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복수가 지천에 늘어져 있는 tv드라마에서 생소한 화법의 두 드라마가 있다. 바로 sbs월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와, jtbc금토 드라마 <송곳>이 그것이다. 고려 말 권력 투쟁을 다루는 드라마라 생각하며 리모컨을 고정한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혁명'이 등장하고,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발 내딛고 마는 그런 인간의 이야기 <송곳>은 섬세하게 노동조합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고려 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의 혁명과, 2003년년 까르푸 노동조합을 배경으로 했음에도, 역설적으로 드라마 속 현실은 2015년의 현실을 복기한다. 그래서, 드라마 속 '혁명'은 과거의 혁명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요, 드라마 속 노동조합으로의 결집은 현실 속 우리의 단결을 촉구한다. 




'혁명 전야' <육룡이 나르샤>
왜 고려 말이었을까? 그것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답을 해준다. 백성들이 가진 것 30%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 90%로 세율을 높이는 권력, 그것도 부족하여 백성들이 피땀으로 일군 황무지까지 자신의 힘을 동원하여 빼앗는 권력,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는 권력, 빼앗긴 자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 나라, 가진 자들의 권한이 되어버린 나라, <육룡이 나르샤>는 말한다. 그건 더 이상 그 누군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그리고 그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고려 말에 시청자들은 묘한 현실의 기시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고려 말에 새로운 지켜야 할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혁명'을 외치는 일군의 무리들이 등장한다.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퀄로서 드라마는 본원 정도전(김명민 분)을 그 핵심에 두고, 그를 중심으로 이성계(천호진 분), 이방원(유아인 분), 땅새(변요한 분), 연(정유미 분), 분이(신세경 분), 무휼(윤균상 분) 등의 여섯 용을 등장시켜, 고려에서 조선이라는 역성 혁명의 과정을 그려낸다. 

조선의 시조 이성계의 성업을 기리기 위해 정도전이 지었다는 '용비어천가'는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건국까지 이성계의 선조들의 업적을 전설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중 첫 구절, '해동의 육룡이 나르시어, 그 행동하는 일마다 하늘이 내리신 복이시니'에서 유래된 <육룡이 나르샤>는 이성계의 선조 육룡 대신, 하잘것없는 백성들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는 곧,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을, 그저 왕씨 왕조에서 이씨 왕조로의 역성 혁명이라는 왕조의 변화가 아니라, 고려 말 그 억압의 구조를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민중'의 대변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상징적으로 '용'으로 승화시켜, 조선의 건국이 바로 이런 '민중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드라마는 그리고자 한다. 그에 따라 드라마는 장황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구구절절 땅새와 연희, 그리고 분이와 무휼의 사연과 역할을 부여하기에 고심한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정도전과 이성계, 이방원의 대업이 아니라, 바로 고려 말 민중의 참을 수 없었던 저항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참을 수 없음과, 저항 의지는 곧 견디기 힘든 우리의 현실로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더구나 이방원을 비롯하여 분이, 무휼 등이 대부분 젊은 연기자인 이 드라마의 육룡들의 활약은 결국 2015년 젊은이들의 각성과 행동을 촉구한다. 



2015 당신을 위한 노동조합 안내서, <송곳>
시작은 이수인(지현우 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제 스스로도 그 다음에 어떤 결과가 올 지 뻔히 알면서도 불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듯 그렇게 삶의 고달픈 행보를 밟으며 살아왔던 이수인의 지난 여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등학교 시절, 육사생도 시절, 늘 선택의 고민이 이수인을 휩싸였던 순간, 이수인은 결국 송곳같은 결정을 내리지만, 동시에 그의 결정은 그걸 지켜본 시청자들에게 지금 혹은 지나간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 이수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푸르미 마트의 노조원들과, 구고신의 노동상담소에 있는 문소진(김가은 분)으로 확산되어 가는 송곳들의 행렬, 그들이 선택한 노동조합의 여정은, 또 다른 질문을 시청자에게 던진다. 드라마는 매 상황마다, 섣부른 정답의 행보를 가는 대신, 의문부호와, 물음표를 던진다. 노동상담소 소장 구고신은 함께 모여 싸움을 하려고 하는 푸르미 식구들에게 지표를 제시해 주지만, 동시에 그들이 얼싸안고 쉽게 들썩일때 마다 찬물을 뿌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세상은 강고하고, 세상의 편견은 그보다 더 굳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구고신의 찬물 덕분에, 역설적으로 <송곳>은 쉬이 희망에 중독되지 않도록 한다. 노동조합 만들기의 여정이 어설프게 강령하되지도 않는다. 드라마의 제목, 송곳처럼, 어쩌지 못해 벼랑인 줄 알면서도 선택하는 과정처럼, 서로가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키며 살기 위해 결국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최후의 선택지로서, 그리고 단단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2003년 까르푸 노동조합 결성 과정을 다루지만, 드라마에서 시작된 정규직 해고와 비정규직 확산의 현실이 2015년의 암울한 현실에 잇닿아 있기에, 오히려 <송곳>의 2003년은 현실적이다. 또한, 이제는 굴뚝에 올라가서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하는 열악한 현실이, 더더욱 구고신의 찬물 한 바가지가, 드라마가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자기번민이, 드라마 속 대안을 수긍하게 만든다. 세상에 세뇌당하고, 현실에 지레 무릎끓은 시청자들은 그래서 <송곳>을 보며, 역설적으로 정답을 찾아간다. 

by meditator 2015. 11. 10.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