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이 소속된 집단의 리더는 소통은 커녕,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며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문제가 되었다 한다. ㅇㅇㅇ를 제대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이 리더는 여전히 군대에 있는 듯, 군대 시절의 경험을 고스란히 사회로 확장시켜 주변에 물의를 끼치는 중이다. 남자들이 모이면 군대 다녀온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이유는, 그들의 인생에서 그 군대가 그만큼 자신의 전인생사의 경험을 뛰어넘을 만큼 파격적이고 이질적인, 그리고 그 여파가 이후의 삶에 지대하게 미친 충격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군대라는 건, 이른바 '조직 사회'의 가장 첨예화된 형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 하고, 그 반대편의 누군가는 인생에서 가장 무용한 시간이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그 남자들의 전형적 후일담 '군대' 이야기가 육사 출신이 송곳의 이수인(지현우 분)의 이야기에 종종 등장한다. 성공하는 직업 군인이 희망이었던 이수인은 하지만, 결국 직업 군인이 되지 못했다. '군대'라는 조직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할 거 같았던 그는, 결국 '군대'라는 조직 문화를 견녀내지 못했다. 그놈의 '송곳'같은 성정 때문에. 




하지만 그가 사회 생활을 하는 구비구비마다 그의 군대에서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는' 예방 주사로 작동한다. 그 누군가가 '군대'에서의 경험을 사회로 확장하여 '군대식' 행태를 보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반면, 이수인에게 '군대'는 철저한 삶의 복기 대상이다. 그가 프랑스 인 점장의 총애를 받는 과장에서 직원들의 부당해고에 맞설 수 밖에 없는 송곳같은 인물이 되는 그 순간부터, 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드라마는 그가 겪었던 '군대'의 경험을 들먹인다. 



군대 이야기, 노조에서 인간으로 넘어가는 매개제
그렇게 시작된 군대 이야기는 11월 15일 8회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회사가 노조원들의 월급을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지불하자, 많은 노조원들이 노조를 탈퇴한다. 그러자 남은 노조원들과 탈퇴한 노조원들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고, 그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남은 노조원들은 탈퇴한 노조원들을 배신자라 지목하며 그들이 돌아와도 받아주지 않아야 한다는 둥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다. 구고인이 나서서 이렇게 같은 편끼리 싸우는 걸 바로 회사가 원하는 거라 설득하지만 그의 말조차 잔뜩 화가 난 노조원들에게는 별 무 소용이 없다. 바로 그 순간 이수인의 군대 이야기가 등장한다. 십여일의 거친 훈련 과정, 전우애로 똘똘 뭉칠 것 같은 그들은 다음 순간 이수인이 짊어졌던 10kg의 화기를 모른 척 할 정도로 자신이 견뎌야 할 현실의 무게에 짙눌려 있다. 심지어 이수인조차 조장의 일어나라는 소리를 모른 척 할 정도로 지쳐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 하나쯤이야 제일 먼저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조금 더 눈을 붙일 동안, 그 시간 동안 조장은 목이 쉬어 터지도록 동기들이 일어날 것을 독려했다. 

그런 이수인의 군대 이야기는 이제 푸르미 노동조합 결성 과정에서 맞부닥친 현실의 문제로 다시 되돌아 온다. 그리고 이수인은 회사의 부당한 월급 강등에, 그리고 동료 노조원들의 후퇴에 화가 나고 좌절한 노조원들에게 말한다. 여러분들도 그만하셔도 된다고, 각자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짐의 무게만 짊어지면 된다고. 아마도 이수인의 그 말이, 그의 군대 경험이 보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풀어졌다면, 그럴 듯은 했지만, 그만큼 감동적으로 전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군대 시절에 대한 복기는, 그저 현재의 노조 상황을 넘어, 인간의 삶에 짙눌려진 무게에 대한 촌철살인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송곳>은 푸르미 노동 조합 결성이라는 사건을 둘러싼 전개를 하면서 이수인이라는 인물이 가진 경험의 전사를 동시에 풀어낸다. 그럼으로써, 이런 상황이 그저 노동조합 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삶의 요소요소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보편적 상황임을 설득해 낸다. 즉,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그저 푸르미란 특수한 조건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굳이 노동조합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며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 벌어질 수 있는 동일한 문제라는 것을 드라마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푸르미란 작업장에서 일을 하게된 사람들에게는 노동조합이란 형태로 다가왔을 뿐, 그 상황이 군대로 바뀌면 군대에서, 혹은 학교로 바뀌면 학교에서 우리들은 언제나 동일한 문제의 상황을 맞부닦치게 되고, 그 상황에서 똑같은 갈등과 결정의 기로에 설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드라마는 남자들의 가장 보편적인 경험 '군대'를 구구절절히 들먹이고 있다. 그 누군가는 군대를 통해 그저 사람들을 휘두르고 부려먹는 방법을 배웠다면, 이수인은 그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을 '인간'의 민낯에 대한 충실한 선험적 학습을 완료했다. 누군가에겐 트라우마 된 경험이, 이제 이수인에게는 그를 쉽게 흔들거나 좌절치 않게 만들 단단한 토양이 된 것이다. 그렇게 이수인의 군대처럼, <송곳>도 마찬가지다. 그저 푸르미란 가상의 마트에서 사람들이 노조를 만드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다. 그래서 노조에 관심이 없으면 모지 않아도 될 이야기가 아니다. <미생>이 환타지로 일관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송곳>은 일하는 곳에서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처절한 민낯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진짜 미생들의 이야기이다. 갑이면 갑, 갑중에 을은 을대로, 그리고 을들 속에서도 저마다 서로 다른 입장들의 얼굴을, 하지만, 그래서 보기 싫고,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치장하지 않은 그 민낯에서, 이수인이 군대 생활을 통해 인간에 대한 단단한 배움을 쌓았듯이, 쉽게 기대하거나 허물어 지지 않는 인간사를 배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기대어 살아가야 하고,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길어올리게 된다. 그래서 <송곳>은 그저 노동조합 만드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서도 쉽게 말해주지 않는 진국의 '인간학'으로서 2015년의 우리가 보아야 할 드라마 된다. 
by meditator 2015. 11. 16. 14:54

10월 30일 2.996%로 시작한 <응답하라 1998>이 4회만에 시청률 8%를 넘었다(닐슨 코리아 기준 8.251%) 이 정도면 앞선 <응답하라> 시리즈에 비해 훨씬 더 빨리 신드롬에 도달하고 있는 중이라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은 평가다.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별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쌍문동 골목 가족들이 아웅다웅하며 살아가는 이야기, 역시나 전편에 이어 여주인공의 남편 찾기 퍼즐의 반복인데도, 하염없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묘하다. 그 이유가 뭘까?


이 글을 쓰는 기자는 83년에 대학을 입학한 연식이 제법 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83학번 세대가 본 <응답하라 1988>은 동시대적 공감 그 자체일까? 그런데 이상하다. 동시대, 아니 이미 대학을 졸업한 이후의 이야기인데, 이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는 듯한 회고조의 기시감이 든다. 드라마는 1988년인데, 막상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정취는 1970년대의 어느 시점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그건 내가 살았던 1980년대에는 느끼기 힘들었던 정서를 <응답하라 1988>이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존무죄, 무전유죄의 1988
11월 13일 방영된 3회 <응답하라 1988>의 소 제목은 유전무죄, 무전 유죄였다. 드라마의 사회적 배경은 지강헌 탈주 사건 과정에서 그가 외친 '유전무죄, 무전 유죄'가 사회적 유행어가 되던 시기이다. 왜 당시 이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유행어가 되었을까? 이 말 그대로 이미 당시 대한민국은 '유전(有錢)'이 곧 사회적 기득권을 얻는데 직행 티켓이 되는 것이 당연시 되어가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를 살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부의 격차를 넘어선 사회적 격차를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던 시기였기에, 한 탈주자의 이 말이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사회적 유행어로 자리매김하던 시기가 되었다. 즉, 광주 사태를 진압하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 정권을 뒷받침한 경제적 호황은 그 떡고물이 편중되어 계층 차이가 분명하게 체감되기 시작하던 때가 바로 저 88년 올림픽의 뒤였던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선 그런 빈부의 격차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정환이네는 형이 산 올림픽 복권으로 졸지에 부자가 되었지만, 그들이 가진 부를 전횡하지 않는다. 말끝마다 '졸부'잖아 하면서도 수학 여행을 가는 덕선이의 용돈까지 챙길 정도로 정환모의 마음은 넉넉하다.  빛보증을 잘못써서 하루 아침에 반지하로 내려앉은 덕선네는 막내 아들 노을을 친구들이 '반지하'라 불러 아버지의 마음을 후벼파지만, 그럼에도 건강하고 밝게 자라는, 그리고 여전히 술만 마시면 누군가에게 퍼주는 마음 넉넉한 가장의 여유를 가진 집안이다. 드라마 속 골목 사람들에게 빈부격차는 그저 경제적 지수일 뿐, 말 그대로 콩 한 톨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정서를 쌍문동 골목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은 그런 시대를 산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농촌을 다룬 <전원 일기> 속 농촌이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듯이, 쌍문동 골목 이야기를 다룬 <응답하라 1988> 속 서울은 당시에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1988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가 시작된 시기는 1980년 10월 21일이다. 이 시기가 상당히 상징적이지 않은가. 1980년 하고도, 광주 사태가 마무리 된 10월 21일, 거기에 농촌 공동 사회가 파괴되고, 도시 집중 현상이 극에 달하기 시작한 1980년대의 그 첫 무렵에, 농촌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다룬 <전원일기>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전원일기>는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은 할머니, 아버지, 자식 삼대, 사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과, 그 주변 이웃들이 너나없이 한 가족처럼 지내는 아름다운 가족 공동체의 이야기로 당시 서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오죽하면 그 드라마에 나오는 최불암, 김혜자 씨를 진짜 부부로 알았을 정도로. 



우리가 상실한 도시 공동체, <응답하라>
그렇듯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족을 기초 단위로 한 도시 공동체의 이야기를 <응답하라> 시리즈는 일관되게 다룬다. <응답하라 1997>이 부산의 성시원네를 배경으로 너나없이 지내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응답하라 1994>는 서울 신촌의 하숙집을 배경으로 역시나 혈육같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두 드라마 모두 피를 나눈 형제처럼 친해져 버린 벗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 핵심에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실질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성동일-이일화 부부가 있다. 즉, 이 부부를 중심으로 한 확대 가족과 같은 공동체가 <응답하라> 시리즈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화룡점정이 된 것은 당시의 시대를 묶어낸 음악을 비롯한 문화적 상품을로 점철된 문화적 공감대가, 공동체적 정서를 더하여, 완성된 시대적 공동체가 완성된다. 즉, 해체된 원자화된 21세기 사람들이 잃어버린 공동체와 그 정서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응답하라 1988>은 그 시점을 쌍문동 골목으로 가지고 간다. 왜 쌍문동일까? 그것은 <전원일기>가 지도에서 찾기도 힘든 양촌리라는 곳을 찾아간 것과 같은 이치다. 당시 서울이라기엔 여러모로 아쉬운 변두리 쌍문동을 배경으로, 마치 70년대나 60년대에나 있을 법한 서울 도시 공동체의 정서를 드라마는 담는다. 서로의 밥그릇 갯수까지 알 것같은 이웃들, 그래서 드라마는 개인의 문제로 시작하여, 공동체의 해결로 끝을 맺는다. 반대로, 관계의 문제가, 공동체의 고민이 되기도 한다. 4회, 바둑 경기에서 자꾸 지는 택이의 문제를 친구들이 함께 왁자기껄 웃고 해결하는 것이 공동체 해결의 대표적인 사례요, 매 시리즈마다 시청자들을 낚는 여주인공의 남편 문제가 대표적인 공동체의 문제화환 개인의 문제이다. 즉,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공동체가 나서서 서로서로 해결해 주지만, 감정조차 공유해 버리는 그 공동체의 부담 역시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매 시리즈 여주인공의 남편 찾기는 그저 시청자들을 낚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너와 나가 분명치 않는 공동체적 문화의 필연적 산물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응답하라>는 <국제 시장>과도 같은 코드를 가진다. 그 시절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아버지가 오늘의 현재를 일구었듯이, 이제는 사라진 가족 공동체의 아름다움이 그 시절의 추억을 한껏 살려낸다. 과거는 아름답고, 추억은 흐뭇하다. 그저 문제는 그 모든 것을 잃고, 홀로 떨구어져 나온 현재의 우리뿐. 그런데 오늘의 빈익빈 부익부, 배금주의, 해체된 가족, 그리고 원자화된 개인을 낳은 것은 누구일까? <국제시장>의 아버지는 오로지 희생만 했을 뿐이고, <응답하라>의 가족은 가족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뭉쳤을 뿐일까? 과거를 그린 드라마들은 답하지 않는다. 그때는 아름다웠고, 지금의 현실은 불쌍할 뿐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정이 넘쳤고, 우리는 그 정마저 잃은 채 도시를 헤맨다. 도대체 그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누구의 잘못인가? 현재를 만든 부모 세대의 배금주의, 성공 지상주의를 드라마는 그려내지 않는다. 

<전원일기>는 파괴되어 가는 농촌 공동체의 이야기를 시늉만 했을 뿐, 아름다운 농촌만을 그려냈다. 마찬가지다. <응답하라> 역시 그 아름다운 가족 공동체 속에서 살아낸 가족들은 성공한 중산층으로 그려질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성공한 자의 후일담은 약간의 흉터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응답하라>가 달착지근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by meditator 2015. 11. 15. 16:00

11월 10일 <육룡이 나르샤>의 시청률은 그 전회 13.3%에 비애 0.8%나 상승한 14.1%(닐슨 코리아 기준)를 기록했다. 6회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인 셈이다. 하지만, 동시간대 mbc월화 드라마 <화려한 유혹> 역시 전회에 비해 똑같이 0.8% 상승한 것을 놓고 보면 월요일 <가요무대>의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같기도 하다. 하지만 시청률과 상관없이 12회 <육룡이 나르샤>는 흥미진진했으며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이 흥미진진과 감동의 속내를 한번쯤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 속내가 곧 쉽게 치고 오르지 못하는 이 드라마의 지지부진한 원인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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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마리 용의 산만함
제목에서 부터 여섯 마리의 용이 날아 다니는 이 거창한 이름의 사극, <육룡이 나르샤>, 하지만 300억 대작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시청자들의 반응은 지금까지 엇갈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엇갈린 반응들이 11월 10일자 방송에서는 한결같이 '좋았다'로 돌아섰다. 무엇이 좋았던 것일까?

무엇보다 그간 함주에 칩거(?)한 채 좀처럼 정도전의 '육룡' 낚시에 낚이지 않았던 이성계가 그의 아들 이방원의 옥사를 계기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살아온 장수, 흰서리가 희끗희끗한 상투 머리가 흐트러지고 얼굴엔 상처, 그리고 먼지와 피로 얼룩진 군복으로 등장한 천호진의 이성계 모습은, <정도전>의 기세 등등했던 유동근의 이성계와는 또 다르게 무인 이성계의 존재감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터를 누비던 그가,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이제 정치를 하겠다는 그 결심은 그 어떤 정치의 출사표보다 설득력을 느끼게 하였다.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역성 혁명을 이끄는 주역인 이성계가 극의 전면에 자신을 드러내자, 비로소 극이 중심을 갖추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성계가 중심에 들어서도록 그 숨막히는 정쟁의 막후에서 그 모든 것을 주물렀던 정도전과 그런 정도전의 손아귀 안에서 어떻게든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고심하는 이인임, 홍인방, 길태미의 이합집산이 긴장감을 부여했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치에 나서는 이성계와 그의 막후에서 그의 브레인으로 자리매김하는 정도전의 존재감이, 비로소 <육룡이 나르샤>를 본 궤도에 올려놓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곧, 퓨전 사극으로서, 역사적 사실 이상의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인 장치들의 취약함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제목부터 거창하게 육룡을 내세우고,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이라는 역사적 인물 외에 연희, 분이, 무휼, 땅새라는 '민중'을 고려 말 역성 혁명 과정의 중요한 주체로 내세우려 했지만, 그들이 극을 중심으로 이끄는 순간, 드라마는 흐트러지고, 그들의 이야기조차 설득력을 크게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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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 정도전, 그 혁명 조직의 설득력의 한계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퀼에 해당하는 <육룡이 나르샤>는 세종 조에까지 암약했던(?) 본원 정도전의 유지를 따른 결사 조직의 시초를 그린다. 당연히 거기엔 말 그대로 본래 이 조직의 뿌리가 된 본원 정도전이 등장한다. 

그런데, <육룡이 나르샤(이하 육룡)>의 정도전은 <정도전>의 풍운아 정도전과 다르다. 12회, 옥사를 겪던 이방원을 마지막에, 옥사를 담당했던 남은(진선규 분)은 이인임의 수하인 듯 굴었으나 결국, 정도전의 둘도 없는 벗이었으며, 이인임의 계략 하에 놀아나는 듯한 옥사를 정도전의 의지에 따라 바꿔놓은 결정적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보여지듯이, <육룡이 나르샤>의 정도전은 스스로 역사 속에 뛰어들어 혁명을 온 몸으로 겪어가는 인물이 아니라, 혁명을 계획하고 집도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를 따르는 연희의 태도에서 보여지듯이 전지전능한 종교적 교주와도 같은 인물로 그려지는 정도전은 드라마적 캐릭터로 보았을 때 '납작'하다. 즉, 그는 고뇌하나, 그의 고뇌는 마치 예수가 그의 제자를 두고 고민하듯 '인간적이지(?) 않다. 그리고 뻔히 구해줄 수 있는 이방원을 이 기회를 통해 반성을 하라고 내처두었듯이, 전지전능하다. 따라서 그런 전지전능한 인물 정도전은 종종 등장하는 코믹한 씬에도 불구하고 극중 할 일이라고는 알고보니 이게 내 계략이었어라던가, 아니면 장황한 설명조의 웅변 밖에는 극중 기여할 바가 적다. 다른 사람들은 욕망에 고뇌하고, 앞날을 몰라 헤매고, 세상에 자신을 던지지만, 이미 그의 머릿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는 혁명의 계획자 정도전은 믿고 의지할 대상은 되지만, 정이가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러기에 그와 홍인방의 불꽃튀는 설전의 장면에서, 어쩐지 홍인방에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홍인방의 의견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그가 인간적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이런 본원, 혁명의 기획자 정도전의 절대 옮음이 <육룡>의 장점이자, 동시에 극적 매력을 덜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또한 <육룡>은 그런 혁명의 기획자 정도전의 휘하에 비밀 조직원으로서 나머지 용들, 특히 고려의 젊은이들의 이합집산을 그려낸다. 특히 12부의 과정에서 아버지 이성계보다, 그의 아들 이방원의 열혈 혁명 의지로 인한 굴곡을 다룬다.  비록 지금은 젊은 혈기에 정도전을 스승으로 모시겠지만, 곧 그는 왕좌를 위해 정도전을 제거할 것이고 아비와 척을 지고, 형과 동생들을 제거할 권력의 화신이기에, 유아인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역성 혁명의 주도 세력으로 그를 따라가는 것이 저어된다. 

이방원이야 그래도 역사적 인물이니 그렇다 치고, 나머니 인물들 분이, 땅새, 연희, 무휼의 이야기로 가면 극은 지지부진해진다. 이들은 고려의 민중을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들인데, 어쩐지 저마다 사연도, 극중 역할도 어정쩡하다. 마치 정도전의 심중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장치가 된 듯한 연희의 존재도 부담스럽고, 당차게 황무지를 개간하던 소녀에서, 천민 출싱에 어울리지 않게 장황한 대사를 읊어대며 어느덧 이방원 바라기가 된 분이도 어정쩡하다. 땅새도, 무휼도 그들의 사연으로 들어갈라치면 극이 갈팡질팡하는 듯하다. 결국 '민중 사극'를 지향하지만, 극이 그 '민중'들은 저마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느덧 본원의 조직원으로만 그 존재감이 귀속되어 버리고, 대신 칼만 들지 않았을 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정치판과, 가끔씩 등장하는 황당무개한 무협 칼싸움이 <육룡>의 재미를 추동한다. 결국 무인과 사대부의 합작품 넘어선 조선의 역성 혁명, 그를 설득해 낼 수 있을 지, 이것이 시청률과 무관하게 <육룡>의 진짜 딜레마이다. 

by meditator 2015. 11. 11. 14:24

사랑과 복수가 지천에 늘어져 있는 tv드라마에서 생소한 화법의 두 드라마가 있다. 바로 sbs월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와, jtbc금토 드라마 <송곳>이 그것이다. 고려 말 권력 투쟁을 다루는 드라마라 생각하며 리모컨을 고정한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혁명'이 등장하고,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발 내딛고 마는 그런 인간의 이야기 <송곳>은 섬세하게 노동조합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고려 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의 혁명과, 2003년년 까르푸 노동조합을 배경으로 했음에도, 역설적으로 드라마 속 현실은 2015년의 현실을 복기한다. 그래서, 드라마 속 '혁명'은 과거의 혁명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요, 드라마 속 노동조합으로의 결집은 현실 속 우리의 단결을 촉구한다. 




'혁명 전야' <육룡이 나르샤>
왜 고려 말이었을까? 그것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답을 해준다. 백성들이 가진 것 30%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 90%로 세율을 높이는 권력, 그것도 부족하여 백성들이 피땀으로 일군 황무지까지 자신의 힘을 동원하여 빼앗는 권력,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는 권력, 빼앗긴 자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 나라, 가진 자들의 권한이 되어버린 나라, <육룡이 나르샤>는 말한다. 그건 더 이상 그 누군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그리고 그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고려 말에 시청자들은 묘한 현실의 기시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고려 말에 새로운 지켜야 할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혁명'을 외치는 일군의 무리들이 등장한다.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퀄로서 드라마는 본원 정도전(김명민 분)을 그 핵심에 두고, 그를 중심으로 이성계(천호진 분), 이방원(유아인 분), 땅새(변요한 분), 연(정유미 분), 분이(신세경 분), 무휼(윤균상 분) 등의 여섯 용을 등장시켜, 고려에서 조선이라는 역성 혁명의 과정을 그려낸다. 

조선의 시조 이성계의 성업을 기리기 위해 정도전이 지었다는 '용비어천가'는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건국까지 이성계의 선조들의 업적을 전설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중 첫 구절, '해동의 육룡이 나르시어, 그 행동하는 일마다 하늘이 내리신 복이시니'에서 유래된 <육룡이 나르샤>는 이성계의 선조 육룡 대신, 하잘것없는 백성들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는 곧,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을, 그저 왕씨 왕조에서 이씨 왕조로의 역성 혁명이라는 왕조의 변화가 아니라, 고려 말 그 억압의 구조를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민중'의 대변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상징적으로 '용'으로 승화시켜, 조선의 건국이 바로 이런 '민중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드라마는 그리고자 한다. 그에 따라 드라마는 장황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구구절절 땅새와 연희, 그리고 분이와 무휼의 사연과 역할을 부여하기에 고심한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정도전과 이성계, 이방원의 대업이 아니라, 바로 고려 말 민중의 참을 수 없었던 저항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참을 수 없음과, 저항 의지는 곧 견디기 힘든 우리의 현실로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더구나 이방원을 비롯하여 분이, 무휼 등이 대부분 젊은 연기자인 이 드라마의 육룡들의 활약은 결국 2015년 젊은이들의 각성과 행동을 촉구한다. 



2015 당신을 위한 노동조합 안내서, <송곳>
시작은 이수인(지현우 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제 스스로도 그 다음에 어떤 결과가 올 지 뻔히 알면서도 불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듯 그렇게 삶의 고달픈 행보를 밟으며 살아왔던 이수인의 지난 여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등학교 시절, 육사생도 시절, 늘 선택의 고민이 이수인을 휩싸였던 순간, 이수인은 결국 송곳같은 결정을 내리지만, 동시에 그의 결정은 그걸 지켜본 시청자들에게 지금 혹은 지나간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 이수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푸르미 마트의 노조원들과, 구고신의 노동상담소에 있는 문소진(김가은 분)으로 확산되어 가는 송곳들의 행렬, 그들이 선택한 노동조합의 여정은, 또 다른 질문을 시청자에게 던진다. 드라마는 매 상황마다, 섣부른 정답의 행보를 가는 대신, 의문부호와, 물음표를 던진다. 노동상담소 소장 구고신은 함께 모여 싸움을 하려고 하는 푸르미 식구들에게 지표를 제시해 주지만, 동시에 그들이 얼싸안고 쉽게 들썩일때 마다 찬물을 뿌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세상은 강고하고, 세상의 편견은 그보다 더 굳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구고신의 찬물 덕분에, 역설적으로 <송곳>은 쉬이 희망에 중독되지 않도록 한다. 노동조합 만들기의 여정이 어설프게 강령하되지도 않는다. 드라마의 제목, 송곳처럼, 어쩌지 못해 벼랑인 줄 알면서도 선택하는 과정처럼, 서로가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키며 살기 위해 결국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최후의 선택지로서, 그리고 단단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2003년 까르푸 노동조합 결성 과정을 다루지만, 드라마에서 시작된 정규직 해고와 비정규직 확산의 현실이 2015년의 암울한 현실에 잇닿아 있기에, 오히려 <송곳>의 2003년은 현실적이다. 또한, 이제는 굴뚝에 올라가서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하는 열악한 현실이, 더더욱 구고신의 찬물 한 바가지가, 드라마가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자기번민이, 드라마 속 대안을 수긍하게 만든다. 세상에 세뇌당하고, 현실에 지레 무릎끓은 시청자들은 그래서 <송곳>을 보며, 역설적으로 정답을 찾아간다. 

by meditator 2015. 11. 10. 15:09

포로수용소의 아버지 귀도(로베르트 베니니 분)는 아들과 함께 끌려간 수용소의 상황을 하나의 게임처럼 아들이 여기도록 희화화시킨다. 심지어 탈출을 시도하다 끌려가는 마지막 순간에 조차, 아들과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그것마저도 놀이인 척 웃음기를 머금은다. 그렇게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속 아버지는 끝까지 아들에게 현실의 비극을 숨겨냈다. 덕분에 영화는 그런 아버지의 지극한 부성에 찬사를 보내면 칸 영화제의 그랑프리를 안겼다. 아들을 위해 현실을 놀이로 승화시킨 아버지, 하지만, 현실 속, 그것도 2015년 대한민국 현실의 아버지는 알량한 아들이 꿈꾸는 동화마저도 산산히 짓밟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꿈꾸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꿈에서 허우적거리는 아들
<인생은 아름다워> 속 아들의 1000점 획득 탱크 따기 게임이 수용소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아버지가 만들어 낸 놀이라면, <낯선 동화> 속 삽입되는 동화는, 아버지 상구(김정태 분)가 만든 창작 캐릭터 봉봉이이자, 동시에 그 봉봉이로 인해 가족을 외면한 아버지 때문에 현실에 내던져진 아이 수봉(정윤석 분)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꾸려가는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는 모두 가혹한 현실을 버텨내기 위한 '플라시보 장치'이다. 하지만, 전자가 아버지에 의해 아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라면, 역으로 후자는 무능한 아버지로 인해, 아들이 스스로 자신을 다독이기 위한 환타지라는 점에서 이야기의 궤적은 달라진다. 

영화 속 아이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탱크 획득 게임을 위해 어려운 상황을 견디어 낸다. 드라마 속 수봉이 머릿속 동화도 아버지가 만든 것이긴 하다. 아버지가 창안해 냈고, 심지어 전국민적 인기 캐릭터마저 되었지만, 그 물질적 수혜는 아버지의 친구인 기풍(정희태 분)이 가져갔다는 것이 수봉이네 가족의 비극적 상황이 된다. 그래서 자신의 창작물인 봉봉이를 빼앗긴 아버지는, <인생은 아름다워> 속 아버지처럼 아들과 함께 고난을 극복하는 대신, 자신이 만든 캐릭터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가족을 방치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창작물을 되찾기 위해 고심하는 아버지를, 꿈만을 쫓아 무능력하고 이상주의적이라 생각한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을 한 채 집을 나가버리고, 그런 엄마를 아버지는 일본에 공부를 하러 갔다고 아이들에게 속인다.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가 지어낸 엄마에 대한 거짓말로 인해, 아들 수봉은 엉뚱한 동화를 꿈꾸기 시작한다. 전단지를 돌리며 돈을 모아, 자신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대신 엄마를 찾아, 아니 엄마를 찾아내 행복을 되찾겠다는 꿈말이다. 그래서 전단지 등 각종 알바를 하는 소년의 머릿속에는 아버지가 만든 캐릭터 봉봉이 형제가 갖은 우여곡절을 겪고, 아버지와 함께 성에 갇힌 엄마를 구출해 온 가족이 행복해지는 동화가 펼쳐진다. 수봉이는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그 동화의 힘으로 여관방을 전전하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전단지 알바를 하는 현실을 견딘다. 하지만, 아들의 통장마저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아버지, 그리고 일본대신 일식집에서 일하는 엄마는 소년의 알량한 동화마저도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2015년 대한민국 아버지의 선택
<낯선 동화>의 현실은 현실적이지만, 그 현실을 이야기하는 화법은 말 그대로 낯설다. 창작자로써 자신의 콘텐츠 아이디어를 빼앗긴 아버지, 그 아버지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되찾기 위한 재판을 하기 위해 아들의 통장에까지 손을 댄다. 그리고 드라마는 엄마의 입을 빌려, 그런 아버지를 낭만적이며 이상주의적이라 평가한다. 그렇다고 무능한 아버지 대신 엄마가 아이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버리고, 핑계를 대고 가족을 떠나 버릴 뿐이다. 그리고 집나간 엄마들이 그렇듯 돈을 벌어 아이들을 데려오려 하지만 엄마가 만난 현실은 아버지만큼이나 극한적이다. 

환타지적 요소가 강한 드라마라면 아마도 드라마 후반부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아이디어였던 봉봉이를 되찾았을 것이다. 엄마도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낯선 동화>에 그런 이상향은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탈출을 하다 잡혀가는 <인생은 아름다워> 속 귀도처럼,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통장을 거덜내며 시작한 재판의 잔금과, 아들을 괴롭히는 불량배가 요구하는 150만원과, 이제 돌아올 엄마도 없어 좌절하는 아들들이 기다리는 여관방이 있을 뿐이다. 고시원에서 사는 엄마는 아이에게 넌 이제 아이가 아니라고 눈물로 호소할 뿐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뒤늦게 그런 현실을 깨닳은 아버지가, 자신의 창작 아이디어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을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 노릇을 시작하는 것으로 그린다. 현실에서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불가능해보이는 재판 대신, 사기꾼 친구가 던져준 수표 몇 장으로, 불량배에 시달리는 아들의 위기를 막고,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낯선 동화'판 해피엔딩이다. 결국 2015년 대한민국에서 아버지란 존재는 자신의 아이디어 창작권을 고집하는 것이 '낭만적'인 것이 되었고, 비현실적 싸움 대신, 단 돈 몇 푼이라도 받아서 가족을 챙기는 것이,ㅎ현실적인 선택이 되었다. 이 '낯선' 화법이, 그나마 남은 가족을 위해 최선이 되는 세상, 그것이 2015년 대한민국에서 그려낼 수 있는 동화이다. 

창작자의 아이디어를 보호해 주지 않는 사회, 위기에 빠진 가족을 구제해 주는 제도가 없는 사회에서, 오로지 부모만이, 그리고 부모 중 한 사람이 부모이기를 포기하면 남은 한 사람이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려낸 최선의 '동화'다. 


by meditator 2015. 11. 8. 15:33

11월 6일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10회 시청률은 5.4%(닐슨 코리아 기준)를 기록했다. 그 전회 4%대로 내려앉았던 시청률이 회복을 한 것이다. 하지만, 평균 5%대를 오르내리는 시청률,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은 결국 실패(?)한 드라마가 된 것일까? 시청률, 즉 대중들이 원하는 재미만을 놓고 보면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은 성공적이지 않은 드라마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다면 과연 성공적인 드라마란 무엇일까 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드라마가 추구해야 하는 재미란 무엇인가란 질문도 던져보게 된다. 


시청률표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프로그램들은 수목드라마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는 예뻤다>와 같은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이다. 그게 아니면 '막장'이라도 좋으니 사건의 전개와 선악의 대비와 권선징악의 코드가 분명한 주말, 아침, 거기에 이제는 저녁 시간 드라마들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조명하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나, 다큐 프로그램들은 절대 시청률표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시청률이 높지 않아서 좋은 드라마, 혹은 성공하지 못한 드라마라면, 그래서 사람들이 더 많이 봐야하는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라면, 결국 우리 tv에서 저런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나, 다큐들의 설 자리는 없다.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은 그렇게 사람들이 보기 편한 것, 즐기는 것과, 다수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이야기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시사 고발이나, 다큐와 드라마 라는 장르의 다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편하게 소비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공기(公器)'로서의 방송의 존재론까지 그 질문은 이어진다.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아치아라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하 마을)>이 10회를 마쳤다. 16부작의 장정 중 반을 넘어 온 셈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점점 오리무중이다. 아니, 김혜진의 죽음으로 시작된, 아니 김혜진으로 추정된 백골의 출현으로 시작된 마을 내 사건은 오히려 회를 거듭할 수록 김혜진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용의자로 만들어 간다. 내연 관계로 시작된 사건은 불법 입양으로, 이제 '더러운 피'가 연상케하는 마을 내 유전병의 돌림으로 파문을 확산시켜 간다. 

서창권(정성모 분) 회장과 내연 관계로 추정된 김혜진, 그녀와 머리 끄댕이를 붙잡고 육박전까지 벌인 서창권의 아내 윤지숙(신은경 분)으로 인해 최초의 사건은 이 삼각 관계의 관련자인 서창권과 윤지숙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하지만, 이제 10를 마친 <마을>에서 그 용의선상의 인물을 동심원처럼 퍼져간다. 굳이 천도제를 지내며 젊은 영을 위로하는 서창권의 모 옥여사(김용림 분)의 눈빛도 의미심장하고, 그런가 하면 김혜진을 도와주는가 싶은데, 그녀를 이용해 어떻게든 마을을 떠날 한 밑천을 잡는데 혈안이 된 윤지숙의 동생 강주희(장소연 분)는 도무지 정체를 알 길이 없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건의 실체를 알고 싶다는 서기현(온주완 분)도 석연치 않고, 이제 서창권 뒤의 실세 노회장 등 새로운 배후 인물까지 등장할 참이다.  오히려 마을 주변을 둘러싸고 연일 발생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김혜진 실종 사건에 저만치 밀려버릴 정도다. 심지어 사건을 애써 수사하려는 박우재(육성재 분)와 한경사(김민재 분)까지 한번쯤은 의심하게 된다. 아니 왜 소윤은 그렇게 애써 언니를, 언니의 실종을 캐어내려고 할까?

웬만한 시리즈를 꿰어 놓을 수 있는 연쇄 살인 사건조차 시시하게 만들어 버린 김혜진 실종 사건이 이토록 회를 거듭할 수록 오리무중으로 빠지게 만드는, 거기에 마을의 관련 인물들을 모두 용의 선상에 올리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 누구도 쉽게 선악의 잣대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쉽게 그 누구도 '선'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10회, 소윤(문근영 분)은 늦은 밤 자신을 찾아와 미술쌤 남건우(박은석 분)의 추행을 호소한 가영(이열음 분)을 보호하기 위해 앞장서 신고를 한다. 하지만 신고 과정에서 득의양양한 가영의 태도를 수상히 여긴 소윤이 가영의 핸드폰을 빼앗아 그 내용을 보고,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알게 된다. 남건우에게 사랑을 호소하다, 그와 강주희의 관계를 알고 난 후 배신감에 사로잡힌 가영이, 자신의 허벅지 상처를 확인하려 했던 남건우의 행동을 빌미로 삼아, 그를 추행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이런 식이다. 소윤은 선의로 시작했지만, 그녀의 선의는 가영에 의해 이용당하고 만다. 이런 가영-소윤의 관계는 마을 내 일어났던 사건의 전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 누구의 행동도 곱게 보아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실험적이기까지한 <마을>의 시도 
10회에 이르러 이제야 조금씩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엄마 살려줘!', 김혜진은 유전병인 파브리 병을 앓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혈육을 찾기 위해 이 마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출생은 그녀가 엄마로 추정하고 만난 뱅이 아지매 윤지숙의 생모를 통해 들려주듯이, 원치 않는 것이었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 그 누구도 그녀의 귀환을 반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그 원치 않는 출생과 김혜진의 파브리 병, 그리고 그 병을 가진 것으로 추측되는 가영 등으로 인해 마을 내에는 원치 않는 출생이 더 있음이 그리고 그 원치 않는 출생에 관련된 사람이 서창권만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마을은 김혜진의 출생과 관련된 부도덕한 사건을 통해, 그리고 그 부도덕한 사건을 마을 이라는 공동 사회가 덮으며 어린 아이들을 희생시킨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공동체 사회의 부도덕을 드러낸다. 즉, 우리 사회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다가가 그 허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보기에 그럴 듯한 아름다운 마을, 오래도록 공동체의 정을 나누던 곳, 하지만 그 허명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나면 거기엔, 그걸 유지하기 위해 부도덕한 잡음들을 싹부터 자르고마는 잔인한 전설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잔인한 전설을 덮으며 생존한 마을은, 이제 '관광 특구'가 되고, '카지노'를 만들어 오랫동안 부귀 영화를 누리고자 한다. 이렇게 보면 결국 아치아라는 강원도 어느 골짜기에 있는 이름모을 마을이 아니라, 근현대의 얼룩진 역사를 성장과 성취로 덮으려는 대한민국의 왜곡된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10회에 이르러서도 오리무중인 드라마는 재미가 없을 지는 몰라도, 불편할 지는 몰라도, 말도 되지 않는 '막장'은 아니다. 오히려 모르면 모를 수록, 사건이 확산되어가면 되어갈 수록, 인간의 얼굴을 하고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인면수심의 민낯을 철저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 불가지론의 묘미는 오묘하고 깊다. 그런 면에서 <마을>의 시도는 실험적이기 까지 하다. 선보다는 보통 사람의 얼굴을 하는, 가족의 이름으로 저지른 악의 얼굴을 샅샅이 드러내고, 한 회 한 회 시청률에 일희일비해서 시청자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드라마들과 다른 호흡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이른바 '막장' 드라마 속 가족의 맨 얼굴이, <마을>과 무에 그리 다를게 있을까? 단지 미사여구의 차이일뿐. 그런 면에서 <마을>은 모처럼 짙은 화장을 지운 우리네 삶의 민낯이다. 

by meditator 2015. 11. 6. 14:11

300억이라는 엄청난 제작비와 김명민, 유안인 등 쟁쟁한 출연진으로 화제를 모은바 있는 <육룡이 나르샤(이하 육룡)>는 변함없는 월화 드라마의 강자이다. 하지만, 시청률 1위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막상 시청률로 보면 13.5%(닐슨 코리아 기준)로 제작비와 출연진 대비 궁색한 실적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그에 반해<육룡>에 비해 조촐한 규모와 덜 화려한 (?) 출연진으로 시작한 <화려한 유혹>은 10회 9.6%(닐슨 코리아 기준)로 비록 1위 수성을 하지 못했지만 꾸준한 2위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육룡>이 연출과 번잡한 전개로 호불호가 갈리는 반면, <화려한 유혹>은 2위에도 불구하고 나무랄데 없는 연출과 출연진의 호연으로 칭찬이 마를 날이 없다. 입지가 좁은 1위와 여유로운 2위의 현실이다. 




'욕망'을 향해 달리지만 '사랑'에 걸려 넘어지는 군상들
칭찬이 자자한 <화려한 유혹>, 작가가 <황금 무지개>, <메이퀸>의 작가 손영목으로, <화려한 유혹> 역시 mbc 주말 드라마였던 앞의 두 드라마의 얼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부모 대의 얽힌 악연이 그 자식대에까지 이르러 영향을 미치고, 그 악연의 시작인 '욕망'은 대를 이어 서로의 관계를 일그러지게 만들면서 사건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 <화려한 유혹>은 현재 정치의 막후 실권자로 자리매김한 강석현(정진영 분)이란 인물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그가 정치 인생에 족적으로 남긴 그림자는 그의 자식들 일도, 일란, 그리고 배다른 자식 일주, 강석현의 보자좐이었다가 강석현의 불법 자금의 죄를 뒤집어 쓴 채 스스로 목숨을 거둔 진정기의 아들 진형우, 그리고 진정기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폐인처럼 살다 죽은 운전기사 신기사(정인기 분)의 딸 은수에게 그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당연히 통속극답게 이야기는 '복수'로 부터 시작된다. 남편의 의문사와 자신에게 까지 드리워진 전과자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의 무죄를 밝히고자 강석현의 집에 들어간 은수,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강석현에게서 찾고 그의 가노가 되어 호시탐탐 '전복'의 기회를 노리는 형우는 <화려한 유혹>속 갈등의 엔진이 된다. 그리고 그 엔진의 추동 맞은 편에, 노회한 강석현과, 아버지의 후광 아래 자신의 욕망을 향해 달리는 그의 아들 일도와 딸 일주가 있다. 상위 1%의 정계 집안과, 그 집안의 궤멸을 향해 움직이는 또 다른 '복수'의 열망이 여느 통속극처럼 드라마를 끌어간다. 

그리고 빠짐없이 '사랑'도 추가된다. '동화'처럼 시작되어 '잔혹 동화'로 끝장난 은수와 형우, 거기에 얽힌 일주의 어린 시절의 사랑, 그리고 이제 강석현 집에서 은수를 만난 형우가 매몰차게 은수를 몰아붙이지만, 그녀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듯이, 그리고 그런 형우를 보며 어린 시절 은수에게 저지른 짓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던 일주가 하루 아침에 안면을 바꾸듯, '욕망'을 향해 달려야 하는 그들은 저마다의 '사랑'에 걸려 넘어지기 시작하면서 <화려한 유혹>의 재미는 배가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서 사랑의 백미는 강석현의 사랑이다. 여느 통속극의 부도덕한 과거를 가진 어른의 세대의 대표적 인물인 강석현은 이제 치매끼가 있는 그가 은수를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청미로 오인하여 애닮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이루지 못한 과거의 회한어린 사랑을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정계의 실력자였던 처가의 후원을 등에 업고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 하던 강석현, 비서였던 청미, 그녀를 사랑하게 된 강석현은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자 하였다. 또한 그가 그때 버리고자 했던 것은 그저 사랑만이 아니었다. 정치에서 성공하고자 자신이 배웠던 바를 독재 정권을 위해 '곡학아세(曲學阿世)했던 부도덕한 자신의 정치 생활을 버리고자 했던 도덕적 결단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사랑했던 여인도, 자신의 신념도 지키지 못한 채 여와 야를 오가며 정치의 배후 실권자로 살아남았고, 이제 그에게는 심장이 아픈 상흔으로 그 기억이 남게지게 되었다. 

그렇게 끝까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부모 세대의 대변자인 여타 통속극과 달리, 이전 자신의 행위와 사랑에 대한 회한을 가진 강석현, 그리고 그것을 공감되게 연기하는 정진영의 존재로 말미암아, <화려한 유혹>은 여느 통속극의 궤도를 벗어난다. 이미 <메이퀸>과 <황금 무지개>를 통해 개발 독재 시대를 생존해 왔던 부모 세대의 전사를 서사적으로 펼친 바 있던 손영목 작가의 내공이, 정진영이란 배우를 통해 본래의 의도대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통속극에서 통속 심리극으로의 진화 
거기에, '욕망'을 향해 달려야 하면서도 '사랑'으로 인해 궤도 이탈을 하는 젊은 세대의 갈등, 그리고 그들에 대항한 또 다른 욕망의 포진이, 여느 통속극들이 '막장식'의 사건으로 극을 풀어가는 것과 달리, <화려한 유혹>도 형우에 대한 피습, 은수의 납치, 일주에 대한 폭력 등 여전한 막장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과 사건의 사이에 개연성있는 인물들의 심리 전개와 갈등을 충분히 집어넘음으로써, '심리극'으로서 진화한다. 덕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욕망'과 '사랑'으로 인해 각 인물은 선과 악 그 어느 편으로 섣부르게 폄하할 수 없는 저마다 개연성있는 인간으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11월 3일 10회 마지막, 강석현과 식당에서 단 둘이 앉아 청미인 척 했던 은수를 목격한 일주가, 다음 날 은수를 강석현의 치매를 빌미로 돈을 뜯어내려는 파렴치범으로 모는 장면, 은수를 둘러 싼 강석현과 형우 모자, 그리고 은수의 통장의 돈을 확인하기 까지, 등장인물들 사이에 숨막히는 긴장감과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인물들의 심리가 변화되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진화된 통속심리극으로서의 <화려한 유혹>의 면모를 드러낸다. 

통속극의 묘미는 인간의 민낯을 드러내는 친숙한 그 지점에 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통속극들은 인간의 민낯이란 미명 하에, 욕망의 점철로 이어지고 섣부른 권선징악의 주제 아래, 막장식의 전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화려한 유혹>이 현재까지 보인 성취는 주목할 만 하다. 똑같은 이야기도 어떤 그릇에 담아, 어떤 시선에서 어떻게 요리하는가에 따라, 진짜 인간의 민낯을 제대로 드러내며 섣부른 권선징악 대신, 인간의 한계와 회한, 반성을 담아낼 수 있는 가를 <화려한 유혹>은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부디 이 실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뻔한 통속극의 진화가 이루어 지기를. 
by meditator 2015. 11. 4. 15:09

김영현, 박상현 작가의 sbs 월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정현민 작가의 kbs 대하 드라마 <정도전>이라는 전작의 무게를 얹고 시작하였다. 하지만 10회을 앞둔 <육룡이 나르샤>를 두고 그 누구도 <정도전>의 그늘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정도전>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정극 버전이었다면, <육룡이 나르샤>는 역사라는 밑그림에서 특징적 인물과 사건을 떼어, 새로이 그려낸 '퓨전' 사극의 향기가 짙기 때문이다. 




길태미와 홍인방, 실질적 악의 축
이제 9회를 마친 <육룡이 나르샤>는 '혁명'을 이야기한다. 고려라는 막장을 극복할 새로운 시대로써의 '혁명'. 그 '혁명'을 맞이하기 위해 고려는 날마다 더더욱 어둠이 깊어만 간다. 백성으로부터 30%를 받던 세율을 90%로 늘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먹고 살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한 백성의 땅을 그 개간한 백성들의 목숨까지 거두며 권세가들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고야 만다. 일찌기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고려 말 백성들이 스스로 권세가 농장의 농노로 전락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은(?)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는 개연성있게 설명해 낸다.

그리고 이런 깊은 밤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로서 길태미(박혁권 분)와 홍인방(전노민 분)을 등장시킨다. <정도전>이 정도전이란 인물을 품어내기 위해 '악의 축'으로서 이인임이란 역사적 캐릭터를 형상화시키는데 성공적이었다면, <육룡이 나르샤>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은 길태미와 홍인방이다. 이미 이인임(최종원 분)이라는 기존 권세가가 자리를 잡고 있는 가운데 새롭게 부상한 권세가로써 어떻게든 자신의 권력과 부를 끌어모으려는 그들의 욕망은 고려 말의 막무가내 식 권력의 부도덕을 가속화시킨다. 

극중 이인임이 <정도전>의 이인임과 비슷한 노회한 권력으로 등장하는 반면, <정도전>에서 막무가내 권신으로 잠시 등장했던 길태미와 홍인방은 극 중 '육룡'이 '혁명'을 잉태하는데 결정적 엔진이 된다. 즉 이제 10회를 앞둔 드라마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해도 무방하다. 비록 그 편이 '악'이긴 하지만. 

첫 회부터 몇 시간에 걸친 화려한 눈화장으로 등장하여 조선 제일검이라 하면서도 이인임 앞에서 철부지 아이처럼 굴던 길태미의 캐릭터는 단박에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아이 같은 순진함으로 '땅을 더 가지고 싶어'라며 서슴지 않고 다른 중신과 백성들의 땅을 탐하는 길태미의 캐릭터는 <육룡이 나르샤>를 매력있게 만든 주요인이 되었다. 그런 아이러니하나 캐릭터를 출연하는 작품마다 비중과 상관없이 캐릭터를 설득력있게 그려낸 박혁권이 역시나 길태미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가 하면, 사형 정도전을 구하기 위해 한 달음에 달려와 그를 설득하고,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그래서 그와 함께 유배까지 다녀온 홍인방 역시 그 등장부터 존재감이 남달랐다. 그랬던 그가, 유배 후에 180도 변신, 가장 극악하게 권력과 부를 탐하는 존재가 된 것은 길태미에 이은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되었다. 심지어 성균관 동학이었던 그와 정도전이 맞붙는 씬에서 일찌기 그 누구와 붙어도 존재감이 남달랐던 정도전의 김명민과 그 존재감에서 우위를 점치기 힘들 정도의 연기를 보인 홍인방 전노민의 안정적인 사극 연기는 홍인방의 비열함을 묘하게 가속화시킨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다가오리니 
그렇게 박혁권과 전노민이란 걸출한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아직은 '혁명'이란 문구가 생경하게 다가오는 드라마에서 '혁명'의 개연성은 깊어져만 간다. '혁명' 세력이 '혁명'을 잘 조직해서 '혁명'이 기대하는게 아니라, 악의 축들의 만행이 깊어져서, '혁명'을 당연시하도록 설득해 내는 것이다. 즉 <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퀼로써 그 존재를 드러낸 '본원' 정도전의 활약은 아직은 뜬구름잡듯 '음모가'에 지나지 않지만, 그 섣부른 음모조차도 개연성있도록 길태미와 홍인방의 '욕망'은 거침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욕망은 현존재적이다. 이인임이란 인물이 전통적인 권신의 모습으로 기존 사극 속 집권 세력의 노회함을 드러낸다면, 길태미는 최근 드라마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악역들 처럼 소시오패스(사회적 규범이 없는 사람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죄책감이 없으며 그것이 잘못인지를 인정하지 못한다)적 성향을 보인다. 아이와 같은 순진함으로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한번 지고나면 죽음이라는 그의 무인론에 근거한 생존 방식은 더더욱 '복지부동'의 그 누군가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홍인방은 더더욱 기시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 시작은 개혁적이었으나, 자신이 머리를 채운 지식을 역이용하고, 그 머리에서 나온 지식을 세 치 혀로 휘감아 세상을 농단하는, 그 인물은 최근 '국정화 교과서'를 필두로 우리 사회 보수라고 말하기도 수준에 닿지 않는 반동적 획책에 앞장서는, 그 머리가 되는 일군의 인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때는 그 누구보다 고고한 학식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그 바뀌지 않은 얼굴로 정권의 나팔수로 앞장서 팡파레를 울리는 그들을 고문받는 자리에서 바로 자신의 존재를 바꾸버린 홍인방을 통해 설득해 낸다. 

그런 길태미와 홍인방의 캐릭터, 그리고 고려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워가는 그들의 욕망을 통해 현재의 막가파식 권력과, 그들의 욕망을 복기하게 된다. 또한 그들의 욕망이 결국은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는 드라마적 설정에 포기했던 희망마저 피어오르게 만든다. 욕망이 욕망을 낳아, 결국 기존의 권세가였던 이인임과 최영과의 관계마저 긴장 관계로 만들게 된 길태미와 홍인방, 그들의 욕망의 에스커레이션 덕분에, 무인 최영, 권신 이인임, 거기에 이인임을 뒷받침하던 무인 길태미와 사대부 홍인방의 아슬아슬한 연합체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각자는 자신이 버릴 카드와 새로이 선택할 카드를 신중하게 고르기 시작하였고, 거기서 이성계와, 정도전의 안변책은 조커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는 이런 역사적 긴장 관계의 궤멸에 '필연적 계기 속의 우연"이라는 재미를 던져준다. 마치 베를린 장벽의 붕괴라는 역사적 필연이 대변인의 말실수와 그 통역의 잘못이라는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것처럼, 길태미와 홍인방, 최영, 이인임 사이의 일촉즉발의 긴장 관계가 땅새의 분노로 인해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궁지에 몰린 홍인방이나 이인임은 자신의 파멸을 재촉하게 만들, 스스로 손발을 묶어 놓았던 이성계와 정도전에게 스스로 날개를 달아주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현하고 만다. <육룡이 나르샤> 9회는 바로 그 필연와 우연의 콜라보레이션, 그 곳에서 빚어지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by meditator 2015. 11. 3. 14:53

거리를 걷다 문득 눈에 들어 온 시뻘건 테두리의 현수막, 거기엔 '김일성 주체 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라는 새누리당의 국정 교과서 선전 문구가 쓰여져 있다. 저 '얼토당토치 않은' 문구가 고즈넉한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 걸려 있다니! 도대체 왜? 저 당이 바보 같아서? 한심해서? 아니, 냉정하게 보자면 그게 먹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을 읽은 이 아파트 단지 주민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현재의 국사 교과서가 어떤가 제대로 알아보려고 하기도 전에, 새누리 당이 제시한 '좌경 프레임' 속에서 덜컥 가슴이 우선 내려앉을 수도 있을 터이니. 이런 식이다. 여당은 동네 곳곳의 식당에서 하루 종일 틀어져 있는 종편을 통해 그들이 제시한 '색깔론 프레임'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사람들을 그 프레임에 걸려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넘어진다. 야당이라고 그리 신통치 못하다. 


이런 말도 되지 않은 프레임 정치가 통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선입견, 고정 관념이다. 6.25라는 민족적 트라우마를 넘지 못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저 시뻘건 테두리의 색깔 선동은 여전히 일정 부분 유효하다. 사람들은 스스로 진실을 알아가는 대신에 미디어와 세상에 떠도는 소문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신념을 추수한다. 그게 중뿔나지 않게 세상에 얹혀가는 대한민국의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소용되었기 때문에, 아파트 단지 안에 버젓이 김일성 주체 사상 운운하는 현수막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손바닥 뒤집는 듯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 
도대체 드라마 <마을 - 아치아라의 비밀>에 대한 리뷰을 쓰겠다고 해놓고 웬 생뚱맞은 새누리당 현수막이니 프레임이니 하는 엉뚱한 소리만 하냐고? 바로 그 세상에 속편하게 얹혀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가 sbs의 수목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마을에 들어온 외지인 김혜진의 실종 사건, 그에 이어 등장한 백골 사체에 대한 수사 사건, 그리고 거기에 얽힌 한소윤, 소정 자매의 사연을 풀어가고 있는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그런데 이 드라마의 제목은 김혜진 실종 사건도 아니라, 아치아라라는 생경한 지명을 내세운 마을이다. 왜 마을이었을까? 그 의문을 8회에 이른 드라마는 조금씩 풀어내고 있는 중이다. 

비오는 저녁 음산한 기운을 드리우며 한소정을 맞이했던 아치아라, 하지만 마을이라는 '촌스런' 지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치아라는 관광 특구 지정을 눈 앞에 둔 제법 큰 소도시이다. 오히려 그 발전된 모습과 달리, 이곳이 여전히 마을인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그 속내를 뻔히 아는 토착적 문화와 분위기가 지배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을의 분위기는 역으로 마을 사람이 아닌 외지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으로 드러난다. 즉 우리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외면과 배척이다. 

김혜진(장희진 분)은 드물에 아치아라에 등장한 외지인이다. 마을의 미술 학원 쌤으로 일을 하던 그녀는 마을의 중심 인물인 서창권(정성모 분)과 불륜을 일으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사라졌지만 마을 사람 그 누구도 사라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이년 여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 다시 또 한 사람의 외지인이 마을에 등장한다. 마을의 고등학교에 영어 교사로 온 한소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묘하게 김혜진이 쓰던 공간을 물려받은 그녀는 김혜진의 유골을 발견하는 등 가는 곳곳마다 사라진 김혜진의 흔적과 조우한다. 그리고 이제 8회에 이르러 드디어 김혜진이란 이름의 그녀가 사실은 한소윤의 의붓 언니였던 한소정임이 드러난다. 

한소정은 아이들의 선생님이란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심지어 서창원의 아내 윤지숙은 이상한 자신의 아이 유나(안서현 분)의 문제로 의지하기 까지 했었다. 하지만 한소정이 김혜진으로 살았던 한소윤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순간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돌변한다. 따랐던 아이들은 한소정에게 '환향녀'라며 한소정과 동급으로 취급하며 대놓고 조롱을 하고 무시하고, 친절하던 마을 사람들은 물까지 뒤집어 씌우며 악다구니를 퍼붓는다. 김혜진의 장례식에 까지 왔던 그 사람들이. 

분명 서창권과 함께 불륜을 저질렀음에도(?), 오로지 김혜진에게만 돌팔매를 던진 사람들, 그래서 그 김혜진이 사라져도 그 누구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김혜진의 엄마연 하는 사람이 뒤늦은 장례식을 하겠다고 하자, 그 장례식에 나타나 아낌없는 동정을 표명하는 사람들, 그러나 아이들의 선생님인 한소윤이, 그 김혜진의 동생이라고 하자, 불쾌감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심지어 아이들의 선생님으로서 자질을 운운하기까지 하는 사람들, 바로 이 비논리적인 도덕적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아치아라의 사람들이고, 드라마는 이들에 주목한다. 



공모자 마을 사람들
부도덕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이 우리 안의 사람이라면, 심지어 그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남자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라 눈 한번 찔금 감는 반면에, 그 상대인 여성, 외지인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모욕과 배척을 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사회적 정치적 삶을 박탈 당한 채 생물학적 삶만을 가진 존재, 박탈당한 삶, 배제된 존재)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 대한 이해 관계가 없는 하지만 자신의 인간적 모습을 표명할 수 있는 장례식 같은 곳에선 거침없이 '인도적' 행위를 보인다. 그러나, 그 과거화된 사건이 다시 현재로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거침없이 '폭력적'으로 변화된다. 그 진실이 자신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님에도, 마치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부도덕한 사태에 대한 동참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치 상처입은 까마귀를 그 동료들이 달려들어 부리로 짖이기듯, 그 피해자와 그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던짐으로써 마을의 위장된 평화를 지키고자 한다. 

8회를 경과하며 드러나는 마을 사람들의 이런 표리부동한 폭력적 감정에서는 기시감이 느껴진다. 하루 아침에 태도가 돌변하여 선생님에게 '환향녀'라 손가락질을 하는 아이들, 김혜진에 대한 진실을 알려고 하는 대신에, 마을에 덧씌워진 불륜의 프레임에 가장 앞장선다. 진실 대신에 어른들이 가르쳐 준 왜곡된 도덕 교육(?)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참교육'을 해야 하는 필요성은 새로온 선생님에게 거침없이 수모를 안기며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에게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값싼 동점심에는 후하다가도, 그것이 묵은 해원을 긁어 올리며는 거침없이 불쾌감을 넘어 폭력적 태도마저 드러내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서는 '세월호 사태' 등에 대한 대한민국 사람들의 태도가 고대로 복습된다. <마을 -아치아라의 비밀>에서는 아직도 사건도, 범인도 윤곽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회를 거듭할 수록, '심정적 공모자'인 마을 사람들의 표리부동은 도를 더한다. 사건이 불법 입양이든 불륜이든 상관없이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가능케 한 공모자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by meditator 2015. 10. 30. 16:18

10월 26일 첫 선을 보인 tvn의 월화 드라마 <풍선껌>은 늦가을의 시린 마음을 달래 주기에 손색이 없는 로맨틱 멜로 드라마이다. 여느 사랑 이야기와 달리, 드라마는 1회 사랑하는 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싸들고 나온 여주인공으로 시작된다. 사랑의 시작이 아닌, 그 끝에서 시작된 드라마는 이 가을 가슴 시린 시청자들을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주인공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개연성있는' 관계를 직조해 나가기 시작한다. 한 집에서 자라났지만 서로가 이성에 눈을 뜰 사이도 없이, 버려질 두려움에 밀려나버린 여주인공, 그런 여주인공의 아버지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배려맨'이 되어버린 남주인공, 그리고 그들 곁에 저마다의 사연으로 포진한 개성 강한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그 공감가는 이야기의 결을 살린 분위기있는 화면과, 그 분위기를 한껏 배가시킬 ost들, 마치 달콤한 음식에 저절로 손이 가듯 스르르 드라마에 휩쓸리게 만든다. 이동욱, 정려원은 역시나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한껏 살리고, 시크한 이종혁과, 상처받은 듯한 눈매의 박희본도 반갑다. 




스펙좋은 이들의 그들이 사는 세상 
그런데, 드라마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소개가 끝나갈 즈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상처를 받았네 어쩟네 하지만, 결국 백화점이나 병원 집 자손에, 그게 아니라도 부모 없이 자라도 씩씩하게 공부 잘해서 피디가 되거나 해야 하는 건가 라는 의문말이다. 방송 도중 자살을 하겠다고 옥상에 오른 고등학생을 달래느라 두서없이 던지는 여주인공 김행아(정려원 분)의 대사는 학창 시절 공부를 잘 해 1등도 했지만 지금은 만년 꼴등이었던 DJ보다 못번다이다. 그런가 하면 방송국 숙직실에서 라면이나 끓어먹는 조동일(박원상 분)은 말한다. 방송국에 발에 걸리는 게 서울대라고. <프로듀사> 에서도 서울대 나온 백승찬(김수현 분)의 굴욕을 드라마는 중요한 관전 포인트로 삼더니, 이젠 그 스펙에 이런 일이 드라마 속 주요 설정이 되어간다. 드라마 속 그들은 자조적으로 스펙좋은 자신들의 삶을 투정하듯 말하고, 시청자들은 그걸 여사로 들어 넘기지만, 현실은 말한다. 밤을 꼴딱 새서 측른들이 걱정하는 라디오 방송국 DJ라는게 이른바 '언론 고시'를 통해야 하고, 그 방송국에 가면 발에 걸려 넘어진다는 서울대 역시 때론 수능을 만점 받아도 떨어지는 곳이라는 것을. 

잘 나가는 선남선녀들의 사랑 이야기는 <풍선껌>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니 더 문제다. 요즘 한창 인기몰이 중인 <그녀는 예뻤다> 속 주인공들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이 드라마 속 여심을 설레는 남주인공들의 직업은 여성지 부편집장에 기자다. 비록 부수 경쟁에 밀려 몇 달 후에 모스트가 폐간될 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성준(박서준 분)은 미국 본사에서 온 엘리트 부편집장에, 어수룩하고 털털한 김신혁(최시원 분)은 호텔 스위트 룸에 사는 능력있는 명칭부터 멋들어진 피처 에디터이다. 여주인공들도 그리 다르지 않다. 민하리(고준희 분)는 집안 좋은 호텔리어이다. 이들에 비해 외모에서 부터 딸리는 여주인공은 낡은 윤전기를 돌리는 광고업자 집안의 미래를 기약할 길 없는 인턴 사원이지만, 여성지 인턴도 현실에서는 그리 만만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구직자들은 안다. 허긴 멜로 드라마 뿐인가.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이들은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부모님들이 원하는 직업 상위 50위 안에 들 직업만을 가지고 나타난다. 



삼포, 오포 세대의 거세된 욕망의 표현?
직업만이 아니다. 드라마 속 그들에게는 '전세 대란'이란 없다. '월셋집 전전' 역시 남의 일이다. 그 정도 스펙에 그런 집은 당연하다는 듯, 하늘을 찌를 듯 깍아지른 아파트 숲이 그들의 집이다. 집뿐만이 아니다. 그 집의 실내를 채우는 인테리어의 면면은 그 바쁜 사람들이 언제 그렇게 멋들어지게 꾸몄는지 웬만한 인테리어 업자가 두 손 들고 갈 정도로 세련됐다. 어디 인테리어 뿐인가. 주방을 채운 한 눈에 보기에도 럭셔리해보이는 주방 가전이며 기구, 용기들은 또 어쩌고. 마치 그 정도 직업에, 그 정도 집에, 그런 인테리어는 할 수 있어야 드라마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은연 중에 말하는 듯 하다. 10월 24일 방영된 드라마 스페셜 <짝퉁 패밀리> 속 엄마가 진 빛을 10년 넘게 갚고, 여행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삶이 지긋지긋해서 의붓 동생마저 외면한 채 제주도에서 1년만 살다 죽겠다고 결심한 여주인공의 현실은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그 어는 곳의 사랑 이야기에서도 발을 붙일 곳이 없다. 

황교익 평론가는 최근 범람하고 있는 먹방, 요리 프로그램에 대해 현실에 욕망을 거세당한 현대인들의 '구순기적 정체'의 표현이라 정의내리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드라마 속 현실에서 쉽게 취득할 수 없는 버젓한 직업, 소유하기 힘든 커다란 나의 집, 그리고 그 집을 채우기 버거운 멋진 만큼 비싼 인테리어로 대변되는 사랑 이야기는, 사랑조차도 '포기' 해야 하는 삼포, 오포 세대의 또 다른 거세된 욕망을 채워주는 '환타지'가 아닐까. 그런데 과연 그 욕망은 '위로'일까? '환각'일까? 이 가을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달달한 사랑 이야기에 쉬이 젖어들지 못하는 건 현실의 퍽퍽함이 깊기 때문이다.

by meditator 2015. 10. 28. 1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