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사를 했다. 나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이전 집에서는 하지 않던 일을 내가 하기 시작했다. 유투브에서 클래식을 찾아 흐르게 만들고 벼르던 글을 다시 써보겠다며 엄두를 내기 시작했다. 뭐지? 하던 차에 tvn shift 2020에 등장한 김정운 박사가 말한다. 바로 그건 '공간' 때문이라고. 김정운 박사는 단언한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고, 공간적 존재라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큐브, 하지만 같은 큐브인데도 달라진 공간이 인간을 변화시킨다고.
공간은 '나'다
시작은 김정운 박사이다. 그는 한때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등의 도발적 책으로 대한민국 사회를 들썩였던 사회심리학자이다. 최고의 강사로 헬기를 타고 강연을 다녔다고 자랑을 하던 그가 어느날 훌쩍 잘 나가던 대한민국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그냥 간게 아니다. 뜬금없이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자칭 화가가 된 그는 이제 여수 바닷가에 산다. 망한 횟집을 '아틀리에'로 개조한 그는 자신의 그 '유랑'이 바로 공간에 대한 욕망으로 부터 비롯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을 <tvn shift 2020 마이 스페이스>는 풀어낸다.
김정운 박사는 단호하게 정의한다. 공간은 바로 '나'라고.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곳, 그것이 바로 공간이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은 크건 작건 '큐브' 속에 갇혀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주장에 건축학과 교수 서현은 공간을 통해 내가 표현되는 것이 맞다며 동의한다. 과학 철학자인 장대인 교수는 70%의 동의를 표하며 공간의 개념을 물리적 의미 그 이상으로 확장해야 한다며 덧붙인다.
그래서 다큐는 김정운 박사의 주장을 실험으로 옮긴다. 그 첫 번 째, 기억의 공간을 더듬는다. 한 초등학교 교실, 그 교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자칭 '셜록'이라는 인물의 '과거'를 '힌트'를 따라 추적해 본다.
우산, 텐트, 그리고 맨 앞자리과 그 시절 썼던 공책, 계단참으로 주어진 힌트, 우리가 무심히 쓰던 우산이나 텐트가 '자기 만의 공간'으로 해석된다. 그 작은 우산 안에서 연인들이 키쓰하는 이유가 바로 '나만의 공간'이기 때문이라나. 맨 앞자리에서는 인정 욕구가 강한 자기애가 드러나고, 다른 학생들과 부딪치지 않는 계단 참에서는 자신의 세계를 갖고 싶어하는 자의식을 엿본다. 그리고, 말로는 이상하다 하지만, 늘 아이들과 휩싸여 지내게 되는 우리의 학교가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들여다 보고 성장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과 함께.
그렇게 김정운 박사의 예리한 분석과 함께 등장한 건축학과 교수 유현준, 그는 초등학교라는 공간이 '거푸집'같은 곳이라하고, 컨테이너처럼 쟁여진 그 과거로부터 기억을 재구성하고, 지금 내가 여기서 무슨 기억을 만들고있는가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공간'이라는 것이다.
기억, 권력, 그리고 감정
그렇다면 지금의 나를 드러내고 있는 공간은 어떤 곳일까? 현재의 대한민국 공간을 대표하는 '직장'으로 다큐는 시선을 옮긴다.
일로 한 직장의 오너를 만나러 가는 과정, 경비원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출입증을 받고, 비서실을 통과하는 '시퀀스'는 그 자체로 만나러 가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권력'의 장치가 김정운 박사와 유현준 교수는 공감한다. 그렇듯 오늘날 대한민국의 직장은 바로 '권력'으로서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직적 권력 구조'로 대변되는 공간이 변화하고 있다. '창의성'을 중시하는 트렌드는 회사를 놀이터처럼, 까페처럼 심지어 술도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그런데 '권위'를 파괴하는 공간이 마냥 좋기만 할까?
한 카드 회사에서 입사 2년차 강대리 자리 찾기로 부터 시작된 실험은 팀장님과 강대리와 함께 한 자리에서 권력과 공간에 대한 허심탄회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공간이 바뀌면 권력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함께 공감한 팀장님과 입사 2년차 강대리, 그러나 수평적으로 바뀐 공간이 '팀장' 님은 마냥 편하지만은 않단다.
직장에 들어와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졌던 공간, 수평적인 사내 문화는 때론 상급자의 '상실감'을 자아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직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수평적 공간에 대한 실험은 군대 내 위계 질서를 고스란히 담보해 냈던 한국 사회 내 직장 문화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담론이다.
특히 직장을 다니며 부여받은 명함으로 상징되는 '지위'가 곧 자신의 존재였던 자신을 표현해왔던 한국 남자에게 있어, 변화하는 직장 문화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권위'가 아닌 공간, 그 모색은 어떤 것일까? 또 하나의 실험이 등장한다. 김정운 박사와 유현준 교수가 한 부부의 집을 통해 그 답을 찾는다. 역시나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라는 공간 심리 실험, 거실을 덥석 들어앉은 명품 차, 곳곳에 감각적인 디자인, 그리고 다락방 공간을 활용한 미니 영화관 등을 통해 드러난 부부, 그 중에서도 특히 남편 김준선 씨의 '취향', 그건 늦게 나가서도 얼른 들어오고 싶은 집, 그저 돈을 벌어오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건사하는 '의무'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풀어놓은 '감정'이 오롯이 담겨있는 공간이다.
더 나아가 공간은 '행복'이 될 수도 있다. 여행, 캠핑 마니아였던 김득영씨는 집 근처에 트리 하우스를 지었다. 200~300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지어진 집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공간'으로 구현, 덕분에 삶이 즐거워졌단다.
imf 때 학창 시절을 보내느라 취미를 사치로 여기며 자랐던 80년대 동갑내기 이태연, 김기현, 양환용 씨, 그들은 비어있는 상가를 자신들의 아지트로 꾸몄다. 각자 한 달에 10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꾸린 공간에는 게임에서 부터 만화까지 그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충만'된 공간이다. 나이든 남자들이 하는 취미라야 그저 모여서 술 마시는 것 밖에 없는 우리 사회에서 그들은 술을 안 먹어도 모여서 함께 모여서 얘기도 나누고 요리도 하며 '네버랜드'같은 '비밀기지'를 꾸렸다.
다시 김정민 박사로, 그는 여수로 와서 말투부터 달라졌단다. 대기업에 강연을 다니던 시절 속사포처럼 쏘아대던 말투부터 달라진 걸 공간의 변화로부터 찾는다. 그렇듯 다큐는 '나만의 공간'을 찾으라 권유한다.
나만의 공간은 바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다. '소유'가 아니다. 여행을 통해 체득한 경험을 모아놓은 연구실은 7평에서 여행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몇 만평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유현준 교수가 자신의 세계를 찾아 깃들었던 텐트처럼, 집안의 작은 구석, 나무 아래, 도서관, 버스 뒷자석, 회사 옥상, 지금까지 지나쳤던 공간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공간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기울이라 권유한다. 바로 그렇게 자신이 사유한 공간을 통해 자신이 달라질 수 있단다. 공간을 '소유'라고 생각했던 우리 사회에 대한 도발적 담론이다.
지금 내 방에는 슈페르트의 아르페이오 소나타가 흐른다. 비록 콘서트홀은 아니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짙은 첼로 선율은 큐브의 공간을 넘어 나의 사유를 자유롭게 확장한다. 공간은 곧 부동산이요, 재테크라고만 생각했던 우리 사회의 선입관을 넘어, 내가 좋아하는 곳을 통해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tvn shift 2020 - 마이 스페이스>의 주장은 2020년을 맞이하며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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