른 이유라고도 덧붙인다. 그리고 이것은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혹은 결과만 괜찮으면 되지 않느냐는 현재 대한민국의 허위적 윤리 의식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문제 의식은 십 년 여의 세월을 흘러 <마을-아치아라의 비밀>로 다시 통한다. 마을로 흘러 들어온 외지인 김혜진, 하지만 그녀는 사실 외지인이 아니었다. 마을의 상습 강간범에게 강간을 당한 채 아이을 낳게된 윤지숙(신은경 분)의 버려진 아이였다. 파브리 병으로 인해 신장 이식이 필요했던 그녀는 자신을 도와줄, 그리고 병든 자기가 의지할 혈육을 찾아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피붙이를 찾아 헤맨 여정에서 그녀가 만난 끔찍한 사실, 그녀의 남편에게 불륜을 해가면서 '단죄'를 하려고 했던 친엄마가 사실은 '강간'의 피해자였다는 것, 더구나 그녀를 강간했던 당사자는 여전히 마을에서 자기 자식을 끔찍히 여기며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자신을 버린 엄마를 밝히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엄마가 자신을 '괴물'로 여기도록 만든 그 '강간'범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그리고 신장 이식을 해주겠다고 나선 엄마조차 외면한 채 진실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김혜진의 맹목적 몸짓은 자신의 출생이 주는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애초에 친엄마를 밝히려던 그녀의 시도도, 그리고 마지막 자신과 엄마를 그렇게 만든 강간범을 밝히려던 시도도, 그 어느 것 하나 그녀를 막아서지 않는 것이 없다. 겨우 찾아낸 엄마는 그녀를 괴물로 불렀고, 잘 살고 있는 자신을 흐뜨러 뜨리는 훼방꾼 취급을 했다. 강간범은 한 술 더 뜬다. 자신의 어린 딸이 아플까봐 애지중지 하는 그는, 또 다른 그녀의 혈육인 그녀를 끝내 '그 여자'라 부르며 '협박범' 취급이나 한다. 병에 대한 치료보다도 더 간절히 원한 '가족'의 손길을 '괴물'이 되어버린 김혜진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신장 이식이 필요했던 김혜진이나, 의붓 오빠가 신장이식을 해줄 여유도 없이 죽어버린 가영(이열음 분)이나, 강간범의 상습 강간의 피해는 십 여년이 지나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낳았던 딸을 괴물이라 부르는 윤지숙에게서 보여지듯이 강간의 상처는 덮는다고 덮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치아라 마을은 곧 현실의 우리 사회
결국 윤지숙 모녀의 불행을 통해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른바 사회의 그럴 듯한 허위적 윤리의 껍데기 속에 숨죽여 사라져 가는 윤지숙 모녀와 같은 피해자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확장하면 아직도 수요일마다 일 대사관 앞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사과받기 위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시위를 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요, 가깝게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피해자들의 숨은 상처이다. 또한 그것은 단지 '성'과 관련된 상처만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사건을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져 가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깊어져만 가는 '세월호' 등 각종 사회적 상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초에 제대로 단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상처의 피해를 공동체가 보다듬었다면 김혜진이든 가영이든 애꿏은 두 아이의 운명을 달리 할 일이 없을 사건을 십 여년이 지나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야 풀어지는 그 '과거사'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서 보여지듯이 김혜진은 자신을 던져 그 '과거사'를 해결하려 했지만, 정작 그녀가 죽음으로 드러낸 것은 또 다른 피해자 윤지숙의 슬픈 과거였을 뿐이다. 결국 피해자와 피해자만이 마을의 역사에서 상처를 받은 채 쓰러져 간 모습은 얄궃게도 우리의 현대사와 닮았다.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범죄자는 단죄의 시간을 벗어나 멀쩡한 모습으로 경찰서를 나올 수 있게 되는 그 슬픈 결론이 놀랍게도 현실과 흡사하다. 때문에 결국 윤지숙의 아이러니한 모정이 김혜진을 죽음에 이르게 했음에도 윤지숙에게 쉽게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우리를, 그리고 우리 사회가 멀쩡한 듯 가리고 있는 위선의 가면을 벗긴다. 그리고 그 평화롭던 아치아라라는 마을이 상습 강간범을 결국 품어준 꼴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또한, 우리가 습관적으로 의지하는 '모성'과 '가족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뿐만 아니라, 결국 피해자였던 두 여주인공의 죽음과 감옥행으로 끝나 버린 채, 그 사건을 둘러싸고 음습하게 등장했던 윤지숙의 남편과 노회장의 커넥션을 남겨 둠으로써, 쉽게 종식되지 않는 사회적 비리의 뒤끝을 여운으로 남긴다. 그것은 이른바 미드처럼, 드러난 한 사건 이후에 보다 큰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시즌제를 위한 포석일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자체 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아마, 그 어떤 드라마보다, 시원한 '환타지'의 여력이 없는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 그래서 생소하고 낯설지만, 그것이 바로 시청률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드라마의 가치이다. 
by meditator 2015. 12. 4. 14:07

박리환(이동욱 분)과 김행아(정려원 분)의 사랑 이야기로 시작된 드라마<풍선껌> 하지만, 12회를 마친 이 드라마의 굵직한 줄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박리환의 엄마 박선영(배종옥 분)의 이야기이다. 그러기에 어쩌면 늦가을 감성을 촉촉히 적겨줄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고 <풍선껌>을 봤던 혹자는 현실에서처럼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혈육에의 끈끈하고 지긋지긋한 관계에 지레 질려버리고 이 드라마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 아니, 그 어떤 드라마이든 '쾌(快)'이거나 락(樂)이 아닌, 보는 것자체가 인(忍)이 필요한 드라마들은 드라마조차도 편집본이나 팟캐스트를 이용해 소비하는 세상에서 마치 멸종 위기의 동물과도 같은 존재일 지도 모르겠다. <풍선껌>의 1.705%(닐슨 코리아 기준 케이블 기준)의 쉽지 않은 시청률은 많은 것을 내포한다. 하지만, 드라마<풍선껌>은 그 수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한 해를 보내며 생각케 한다. 




알츠하이머, 천형의 징벌 혹은, 회자정리
알츠하이머에 걸린 이후 친정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고 아들마저 기억에서 잠시 지우는 등 급격한 악화 증세를 보이던 선영은 이후 아들 리환과 주변 친지들의 따스한 도움으로 회복세를 보인다. 이제 아들 리환을 기억하고, 종종 이전의 선영이 가졌던 똑부러지던 판단력의 기세를 보인다. 하지만, 그 이외의 시간 선영은 여전히 자신이 몸담았던 병원을 좋은 냄새로 기억하고, 좋았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차츰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놓쳐간다. 그런 자신의 증세에 대해 선영은 자신이 행아의 아버지와 함께 했던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마저 잃으면 어떡하냐로 불안해 했지만, 그런 엄마에 대해 리환은 '아이로', 돌아가는 삶의 단순성으로의 회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물론 선영의 질병으로 인해 리환은 고통받는다. 엄마가 잠시 보였던 행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그리고 그로 인해 추측되는 도발될지도 모를 자신의 유전적 결과물에 대한 두려움으로 리환은 행아와 이별을 선택하고 하루하루를 견디어 간다. 하지만 그런 리환과 다르게, 11회를 통해 장황하게 설명했던 선영의 지난 날처럼, 이제 풍성했던 잎을 거두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삶의 집착을 조금씩 거두어 가는 선영은 그녀의 나레이션처럼 '현명'해지고 '편안'해진다. 

선영에게 행아는 애증이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딸,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아들이 사랑하는 아이, 거기에 자신이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사랑을 이루어 주지도 않고 행아만 남기고 떠난 행아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선영은 내내 행아를 불편해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이었던 아들의 마음마저 가져간 행아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그토록 집착했던 지난 날의 모든 것을 거두기 시작한 선영은, 그 과거 속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에의 집착도 거두고, 그래서 행아 아버지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대신 찰라와도 같았지만 행복했던 순간만을 기억 저 편에 남긴 선영은 그녀를 버텨오던 자존심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한다. 용서하라고. 엄마의 이기심으로 너를 불행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아들 리환은 친정쪽 식구들에게 보란 듯이 의대에 보내고 친정에 금의환양하겠다는 욕심으로 아들을 외롭게 자라게 했다고, 거기에 친정 식구들마저 쉽게 하지 못할 집안에 리환을 보내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었다는 걸 사과한다. 

선영의 사과는 아마도 그녀가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루어 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리고 선영의 사과는 그저 선영의 사과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모든 부모 자식의 질곡의 속내를 토로한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말한다. 어디 내가 내 욕심때문에 그러느냐고, 그저 너 잘 돼기만을 바라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픈 뒤의 선영의 고백처럼, 기실은 그 부모들의 자식 잘 되라고의 기원은 그 시초가 부모들의 '자존심'으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선영의 고백을 통해 드러내고야 만다. 



회개, 반성 혹은 머뭇거림의 치유 
그래서 1.705%의 시청자들은 현실에서 부모의 전횡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시간을 알츠하이머에 걸린 선영을 통해 치유받게 된다. 동시에,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렀던 이기적인 지난 날을 되돌아 보게 한다. 

자신의 삶처럼 아들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던 선영이 그녀의 앙칼지고 상처투성이였던 사랑도 놓아두고, 그 사랑의 떨거지 아들도 받아들이며 인생을 정리하는 한편에서,  <풍선껌>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 앞에서 머뭇거린다. 리환은 혹시나 자신을 찾아올 유전병 알츠하이머로 인해 사랑하는 이 행아가 불행해 질까봐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런 리환의 이별 선언에 행아는 지금 자신이 리환의 어깨에 얹혀진 또 다른 짐이 될까봐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리환과 행아만이 아니다. 여전히 행아를 사랑하는 강석준(이종혁 분)도 리환 앞에서는 패기를 부리지만 막상 행아 앞에선 기다리겠다는 말 밖에는 할 줄 모르고, 여느 드라마라면 돈과 권력으로 사랑을 밀어 붙였을 재벌 집 딸래미 홍이슬(박희본 분)도 리환의 불행 앞에 눈물을 보일 뿐이다. 연적인 권지훈(이승준 분)도, 조동일(박원상 분)도 서로 멱살잡이를 하는 대신 조심스레 상대방의 장점을 짚어본다. 

덕분에 <풍선껌>의 가장 악역은 두 어머니였다. 이슬을 재벌 집 딸내미 답게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이슬모의 무지막지한 모성과, 사실은 그 모성과 별반 다를 거 없던 선영의 속물적인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그건, 처지만 다를 뿐,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혈육이라는 이름의 딜레마들이다. 그리고 그걸 치유해 가는 건, 그 혈육의 주변 사람들의 따스한 기억의 순간들. 견뎌낼 수 없었던 행아 아버지의 죽음은 그와의 찰라와도 같았던 행복했던 시간, 그리고 상처받은 채 스스로 자신을 지우려 했던 선영을 보듬었던 공주 이모 등의 친지들. 그리고 아들 리환. 

그리고 종종 자신을 놓아버리려 하는 엄마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 살아왔던 리환을 견디게 해주었던 것은 혈육과도 같은 행아, 지훈, 그리고 시크릿 가든의 식구들. 그물망처럼 그들은 서로서로 조심하고 머뭇거리며 서로의 주변에서 서성이며 서로를 든든하게 지켜준다. 그래서, 이제 리환과 행아의 이별도, 권지훈과 조동일의 어긋난 사랑도, 막장 대신 '사랑'에 대한 반추로 이어진다. 

엄마 선영은 병을 통해 자신을 버티어 왔던 속물적인 자존심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아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얻고, 서로는 사랑의 이기심대신, 사랑으로 인한 배려로 마음 졸인다. 덕분에 드라마는 화끈한 사건은 없어도 매회, 마음을 덥힌다. 가족의 이름으로, 모성의 이름으로 아들을 몰아부쳤던 엄마가 맨정신으로 아들에게 전한 마지막 이야기는, 너의 행복을 찾으라이다. 


똑같이 알츠아히머를 앓아도 도시의 알츠하이머 환자와 농촌의 알츠하이머 환자가 예후가 다른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도시의 알츠하이머 환자가 고립된 공간 인간 관계를 통해 급격하게 악화되는 징후를 보이는 반면, 삶의 근거지를 놓치지 않는 농촌의 환자들은 그저 조금 기억력이 떨어지는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고 하니, 선영의 알츠하이머는 그저 예후로서가 아니라, 결국은 인간에게 닥치고야 말 질병에 대한 개인과 그 주변 사람들의 또 다른 화법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by meditator 2015. 12. 2. 14:40

<풍선껌> 9회 리환 모 박선영(배종옥 분)은 리환이를 가져 집을 나온 이후 선뜻 찾아가지 못하고 미루어 두었던 아버지와의 묵은 해원을 알츠하이머로 더 이상 정신을 놓기 전에 풀고자 마음 먹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그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 오랜 투병 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그녀의 사과 한 마디를 기다려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시고 만 것이다. 오빠의 원망을 채 듣지도 못한 채 전화기를 떨어뜨린 선영, 힘들게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며칠 만에 깨어난 선영은 그녀의 아들 리환을 그녀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만다. 




가족이란 이름이 지워주는 무게에 대하여 
아들을 부정하는 엄마라니! 남자 주인공 리환(이동욱 분)의 엄마 선영의 아들에 대한 기억 상실은 한국 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문 설정이다. 우리 나라 드라마에선 그 어떤 힘든 역경이 있어도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절대적인 것으로 그려 왔으니까. 하지만, <풍선껌>의 선영은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걸려서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아들을 지운다. 

이런 선영의 아들에 대한 기억 상실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 우선 대학 병원의 호흡기 내과 의사라는 번듯한 직위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월 미혼모로 아들 하나를 키워내기 위해 그녀가 견뎌냈던 세월의 무게를 역설적으로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쉽게 다시 자신의 육친을 찾지 못할 정도로 그녀가 가졌던 부와 명예를 상실케했던 미혼모로서의 삶, 제 아무리 번듯한 직업을 가졌다 한들 여전히 이 사회에서 미혼모로 살아냈던 삶의 무게를 전해주는 것이다. 

또한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그토록 '당연시' 여기는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한 개인에게 하중되는 부담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선영은 아들 리환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버렸으며, 그 부모가 선사해줄 가족의 부를 외면해야 했다. 즉,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한 삶은 그녀에게 추운 방과 떨어진 천장으로 기억되는 삶을 기억에 새긴다. 가족은 그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유지되고 계승되는 것이라고 <풍선껌>은 말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닐 수도.
<풍선껌> 속의 가족은 질곡이다. 선영은 자신의 아들 리환을 알츠하이머가 걸린 자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리환을 보호해줄 강력한 유사 가족을 원한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부가 충만한 이슬과 그녀의 가족이다. 하지만 선영이 선택한 이슬의 가족이란 또 다른 질곡이다. 이슬 자신이 대놓고 엄마가 아프면 엄마 곁에 머물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에서 가능하면 엄마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만큼, 이슬의 가족과 가계는 '부'의 카르텔이며, 그 카르텔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인간적'인 고려는 사치가 되는 관계들이다. 하지만 아픈 선영에게 그런 이슬의 가계가 동앗줄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이 마음을 두고 있는 사고무친 행아(정려원 분)를 멀리한다. 선영의 선택을 통해 이 사회 속 '가족'의 존재 이유와 존재 기반을 생각케 보게 된다. 그런 엄마에게 반기를 들면서도 행아를 선택하려 했던 리환은 하지만 10회 마지막 결국 행아에게 이별을 고한다. 알츠하이머 엄마라는 무게를 같이 짊어지며 '가족'이 되려 했지만, 리환은 깨닫는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가족이 질곡으로 작동하는 반면, <풍선껌>에서 위로가 되는 것은 가족 아닌 사람들이다. 진짜 이모가 아니지만, 이모라고 부르며 자신을 혹사하며 선영을 돌보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행아는 선영이 사랑했던 선배의 딸일 뿐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선영이 의지하는 것은 자신이 외면했던 피붙이가 아니라, 행아의 아버지 김준혁(박철민 분)이 운영하던 '시크릿 가든'에 모여든 사연있는 공주 이모(서정연 분)다. 거기에 이모를 돌보느라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는 행아를 걱정해 주는 것은 그녀의 방송국 식구들이요, 리환의 곁에서 그를 형처럼 지켜주는 것은 그와 한의원을 함께 하는 권지훈(이승준 분)이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이 '유사 가족' 패밀리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혈연 관계로 인해 고통받은 행아와 리환이 의지하고 그들을 지켜주는 사람들이다. 즉, 가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정작 위로를 받는 것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다. 

뻔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 같았던 <풍선껌>은 하지만 회를 거듭하며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관계들을 통하여, 현재 우리가 믿고 살아가는 이 사회의 편견과 속념들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다. 가족의 절대성에 대하여, 가족의 무게에 대하여, 그리고 과연 '가족'만이 대안이 되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 
by meditator 2015. 11. 25. 16:08

24회 <애인있어요>, 드디어 주민센터에 들러 자신이 도해강(김현준 분)임을 확실하게 알게 된 도해강은 도해강의 이름으로 최진언(지진희 분)을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불륜과 생과 사의 고비마저 갈라놓지 못하는 말 그대로 이 죽일 놈의 맹목적인 사랑이다. 


이 죽일 놈의 맹목적인 사랑 
극 초반 자신의 재판 피해자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리고 심지어 자신들의 아이의 죽음에도 요동조차 하지 않는 아내 도해강에 질려버린 최진언은 이제 다시 도해강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전 아내 앞에서 '사랑에 지쳐서'아내를 버리려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아내를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마다치 않고, 심지어 아내의 어머니 빛쟁이에 맞기까지 했던 최진언의 지독한 사랑은, 그 사랑이 아이의 죽음과 함께 환멸로 바뀌어, 결국 불륜이란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 앞에서 '어떤 일이라도 할 테니 저 사람 좀 치워주세요'라고 말하던 최진언은 하지만, 아내와 헤어지고 불륜녀 설리와 함께 외국 생활을 하면서도 아내와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했다. 연구에 밤을 세워 매달리고 쪽잠을 자면서 자신을 내몰았지만, 4년만에 자기 앞에 독고 용기의 모습으로 나타난 도해강에게 불가항력으로 무너지고 만다. 



도해강도 만만치 않다. 남편의 앞에서 물에 자신을 던져 가면서 구출하려 했던 결혼 생활도 최진언의 가차없는 오해와 시누이의 음모로 하루 아침에 회사에서의 직위와 결혼 생활, 모든 것을 잃은 처지가 되어서도 다시 한번 남편을 만나러 가다 사고를 당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독고용이가 되어 산 4년이 흐르고서도 그녀는 최진언을 만나자 다시 가슴이 뛴다. 그녀의 기억은 잊혀졌지만,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는 최진언으로 인한 아픔보다 그로 인한 사랑이 더 크다. 

그래서 사고 후 기억을 조금씩 다시 찾게 된 도해강은 거침없이 최진언을 선택한다. 그리고 최진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하고자 한다. 

7%의 딜레마, 바로 설득되지 않는 사랑?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4년후 고국에 돌아온 최진언이 아내 도해강을 만나고 마치 일방통행 도로처럼 도해강을 향해 달려가지만, 시청자들은 잊지 않고 있다. 그가 지금 그렇게 맹목적으로 아내를 향해 사랑으로 치닿듯이, 4년 전에는 아내와의 이별을 향해 그렇데 치달아 갔었다는 것을.

즉 <애인있어요>는 극 초반 최진언에게 '혐진언'이란 별명이 붙여지듯이 아이를 낳고 함께 살아왔던 아내를 떨어버리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상황을 설정했던 부담을 상쇄하기라도 하는 듯, 4년 후 도해강을 만난 최진언은 그녀를 향해 세상에 없는 순애보를 펼친다. 

그런데 그 최진언의 순애보가 그 누군가의 눈에는 순애보가 아니라, 그저 또 다른 형태의 이기적인 사랑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애인있어요>의 딜레마라는 것이다. 아이의 죽음을 자기처럼 슬퍼하지 않는 아내가, 순수했던 시절을 잊은 채 입신양명에 매달리는 아내가 싫어서, 이혼을 하자 하고, 매달리는 후배를 안고,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 앞에서 아내를 치워달라고 말하며 모멸감을 안겼던 최진언과, 지금 그가 헤어지면서 바랬듯이 좋은 사람들과 웃으며 그 이전 도해강과 달리 정의롭게 살아가는 독고 용기가 된 삶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신이 사랑했던 도해강만을 확인하기 위해 독고용기의 삶에 뛰어드는 최진언이 똑같이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화제성을 넘어 7%대에서 쉽게 상승하지 못하는 시청률은 그 딜레마의 반증이 아닐지.



사랑은 이기적이라지만, 한 입으로 두 말 하듯, 극 초반 아내를 버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최진언이, 이제 와 도해강을 향한 순애보를 펼치고 있는 것이 <애인있어요>를 처음부터 시청했던 시청자들에게는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극중 도해강과 최진언을 연기하는 김현주와 지진희의 연기는 순애보를 설득하기에 넉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그 딜레마를 쉽게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 24회를 넘긴 <애인있어요>의 나머지 추동력이 될 것이다.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 도해강 앞에 순애보를 펼치며 돌아온 최진언, 그런 그의 사랑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는 도해강이 과연 이 순애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애인있어요>의 후반부 전개의 키 포인트이다. 또한 거기에 두 사람의 부모가 얽힌 오랜 해원도 만만치 않다. 

즉, 최진언의 아버지는 자신의 사업적 욕심에 도해강의 아버지의 죽음을 묵과했거나 방조, 심지어 도발했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드라마는 기억을 찾은 도해강을 다시 한번 최진언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 두 사람을 원수의 집안으로 서로 사랑하게된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만들어 가고자 한다. 하지만, 딜레마는, 극초반 불륜도 마다하지 않는 최진언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이 둘의 사랑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순애보라기 보다는, 자신의 이기적인 감정에 휘둘려 사랑을 기만한 '햄릿'과 그 사랑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오필리아'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다시 돌아온 순애보적인, 거기에 정의로운 인물인 최진언이, 이 모든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을지. 아내를 버릴 수 있다면 그 싫어하던 아버지의 사업도 물려받겠다던 인물의 순애보를 나머지 극의 흐름이 설득할 수 있을지. 거기에 자신의 과거, 거기에 더해진 최진언의 혐오스런 사랑까지 도해강이 '결자해지' 할 수 있을지, 그것이 시청자를 설득할 수 있을지가 <애인있어요>의 관건이 된다. 

by meditator 2015. 11. 23. 15:37

11월 20일 방영된 <응답하라 1988>이 드디어 케이블 시청률 10%를 넘었다.(닐슨 코리아 기준 10.145%) 그도 그럴 것이 20일 방영된 5회는 자식되는 혹은 부모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공감할 '모성'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고 홀로 자식을 키우는 선우모(김선영 분)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의연하게 견뎌냈지만, 결국 친정 엄마의 측은지심에 무너지는 모습에 시청자의 누선을 자극했다. 민정당사 농성에 가담했다 잡혀가는 큰딸 보라(류혜영 분)를 막아선 엄마(이일화 분)의 애끓는 일편단심 모정은 또 다른 의미에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남편과 아들 둘을 놔두고 차마 집을 떠나지 못하던, 그리고 자신의 부재에도 잘 지내는 가족들에게 실망하는 정환 모(라미란 분)의 모정은 바로 우리네 엄마들의 모습 그자체로 공감을 자아냈다. 그렇게 울고 미소지으며 한 시간을 시청하고, 채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하지만 마음은 씁쓸해졌다. 




부동산 투기를 하던 엄마도 88년의 모성이었고, 
유신 말기에서 부터 전두환 정권이 끝나던 시기인 85년까지 안정세를 보이던 부동산 시세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88년 부동산 광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부동산 광풍은 강남권 아파트는 물론 전국의 모든 토지가 그 대상이 되었고, 오죽하면 '망국병'이라 지칭될 정도였다. 그렇다면 당시 '망국병'에 앞장선 사람들이 누구였을까? 바로 그 누군가의 '엄마'들이다. '부동산 투기'바람의 선봉에 선 그 누군가의 엄마들이 드라마에서 처럼 '마른 자리 진 자리' 보살피는 대신, 아파트다. 토지다 하며 전국을 휩쓸며 다닌 덕분에, 그 '엄마'의 자식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어, 한 자리 할라치면 너도 나도 불법 토지 거래로 걸리는 망국 유전병'을 가진 자식들이 되었다. 그렇게 <응답할 1988>은 88년의 모성을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이야기 하지 않고 있다. 

이 드라마 이야기 하지 않고 있는 모성은 또 있다. 바로 운동권 자녀를 둔 보라 엄마의 모성이다. 엄마는 골목에 숨어있다 잡혀가는 보라를 막아선다. 빗속에 신발도 벗어제친 채 달려온 엄마의 발에선 피가 흐리고, 하지만 엄마는 아랑곳없다. 잡혀가는 딸을 막아서며 자신의 딸 보라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자식인가, 부모를 생각하는 딸인가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보며, 딸 보라는 집안 식구들조차도 꼼짝못하게 만들었던 그 기세 등등한 보라는 '잘못했다'는 말을 성큼 내뱉고 만다. 자식을 위해서는 맨발도 마다하지 않고 가녀린 몸으로 막아서는 모정, 그 앞에서 자식은 결국 '자존심'을 내던지고 만다. 그리고 드라마는 보라가 내던진 자존심이, 그리고 사복 경찰 앞에서 빌듯이 애원하는 엄마의 보잘것 없는 자존심이  바로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삼베 수건을 쓰고 거리로 나선 엄마들도 88년의 모성이었다. 
하지만, 88년의 모성은 보라 엄마같은 모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시작은 보라 엄마처럼 시작했을 수도 있다. 85년 12월 12일 서울 기독교 회관 2층에서 민주화 가족 협의회가 창립되었다. 이 조직의 원칙은 특이하게도 '담보물 우선주의'이다. 여기서 말하는 담보물은 바로 '감옥에 갇힌 자녀'들이고, 그 담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선 부모들이 이 협의회의 회원들이다. 이 회원들도 보라 엄마처럼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부모들은 '한 개인의 석방을 애원하기 보다는 민주화의 대열에 함께 서는 것이 고통받는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지름길'이라고 믿으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서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6.10 항쟁의 기폭제가 박종철 치사 사건 때 머리에 삼베 수건을 뒤집어 쓰고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어간 남영동 대공 분실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었다. 7월 4일 최류탄을 맞고 죽어간 이한열 군 장례식때도 시청까지 꽉 매운 행렬의 선두에 선 것은 역시나 머리에 삼베 수건을 쓴 어머니들이었다. 그 어머니들이 바로 드라마가 배경이 된 88년에 무엇을 했냐 하면, 10월 기독교 회관에서 의문사 유가족을 중심으로 135일의 농성을 벌였다. 



‘그들도 처음엔 평범한 어머니 보통의 아내였다. / 늦게 들어오는 자식을 기다리고 / 자기 일에만 바쁜 남편이 밉던 / 남들과 똑같은 여자였고 어머니였다. 자식이 혹시 / 무슨 물이나 들지 않을까. 조바심 내던 아버지였다. / 적어도 가족들이 고난받는 길을 택하기 전까지는 / 식구 중의 하나가 이 민족의 고통을 끌어안고 / 전생애를 다 던지는 사람이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도종환; 민가협 창립 열돌에 부쳐; 민가협)

드라마는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보라의 문제를 '집안 문제'로 해결한다. 아버지가 나서서 딸을 주리틀듯 잡아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튕겨나갔던 딸은 어머니의 눈물 겨운 모성에 결국 '항복'을 하고야 만다. 극중 보이듯 보라는 '단순 가담'으로 인해 '훈방'조치에 처해진다. 마치 드라마는 엄마 아빠의 극진한 마음이 닿았던 것처럼 그려지지만, '훈방 조치' 할만 하니까 한 사안인 것이다. 오히려 그 기세 등등했던 보라는 엄마, 아빠의 마음을 핑계로, 도망치고 싶던 자신의 '퇴로'를 마련한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민주화 시위'에 가담했던 보라의 일은 드라마 속 가족의 '해프닝'으로 다루어진다. 마치 경기에 진 택이를 동네 아이들이 응원하여 추스리게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건 그저 드라마의 해법이 아니라, 이 드라마가 '모성'에 기대어 우리의 가족을 설명하듯이, 그 모성과 부성의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 사회가 선택한 해법이다. 

'내 가족'을 선택한 우리 사회의 결과, 헬조선 
민가협의 어머니들이 자식을 잃은 고통을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의 민주화에 적극 동참하는 것을 '지름길'을 찾았지만, 우리 사회는 가족에게 전해지는 모든 사회적 부담과 고통을 '가족끼리' 보담고 '사랑'하는 것으로 해결해 왔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복지 제도를 가진 스웨덴이 자신들의 집이 곧 사회이며 국가이고 민족 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지고 노인과 여성과 아동을 위한 복지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열렬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 새끼', 내 부모'를 보담고, 각자 도생하기 위해 각자 고군분투 해왔다. 그래서 어느 부모는 없는 살림에 아끼고 아껴 자식을 번듯하게 키워내고, 또 어느 부모는 자식의 밥을 챙기는 대신 열심히 투기 바람에 날라 다녔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2015년이 '헬조선'이다. 그렇게 살아온 사회이기에 대통령이 된 사람의 과업이 아버지 되살리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응답하라 1988>이 그려내고 있는 88년에도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극진한 가족애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by meditator 2015. 11. 21. 16:11

김희선이 여주인공을 연기하던 90년대의 로맨틱 멜로물 <미스터 Q>(1998)나, <토마토(1999) 속 여주인공은 얼굴은 이쁘지만, 가진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마치 '콩쥐팥쥐' 속 콩쥐처럼 극중 불쌍한 처지에 팥쥐 역을 맡은 배우에게 온갖 고난을 다 겪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미모와 그 미모보다 더 이쁜 마음에 매료된 남자 주인공을 그녀를 '백마탄 왕자'처럼 굳건하게 지켜준다. 


그러던 로멘틱 멜로물의 주인공이 한예슬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환상의 커플(2006)>을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여주인공은 아름답지만, 거기에 가진 것도 제법 있는데, 대신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얼굴 이쁘지만 성격이 싸가진인 여주인공은 <별에서 온 그대>으로 정점을 이룬다. 오랜 연예계 생활, 하지만 일관된 발연기와 안하무인의 성격으로 이제는 그 정점에서마저 추락할 위기에 놓인 여주인공 천송이, 그런 그녀에게 왕자님보다 능력이 한 수위인 외계인 도민준이 다가선다. 그래도 여전히 여주인공은 이뻤다. 

물론 여주인공에게 데미지가 가해진 경우도 있다. <성균관 스캔들(2010)>이나, <커피 프린스 1호점(2007)>처럼 피치못할 사정으로 여주인공이 남장을 해서 남자 주인공으로 하여금 '커밍아웃'의 갈등을 느끼도록 하는 사연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거죽일뿐,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시청자들이 보기엔 한 눈에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걸 알아볼 만큼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등장했었다. 오죽하면 남자 주인공이 미소년인 그를 아니 그녀로 하여금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까. 역시 여전히 여주인공은 이뻤던 것이다. 



경쟁력이 없는 그녀들
그런데 2015년 로맨틱 코미디를 내걸고 등장한 두 편의 작품 속 여주인공이 모두 이쁘지 않다. 한 명은 외모에 하자(?)가 있고, 또 다른 한 명은 몸매에 하자(?)가 있다. <그녀는 예뻤다> 여주인공 김혜진은 어릴  때 한 미모했었지만 가계의 내력에 따라 자라면서 심한 곱슬 머리와 안구 홍조증을 가진 여자이다. 그런가 하면 새로 시작한 KBS2의 <오 마이 비너스>의 여주인공 강주은(신민아 분)은 역시나 대구를 주름잡을 정도의 미모로 그녀의 얼굴로 안되는 것이 없었지만 이제 현실은 77사이즈에 15년 남친마저 살을 뺀 친구에게 뺏긴 처지가 되버렸다. 

얼굴이 안되거나, 몸매가 안되는 여주인공들 이들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외모가 경쟁력'인 2015년의 세태다. 돈이나 빽이 대세인 '자본주의 성장기' 시절 여주인공들은 가진 것이 없고, 지켜줄 집안이나 배경이 없었다. 혹은 가진 것이 없어 자신의 성조차 부정해야 하거나, 자신의 왜곡된 성격으로 가진 것조차 빼앗기게 된 처지에 놓인다. 이제 '자본주의'가 인간의 전인격을 굴복시킨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상품으로 내세워야 하고, 그래서 성형으로 외모를 바꿔 인생을 역전시킨 TV 프로그램이 등장하는 시대에, 그녀들은 그 경쟁력을 상실한 '을'로 등장한다. 

거기에 '외모'가 '을'인 것과 비등하게 삶의 조건도 '을'이다. 어렵사리 회사에 들어갔지만 이리 저리 가라하는 데로 처분이 정해진 '인턴' 신세이거나, 몸매도 포기하며 어렵게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지만, 그녀가 학창 시절 생각했던 정의의 수호자 대신 '고객이 원하는 법률 서비스'를 수행하는 심부름 센터 직원과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는, 로펌의 일개 직원에 불과한 처지인 것이다. 



당연히 경쟁력이 없는 그녀들과 만나게 된 남자 주인공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가진 것 없어도 이뻤던 그녀들은 첫 눈에 호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안면 홍조의 김혜진은 달라진 외모 때문에 어린 시절 친구 앞에 자기 대신 친구를 세우고, 자기 자신은 그저 눈 밖에 난 '인턴' 사원으로 사사건건 남자 친구에게 닥달을 당하는 처지이다. 자신이 이제 와 친구라고 말하는 것조차 자존심상할 만큼. <오 마이 비너스>의 강주은과 김영호(소지섭 분)의 만남도 그리 유쾌하진 않다. 언제나 그와의 만남의 순간에 강주은의 '살려주세요'가 등장하는 만큼, 그녀는 늘 위기에 빠지고, 그 위기의 순간에 김영호는 그녀를 구한다. 하지만 살집이 두둑한데다, 고맙다는 말을 제쳐버리는 그녀가 그에게 매력적일 리가 없다. 그저 길잃은 강아지 두고 올 수 없는 마음으로 김영호는 강주은을 보살핀다. 물론 그 마지못한 관심이 그녀들의 인간적 매력을 통해 '사랑'으로 변화될 것이지만. 

그렇게 외모의 경쟁력이 없는 그녀들, 거기에 번듯한 직업인 듯 보이지만 사실 속 빈 강정에 불과한 그들의 처지는 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수술대에 눕기를 거부하지 않고, 그럼에도 그 속빈 강정을 포기할 수 없는 동시대 여성들의 위안이 된다. 물론 이 위안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하루 아침에 '변신'을 하고 나타난 김혜진처럼, 이미 아름다움이 보장된 여배우들의 거친 분장 캐릭터로 등장한 <그녀는 예뻤다>와 <오마이 비너스>의 여주인공들은 마치 '해피엔딩'이 보장된 동화와도 같다. <그녀는 예뻤다> 마지막 회 김혜진이 다시 안면 홍조 곱슬머리 김혜진이 되었다 하더라도 시청자들은 사실 김혜진의 황정음이 이쁘다는 걸 안다. 그래서 언제든 다시 이뻐질 수 있는 김혜진처럼 다시 돌아온 안면 홍조 김혜진이 그리 안타깝진 않다. 드라마는 외모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지만, 이쁜 여배우들의 분장으로 눈속임을 한 캐릭터를 보며, 시청자들은 보험을 든 기분으로 그 '인간 승리'의 로코를 편안히(?) 즐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생 역전의 아이콘 헬스 트레이너 김영호를 만난 강주은의 변신 과정은 시청자 머리 속에 이미 인형 같은 몸매로 인식된 신민아란 배우가 있기에 여유로운 것이다. 

그렇게 행복이 보장된 동화 속 그녀들의 자신을 던진 개과천선과 달리, 시대를 달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을 사랑하게 된 그들은 변함이 없다. 첫 눈에 그녀들을 보고 반하든, 혹은 싸가지 없는 그녀들에 불평을 하며 시작했든, 아니 이제 외모가 경쟁력이 없는 그녀들에 측은지심으로 다가섰던, 여전히 그들은 시대에 따른 '갑'의 캐릭터다. 실장님이었다가, 능력 갑의 외계인이었다가, 이제 잡지사 편집장이거나, 기업의 후계자이자, 헐리우드를 들었다 놨다 하는 헬스 트레이너로 시대에 맞춰 옷을 갈아입듯 트렌디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때론 완벽남이었다가, 외계로 돌아가지 못해 절쩔 매거나,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상처를 입어도 능력남인 게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능력자'인 것이다. 변한 듯 하지만 결국 변한 게 없는 로맨틱 드라마 속 남녀의 갑을 관계이다. 

by meditator 2015. 11. 18. 1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