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아는 분이 아들네가 둘째를 가졌다고 말씀하셨다. 시작은 축하한다였지만 결국은 '어떻게 해요'라며 걱정으로 마무리되었다. 출생율은 매년 최저를 갱신하고 있는 시절, 하나라도 더 낳으면 좋은 일 아닌가 싶지만, 현실은 혹독하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집안, 그나마 좋은 직장을 다녀서 어린이집의 혜택을 받는다지만, 일찍 끝나는 어린이집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할머니'의 몫이다. 아이를 돌보는 할머니가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또 다른 할머니가 그 '대타'를 하기 위해 서둘러 와야 하는 처지다. 할머니가 아프기라도 하면 완전 비상이다.
아이는 엄마가 낳지만 그 아이 하나를 기르기 위해 온 가족이 다 동원되어야 하는 현실, 그래도 그나마 봐줄 할머니가 있으니 낫다지만, 자식에 이어 손주까지 돌보는 할머니의 형편은 그리 녹록치 않다.
돌봄 공백을 몸으로 때우는 할머니 시작은 이제 60줄에 들어선 허정옥 씨네 집이다. 아침부터 일어나기 싫은 손주를 질질 끌다시피 이끌고 업고 하여 허정옥 씨가 출근한 곳은 같은 아파트 15층에 사는 큰 딸네 집이다. 두 명 중 한 명의 손주를 자신의 집에서 재운 정옥씨, 손주를 데려다 놓으면 끝이 아니라 그때부터 그녀의 육아 전쟁이 시작된다.
두 손주와 실랑이를 벌이는 딸 대신 그 집 식구들 아침 챙기기부터 시작된 정옥 씨의 아침은 아이들을 겨우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어지러진 딸네 집안을 챙기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가 싶더니, 오후 4시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와서 딸이 올 때가지 끝나지 않는 놀이 지옥 속에서 할머니의 혼을 쏙 빼놓는다. 직장에서 돌아온 딸은 힘들다고 꼼짝하지 않고 그 대신 엄마인 할머니가 동분서주 바쁘다.
2016년 큰 애를 낳으면서 시작된 황혼 육아, 딸은 경제적으로 도움을 드린다지만 할머니 입장에서는 자식 생각해서 해주는 일이지 돈 생각했으면 못할 일이라 고개를 내두른다. 이제는 제법 큰, 하지만 여전히 아기같은 손주들을 번쩍 번쩍 안고 업고 하다보니 체력적으로 힘에 부쳐 약을 달고 산다. 병원에서는 오래도록 쓴 육체가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다며 휴식을 요구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2018년 보육 실태 조사에 따르면 아이를 개인에게 맡기는 경우, 83.6%가 조부모라는 결과가 나왔다. 더구나 아이를 돌보는 조부모들 중 열 명 중 한 명은 일주일에 7일 동안 아이를 돌보고 있는 과도한 황혼 육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 자식이 힘들까 참여하기 시작한 황혼 육아에서 조부모들, 특히 할머니들은 손목터널 증후군, 관절염, 척추염 등 '손주병'을 얻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안은 없다. 여전히 오랜 시간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 자식 세대에게 맞벌이를 그만두거나 할머니에게 맡기거나 밖에 없는 현실, 믿을 곳이 되어주어야 하는 조부모들의 처지는 녹록치 않다.
이에 전문가는 설사 믿고 맡기는 내 부모라 하더라도 과연 어디까지 맡길 것인지, 즉 시간이나 조건에 있어서 명확하게 육아의 한계를 약속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 이제 곧 둘째 출산을 앞둔 문미예 씨 집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온 가족이 육아에 참여한다. 아침 일찍 딸네 집으로 출근한 할아버지 문정기 씨가 오전 중에 손녀를 돌보면 오후에 할머니가 와서 돌봄을 이어가는 식이다. 가족마다 2~6시간 씩 시간을 나눠 한 사람에게 '독박 육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데 이런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가족들이 어디 쉽겠는가.
마음의 벽을 쌓는 황혼 육아 하지만 애본 공은 없다고, 할머니의 황혼 육아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대구에서 김포로 9살 손자를 돌보러 오는 73세의 곽정화 씨, 그런데 먼 길을 어렵게 온 할머니를 대하는 손주의 태도가 영 석연찮다. 하교 길에 반기는 할머니한테 대뜸 '왜 할머니야'라고 볼멘 소리를 내놓고 하더니 집에 와서도 할머니한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하지만 카메라에 비친 할머니도 만만치 않다. 꿀먹은 벙어리같은 손주에 대한 섭섭함을 피력하는 것도 잠깐 앉은 자세부터 연신 잔소리다. 며느리가 돌아오니 태세마저 전환하신다. 대놓고 첫 째 며느리를 본받으라 한다던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음식 만들기에 남자 아이들한테 웬 부엌 일이냐며 핀잔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 참다못한 며느리는 방학을 핑계대며 할머니가 이제 먼 길을 고생하며 오시지 않아도 된다하고,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섭섭하다.
이렇게 막상 아쉬워서 부탁한 황혼 육아지만 집집마다 젊은 며느리 세대와 나이든 할머니 세대의 육아 방식의 갈등은 가족 내 위기를 조성한다.
69세 김복순 씨 역시 며느리의 부탁으로 함께 살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큰 손주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할머니는 밥을 먹다 말고 라면을 먹고 싶다는 손주에게 라면을 끓여준다. 마트에 가서 장난감을 사고 싶다면 말리는 엄마한테 그게 얼마나 된다며 하며 손주 역성을 드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눈치가 빠른 아이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할머니에게 부탁하고, 그런 관계에서 소외된 엄마는 자신이 귀찮은 큰 누나가 된다며 상실감을 호소한다.
실제 2015 보육 실태에 따르면 황혼 육아를 하는 세대의 50%가 양육 방식의 차이로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할머니와 엄마의 권한 사이에서 정작 피해를 보고 있는 건 아이들, 곽정화 씨의 9살 손자가 마음을 닫은 건 잔소리 많은 할머니로 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제 아무리 할머니 세대에게 육아를 맡겨도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건 부모 세대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디 전문가의 고언대로 될 수 있을까. 다큐 속 할머니는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이해를 더하며 한 발 물러서셨지만, 자기 자식들을 키우며 평생을 살아오며 '습'처럼 익혀진 삶의 방식에서 나오는 조부모 세대의 사고 방식이 쉽게 변화되는 건 쉽지 않다.
보육 시스템의 부재, 그런 가운데 기댈 곳은 부모님 밖에 없는 현실, 하지만 정작 내 자식이 힘들까봐 시작한 황혼 육아에서 몸도, 마음도 다쳐가는 부모님들,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가족의 문제로 치환시킨 현상은 문제점은 명확하지만, 해결책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 그 딜레마를 감수하고 굳이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을까란 최저 출산율의 딜레마로 귀결되는 것이다.
지난 5일 다이어트 산업 배후에 치열하게 벌어지는 음식 정치를 다루었던 <sbs스페셜- 끼니外란> 이 12일 그에 이어 영양제에 타깃을 맞추었다. 다이어트 산업만큼이나 우리 사회에서 매우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영양제 시장, 그 필요성에 대한 평행선같은 주장과 그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막후 전쟁'을 다룬다.
평행선과 같은 영양제 진실 게임 대항해 시대 오랜 항해 동안 신선한 채소를 먹지 못해 선원들이 죽어가며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비타민 c의 중요성, 이처럼 비타민과 미네랄 등은 그 존재를 '결핍'을 통해 드러내는 우리 몸의 중요한 영양소이다. 발달한 약품 산업은 햇빛을 잔뜩 품은 양털을 용매제에 끓여 비타민 D를, 아스팔트 원료로 부터 비타민 C 등을 추출하여 대중적으로 싼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 미국에 한해서만 한 해 53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산업이 되었다.
영양제 찬반 논란의 서막을 연건 영양제 전도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여에스더 홍혜걸 의학 박사 부부이다. 방송 등으로 바쁜 두 사람 과도한 업무와 불규칙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갖가지 영양제로 극복하고 있단다. 모양만 영양제지 식품이나 마찬가지라며 아침 식사를 한 후 밥 한 공기 양에 버금가는 26알의 다양한 영양제를 이제는 한번에 먹을 수 있다는 내공을 펼쳐보이는 홍혜걸 박사. 30대 후반부터 젊음과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양제를 섭취해 왔다는 홍 박사는 굉장히 저비용으로 과로로 인한 신체적 부담과 불규칙한 식사로 인한 영양 불균형을 해결할 수 있다며 영양제 적극 찬성 의견을 피력한다.
반면 <세계는 뚱뚱하다>라는 저서를 통해 비만의 사회학을 연구해온 베리 팝킨 교수의 입장은 다르다. 그때 그때 나는 지역 농산물에서 제철에 먹을 채소와 과일을 섭취하는 팝킨 교수는 영양제 무용론을 주장한다. 자연에서 충분한 영양을 취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더구나 기름진 음식이나 정크 푸드를 먹으면 아무리 좋은 영양제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좀 다른 의견도 있다. 젊어 각종 질병으로 고생했던 폴 자미넷 수칭 부부의 겨우, 식습관의 변화를 통해 만성 질환을 고쳤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자신들의 전공을 떠난 암과 각종 질병 연구에 헌신하는 두 사람을 사골 국물로 무기질을 , 내장 중심의 고기 섭취를 통한 단백질을, 코코넛 오일로 지방을 섭취하는 식단으로 하루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그럼에도 이런 음식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특히 겨울철에는 비타민 D가 부족하고, 일주일에 12개의 굴로 아연 섭취를 충족시킬 수 있다지만 막상 12개의 굴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며 매일, 혹은 일주일에 한번씩 부족한 영양 성분을 각종 영양제를 통해 섭취할 것을 주장한다.
자연 식품을 통해 영양소 섭취를 주장하는 하버드 권장 식단 역시 종합 비타민과 비타민 D는 영양제를 통해 섭취해야 한다고 권장한다. 반면 가정의학과 명승권 교수는 '비타민부터 끊어라'라고 주장하는 비타민 무용론 전도사이다. 22편의 임상 실험을 통해 비타민 등 각종 영양제가 암 예방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특히나 방광암의 위험성은 52%나 증가한다는 것이다.
에린 미코스 존스 홉킨스대 교수 역시 비타민 섭취가 심혈관계 질환 예방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며 비타민 D와 칼슘을 함께 섭취했을 때 외려 뇌졸증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힜다.
특히 최근 노화를 막자우는 묘약으로 부각되고 있는 항산화제의 경우, 선충에게 이 항산화제를 과다 투여했을 때 도리어 죽음에 이르렀다고 마이클 리스토 교수는 주장한다. 운동을 하며 항산화제를 복용하면 오히려 건강이 안좋아지는 반면, 차라리 항산화제 없이 운동을 했을 때 혈액 신진대사가 좋아지고 당뇨병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타민의 실제 효용은? 이렇게 맞물리는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제작진은 실험을 한다. 라면을 주식으로 삼다시피한 남요한 씨, 건강을 챙기기위해 마치 식사의 한 과정처럼 다양한 영양제를 복용하는 현지씨, 저탄수고지 다이어트를 했지만 지금은 요요에 시달리고 있는 이영훈 피디 등의 영양 상태를 조사한 것.
결과는 뜻밖이다. 세 사람 모두 비타민 B6가 과잉으로 나타났으며 우려와 달리 남요한 씨가 비타민이 좀 부족하고, 이영훈 비타민 A와 B12과잉인 것을 제외하고는 세 사람 모두 혈중 내 비타민 농도가 비슷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베리 팝킨 교수에 따르면 채소 속 항산화물질은 우리 몸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베타카로틴의 복용이 폐암을 증가시키듯 그것이 영양제의 형태로 변했을 때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활성부위에 얼마나 흡수되는지 시판되는 영양제의 효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영양제 산업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제는 맞춤 비타민이라며 한 병에 12만원짜리 비타민 B 주사처럼 직접 몸에 투입하는 주사요법까지 등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앞서 <끼니外란> 1편에서도 등장했던 산업과 하계의 유착 관계이다. 비타민 D를 많이 복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저명한 마이클 홀릭 교수가 업계로 돈을 받았던 스캔들에서 보여지듯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여러 주장들의 이면에 업계의 '로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다큐는 지적한다.
앞서 영양제 전도사였던 홍혜걸 의학 전문기자 역시 특정 질병을 치료한다던가, 우리가 음식을 통해 먹지 않는 성분을 필요이상 섭취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선을 긋는다.
기준이 모호한 건강기능식품 이렇듯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건 비타민이나 미네랄 등의 영양제 만이 아니다. 방송 광고 등을 통해 등장하고 있는 키크는 약의 경우 1,2차에 걸친 비교 실험 결과 편차가 미미했고, 이런 식이면 1,2년이면 거의 차이가 없다고 전문가는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는 이른바 식약처의 건강 기능 식품 인정이다. 한 두 개의 논문만으로 인정되는 과정 자체가 허술하다는 것이다.
관절에 특효약이라는 글루코사민의 경우 비영리기관에서는 효과가 없다는 결과가 나온 반면, 자금 지원을 받은 기관에서는 통증이 감소했다는 상반된 결과처럼 식약처 인증 기준 자체가 의심스러운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특히 가르시니아 추출물처럼 급성 간염을 일으키거나 심장 질환 등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제품이 건강 기능 식품으로 둔갑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농림축산부는 일반 식품에도 기능성 표시 제도를 도입하려 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영양제 진실 게임의 결론은 모호하다. 이현령 비현령이듯이 양 측의 주장은 팽팽하고, 각 주장은 그 나름의 타당성을 근거로 제시한다. 결국 선택은 '소비자'의 판단이다. 하지만 각종 방송과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생산되고 유포되고 있는 여러 영양제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자극들은 건강 염려증에 휩싸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
그러나 어쩌면 결론은 명확할 지도 모른다. 가장 기본은 신선한 식재료를 통한 규칙적이고도 건강한 식단이다. 앞서 비타민 무용론에 불을 지폈던 영국 BBC에서도 일조량이 적은 가을과 겨울철에 비타민 D 보충제 섭취를 권장한다던가, 음식으로 필요 영양량을 섭취할 수 없는 노약자 등에게 부족된 영양분의 영양제를 통한 보완을 제시하듯이, 오늘 우리가 먹는 각종 영양제들이 어디까지나 우리가 먹는 식사의 '보조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는 게 아닐까. 굳이 과용하여, 영양제 천국인 미국인들의 오줌이 가장 비싼 오줌이라는 우스개꺼리의 당사자가 될 필요는 없을 듯싶다.
지난 2일 kbs 다큐 인사이트는 2010년대를 기점으로 가상이 현실보다 큰 힘을 가지게 된 오늘의 세상을 진단했다. 그에 이어 2부, <역전된 세계>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능을 가지게 된 AI의 시대에 인간의 존재론을 질문한다.
AI 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사고나 학습 등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을 컴퓨터를 통해 구현하는 기술이다. 이는 기계가 인간을 모방하고 그런 기계를 인간은 통제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전 구글 그로스 마케터, 2019년 다보스포럼 글로벌 쉐이퍼, 모바일 IT 전략가인 주영민 씨가 프리젠터로 나선 <보일링 포인트- 2부 역전된 세계> 이제 우리에게 AI란 단어를 버릴 때라고 단언한다. 이미 기계는 자신의 독창성과 고유성을 가지고 인간과 다른 지능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 그래서 프로그램에서는 AI 대신 기계 지능, 비인간 지능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AI가 인간을 추월한 첫 번째 유적지 대한민국 그 시작은 바로 우리가 기억하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 대국이다. 2016년 3월 9일, 첫 번째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은 패배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한 인간이 기계를 상대해 패배한 사건으로 생각했다. 과연 그럴까? 이어진 3월 10일의 대국, 알파고의 37수, '지금 뭐하는 거죠? 드디어 알파고가 빈틈을 보이기 시작했군요'라는 기사의 말처럼 인간이라면 두지 않을 수였다. 그러나 알파고는 승리했다. 심지어 그 37수는 승패를 가르는 전환점이자, 신의 한수였다.
인간이 입력한 데이터를 따르지 않은,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심오한 한 수, 바로 그 순간을 주영민 씨는 인공 지능의 초월성을 처음 드러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순간이라 정의내린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다. 그 첫 번째는 이제 기계는 더 이상 인간이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학습하고 판단하여 행동하기 시작한 기계지능, 문제는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는 것이다. 두번 째는 그렇게 기계 지능의 등장으로, 이제 인간은 지식의 정수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알파고는 데이터를 입력했던 인간 가이드가 있었다. 그 이후 등장한 알파 제로의 경우는 두 개의 기계 알고리즘이 서로 학습하는 형태로 인간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 이 알파제로가 단 3일만에 알파고를 꺽었다. 벽돌깨기에서 부터 시작하여 바둑, 이제 스타크래프트까지 그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는 딥마인드의 기계 지능, 과연 도래할 다음 10년 우리가 맞이할 시대는 어떤 것일까?
알파 제로는 스스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알고리즘의 등장을 의미한다. 하루 수백만 번이라도 스스로 시행착오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계 지능, 어쩌면 20세기의 기적을 이룬 페니실린의 발견과도 같은 획기적인 발전은 이제 '인간의 우연'이 아니라 기계 지능의 필연적인 결과물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페리실린을 발견한 플레밍은 자신의 발명을 이미 자연이 발명한 페니실린을 자신이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라 말한다)
기계의 명령에 복종하는 수동적 존재가 된 인간 여기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최근 미국 프로야구에 도입된 AI 심판, 스트라이크 존에 대해 인간 심판과 AI 심판이 서로 다른 판정을 내리고, 이에 인간 심판이 AI 심판의 판정에 불복하여 항의를 하다 쫒겨난 것이다.
이 사건은 상징적이지만 현실에서 이미 기계 지능은 많은 영역에서 인간의 수행 능력을 압도하고 있다. 구글에 디지털 광고를 하고 싶은 스타트업 기업, 자신이 광고하고 싶은 타깃과 메시지, 상품 서비스 내용을 광고 플랫폼에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아서 구글 광고 플랫폼은 광고를 설정해 준다. 마케터는 이 가상 세계의 시그널을 받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미국 범죄 현장에 도입된 프레드 폴이라는 경찰차 순찰 명령 알고리즘, 이 기계 지능의 명령에 따라 차를 대고만 있어도 범죄가 일어날 확률이 70%를 넘겼다. 그에 따라 미국 LA에서는 인간 경찰의 수가 줄었다.
이런 식이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운명 자체를 기계가 조율하고 있다. 주관적이고 편향적이고 결함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인간, 그에 반해 기계의 결정은 객관적이라 우리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 마치 과거 신의 판단에 무조건 복종하듯 오늘날 우리는 신의 섭리를 기계 지능으로 대체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고 주영민 씨는 반문한다. 인간의 일자리를 기계가 대체할 것을 걱정하지만, 기계는 한 술 더 떠서 판단, 지능, 선택, 결정의 능력으로 인간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이다.
AI의 도움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는 세계 최대 헤지펀드 설립자 레이 달리오는 그래서 두렵다고 말한다. AI가 자신에게 돈을 줄지는 모르지만 과연 어떤 과정으로 그 판단을 내리는 것인지 알 수 없기에. AI연구의 권위자 뉴욕대 조경현 교수 역시 같은 맥락의 우려를 표명한다. 번역 인공 지능이 좋은 아침이라는 단어를 공격하다로 번역하는 파람에 이스라엘에 체포될 뻔했던 팔레스타인 남자, 이 사건은 AI의 편협합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500만 남짓의 핀란드에 대한 데이터가 2억5천만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데이터보다 훨씬 더 많은 인터넷 세상, 더구나 그 데이터가 '기득권' 중심으로 편집된 그곳에서 피해를 보는 다수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고 조경현 교수는 경고한다.
감시하고 위조하고 편향된 기계 지능 인간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터미네이터의 도래를 먼 미래의 위협으로 걱정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의 다양한 영역에서 기계 지능은 가공할만한 위협적 존재로 대두되고 있다.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대표적인 영역은 감시 산업이다. 그 중에서도 안면 인식이 폭넓게 도입되고 있다. 얼굴을 추적하고 신분을 확인하며 디지털 상 정보를 확인 다양한 온라인 접속으로 '나'를 추적한다.
중국에서 야심차게 기획하고 있는 텐황 프로젝트가 있다. 전국의 CCTV에 안면인식 기능을 탑재하는 프로젝트로 1억 2천만대에 달하는 CCTV를 4억대까지 늘일 계획이라 한다. 이 전국적인 단일한 영상 감시 시스템 간단하게는 무단 횡단하는 사람을 검색하여, 그 대상인 위쳇 사용자에게 벌금을 물리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거리 전광판에 그의 얼굴을 공표하는 자동화된 인민 재판으로 발전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최근 홍콩 시위에서 이러한 안면 인식 시스템에 맞서 시위자들을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러자 홍콩 정부는 마스크 금지법을 실시했고, 시위자들은 머리를 길러 가리거나, 레이저 빔으로 안면인식 시스템을 교란하고자 했다. 이처럼, 감시의 영역으로 간 기계 지능은 그저 범죄차 색출을 넘어 국가의 정치적 반대파 억압과 색출에 압장 서는데 유용한 기능이 된다. 심지어 지진이 난 쓰촨성 기숙사에서는 안면 인식 시스템의 오류로 도피에 지체되기도 하는 부작용이 실제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프로그램에서 등장한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처럼, 특정 인물의 얼굴을 AI 기술을 이용하여 특정 영상에 편집하는 위조 알고리즘 '딥페이크', 실존하지 않지만 진짜 같은 사람의 이미지는 포르노에 배우 얼굴을 합성하거나 정치인의 얼굴을 합성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시카고 대학에서 만든 식당 리뷰 알고리즘의 경우 외려 인간이 쓴 리뷰보다 더 사실적이고 정확해서 좋은 평점을 받는데, 이런 알고리즘이 정치적 영역에 도용된다면? 현실을 조작하는 수많은 메시지를 전파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실제 캠브리지 애널리티카 사건에서 보여지듯 흑인 등 특정 계층에게 투표 포기를 권유하는 왜곡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주영민 씨가 가장 우려하는 건 추천 알고리즘이다. 가깝게는 네비게이션에서 부터 물건을 사고, 음악을 듣고 여행지를 선택하는데 있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기계 지능이다.
추천 알고리즘이 위험한건 우리는 점점 이 '추천'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게 되는 중이고 그에 따라 고민하고 선택할 필요를 점점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추천이라는게 취향과 관심사에 따른 알고리즘 축적의 결과물이기에 익숙하고 좋아할 만한 것만을 추천하기에 점점 더 인식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추천을 받는다지만 알고리즘이 찾은 걸 원하도록 명령받는 건 아닐까란 의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판단과 감정, 가치관, 의식, 신념마저도 편향된 정보로 '나의 세계'가 구축되어진다면? 일상적 행동 패턴이 추천 알고리즘에 종속된 인간을 과연 '로봇'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등장한다. 즉, AI가 인간을 프로그래밍하는 건 아닌가 라는, AI는 모순적 존재인 인간을 AI의 입맛에 맞춰 그 본질적인 모호성을 제거하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과연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AI에 통제된 사회인가, 여전히 모호하지만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는 인간성을 존중받는 사회인가라는, 우리의 인간성은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란 문명사적 관점의 고민이 대두된다.
이렇게 1부에서 어느새 우리를 에워싸다 못해 압도하고 있는 기계 지능의 세상을 짚어보는데서 나아가, 2부, 인간의 사고와 판단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신'의 자리를 넘보는 기계 지능의 존재를 점검한다. 결국, 그 질문은 언제나 본질적이며 철학적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데카르트의 정의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간이 그 정의의 몫을 기계에게 넘겨주었을 때,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반문이다. 일상의 익숙함이 어느덧 우리의 사고를 장악하고, 사회의 편리함이 정치를 조종할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존재 앞에 우리의 고민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프로그램은 주문한다.
초콜릿이 다이어트에 좋다고? 지난 5일 방영된 <sbs스페셜- 끼니外란 1부, 다이어트 막전막후>는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에게 금기시되어왔던 초콜릿에 대한 새로운 주장으로 시작됐다.
독일의 피터 오네큰과 디아나 뤼넬이 발표한 이 연구는 저탄수화물 식사시 다크 초콜릿을 먹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이 더 빠르게 체중을 감량했다는 것이다. 언제나 새해가 시작되면 새로운 다이어트 화두가 등장하곤 했는데, 그렇다면 올해는 초콜릿인가?
초콜릿을 살이 빠진다고? 독일에서 이루어진 연구, 16명의 실험자들을 대상으로 3주 동안 체중 감량 여부를 조사했다. 그랬더니 후반부로 갈수록 초콜릿을 먹은 그룹과 먹지 않은 그룹 사이에 체중 감량 간격이 벌어졌고 3주 후 초콜릿 군이 10%이상 더 많이 감량했다. 다큐는 저탄수화물식에 돌입한 참가자들, 그 중 4명은 초콜릿을, 나머지는 먹지 않는 방식으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확실히 초콜릿을 먹으니까 공복감이 덜해 다이어트가 편하다는 참가자들', 그런데 3주 후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만 좋아졌을 뿐 체중 감량은 비초콜릿군이 더 좋았던 것, 샘플 수의 차이 때문일까?
다시 독일로, 연구를 했던 피터와 디아나에게 카메라가 비춰졌다. 알고보니 연구자가 아니라 기자였던 이들이 '진짜' 했던 것은 초콜릿이 다이어트에 좋느냐 여부가 아니라 '다이어트 이론'이 어떻게 조작되는가를 밝혀내기 위한 '페이스 다큐'였다.
즉, 이들은 체중 감량을 많이 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등 통계를 조작했다. 그리고 가짜 연구소를 만들고 100달러만 입금하면 논문을 게재해주는 학술지에 자신들의 이론을 발표했다. 연기자를 고용해 초콜릿으로 살을 뺐다는 홍보 다이어트 영상을 만들어 광고를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유럽 최대의 신문 1면에 이들의 연구가 보도되었고, 그 다음은 쉬웠다. 다른 언론들이 서로 베껴쓰며 유럽, 러시아, 인도까지 그들의 이론이 검증없이 퍼져나갔다. 바로 이렇게 '허무맹랑한' 다이어트에 관한 이론은 너무도 쉽게 세상을 속였다.
그렇다면 정말 초콜릿은 우리 몸에 어떨까? 초콜릿의 폴리페놀이 우리 몸에 좋다는 연구를 십년 동안 했다는 호주의 연구 결과가 있었다. 그런데 이 연구 결과에 대해 미 FDA가 개입을 하자 연구는 포기 되었다. 이 주장이 세상에 발표되는데 해당 업계는 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이해 관계에 맞게 결과는 왜곡되었던 것, 즉, 심혈관 질환에 좋을 정도의 폴리페놀을 먹기 위해서는 초콜릿 한 통을 통째로 먹어야 되는 식인데, 그 한 통이 다크 초콜릿이 750칼로리, 밀크 초콜릿이 무려 5850칼로리나 된다는 것을 연구는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것이다.
과연 초콜릿 다이어트 뿐일까? 다큐는 우리 사회에서 다이어트의 왕도로 여겨지는 '운동'에 대해 도전한다. 이를 위해 지난 해 저탄고지 간헐적 단식에 도전했던 김현진 김서형 부부를 다시 만난다. 1년 만에 요요가 와서 고도 비만 상태에 이르른 부부, 이들과 한지원, 김형자 부부 4 사람은 운동과 식이조절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운동을 해도 살이 안빠진다고? 결과는 어땠을까? 식이조절 그룹이 운동을 했던 그룹보다 더 살을 많이 뺐다. 이 결과와 관련하여 해먼 판쳐 교수의 '운동의 역설'이 등장한다. 탄자니아 하자족을 대상으로 한 실험, 하루 10 km 이상을 움직이는 이 수렵 채집 부족이 서구인과 비교하여 총에너지 소비량이 차이가 없었던 것, 그에 따라 판쳐 교수는 더 많이 활동한다고 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우리 사회의 믿음은 잘못된 것이란 주장을 편다. 심지어, 기초 대사량에 운동량을 더하는 현재의 칼로리 소비량은 운동을 하면 처음엔 칼로리가 늘지만 몸이 적응을 하면 칼로리 소모는 정체하기에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운동 그 자체는 체중 감량에 적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에는 '운동에 대한 신화'가 퍼졌을까? 거기에는 뜻밖에도 운동 후 시원한 콜라 한 잔이라는 '탄산음료 반사 작용'을 퍼뜨린 음료 산업이 있다.
몇 년 전 콜라업체와 스티븐 블레이어 등 유명한 석학 들 사이의 메일이 폭로되어 문제가 된 바 있다. 비만의 원인이 '식이'에 있음을 감추려던 시도, 이를 위해 '운동 부족'을 부각하려했다는 것이다. 자사 제품의 매출이 저하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더 많이 팔기 위해 기꺼이 연구 결과을 왜곡되게 대중에게 전파하는데 앞장서는 '기업'이 있었던 것이다.
어디 운동에 대한 이론뿐일까? 우리는 매일 방송에서 약은 아니라도 약같은 다이어트 식품들을 만난다. 일부 건강 관련 프로그램들은 상업적 목적에서 협찬사의 제품 효능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방송을 제작한다. 관련자는 말한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사례자 중 실제 먹고 효과를 본 사람은? 거의 없다고. 자괴감이 들었다 고백한다.
방송프로그램뿐일까. 언론사의 기사로 둔갑한 광고들도 있다. 똑같은 상품을 홍보하는 광고성 기사가 식품업계 큰 손의 지원 아래 업계에 유리한 논문이 인용되며 1년에 10~20여회 등장한다.
다큐는 그저 살을 뺀다는 다이어트나 몸에 좋다는 건강식품의 이면에 복잡하게 얽힌 진실을 밝힌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치열하게 밥상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오늘 당신이 좋다고 선택한 음식은 음식 정치(food politics)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는 조언한다. 과학은 그렇게 획기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획기적인 발전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누가 돈을 대지?' 의심하라고.
매년 새해가 들어서면 획기적인 발견인 듯 등장하는 다이어트의 화두, 올해는 초콜릿으로 시작되는가했던 다큐는 그 어느 해보다 '건강'했다. 우리가 쉽게 믿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건강에 관한 정보들이 사실은 '조작된 상품'일 수 있음을 다큐는 진지하게 경고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있어 우리의 '주체적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권유한다. 그 어느 해보다도 맑은 정신으로 시작할 수 있게 만드는 '건강에 대한 화두'이다.
매년 그 해의 '트렌드'를 점쳐보는 <트렌드 코리아>를 펴내는 김난도 교수가 2월 3일 <tvn shft> 이끈다. 김난도 교수는 한때 뉴요커였던 조승연 작가와 가끔 뉴요커였던 미시간 주 출신의 에릭남과 함께 최신 유행 트렌드를 선도하는 도시 '뉴욕'을 방문해 그곳의 밀레니얼 세대로 대변되는 젊은이들을 만난다.
뉴욕의 트렌드을 알아보기에 앞서 세 사람은 '밀레니얼 세대'에 대해 정의를 내려본다. 198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젊은 세대, 2010년대 이후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였고, 2010년대 이후의 기술 산업 발달의 결과물인 모바일 기기에 능통한 세대이다. 평생을 돈을 버느라 인생을 다 써버리는 아빠처럼 살기 싫지만, 아빠보다 더 많은 걸 하고 싶지만, 2007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로 '아빠처럼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세대', 흥미롭게도 베이비 부머 세대인 김난도 교수, 엑스 세대인 조승연 작가, 그리고 밀레니얼 세대인 에릭남 사이에 '아보카도'로 세대간 구분을 해본다.
밀레니얼 세대 이전 세대에게 아보카도란, 그저 비싸다거나, 혹은 낯선 음식에 불과하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아보카도에 집착한다. 그러나 아보카도를 키우는데 물이 너무 많이 들고 자연보호적 관점에서 '과소비'가 된다 하니 포기해야 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게 바로 밀레니얼 세대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보카도란 문화적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대, 문화적 깊이와 생각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아빠 세대처럼 집을 산다던가 하는 대신에 사진이라던가, 추억이라던가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 '소확행'을 중요시하는 세대, 뉴욕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여러 얼굴을 맞이한다.
욜로와 파이어족, 다르지만 같은 뉴욕의 밀레니얼 세대를 만나기에 앞서 전제가 되어야 할 사건이 있다. 바로 지금은 그라운드 제로라는 역사적 추모 공원이 된 2001년 9월 11일 뉴욕은 물론 전세계를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뉴욕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의 비행기 테러 사건, 그 사건은 3000여명의 인명 피해도 피해지만, 그 사건을 기점으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미국이 급격한 정치, 경제적 침체를 겪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사회적 불안과 불경기를 겪으며 자란 밀레니얼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사고와 삶의 방식을 보이는데, 하지만 뉴욕이라는 문화적 풀 속에서 밀레니얼 세대는 각자 저마다의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위해 기꺼이 월 3000 달러의 비용을 감수하며 10평 남짓 원룸에서 뉴욕을 기반하여 각 도시의 여행 영상을 유투브에 올리고 있는 뉴저지 출신의 존바, 그에게 뉴욕은 대도시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곳이다. 또한 1960년대 지미 핸드릭스가 연주했던 1950~60년대의 문화가 그대로 있는 도시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문화적 산실이요, 1달러 짜리 피자로 상징되는 거추장스러움을 벗어던진 미니멀리즘적 삶의 행태가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욜로 존바가 있는가 하면, 다니던 의대를 중퇴하고 100만 달러를 목표로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그에 기반하여 30~40대에 조기 은퇴를 준비하는 '파이어 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잭 시티도 있다.
하루에 400달러를 벌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에 기꺼이 블로그 광고 등 수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고 부업까지 하며 '파이어 운동'을 하는 잭, 태국 출신인 그는 빚때문에 미국으로 이민온 아버지가 불법체류자로 하루 3개씩 일을 하며 고생을 했던 모습을 보며 저렇게 평생을 일을 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지금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욜로 존바와 조기 은퇴를 향해 달려가는 잭은 다를까? 비록 방식은 다르지만 그들 모두는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지금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조기 은퇴 후 그냥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하겠다는 잭, 그의 모토는 돈의 속박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바로 '시간'이라는 것. 밀레니얼 세대에게 자기를 중심으로 흐르는 '시간'과 '세상'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부모 세대와는 다른 삶의 모색 그런가 하면 부모 세대가 6,70을 살며 당뇨로 고생하며 사는 것을 본, 하지만 부모 세대와 달리 100세를 살아내야 할 지도 모르는 뉴욕의 밀레니얼 세대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러한 건강에 대한 관심은 이제는 '트렌드'가 된 '비건(채식주의자 vegan)'에, 관광 명물이 된 브라이언트 파크의 단체 요가, 삭막한 현실 그리고 부모들이 만들어 놓은 지나친 분업 사회의 반대 급부로서의 '화초 세대(반려 식물로써 화초를 기르는 세대)'가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공유 오피스와 공유 주택 역시 이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여 홀로 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은 밀레니얼들은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공간을 선호한다. 그곳에서 비지니스는 물론 고립된 처지를 넘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택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는 이전의 나, 혹은 내가 가진 것이 중요했던 앞 세대와 달리, 우리 다같이 잘 살자는 '위코노미' 정신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우리가 함께 무엇인가를 해보고자 하는 밀레니얼들의 태도는 정치적 목소리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가고 있다. <tvn shift>가 방문한 민주사회주의자 연맹은 그런 미국내 밀레니얼들의 새로운 정치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단체이다. 조직에서의 승진과 돈, 성공만을 지향했던 기성 세대의 정치적 방식을 야만주의라 규정한 이 단체는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모색한다.
경제에 대한 불만, 찾기 힘든 좋은 직장 등 기성 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환경에 이들은 반발한다. 그러기에 기성 세대가 선택한 '자본주의'는 계속 실패했다고 단정한다. 반면에 사회 주의는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지금의 정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을 세상이니 자신들의 방식으로 정치를 마련해 나가겠다는 이들은 인스타를 기반으로 하여 대중적 지지도를 형성해 가고 있는 AOC(알렉산드리아 오카이오 코르테즈)와 같은 정치인을 배출해 내고 있다.
뉴욕의 밀레니얼들과 함께 한 여정, 이에 대해 김난도 교수는 부모보다 못사는 세대의 합리적 선택이라 정의한다. 아빠보다 잘 살기 쉽지 않은 세대, 아빠처럼 살기도 쉽지 않은 세대의 좌절이 낳은 역설적 모색이 뉴욕에서 만난 밀레니얼의 서로 다른 하지만 결국은 기성 세대의 안티테제로서의 모습들이다.
2020년이 밝았다. 과연 올해는, 그리고 올해를 기점으로 하여 2020년대는 어떤 변화된 세상이 우리를 맞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다큐 인사이트가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최근 소셜 미디어의 확산, 인공 지능의 획기적인 도약으로 상징되는 세상을 이해해 보고자 가상을 향해 끓어오르는 세계에 촛점을 맞춘다. 이른바 <보일링 포인트> , 이를 '기술사회학'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 첫 번째는 가상의 세계가 현실 세계를 압도하는 <역전된 세계>이다. 전 구글 그로스 마케터이자, 2019 다보스 포럼 청년 대표였던 주영민 씨가 프레젠터로 나선다.
주영민 씨는 2010년, 아니 좀 더 포괄적으로 2010년대를 주목한다. 2012년 페북, 2014년 아이폰4, 인스타, 카톡, 우버 택시가 등장했고,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이 대결을 벌였다. 2017년 비트코인이 2만 달러를 돌파했고 2016년 드디어 페북 가입 인구가 중국 인구를 넘어 기독교 인구를 돌파했다. 과연 이 시대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2010년대, 가상화 혁명의 시대 아이폰 4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누군가 만나서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게 어색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과 10년 사이 우리는 스마트폰과 함게 한 일상이 어색하지 않다. 그곳에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 것이 스스럼이 없다. 변화된 일상의 풍경은 우리 사회, 우리가 사는 지구의 풍경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가상 현실이 현실을 역전하는 거대한 흐름, 바로 '가상화 혁명'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 가장 큰 공포는 무엇일까? 다름아닌 스마트폰을 분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신체의 일부가 된 듯, 손끝에 연결된 전자 두뇌,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켜면서 기계에 동기화되고, 거기에 의존하여 사는 인간, 어쩌면 우리 자신보다도 더 실재 자신과도 가까운 핸드폰, 혹 그건 '나'를 상실한 건 아닐까?
'인터넷이 사는 곳'이라는 데이터 정보 센터, 그 클라우드 서버가 정지된다면? 메시지, 카톡 등 우리가 인터넷 공간에서 하는 모든 활동이 멈춰버린다. 아니 우리 세계가 멈춰버린다. 그곳에 우리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은 채 기록 저장된다. 우리 삶의 모든 정보가 업로드 되어 복제 분산 저장되는 그곳이 우리 시대 진짜 '아틀라스'가 아닐까? 어느덧 가상이 현실은 컨트롤하는 주인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날 누군가를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찾아본다. 혹시라도 그 사람이 계정이 없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불투명함에 불편함을 느낀다. 지난 10년간 가상에 익숙해지며 배운 감각이다. 어느덧 사람들은 실제 자아보다 인스타에 표현된 자신에 더 신경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인스타그래머블(인스타에 올릴 만한)' 인스타에 표현된 자신을 멋지고 화려하게 꾸미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 어느덧 사람들은 자신들의 취향, 경험 외모조차 '인스타그래머블'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심지어, 과거에 연예인을 닮고 싶다던 사람들은 이제 인스타필터로 변형된 자신이 되기 위해 성형 수술까지 감행한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면 하지 않는다'. 힙한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대신 사진을 찍고, 여행은 인스타에 업로드하는 '노동'이 되었다. 24시간 인스타에 동기화하기 위한 행위, 삶의 최종 판단이 가상 세계로 전이되고 있다. 힙한 까페의 불편한 의자처럼 현실 공간이 외려 현실성을 잃어가고 있다.
소셜 미디어라는 용어는 어쩌면 이제 더는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진짜같은 현실, 그곳에서 더 행복하고 자유롭고, 풍요로운 공간, 이미 도래한 가상 현실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도래한 가상의 디스토피아 과연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 볼까? 놀랍게도 하루 한 사람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횟수는 2600회에서 무려 5400회에 이른다고 한다. 알림음으로 가득찬 하루, 스마트폰을 닫고 자신의 일상에 집중하기 까지 걸리는 시간은 23분, 우리는 현실의 일상 대신 그곳에 더 자주, 더 오래 머무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인스타그래머블'한 일상이 현실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넷플렉스의 드라마 '블랙 미러'에는 좋아요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고 좋아요를 받기 위해 투쟁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과연 드라마만의 이야기일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좋아요'를 얼마나 받은 사람인가 찾아보고 평가한다. 어느덧 '좋아요'는 점수화시키고 평점화시키는 도구가 되었고 현실 세계의 가치 척도로 기능하고 있다.
보상과 간격, 크기를 조절할 수록 인간의 강박은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구글의 조사처럼, '좋아요'로 상징되는 가변 보상 행복, 즉 가짜 즐거움의 맑은 종소리는 '비타민'을 넘어 '진통제'처럼 인간의 삶을 제어하기에 이른다. 수면 시간이 경쟁자가 된 세계, 기독교 인구를 넘어선 그 세계의 사람들, 어느덧 기술이 종교보다 우리를 더 지배하고 있는 세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가상의 점수에 그 누구보다 '연연'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 현실 권력이다. 2010년대 이래 정치 에서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최초의 트위터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등장했다. 가장 강력한 트위터리안이 가장 강력한 대통령이 되는 세상, 우리나라라고 다를까. 1,2년전만 해도 유투브를 욕하던 정치인들이 앞다퉈 유투브를 개설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단적인 예이다.
무엇보다 위험한 현상은 현실에서 '가짜'가 가상의 권위를 얻으면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거기로 나서서 실제 행동으로 자신들의 신념을 옮기는 것이다. '지구는 평평하다'라던가, '백신은 해롭다'라던가, 심지어 '기후 변화는 조작됐다'와 같은 이미 과학적으로 거짓이라 판명된 이론들이 유투브를 중심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거기에 많은 조회수가 이어지며 이를 현실에서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폐해의 심각성은 '정치'나 '기업'의 영역에서 극대화된다. 가상의 여론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드는 것이다. 그 중에 이른바 '봇산업'이 있다. 스팸 메일, 음원 사재기, 리트윗 조작, 유투브 시청수 조작, 상품 후기, 나아가 정치적 메시지까지 사용자를 흉내내는 프로그램으로 마치 진짜 유행인 것처럼 유행을 변화시킨다. 실제 조사에 따르면 인터넷 트래픽 절반이, 우리가 보는 댓글과 팔로우의 절반, 인기 영상의 좋아요의 절반이 '봇산업'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심각함을 떠나 무섭기까지 하다.
미래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뒤섞여 사는 영화 <터미테이터> 속 디스토피아가 먼 미래가 아니라 ,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사는 '가상 세계'에 이미 도래해 있지 않냐고 <보일링 포인트>는 묻는다.
리버스 싱귤래리티 - 인간의 퇴화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역설적 질문이 등장한다. 나머지 절반은 그렇다면 '인간'일까?
영국 노동당은 총선 과정에서 트위터 등에 나타난 지지자의 특성을 분석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짜 뉴스를 배포하고, 반복적 메시지를 유포하며,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상적 린치를 가하고 진영 논리를 전파하는 등 열성 지지자들의 행동이 '봇'과 차이가 없다는 결과에 도달했다.
어떤 기이한 신념이라도 동지를 찾아 연결되면 그에 대해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들, 팩트 체크가 무력해지고 신념이 사실을 취사 선택하며 나의 믿음이 승리하는 것만이 중요한 사람들, 그 사람들을 주영민 씨는 '봇맨'이라 정의내린다.
소프트 뱅크 회장인 손정의 씨는 기계가 진화하여 인간을 추월하는 시점, 싱귤래리티(singularity)를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싱귤래리티는 그리 멀지 않은 5년내지 10년안의 현실이 될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하지만 주영민 씨는 '리버스 싱귤래리티(reverse singularity)가 아닐까 라며 우려를 표명한다. 즉, 기계가 똑똑해져서가 아니라 오늘날 인간이 기계의 단순성을 닮아 후퇴해서, 소셜 미디어의 점수에 연연하고, 인스타의 아바타에 집착하는, 그리고 봇의 단순성을 스스로 내재화시키며, 가상 세계를 통해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 어떤 것이 더 강력한 가상 현실인가가 정치의 관건이 되는 증오와 갈등이 점철된 오늘날의 세상이야 말로 '리버스 싱귤래리티', 인간성의 후퇴가 아니겠는가 반문한다.
가상 세계의 역습은 이미 우리가 사는 세상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저 알파고에 진 것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이 어느 틈에 우리 자신이 이미 그 세상에 '접속'하고 '동기화'되어지고 있다는 분석은 예리하다. 거기에 더해 굳이 지구는 평평하다를 들지 않더라도 유투브를 중심으로 하여 갈라진 정치적 입장과 그 갈등으로 끓어오르고 있는 우리 사회를 보면, 가상 세계에서 점화되는 권력의 실체가 섬뜩할 정도로 실감난다. 그리고 그 궁극에서 만나지는 더 이상,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기를 포기한 '봇'이 되어가는 리버스 싱귤래리티, 인간을 만나는 지점은 씁쓸한 '자각'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계절에 시작해서 나뭇잎이 떨어지는 계절에 마무리된 <kbs 다큐인사이트 - 세상 끝의 집 3부작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을 보고 나니 문득 안도현 씨의 시가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도대체 얼마가 깊고 진한 '사랑'이기에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평생 결핍을 감내하며 고독과 침묵의 여정을 기꺼이 안을 수 있단 말인가. 한 해가 저무는 시절에 만난 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의 수사들은 역지사지로 지나온 1년간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겸허하게 반성케 한다.
위대한 포기의 삶 경북 상주 산곡산 깊은 곳에 수도사들의 공동체가 있다. 일찌기 1084년 성 브르노가 프랑스 사르트뤄즈 계곡에 세운 카르투시오 수도원은 엄격한 고독와 침묵의 수도생활로 신을 향한 영원의 진리에 헌신해 왔다. 전 세계에 11곳에 370명의 수도사만이 그 '희생'의 수도를 이어온 가운데 15년전 요한 바오로 2세가 경북 상주에 아시아 유일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을 허락했다.
한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크로아티아에서 온 11명 수도사가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사막'과도 같은 이 산자락에 수도원의 소음마저도 거세된 독방에서 '침묵'과 '고통'에 투신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수도사들에게 이곳은 '주님과 그분이 종이 함께 이야기하는 거룩한 땅'이다. 그러나 그 '주님이 약속하신 땅의 샘'에 다다르는 길은 건조하고 메마르다.
종소리에 따라 하루의 활동을 하는 수도사들, 기도방, 작업실, 텃밭으로 이뤄진 독방에서 봉쇄 수도사들은 온종일 기도와 묵상을 한다. 반면 평수사들은 기도와 묵상과 함께 '노동의 소임'을 감당한다. 인터넷, 전화, 신문 등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수도사들 사이의 이야기는 '서면'으로 대체된다. 유일한 대화라면 짧은 한국어 수업, 형제적 일치를 위한 산책, 주말의 정찬 뿐이다. 심지어 일년에 이틀만 부모님과 만날 수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가볼 수 없는 '위대한 포기'로 점철된 수도의 삶이다.
한 달에 한번 이 수도원 설립시절부터 조력자 역할을 해온 초대 안동 교구장이었던 두봉 주교와의 자유 토론 시간, 이 날의 화두는 '얼마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살아가셨듯이 그분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기 위해 '가난'을 모토로 삼은 수도사들, 그들은 가난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겸손하게 초연해져 점점 더 하느님을 깊이 이해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다.
자유로운 결핍 세상의 재물에 대한 '자유로운 포기', 불필요한 욕망들을 극복하고 해방됨은 수도사들의 구멍난 양말, 실처럼 헤어져가는 옷가지, 육식은 없는 소박한 밥상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심지어 매주 금요일에는 극기를 위해 '밥'과 물만으로 식사를 한다. 그것도 자신의 독방에서 홀로.
한국어 교습 시간에 등장한 금식, 바나나 한 개와 쌀밥 한 공기, 밥을 반 정도 먹다가 바나나를 한 입 베어무니 그 맛이 짜더라는 소회, 심지어 그 마저도 자꾸 바나나에 의지하게 되는 거 같아 안먹게 되었노라. 완벽하게 끊는게 외려 어려운 거 같지만 더 쉬웠다는 타협이 아니라 기꺼이 결핍을 껴안는 삶의 태도이다.
그 결핍의 식사를 이뤄내는 건 평수사들의 '노동'이다. 밭을 갈다가도, 음식을 만들다가도, 재봉틀을 돌리다가도 종소리가 울리면 매 흙바닥에서 머리 조아려 기도하는 수사들의 노동은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결합하는 기꺼운 '봉사'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란 모토 아래 수도사들 각각이 꾸린 텃밭에서 난 생산물들을 11형제가 나누어 생활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따라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삶의 태도이다.
세상을 향한 기도 고독과 기도, 그 봉쇄된 삶을 보며 문득 저 '기도'의 의미가 무엇일까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 '의문'에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한 수사의 이야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봉사하는 삶을 사는 수녀님을 누나로 둔 수사님은 얼마전 종신 서원을 했다. 어렵사리 걸음을 하신 외할머님께 하느님과 결혼을 했다고 밝은 얼굴로 자랑하는 손자, 그런 할머니 옆에서 자신도 하느님과 결혼을 했다고 역시나 밝은 얼굴로 덧붙이는 누나 수녀님.
일년만에 오누이의 대화는 서로가 다르게 하느님을 향하는 길로 이른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병원에서 일하는 수녀님의 삶에 늘 고맙다는 동생, 늘 기도하는 동생이 자신의 기도 때마다 떠오른다는 누님, '봉사'로 다할 수 없는 세상 가난한 이들에 대한 마음을 동생에게 빚진다고 누님은 말한다. 그리고 누님의 말처럼 또 다른 수사의 기도하는 시간은 낯선 땅 낯선 이의 간절한 사연과 함께 하고, 파란 눈 이방의 수사가 간절한 기도는 북녁 땅 가난한 동포들에게 닿는다. 그들은 세상으로 부터 은둔하지만 그들의 기도, 그들의 마음은 온전히 세상 속 그 누구보다 세상을 향해 열려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평생 수도의 삶을 선택하는 그 마음을 쉽사리 헤아리기 어렵다. 세상의 일로 이루어 내지 못한 그 여지를 '기도'로 채우는 그 '이타성' 역시 물성의 시대에 낯설기까지 하다. 25년된 구두와 닳아 테이프로 묶은 슬리퍼, 앞 뒤로 구멍이 난 양말이 당연하다는 듯 신고, 죽어서도 봉쇄된 그곳을 떠나지 않은 채 절대자를 향한, 그리고 그 '절대자'가 품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오늘도 정진의 길에 고뇌하고 성실하게 맡은 바 책무를 다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인간의 원형'처럼 울려온다. 홀로 기도하는 수사의 맞은 편에 a4 용지에 선 두 개로 그어진 십자가가 있다. 그 어떤 성물보다도 숭고해 보이는 십자가야 말로 카르투시오 수도사들의 삶 그 자체다.
이사를 했다. 나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이전 집에서는 하지 않던 일을 내가 하기 시작했다. 유투브에서 클래식을 찾아 흐르게 만들고 벼르던 글을 다시 써보겠다며 엄두를 내기 시작했다. 뭐지? 하던 차에 tvn shift 2020에 등장한 김정운 박사가 말한다. 바로 그건 '공간' 때문이라고. 김정운 박사는 단언한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고, 공간적 존재라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큐브, 하지만 같은 큐브인데도 달라진 공간이 인간을 변화시킨다고.
공간은 '나'다 시작은 김정운 박사이다. 그는 한때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등의 도발적 책으로 대한민국 사회를 들썩였던 사회심리학자이다. 최고의 강사로 헬기를 타고 강연을 다녔다고 자랑을 하던 그가 어느날 훌쩍 잘 나가던 대한민국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그냥 간게 아니다. 뜬금없이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자칭 화가가 된 그는 이제 여수 바닷가에 산다. 망한 횟집을 '아틀리에'로 개조한 그는 자신의 그 '유랑'이 바로 공간에 대한 욕망으로 부터 비롯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을 <tvn shift 2020 마이 스페이스>는 풀어낸다.
김정운 박사는 단호하게 정의한다. 공간은 바로 '나'라고.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곳, 그것이 바로 공간이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은 크건 작건 '큐브' 속에 갇혀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주장에 건축학과 교수 서현은 공간을 통해 내가 표현되는 것이 맞다며 동의한다. 과학 철학자인 장대인 교수는 70%의 동의를 표하며 공간의 개념을 물리적 의미 그 이상으로 확장해야 한다며 덧붙인다.
그래서 다큐는 김정운 박사의 주장을 실험으로 옮긴다. 그 첫 번 째, 기억의 공간을 더듬는다. 한 초등학교 교실, 그 교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자칭 '셜록'이라는 인물의 '과거'를 '힌트'를 따라 추적해 본다.
우산, 텐트, 그리고 맨 앞자리과 그 시절 썼던 공책, 계단참으로 주어진 힌트, 우리가 무심히 쓰던 우산이나 텐트가 '자기 만의 공간'으로 해석된다. 그 작은 우산 안에서 연인들이 키쓰하는 이유가 바로 '나만의 공간'이기 때문이라나. 맨 앞자리에서는 인정 욕구가 강한 자기애가 드러나고, 다른 학생들과 부딪치지 않는 계단 참에서는 자신의 세계를 갖고 싶어하는 자의식을 엿본다. 그리고, 말로는 이상하다 하지만, 늘 아이들과 휩싸여 지내게 되는 우리의 학교가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들여다 보고 성장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과 함께.
그렇게 김정운 박사의 예리한 분석과 함께 등장한 건축학과 교수 유현준, 그는 초등학교라는 공간이 '거푸집'같은 곳이라하고, 컨테이너처럼 쟁여진 그 과거로부터 기억을 재구성하고, 지금 내가 여기서 무슨 기억을 만들고있는가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공간'이라는 것이다.
기억, 권력, 그리고 감정 그렇다면 지금의 나를 드러내고 있는 공간은 어떤 곳일까? 현재의 대한민국 공간을 대표하는 '직장'으로 다큐는 시선을 옮긴다.
일로 한 직장의 오너를 만나러 가는 과정, 경비원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출입증을 받고, 비서실을 통과하는 '시퀀스'는 그 자체로 만나러 가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권력'의 장치가 김정운 박사와 유현준 교수는 공감한다. 그렇듯 오늘날 대한민국의 직장은 바로 '권력'으로서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직적 권력 구조'로 대변되는 공간이 변화하고 있다. '창의성'을 중시하는 트렌드는 회사를 놀이터처럼, 까페처럼 심지어 술도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그런데 '권위'를 파괴하는 공간이 마냥 좋기만 할까?
한 카드 회사에서 입사 2년차 강대리 자리 찾기로 부터 시작된 실험은 팀장님과 강대리와 함께 한 자리에서 권력과 공간에 대한 허심탄회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공간이 바뀌면 권력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함께 공감한 팀장님과 입사 2년차 강대리, 그러나 수평적으로 바뀐 공간이 '팀장' 님은 마냥 편하지만은 않단다.
직장에 들어와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졌던 공간, 수평적인 사내 문화는 때론 상급자의 '상실감'을 자아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직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수평적 공간에 대한 실험은 군대 내 위계 질서를 고스란히 담보해 냈던 한국 사회 내 직장 문화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담론이다. 특히 직장을 다니며 부여받은 명함으로 상징되는 '지위'가 곧 자신의 존재였던 자신을 표현해왔던 한국 남자에게 있어, 변화하는 직장 문화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권위'가 아닌 공간, 그 모색은 어떤 것일까? 또 하나의 실험이 등장한다. 김정운 박사와 유현준 교수가 한 부부의 집을 통해 그 답을 찾는다. 역시나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라는 공간 심리 실험, 거실을 덥석 들어앉은 명품 차, 곳곳에 감각적인 디자인, 그리고 다락방 공간을 활용한 미니 영화관 등을 통해 드러난 부부, 그 중에서도 특히 남편 김준선 씨의 '취향', 그건 늦게 나가서도 얼른 들어오고 싶은 집, 그저 돈을 벌어오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건사하는 '의무'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풀어놓은 '감정'이 오롯이 담겨있는 공간이다.
더 나아가 공간은 '행복'이 될 수도 있다. 여행, 캠핑 마니아였던 김득영씨는 집 근처에 트리 하우스를 지었다. 200~300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지어진 집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공간'으로 구현, 덕분에 삶이 즐거워졌단다.
imf 때 학창 시절을 보내느라 취미를 사치로 여기며 자랐던 80년대 동갑내기 이태연, 김기현, 양환용 씨, 그들은 비어있는 상가를 자신들의 아지트로 꾸몄다. 각자 한 달에 10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꾸린 공간에는 게임에서 부터 만화까지 그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충만'된 공간이다. 나이든 남자들이 하는 취미라야 그저 모여서 술 마시는 것 밖에 없는 우리 사회에서 그들은 술을 안 먹어도 모여서 함께 모여서 얘기도 나누고 요리도 하며 '네버랜드'같은 '비밀기지'를 꾸렸다.
다시 김정민 박사로, 그는 여수로 와서 말투부터 달라졌단다. 대기업에 강연을 다니던 시절 속사포처럼 쏘아대던 말투부터 달라진 걸 공간의 변화로부터 찾는다. 그렇듯 다큐는 '나만의 공간'을 찾으라 권유한다.
나만의 공간은 바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다. '소유'가 아니다. 여행을 통해 체득한 경험을 모아놓은 연구실은 7평에서 여행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몇 만평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유현준 교수가 자신의 세계를 찾아 깃들었던 텐트처럼, 집안의 작은 구석, 나무 아래, 도서관, 버스 뒷자석, 회사 옥상, 지금까지 지나쳤던 공간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공간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기울이라 권유한다. 바로 그렇게 자신이 사유한 공간을 통해 자신이 달라질 수 있단다. 공간을 '소유'라고 생각했던 우리 사회에 대한 도발적 담론이다.
지금 내 방에는 슈페르트의 아르페이오 소나타가 흐른다. 비록 콘서트홀은 아니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짙은 첼로 선율은 큐브의 공간을 넘어 나의 사유를 자유롭게 확장한다. 공간은 곧 부동산이요, 재테크라고만 생각했던 우리 사회의 선입관을 넘어, 내가 좋아하는 곳을 통해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tvn shift 2020 - 마이 스페이스>의 주장은 2020년을 맞이하며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화두다.
어른이 된 아이들이 새삼스럽게 스타크래프트를 보고 있다. 언제적 이영호, 이제동, 김택용 인데, 그들이 다시, 여전히 게이머로서 활약을 한단다. 한 때는 아이들과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 게임 시간을 조율하느라 실랑이를 벌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덧 그 아이들이 즐겨 보던 게임의 게이머들의 건재만으로 웬지 이웃집 청년들의 소식을 들은 마냥 반갑다. 어느덧 그렇게 스타라는 게임은 오랜 벗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최근 들어 다시 활성화된 스타 덕분일까, kbs에서 특별 다큐로 스타와, 그 게이머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2019년 12월 22일 방영된 <더 게이머> 이다.
게이머의 등장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게임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용사들이 등장했다는. 강호의 전설같은 문구로 시작된 다큐, 뜻밖에도 스타의 포문을 연 건 바로 우리 사회를 강타한 IMF였다.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가기 싫었어/ 열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중략) 오늘의 뉴스 대낮부턴 오락실에 / 이 시대의 아빠들이 많다는데
실직한 아버지, 취업을 못한 대학생들의 아우성으로 대변되는 IMF, 직장에서 본의 아니게 정리해고를 당한 사람들이 택한 호구지책 중에는 PC방이 있었다. 덕분에 사멸 위기에 놓인 용산 시장을 각종 게임 기구들이 구원했다. 호주머니가 가벼워진 사람들은 1시간에 1000원이라는 값싼 PC방으로 몰렸다. 그리고 그 배경에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이 2001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4배, 100명 당 17.2명이라는 높은 초고속 인터넷 보급이라는 IT산업의 획기적인 확산이 있다.
물론 스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메이플 스토리, 군주 온라인, 바람의 나라 등 2000년대를 풍미했던 많은 게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스타만이 스타가 된 게이머와 함께 당대 최고의 대전으로 많은 유저(시스템을 직접 조작하거나 대화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와 팬들을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스타만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스타에서는 유저 각자가 저그, 테란, 프로토스 등 한 종족의 전사가 되어, 다른 전사와 싸움을 벌이는 '대결'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개인 대 개인만이 아니라 팀플레이도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대결은 온라인 게임의 특성에 따라 같은 공간은 물론 멀리 있는 상대방과 한 판 대결을 벌일 수도 있다. 그러한 온라인 네트워크에 기반한 게임과 함께 게임을 하면서 동시에 게임 한 편에서 쌍방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동시성이 스타의 현장성을 한껏 살려내며 청소년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기를 끌던 게임을 하는 유저 중에서 본격적으로 '게임'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 아이들이 해도 말리는 게임을 직업으로 한다니, 당연히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좋지 않았다. '오락실 폐인'이라는 대명사로 불린 사람들, '잠은 자냐?', '백수냐?', '자네들은 뭐하는 사람인가?'라며 기성 세대들은 그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초기엔 처우도 좋지 않았다. 겨우 상금이나 받아야 돈이 생기던 시절, PC방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좁은 모텔방에서 6~7명이 모여 생활을 했다. 당대 최고의 게이머였던 이윤열이 PC방에서 연습을 하면 아이들이 둘러서서 '야, 이윤열이다~'라며 구경을 하던 시대였다.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적 코드가 되다 그런 열악한 스타의 환경을 돌파한 건 '방송'이었다. 하던 게임에서 보는 게임으로, 황형준 피디의 기획으로 99년 프로게이머 대결이 방송에 등장했다. 왜 스타를 방송했을까? 스튜디오에 그럴 듯한 의자 두 개에 컴퓨터 두 대만 있고, 그걸 중계하는 캐스터와 해설자만 있으면 됐으니 현대판 바둑 중계 수준이랄까? 역설적으로 IMF로 중단된 제작비가 제작비가 덜 드는 스타의 중계를 가능케 했다.
하지만 중계만으론 부족했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스타'의 탄생이 필요했고, 그런 요구에 응답한 건 다름아닌 이제는 전설이 된 테란의 황제 임요한이었다. E스포츠의 아이콘, 사람들은 스타는 몰라도 임요한을 알았던 시절, 유닛 몇 개만 살아남아도 이른바 '컨트롤(인공지능으로 각자 움직이는 유닛들을 마우스와 키보드 커맨드로 사람이 직접 조작하는 것) '을 귀신같이 써서 그걸로 역전을 해냈고, 지형지물을 이용하는데 능하며, 심리전에도 탁월했던 임요한은 말 그대로 스타였다. 그리고 그가 스타이기를 가능케 했던 건 2004년 준결승에서 이른바 임진록(임요한 대 홍진호의 대결)을 단 몇 분만에 3연승의 전설을 만든 후 제자 같은 최연성에게결승전에서 지고 자신의 플레이를 용납할 수 없어 울음을 멈출 수 없었던 절박한 승부사의 기질이었다.
물론 한 사람의 스타만으로 가능한 건 아니었다. '임진록'이라는 전설의 대전을 남긴, 임요한과 폭풍 저그 홍진호의 대결, '이렇게 임요한을 밀어붙인 이가 있었을까', '우승보다 값진 준우승'이라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두 사람뿐인가, '뛰는 스톱 위에 나는 드랍쉽'이라는 프로토스의 영웅 박정석 등 각 종족을 대표하는 게이머군이 형성되었다. 스타만의 드라마틱한 내러티브가 만들어지고, 게이머간의 대결이 부각되고 그에 걸맞는 '테란의 황제', 폭풍 저그 등의 네이밍을 갖춰가며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세간의 시선을 쉽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뉴스에서는 게임 중독, 심지어 PC방에서 오래 게임을 하다보면 남성 호르몬이 감소한다는 우려 등을 전했다. 다큐는 이제와 고해 성사를 한다. KBS <아침마당>이라는 프로에서 당대 최고의 프로게이머라는 임요한을 데려다 놓고, 게임 중독이라던가, 그렇게 게임 중 싸움을 하다보면 누군가 날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던가, 조직 폭력배와의 연루 등의 '무례한' 질문을 퍼부었음을.
하지마 그건 안타깝게도 게임, 게이머를 보는 동시대 인식의 틀이었다. 여전히 쟤들 저렇게 게임만 하다 나중에 뭐할거야 하며 '백수 건달'처럼 여겼다. 게이머들 역시 자신있게 자신의 직업을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스타의 한계를 돌파해준 건 뜻밖에도 대기업이었다. 젊은 층에게 열렬한 호응을 얻고 있는 게임 스타에 대해 팬텍, SK텔레콤 등이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게임단을 창단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바닥에서 부터 기반을 닦아오며 성장해 오던 스타는 이런 대기업의 지원으로 압축적 성장을 할 수 있었고, 대기업의 후광은 이제 게이머에 대한 사회적 인식 조차 변화시켜 냈다.
1999년 대회수 72회, 총 상금 15억 규모의 대회는 불과 몇 년 만에 2004년 대회수 148회에 총 상금 규모 50억의 급속한 발전을 이뤘다. 그리고 그 정점은 바로 2004년 야구의 고장 부산에서 야구 결승전이 있던 날 열린 광안리 결승이었다. 10만 관중으로 가득찬 광안리 백사장, 그곳에 선수들은 보트를 타고 등장했고, 그 선수들을 관중들은 바다 저멀리 울려퍼지는 함성으로 반겼다.
국악 한마당에서 스타 게임을 판소리로 실연을 했고, 개그 콘서트 개그맨이 스타 종족 성대 모사를 하는데 그게 뭔지를 알고 다 웃을 수 있던 시절, 심지어 평양 조선 컴퓨터 센터에서도 스타 배우기에 분주했다. <아침 마당>에 나가 수모를 겪던 임요한은 청와대에 초청받아 게임 산업 지원을 당당하게 대통령께 건의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이어받아 공군 E 스포츠팀이 창단되고 게이머들이 군특기병으로 국가적 인정을 받았다. 이제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 1순위가 된 프로게이머, 그렇게 대중 문화 전반의 대표적 문화 코드로 자리매김하였다.
역사가 된 게임 하지만 절정의 시간이 무너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표적인 스타 게이머가 가담한 승부조작 사건은 스타를 사랑했던 팬들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스타는 급격한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결국 공군에서도 E스포츠팀을 접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며 스타의 저변은 확장되었다. 어느덧 20대에서 40대까지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되었다. 해외에서도 반응이 오고, 드디어 2018년 아시안 게임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어떻게 하면 게임을 그만두게 할 수 있을까요?라요 문의하던 부모는 이제 우리 아이가 재능이 있는 거 같은데 게이머를 하면 어떨까요?라고 궁금해 한단다.
다큐에서도 밝힌바와 같이 어느덧 우리나라 청장년층의 문화 중 대표적인 코드가 된 게임, 그 중에서도 스타, 그것을 '문화적 현상'으로 밝혀보고자 한 시도는 신선하다. 더욱이 그저 '게임'이었던 스타의 탄생을 우리 사회를 강타한 IMF와 맞물려 설명한 건 문화 현상의 역사성을 제대로 드러내 보인 예리한 분석이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임요한, 홍진호 등으로 대표되는 1세대 스타 게이머들의 '스타성'과 스타의 발전, 그 상관 관계를 밝힌 점은 마치 가요 산업과 아이돌의 탄생의 관계처럼 명쾌했지만, 그 이후 지금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는 게이머들에 대한 이야기나, 한편에서 활성화되면서 동시에 벽에 부딪친 스타라는 게임이 본질적으로 노정하고 있는 난제에 대해서는 짚지 않은 채 너무 긍정적인 측면만 부각한 점이 아쉽다.
악플,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회적 문제다. 얼마전 유명을 달리한 두 명의 젊은 여성 연예인들, 그들의 죽음에는 예외없이 '악플'의 책임이 대두됐다. 하지만, 그들에게 쏟아부어진 악플은 무수하되, 정작 그 죽음에 책임감을 느낄 당사자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악플은 마치 독버섯처럼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나가고 있다. 이가온, 아직 미성년자인 앳된 시골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이다. 하지만, 가온이와 엄마가 보낸 지난 몇 달은 지옥과도 같았다. 시간만 나면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가온이, 핸드폰 중독?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서 혹시나 자신에 대한 악플이 달려있을까 노심초사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그 시작은 한 방송국에서 매주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의 출연에서 부터였다. 작은 시골학교, 골든벨을 울릴것이라고 예측된 3학년 선배를 제치고 1학년 가온이가 124대 골든벨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연히 축하받아야 할 일, 하지만 가온이의 방송 출연분이 캡춰되어 인터넷 공간에서 돌아다니게 되자, 특정 사이트에서는 가온이의 외모를 평가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성희롱성 댓글이 달리고, 사상 검증까지 이뤄졌다. 결국 가온이 모녀는 이에 대해 법적인 해결을 모색했는데 그 과정에서 수집된 악플만 550여개, 본인이 직접 증거를 수집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악플을 직접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가온이와 엄마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이제 가온이는 밤에 자면서도 자신에게 달린 악플에 시달린다. 엄마는 차라리 시간을 돌려 그 방송에 출연시키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 지워져도 자신의 머릿속에 남긴 악플로 인해 괴로울 것이라는 가온이, 이렇게 악플은 그 누구라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벌금, 구속으로도 악플은 멈춰지지 않았다 베이비복스라는 그룹 시절부터 악플에 시달려 왔던 배우 심은진 씨, 3년전부터는 자신의 sns를 도배하는 한 사람의 지독한 악플로 고통받고 있다. 무려 그 한 사람이 단 악플만 1000 개,
거듭된 고소로 벌금형은 물론 구속으로 이어진 상황에서도 악플은 멈춰지지 않았다, 심지어 고소 과정에서 심은진씨와 만난 악플러는 마치 아는 언니에게 인사하듯 '언니, 안녕'하며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고 한다. 어렵게 만난 악플러의 어머니는 외려 구속시켜줘서 고맙다고 할 정도로 강박증이 심해진 상황이라 사과는 언감생심이다.
원종환 씨의 경우 벌금을 문 악플러가 당당하게 공연 앞자리를 차지하고 그의 공연을 봤다고 한다. 이미 벌금을 물었기에 그동안의 죄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고, 차단을 하면 다시 계정을 만들어 악플을 다는 이들로 인해 당하는 연예인들의 고통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한 아이돌 가수에게 지속적으로 악플을 다는 사람을 추적해 보니 40대의 고시생이었다. 사법 고시를 준비하다 겪은 사회적 좌절을 악플을 달아왔던 그는 특정 연예인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에게 자신의 화풀이를 해왔던 것.
이렇게 한 사람, 혹은 특정의 몇몇에게 '강박증'처럼 댓글을 다는 병적인 악플러들도 문제이지만, 자신이 댓글을 단 것조차 기억을 못하는 다수의 악플러들이 있다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막상 인터넷 상에서 악플을 달던 악플러를 찾아 연락을 하면 대부분 자신이 그런 댓글을 단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멀쩡한 목소리로, '제가 쓴 건가요?'라고 반문하는 사람들, '개그로 적은 건데, 별 의도가 없었어요', 라던가, ' 그 글이 문제가 되는 건가요?'라며 문제 의식조차 느끼지 못한 채 댓글을 다는 다수의 악플러가 현재의 '악플 사회'를 만든다.
악플러를 초대합니다 그래서 sbs스페셜은 악플러에 대해 보다 잘 알기 위해 '악플러를 초대'했다. 하지만, 제작진의 거듭된 청에도 불구하고 매번 악플러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드디어 세 번째 어렵사리 마련된 '악플러의 밤', 악플로 인해 고통을 받아왔던 김정민과 김장훈이 호스트가 되어 세 명의 악플러를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자신들이 이상 심리를 가진 사람이나 악마 본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며, 그저 너무도 평화로운 세상 무료할 때 배설하는 기분으로 악플을 단다고 하는 최민지(가명), 자신의 악플에 수 백명이 추천을 할 때 희열을 느낀다는, 그래서 당연히 선플도 달아왔다는 레이용(가명), 연예인의 가식적인 모습을 못견뎌 악플을 단다는 니즈(가명)까지 다양한 악플의 이유가 등장했다.
인간의 사냥 본능에서 부터 친구에세 카톡을 보내는 식이라던가, 재미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악플을 설명하는 악플러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행동이 범죄라는 인식이 없다. 전문가들은 이상 심리를 가지거나 강박증적으로 악플을 다는 몇몇 집요한 악플러도 문제지만 바로 이렇게 그 누군가의 악플에 감정적으로 휩쓸려 자신들의 공격성을 토해놓는 80%의 악플러가 오늘의 악플 세상을 만든다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어렵사리 악플러를 초대한 '악플러의 밤'의 결말은 어땠을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호스트 김정민과 김장훈, 김정민에게 악플을 달던 니즈는 알고보니 김정민이 가식적인 연예인이 아니라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인 줄 알았다며 화해의 포옹까지 나누며 화기애애한 마무리를 했다.
악플러와의 포옹, 그러면 됐을까? 이야기 과정에서도 나왔지만 겨우 세 명, 그것도 몇 번의 초대가 무산된 가운데 등장한 세 명의 악플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자화자찬할 수 있을까?
악플러들조차도 코웃음치는 '선플 달기' 캠페인보다는, 대화 중간 지속적으로 김장훈이 언급한 '시스템'의 문제이야말로 사실은 프로그램이 간과한 결론이 아니었을까? 똑같은 '인간'이라는 종을 놓고 어떤 철학자는 '성선설'을 또 다른 철학자는 '성악설'을 놓한 건, 결국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인 것이 아니라, 어떤 시스템과 어떤 조건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인간성이 다르게 발현될 수 있는 존재란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악플러의 밤에서도 등장했지만, 마치 악플을 도발하는 듯한 기사들은 그 자체가 '만인 대 만인의 투쟁'판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것처럼 아예 '댓글'을 쓰지 않는 것이야 말로 '답정너'아닐까. 추천이나 좋아요가 없다면 어떨까? 어쩌면 답은 나와있을 지도 모른다. 그 답을 굳이 겉훑기 식으로 한번 언급하고, 김정민과 악플러의 급 화해 모드로 마무리된 <악플러의 밤>은 그저 이슈가 되니 한번 다뤄보자는 요식 행위를 넘어서기가 힘들어 보인다. 악플은 나날이 심해지지만 한편에서 조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방기하는 현재의 시스템에서 악플은 결코 종식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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