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주말 드라마 <애인있어요>의 18회 시청률은 7.6%(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이다. 동시간대 mbc 주말 드라마 <내딸 금사월>이 23.5%(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 각종 게시판에 오르내리는 이 드라마와 관련된 설전을 놓고 보면 화제성 면에서는 거의 국민 드라마급이다. 


<애인있어요>를 화제의 중심에 오르내리도록 만드는 주요 요소는 바로 부부였던 도해강(김현주 분)와 최진언(지진희 분)가 최진언의 불륜으로 인해 부부 생활이 파탄이 났음에도, 이제 몇 년이 흐른 후 다시 독고용기가 된 도해강과 만나 가슴이 설레는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때문이다. 아이를 잃고 상심에 똑같이 상심에 빠졌음에도 그 부부의 위기를 불륜으로 돌파(?)한 최진언은 욕받이가 되었다가, 몇 년후 다시 독고용기가 된 도해강을 보고 '나는 알아요, 내 아내라는 것을'이라며 저돌적으로 다가가는 모습에 가슴설레는 대상이 되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들쑤셔 놓는다. 

그런가 하면 아내 도해강은 남편에게 버림받다시피하여 이혼을 당하고 가진 것을 모두 잃은 채 사고를 당해 시청자들의 안쓰러움을 독차지하는가 싶더니,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봐온 백석(이규한 분)과 최진언의 약혼자연하는 설리(박한별 분)을 제치고 최진언에게 다가가 시청자의 가슴을 헤집는다. 

두 주인공, 그 누구도 마음을 선뜻 주었다가는 그가 저지르는 도덕적 딜레마에 시청자조차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드라마, 그저 막장이라, 불륜이라 치부해 버리기엔 불편한 <애인있어요>, 이 두 주인공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50부작의 대하드라마급 이 드라마를 통해 작가가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이 가을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줄 멜로일까?



뇌가 순수한 남자 최진언 
<애인있어요>가 파란을 일으키는 문제의 근원은 바로 최진언으로 부터 시작된다. 일찌기 대학 시절 목이 매달다시피하여 도해강을 자신의 아내로 만들었으나, 아버지 회사의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며 하루가 다르게 그 순수한 모습을 잃은 채 욕망의 화신이 되어가는 그녀에게 최진언은 실망한다. 그리고 그 실망은 아내의 재판 결과로 인해 딸이 목숨을 잃게 되면서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최진언이 선택한 것은 불륜. 그랬던 최진언이 4년만에 아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독고 용기에에 아내를 잊지 못했다며 다시 사랑하자고 다가간다. 

언뜻 보면 치정극의 주인공과 같은 설정을 가진 최진언이라는 캐릭터, 멜로의 주인공이라는 시선에서 한발 떨어져 그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대학 시절 첫 눈에 반한 아내에게 저돌적이듯, 아내가 싫어지자 어린 후배에게 다시 그러고, 이제 시간이 흘러 다른 이의 모습을 한 아내에게 다시 들이대는 이 남자, 이 캐릭터를 시청자들은 불쾌해하면서도, 지진희라는 멋진 배우가 연기하는 그의 사랑에 어쩔줄 몰라한다. 

그런 최진언에게 성격 유형 검사를 한다면 아마도 '외곬수형'으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일찌기 천년 제약의 외아들로 고이고이 자라난 그는, 물론 배다른 누나로 인한 갈등은 있었다지만, 늘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환경과 선택지를 가진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속물같은 아버지와 누나를 멀리하고, 자신은 고고하게 연구실을 택했듯이, 그는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순수해 보이던 도해강을 택했고, 그녀가 자신의 가족들과 같은 부류가 되어가자, 그 예전 아내처럼 순수해 보이는 설리를 택한다. 그리고 이제, 그녀와 함께 유학까지 다녀온 그가, 집안에서 당연히 약혼자 취급을 하는 설리와 결혼을 하지 않겠다며 도해강에 매달린다. 18회라는 짧지 않은 회차 동안 최진언의 선택은 늘 '자신의 마음 가는대로'이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참는 대신, '사랑'이란 이름으로 현실을 외면해 왔다. 천년 제약이라는 집안 배경을 '도해강'과의 사랑으로, 그리고 '학문'으로 외면해 왔고, 아내에 대한 불만을 '불륜'으로 도피했으며, 이제 '설리와의 결혼'을 아내와 같은 도해강으로 피해간다. 

그는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기적 행위'의 연속이었으며, 그의 '이기적 행위'로 인해 주변의 누군가는 늘 상처를 입곤 했다. 18회, 독고 용기가 된 도해강과 '이름을 다 잊고 처음부터 사랑하자' 했던 그가, 아내가 죽었다는 백석의 말 한 마디에, 옆에서 떨고 있는 도해강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아내의 죽음을 확인하러 가는 모습에서, 최진언의 존재론은 여실히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양가가 모인 상견례 자리에서 그간 자신과 함께 하리라 믿어왔던 설리에게 대한 배려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다. 아마도 최진언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아닐까? 그러기에 최진언의 '결자해지'는 결국 자기 자신의 마음만을 사랑하게 된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이혼한 아내에게 주변을 돌아보라고 충고했던 그가, 주변을 돌아보며 그것을 책임지려 하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숙명이 되어버린 도해강의 사랑
사고로 인해 자신이 누군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도해강, 그래서 백석이 만들어준 독고 용기의 존재에 기대어 지난 4년을 살아온 그녀가 최진언을 보자 가슴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 누구보다 그녀를 믿어주고, 그녀에게 다시 웃음을 찾아준 백석과 그의 가족을 생각해야 함에도, 결국 최진언에게로 달려가고 만다. 밤마다 꾸던 악몽을 잠재우지 못한 채 현실로 끌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사람을 죽게 만들었던 나쁜 변호사였던 그녀을 잊고 불륜의 피해자로 그녀를 안쓰럽게 생각했던 시청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최진언을 보란듯이 밀쳐내며 그의 도덕적 딜레마를 극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에 아랑곳없이 도해강은 그녀 자신이 상처받았던 그 길을 똑같이 달려가고 만다. 



마치 금기의 열매처럼 최진언과의 사랑에 다시 빠져버린 도해강은, 결국 4년전의 시간으로 자신을 다시 끌고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불론과 이혼이라는 과정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아니 마무리 할 수 없었던 전쟁과도 같은 사랑으로의 회귀이자, 이제는 자기 자신보다 주변을 더 챙기고, 정의에 분노하는 백석의 사무장에서, 재판의 피해자가 죽어도 눈 하나 끔쩍하지 않던, 더 높은 자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도덕적 아노미'에 빠진 도해강에 대한 복기가 될 것이다. 

'사랑'으로 시작하여 반성과 회개가 되어갈 
불륜과 다시 불륜과도 같은 사랑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애인있어요>는 가장 극단적인 도덕적 딜레마를 통해, 역설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쉽게 그 누구의 편을 들어주기 힘든 처지에 놓인 두 주인공을 통해, 일반적인 막장 드라마의 편한 선악 구도에 손을 들어주었던 시청자들은 혼란을 느낀다. 그리고, 더불어 회의를 느낀다. '사랑'과, '도덕'과 마음에 대해, 그리고 거기에서 부터, 시청자들과 함께, 두 주인공들은 진짜 자신들의 길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날 듯하다. 

인류사에서 '사랑'이란 감정은 인류 역사의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인 듯 여겨지지만, 사실은 누군가와의 '사랑'을 전제로 한 '자유로운 연애' 그 자체가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 인연은 당연하게 가족과 가족 사이의, 혹은 신분과 신분 사이의 이합집산이었던 것이, 자본주의가 되고, 핵가족이 필요가 되면서, 그 가족을 이루는 전제 조건으로 자유로운 연애라는 것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 모든 욕망의 가장 극적인 상징체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감정은, 우리 사회 모든 욕망의 최고봉이다. 그러기에, 그 사랑에서 시작된 회의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 전반에 대한 회의와 회개로 귀결된다. <애인 있어요>의 뒤죽박죽 연애담은 결국 후반부의 그 연애담의 근저에 흐르는 각자의 욕망으로 귀결되어갈 수 밖에 없다. 

아내를 불륜까지 저지르며 외면했지만 결국 다시 아내를 사랑하게 된 남자와, 불륜의 피해자가 되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자가 다시 남의 남자를 빼앗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두 주인공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되돌아 보게 되고, 거기서 자기 자신들을 얽매인 또 다른 욕망의 민낯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민낯을 향해 가기 위해, 두 주인공은 위험한 통과 의례를 거치는 중이다. 



by meditator 2015. 10. 26. 14:55

<미생>처럼 이미 그 원작에서 부터 화제가 되었던 또 하나의 만화 작품이 드라마가 되었다. 10월 24일 jtbc를 통해 첫 선을 보인 최규석 작가의 <송곳>이 그것이다. 


영화 <스물>속 생생한 젊음의 원작인 만화 <울기엔 좀 애매한>의 원작자로 알려진 최규석 작가는 이미 만화를 통해 당대를 표현하는데 발군의 능력을 보인 작가이다. 과학책일까 하는 의심을 품게 하는 <습지 생태 보고서>를 통해 빗물이 새는 반지하 셋방에 모인 일군의 젊은 군상들의 리얼한 궁상을 기록하는가 하면, 작가 자신의 가족을 통해 성장주의 대한민국의 속살을 드러낸 <대한민국 원주민>은 역사가 외면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낱낱이 그린다. 일찌기 2003년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통해 아기 공룡 둘리가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았다면 노동자 둘리가 되어 손가락을 프레스 기계에 잃었을 것이란 작가의 냉철한 현실 인식은 2009년 <100도씨>를 통해 6월 민주 항쟁을 기록했고, 만화로 보는 노동법이란 평을 들은 <송곳>으로 귀결된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관통해 온 최규석 작가의 작품 세계는 현실을 다룬 다는 것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오히려 그것보다는 그 속에서 살아내는 인간 군상의 민낯을 거침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술 주정뱅이 아버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엄마, 그리고 가족의 기대를 등에 업고 성공하려 했지만 맘처럼 되지 않았던 형, 그리고 그런 가족을 보면서 일가를 이루는 것에 회의를 하는 자신을 '원주민'이라 지칭하고, 찌질한 젊은 군상들을 '울기에 좀 애매한' 존재로 그려내는 것처럼, 현실 인간의 '미시사'에 천착해 왔다. 그리고 그 최규석 작가의 최신작 <송곳>을 드라마환 <송곳> 역시 현실의 '인간'에 촛점을 맞춘다. 



갑갑한 현실 속 송곳같은 사람들
방영전부터 마트 노동자들의 정리 해고 투쟁을 다뤘다는 점에서 영화 <카트>와 소재 면에서 중복이 우려되었던 드라마 <송곳> 하지만, 첫 선을 보인 <송곳>의 시점은 마트가 아니라, 노숙자가 되어가는 짜장면집 배달원과 조우한 구고신으로 부터 시작된다. 6개월 동안 일한 짜장면 집에서 오토바이를 부쉈다는 이유만으로 돈 한 푼 못받고 쫓겨나 박스를 덮고 잠을 청하던 배달원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구고신은 대뜸 그의 손을 잡고 그가 일하던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법'으로 얼르고, 짜장면 집 단골 사업장으로 '뺨치며' 단번에 배달원의 밀린 봉급을 챙겨준다. 그리고 그에게 사례비를 건네는 건네는 배달원의 어깨를 치며 자신의 밥그릇이나 잘 챙기라는 말을 건네고 휭하니 사라지는 구고신의 모습에서, 이 드라마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그를 통해 보여줄 '인간'에의 천착을 대번에 설명해 낸다. 

그렇게 구고신으로 부터 '해학적'으로 시작된 드라마는 극중 배경이 마트로 바뀌면서 진지해진다. 분주한 마트의 아침 개장 시간, 관례대로 일을 하려는 마트 직원들 사이에서 원칙을 강조하며 사서 미움을 받는 과장 이수인, 그 깐깐한 원칙으로 인해 외국인 지점장에게 총애를 받는 그는 하지만 부장이 지시로 자기밑의 직원들을 자르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협력업체 직원들을 마트 직원인 양 부리려는 마트 직원들을 저지하며 원칙을 강조하는 이수인의 캐릭터는 이어지는 부당 해고 지시에서 '거부'로 연결되며 그 일관성이 드러난다. 또한 부장 앞에서 부당한 지시에 놀란 그의 모습은 일찌기 어린 시절 '남성의 강고함'을 강조하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부터 유래된, 그리고 학창 시절과 육사 생도 시절을 경과하며 원치 않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송곳'같은 캐릭터의  존재감을 대번에 설득해 낸다. 



그렇게 드라마 <송곳>은 그 원작의 그것처럼, 현실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되, 상황의 불가역성을 강조하는 대신, 그 곳에서 결국 선택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과, 그 곳에서 고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인간형을 그려냄으로서 삶의 투쟁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현실의 역동성에 발을 거는 단단한 돌부리같은 존재는 불편하게 현실에 길들여 살아가는 시청자들의 마음에 돌을 던진다. 

그렇게 잊고 있던 당연함을 일깨우며 불편하게 시작된 <송곳>이 마트 직원들의 부당 해고과 그에 맞선 투쟁으로 어이질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그리고 그런 내용의 드라마가 무노조주의를 일관되게 관철시켜오는 삼성 계열 하의 jtbc에서 방영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그 아이러니를 조소하기 에 앞서, 삼포 세대의 비감한 현실을 다룬 <미생>조차 결국 환타지로 끝나고 마는 세상에 권력의 눈치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뉴스가 재벌의 시야 내에서 이듯이, 역시나 재벌의 품 안에서만이 이런 사회비판적 드라마가 만들어 질 수 있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감내해야 하는 것이 현재 미디어의 현실에의 직시가 우선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jtbc 뉴스의 건재를 감사하듯이, 그저 <송곳>이 원작의 주제 의식을 훼손하지 않고, 시청률에 휘둘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그 송곳같은 이야기를 잘 마무리 하길 바란다. 그리고 jtbc든 어디든, 부디 이런 현실적인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 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by meditator 2015. 10. 25. 11:38

<두번 째 스무살>은 <내딸 서영이>로 kbs2 주말 드라마의 불패 아니 성공 신화를 만든 소현경 작품이다. 하지만 <내딸 서영이>를 그저 시청률 50%에 육박하는 시청률의 신화로만 설명해서는 부족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불륜과 위악이 판치는 주말 드라마 속에서 이른바 '착한 드라마'로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내딸 서영이> 이후 mbc에서 방영되었던 <투윅스>는 <내딸 서영이>의 히트 작가란 이름이 무색하게 고전하였고, 결국 소현경 작가의 차기작 <두번 째 스무살>은  tvn이란 케이블 장르로 귀결되었다. 




소현경 작가의 특기, 유예된 삶의 이야기
10월 17일 16부작으로 종영한 <두번 째 스무살>, 이 작품은 미처 고등학교조차 마치지 못한 채 한 아이의 엄마로,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란 이름으로만 살아온 하노라(최지우 분)가 본의 아니게(?) 대학에 들어가게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다. 극중 하노라는 서른 여덟의 나이에 벌써 대학 1년생의 아들을 준 아줌마이지만, 남편의 이혼 요구에 제대로 불만조차 표출하지 못하는 '자아' 상실형' 인간으로 등장한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지만 제대로 된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 어른들의 이야기, 바로 이것이 소현경 작가가 꾸준히 풀어내오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공통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발군의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2011년 5월 종영한 <49일>이라 할 수 있다. 방송 초반 모 가수의 팬픽과 유사하다는 표절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마지막 회에 이르러 어이없는 자매 설정에도 불구하고, <49일>은 드라마 사상 드물게 죽은 자가 주인공이 되어, 49일의 유예된 삶의 기간 동안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왜곡된 삶을 바로 잡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작품으로 인정받은 작품이다. 

그렇게 자신의 죽음 뒤에 비로소 49일의 유예를 얻어 자신의 뒤틀린 삶에 개입하는 <49일>의 여주인공 신지현처럼, <두번 째 스무살>의 하노라도 남편과의 이혼을 막기 위해 무작정 뛰어든 대학 생활 속에서 비로소 헝크러진 자신의 삶을 목격하게 된다. 방송 초반 하노라는 <49일>의 신지현처럼 불치병 해프닝을 통해 자신의 삶에 그다지 긴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긴박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불치병이 말 그대로 해프닝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계기로 하노라는 그저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누군가의 엄마인 채 자신이 묻어두었던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꺼내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자신은 서른 여덟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열여덟 남편을 만났던, 그리고 무용에 뜻을 두었던 그 시절에 정체되어 버린 아이 어른이었다. 그리고 대학에서 우연히 만난 그 시절의 친구, 하지만 하노라를 첫사랑으로, 그리고 자기 인생의 은인으로 생각했던 차현석(이상윤 분)의 도움으로 하노라는 비로소 열 여덟의 그 시간으로 부터 발을 내딛는다. 



어른으로 살고, 사랑하는 법에 대하여 
<두번 째 스무살>은 흔히 캠퍼스물처럼 학생 하노라와 교수 차현석은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서로 만나고 갈등하고 사랑을 가꾸어 나간다. 또한 여타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처럼 대학으로 간 하노라는 '회춘'의 모든 통과 의례를 수행한다. 수강 신청도 하고, 또래 대학생들과도 어울리고, 알바도 하고. 

하지만 소현경의 <두번째 스무살>은 그저 다시 대학으로 간 낭만을 만끽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저 그 시절 첫사랑을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루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남편의 이혼을 막기 위해 간 대학을 결국 스스로 나오듯이, 남편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대학을 선택했던 그녀가 남편의 내연녀에게 당당하게 남편을 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로,  짧은 대학 생활을 통해 어른으로 성장해 나간다. 거기에 15회 이혼을 하고 홀로서기를 하는 차현석에게 결별을 선언할 만큼, 하노라는 그 짧은 시간을 통해 비록 차현석의 도움을 얻었지만,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만을 하지 않는 자신의 삶에 용기를 얻어 나간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도 좋지만, 나도 소중한 진짜 어른 하노라가 된다. 

또한 <내딸 서영이>를 통해 불통인 어른 세대와 젊은 세대의 화해를 고민했던 소현경 작가는 <두번 째 스무살>에서도 그 문제 의식을 이어간다. 하노라가 간 대학은 그래서 그저 그녀가 생각했던 막연한 낭만과 꿈이 충만한 대학이 아니라, 죽도록 알바를 해도 등록금조차 빠듯한, 그래서 주판알을 튕겨보니 대학을 다니는게 별 의미가 없다는 판단을 서게 만들 정도로, 삼포 세대의 현실이 담긴 대학이다. 그리고 거기서 하노라는 몸만 어른인 채 아직은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서, 현실의 파고에 휩쓸린 청춘들과 조우한다. 의기충만하여 교수의 성추행에 반발해 보지만, 그 조차도 현실의 직업 구애에 고개를 숙여버린 선배, 동기들과의 갈등으로 이끌어 가는 에피소드들은, '어른'도 아이도 만만치 않은 2015년의 현실을 깊게 고심한다. 

그러나 용감하게도 작가는 삼포 세대의 현실에 그저 함께 고개를 수그리지 않는다. 그래서 막연하게 취직을 해야 해서 경영학과에 갔던 선배는 마지막에 공연 기획을 꿈꾸고, 학점의 노예였던 아들은 외국에 나가 일을 하며 자신을 단련시킨다. 그저 대학이란 공간에서 자신을 어른으로 성장시킨 것은 늦깍이 대학생 아줌마 하노라만이 아니라, <두번 째 스무살> 속 청춘들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던져져 어른들의 프레임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던 아이들은 조금씩 그 어른들의 프레임 밖으로 튕겨져 나와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함께 어른이 되어가며, 젊은이들과 덜 젊은이들은 서로 소통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차현석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도 중요하다는 하노라뿐만이 아니라, 오직 하노라 바라기였던 차현석은 첫사랑 하노라를 넘어 현실의 하노라를 사랑하게 된다. 자기애적 인격 장애의 안하무인 교수 남편도 조금은 성장한다. 입신양명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김우철(최원영 분)이 유배대로 유배를 가고, 다시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논문을 쓰고, 사랑을 얻기 위해 비열함을 마다않던 김이진(박효주 분)이 자신의 부도덕함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교수직을 사퇴하는 결론은 철부지들의 또 다른 어른이 되는 법이다. 

덕분에 많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극중 누구도 끝까지 나쁜 놈이 되지 않는 <두번 째 스무살>의 결론은 그래서 오히려 감동적이다. 불륜이 복수가 아니라, 나의 성장의 터전이 되는 그래서 당당하게 남편을 던져버리는 당당한 여성으로서의 성장은, 이것이야 말로 진짜 어른다운 복수가 아닐까 통쾌함마저 느껴진다. 길지 않은 16부작의 시간 동안 모두가 한뼘씩 자라,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그래서 보는 시청자마저 '어른스러워지게' 만드는 드라마, 역시나 소현경의 또 한편의 착한 드라마이다. 

그리고 그 착한 드라마를 어른스럽게 만든 것에는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인다. <겨울 연가> 이후 오래도록 고전하는 최지우는 서른 여덟 사랑스러운 하노라를 그녀의 새 이름으로 얻었다. 이상윤은 우재씨에 이어 또 한번 소현경의 남자임을 증명했다. 비열한 남편임에도 그의 연기로 인해 설득되고 싶은 최원영, 밉지 않는 내연녀의 박효주 역시 <두번째 스무살>의 공신이다. 

by meditator 2015. 10. 18. 15:36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4회 시청률이 5.2%(닐슨 코리아 기준)가 나왔다. 야구 중계 관계로 mbc의 <그녀는 예뻤다>가 결방한 가운데 3회가 7.1%나왔던 거에 비하면 폭락에 가까운 수치다. 하지만, 역시나 <그녀는 예뻤다>의 결방으로 12%까지 치솟았던 <객주-장사의 신> 역시 10%대로 내려 앉은 거나, 그 이전 1,2회 시청률이 5~6%였던 거로 보면, 그저 조금 낮아지거나, 그 수준을 유지한 것이라 평가하는 것이 맞겠다. 5~6%의 시청률, 그 결과만을 놓고 보면,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야 하는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하 마을)>의 낮은 시청률이 왜 당연한 것이냐고? 그것은 굳이 <마을>을 걸고 넘어질 것이 아니라, <마을>과 유사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시청률을 살펴보면 알 수 있겠다. 

8월 11일 종영한 kbs2의 <너를 기억해>는 최고 시청률이 5.3%였다. 콘텐츠 지수면에서 양호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방영 내내 이 드라마는 4~5%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좀 나은 편은 2014년 4월 종영한 <신의 선물>이다. 역시나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였던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이 10.6%를 기록했다. 하지만 역시나 대부분의 회차는 8~9% 정도 수준이었다. 

<마을>을 비롯한 <너를 기억해>, <신의 선물>과 같은 장르의 특징은 미스터리 스릴러로, 그저 틀어놓고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인 드라마가 아니라, 잠시 잠깐 한 눈을 팔면 중요한 힌트를 놓칠 수도 있는, 사건의 추이를 주의깊게 주목하고 그 이면의 것들을 추리해야 하는 생각하는 드라마들이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유괴 사건으로, 연쇄 살인으로 시작된다 한들, 결국 드라마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하며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들 드라마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마을>은 무섭다. 심지어 방영하는 시간 혼자 보기 힘들 정도로. 그런데 <마을>dl 무서운 이유는 그저 간간히 나타나는 죽었다던 김혜진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드는 의심, 그리고 그 의심을 뒷받침하는 시청자의 머릿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이 드라마를 무섭게 만든다. 실제 드라마 속 설정들은 그리 잔인하지 않다. 무섭지도 않다. 기껏해야 해골 쫌 나오고, 귀신인 듯한 여자가 창문에 매달리고 만다. 하지만 그보다는 비밀을 숨긴 사람들의 묘한 시선, 속을 알수 없는 사람들이 횡행하는 마을이 무섭다. 그들의 숨겨진 사연이 가진 폭발력이 두려운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하는 드라마' 라는 것이 현재 공중파 드라마에서는 '이질적'인 장르가 되었다는 것이 이들 드라마의 낮은 시청률의 한 원인이 된다. 즉, 스스로 '바보 상자'란 그 이름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공중파 드라마들은 시청률이란 이름으로 대중들이 가장 손쉽게 소비할 수 있는 장르에 몰입해오다 보니, 결국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하며 따라가야 하는 드라마는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편성에 따른 '광고'를 무시할 수 없고, 그래서 리모컨을 수호하는 중장년층의 구미에 맞는, 그들이 쉽게 '소비'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드는데 천착하다 보니 점점 더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을 한다는 것이 낯선 일이 되어가는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sbs의 월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묵직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드라마를 시작했지만, 역시나 시청률이라는, 그래서 대중들을 손쉽게 유혹할 수 있는 이야기꺼리를 위해, 미성년자 강간 장면을 여과없이 내보내고, 마치 무협 게임의 설정과, 일본 사무라이 검법을 우리의 검법인 양 잔뜩 버무려 무술의 내공으로 시청자를 현혹한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 이 높은 시청률의 전제가 되는, 리모컨을 쥐고 있는 중장년츠의 기호라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드라마, 자극적인 내용의 드라마'를 선호하는, 그들은, 결국 우리나라의 '생각하지 않는 중장년층'으로 귀결된다. '생각없는 세대'를 위한, '생각하지 않는 드라마', 그 속에서 새로운 시도는 점점 고갈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생각없는 세대를 위한 생각없는 드라마는 역으로 이렇게 생각없는 사회를 조장하는 중이다.



생각하는 드라마, 그렇다면 무엇을 생각할까?
생각없는 세대를 위한, 생각하지 않는 드라마, 이 정언은 궤변과도 같다. 그저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에 대한 호불호가 갈린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말 드라마, 혹은 아침 드라마, 그리고 이제는 그런 드라마를 흉내내는 주중 미니 시리즈에 등장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적을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자신과 똑같이 의식 불명 상태의 환자로 만들어 버리는 설정. '복수'라는 미명아래 자신의 자식마저 외면하고, 혹은 자신의 자식을 이용하여 누군가를 위해하는 설정들은, 오히려 웬만한 미스터리 스릴러의 내용들을 능가한다. 설정의 호불호, 혹은 자극성을 가지고 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대부분 미스터리 스릴러물이 추구하는 주제 의식이 대중들의 입맛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너를 기억해>도, <신의 선물>도, 그리고 이제 <마을>도 모두, 결국 그 끝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에의 반추, 반성, 그리고 징벌이다. 여타 드라마들이, 욕망에 대한 징벌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 왜곡된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상쇄하는 반면, 대부분의 미스터리 스릴러들은, 인간의 욕망이 저질러 놓은 범죄로 시작하여, 그 헛된 욕망의 헛헛한, 혹은 무자비한 결말로 시청자를 이끈다. '성공'과 '밝은 미래'와 '화목'을 이야기하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꺼림찍한 것이 시청자들의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이제 4회에 이른 <마을>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수상하다. 이제 4회에 불과하지만, 등장인물들은 주연이고, 조연이고 할 것없이 저마다, 자신의 욕망으로 인한 숨기고 싶은 과거를 가진 인물들인 듯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마을을 관광 특구로 만들기 위해 살인 사건마저 덮으려는 도의원 서창권(정성모 분), 하지만 그가 살인 사건을 덮으려는 데는, 의문의 실종자 김혜진이란 인물과의 석연찮은 인연때문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가영이란 여고생이 자신의 어머니와 서창권의 사진에 집착하듯, 혹은 서창권의 아내 윤지숙의 '서창권의 여자 관계때문이라면 마을 모든 여자들을 적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처럼 과연 이 마을에는 서창권의 아이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의 삿된 욕망은 마을의 실종 사건의 배경으로 검게 피어오른다. 하지만 권력을 지닌 서창권만이 아니다. 그에게 전화 한 통화로 미술 선생을 정직원으로 만들 수 있는 그의 처제처럼,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욕망으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른 김혜진 실종 사건에 직간접적 관련자들인 듯 보인다. 심지어 파출소 한경사(김민재 분)마저 예외가 아니다. 

사망으로 처리된 자신의 과거를 찾아 마을로 찾아온 한소윤(문근영 분), 그녀가 찾아낸 죽지 않았다던 언니 한소정, 하지만 죽지 않았다던 언니는 자신의 친언니가 아니었고, 입양된 언니는 사고 후 살아남았지만, 소윤의 외할머니의 외면으로 보육원에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어렵사리 찾아낸 고모로부터, 아버지조차 친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렇게, 회를 거듭하며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는 사건들은 어른들의 부도덕함이다. 그리고 그런 어른들의 부도덕함으로 덮인 마을의 비밀에 유나, 가영 등 철모르는 아이들이 덤벼든다. 문근영이 분한 한소정 역시, 여전히 앳된 그녀의 모습처럼, 여섯 살의 나이에 사고를 당한 그 시점에 머물러 있는 어른 아이이다. 즉, 부도덕의 세계에 세례를 받지 않은 그래서, 면죄부를 가진 아이들이, 부도덕한 어른들의 세계에 메스를 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을은 단막극 <늪>으로 몬테카를로 tv 페스티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도현정 작가의 작품이다. 남편의 불륜을 궁극으로 자신의 처절한 죽음을 통해 복수를 가했던 처연한 <늪>의 주제 의식은, 일반적인 드라마의 '복수'화법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복수'도 하고, 나는 나대로 승승장구 해야 하는 요즘 시절, 과연 <마을>속 욕망의 노예가 되어 과거를 덮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결말을 이끌런지, 부디 시청률이 낮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지 말고 자신의 몸을 던져 남편을 징죄하던 <늪>처럼 오래도록 기억되는 드라마가 되길 바란다. 어차피 욕망을 반성하는 미스터리 스릴러에 내일은 없다. 

by meditator 2015. 10. 16. 15:18

대안학교를 다니다 뒤늦게 입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아들의 수능을 앞둔 친구는 기존의 교육 제도의 통과 의례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친구에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그토록 비합리적이라 비판했던 수능이 그나마 자신의 실력으로 자신을 입증하고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기회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고 만다. 그러나 그 조차도 어쩌면 거짓이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좋은 환경에서 남들과 다른 교육적 혜택을 풍요롭게 받은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과의 경쟁은 애초에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육룍이 나르샤>이 이른바 음서 '고려와 조선 시대,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나 지위가 높은 관리의 자손을 과거를 치르지 아니하고 관리로 채용하던 제도) 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던 고려 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것은 '시의적'이다. 그래서 무신 길태미의 아들이 성균관에서 펄펄 날뛰는 음서가 당연시되고, 이인임, 길태미로 대변되는 권문세가들의 권력이 횡행하는 그 시대는 사극의 한 장면이지만, 그대로 현실로 오버랩된다. 그리고, 그 혼란의 고려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망해가는 나라 속에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정의'는 그대로 이 드라마가 현실에 부르짖고 싶은 간절한 외침으로 전해져 온다. 



혼란의 고려 말, 인간은 저 마다 자신의 바닥을 확인한다. 
'난세'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어지러운 세상이란? <육룡이 나르샤>는 그것을 '인간이 자신의 바닥을,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시대'라고 말하는 듯 하다. 태평치세라면 그저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 세상의 이치대로 흘러가면 되는 것을,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저 마다 시험에 들고, 삶의 위기에 몰린 채, 자신이 결국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확인하게 만들고 만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영웅도 탄생하고, 비겁자도, 배신자도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이제 2회에 이른 드라마는 말한다. 

애초에 kbs의 대하사극 <정도전>과 비슷한 시기에 기획되었던, 하지만 <정도전>의 편성으로 방송사가 바뀌고, 시기가 미루어 진채 2015년에 돌아온 <육룡이 나르샤>는 <정도전>과 같은 시기를 다룬다. 하지만, kbs의 사극 <정도전>이 역사를 정공법으로 해석해 들어갔던 사실화에 가깝다면, <육룡이 나르샤>는 마치 피카소의 인물화처럼 같은 시대를 여러 각도의 다른 층위를 가지고 접근한다.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 속 인물이 그 미묘한 층위를 통해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듯, <육룡이 나르샤>도 드라마 속 다양한 군상의 인물들을 통해 혼란기 속에 드러난 인간의 본질을 논한다. 

그래서 북방의 장수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고려 말의 지도자로 등극한 이성계(유동근 분)는 <정도전>에서 마지막까지 왕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조의 신하로서 그 충심을 거스르지 않는 지극히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되었다면, <육룡이 나르샤>의 첫 번째 용 이성계(천호진 분)는 첫 회에 그의 숨겨진 치부를 드러내고 만다. 즉 쌍성총관부를 다스리던 조소생을 배신하고 고려군에 투항해 성문을 열었던,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의 과거가 이성계로 하여금 고려말 도당에 진입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장벽을 만든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선'과 '악'의 선문답같은 이인임(최종원 분)과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남다름 분)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을 이룬 시조 이성계가 위인전의 시나리오와 달리 이미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도덕의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잔트가르'(최고의 사내)'라 부르며 흠모하던 아들 이방원은 진짜 잔트가르를 찾아 헤맨다. 

그가 발견한 아버지와 다른 잔트가르는 정도전(김명민 분), <육룡이 나르샤>의 정도전과 <정도전>의 정도전은 그 정의의 방향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정도전>의 정도전이 시대와 불협화음을 내며 성장하는 캐릭터라면, <육룡이 나르샤>의 정도전은 좀 더 노회하게 시대를 짚어보며 전략가의 기지를 갖춘 캐릭터랄까. 그렇게 이인임 앞에서 고개를 숙인 이성계 대신 이인임을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정도전을 따라 이방원은 성균관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정도전과 그를 따르는 신진 사대부들의 길을 쫓는다. 하지만 결국 정도전은 원나라와의 수교를 하려던 이인임의 술수는 막았지만 고문을 당하고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었고, 성균관에 남은 이방원은 불법 서적 '맹자'를 읽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유교, 특히 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마에 새길 신세가 될 뻔한다. 



정의, 하지만 난세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다. 
<육룡이 나르샤>는 <정도전>과 비교가 되지만 오히려 극의 구성 면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미드 <왕좌의 게임>을 연상케 한다. 시청자들이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줄 수 없는, 왕좌를 향한 피비린내나는 욕망이 진동했던 '게임'과도 같은 처절한 권력의 드라마를 향해 <육룡이 나르샤>는 달려간다. 

도당의 일원이 되고자 하지만 자신의 부도덕성에 발목이 잡힌 이성계, 고고한 정의를 향한 의지는 갈급하지만, 그의 뜻을 펼칠 광장은 허락되지 않은 정도전, 그리고, '잔투가르'가 되기를 갈구하지만, 결국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자들의 목숨을 거두고 시작되는 현실적 정의의 이방원까지, 조선을 향한 대의에 힘을 모을 이들의 서로 다른 '정의'의 첫발을 드라마는 그린다. 

주인공들만이 아니다. 오히려 2회에 이르는 동안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려 제일검이라며, 경박하고, 또 경박하고, 경박하기 그지 이를데 없는 길태미의 캐릭터이다. 자신의 욕망에 너무도 솔직한, 그러면서도 자신의 권력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길태미의 캐릭터는 <정도전>의 이인임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대한민국의 속물 갑의 본질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시청자의 친근한 주목을 끈다. 거기에, 1회에서 정도전의 가장 가까운 벗으로 그와 함께 정의의 길에 나섰다가, 2회에 이르러 길태미의 사돈으로 변신하는 홍인방(전노민 분) 역시 그의 말대로, 위기 속에서 변절하고 마는, 이 땅의 그 누군가들을 연상케 한다. 

드라마 속 대사가 투박하게 '선과 악'의 변증법을 논하고, '정의'를 내세우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위기 속에서 저마다 자신을 확인한다. 누군가는 변함없는 권력에의 의지로, 그리고 또 누군가는 정의로운가 싶었던 자신의 속된 본질을, 그리고 또 누군가는 선하고 싶지만, 도덕적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내걸고도 여전히 자신의 뜻을 향한 멀고먼 길을 확인하고 마는, 그리고 또 누군가는, 정의보다 가까운 피를 확인하며 저마다의 '정의'를 써내려간다. 그렇게 실존적인 인물들의 이합집산을 통해 드라마는 추상적 정의가 아닌, 역사 속에서 펄펄 살아 움직이는, 그래서 인간적으로 고민해 볼만한 '정의'를 논하기 시작한다. 


이제 2회에 이른 <육룡이 나르샤>의 만듬새는 그다지 매끄럽지 않다. 장면은 들쭉날쭉하고, 인물들의 캐릭터에 집중은 쉽지 않다. 그런가 하면 대사는 사변적이고 어렵다. 그리고 그 핑계의 몫은 상당 부분 피디인 신경수에게 돌려진다. 그런데 신경수 피디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바로 2014년 세상이 바른 리더의 자질을 소리높여 갈구할 때, 부도덕한 대통령(손현준 분)이 젊은 세대의 대변자같은 경호원(박유천 분)과 함께 자신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했던 이야기를 다룬 <쓰리데이즈>가 그것이다. 희망을 기대할 수 없었던 세월호의 시대, 강직하게 '정의'를 이야기하고, 지도자와, 젊은이가 함께 미래를 기약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어수선했던 연출력에도 불구하고 신경수 피디의 우직한 주제 의식에의 천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여전히 그 어수선함은 쉬이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육룡이 나르샤>가 그 본래의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서 결코 곁가지로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부디 세월호의 시대보다 더 나쁜 시대가 있을까 라는 탄식이 실현되고 있는 2015년, 다시 우리에게 '정의'를 향한 희망을 길어줄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 주길 기대해 본다. 기왕이면, 간지나는 연출의 업그레이드도 함께. 

by meditator 2015. 10. 13. 15:48

남편의 불륜으로 인해 상처받은 두 여성이 있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이혼을 했으며, 동시에 삶에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거나, 시작했다. 그런데 이 두 여성들에게 남자가 다가온다. 그리고 그 남자를 보며 가슴이 뛴다. 이 사람과 다시 사랑을 해도 될까? 그런데 그녀에게 찾아온 두 번 째 사랑이 전적으로 반갑지만은 않다. 




<두번 째 스무살> -하노라의 이혼=성인식, 그리고 두번 째 사랑의 딜레마 
tvn의 금토 드라마 <두번 째 스무 살>의 여주인공 하노라(최지우 분)는 이제 겨우 서른 여덟 살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벌써 대학에 입학한 아들이 있고, 대학 교수인 아들이 있다. 그건 그녀가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채 아들 민수(김민재 분)를 가진 채 홀로 할머니를 남겨두고 남편을 따라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하노라의 선택으로 인해, 이제 서른 여덟이 된 하노라는 남편에게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이혼을 당할 처지에 놓였고, 역시 대학 새내기인 아들은 매사에 '엄마는 몰라도 돼!'라며 무시한다. 청천벽력같은 남편의 이혼 선고에 어떻게든 시간을 되돌리려 한 하노라는 남편, 아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대학을 가고자 했고, 해프닝 끝에 입학한 우천대 인문학부 새내기 생활은 그녀에게 전과 다른 세상을 선물했다. 

그 결과 이제 하노라는 오히려 당당하게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애'적 성격 장애를 가진 남편 김우철(최원영 분)과의 만남을 '그의 탓'이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라 담담하게 정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말 한 마디 섞지 않는 아들에게 '이혼'을 이해받고 위로받는 처지가 되었다. 무엇보다 김우철을 만나 멈춰버린 하노라의 십대는 그녀가 우천대 새내기로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비로소 '어른'으로서의 시작으로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김우철을 만난 그 시간 이래로 정체되어 있던 하노라의 시간이 다시 흐르게 된 데에는 대학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자 첫사랑 차현석(이상윤 분)의 도움이 크다. 하노라를 만나자마자 벌컥 화부터 낸, 말도 없이 사라져 할머니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은 첫사랑 하노라로 인한 상처를 가진 차현석은 불치병 해프닝을 거치며 하노라의 곁에서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도와준다. 그러면서 그의 가슴이 그 예전처럼 다시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이혼을 하고 홀로서기를 시작한 하노라의 가슴도 차현석을 보며 두근거린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버겁다. 이런 하노라, 차현석과 다시 사랑해도 될까?

<두번 째 스무살>의 소개글에서는 이 드라마가 분명 '캠퍼스 로맨스 드라마'라고 정의내려져 있다. 하지만, 막상 가슴이 뛰기 시작한 하노라를 보면서 복잡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노라가 김우철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한 것은 다친 그녀의 발을 치료해 주는 '아빠같은'그의 등때문이었다. 그리고 단지 김우철이 '아빠같은' 모습을 보인 것이 그때가 마지막이었던 것이 하노라-김우철 커플의 슬픈 운명이었다. 그렇게 '아빠같은' 남자를 선택하려 했지만 실패한 하노라, 그렇다면 이제 진짜 '아빠같은' 남자 차현석을 만나 행복하면 될까?

극중 차현석의 캐릭터는 말 그대로 '아빠같은' 키다리 아저씨이다. 제일 잘 나가는 연극 연출가임에도 그의 모든 일상의 촉각은 오로지 하노라를 향해 있다. 그래서 하노라가 어려운 고비마다 그는 '슈퍼맨'처럼 나타나 척척 해결해 주곤 한다. 그리고 하노라는 그의 도움을 받아, 김우철 앞에서 말 조차도 어려워하던 무기력한 서른 여덟의 주부에서, 왕따를 극복하고, 동기들의 사랑을 받는 늦깍이 대학생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 비로소 '어른'으로 시간을 열어가는데, 여기서 차현석과의 해피엔딩이라면, 그녀는 김우철 '아빠' 에서, 차현석 '키다리 아저씨'로 말만 갈아탄 셈이 되는 건 아닐까? 

물론 '어른'으로서의 홀로서기가 꼭 누군가와 사랑을 배제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김우철이란 존재의 그늘에서 숨죽여 살아온 하노라가, 이제 비로소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두번 째 스무살>에서, 차현석과의 사랑은, 예측되는 해피엔딩이면서도, 한편에서, '어른되기'를 극중 화두로 삼았던 드라마의 내용으로서는 불협화음을 낸다. 부디 이런 '의존'으로서의 사랑을 승화시켜 하노라의 홀로서기를 훼손시키지 않는 진정한 사랑으로 마무리되길 기대해 본다. 



<애인 있어요>-독고용기가 된 도해강에게 찾아온 사랑, 그런데 그 사람이 전 남편?
그래도 다시 찾아온 첫사랑의 <두번 째 스무살>은 나은 편이다. <애인있어요>의 독고 용기가 된 도해강에게 찾아온 사랑은 설상가상이다. 

천년 제약의 며느리로, 그리고 변호사로 천년 제약의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했던 도해강(, 하지만 어린 딸이 그녀의 사건 피해자로 인해 죽임을 당하자 그녀의 남편이자 천년 제약의 아들인 최진언(지진희 분)은 그런 그녀에게 정내미가 떨어져 한다. 그리고 그런 최진언의 마음은 결국 그를 불륜으로 이끌고. 결국 도해강은 최진언과 이혼을 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천년제약의 모든 직위를 잃는 처지에 빠지게 된다. 그나마 시아버지의 배려로 중국으로 떠나던 날, 쌍둥이 독고용기로 오인을 받아 사고를 당하고 그녀를 구한 백석(이규한 분)덕분에 '독고 용기'가 되어 살아간다. 

그렇게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백석에 의해 독고 용기로 살기위해 애쓰는, 그러면서 최진언의 바램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을 찾고, 그 예전 악덕 변호사 대신, 정의로운 사무장이 되어 살아가는 독고용기인 도해강 앞에, 귀국한 최진언이 우연히 나타난다. 그리고 백석의 의동생 설리(박한별 분)의 남자 친구로 엮이게 된 두 사람, 기억을 잃은 4년 동안 오로지 도해강 바라기로 사랑을 고백해온 백석, 이제 결혼만을 앞둔 설리를 두고, 도해강과 최진언의 가슴은 다시 뛴다. 

도해강과 최진언, 죽은 딸이 좋아했던 음악 앞에서 가슴이 떨리는, 감정의 데시벨이 일치하는 두 사람, 하지만 그저 이혼을 했던 전 남편과 기억을 잃은 전 아내라는 순애보의 조건 외에, 두사람의 애정을 가로막는 장벽은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 이제 4년이 흘러 독고용기가 된 도해강이 그 예전 최진언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도해강의 감정을 고스란히 상기하여 다시 가슴이 뛴다 하지만, 이렇게 기억조차 잃은 채 독고용기로 살아가야 하는 도해강의 굴곡진 삶에 최진언의 전과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그건 비단 최진언이 저지른 불륜만이 아니다. 오히려 불륜을 빙자하여 아내 도해강으로부터 도망가려 했던 비겁한 동반자 최진언이 그 핵심이다. 그리고 도해강과 최진언의 부부 관계를 넘어서, 도해강과 독고용기를 불행에 빠뜨린 원인을 제공한 최진언의 아버지의 부도덕, 그리고 도해강이 공범자이자 결국 피해자가 되어버린, 그리고 독고 용기는 그로 인해 남편까지 잃게 된 천년 제약이란 재벌 기업의 부도덕이 이 두 사람의 다시 불붙은 사랑의 배후에 어둡게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불붙은 두 사람의 사랑은, 금기였던 도해강의 존재를 망각 속으로 부터 불러오고, 결국 금기였던 천년 제약의 모든 부조리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결국 독고용기가 된 도해강과 최진언의 사랑은, 금단의 열매와도 같다. 그리고 성서 속 무책임의 캐릭터 이브처럼, 최진언은 그저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금단의 열매에 손을 댄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댓가는 앞서 설리와의 불륜 이상 처절하게 그와 그의 집안을 무너뜨려 갈 것이다. 



이혼 뒤에 두 여자에게 찾아온 사랑은 트렌드의 드라마답다. 하지만, 녹록치 않다. <두번 째 스무살>의 사랑은 키다리 아저씨의 환타지를 넘어, 이제 막 성인식을 치룬 하노라의 홀로서기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애인있어요>는 사랑이, 이 드라마가 드려놓은 큰 그림, 부도덕을 먹이로 성장한 재벌 기업의 파멸을 향한 도미노의 첫 스타트가 될 것이다. 그래서 <두번 째 스무살>과 <애인 있어요>가 그저 뻔한 사랑 이야기만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랑은 달콤하다. 심지어, 한때는 불륜남이었던 최진언이 다시 설레일 만큼, 하노라의 홀로서기는 기대되지만, 차현석이란 백마탄 왕자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도 어쩔 수 없다. 과연 이 딜레마를 잘 극복하고, 좋은(?) 드라마로 기억될런지, 남은 숙제가 만만치 않다. 
by meditator 2015. 10. 12. 16:32

<용팔이>의 후속으로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하 마을)>이 첫 선을 보였다. 20%를 육박하던 전작의 후광은 아랑곳없이 첫 회를 선보인 <마을>은 단번에 <그녀는 예뻤다>, <객주>에 뒤를 이은 꼴찌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환영받지 못하는 '미스터리 스릴러'인 <마을>은 아마도 앞으로도 '로코',와 '사극'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장르를 뛰어넘기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점, 공중파에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미스터리 스릴러 <마을>, 그것이 이 드라마의 묘미이자, 장점이다. 




마을의 비밀, 장소가 주인공이 된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은 흡사 니콜 키드먼이 출연했던 2003년의 영화 <도그빌>을 연상케 한다. 로키 산맥의 평화로운 마을, 거기에 의문의 여인 '니콜 키드먼'이 등장한다. 마을은 아름다운 그녀로 인해 술렁이기 시작하고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러나 정작 이 영화의 제목이 '도그빌'인 것처럼, 영화가 그려내고자 한 것은 여주인공 니콜 키드먼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드러나는 '도그빌'이란 마을의 숨겨진 모습이다. 

그렇게 영화 <도그빌>처럼 <마을-아치아라의 비밀>도 우리말이지만, 생소한 '아치아라'라는 지명의 마을을 내세운다. 어린 시절 온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마저도 '죽은 이'로 만든 '아치아라'로 향하는 젊은 여교사 한소윤(문근영 분)으로 드라마는 시작된다. 

하지만 비오는 날 연쇄 살인범의 사건 소식을 들으며, 호두를 문지르는 소리에 쫓겨 거리를 달리는 한소윤으로 시작된 드라마는 그녀가 도착한 아치아라가 그곳 사람들 말처럼 '가족같은' 곳이 아님을 감지시킨다. 그리고 장면은 바뀌어 이제는 마을의 유지가 된 마을 출신의 지역구 도의원이자, 한소윤이 일하게 된 해원 재단의 주인인 서창권(정성모 분)과 윤지숙(신은경 분)의 내연녀를 둘러싼 갈등이 보여진다. 윤지숙은 자신의 딸이 몰래 지켜보는 가운데 서창권의 내연녀랑 머리끄댕이를 잡고 '육박전'을 벌인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해원 중학교 원어민 영어 교사가 된 한소윤, 하지만 '작은 연못'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커다란 호수를 품은 마을은 온통 수상한 모습들 투성이다. 그녀의 방 맞은 편에 '신당'을 연상케 하는 이웃집 여인에서 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는 의문의 남자, 그리고 그런 수상한 모습 끝에 그녀는 폭우가 내린 얼마 후 따라나선 사생대회에서 범죄라고는 없었던 이 마을의 유일한 오점, 사라진 여선생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을 부르는 듯 모습을 드러낸 시체의 앙상한 모습에 혼이 나가고, 아이들이 붙인 '시체샘'이라는 별명에 혼란에 빠진 한소윤을 한편으로 한채, 첫 회 드라마가 드러낸 것은, 시체의 발견과 함께 반응을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수상한 모습이다. 마치 모두가 공범자인 양, 그 시체와 관련된 범행을 아는 양, 석연치 않은 모습을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면면에서, <마을>의 실질적 주인공은 한소윤이 아니라, 어쩌면 아치아라라는 마을 그 자체일 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흘리며 드라마는 열린다. 거기에 미술 교사의 '아치아라에 빠져 그 누구도 이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그 심증에 의혹을 더한다. 



서로 다른 결의 추리가 주는 재미
앞서 니콜 키드먼의 <도그빌>을 예를 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김은희-장항준 콤비의 <위기일발 풍년 빌라>가 '저주받은 역작'으로 불리워지듯이 생소한 장르이다. 하지만, 미드, 특히나 영드에서는 이렇게 장소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가 가장 인기있는 장르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닥터 후>로 인기를 끌었던 데이비드 터넌트가 형사로 등장한 영국에서는 인기리에 방영되어 시즌 2가 제작된 <브로드 처치(broadchurch)> 역시 조용한 마을에서 발생한 어린 아이의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입소문을 끌고 있는 < 포티튜드(fortitude)> 역시 북극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다룬다. <왓 리메인즈(whatremains)> 역시 한 건물과 거기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이다. 

이렇게 '장소'가 주인공이 된 미스터리 스릴러들은 <마을>처럼 하나의 사건, 주로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숨겨진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고, 거기에 그저 평범하고 착한 것처럼 보여지는 인간 군상의 숨겨진 비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물론 그 전개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 비인간성의 폭로의 매개가 '종교'가 될 수도 있고, '바이러스'가 될 수도 있고, '이기적인 육친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든 평화로움과 이웃이라는 집단애에 숨겨진 인간의 또 다른 이면을 폭로하는 한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렇게 인간의 숨겨진 이면을 그린다는 점에서 벌써, 폭로와 반성보다는 환타지와 복수에 익숙한 우리나라 시청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장르라는 점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점에서 <마을>은 더더욱 시도되고, 웰 메이드의 좋은 선례로 남겨져야 할 '사명'이 있는 드라마가 된다. 기왕에, 막장식의 몇몇 재벌 치정극으로 재미를 본 sbs가 이쯤에선 그간의 오명을 씻을 조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 마을에서 벌어진 여느 장소를 배경으로 한 미스테리 스릴러의 공식을 순조롭게 따라나선 <마을>은 하지만 이미 첫 회 '마을의 진실'을 향한 추리의 갈래는 다양하게 갈라지며 볼 재미를 선사한다. 

단적으로 발견된 시체는 누구일까? 드라마 초반 복병처럼 등장한 윤지숙과 젊은 여선생의 육박전에서 보여지듯 한소윤의 방에서 사라진 여선생일까? 왜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공범자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과연 '시체샘'이라 불리게 된 법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한소윤의 정체는 무엇일까? 마을, 그것도 아치아라에 사로잡혀 귀신이 된 채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했다는 미술 교사 말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마을>은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심령극까지 다양한 갈래의 상상력을 추동한다. 과연 첫 회만으로 사고를 풍성하게 만든 ,마을>이 시청자들의 뒷통수를 '갈기며' 추리의 묘미를 더해갈 것인지, 그것이 바로 장소 스릴러 <마을>의 관건이 된다. 
by meditator 2015. 10. 8. 13:20

노처녀 영애씨의 일과 사랑을 다룬 <막돼먹은 영애씨>가 10월 5일 시즌 14를 완주했다. 시즌 14, 대한민국 드라마계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대세이던 2007년 '다큐멘터리' 형식에 '드라마'를 가미한 새로운 시도로 작은 간판 회사에서 후덕한 외모에 대한 세상의 편견에 맞서 '막돼먹게' 대들며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던 영애씨가 드디어 그녀의 꿈이었던 '이영애 디자인'의 사장이 되며 시즌 14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어디 시즌14뿐인가, 시즌14의 마지막, 양 손의 떡처럼 양 팔에 두 남자 김산호(김산호 분)와 이승준(이승준 분)을 안은 영애씨의 네버엔딩 러브스토리처럼, 당연히 시즌 15가 예정되어 있다. 





낙원사의 사장이었던 이승준의 무모한 중국 투자로 인해 새로운 사장 조덕제(조덕제 분)가 등장하며 영애씨는 졸지에 정리 해고 대상자로 길거리에 내몰리고 만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 영애씨는 그간 꿈꾸어왔던 자신의 회사를 차리기에 이르렀는데.....

'사장'이 된 영애씨, 하지만
그렇게 이제 '을'의 처지에서, '갑'으로 등극한 영애씨, 하지만 불황에 시달리고, 또 다른 '갑'의 횡포에 무너져 내리는 이땅의 500만을 넘는 자영업자의 현실은 고스란히 <막돼먹은 영애씨> 속 '이영애 디자인' 사장 영애씨의 현실이 된다.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해 함께 고생하자 의기투합했던 라미란(라미란 분)이 영애씨를 배신한 채 낙원사로 돌아가고, 심지어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 일식집 알바까지 감수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린다. '알바'를 하지 않는다고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일감을 얻기 위해 접대는 물론, 떡볶기 심부름까지 불사해야 하고, 결혼까지 갔던 산호에게 일감을 구걸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을 거리로 내친 낙원사에 들어가 새 사장의 갖은 굴욕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간판집 직원에서, 낙원사 디자이너, 그리고 '이영애 디자인' 사장으로 영애씨의 직함은 시즌을 거듭하며 업그레이드 되었고, 그녀의 직위만 보자면 분명 '사회적 상승'에 불과한데, 막상 시즌의 회차를 채우는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 '을'로 '밥벌이의 지겨움, 궁색함'을 감수해야 하는, 그래서 보통 시민들의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 

덕분에 자신이 당한 '차별대우'와 부당함은 반드시 어떻게든 되갚아 주고야 말았던 영애씨의 '막돼먹음'은 이제는 월급도 제대로 못주는 직원들 때문에 한결 완화되고 만다. 예전갚으면 열번은 더 뒤짚었을 판을, 그래도 어떻게든 '하청' 한번 따보겠다며, 그래서 직원들 월급이라도 주겠다며 눈을 질끈 감는다. 덕분에, <막돼먹은 영애씨>의 주된 매력 중 하나였던 그 '막돼먹음'이 시즌 14에 들어와 그저 조미료처럼 가끔씩 등장한 반면, 밥벌이의 애환은 깊어졌다. 사랑했던 이의 앞에서 알바를 하다 들켜 넘어져 생선과 씨름을 하느라 치욕을 겪어도, 결국 다시 그 알바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어느새 '가장'이 되어버린 영애씨가 된 것이다. 

덕분에 비록 그녀의 '막돼먹음'의 통쾌함은 누그러졌지만, 그녀의 깊어지는 삶의 애환이 여전히 우리네 이웃의 그 누군인가같은 영애씨의 정체성을 공감케한다. 

영애씨의 사랑, 드라마의 동력이자, 딜레마
대신 '갑'이 되었지만 여전히 '을'인 자영업자 영애씨의 고달픈 삶의 행간을 채운 것은 그 어떤 멜로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했던 그녀의 사랑이다. 

시즌 13을 거쳐 이제 서로 반지를 나누며 고백만을 남겨두었던 작은 사장 이승준과의 사랑, 하지만 그 사랑은 시즌14초반 낙원사를 거덜내버린 이승준의 사업 실패로 유보되고 만다. 낙원사 사장에서 낙원사 직원이 되어버린 이승준, 존재의 초라함을 이겨내지 못한 이승준의 찌질함이, 그리고 그 낙원사에서 조차 쫓겨나버린 영애씨의 현실이 두 사람 사랑의 장벽이 된다. 

그런가 하면 결혼까지 약속했다가 혼수 문제로 결별을 한 산호가 등장한다. 같은 건물에 사무실이 있어 오가며 마주치던 산호는 위기에 빠진 이영애 디자인을 구원해준 구세주로 영애씨의 애정 전선에 막강한 존재로 복귀한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돌아온 산호의 변함없는 애정과, 사랑하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가로막힌 승준의 '중2병적' 애증으로 채워져 간다. 이렇게 두 남자의 과분한 사랑을 받는 웬만한 멜로 드라마 여주인공 저리가라할 처지의 영애씨, 하지만 정작 <막돼먹은 영애씨>의 멜로를 채운 것은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해 산호에게 일감을 부탁하는 영애씨, 자존심을 접은 채 낙원사 하청으로 들어온 영애씨에게 자기 자존심을 어쩌지 못해 막무가내의 행동을 벌이는 승준처럼, 현실의 삶이다. 드라마의 틀은 삼각관계이지만, 여느 드라마와 달리, 그 삼각관계의 변수가 되는 것은 이영애라는 노처녀 자영업자의 현실인 것이, <막돼먹은 영애씨>가 여느 드라마와 다른 것이다. 



노처녀 영애씨가 <막돼먹은 영애씨>의 대표적 캐릭터인 만큼, 이렇게 삼각관계에 얼크러진 영애씨의 애정 전선은 시즌 14에서 결론을 내지 않는다. 여느 멜로 드라마라면 드라마 자체가 '도루묵'이었겠지만, 시즌 15를 앞둔 <막돼먹은 영애씨>의 결론은 다르다. 숱한 남성들과의 애정 행각에도 불구하고, '자신'이라는 중심으로 돌아오곤 했던 영애씨는 시즌14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전한 호의를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산호로 인해 흔드렸던 그녀는 오히려 그런 관계를 통해, 이전의 혼수로 인해 파토난 결혼의 앙금을 지워내었고, 모든 사람이 말리는 이승준과의 관계에서 자기 확신을 더했다. 물론 그럼에도 관계는 그녀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지만, 숱한 '산호지지파'와, '승준 지지파'의 열화와 같은 원성에도 불구하고, 그저 시즌15의 러브 라인을 위해서가 아닌, 인간 영애로 흔들렸던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는 시즌14는,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영애씨 다웠다. 누군가와 짝짓기의 성공이 아니라, 언제라도 그랬듯, 자기 확신과 자기 결정에 충실한 영애씨였으니까. '제작진의 밀땅'이란 원성에도 불구하고, 영애씨는 그래야 영애씨다운거니까. 



하지만 시즌14의 아쉬움도 남는다. 리얼리티 다큐의 장점을 한껏 살린, 이영애 디자인의 사장이 되어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 갖은 수모를 견뎌내는 영애씨의 고군분투에 대한민국 자영업자의 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되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기위기마다 그녀에게 구원의 동앗줄을 내려준 것은, 첫 일감을 준 산호에, 이제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이영애를 '갑'으로 등극시켜준 이승준처럼 여느 로맨틱코미디처럼 '남자들'이 한 몫했다는 점이다. 비록 애정 전선에서는 한껏 두 남자와 얼키더라도, 사업만은 자신의 힘으로 우뚝 서는 영애씨를 기대했다면 지나친 '환타지'였을까? 그런 면에서 현실을 한껏 살리면서도, 결국은 '로코'의 틀에 천착해버린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4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아쉬움은 아쉬움일뿐, 그 어떤 드라마보다 맛깔난 연기로 매회를 채워주는 영애씨를 비롯한 '소름끼치게' 찌질한 작은 사장, 화룡점정 라미란에서 단역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새로이 등장한 악역 조덕제 사장이 신스틸러가 되어버린 영애씨 출연진의 '막돼먹지' 않은 중독성있는 연기가 벌써 그립다. 
by meditator 2015. 10. 6. 15:06

8월 30일부터 9월 9일까지 방영되었던 ebs의 다큐 프라임은 <한국인의 집단 심리 WE>를 통해 우리의 집단 문화를 진단해 본다. 그 중 1, 2편은 PD인 오정호씨에 의해 책으로도 발간된 홍보, PR, 프로파간다의 매커니즘을 다룬 <대중 유혹의 기술>이다. 그  대중 유혹의 기술 세번 째 명제, '그들의 귀에 드라마를 집어 넣어라'는 태국의 드라마와 현실의 맞물림을 분석한다. 


2013년 태국 범죄 중 성폭행, 강간과 관련된 범죄가 3만건을 육박했다. 하지만 신고된 범죄 중 10% 정도가 조사를 받았고, 그 중 2000 명만이 검거가 되는게 태국의 현실이다. 왜 이렇게 성과 관련된 범죄는 만연한 반면, 그와 관련된 단속이나, 단죄는 허술한 것일까? 이에 대해 <대중 유혹의 기술>은 태국 드라마의 경향성을 예로 든다. 태국 드라마 내용 중 연인간 말다툼이나 데이트 폭력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드라마는 이를 낭만적 연애의 한 과정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이는 9시도 안된 시간 태국의 어린이들까지 보는 시간대에 높은 시청률로 인기를 끈다. 태국의 여성 단체들은 이런 드라마 속 성적 내용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만, 시청률에 투항한 제작진들은 아이들과 함께 보는 이 시간의 성폭행에 가까운 내용을 포기하지 못한다. 심지어 2008년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서 데이트 강간이 드라마 중 가장 선호하는 장면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태국 드라마의 내용, 그리고 시청자의 선호도, 그리고 시청률을 미끼로 이를 양산하는 제작진, 그리고 높은 성폭행 범죄율을 통해 다큐는 드라마 속 내용과 현실의 상관 관계를 설파하고자 한다. 



태국엔 성폭행 드라마, 우리나라엔 막장 드라마 
태국의 성폭행 드라마와 우리네 드라마가 무슨 상관이냐고? 태국에 데이트 폭력을 다룬 드라마가 만연한다면, 우리네 드라마에는 외국어로도 번역되지 않고 고유 명사로 쓰이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있다. 아침 드라마로부터 시작되어, 주말로 번지고, 이제 시청률이 변변치 않자 주중 미니 시리즈에까지, '막장'의 막강한 영향력은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중이다. 

<왔다 장보리>를 통해 악역 연민정을 연기한 배우 이유리에게 연기대상을 안겼던 김순옥 작가는 '역시 김순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신작 <내딸 금사월>을 주말의 스테디 셀러로 등극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런가 하면, <상류 사회>, <가면>에 이어 <용팔이>는 재벌 집안을 배경으로 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막장 스토리로 SBS 드라마에 시청률 1위의 보상을 안겨주고 있는 중이다. 

갱도의 마지막 부분을 뜻하는 막장이 드라마로 오면 시청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연성과 설득력을 제친 채 자극적인 설정의 반복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드라마의 한 장르가 된다. 거기에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들엔 몇 가지 특징이 더해진다. 

우선 드라마의 전반적 코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복수'이다. 최근 종영한 <여자를 울려>의 경우에서도 보여지듯이 시청률이 좀 안나온다 싶으면 드라마는 그중 '복수'의 코드'를 강화시키고 애초에 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궤도도 변경시킨 채, 극중 주연의 비중조차 변경시키는 것이 이제는 한국 드라마에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내딸 금사월>에서 신득예 역을 맡은 전인화는 <전설의 마녀>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 복수를 위해 칼을 갈며 남편과 자식까지도 이용하는 집요한 집념의 캐릭터로 다시 한번 등장하여 <내딸 금사월>의 동력을 추동한다. 남편으로 인해 망한 친정, 그리고 잃어버린 첫사랑을 되갚기 위해 자신이 낳은 딸도 보육원에 버려둔 채 본래의 얼굴을 숨기며 복수를 위한 칼을 간다. 그런가 하면 <용팔이>는 재벌가의 경영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의붓 동생을 의도적으로 뇌사 상태에 빠뜨린 철면피한 오빠가 등장한다. 그리고 의로운 의사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 여동생은 경영권도 되찾고 자신을 의식 불명 상태로 빠드린 인물들에게 '복수'를 한다. 

사이코패스를 향한 복수를 종용하는 드라마 
이렇게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막장' 드라마의 주된 동력은 '복수'이다. 자신을 가해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보복, <용팔이>의 한여진이 냉정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인물들에게 복수를 하고, 신득예가 자신의 가문을 파멸로 빠뜨린 사람들을 향해 케이크 독살 사건과 같은 술수를 부릴 때 시청자들은 통쾌해 한다. 과연, 이런 '보복성' 드라마의 설정은 우리 사회에 최근 급증하고 있는 묻지마 증오 범죄와 무관할까? <미세스 캅> 마지막 회, 강태유(손병호 분)를 죽이겠다고 다짐했던 강력팀 반장 최영진(김희애 분)는 결국 그 다짐을 실천한다. 물론 드라마는 칼을 뽑아든 강태유를 향한 최영진의 정당방위로 처리했지만, 이제 드라마도,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시청자도  더 이상 강태유같은 사람을 법의 심판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좀 더 끔찍하게 잔인하게 가혹하게 복수를 할 것인가, 새롭게 등장하는 '막장 ' 드라마들은 저마다 기묘한 방법을 강구한다. 

그리고 또 하나 막장 드라마의 새로운 특징으로 등장한 것은 악의 주구가 '사이코패스'스러워 졌다는 것이다. 극중 복수의 대상은 '인간'이라 치부할 수 없는 파렴치한 인간 말종들이다. 도덕적 기준 따위는 저버린 지 오래, 수치심, 죄책감 따위도 들어설 여지가 없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인물들이 드라마 속에 넘쳐난다. <용팔이>의 한도준(조현재 분)은 마치 중2병 인물처럼 여동생을 두고 아버지로 부터 받은 차별을 내재화시켜 도덕심 따위는 말아먹은 파렴치범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파렴치범에 대한 동생의 복수는 모든 경제적 특권을 빼앗긴 채 자신과 똑같이 13층의 병실에 의식 불명 상태가 되어 눕히는 것이다. <내딸 금사월>은 부모대의 애증 관계가 고스란히 아이들대로 이어진다. 심지어 강만후(손창민 분)는 자신이 목숨을 빼앗으려 했던 가해자임에도 오민호(박상원 분)의 아이와 자신의 아이가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내보일 정도이다. 도덕적 가치 따위는 버린지 오래, 전도된 감정과 가치관들이 드라마를 통해 '악'의 이름으로 마구 분출된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이런 '정상'을 벗어난 사이코패스적인 악행의 당사자들, 대부분 극중 부도덕하게 부를 축적하여 선한 이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인물들에 대해 '현실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만나는 미디어를 통해 만나는 가진 자들의 맨 얼굴이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휠체어를 타고 등장해 조롱거리가 되었던 재벌은 곧 드라마의 주된 설정이 되고, 자식의 아들을 위해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돈을 던져 준 재벌 에피소나, 땅콩 나부랭이에 갑질을 했던 해프닝은 드라마를 자극적이란 수식어에서 구해준다. 

이런 반인격적 장애를 가진 나쁜 놈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시청자들은 이렇게 현실을 베낀듯 나쁜 사이코패스적 악인들을 향한 착한 사람들의 마지못한(?) 보복 범죄에 카다르시스를 느끼며 응원한다. 나쁜 놈들은 '반인격적 장애'를 가진 파렴치범을 상대하는 방법은 이기에,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하고, 복수하는 대상이 될 뿐이다. 맞써 싸우는 방식은 그들처럼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복수'이다. '싸움'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고, 보복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통쾌하고 시원해질 수록, 현실에서 싸울 방법은 요원해진다. 왜냐하면 시청자들은 신의 손을 가진 대번에 재벌가의 딸이 반할 의사도 아니요, 그렇다고 눈만 뜨면 대번에 경제력을 회복할 재벌가의 딸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의 싸울 대상은 여전히 전지전능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매료된 '막장'은 보는 동안은 시원하고 통쾌하지만, 보고나면 한결 더 허무해지는 이유가 그때문이다. '막장'식의 복수에 길들여지다 보니, <어셈블리>의 '당신이 외면하는 정치'를 향한 진득한 외침은 그저 시시해 보일 뿐이다. 그저 통쾌한 맛에 보고, 즐기면 그뿐이라고 하지만, 그 '막장'에 중독되어 조롱하고 대리만족 하는 동안, 어쩌면 우리는 '막장'의 세상에 무감각해지고, 무기력져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싸우는 방법조차 잃는다. 그저 기억나는 것이곤, 보복, 복수, 현실의 범죄는 이걸 증명한다. 재밌어서 보는 드라마, 시청자들이 즐겨 찾아서 만드는 드라마가 낳은 결과이다. 

by meditator 2015. 10. 1. 14:53

언제나 명절이 그렇듯, 민족의 대명절 추석을 맞이하여 떠들썩한 잔치 한 마당이 벌어졌다. 저마다 '추석 특집'이라는 이름표를 하나 더 붙이고, 다른 때보다 더 화려하게, 더 시끌벅적하게 판을 벌인 각종 프로그램들이 그것이요, 명절을 빌미로 슬쩍 끼어들여 시청자의 구미를 한번 당겨보는 새롭게 런칭해보려는 프로그램들이 그것이다. 2015년의 트렌들에 맞게 누군가는 '노래'를 가지고, 또 누군가는 '음식'을 가지고 명절로 인해 들뜬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명절이 들썩거리고 시끌벅적하기만 한 건가, 누군가 한데 어울려 놀면, 그 무리에 끼지 못한 채 외로움이 깊어지는 사람들이 있을 터이고, 누군가 가족을 만나면,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서러움은 깊어질 것이다. 굳이 어떤 사건을 떠올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보름달이 휘엉청 밝은 이 초가을의 명절은 누군가에게 기쁨과 번접함이라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슬픔과 사무침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잔치판에 몰두하는 미디어는 화려한 특집을 마련하기에 골몰하는데, 그런 와중에 독특한 드라마 한 편이 찾아왔다. '추석 특집극'이라는 명패를 달았는데, 제목이 무려,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이다. 추석에 장례식이라니! 허긴, 추석이 뭔가, 돌아가신 조상을 햇 곡식으로 기리는 날인데, '판타스틱한 장례식'이 굳이 안 어울릴 건 없는 거다. 




죽기 전에 치뤄보는 장례식
생로병사, 이 평범한 네 글자의 문구가 '자본주의'라는 제도화된 사회에 진입하면 복잡해 진다. 일전에 친지의 장례식을 겪으며 느낀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죽음에도 돈이 필요하구나 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돈이 있는데 가족이 없다면, 그 또한 죽는 자에겐 난감한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어느 곳엔 가족이 찾아가지 않은, 혹은 가족이 돈이 없어 버려진 이른마 '무연고자'들의 무덤이 있다.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의 주인공은 바로 그렇게 무연고자의 처지에 몰린 장미수(경수진 분)이다. 뇌종양 판정을 받은 장미수, 병실 동기의 붉은색 드레스 코드가 있는 깜찍한(?) 장례식에 참석한 그녀는 그녀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죽음 걱정에 눌린다. 그도 그럴 것이 산업 현장에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어릴 적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보호자연했지만 남보다 못한 고모로 인해,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장례식 걱정이나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심지어 모처럼 만난 첫 애인조차도 그녀가 조만간 죽을 것을 알고 그녀의 돈을 노리며 달려드니, 장미수가 그 누구를 믿고 세상을 떠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은 흔히 드라마가 다루는 시한부 생명을 가진 환자의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한다. 그리고 '추석'이라는 혹은 '명절'이라는 이름 만으로 마치 모두가 가족과 함께 어우러져 지낼 것만 같은 이 시기에,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의 장미수처럼 세상에는 아빠는 돌아가시고, 엄마는 집을 나가고, 친척은 그저 내 돈만 관심이 있는, 외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명절'은 커녕, '죽음'이라는 통과 의례 조차도 '가족'이 없으면 외로움을 배가시키고,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다는 것을 '추석 특집' 드라마는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즉, 이 지극히 '가족 중심', 그리고 '가족'이 아니고서는 걷어주는 그 누구도 없는 매정한 사회 속, 홀로 죽어가는 이의 죽음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는 젊은 남녀가 등장하는 드라마답게, 무연고 죽음에 몰릴 장미수에게, 첫사랑이었던 박동수(최우식 분)이 등장하는 환타지가 일어난다. 고등학교 때 전교 1등 장미수를 좋아한다며 무작정 전학까지 왔던 박동수, 하지만 어느 날 사라졌던 그가, 기적처럼 장미수 네 아파트 벽 페이트공으로 장미수네 창문 밖에 대롱대롱 매달려 등장한다. 그리고, 청소년 시절처럼 '너만 보면 염통이 아파'라며 다시 장미수에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죽음을 알고 나서도, 죽을 때가지 나랑 놀다 가라며.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에 등장한 백마 탄 왕자는 '염통이 아픈' 순진남 박동수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드라마의 잘 나가는 실장님보다도 더 멋지다. 이제 죽음을 앞둔 장미수에겐 돈도, 그 어느 것도 필요 없고, 마지막 순간을 맞을 그녀의 보호자가 필요할 뿐인데, 그가 바로 딱 그 역할인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순간에 걸맞은 백마 탄 왕자를 만난 장미수는 덕분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쫓기지 않고, 죽음의 통과 의례를 순탄하게 맞이한다. 

죽을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냉소적으로 말하던 그녀는 박동수 덕분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그래서 죽음을 서러워하고, 아쉬워하며 갈 여유(?)를 가진다. 그리고 그 누구도 돌아봐조지 않을 죽음에 두려워하는 대신에, 사랑하는 이의 마중을 받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미리 작별을 고하는 '판타스틱한 장례식'까지 참석하기에 이른다. 



죽을 사람이 미리 참석하는 '판타스틱한 장례식', 이 아이러니한 드라마의 설정은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명절'이라는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가족 중심'적인가를, '가족'의 아웃 사이들에 대해 얼마나 무방비하고, 매정한 가를, 그리고, '판타스틱한 장례식'을 통해 그래도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고 그렇게 보낼 수 있는 친지들은 얼마나 행복한가를 역설적으로 깨닫게 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준비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내는 그래서 명절이 더 서러운 사람들이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것이다. 

마치 강요라도 하듯이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강요하는 듯한 추석 명절에,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은 신선한 볼거리였다. 모두가 들썩일 때 더 외로워지는 사람은, 이게 아닌데, 이렇게 웃고 떠들 때가 아닌데 라며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볼만한, 물론 죽음의 순간에도 왕자님이 찾아온 이야기는 환타지이지만, 그 행간을 넘어 여러 생각해 볼 거리를 남겨준 작품이다. 다만 죽음을 앞둔 장미수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기에 심장 이식을 거부한 순애보 왕자 박동수의 숨겨진 이야기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by meditator 2015. 9. 27. 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