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표절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신경숙 작가는 2008년 <엄마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지하철에서 놓쳐버린 치매끼 있는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희생해온 모성에 대한 애도와 헌사가 작품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은 아버지 세대에 대한 헌사를 다루었던 <국제시장>처럼 당대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심지어 외국에 번역까지 되어 한국의 대표적 문학 작품으로 알려졌다. 


<국제 시장>의 아버지, 그리고 <엄마를 부탁해>의 어머니가 여전히 환호와 칭송을 받는 것은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며 이 시대를 뒷받침해온 부성과 모성에의 경의이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 이런 작품들이 여전히 당대의 '베스트 셀러'가 되는 것에 당혹감을 주는 것은, 그 세대가 결과한 현재에 대한 반성 없음에 대한 아쉬움과,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부성'과, '모성'이 존재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현실감때문이기도 하다. <국제 시장>을 경유하여, <가시 고기>로 좌초한 '부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여전히 내려지지 않은 채, 모성 역시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엄마를 부탁해>를 쉬이 넘어서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8월 21일 밤 조용히 찾아온 단막극 한 편에, 이 시대에 새롭게 생각해 볼 '모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 



우리 시대의 모성이란?
<알젠타를 찾아서>는 자신의 키보다 몇 배자 더 긴 장대를 들고 질주하는  장대높이 뛰기 선수 승희(이수경 분)의 땀방울과 좌절로 시작된다. 대한 체대 4학년, 눈부신 우승 성적과 기록을 뒤로 하고 대학에 들어온 오래 승희는 한번도 좋은 성과를 거둔 적이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학교 때부터 수술을 받기 시작한 그녀의 무릎은 운동선수로서의 그녀의 앞길을 막는다. 육상 연맹의 간부인 아버지는 압박하고, 그저 장대높이 뛰기만을 하며 줄기차게 달려왔던 그녀에겐 운동 이외의 삶은 생소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다시 한번 좋은 성적으로 국가 대표가 되고자 하는 승희, 하지만 그녀의 몸과 기록은 그것을 받쳐주지 못하고, 결국 금지된 약물에의 유혹까지 받는다. 

승희가 은밀하게 약물까지 거래하려던 것을 알아챈 아버지, 자신이라도 나서서 딸의 코치가 되겠다던 아버지는 한때 한국 육상계의 스타였고, 세계 무대에서 활약했던 강진아가 시청 코치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승희를 그녀에게 맡기고자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강진아가 승희를 낳은 엄마이기 때문이다. 

강진아를 찾아간 아버지는 그저 엄마이기 때문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매몰차게 거절하는 강진아에게, 승희가 약물에 손을 대려 했다는 사실을 전하며 매달린다. 마지 못해 승희를 받아들인 코치, 그리고 사실은 엄마 강진아. 

<알젠타를 찾아서>의 친엄마 강진아는 한 마디로 '나쁜 년'이다. 국가 대표 유망주였던 그녀가 자신의 코치였던 승희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까지 하자 더 이상 국내에선 선수로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강진아는 한 살 배기 승희 대신, 자신의 운동을 택했다. 자신이 죽었다고 하라며 어거지로 어린 딸을 지금의 승희 의붓 엄마인 팀 후배에게 맡기고 강진아는 외국 행을 택한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엄마와는 전혀 다른 삶으로서의 엄마이다. 어떻게 어린 딸을 버리냐는 후배의 말에 강진아는 말한다. 이렇게 승희의 엄마로서 한국에 주저앉아 버린다면, 평생 지금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살 것이라고. 강진아는 그래서 후회하는 삶대신, 딸을 버리더라도,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극중 제목으로 등장한 알젠타는 600만년 전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던 전설적인 새 아르젠타비스 마그니피센스를 뜻한다. 키가 2미터 양쪽 날개 끝까지까지의 길이가 8키터에 달하는 이 새는 몸이 너무 무거워 스스로 하늘을 날지 못해, 행글라이더처럼 언덕을 달려 바람을 이용해 하늘을 날았다고 전한다. 그 전설적인 새 아르젠타비스는, <알젠타를 찾아서>의 극중 어린 딸로 인해 육상 선수로 재도약할 수 없는 엄마 강진아를 상징한다. 그래서 엄마 강진아는 자신의 무거운 날개인 어린 딸을 버리는 것으로 도약에 성공한다. 극중 엄마가 가진 날개, 그리고 딸에게 남겨진 새의 목걸이는 '성공'을 위해 분리된 '모녀' 사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드라마는 자식마저 버린 나쁜 엄마 강진아를 그저 나쁜 엄마 대신,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한 엄마 이전에 한 사람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국가 대표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운동 선수 승희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결국 이해한다. 극중 강진아는 심장 판막이 다 망가져 수술 시기를 놓친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딸을 보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올 용기를 낸 것으로 그려진다. 비록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가 승희에게 남긴 상자에서 보여지듯이 한시도 딸 승희를 잊지 않았음 또한 보여준다. 그리고 엄마 강진아는 자신을 희생하여 딸을 기르는 대신, 이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슬럼프에 빠진 승희에게 길을 제시하고 떠난다. 

비록 아이를 '케어'하지 않지만, 결국 아이가 스스로 설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엄마, 그것은 그간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지향해온 모성상에 전적으로 위배된다. 오히려 <알젠타를 찾아서>의 엄마는 우리가 보았던 서구 영화의 아버지 상에 더 부합된다. 아이를 돌보지는 않았지만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부성, 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변화된 모성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나날이 증가되어 가는 일하는 엄마들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제시할 수 있는 방향일 수도 있다. 더 이상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자신을 희생하며 살 수 없는 엄마들의 세대, 그 엄마들에게 여전히 <엄마를 부탁해>가 모성의 이상향으로 그려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케어는 할수 없지만, 삶의 본보기와 가능성을 열어주는 새로운 모성상으로서의 <알젠타를 찾아서>의 엄마 강진아가 비록 극단적이지만, 이 시대 생각해볼 모성상의 가능성이다. 그런 면에서 <알젠타>를 찾아서는 그저 승희의 인간 승리가 아니라, 이 시대 새로운 모성상의 구현에서 생각해 볼 만한 드라마가 되었다. 
by meditator 2015. 8. 22. 15:33

좀비, 백과 사전적 정의로는 아이티에서 유래된 부두교에서 등장하는 살아있는 시체,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미디어 속 좀비는 전염병과 생물 병기에 의해 감염되어 파멸된 존재, 그래서 생각없이 생물적 본능과 반사 행동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그려진다.  좀비는 이제 시즌 6에 돌입하고 있는 미드 <워킹 데드> 시리즈를 정점으로, 스릴러 물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그를 통해 자본주의 발전의 그림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산업 사회의 노동력으로, 혹은 상업적 소비 문화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징적 존재로 등장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좀비'를 가장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는 장르는 웹툰을 중심으로 한 에니메이션 장르이다. '좀비'나 '뱀파이어'는 이은재의 <1호선>, 강풀의 <당신의 모든 순간> , 그리고 최근 드라마화 하고 있는 <밤을 걷는 선비> 등을 통하여 '스릴러'에서부터 '로맨스'까지 다양한 장르로 소비되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로 오면 여전히 이들은 생소하며 이질적인 장르이다. 드라마화한 <밤을 걷는 선비>를 필두로  <오렌지 마말레이드> 등 여러 드라마들이 '뱀파이어'를 극중 주요 제재로 활요하고자 하지만, 여전히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좀비'는 더하다. 아예 공중파이건, 케이블이건, '살아있는 시체'는 한 발을 들이미는 것조차 버겁다. 

그런 가운데 8월 14일 방영된 <드라마 스페셜 2015>의 세번 째 작품으로 좀비물이 등장했다. <라이트 쇼크>가 그것이다. 



드라마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좀비물'<라이브 토크>
<라이브 토크>의 이야기는 전형적이다. 권력과 손을 잡는 다국적 제약 회사의 실험 과정 문제로 '좀비'가 발생한다. 제약 회사는 '좀비' 실험 참가자들을 죽여없애려고 하지만, 그 중 한 명의 실험 참가자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채 살아남아, 생방송인 <금요 토론> 방송에 난입한다. 조종실에 들어가 인질들을 잡은 채 생방송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참혹한 진실을 알리려고 했던 실험 참가자(장세현 분), 하지만 약물로 잠시 잠재웠던 그의 '좀비' 증상이 다시 나타나고, 그런 그에 의해 습격당한 방송국 관계자들은 '좀비'가 되기 시작하고, 그 파급력은 거침없이 방송국을 집어 삼킨다. 

그런 '좀비' 쇼크의 와중에 놓인 알바 사이트의 대표로서 생방송에 참가했던 은범(백성현 분)과 그 여동생 은별(김지영 분), 그리고 풋내기 방송 기자 수현(여민주 분)는 생과 사의 갈림김, 그리고 제약 회사의 숨겨진 비리와 희생된 사람들 사이에 휩쓸려 들어간다. 

거대 다국적 제약 회사의 숨겨진 음모, 그리고 거기에 결탁한 국회의원, 그리고 '좀비' 실험인줄도 모르고 '많은 알바비'에 '희희낙락'하며 찾아든 순진한 학생들, 그리고 은범과 은별 남매의 애끓는 혈육의 연, 거기에 신참 기자의 사명감까지, 한 편의 단막극이 설정할 수 있는, 그리고 이런 종류의 장르물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라이브 토크> 한 편에 수요되었다. 

하지만 익숙하고도 뻔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남짓의 단막극 <라이브 토크>는 땀이 채 식기도 전에 후딱 지나가 버릴 정도로 '스릴'에 넘쳤다. 

알바 희생자였던 '좀비' 실험의 희생자가 다국적 제약 회사의 비리를 알릴 장소로 선택한 '방송국', 그리고 생방송 토론은,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풀어나갈 가장 절묘한 장소가 되었다. 마치 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방송국과 생방송이라는 장소와 설정을 절묘하게 풀어가는 것처럼, <라이브 쇼크> 역시 생방송에 진입한 좀비, 그리고, 방송국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번져가는 좀비 바이러스라는 설정을 '방송국'이라는 지형지물을 기막히게 이용하여 풀어낸다. 

알리고자 하는 희생자, 하지만 알리게 놔두어서는 안되는 권력 측은 '방송'을 매개로 힘겨루기를 하고, 결국, 마지막 한 신참 기자와, 책임감을 가진 한 시민의 정의감은, 통제된 방송을 넘어, '인터넷'이라는 또 다른 매체를 통해 '진실'을 알린다는 결론은, '통제'된 현대 사회의 단면과 허상을 적절하게 설득해 낸다. 

거기에 도시 한 가운데 있지만, 철문 셔터를 내리고 나면, 무법 천지가 되어버리는 거대한 방송국 건물은 그 자체로 '스릴러'가 된다. 그 어둠의 공간이 되어버린 방송국, 그 높은 빌딩의 복도와 복도, 그리고 나선형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밀실과도 같은 제작 현장들 사이로 좀비와 인간, 그리고 잡으려는 자와, 잡히지 않으려는 자의 숨막히게 벌어지는 레이스는, 충분히 늦여름의 더위를 식히고도 남았다. 



물론 얼굴에 돋아오른 수포 분장과, 구체 관절 인형처럼 꺽어져 버린 좀비들은, 등장한 첫 순간에는 좀 어설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드라마 스페셜>의 제작비로 따지자면, 이 정도면 '블록버스터' 급 일 것이다. 그런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좀비'들의 출현을 상쇄시킨 아니, 극복한 것은 출연자들의 연기이다. 대부분 어디선가 얼굴을 한번 본듯한, 아니, 그 조차도 아닌 단역의 출연자들은 '혼신'의 좀비 연기를 선보이며 방송국을 질주하여, <라이크 쇼크>에 <워킹 데드>급의 공포를 안긴다. 높은 제작비와, 그에 따른 엄청난 물량의 미드의 공포물을, 방송국이라는 유리한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단역 연기자들의 투혼으로 상응한 공포물을 만든 것이다.

덕분에, <라이브 쇼크>는 뻔한 듯 이어지는 스토리, 예정된 결말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리모컨을 이동할 수 없는 한 시간을 선사했다. 마지막 순간의 반전이라는 옵션까지 더해. 드라마에서 쉽게 선택할 수 없었던 이질적 장르물로서의 '좀비'물은, 가장 약소한 물적,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드라마 스페셜>의 존재감을 한껏 뽐냈다. 이 정도라면, 비록 매주 시간을 잃은 대신, 가끔씩 찾아드는 <드라마 스페셜>을 기다릴만한 이유로 충분하다. 

by meditator 2015. 8. 15. 16:43

sbs의 수목 드라마 <용팔이>가 4회만에 14.9%의 시청률을 보이며 놀라운 시청률 상승을 보이고 있다. 그런 반면, 이제 10회를 맞이할 <어셈블리>는 여전히 5%대의 시청률을 보이며 지지부진한 모습이다. 


하지만 <어셈블리>의 시청률을 들여다 보면, 용접공 신분으로(정확하게 신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용접공은 드라마 상에서 진상필을 대우하는 동료 국회의원들의 태도만 봐도 '신분' 맞다) 감히 여당 국회의원이 된 지 몇 달 만에 정치 생명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진상필(정재영 분)처럼, 한 회 4%대였다가, 한 회 5%대였다가 역시나 롤러코스터를 타는 중이다. 또한 재미있는 게, 그저 백도현(장현성 분)의 선거용 이용물로 여당에 들어왔다가 조금씩 '정치인'으로 성장해 나가는 진상필처럼 들쑥날쑥하면서 야곰야곰 시청률도 성장하여, 이제는 6%를 바라보고 있는 것 역시 <어셈블리>와 같다. 



리얼 인듯, 환타지스런 정치인 진상필
<어셈블리>란 드라마는 현실적이다. 백도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정치 이야기, 자신의 지역구에 등장한 대통령 후보군의 인물 때문에, 은밀하게 새로이 물색한 후보 지역구에, 총알 받이로 노조위원장 출신의 진상필을 공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국회에 들어온 신참 국회의원이 자신의 색깔을 드러냈다가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여당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 저격수를 마다하지 않는 과정,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셈법에 따라 다시 한번 내처지는 과정은 '실록'처럼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의 맨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반면 애초에 용접공 출신 노조 위원장이 여당 국회의원이 된다는 설정에서 부터 '환타지'스러웠던 설정은, 롤러코스터와 같은 역정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초심을 놓치지 않는 인간 진상필이 벌이는 정치 행보, 그 자체가 <어셈블리> 자체를 더욱 환타지 스럽게 만든다. 

여당이라면 무조건 당선은 따논 당상인 경제시에서, 백도현 사무총장의 추천으로 진상필은 국회의원이 된다. 비록 그 과정에서 그와 함께 노조를 이끌어 오던 배달수(손병호 분)의 희생은 있었지만, 그래서 더 진상필은 국회로 가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그와 함께 하게 된 애초에 경제시의 국회의원 내정자였지만, 진상필의 출현으로 졸지에 그의 보좌관이 된 최인경(송윤아 분)가 있다. 

이 두 사람은 최인경은 진상필더러 모가 아니면 도라고 다그치며 좀 더 정치적인 모습을 보이라 힐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닮았다. 무기력한 노조 대신 정치를 선택했던 행보, 그리고 다음 공천을 위해 여당 저격수를 마다하지 않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추진력에도 불구하고, 형과 같은 배달수와 함께 했던 그 초심을 놓치지 않고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진상필이 있다. 그리고  가장 믿었던 선배 백도현의 부탁으로 진상필을 돕게 되었지만, 이제 그 백도현의 정치적 술수에 휘말려 희생양이 되어가는 진상필을 위해, 자신의 계보와도 같은 백도현을 등지기로 결심한 최인경의 행보 역시 '낭만적일 만큼' 인간적이다. 최인경의 '동지'라는 무색하지 않게, 진상필과 최인경은 인간이기를 쉽게 마다하는 '정치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얼굴을 포기하지 않는 정치'의 동지들이다. 

드라마 중 김규환(옥택연 분)의 존재는 사족이다. 배달수의 아들로 등장하는 아버지의 죽음을 오해하고,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진상필에게 접근하여 칼을 간다. 드라마 속 진상필의 진심을 의심하는 그의 존재는 정치인 진상필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굳이 등장할 필요가 없는 그 존재를 통해 매회 진상필이란 정치인의 진심을 의심하고, 따져보고, 건드려 보며 그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어셈블리>의 행보는 더디다. 



정치 혐오주의 세태 속에서 인간적 정치란?
왜 굳이 속시원한 진상필의 활약 대신 그때문에 죽었다는 오명을 쉽사리 벗기 힘든 형과 같은 동지의 아들을 등장시켜 진상필을 의심하게 만들까. 
그것은 진상필로 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회에 팽배하여 있는 '정치 혐오주의'때문이다. 

그 언제부터인가 이제는 그 시기조차 알 수 없게, 우리 사회엔 정치는 더럽고 나쁜 것이란 '정치 혐오주의'가 팽배하여 있다. 물론 국회의사당에 모인 사람들은 맨날 말만 많고, 심지어 서로 싸움박질만 하고 제대로 해내는 것은 없다. 아니, 제대로 해내는 것이 있기는 하다. 자기 논에 물대기처럼 국민들이 뽑아주었다는 처지를 망각한 채, 자기들 개인의 이익, 그리고 차기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자기 지역구 이익에는 앞장을 선다. 그리고 이런 국회의원들의 변할 줄 모르는 행태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뿌리깊은 혐오'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가 뿌리깊으면 뿌리깊을 수록, 사실 '노가 나는' 것은 국민들의 외면을 받은 정치인들이다. 국민들이 더럽다고 손가락질 하면 할수록, 그 손가락질 받은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협잡을 하고, 자신들끼리 해먹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사람들의 외면을 받은 현실 정치 혐오주의에서, '인간적 정치'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불가피하게 '인간적'인 그 면을 설득해 내기 위해 <어셈블리>는 지지부진 갈짓자를 달려왔다. 끊임없이 사족같은 동지의 아들을 통해 진상필을 의심하고, 심지어 동지였던 최인경조차 서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9회 어떻게 하면 진상필을 끌어내릴까 노리던 김규환이 진상필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판국에도 최인경을 보호하고 싶은 그의 진심이 적이었던 김규환을 돌려 세웠다. 그리고 그와 함께 최인경도 돌아왔다. 

그리하여 여전히 낭만주의적일 정도로 순수한 정치적 이상주의자 최인경과, 노조 출신의 초심을 놓치지 않은 진상필은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의 길에 본격적으로 나서고자 한다. 그 길을 구불구불하고 에돌아 왔지만, 대신 '인간'에 대한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어셈블리>를 지켜보는 시청자들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에 대한 희망을 건져보게 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5. 8. 13. 18:20

<너를 기억해>는 매회 작은 제목을 내걸었다. 15회에 내걸은 제목은 '해피엔딩은 가능할까? 였다. 


대부분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 특히나 스릴러물, 그 중에서도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 중 하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생명을 앗아가는 범죄자들이 통렬한 댓가를 치르는 것이다. 아마도 스릴러 물의 해피엔딩이란 바로 그런 것이리라. 그런 면에서 <너를 기억해>는 매우 찝찝한 드라마이다. 결국 악의 최종 근원이었던 이준영, 혹은 이준호(최준영 분)은 결국 잡히지 않았으니까. 16부라는 길고 긴(?) 회차를 통해 이준영을 잡기 위해 발버둥치던 두 주인공 이현(서인국 분)과 차지안(장나라 분)는 처음과 다르지 않게 끝까지 이준영을 잡겠다며 의지를 다짐하고 드라마는 마무리된다. 도대체 이 드라마는 그렇다면 16부작 동안 뭘 한 거지? 이런 뜨뜨미지근한 결론 답게 드라마는 마지막 회까지 5.1%(닐슨 코리아 기준)로 별다른 반동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렇다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망드'의 대열에 합류한 것일까?



어른들이 저지레해놓은 세상에 던져진 아이들.
하지만 <너를 기억해>의 미덕은 분명하고도 통쾌한 결론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아니다. 누군가를 대놓고 벌주고 잡아넣고 하는 식의 단죄는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너를 기억해>가 내린 결론은 명확하다. 

<너를 기억해>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아이들'이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아이들, 아이들이란 말은 곧, 아직 성장하지 않아서, 어른들이 만든 세상을 뚫고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내지 못한 존재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른들이 만든 세상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절대 악으로 등장한 이준영이 그렇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 철이 들기 까지 방안에 갇혀서, 문자만을 상대하며, 우리든 갇힌 동물처럼 학대받으며 자라나던 아이, 그의 존재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어른들에 대한 복수와, 자신처럼 학대받는 아이들에 대한 동포애'로 정의내려진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타고난 뛰어난 두뇌와 학습된 지적 능력을 기반으로 실천해 나간다. 

그리고 악의 사도 이준영에 의해 부모를 잃은 아이들, 이준영의 유일한 어린 시절 친구는 이준영에게 말한다. 니가 누군가를 생각하면, 언제나 일이 잘못된다고. 그도 그럴 것이, 이준영은 자신처럼 학대받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그들을 학대했던 것으로 간주한 부모들을 살해하고, 자신이 대신 그들의 보호자연 했으니까. 그렇게 '이준영의 아이들'은 앨범을 가들채울 정도로 채워져 나갔다. 그는 이준영의 범죄 외에, 그렇게 이준영의 범죄를 기인하는 어른들의 부조리한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준영이 포악한 범죄자인줄 알면서도 이용하는 현지수(임지은 분)나, 강은혁의 아버지 경찰청 부청장같은 인물들이 존재힌다. 

드라마는 직설적으로 드라마 속 어른들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비유하지는 않지만,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마음대로 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이용하며, 자신들의 잘못이 밝혀진 이후에도 사죄를 하기는 커녕 덮으려고 전전긍긍하는 그 모습들에서 충분이 작가가 현재의 기성 세대를 상징하고자 함을 읽어 낼 수 있다.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방법
그렇다면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 던져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이준영은 악의 사도가 되어 그런 부조리한 어른들을 사적으로 징벌하고, 아이들을 구원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구원(?) 방식은 뜻하지 않게(?) 아이들에게 부모를 잃게 만들고, 형제간의 생이별을 하게 만든다. 

이현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고, 동생을 사라지게 만든 이준영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이준영에게 폭력을 가했지만, 그의 도피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딸 차지안 역시 복수를 지향한다. 그리고 이준영의 거짓말로 인해 형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정선호는 제 2의 이준영이 되어 나쁜 사람들을 사적으로 징벌하는 사이코패스가 되었으며 형을 최후의 목표로 설정하고 쫓는다. 그리고 경찰청 부청장의 아들로 유학까지 다녀온 강은혁(이천희 분)은 그저 자부심이 넘치는 수사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준영으로 인해, 그리고 정선호가 저지른 범죄로 인해 서로 얽혀 들어가며 과거의 사건과, 진실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서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나쁜 것이 무엇인지, 나쁜 것의 단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복수는 정당한 것인지, 벌을 받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너를 기억해>의 16부는 속시원한 사건 해결 대신 사건에 휘말린 이들이 던진 수많은 물음표로 채워진다. 

어떻게 보면 이준영과 이현은 다르지 않다. 물론 방식은 다르지 않지만, 그 둘은 모두 어른에 의해 밀실에 갇혀진 '학대'당한 경험을 가진 아이들이다. 그리고 본능적 상황에서 누군가를 죽였다. 그래서 이준영은 그런 이현을 구한답시고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과 같은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동생을 숨겼다. 하지만, 이현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사이코패스인 동생을 숨기는 대신 감수하려 했고, 진실에 다가가려 했다. 프로스트의 두 갈래 길에서, 이준영과 이현이 선택한 길은 서로 달랐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차지안이 선택한 길도 달랐다. 그리고 이현과 차지안이 선택한 길이 달라짐으로 해서, 이현의 동생, 정선호 변호사, 민이가 선택한 길도 달라졌다. 그리고 수사 기획관을 죽인 최은복(손승원 분)에 대한 동료 수사관들의 선택도 달랐다. 

이준영을 암묵적으로 방조한 아버지의 실체를 알게 된 강은혁은 말한다. 아버지를 사퇴하게 만들까, 하지만 경찰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경찰에서 나가도 공기업 이사직을 맡으며 그 부패한 권력을 유지해 갈 것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그러면 자신이 사표를 쓸까, 하지만 그것은 도망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강은혁이 선택한 길은 스스로 아버지 대신 차지안에게 사과를 할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가 선택한 사과는 '실천'이다. 앉아서 아빠를 원망하며 징징거리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고, 기꺼이 자신의 운명을 감내하고자 한다. 이준영을 잡기 위해 누구보다 솔선수범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너를 기억해>에서 가장 명확하게 제시된 어른들 세상을 사는 아이들의 방식이요,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가는 길이다. 

이현은 말한다. 이준영은 불쌍하지만, 그가 이해도 되지만, 그를 용인하지는 않겠다고, 차지안 역시 끝까지 이현과 함께 이준영을 쫓겠다고 한다. 분명, 이현도, 차지안도 1회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범죄자 이준영을 잡지 못했고, 그의 존재는 그들의 곁을 유유히 지나칠 정도로 여유롭다. 하지만, 16부의 과정을 거치며, 그들은 어른들 세상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신념에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야 비로소 흔들리지 않고 굳건해졌다. 그리고, '이준영의 아이들'로 잘못 자란 아이들을 설득할 내공조차 생겼다. 처음과 똑같지만, 똑같지 않다. 그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상처받은 아이들에 불과하던 그들은, 이제 부조리한 어른들의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너를 기억해>는 언뜻 모호해 보이지만 명확하게 부조리한 부모 세대가 만들어 놓은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 목소리를 분명하게 전달한다. 초반 '표절'시비 까지 불러 왔던 트릭이 가득했던 이야기와, 힘이 잔뜩 들어갔던 연기들을 뒤로 하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집중했던 후반이 진득했던 모처럼 보기드물었던 '수작'이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모두가 함께 하기에는 '접근성'이 떨어졌다는 점일뿐. 모두가 공감해야 한다는 과제는, 놓쳐버린 이준영처럼,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과제로 남기며. 
by meditator 2015. 8. 12. 15:36

아비가 아들을 죽인다. 그것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뒤주에 넣어, 고스란히 생매장을 한다. 

이 '엽기적 비속' 살해 사건에서 '뒤주'라는 단어만 등장하면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고개를 까딱한다. 누군지 알기 때문이다. 세세한 그 내막은 몰라도, 조선 조 역사에서 영조가 그의 아들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이 사건은 전대미문의 역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이 '비극적이고도', 드라마틱한 '엽기적' 비속 살해 사건은 당연히 이야깃거리에 솔깃한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와 문학에서부터 드라마,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로 변주된다. 그리고 변주를 하는 사람들마다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 서서 '사도'의 죽음을 해명하고자 애쓴다.

 

<영원한 제국>에서 <비문>까지 정치적 개혁 세력으로서의 사도 
2014년 12월 종영된 sbs사극 <비문>은 사도를 둘러싼 역사적 시각 중 한 편을 대표한다. 즉, 아비 영조로 대비되는 '노론'과 본의건, 본의 아니건 손을 잡게 된 '수구' 세력에 대비되어, 기존 정치 세력에 반발하는 '개혁' 세력이 대표자로서 '사도' 이선을 그려낸다. 이미 어미의 뱃속에서 태자가 되어 이십대가 되어 아비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까지 해낸 영특한 세자, 하지만 그의 '영특함'은 오히려 무기가 되어, 그를 아비와, 그리고 그 아비를 존립하게 만든 '노론' 세력에 반기를 들게 만들고, 결국 그것은 정치적 패배로서의 '뒤주에서의 죽음'을 기인하게 만든다.

여기서 그려진 사도 세자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집권 세력인 '노론'에 대해, 그리고 그 '노론'을 중용하는 '노회'한 아비 영조에 대해 '개혁'과 '진정한 탕평을 이루고자 했던 '개혁'의 주도 세력으로서, 그리고 실패한 '개혁'을 죽음으로 감수한 '낭만적 영웅'이요, '정치적 희생양'이다. 1994년 상영된 <영원한 제국> 역시 이런 개혁 세력으로서의 사도 세자를 그린다. 심지어 2011년 <무사 백동수>의 사도 세자는 북벌을 주장하다 청과 결탁한 집권 세력에 의해 '살해'된다. 

뱀파이어를 다룬 퓨전 사극 mbc의 <밤을 걷는 선비> 역시 '사도 세자의 죽음'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이다. 극중 '사동 세자'는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오랫동안 우물에 갇혀 죽음을 당한 인물로 그려진다. 사도와 사동이라는 받침 하나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희생양으로 아비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그의 아들인 세손이 아비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자 하는 이야기가 '사도 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역사적 정황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뱀파이어물답게, 정치적 희생양으로서의 죽음으로 알려진 사동 세자 죽음의 뒤에는 뱀파이어를 없애기 위해 '비기'을 손에 넣으려 했던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귀'(이수혁 분)라는 뱀파이어가 있었다는 식으로 변주된다. 



정신병력에 희생된 사도 
이런 정치적 해석의 또 다른 한편에서, 사도 세자가 '의대증'(옷을 잘 입지 못하는 정신병)'을 보였다던가, 동궁전의 인물들을 별다른 이유없이 죽인 일 등을 예로들어 개인적 고뇌의 상징으로 사도 세자를 그리는 방식이 있다. 

사도 세자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그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존해왔던 바가 컸기 때문에 이전의 역사적 사극들은 정신적 이상자로서의 사도 세자를 그려내는데 충실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선왕조 500년-한중록>이다. 이 작품에서 사도 세자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유약한 심성을 가진 인물로, 그로 인해 결국 정신병까지 얻은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후 그저 아비를 잃은 불쌍한 여인네로 <한중록>에서 자신을 그려낸 혜경국 홍씨가 당대 노론 대표적 명문가의 여식으로 아비 홍봉한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 했다는 역사적 해석이 등장하면서, 혜경궁 홍씨 자신에 당위성을 강조한 <한중록>의 시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 제기되어 왔다. 

8월 7일 방영된 드라마 스페셜<붉은 달>은 정신병력을 앓은 사도 세자 개인의 불행에 집중하지만, 그것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제 아무리 정치적 입장에서 '재조명'을 한다 하더라도 사도 세자가 말년에 비단 옷을 가져다 주면 찢어버리고,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거나, 무명 옷만 겨우 갈아입었던 병력이나, 동궁전의 인물들을 별다른 이유없이 죽였던 범죄 행각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덮을 수 없다. 그리고 공포물로서의 <붉은달>은 이런 사도 세자의 정신적 불안정을 숙종-경종-영조 연간의 비극적 왕실사로부터 길어 올린다. 

즉 마흔이 넘은 나이에 겨우 아들을 얻은 영조는 그 아들을 왕재로 잘 키울 욕심에 경종과 장희빈이 기거했던 저승전 아들의 세자궁을 만든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저승전에서 내시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붉은 달>이 주목하는 것은 뜻밖에도 정신병력을 보인 사도 세자 뒤에 숨겨진 배후, 한을 품은 장희빈이다. 즉 숙종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사약을 받고 숨져간 어미, 그리고 어미의 뒤를 이어 숙종의 또 다른 아들인 영조의 정치적 야망으로 인해 독살된 아들 경종, 이 두 모자의 억울한 죽음을 부각시킨다. 즉 정치적 욕망에 따라 자신의 아내와 형조차도 가차없이 죽여버리는 아비들의 무자비한 행각이 '장희빈의 한'을 낳았고, 그 한은 왕실의 저주가 되어 '사도'에게 드리워진다. 

'사도'의 눈에만 나타나 그를 뒤흔드는 장희빈, 안그래도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에 강력한 군주 아비 영조 눈에 들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그는, 귀신의 속살거림에 하염없이 무너져 버린다. 원망하는 아비의 관을 만들고, 자신보다 더 아비의 사랑을 받는 세손의 관을 만들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관을 만들며 미쳐가는 것이다. 

아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세손의 남바위를 쓰고 육친의 정을 호소하는 세자, 그러다 장희빈의 혼령 앞에 혼돈에 빠져 마구 칼을 휘두르고 마는 세자의 모습은 흡사 셰익스피어 비극 속 햄릿이 영혼 앞에 자신의 정신을 놓아버리는 장면처럼 처절하다. <미생> 속 김대리였던 김대명은 어느 틈에 소심하고 유약한 세자가 되어 때로는 안쓰럽고 무기력하고 섬뜩한 새로운 사도를 선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붉은달>이 신선했던 것은 그저 혼귀의 희생이 되어버린 인물을 넘어 비극적 조선 왕실사로 확장된 공포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서 비극의 당사자만이 아니라, '어미'대 어미'의 대결로 이야기를 확장시킨 점이다. 자신은 물론 아들까지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린 장희빈 모자, 그들이 그래서 이후 왕실의 후계를 '비극'으로 물들이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해 보인다. 사도는 물론, 그의 아들인 세손에까지 뻗치는 공포의 야욕, 거기에 맞선 것은 또 다른 어미의 한이다. 장희빈의 포한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만 아들 사도, 그의 무기력한 패배가 그의 아들 세손에게까지 이어지지 않기 위해, 한의 대물림을 막기 위해 사도의 어미인 선희궁이 나선 것이다. 

사도도,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도, 그리고 그 아들인 정조까지 사도의 죽음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로 늘 역사의 주목을 받았지만 단 한번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았단 선희궁 영빈 이씨를 <붉은 달>은 주목한다. 비천한 신분을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그 인물은 악귀의 제물이 된 아들의 희생이 더는 세손에게 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왕실에 드리운 한을 종식시키기 위해 나서는 용기있는 여성으로 그려낸다. 그저 아들을 죽음으로 종결시키는 당사자를 넘어, 장희빈의 한에 대결하는 또 다른 '어미의 한'을 지닌 귀신으로 화하기 위해 자신을 '살신성인'하는 실천하는 '어미'상으로 선희궁을 새롭게 창조한다. 비록 공포물이지만, 사도라는 인물을 통해 본 비극적 왕실사, 역사적으로 조명받지 않았던 인물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붉은 달>의 접근은 뻔한 그 어떤 퓨전 사극보다 신선했다. 
by meditator 2015. 8. 8. 15:54

kbs2의 미니 시리즈가 고전 중이다.

새로이 시작한 sbs의 수목 드라마<용팔이>는 첫 회 11.6%(닐슨 코리아 기준)로 너끈하게 동시간대 1위를 쟁취하였다. 하지만 <가면>의 종영 이후 새로이 펼쳐진 공중파 3사의 경합에서, <어셈블리>는 자체 최고 시청률 5.3%(닐슨 코리아 기준)를 기록하였지만 역시나 꼴찌의 자리는 면치 못했다.  
그런가 하면 역시나 동시간대 1위였던 <상류 사회>가 종영된 이후 뒷심을 노리던 <너를 기억해>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5.3%(닐슨 코리아 기준)의 시청률 상승을 보였지만, 동시간대 꼴찌는 따논 당상이었다.
이런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의 꼴찌 릴레이를 두고, 혹자는 '고전'중이라는 타이틀을 내건다. 하지만, 그건 이 두 드라마를 폄하하는 평가일 뿐이다. 그리고 '시청률'이라는 편협한 프레임 속에 드라마를 집어넣고, 드라마의 입지를 좁혀가는 시선일 뿐이다. 오히려,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는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뻔한 막장급 재벌 드라마들 사이에서 '고군분투', 분전 중이라고 평가되어야 하는 수작들이다.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의 첫 번째 공통점; 재벌이 없다. 
동시간대 1위를 기록하며 종영한 <가면>, <상류 사회>, 그리고 그 후속작인 <미세스 캅>, <용팔이>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바로 '재벌'스 월드이다. '재벌'에 의해 움직이며, 그들과 그들 주변 인물들의 이합집산과, 이전투구, 그리고 정의 실현이 세상을 채운다. 살면서 방송을 통해서가 아니면 만나지도 못하는 재벌들의 이야기, 최근 뉴스를 점하고 있는 롯데 그룹 사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혈육 간의 골육 상쟁이 시청률 상위의 드라마들을 접한다. 

그리고 이런 재벌들의 이야기는 바이러스와도 같이 어마어마한 번식력을 자랑한다. 그 시작이 주말 드라마부터였던가, 아니면 아침 드라마부터 였던가, 시청률 주도층인 3.40대 중장년 주부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상류 재벌 집안의 막장 스토리가 트렌드가 되기 시작하면서, 아침 드라마와, 주말 드라마을 잠식하더니, 이제 케이블과 종편의 다양한 프로그램의 공세와, 젊은 층의 외면으로 인해 낮아진 시청률로 고전하던 주중 미니 시리즈까지 잠식하고 말았다. 

종영한 <상류 사회> 계급 간 로맨스를 통해 사랑의 의미와 오포 세대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권두언은 뒤집으면 재벌 자제와 '평민'들간의 사랑 싸움과 집안 갈등으로 채우겠다는 말이었다. 작가 최호철을 임성한의 뒤를 이을 막장계의 후계자로 만든 <가면> 역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커녕, 갖다 붙이면 이야이가 되고 마는 어이없는 재벌가의 막장 해프닝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설픈 신인들의 연기가 어땠건, 말도 되지 않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스토리가 어땠건, 재벌가의 막장 급 이전투구는 여전히 '욕을 하면서' 보건 말건 시청률 1위의 자리를 고수한다. 

그런 '트렌디'한 '재벌'가란 소재가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에는 없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들 두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가장 큰 장벽 중 하나일 지도 모른다. 대신 <어셈블리>는 해고당한 노동자들의 농성 장면이 화면을 채웠다. 혹자는 바로 이런 시작이 <어셈블리>의 접근성을 낮춘 요인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게다가 정의롭기만 해도 될똥망똥한 주인공은 형제같은 사람을 배신하고 여당 국회의원이 되더니, 공천을 받겠다고 삼천포로 빠져서 여당의 돌격대가 되어 설친다. 그런가 하면 <너를 기억해>는 익숙한 사이코패스가 등장하지만, 그는 재벌이 아니다. 정체를 모를 연쇄 살인범,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주인공, 그리고 범죄 심리학자와 법의관, 형사, 변호사, 이렇게 전문직들이 등장하여 각자 자신의 전문적 용어를 즐비하게 나열하며 '추리'를 해대는 이들 드라마는 '접근성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소에는 만날 일 조차 없는 그들의 집안 내 막장 스토리는 뉴스를 통해서야 아는 하지만, 언제나 드라마만 보면 옆집 사람처럼 익숙하게 집안 속내를 까발리는 '재벌'이 없는 드라마, 사람들이 기피하는 노조의 이야기와, 정치의 협잡과 더러운 이면을 낱낱이 까발리는 드라마, 선과 악이 분명하지 않고, 사건의 추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하나의 사건을 통해 또 다른 사건이 꼬리를 물고, 그것을 통해 조금씩 과거가 드러나는 드라마, 이것이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이다. 이렇게 익숙하지 않고 낯설고, 생소한 이들 두 드라마, 그렇다고 '고전'이라는 말로 밀어 제치기에는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의 가치는 소중하다.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는 분전 중
여권 실세인 여당 사무총장 백도현(장현성 분)의 히든 카드로 국회에 입성한 진상필(정재영 분), 하지만 그의 행보는 여느 '히어로'물의 주인공과는 다르다. 애초에 더 이상 몰릴 곳이 없는 노조 위원장으로 선택한 행보였지만, '노조'라는 위치와 달리, 그가 선택한 곳은 '노조'의 성향과는 반대편인 '여당'이었다. 어떻게 중간이 없이 모 아니면 도냐며 볼멘 소리를 하는 최인경(송윤아 분)의 말처럼, 여당에 들어온 진상필의 행보는 롤러코스터를 탄다. 여당 국회의원 신분임에도 정부 추경 예산을 추인할 수 없다고 큰 소리를 치는가 하면, 어느새 백도현의 개가 되어 반청파를 물어 뜯는데 앞장 선다. 그러다, 이제는 살생부 속 한 인물이 되어, 정치 생명의 위기를 맞는다. 

그는 '배신자' 소리를 들어가며 국회의원이 되고자 했던 그 초심, 그리고 그를 '믿노라'며 죽어가던 배달수(손병호 분)의 유언처럼 노동자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국회의원이 되보고자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장벽이다. 정치 초년병인 그는 노회한 정치 고단자들에게 이용해 먹히기 십상이고, 그의 선의는 언제나 짓밟히곤 한다. '무관심'을 넘어. '혐오' 수준에 이른 정치에 대한 '희망'을 길어 올리기엔 아직 한참 '역부족'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셈블리>는 가치있다. 쉽게 환타지처럼 정의로운 히어로를 내세워 쉽게 희망을 들먹이지 않고, 오히려 철저히 현실에 천착하여, 갖은 우회로를 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치'를 놓아서는 안되는 목적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간다. 사람들이 쉽게 평가하고, 시청률을 내세워 험담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에 흔들리지 않는다. 

<너를 기억해> 역시 쉽지 않다. 아버지를 사이코패스에게 잃고 동생마저 잃은 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된 드라마는, 한 회, 한 회 하나의 사건들을 통해, 그와 그 주변의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풀어 나간다. 한 회의 이야기는, 하나의 퍼즐을 푸는 동시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그저 범인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그 이면의 진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차분하게 천착해 나간다. 이 놈이 나쁜 놈 하고 다같이 몰려가 두드려 패는 식의 사건 해결이라는 것은 없다. 통쾌한 한 방도 없다, 장군 하면 멍군이요, 멍군인가 하면, 또 다른 패가 등장한다. 하지만, 대신, 그 느리고, 퍼즐로 가득한 이야기들을 풀어가면, 고정 관념을 넘어선 사람과 사람의 관계, 선과 악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보게 된다. 역시나 그저 시청률이나, 범인 잡기로만 설명할 길이 없는 드라마이다. 


하지만 시청률 지상주의 드라마 시장에서, <어셈블리>나 <너를 기억해>는 그저 꼴찌일 뿐이다. 그나마 콘텐츠 영역 면에서 면피를 한다. 더구나 한 회만으로 그 흐름을 따라잡기 힘드니, 리모콘 돌리다 재밌어 자리 틀고 앉게 되는 '중간 유입'도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다세대의 다중'을 대상으로 하는 공중파 드라마로는 젬병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런 냉혹한 시청률 기중에 따른 평가는 처음으로 드라마판에 들어선 영화배우 정재영의 마지막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일까, <너를 기억해> 후속 작품은 가장 대중적 기호에 맞춘 '고부 갈등'을 내세운 <별난 며느리>를 택했다. <복면 검사>에서 <어셈블리>로 이어진 '사회 비판적'인 계보를 잇던 수목 미니 시리즈 역시 대하 드라마 <장사의 신-객주 2015>를 선택하였다. 

만약에 드라마에서 '재벌'을 등장하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통과된다면 어떨까? 아마도 우리 드라마계는 '개점 휴업'을 해야 할 형편에 빠질 것이다. 그만큼 현재 특히나 공중파 드라마들은 '재벌 중심의 막장 스토리'에 현격하게 편중되어 있다. <상류 사회>, <가면>의 후속작인 <용팔이>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자 하지만, 신선하지 않다. 역시나 재벌가의 이전투구가 빠지지 않는다. 제 아무리 시청률 1위를 수성하고 있다지만, 결국은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느낌이다. 시청률 지상주의를 내세우면 결국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뻔해진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익숙하지 않지만, 뻔하지 않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이어가는 <너를 기억해>와 <어셈블리>의 가치는 소중하다. 그저 몇 %의 시청률로 설명할 수 없는, 귀 기울여 들어볼만한 이야기들이다. 
by meditator 2015. 8. 6. 17:20

8월2일 50회로 마무리된 kbs1의 대하사극 <징비록>, 최고 시청률 13.8%(22회), 마지막 회 시청률 12.3%(닐슨 코리아 기준)로 그 전작 <정도전>에 비하여 아쉬운 시청률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저 시청률, 화제성만으로 <징비록>을 이전의 <정도전>의 벽을 넘지 못했다라는 평가를 내리기에는 이 작품이 갑갑한 오늘의 현실에 남긴 시사점은 만만치 않다. 




시청률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에의 경계
이제 와 하는 말같지만 애초에 <징비록>은 시청률이 높이 나올만한 드라마라 보기는 어려웠다. 이미 대하 사극의 소재로 울궈먹을 대로 울궈 먹은 임진왜란이라는 소재, 제 아무리 <명량>이 인기를 얻었다 해도, 아니, 오히려 영화 <명량>이 인기를 얻어서 더더욱 어쩌면 식상해진 역사적 소재를 대하사극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징비록>은 애초에 그런 태생적 핸디캡을 가진 작품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징비록>이 붐을 일으킬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드라마가 '징비록'이기 때문이다. '징비록'은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간다'는 시경의 문구에서 따온 제목이다. 임진왜란 당시 정치 현장에서 난을 겪은 서해 류성룡이 드라마에서 나왔듯이 정권으로부터 소외된 이후 칩거하며 적어간 전란의 속살이다.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전란의 과정에서 겪은 경험을 풍부한 사료와 경험을 밑바탕으로 써내려간 징비록은, 말 그대로 '객관적' 서술에 방점이 찍힌다. 심지어 임진왜란에 대한 저술 중, <선조 실록> 등 실록이나, 중국과 일본의 그 어떤 사료보다도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저술로 인정받고 있는 저술이다. 

가장 정권의 중심에서 임진왜란을 겪었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그 역사의 소용돌이를 집필했다는 의미는, 결국, 징비록의 첫 글자 혼날 징처럼 자신이 몸담은 역사를 혼내고 경계하는 내용일 수 밖에 없다. 드라마의 마지막 회, 선조와 독대한 류성룡은 선조에게 일갈한다. 전쟁이 끝난 이 마당에도 선조는 한 치의 반성도 없이 구구절절 자기 변명만 늘어놓는다고.  바로 이렇게 자신의 주군과 독대한, 어쩌면 그에게 주어진 단 한번의 정치적 구원의 기회를 꾸짖음과 반성에의 독촉으로 마무리한 류성룡의 모습은, 바로 그대로 '징비록'의 입장이요, 드라마 <징비록>의 관점이다. 

드라마 <징비록>이 바라본 임진왜란은 어떤 것이었을까? 임금을 비롯한 정치 관료들은 자기 안위만 생각하고, 그런 지배층에 의해 정치는 이리저리 당파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스스로 국난의 위기로 빠져들어 간다. 심지어 전쟁의 와중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임금은 적이 눈앞에 오자 싸우는 대신 도망치기에 바빴고, 양반들은 적에게 나라를 넘겨줄 지언정 한 명의 군사라도 더 도모하기 위해 공을 세운 노비를 '면천'시켜 주겠다는 자구책에 몸을 던져 반대를 한다. 잠시라도 전쟁이 소강 상태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 사이에 정권은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다시 움직이고, 임금마저 뜻을 세운 의병들을 불의의 반란을 경계하며 제거하는 등 협잡을 일삼는다. 

이렇게 정권이 계파와 임금의 이해에 따라 춤을 추는데도 7년의 전란을 버텨낸 힘은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난 강직한 세력과 우국충절의병, 그리고 자신의 땅을 지키고자 떨쳐 일어난 양민과 노비들이다. 지배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적들과 소통하고자 할 때, 그들은 자신의 땅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심지어 정권에 반하며 국토를 지켜냈다. 하지만, 마지막 회, 도망치는 적군을 한 명이라도 살아보내지 않겠다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마지막 해전을 벌이던 이순신이 그곳에서 전사하고, 정권 내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기는 전쟁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류성룡마저 전쟁 후 '토사구팽'당하는 것으로, 그 '결사항전'의 의는 꺽이는 것으로 드라마 <징비록>은 끝난다. 

그렇게 드라마 <징비록>은 철저한 징계의 역사를 다룬다. 전쟁의 와중에서 잠깐의 승리보다, 전쟁의 와중에서 조차, 아니 전쟁을 코 앞에 두고, 적군을 코 앞에 두고서도 자기 계파의 이해, 자신의 이해에 따라 춤을 추는 정부 각료, 임금 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 냄으로써 오늘을 경계한다. 더구나 그것들이 현실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더더욱 현실감있게, 과거를 오늘에 되살려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최근 미중일 세 나라의 이합집산 속에 외교적 입지가 애매해지는 우리의 처지와 공교롭게도 비교되는 임진왜란 당시 왜와 명 사이에서 무능력한, 하지만 철저히 동아시아 세력 판도에 따라 그 운명이 갈려지는 한반도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냄으로써, 또 다른 현실의 반추를 삼았다. 



드라마 징비록 속에서는 강건한 류성룡이나, 우직한 이순신보다 노회한 선조가 돋보였던 이유이다. 또한 정직하고 강직한 의병장과 같은 인물들은 결국 역사와 정권의 희생양으로 마무리되어 비애를 남긴다. 그렇게 드라마는 쉽게 우리에게 숭앙하고픈 충신 대신,현실에서 쉽게 찾아 볼  역사 속 비겁자를 내세워 현실을 경계한다. 

그렇게 승리과 영광의 역사 대신, 실패와 치욕과, 비굴의 역사, 그럼에도 그 속에서도 잡초처럼 피어나는 끈질긴 힘을 그려내려고 했던 드라마 <징비록>은 애초에 다수 시청자들의 환호를 받기에는 고집스런 작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정권의 무능, 지배층의 자기 이익만이 우선되는 현 시점에서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현실에의 경계가 두드러졌던 '수작'이라고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징비록>의 의의가 짚어져야만 한다. 그저 얄미운 인간 선조가 아니라, 무능한 당파의 권신들이 아니라, 무기력한 조선의 외교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현실의 모습이 다름아님을 징비록은 내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by meditator 2015. 8. 3. 12:37

tvn<오 나의 귀신님>sbs<너를 사랑한 시간>은 모두 여성들의 로맨틱한 감성을 설레이게 하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다. 케이블 평균 3% 내외의 시청률, 압도적인 상대 주말 드라마를 상대로 한 5%를 겨우 넘는 시청률과 무관하게. 매회 이 드라마 속 사랑의 진도가 세간에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이제 <오 나의 귀신님> 10, <너를 사랑한 시간> 12, 중반을 넘어선 이 드라마는 자중지난에 빠졌다. 물론 로맨스물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의 갈등이지만, 최근 이 두 드라마가 빠지고 있는 사랑의 딜레마는 그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갈등이라기엔 주인공의 정체성조차 흔들 정도로 치명적이다.

 

 

 

 

 

 

<오 나의 귀신님>- 선우가 사랑하는 건 순애일까, 봉선일까

로맨스물에서 '연적'이야 사랑의 승화를 위한 아름다운 갈등 요소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연적이 귀신이라면?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깃든 귀신이라면?

 

아버지와 운전기사 식당을 하던 순애(김슬기 분)는 범인을 알아낼 수 없는 사고로 비명횡사한 처녀 귀신이다. 이제 이승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 한을 풀거나, 그게 아니면 남자를 만나 처녀의 한을 풀면 승천을 할 수 있지만, 기한 내에 그렇지 못하면 악귀가 되어 영원히 이승을 떠돌게 된 처지이다. 자신이 죽어간 이유를 알지 못하는 귀신 순애가 택한 방법은 애먼 여자들의 몸에 깃들어 남자들과 하룻밤을 보내고자 하는 것, 하지만 처녀 귀신 순애의 음기를 이겨내지 못한 남자들은 응급실행이다. 그러던 중 서빙고 보살에 쫓겨 우연히 들어간 봉선(박보영 분)의 몸으로 만나게 된 강선우(조정석 분)가 자신을 구원해줄 '양기남'인 것을 알고 결사적으로 매달린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고 봉선을 생각할 정도였던 강선우가 예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변한 봉선과 점차 가까워지고 결국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르자, 귀신 순애의 처지는 애매해진다. 강선우가 봉선과 키스를 한 순간 튕겨져 나간 순애, 그저 자신이 악귀가 되지 않기 위해 이용하려 했던 선우에게 점점 '연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선우를 짝사랑하던 봉선은 선우의 사랑을 얻고, 자신은 악귀를 피해 승천하는 길을 얻으면 된다 했던 귀신 순애가, 선우가 제안한 12일에 고심을 하며 귀신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오 나의 귀신님>의 딜레마는 여기서 생긴다. 처음 셰프 선우의 말에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봉선, 그녀는 선우를 짝사랑했지만, 정작 선우는 자신감없는 봉선을 답답해 하며 내쫓다시피했었다. 그러던 봉선의 몸에 순애가 들어오면서, 순애의 도움으로 방송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는 등 여러가지 사건을 겪으며 선우는 봉선을 달리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선우가 사랑하는 것은 봉선일까, 순애일까. 봉선은 사랑을 얻고 순애는 승천을 하면 된다했지만, 이제 순애가 선우를 사랑하게 되면서 문제는 간단치 않게 된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여주인공은 봉선인데, 실제 드라마 속 여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것은 봉선의 몸에 빙의된 순애다. 결국 드라마의 제목이 '오 나의 귀신님' 인것처럼 순애가 주인공이라는 것일까? 이것이 묘한 것이 분명 박보영이 연기하는 봉선과 순애가 빙의된 봉선이지만,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박보영이 보여준 연기의 절묘함때문인지, 설정의 애매함 때문인지, 마치 선우가 봉선과 순애 사이에 양 다리를 걸친 것처럼 느껴진다. 더구나 극중 실제 봉선의 비중은 현격하게 낮아지고, 그녀의 캐릭터조차 초반 자신없는 모습에서 갑자기 선우에게 적극적인 모습까지 개연성없이 들뛰다 보니, 더더욱 극중 여주인공의 위치는 봉선에 빙의된 순애에게 집중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녀가 그저 봉선에게 빙의된 귀신이란 것을 잊지 않는다. 이것이 그저 사연이 아니라, 이제 10에 들어선 <오 나의 귀신님>에서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 이 드라마의 딜레마이다. 결국 악귀가 되건, 승천을 하건 양단간에 결정이 날 순애, 그렇다면 남겨진 봉선, 그녀가 선우와 사랑을 이어가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이런 생각조차 들게 되는 것이다.

 

 

 

 

<너를 사랑한 시간> 17년의 우정을 우정이라 할 수 있을까?

대만 드라마 <연애의 조건>을 리메이크한 <너를 사랑한 시간>은 하지만 원작 대만 드라마보다는, tvn에서 방영한 <응답하라 1997>이 먼저 연상되는 드라마이다.

 

이제 삼십대 중반 나이가 지긋한 두 주인공들, 애초 원제로 삼으렸던 '너를 사랑한 시간 7000'처럼 17년을 넘게 '친구'로 지내왔던 이 친구들의 이야기는, <응답하라 1997>이 그랬던 것처럼 고등학교 시절 철없는 남녀 사이의 우정과 연인 사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서른 중반이 넘도록 여전히 친구 였다는 두 사람 오하나(하지원 분)와 최원(이진욱 분).

 

고등학교 시절 철없는 소꼽장난 같은 사랑과 우정의 딜레마는 <응답하라 1997>에서 성인이 된 후 바로 '사랑'의 딜레마로 승화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까. 더 이상 낯부끄럽게 '친구'니 하는 걸로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동성'간의 사랑이건, '이성'간의 사랑이건 다르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가는 가장 큰 일중 하나가 바로 '사랑'의 통과 의례를 겪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너를 사랑한 시간>의 두 주인공 최원과 오하나는 말만 서른 중반이고, 얼굴의 액면만 그렇지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의 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직장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오하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일에 대한 지시를 내릴 때 외에는 영락없는 고등학교 시절 오하나에서 하나도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최원 역시 마찬가지다. 아가능불회애니(我可能不會愛你)의 번안어 '너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야'라고 고등학교 시절 외친 이유, 뚜렷한 이유없이 오하나를 '친구'로 대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최원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나이가 서른을 넘어 중반을 지났지만, 고등학교 시절 서로 오해하고 친구라 눙치던 그 자존심센 청소년들이다.

 

마치 '키덜트'의 상징체'와도 같은 오하나와 최원은 하지만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오래 산 부부'와 같은 행동을 한다. 그들이 매번 보이는 똑같은 행동거지들은 마치 이혼한 부부들이 함께 살며 익숙해졌던 습관들을 되풀이 하며 보이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그렇게 서로에게 의존적인 두 사람인데, 굳이 서른 중반을 넘어서까지 '친구'가 꿋꿋하게 우기는 '퇴행'이나 '자기 기만'도 이해가 가지 않거니와, 삼년 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사라진 약혼자의 출현으로 오하나는 흔들리기 까지 한다. 그의 실종에 대해 묻고 따지지도 않고 믿어주고자 하는 오하나는 어떻게 17년간의 우정에 대해서는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외면하려 하는 것일까. 결혼까지 약속한 서먹한 사랑과, 17년산 부부 같은 우정, 그것이 바로 <너를 사랑한 시간>의 딜레마이다.

 

귀신에 빙의된 사랑이나, 사랑과 우정 사이에 여전히 흔들릴 수 있는 서른 중반 커리어 우먼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소재로는 솔깃하다. 시청률과 상관없이 조정석과 박보영의 설레이는 사랑의 연기와, 하지원의 화려한 패션과 그냥 서있기만 해도 설레일 듯한 이진욱과 윤균상도 좋다. 하지만, 구색만으로 16부작 미니 시리즈를 이끌어 가기에 <오 나의 귀신님><너를 사랑한 시간>의 스토리는 빈약하다. 심지어, 개연성에 의심이 가는 설정들이 마구 난무한다. 그저 여자들이 좋아할 이야기로 구색을 맞추지만 말고, 그 속에 한번쯤은 '사랑''인연'에 대핸 진진하게 들여다 보고 고민해 보게 만드는 '진심'이 담겨져야 하지 않을까. 사랑에의 '퇴행'이나 '탐닉'을 강요하지 않고, 사랑 속에서 '성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5. 8. 2. 18:00

1. tv 속 대한민국은 ‘철거중’

공교롭게도 10월 28일 tvn에서 방영된 두 편의 드라마에는 연달아 '철거'가 등장했다.

그 하나가 9시15분에 방영되는 <감자별2013QR3(이하 감자별)(극본;이영철, 장진아, 이광재 연출;김병욱)>이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그 다음 시간인 9시 59분에 방영되는 <빠스껫볼(극본;김지영, 장희진, 연출;곽정환)>이다. 드라마<빠스껫볼>의 시대 배경은 1930년대요, 시트콤<감자별>은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두 작품에서 모두 주인공, 그리고 그의 가족(그래봤자 엄마뿐이지만)은 '철거'를 당해 거리로 나앉는 신세가 된다. 근, 현대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은 '여전히 철거중'이다.

<빠스껫볼>의 시대 배경은 일제시대다. 드라마는 주인공 강산(도지한 분)이 사는 시대를 마치 '세밀화'처럼 묘사해간다. 그리고 그 묘사의 백미는 바로 강산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사는 움막촌이다. 그저 거적데기 하나 덮은 비, 바람이나 겨우 피할 거 같은 움막촌이지만, 강산과 그의 어머니에겐,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가난뱅이들에겐 그곳이 이웃과 얼싸안고 사는 삶의 보금자리이다. 일본이 식민지 토지 정리 사업을 전투적으로 벌이면서, 농촌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남부여대'로 그래도 굶어죽지는 않겠지 라는 마음을 가지고 서울로 밀려든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빠스껫볼>에서 묘사된 그대로 허름한 움막촌이다. 하지만 도시 개발을 시작한 일본인들과, 그 일본인들에게 '영혼을 판' 친일 자본가들은 자신의 부를 확장시키거나 보존키 위해 거리의 주먹패들을 동원해 움막촌을 ‘도시정비 사업’이란 명목 하에 쓸어버린다. 폭력적 철거를 통한 원시적 자본 축적이 시작된 것이다. 몽둥이를 앞세운 그들 앞에, 저항은 폭력을 낳을 뿐이다. <빠스껫볼>에서는 철거 과정에서 다친 노인이 주인공 강산의 죄책감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 대한민국 철거사의 시작이다.

<감자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로등조차 꺼져버린 시커먼 골목을 매일 밤 벌벌 떨며 지나가야하는, 산꼭대기에 있는 조그만 집은 나진아(하연수 분)가 세 살 때부터 살던 집이다. 하지만,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죽고, 나진아네 소유였던 집은 전세가 되고, 월세가 되고, 이젠 그마저도 '철거 대상'이 되어 집을 비워줘야 한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 가난한 모녀가 드리울 곳은 없다.

<빠스껫볼>의 거적데기만 두른 집에 비하면, 더운 물이 콸콸 나오는 뜨신 집은 많이 발전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된 철거가 2013년에도 지속되는 대한민국은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어미 혼자 자식 한 명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이라는 것에서는 말이다. 일제시대건, 2013년이건 누군가에겐 감지덕지 삶을 깃들여 갈 소중한 보금자리가, 다른 누군가에겐 '환금성의 투기 대상'일 뿐이다. 수십 년이 흐르고, 세기가 바뀌어도 그 어떤 것보다도 변함없는 대한민국의 진리이다. tvn의 두 드라마는 단 두 시간 만에 '철거사'를 요약한다.

2. 대한민국 ‘부’의 통과의례; ‘철거’와 ‘건설’

10월 20일 <sbs스페셜 철거왕(연출;박준우)>은 남해 작은 섬 마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무작정 상경, 불과 약관 28살에 '다원 건설'의 사장이 된 청년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겨우 공고만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지하 단칸방에 살던 청년, 회사에 들어가서도 하루에 세 시간을 잘까말까 성실하게 업무에 임해 사장의 눈에 들었던 청년, 28살에 사장이 되어, 불과 15년 만에 건설 재벌이 된 그야말로 현대판 '개천에서 용된' 케이스로 고향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마을에서 이렇게 출세한 사람이 없다며 입을 모아 칭찬을 한다.

하지만, 그의 성공 스토리에는 숨겨진 이면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철거왕'이라고 부른다.

일찍이 1970년대 '광주 대단지' 사건을 시작으로, '아파트 숲이 드리우고, 고층 빌딩이 즐비한 아름다운 서울'이 되기까지, 숱한 서울의 달동네들은 가차 없는 철거에 스러져 갔다. 특히 중동 건설 붐이 막을 내리고 건설사들의 밥줄을 대기 위해 치러 진 1980년대의 무차별 개발은, 공권력이 뒤로 물러나고 조합이 주체가 된 사적 영역이 되면서, '적준'등의 기업이 철거 현장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경찰이 멀뚱히 지켜보는 가운데, '용역'이란 이름을 내걸고 '철거 깡패'들이 거주민들을 폭력적으로 내쫓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 돋보인 활약을 보인 사람이 바로 <sbs스페셜>의 철거왕이요, 그는 폭력적 철거에 앞장서는 걸 발판으로 '적준'에 이어 철거의 대명사가 된 '다원 건설'의 사장이 되었다.

1998년 천주교 인권 위원회는 그가 만든 기업이 서울 곳곳에서 폭력적 철거를 일삼았던 내용을 담아 <다원 건설 철거 범죄 보고서>를 펴냈다. <sbs스페셜>은 그 보고서를 근거로 당시의 상황을 재연한다. 부모들이 철거를 막기 위해 밖에 나가 있는 동안 홀로 남은 아이들이 있는 집에 그들은 거침없이 불은 놓는다. 하지만 부모는 철거 깡패들이 막아선 바리케이트 밖에서 자기 자식을 구하지도 못한 채 그저 울부짖기만 할 뿐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망루에 올라 농성하는 사람들에게도 불을 놓는다. 불이 붙어 떨어진 사람에게 돌아온 건,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철거 깡패의 집단 폭력이요, 차가운 감방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막으려 했지만, 성폭력도,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폭거에 집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갈 곳을 잃었었다고 이제 와 <sbs스페셜>은 밝힌다.

'적준'의 직원으로 시작하여, '다원 건설'을 이루어 가는 한 청년의 입지전적 성공 스토리는 <황금의 제국(극본;박경수, 연출;조남국)>과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하 스캔들(극본;배유미, 연출;김진만, 박재범)> 주인공들의 성공 스토리이기도 하다.

<황금의 제국>에서 철거민의 아들 장태주(고수 분)가 '황금'에 자신의 영혼을 팔게 된 계기는 바로 '철거'다. 철거 현장에서 분신을 한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자 스스로 괴물이 되는 길을 택한 그는 결국 그로 인해 또 다른 철거민을 죽게 만드는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성진 그룹을 넘보는 또 한 명의 건설 기업인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고아 출신으로 장인의 천하 건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철거민들의 저항에 경찰조차 주춤거리자, 직접 포크레인을 밀고 철거를 감행하는 건설사 오너가 바로 태하그룹의 주인이 된 <스캔들>의 장태하(박상민 분)다. 어떻게 ‘폭력적 과정’을 거쳐 이 나라의 재벌들이 성장해왔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 낸다. 드라마 속 ‘철거’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넘어서야 할 ‘통과 의례’처럼 묘사된다. 대한민국 재벌의 성장사를 단적으로 상징해 내는 것에 ‘철거’와 ‘건설’만큼 도식적으로 명확한 것이 없다.

3, 2013년에야 밝힐 수 있는 건설 입국의 뒤안길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젼을 통해 등장한 인물들, 사건들의 이미지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야망의 세월(극본;나연숙, 연출;이종수)>이나, <사랑과 야망(극본;김수현, 연출;곽영범)>의 남자 주인공들은 그저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었음에도 사람들은 그의 모델이 된 누군가가, 정말 드라마 속 그 사람처럼, 의지의 입지전적 인물에, 정의롭고 양심적인 리더라 믿으며 한 표를 행사했다. 그리고 그 사람만큼, 그 사람이 모델이 되어 등장한 드라마 속 우리나라는 '수출 입국'에, '건설 입국'의 화려한 조명만 반짝거렸었다. 한강을 따라 즐비한 아파트를 세우기 위해, 신도시라는 신기루를 완성하기 위해 부서지고, 빼앗기고, 쫓겨난 삶의 흔적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전쟁의 상처와 가난을 딛고, 그 산동네를 탈피한 '개천에서 용난' 신화만이 부각되었었다.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각자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 시킨 승리자가 되어야 했고, 그 성공 가도에서 일탈은 곧 그저 가난이 아니라, '패배자'라는 단호한 낙인까지 감수해야 했다. 누구나 부지런히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면 성공해서 번듯한 내 집 한 칸에서부터 대통령까지 될 수 있는 시대였고, 그렇지 못한 이유는 게으르고, 술독에 빠져있고 노름이나 하는 모자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성공시대' 대통령의 5년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유행어는 되었지만, 히트작은 되지 못했던 영화 주인공의(사실은 실제 탈주범의)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현실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집을 가진 사람은 집을 가져서 '하우스 푸어'가 되고, 젊은이들은 부모가 부자가 아니라면 '88만원' 세대가 따 논 당상이기 십상인 세상이 되었다. '성공'이란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빈익빈 부익부'의 처절한 리그만이 현실이 된 시대에, 이제 드라마는 한때 영광과 승리로만 윤색되던 시대를 솔직하게 복기하기 시작한다. 누구나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 성공 뒤에 스러진 삶들이 있다고.

1988년을 배경으로 한 <스캔들>과 1990년을 배경으로 한 <황금의 제국>은 공교롭게도 '건설 입국'의 뒤안길을 다룬다.

<스캔들>에서 등장한 건설 자본은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안전 기준 따위는 무시하고 설계 도면을 고친다. 심지어, 그로 인해 건물이 붕괴될 위기에도, 그리고 붕괴된 이후에도 자신들의 죄과에 대한 반성이나, 사람의 생명보다는, 사업의 보전이 우선되는 도덕적 불감증과 자본 이기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88올림픽은 범국가적 축제가 아니라, 철거민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시위도 할 수 없는 준계엄령인 상황이요, 철거를 경찰과 공무원의 비호 아래 폭력적으로 밀어 붙일 수 있는, 그리고 건물 붕괴를 테러 위협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는 걸 보여준다.

<황금의 제국>에는 철거 대상인 건물과 거기에 남아 농성을 하는 사람들과, 철거 깡패들과, 그들을 부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또 다른 '건설 자본'이 등장한다. <황금의 제국> 주인공 장태주의 아버지는 60평생 열심히 일해 가게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권리금까지 주었지만, 그 가게는 단 한 달 만에 철거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에게 닥친 건, 철거 깡패의 무차별 폭력이요, 가게 주인이 분신으로 생명이 경각에 놓인 태주의 아버지에게 돌려 준건 입에 발린 '기도'뿐이었다.

철거민들의 시위, 분신자살, 철거 깡패, 경찰과 공무원의 비호, 건설 자본의 폭거, 이것이 이제와 무에 그리 새삼스러운 거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그 시절에는, 그저 대학생들의 유인물에서나 만날 수 있는 '진실'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비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혹은 신문 하단을 통해서만 단신으로만 전해지던, 절대로 방송을 통해서는 보여 지지 않던, 역으로 성공의 팡파레만 울려 퍼지던 그 시대의 사실들이, 2013년 드라마를 통해 이제야 버젓하게 그 시절 사실은 이랬다며 이야깃거리가 되어 나타난다.

그때만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여기의 이야기가 당장 등장하는 건 드물다. 하지만, 이 시대 '빈익빈 부익부'에 지쳐가는 사람들에게, 그 시절의 진실들은 묘한 위로가 된다. '성공'만이 삶의 바로미터가 아니라는 것을, '빈익빈'이 패배가 아니라, 제도적 부조리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통해 이 시절의 고단한 삶을 버틸 자존감을 심어준다.

4. 결자해지(結者解之)

<스캔들>이 방영되는 동안 두 번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첫 번 째, 부실 공사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 건물을 장태하는 폭탄을 사용해 부수어 버린다. 80년대 건설 입국의 시대, 자재를 빼돌리는 등 '부실'로 몸을 불리던 건설 재벌의 실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그리고 마지막 회, 다시 한 번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이번엔 부실로 인한 붕괴가 아니다. 부실을 덮기 위한 의도적 폭발도 아니다. 여전히 건설 자재를 빼돌리며 부실 공사를 한, 그리고 그것을 의롭게 알리려다 우아미의 남편 공기찬 대리가 죽어간 주상 복합 제우스가 '태하 건설'의 '결자해지'로 스스로 주저앉아 내렸다.

<sbs스페셜>의 입지전적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 철거왕은 그가 저지른 불법으로 인해 도망다니다 경찰에 잡힌다. <스캔들>의 장태하는 결국 자신을 대신해 벌을 받으려는 아들의 사랑에 감복해 그간 벌인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 <황금의 제국> 장태주는 또 한 번의 철거를 감행하며 성진 그룹을 넘보는 야망을 불태우는 대신, 홀연히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단죄의 길을 택한다. 2013년 드라마 속 주인공들 스스로 자신의 죄를 감당함으로써 ‘결자해지‘한다.

공교롭게도 2013년 개봉한 영화 <화이(감독;장준환)>는 원수의 아이를 유괴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건설 재벌이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스캔들>과 비슷하다. 영화 속 아버지들도, <스캔들>의 아버지 하명근도 아이를 유괴한다. 그 유괴는 그저 단순한 유괴라는 범죄만이 아니라, 충동적이었건 의도적이었건, '징벌'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아이는 유괴범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를, 그들을 닮으며 자라난다.

영화<화이>에서 자신이 유괴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화이(여진구 분)는 영화의 남은 시간을 몽땅 자신을 키워 준 아비들과, 아비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자들을 죽이는데 쏟아 붙는다. 영화 <화이>의 마지막 장면은 화이와 그의 아비 김윤석의 대결이 아니었다. 모든 아비들을 해치운 화이가 아비들에게 용역을 수주한 건설 재벌 진사장을 죽이는 장면이 마지막이었다. 그것은 그가 결국 이 모든 악의 시초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를 처치함으로써, <화이>는 상징적이지만, 즉자적으로 왜곡된 우리의 현대사를 청소한다.

<스캔들>의 화법은 좀더 은유적이다. 똑같이 유괴를 당한 하은중(김재원 분)은 다른 선택을 한다. 장은중이 된 하은중은 그의 아비들을 용서한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그저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피상적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장태하가 그의 아들을 되찾아 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가 사주한 살해 음모를 시인하고 감옥에 가고, 그 사건의 시발이 된 부실 건물을 무너뜨려야만 한다. 하명근 역시 마찬가지다. 장태하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 혈육과의 생이별을 가했지만, 그의 온 생애에 걸쳐 장태하의 아들을 사랑으로 키워 내야 하는, 그래서 그 아이가 '용서와 화해'의 전도사가 될 수 있게 키워내야 하는 형벌을 스스로에게 짐지웠다. <스캔들>의 사랑은 이상적이지만 난해하다. 그러기에 보다 환타지스럽고, 동화적이다. 드라마라는 보다 대중적 장르의 한계에서 오는 우유부단한 해법일 수도, 복수조차 극복한 ‘화해’를 고민한 작가가 찾아낸 지난한 고민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황금의 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복수를 되갚기 위해 ‘괴물’이 되었던 주인공은 괴물 왕국의 한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시대를 극복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이제 우리 시대 아들들의 몫이라고 드라마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by meditator 2015. 8. 2. 16:50

1월 28일 방영된 <로맨스가 필요해3>의 백미는 신주연(김소연)과 그녀를 보살펴 주는 주완(성준)의 관계도, 신주연도 미처 깨닫지 못한 선배 강도윤(남궁민)과의 사랑도 아니다. 내일 방송을 앞두고 겨우 집에 들어가 옷이나 갈아입고 올 정도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조기 폐경을 맞게 된 신주연의 동료이자, 고참인 ( )과의 갈등이다.

( )은 강도윤과 동기이자, 직장 연배로 보면 신주연에게 언니 대접을 받아야 할 처지이다. 하지만 늘 신주연에게 ‘자기야’라고 불리워지는, 신주연을 팀장으로 모셔야 하는(?) 그녀에게 생각지도 못한 신체적 변화가 생긴다. 흰 머리가 늘고, 달력의 잔글씨가 보이지 않고, 급기야 찾아간 산부인과에서는 조기 폐경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 것이다. 늘 연애할 시간조차 제대로 없다고 푸념을 하던 그녀에게 일하느라 바쁘고 번거로워 금요일 밤의 원나이트 정도면 즐기기에 적당하다 하던 그녀에게 내려진 여자로서의 사형선고이다.

자신에게 닥친 불의의 신체적 변화에 아노미 상태가 된 그녀는 그 일을 비밀 없이 지내는 듯한 사무실 동료들에게 토로하지만 돌아온 것은 내일 방송을 앞둔 팀장 신주연의 철면피같은 무반응이요, 그저 ‘왜 이렇게 바쁜 시기에’라는 난처함이 역력한 다른 동료들의 표정이다. 그런 동료들의 모습에 분노한 ( )는 ‘갑각류같은 년’이라며 신주연에게 퍼붓고 그 자리를 떠나버리고 바쁜 동료들에게 이기죽거리는 심정으로 카톡으로 사직서를 날려 버린다.

<로맨스가 필요해3>가 사랑에 미성숙한 여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멋진 두 남성이라는 환타지에 충실한 로맨스 소설의 얼개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음에도 젊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가는 측면은 그 로맨스 소설이 딛고 있는 현실성이다. 고시를 앞둔 애인 때문에 데이트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고사되어 가는 듯한 ( ), 마흔을 앞두고 있음에도 직장 일에 얽매어 시원하게 연애 한 번 사랑 한번 못해본 ( ), 그리고 팀장의 자리에 오를 만큼 일에서의 성취는 눈부시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사랑에 있어서는 미성숙한 신주연까지 이 시대 젊은 여성들이 그 중 누군가에게 자신을 투영하기에 충분할 캐릭터들이다.

그렇게 일에 압박당하느라 사랑도, 젊음도 제대로 챙겨보지 못한 젊은이들의 삶을 케이블 tvn이 그려내고 있는 동안, 종편 jtbc< >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그녀들의 언니급인 마흔 무렵의 삶이다.

직업적으로 안정된 지위에 올랐지만 결혼이라는 관문을 아직까지 넘지 못해 이제는 불안해 하는 ( ),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화려한 결혼을 했지만 그 번듯함이 허명이 되어 고통으로 다가오는 ( ), 결혼도 넘고, 이혼까지 넘어버린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 가장이 되어 자기 삶을 꾸려낼 수 밖에 없는 처지의 ( )는 우리 시대 마흔 무렵 여자들이 빚어낼 수 있는 또 다른 현실성이다.

sbs의 <따뜻한 말 한 마디>의 ( )는 세대로 치자면 jtbc < >와 같은 세대이다. 하지만, <따뜻한 말 한 마디>라는 드라마의 논조를 담당하고 있는 것은 그녀를 연적이라 생각하고 있는 미경(김지수)의 시선이다. 자신의 동생이 미경의 동생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 )는 자신이 전염병같다고 오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재학(지진희)와 정신적 외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미경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고, 가족, 친지, 심지어 동네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외도 그 불가피성 여부랑 상관없이 <따뜻한 말 한 마디>가 그려가고 있는 파장은, 외도가 가족에 미치는 사회 병리학적 조사 보고서와도 같은 것이다. 가족이, 남편이 전부였던 삶을 살았던 40대 중반의 여성 미경의 눈높이이다.

( )가 재학과의 외도 한번에 천형과도 같은 형벌을 겪고 있는 것과 달리, < >에 오면 상황은 한결 여유로워 진다. 비록 그녀가 낳은 숨겨진 딸의 아버지라는, 첫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이제는 엄연히 남의 집 부인과 그 집 남편의 사업상 파트너라는 위치에 놓인 ( )와 ( )는 사람 없는 엘리베이터에서 키스를 나눌 만큼 대담하다. <따뜻한 말 한디>에서 ‘사랑’이기에 더 용서할 수 없던 외도가, < >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조장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 친구였던 ( )와 ( )는 한 남자를 놓고 연적이 될 처지이지만, 결혼이란 제도에서 놓여진 그녀들이 철천지원수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로맨스가 필요해3>로 가면 한 발 더 나아간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첫사랑을 빼앗겼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신주연이지만 머리끄댕이 한번 잡는 것으로 지나간 회한을 풀어내고, 사업상 그녀가 필요하자 그녀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하는 ‘쿨’한 선택을 한다. 얼굴만 마주대면 으르렁거리다가도 일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냉철한 카리스마를 놓치지 않는다. 사랑에 상처받으면 일로 풀어내고, 일이 힘들어 졌을 때 다시 사랑이 채워주는, 양수겹장의 삶이다. 그러기에 신주연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일과 사랑 모두에서 그녀의 버팀목이던 도윤의 냉정함에 마주쳤을 때이다.

이렇듯 동시간대 sbs, jtbc, tvn에서 월화 10시대에 방영되는 드라마는 각 그 드라마의 타겟층이 되는 여성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 이혼을 해도 당장 먹고 살 걱정이 없는 <따뜻한 말 한 마디>의 그녀들과, 이혼 후의 가장이 되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 >, 그리고 일이 곧 삶의 주된 동인이 되어버린 <로맨스가 필요해3>의 그녀들은 우리 시대 세대별 여성상이자, 세대별 사회상, 경제상의 반영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5. 8. 2. 1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