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이탈리아 람페두사 해상 47명의 조난자를 실은 독일 NGO 시워치(sea-watvh) 3호는 입항 거부로 표류중이다. 이미 출항지였던 몰타에서 오랫동안 출항 보류로 인해 오랫동안 억류되었던 배, 이제 겨우 바다로 나와 '난민'을 구조했지만 그들을 반기는 항구가 없다. 

 

 

 
지중해를 떠도는 사람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난민' 문제가 낯설은 것이 아니다. 지난 해 제주도에 입국한 예맨 난민들을 둘러싸고 여론이 둘로 갈렸다.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갈곳없는 예맨 사람들을 기꺼이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 했지만, '가짜 난민', '범죄자', '테러리스트'까지 우리 사회에 잠재되어 있던 '혐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우리의 문제 만이 아니다. 전세계 곳곳에서 난민들과 관련하여 사회적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특히 바다 하나를 두고 삶의 질을 달리하는 유럽과 아프리카, 그 사이의 지중해는 UN산하 국제 이주기구에 따르면 세계 최대 이주자 발생지역 및 사망 지역이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인종과 종교의 박해, 굶주림으로부터 탈출한 사람들이 '보트 피플'이 되어 지중해 해상을 떠돈다. 

이른바 '유럽 난민 사태(European refugee crisis)'로 명명된, 2011년 시리아 내전 이후 본격적으로 지중해에 나타난 난민들,  2013년 이탈리아 람페두사 해상에서 이들을 태운 배가 좌초하여 366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이탈리아 정부는 이 지역의 군함으로 '마레 노스트룸(우리의 바다)'작전을 펼쳐 난민을 구했다. 하지만 이 작전으로만 구해진 난민들의 수가 무려 15만 명, 안그래도 경제 위기 상황에서 급격하게 증가한 난민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 이 부담을 나누어지지 않으려는 유럽 타국가, 그에 따른 여론의 악화로 2014년 10월 작전은 종료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작전은 종료되도 지중해를 떠도는 사람들은 줄지 않았다. 결국 시민 단체가 나섰다. 

12월 2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구조>는 유럽이 외면한 지중해 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NGO 씨워스에 승선한 세계 각국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난민'문제에 대한 화두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 

 

 

난민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프란체스코 트리플리는 지금 이탈리아에서 요리사로 일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시칠리아계 이민자이다. 그가 '이민자'였기에 '난민'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 '세계의 역사는 이주민의 역사이다.' 과연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 말할 수 있을까'라고 되묻는 프란체스코. 좋은 환경에서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해 요리를 하던 그는 그래서 이제 바다로 나선다. 

라이니니는 암스테르담에서 열쇠 수리공으로 일한다. 호출을 받고 달려가 문을 따주면 사람들이 기뻐하듯 지중해 조난 구조는 그렇게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다. 그는 북아프리카 알제리 태생이다. 4살까지 그곳에 살았다. 다행히도(?) 그는 부모가 유럽 출신이라 유럽으로 '이주'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인데 그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만약에 암스테르담 바다에 사람들이 빠졌다면 20척의 배가 달려갈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국경에서 사람들은 '익사'하고 있다. 

독일에서 청소년 지도 교사로 일하고 있는 슈피 하니힐트는 난민 구조가 의무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않되는 인도적 범죄 행위라며 한 발 더 나아간다. 독일 남서쪽 숲이 있고 집집마다 정원이 있는 마을에서 자란 슈피네 근처에는 난민 수용 위원회가 있었다. 침대도 없이 현대판 감옥같았다고 그곳을 회상하는 그녀, 돈많고 럭셔리한 나라의 문 앞에서 매일 사람들이 '익사'하고 있는 현실, 거대한 묘지가 되어가는 지중해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강변한다. 

그들이 달려간 바다, 그곳에는 도저히 지중해를 건널 수 없어보이는 20~25m의 고무 보트에 80여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 거기에는 임산부도, 어린 아이도 있다. 며칠 동안 당연히 씻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그 자리에서 해결하며 구져져 생지옥 상태로 바다를 건넌다. 항해에 부적합한 고무 보트의 현실에서 조난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로마해상구조조정본부에서 조난 신고가 들어오면 씨워치 호는 달려간다. 순간적으로 보트의 바닥이 무너져 물에 빠진 사람들, 그들 중 상당수는 수영을 할 수 없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에 빠지면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런 그들을 향해 구명 조끼를 던져주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게 바로 이들 볼런티어(자원 봉사), 씨워치 호의 청년들이 하는 일이다. 

하지만 구조가 늘 성공하는 건 아니다. 2017년 11월, 배가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었다. 시체가 바다에 흘러가고 있었다. 2살 아이를 건져 심페 소생을 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리비아 해안 경비대가 배를 출동시켜 구조하려 했지만 다시 리비아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기에 사람들은 그 배에 오르지 않는다. 

 

 

지중해는 누가 구하나? 
자연재해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기로 하여 생긴 일, 그래서 베를린에서 소방관으로 일하는 막스의 신념은 단순하다. 나치부터 난민까지 누가 되었든 인간은 모두 똑같고 중요하기 때문에 구할 것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 의견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나치를 구하듯 난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들을 죽지 않게 하는 건 쉽다. 가서 구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바다로 나서는 일이 매번 쉬운 건 아니다. 그들은 혹시라도 그들이 탄 배가 납치범에게 납치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생존 확인서'를 쓰고 배에 오른다. 난민들이 제 아무리 바다에 빠져 쓸려가도 이들 NGO 난민구조선 승선원들이 바다에 뛰어드는 건 금지사항이다. 막스는 그 금기를 깨뜨렸다. 죽어가는 임산부를 구하러 바다에 뛰어들었다. 어렵사리 그녀를 구조하고 자신의 몸도 말리지 않은 채 두 시간여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의료진과 함께 악전고투를 한 후 홀로 갑판에 나와서 울었다.

그들이 나선 어둠이 내려진 바다는 깜깜하다. 물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죽음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 그 바다에서 돌아온 후 항해사인 크라인아우트는 삶에 대한 '무지'를 잃었다. 난민들의 비참한 상황은 '추하다'. 그 혼란스럽고 미치겠는 상황을 견대낼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바다로 뛰어든 그들을 외면할 수 없기에 이제 스물 여섯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나이가 된 그는 바다로 향한다. 

하지만 이들의 '맹목적'이라 할만한 '인도주의'에 세상은 차갑다. 100유로면 갈 수 있는 거리, 생존을 위한 목숨을 건 마지막 항해, 그러나 난민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잣대는 냉정하다. 자신들이 태어난 곳을 떠나 좀 더 돈을 벌기 쉽고 안전한 환경으로 떠나는 이들을 '기회주의자'라며, 구조하는 행위에 대해 '브로커'의 배만 살찌우는 행위라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로 사람을 넘기는 '인신매매'의 한 유형이라 매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비난'에 대해 씨워치 호의 청년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하는 일은 그들이 난민 지위 확보를 위해 적절한 지역으로 옮겨주는 것일 뿐이라고. 단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사람의 생명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그건 국가와 정치가 판단할 몫이라고. 그리고 그런 '비난'의 근저에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겁먹은 마음이 내재해 있지 않냐 묻는다. 부디 다르게 보일 뿐인 생명에 대해 '너그러움'을 가지라고. 그저 그들은 바다에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수를 줄이는 것이 목표일 뿐이라고. 

김연식 씨, 항해사로 10년을 일했다. 지금은 제주에서 7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집과 씨름 중이다. 그는 씨워치 호의 항해사이다. 자신은 그저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던 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연식 씨, 그는 그렇게 광화문 광장을 가듯 지중해로 간다. 지난 5년간 김연식 씨와 같은 500여 명의 볼런티어들이 3000 여명 이상의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by meditator 2019. 12. 3. 21:00

경상북도 23개의 시군과 경상북도 경제 진흥원에서는 경상남도의 지역 자원을 활용한 창업을 통하여 지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청년 창업팀, '도시 청년 시골 파견제'를  모집한다. 자격도 단순하다. 만 15세 이상 39세 이하 대한민국 국적의 청년들, 출신지, 현 거주 지역 전혀 상관없다. 2019년 기준으로 100 여명의 청년을 모집했다. 여기서 뽑히면? 개인당 3000만원의 지원금이 주어진다. 

서울에서 3000 만원이라면 월셋방 하나 겨우 얻을만한 비용이다. 가게?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그 3000만원의 돈으로, 지방에 내려가 창업을? 서울에서도 창업하는 가게보다 폐업하는 가게가 많은 현실에서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맨 땅에 헤딩'같은 일을 실제로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sbs스페셜 <시골 가게 영업 비밀>이 그들을 찾아간다. 

 

 

시골 마을 북적이는 수족관 
경북 경산시 진랑읍 버스에서 내려서도 30분을 걸어가야 하는 거리에 지난 6월 수족관이 생겼다. 할아버지 대부터 살던 집 옆에 세워진 수족관, 그 곳에 자칭 '코리 아빠' 이현우 씨가 있다.

이 외진 곳 드나드는 사람이나 있을까 싶은 곳에 휴일 주차장이 가득 찼따. 요즘 남자들 사이에서 이른바 '물생활', 관상어 기르기가 유행이라더니 그래서일까? 가족끼리 삼삼오오 수족관 속 신비한 열대어 관람이 한참이다. 이 먼 곳을 어떻게 찾아왔냐는 질문에 '내비'만 있으면 어디는 못가겠냐는 '현답'이 돌아온다. '온라인' 관상어 기르기 까페를 통해 난 입소문이 이곳을 '물생활 마니아의 성지'로 만들었단다. 

그래도 '조그만 물고기'나 키워서 돈이 될까? 이현우 씨가 주로 취급하는 물고기는 청소 물고기로 알려진 '코리도라스', 작은 몸집이라 얕볼 것이 아니다. 그 한 종류인 '인콜리카다'는 마리당 60만원을 호가하고, '제브리나'는 다 크면 120만원에 이르기도 한다니. 그러다 보니 잘 팔리면 하루 매출이 100만원이 넘는 날도 있다고. 

장장 7년의 공시 장수생이었던 이현우 씨는 어떻게 물고기 아빠가 됐을까? 오랜 취준 생활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에게 조카가 함께 잡아온 붕어를 키워보라 권유했고, 그 붕어를 키우며 수조안에 만든 나만의 세상을 통해 10년만에 느껴본 성취감이 그로 하여금 '공시생'의 길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지난 2018년 39세에 턱걸이로 '도시 청년 시골 파견제'를 통해 얻은 지원금으로 수족관을 완성해 현재 성업 중이다. 부모님께 용돈 한번 드려보지 못했다고 울먹이는 현우씨, 하지만 이젠 아들의 수족관에 필요한 재료들을 함께 마련하고 틈틈히 들여다봐주시는 부모님이 현우씨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허허벌판 컨테이너가 품은 야심찬 꿈
경북 경주시 강동면 허허벌판에 박송안 씨의 컨테이너가 있다. 난방이 되지 않아 조만간 겨울 추위가 닥치면 입이 돌아갈 거 같다고 씩씩하게 말하는 송안 씨는 귀촌한 어머님이 여신 까페 한 귀퉁이에 디자인 가게를 친구 지민 씨와 함께 준비중이다. 

시골에서 디자인 가게라니? 송안 씨의 컨테이너가 자리한 곳은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양동 마을이다.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가는 이곳 마을 곳곳에는 여전히 살아 숨쉬는 문화 유산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사람들이 와서 그냥 보고만 가는 것이 아까워 이곳에 양동 마을의 문화적 컨텐츠를 꾸려낸 복합 문화 공간을 꾸려보겠다는 야심찬 마스터플랜을 세운 송안 씨, 그 계획으로 '도시 청년 시골 파견제'를 지원했던 송안 씨는 촬영 도중 합격 발표를 받았고 뛸 듯이 기뻐하며 허허벌판에 펼쳐질 자신의 마스터 플랜을 자랑해 보인다. 

그래도 이런 외진 곳에서 장사가 되겠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외려 송안 씨는 '옛날 분'이라며 타박한다. 대구에서 디자인 회사를 다니던 송안 씨의 꿈은 자신의 공간에서 원하는 디자인을 하는 것, 인스타 등을 통해 홍보가 가능하고, 지구 반대편 그 어디라도 원하기만 한다면 고객과 연결 될 수 있는 세상에서 파는 건 문제가 안된다고 장담한다. 지금은 허허벌판에서 애벌레에 질색하면서도 푸성귀를 뜯어 끼니를 해결하고 어머니 가게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는 형편이지만 자신의 '사업'에 대한 자신감만큼은 그 어떤 벤처 기업가 못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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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이라 가능한 가게 
예림이네 가게는 남해 석교리에 있다. 아이들과 갯벌 체험을 왔던 예림이네는 마을이 너무 좋아 몇 번을 들르다 그만 이곳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도 농사를 지을 엄두가 나지 않아 장사를 시작했다는 예림이네. 목공이 취미인 아빠는 태풍으로 바닷가에 떠내려 온 나무로 뚝딱뚝딱 물건을 만들어 내고, 그 물건은 엄마가 주인인 가게의 유용한 소품이 된다. 

이제 3년 째 노인들만 사는 마을에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사는 이곳은 어느덧 동네 사랑방이 되었고, '빌어먹을 것이다'라는 어르신들의 우려와 달리 시골이라 투자랄 것도 없는 상황에서 수익률은 최고, 가족이 먹고 살 만큼은 벌어 먹고 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것보다 예림이네를 만족시키는 건 한참 커가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하루 온전히 가족을 위해 충만한 시간이 된다. 

경북 성주군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는 권은아 씨는 집주인 할아버지의 인심 덕분에 잔뜩 얻은 늙은 호박으로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실험 중이다. 보증금 천 만원에 월세 80만원인데 5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 자체 연구 제조실에 개인 공간까지 넉넉함을 넘어선다. 

그런데 이 외진 곳에서 아이스크림이라니?  역시나 전국 어디 30시간 정도는 너끈히 냉장 보존 처리가 되는 첨단의 배달 시스템이 첨가물 없는 수제 아이스크림을 전국구 인기 상품으로 만들어 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름이면 동네 어르신들이 거저다 시피 나눠주신 참외로, 늦가을 늙은 호박 등 이 지역에서만 나는 천연 재료가 이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능케 하는 원천이다. 

하지만 꼭 장사가 잘 되기만을 위해 시골을 찾는 건 아니다. 손님이 적을 것같은 아이템을 찾아 우도에서 책방을 연 이의선 씨 부부도 있다. 하루에 열 권, 아니 이제 조금 더 욕심을 부려 20권만 팔면 된다는 부부의 초심은 '돈을 중시하지 않겠다는 것', 우도를 찾은 관광객이 탄 페리호가 떠나는 그 시간이 되면 서점도 문을 닫는 부부의 우도 라이프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도시에서 한평생을 열심히 일만 하시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쓰러지셔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가 들게 되었다는 의선씨, 외로웠던 서울 생활을 결혼과 함께 접고 아내 최영재 씨와 함께 5년전 우도로 내려와 서점을 차리게 되었다는 것. 그래도 책이 팔리는 게 희한하다는 이들 부부의 '영업 비밀'은 바로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팔기 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나를 지켜내는 시간 때문에 시골로 내려온 이들도 있다. 혹은 '시골'이라 가능한 재료들을 찾아 그곳에 연 가게들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라면 가게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할 그들의 '꿈'을 맘껏 풀여낸 공간이 시골이라 가능했기에 시골로 내려온 이들이 있다. 오프라인 마트가 온라인 상권에 어느덧 고심하게 되는 시절, 어쩌면 이 시골 마을의 가게들은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도시의 한계를 넘어선 이 시대의 색다른 첨단 사업일 수도 있겠다. 

by meditator 2019. 11. 18. 15:21

장장 5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기획한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 6부작이 만들어진 시간이다. 1,2부  진화 심리학적으로 '증오'의 기원을 추적했던 다큐는 '증오'가 진화의 결과로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정서적 기제'임을 밝혔다. 그렇다면 그 '내재되어 있는' 증오의 문을 열어제치는 건 무엇일까? <3부,증오를 부추기는 기술>은 바로 그 '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열려진 문'은 봇물처럼 증오를 키워 '극단주의'까지 흘러넘친다. 바로 <4부, 증오의 극단주의>이다.

 

 

3부. 증오를 부추기는 기술 - 누가 증오를 부추기는가? 
에돌아 갈 것도 없다.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젤라니 콥은 오늘날 사람들을 부추겨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부추기는 주범으로 '카리스마적인 리더와 언론'을 손꼽는다. 특히 중립적 사실 보도를 사명으로 했던 '언론'은 이제 그 어떤 단체보다도 당파적이며 편향적인 기사를 쏟아내며 극단적인 대립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리더와 언론의 선전, 선동은 사람들에게 편향적 시각을 갖게하는 걸 넘어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하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우려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1994년 무려 백만 명이 살해당한 르완다 학살이다. 벨기에는 르완다를 식민 지배하며 소 10마리 소유를 기준으로 투치족과 후투족을 나눴다. 15%의 소수 투치족이 85%의 다수 후투족을 지배하며 반목을 거듭, 시간이 흐르며 이들은 서로를 다른 종족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후투족 언론, 그 중에서도 친정부적 어용 언론이었던 '캉구라'는 투치족을 마치 '바이러스'처럼 없애야 할 대상으로 '반투치 선전'에 열을 올렸다. 문맹자가 많았던 르완다에서 영향력이 컸던 라디오 방송국은 더했다. 투치족을 인간이 아니니 죽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며 '바퀴벌레 소탕작전'이라 부추겼다. 더구나, 지주 계급이었던 투치족을 죽이면 그들의 땅을 소유할 수 있다고, 그러니 더 많이 죽여 더 많은 땅을 가지라 선동했다. 

이렇게 언론과 방송을 통한 지속적인 선동, 거기에 투치족은 극악무도한 악당으로 아이들과 노예들을 죽였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난 후투족 사람들은 투치족을 상대로 싸우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고, 자신들이 지키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거라는 '공포'를 내재화 시키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 선전의 '핵심'은 '비인간화'이다. 유대인들에 대해 지하에 들끓는 쥐떼와 같다고 했던 나치처럼 후투족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라며 박멸해야 할 존재로 치부했다. 공격해서 죽이는 게 당연한 것이라며 대량 학살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스며들은 선전과 선동은 사회적 인지 능력인 공감 기능을 관장하는 내측 전전두엽 피질의 활동을 떨어뜨린다.

인간의 진화 과정을 도표로 만들어 놓고 미국에서 342명에게 조사를 했다. 질문에 답한 미국인들 거의 대부분이 자신이 진화의 최종 단계인 100%라 답했다. 반면 이민자인 멕시칸들은 75% 정도 밖에 진화되지 못한 존재라 여겼다. 유럽인도 마찬가지다. 무슬림에 대해 60%라, 즉 미개하고 야만적인 존재가 간주했다. 

문제는 이러한 비상식적인 편견이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활개치고 있다는 것이다. 2015년 찰스턴 감리교회에 들어가 성경 공부 모임을 하던 흑인들을 총기로 난사한 빌런 도프. 그는 흑인들이 매일 백인을 죽이고 백인 여자를 성폭행하고 있다는 가짜 뉴스를 인터넷을 통해 '습득'했다. 

백인에 대한 흑인들 범죄를 인터넷에 검색을 해본 빌런,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띈 사이트는 '보수 시민 위원회'라는 백인 우월주의 선전 사이트였다. 문제는 이 사이트가 '사실'에 근거한 검색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돈을 더 내면 상위에 링크시켜주는 구글의 상업적 알고리즘의 결과였는데도, 사람들은 마치 오늘의 날씨를 검색하여 취득하는 '사실'처럼, 이들 사이트에 대한 '사실적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구글'등의 검색 사이트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증오'를 퍼뜨린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며 사람들은 예외적인 일탈로 여기지만 다큐는 바로 그런 인간의 '증오'에 기반한 대량 학살에 이르는 행동은 인간 역사가 가진 오랜 전통의 산물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은 인간이 가진 이 전통이 산물을 자신들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기꺼이 이용한다는 것도. 

지난 2018년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재선 가도에서 떨어지는 지지율 하락을 상쇄하기 위해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는 '반난민 정책'을 자신의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외국인 침략자가 몰려오고 있다'며 유세 내내 공포를 부추겼고, 바로 자신이 맞서 싸울 적임자라, 헝가리를 지킬 수 있다며 '증오'를 불지르며 '대중 영합적 민족주의 운동'을 조장했던 빅토르는 결국 재선에 성공했고, '반난민, 반EU' 정책을 앞세워 4선까지 기세를 몰아붙였다. 

 

 

4부. 증오의 극단주의 - 결국 리더의 조종이다 
바로 이러한 '증오'의 분위기 속에 '극단주의', 그리고 급진화된 개인이 탄생한다. 필라델피아 빈민가 출신의 청년 프랭크는 1971년 '백인 우월주의 스킨헤드'가 되었다. 다. 나치 깃발을들고 자신들이 유대인의 희생양이라 여기던 집단에서 가족과도 같은 소속감을 느꼈다. 미국이 유대인에 의해 소돔과도 같이 타락했다며 행동에 나선 그는 총기 판매, 조직원 납치 감금을 일삼다 17살에 구속되어 3년 형을 살게 되었다. 

학대받던 가정에서 16살에 도망쳐 나온 제시 모틀은 말콤 X의 자서전을 읽고 이스람교로 개종했다. 유누스 압둘라 무함마드로 개명한 그는 살라피 자하디즘에 헌신, 오사마 빈라덴을 지지하며 알카에다 조직원을 모집하여 보냈다. 

극단주의 전문가인 샤샤 하블리첵은 백인 우월주의건, 극단주의 이슬람이건 다 똑같다고 말한다. 오늘날 전세계적에서 조직적으로 부상되고 있는 극단주의 단체 이들의 1차적 목표는 편가르기이다. 

1971년 필립 짐바르도 교수에 의한 유명한 지하 감독 실험이 있다.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니 편과 내 편을 나누고 이들을 죄수와 간수로 분하게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 수록 간수의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잔인해졌다. 쇠사슬로 죄수를 묶는가 하면, 변기 청소를 시키고 기합을 하는 등 가혹 행위까지 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인간은 자연스럽게 맡겨진 역할에,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게 되는 것일까는 의문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 실험에는 '비밀'이 있었다. 2001년 BBC에서 일반 대중 15명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한 것이다. 간수로 뽑힌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감옥을 운영하라고 했는데, 뜻밖에도 1971년과 달리 간수들은 가혹 행위는 커녕 자신이 간수가 되어 죄수를 통제하는 상황을 싫어했다. 

그리고 1971년 실험에는 실험의 배후 짐바르도 교수가 간수들의 가혹 행위를 '조장'했다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인간들이 간수건, 죄수건 주어진 역할에 무조건 충실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극단적으로 상황을 만들어 가는데에는 '리더의 지시'가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이 '리더의 지시'를 증명하는 사례가 바로 이라크 전 당시 잔혹 행위가 발생했던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의 사례이다. 

 

 

2008년 오바마가 당선된 이후 증가한 백인 우월주의, 이에 트럼프는 '나는 당신들과 같다'며 이를 부추겼다. 위험을 필요이상으로 부풀리고 행위에 대한 칭찬과 보상을 약속하며 거기에 그럴싸한 대의명분까지 더해지면, 상황에 던져진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것같이 되면서 극단주의적 행동을 서슴치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공포 정치를 이용한 정치는 '민주주의'의 퇴보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극단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건 '엄격한 법'일까? 이에 대해 한때 스킨 헤드족이었던 프랭크는 회의적이다. 그를 구속했던 법도, 그가 거리에 나설 때마다 그에게 퍼부어지던 욕도 그를 바꾸진 못했다. 외려 그를 바꾼 건 나치 문신과 스킨 헤드 복장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규직으로 채용해 주었으며 그의 일탈을 견뎌준 유대인 상점 주인이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했던 이슬람 극단주의자 제시를 변화시킨 건, 그가 조직원들을 알카에다로 보냈던 모로코에서였다. 그가 미국에서 당연히 누리던 것들, 언론의 자유라던가 하는 것을 위해 모로코 사람들이 목숨까지 걸며 싸우는 것을 본 제시는 지금까지 그가 투쟁했던 '극단주의'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모든 프랭크에게, 제시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 바로 우리 인간 사회의 비극, 그 악순환을 낳는다.  





by meditator 2019. 11. 15. 19:35

그 어느 때보다도 광장이 뜨거웠다.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으로 대립한 사람들은 온라인이라는 공간에 만족치 않고 광장으로 뛰쳐나갔다. 그저 의견이 다르다 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극명하게 서로에 대해 '증오'에 가득한 말 폭탄을 쏟아놓는 시절, 과연 이런 '대결'의 현실이 '봉합'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당사자들은 '봉합'이 아니라 자신들의 '옳은' 의견을 '정리'되어야 한다고 '단언'할 것인다. 문제는 그 '대결'의 양자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다.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대립, 궁하면 돌아가라는 '선인'들의 지혜를 빌려봐야 하나.  kbs1이 그 지혜의 실마리를 풀어놓았다.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기획한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 시리즈이다. 11월 5일과 6일에 걸쳐 방영된 1,2부는 '증오', 그 기원의 진화론적, 사회사적 의미를 파헤쳐본다. 

 

 

증오의 기원
진화심리학자 브라이언 헤어와 함께 탐구한 1부 증오의 기원, 다큐는 '증오'는 인간의 본성인가?라고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과 유전자가 99% 일치한다는 보노보와 침팬지, 하지만 이 두 종은 친화적인 암컷 지배와 공격적인 수컷 지배로 전혀 다른 사회적 관계를 보여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다큐는 지리적 원인에서 찾아본다. 기원전 6백만년 전에 콩고강을 사이에 두고 분리된 두 동물군, 먹이 걱정이 없는 보노보가 사교적이고 친화적인 공동체를 꾸린 반면, 한정된 먹이를 두고 경쟁을 해야 했던 침팬지는 다른 무리에 적대적인, 심지어 자식들이 많다고 여겨지면 어린 침팬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공격적 성향이 높은 무리가 되었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먹이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자연적 환경에서 동물들의 '증오'가 싹텄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인간은 친화적이며 사랑을 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특정 상황에서 보여주는 적대적인 모습은 인간이야말로 가장 증오가 가득한 생명체임을 유감없이 증명해 낸다. 특히 인간이 '증오'를 표명하는 방식 가운데 '집단 따돌림'은 빈번하게 보여진다.

10대의 왕따 현상을 살펴보면 따돌리는 아이들이 비주류라는 기존의 선입견과 달리 가해자들은 비주류도 아니고 따돌림은 충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외려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인기있는 부류들이 하는 보편적인 행태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을 에게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건 바로 '공평함'이다. 불공평한 상황에 대해 인간은 그걸 학대나 위협이라 여기며 인간성의 어두운 면을 폭력적으로 드러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에서 벌어지는 학교 등 집단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복수인 총격 사건, 성장하는 과정에서자신이 세상에 기대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기억이 분노를 키우고, 이런 분노에 대해 인터넷 공간에서 응원을 받으며 무기와 탄약을 비축하는 등 용의주도한 준비 끝에 '폭발'한다. 또한 특정하고 제한적인 세계관의 경험이 증오를 증폭시키기도 한다. 동성애 반대 시위로 유명한 미국의 원리주의 침례교 단체에서 보여지듯  스스로 내몬 '수난'으로 인해 신념은 강화된다.친족 관계로 얽혀진 이 단체에서의 탈퇴는 마치 팔다리가 잘린 채 상어가 득실거리는 바다에 던져지는 공포감을 느끼기에 쉽사리 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증오는 유전적인 소인을 가지고 사회적 배제를 통해 증폭되며, 자신이 소속된 집단적 정서로 인해 '폭력'의 정서를 수용하게 만든다.

 

 

편가르기의 기원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집단을 미워할까? 인간은 편가리기를 좋아한다. 종교, 인종, 정치 성향을 근거로 사람을 분류하고 나랑 다르구나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 편을 '극단적'으로 응원한다. 

이 원인을 인지 과학자 로리 산토스는 '부족주의(tribalism- 부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힘을 과시하는 현상)에서 찾는다. 1950년대 사회 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오클라호마에서 15살 소년들을 모아놓고 가짜 야영 캠프 실험을 했다. 가상의 시합을 한다고 편을 가르게 된 소년들은 급기야 기를 불태우고 야영지를 습격하는 등 상대집단을 괴롭히는 등 경쟁이 과열되는 행동의 변화를 보였다. 

이를 통해 개인의 행동은 그의 성격이 아니라 직장, 가정, 지역 사회 등 이른바 그가 속한 '부족'에게서 영향을 받게됨이 증명된다. 더구나 경쟁을 벌어야 하는 상황은 집단간의 증오심을 발동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바로 특정 지역을 연고로 한 스포츠 팬들의 강한 충성심이다. 진화한 형태의 전쟁이라 정의내려진 스포츠는 승리, 전리품인 트로피 등의 전쟁의 상징적 요소들을 가지고 특별한 유대감으로 결속하게 된다. 그냥 밉다는 상대 편, 이렇게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 정체성에 완전히 녹아드는 극단적 유대 관계가 바로 정체성 융합'이다. 

옆의 팬이 공격당하면 마치 자신이 공격당했다고 느끼고, 축구가 아니라 동료 팬들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폭력'적이 되는 상황, 개인들은 적극적으로 집단을 보호하고 방어하며 마치 각자가 최전방에서 싸우는 전우처럼 서로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심정이 된다. 이런 폭력적 편가르기는  과거 부족사회에서 구성원들의 단결이 곧 생존을 보장했던, 살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던 심리 기제에서 비롯된다. 

이런 정체성 융합에 기반한 '부족주의'가 스포츠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에서도 극단적으로 존재 양태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진보적 민주당원과 보수적 공화당원은 서로 자기 쪽만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 진영을 '악'이라 규정하며 증오한다. 심리적 매커니즘은 스포츠 부족주의와 동일하지만 그 신념과 윤리적 강도는 정치적 진영논리가 훨씬 더 심하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 양극화가 사회 관계망을 파괴하고 있는 것, 성향이 다르면 가족이라도 함께하지 않으며, 타인종보다도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과 사귀는 걸 꺼려할 정도로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진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을까? 앞서 종교적 극단주의 단체가 친족에 기반하듯, 미국내 보수와 진보적 입장은 대다수 부모와 지역으로 부터 비롯된 환경적, 문화적 요인이 결정적이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유전적 요소는 강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마치 우리의 지역 감정처럼. 

집단만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이들에게 객관적 사실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실제 취임식에 모인 군중이 오바마에 비해 적었음에도 트럼프를 지지한 사람들은 편견으로 이를 왜곡하여 '가짜 뉴스'를 만드는 지경에 이른다. 

 

 

증오의 도구가 된 기술의 발달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인터넷, 블로그 등의 기술의 변화는 이런 양극화 심화를 완화시키기는 커녕 외려 조장하고 있다. 부족주의를 이용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언론 매체는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좀 더 자극적이고 신랄하게 전달하여 수익을 올린다.

페북 등 사용자가 집단 안에서 위안과 안전함을 느끼도록 패러다임이 짜여진 각종 소셜 미디어는 생각이 다른 팔로어를 '위협'으로, 내집단과 외집단의 교류를 배제하고 내집단 구성원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밀폐된 공간이 되기 십상이다. 거기에 사용자의 관심을 오래 끌 수 있는 콘텐츠를 전달하도록 만든 알고리즘은 분노, 공포같은 부정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의 콘텐츠를 통해 부족주의를 자극하며 사고를 극단적으로 증폭시킨다. 

지난 2016년 '모든 무슬림은 극단주의자'라는 생각을 가진 극우 불교 승려 위라투는 무슬림 남성이 불교도 여성을 성폭행하는 '가짜 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한다. 무슬림이 다수 불교도를 위협한다고 선동하는 이 영상으로 인해 불교도의 폭동이 유발되었고, 2017년 미얀마 서부 무슬림 소수 민족 로힝야족 학살이 초래되었다.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할 페북이 추악한 인간 본성을 품어낸 결과였다. 

외부인에 대한 공포와 분보를 선동하는 것만큼 집단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건 없다. 이에 감정 이입을 한 인간들은 같은 종인 다른 인간에게 서슴없이 잔혹해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끊임없는 갈등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이미 힘의 균형점을 잃은 지 오래지만, 상대가 당한 부당함은 보지 않은 채 각자 자신들이 가진 상흔의 역사에 기반하여 자신들을 '희생자'라 여긴다. 

이러한 경쟁적 피해의식은 궁극에 가서 상대편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게 된다. 

실제와는 다른 심리적인 상태에 따른 인식은 확증 편향(자신의 신념, 가치관, 판단 따위에만 주목하고 그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가지며 정치인들은 이를 부추긴다. 

인지 심리학과 진화 심리학에 근거하여 추론해 본 '증오 사회'의 기원, 인간이 아닌 동물 실험과 우리나라가 아닌 타국의 사례들이 등장했지만, 그 '기원'에서 비롯된 '증오'가 만연한 사회는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사회는 '증오'로 분열되고 폭력적 갈등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까? 그 암담한 현상에 대한 희망을 앞서 셰리프의 실험이 전한다. 편을 갈라 싸우던 소년들, 하지만 급수하던 탱크에 돌을 넣어 당장 마실 물이 급해지자 갈등은 잠시 접어두고 '물 구하기' 합동 작전을 벌인다. 이렇듯 보다 긴급한 상위의 목표는 집단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다. 한때 적이 보다 더 큰 적 앞에서 손을 잡았던 세계 대전의 사례에서도 보여지듯이.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인간 집단간의 증오는 얼마든지 바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by meditator 2019. 11. 8. 20:31

'성냥갑', '닭장', 흔히들 아파트를 낮잡아 부르는 통칭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홍익대 유현준 교수에 따르면 1년 365일 아파트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한 눈에 다 보이는 공간 이러한 공간은 아이들의 뇌세포를 자극할 꺼리가 없다. 그래서 정작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선택한 아파트에서 부모들은 주말이면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위해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아파트에 18세 이하 미성년자 가구 중 71.6%가 산다. 마당과 마을과 골목을 잃어버린 아이들, '하우스 딜레마'다. 

 

 

<sbs스페셜>은 2달에 걸쳐 유현준 교수와 함께 '공간 여행'을 떠난다. 과연 어떤 공간에서 내 아이를 키워야 할까 하는 고민이 그 출발점이다. 성장하는 동안 1층 단독 주택에서 2층 양옥, 그리고 아파트에서 살아봤다는 유현준 교수, 그가 설계를 할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건 주택이었단다. 그래서 그는 골목이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는 주택가에 대한 예찬론을 펼친다.  불과 500m 이동할 때도 선택 가능한 길이 수십 가지에 이르는 골목은 아이의 기억을 풍성하게 만들고, 이는 곧 아이가 가진 삶의 배터리를 풍성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아파트? 주택? 도시? 자연? 
아이를 위해 좀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서울 주택가에서 수도권의 좀 더 큰 아파트로 큰 맘 먹고 이사한 예서네 집, 하지만 정작 그 집이 짐이 되는 현실에 봉착했다. 무리를 해서 이사한 덕에 엄마는 학습지 선생님을 하게 되었고 퇴근을 해서도 남은 업무 때문에 예서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 그래도 엄마는 늦게라도 예서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출퇴근 거리가 멀어진 아빠는 예서를 만날 시간조차 없다. 좋은 아파트라지만 이사를 와서 한결 외로워진 예서, 좁고 복닦거려도 친구들이 있던 다세대 주택가를 그리워한다. 

 

 

어린 나이에 동화작가로 등단을 한 이수네, 엄마는 이수의 감성을 좀 더 키워주기 위해 인천의 아파트에서 제주로의 이사를 감행했다. 비오는 날 마당에서 하는 물놀이, 아파트에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다양한 놀이를 즐기는 이수의 감성은 폭발했다. 때로는 놀이동산, 공방, 까페로 변신하는 이수에게 우리집은 '변신'하는 소중한 공간이다. 

하지만 늘 선택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것만은 아니다.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로망을 실현하고자 남해로 이사한 윤슬이네는 딜레마에 빠졌다. 시골이 재미없다는 아이, 벌레가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싶단다. 여유롭고 한적한 것도 잠시 심심해하는 아이를 보며 부모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셋째 임신 사실을 알고 오은주 씨는 장성에 집을 지었다. 가운데 마당이 있는 집, 굳이 주변 이웃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언제든 나와서 편히 쉴 수 있는 마당에 아이들은 층간 소음을 걱정하지 않고 뛰어논다. 

목동에 사는 엄마들은 쉽사리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수도권에 자가로 아파트가 있지만 전세로 그 보다 좁은 목동에 살면서도 아이의 미래를 위해 학군과 교육 여건이 좋은 이곳에서 아이가 다 자랄 때까지 있게 된다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한다.

이처럼 아파트, 주택, 도시, 자연 등 맹모삼천지교처럼 아이들을 위해 부모들은 최선의 '공간'을 찾아 헤매지만 정답은 없다. 유현준 교수 역시 주택이 답이다가 아니라 직업을 탐방하듯 공간 역시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한다. 같은 공간도 창문 밖에 커튼을 달아 공간을 확장하고, 화분을 놓아 마당처럼 꾸며도 좋다. 아파트라도 자주자주 인테리어를 바꿔 변화를 꾀하며 아이들에게 자극을 주는 등 얼마든지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거실에서 공부를
이런 고민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을 다큐는 제시하고자 한다. 아이들 공부를 위해 집을 놔두고 좋은 학군에서 전세를 사는 우리나라 학부모들, 결국 '교육'이라는 화두로 집결되는 고민을 위해 '거실 학습'이라는 공간 활용 학습법을 제시한다. 물론 기승전 '공부'로 이어지는 해법은 아쉽다. 하지만, 우리 아이의 교육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제는 해외에서 살기까지 감행하는 우리나라 부모들에게 '거실 공부법'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네 아이를 모두 일본의 명문대인 도쿄대에 보내서 '사토 마마'라 불리우는 사토 료코씨 그런데 그녀의 비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다름아닌 거실 공부법. 아이들을 공부시킬라 하면 우선 방을 주고, 요즘은 방도 부족해서 방 안을 다시 독서실처럼 꾸며주는 우리와는 달리, 그녀는 '공부하는 아이들이 외로우면 안된다'는 소신을 펼친다. 공부는 힘든 것이기에 거부감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녀, 자, 이제부터 공부하자가 아니라, 어느 틈에 손에 연필을 들고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는 분위기를 가꿔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도쿄대생들의 74%가 초등학교 때까지 거실에서 공부를 했고, 중고등학교 때까지도 거실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는 통계, 일본 명문 아오야마 학원에 입학한 중학생 리나의 집, 리나가 거실 식탁에서 공부를 하는 한편에서 엄마는 부엌 일을 한다. 그러다 리나가 부탁을 하면 함께 앉아 문제도 내주는 환경, 바로 이렇게 가족과 소통하며 언제든 가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거실에서의 공부가 일본에서 좋은 학습법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학습 방식에 대해 전문가는 굳이 조용한 도서관을 놔두고 까페를 찾아가는 요즘 청년들의 학습 방법과 유사함을 지적한다.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인간, 그 환경은 오히려 외떨어진 좋은 방이 아니어도, 학습적 분위기만 갖춘 가족적인 거실이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똑같은 공간인 아파트에 대한 다른 시도도 있다. 마을의 정서를 가진 아파트 공간을 만들기 위해 건축가들이 의기투합했다. 무려 80개가 넘는 출입구를 가진 테라스를 가진 저층, 앞마당을 가진 중간층, 그리고 다락방을 가진 복층 형태의 고층 아파트가 함께 단지를 이루는 방식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업비 때문에 이런 '이상적인 시도'는 선택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으로 시도한 것이 바로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어느 아파트에나 있는 놀이터를 아이들이 스스로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굳이 놀이터뿐이랴, 주변 동네를 주도적으로 자신의 공간으로 탐험해 가는 방식도 있다. 소유하지 않더라도 '도시의 보물 찾기'를 통해 공간은 확장할 수 있다. 단지 아이들에게 그럴 시간만 준다면. 



 

by meditator 2019. 11. 5. 16:46

'성실히 노력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경쟁을 하더라도 반칙은 처벌을 받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노력하면 결과가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저의 결과도 공정할 줄 알았습니다. 기회의 공정성을 믿었던 제가 한심합니다' 서울대 집회에 나선 한 학생의 발언이다.

 

 



이른바 '조국 사태', 청년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쉽사리 모이기 쉽지 않은 대학가 단 2명이 준비를 했는데 500 여 명의 학생이 몰렸다. 조국 전 민정 수석이 법무부 장관이 된 이틀만의 일이다. 8월 23일부터 10월 3일까지 서울대를 비롯 연세대, 고려대, 부산대 등에서 13차례 집회가 열렸다. 96건의 발언, <시사 기획 창>은 이 발언을 데이터 분석 기법을 통해 살펴봤다. 단어, 빈도, 연결 중심성을 통해 심층 의미를 분석했다. 

학생들의 발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당연히 조국, 그리고 '정의'이다. 그리고 의미망의 중심에는 '공정'이 있다. 학생들은 공정에 대한 위반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라는 정의에 위배된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공정'이란 무엇일까? 바로 기회의 평등이다. 교육을 통해 자신들이 한 노력이 보상받고 인정받는 세상, 그를 통해 앞으로의 삶이 보장받는 세상이다. 조국 사태로 인해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에서 '과정으로서의 공정성' 훼손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그들의 생각은 '후안무치'란 단어로 연결된다. 

'부모 잘 만난 고등학생이 연구에만 매진한 어떤 사람의 논문 1저자에 자기 이름을 올리고 논문을 도둑질한 세태가 너무나 부끄럽다.' -연대 대학원생

'한번 두번 받아볼까 말까한 장학금을 가정 형편이 더 어렵거나 성적이 더 좋은 학생이 아니라 유급을 두 번이나 당한 최하위권 학생이 여섯 학기 내내 받았다는 사실, 이러고도 기회가 평등하다 할 수 있나?' - 고대 학생 

 

 

대학생들 '정의'와 '공정'에 문제 제기를 하다 
학생들이 들고 일어선 '상식에 대한 질문', '공정'에 대한 의문, 그 기저에는 바로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서려있다. 박근혜 탄핵 이후 그 상처를 보듬어 줄 것이라는 기대로 이 정부를 뽑았는데, '기회의 평등함, 과정의 공정함, 결과의 정의로움'을 내세운 정부가 국민의 상처를 다시 후벼팠다고 느끼는 것이다. 바로 '촛불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함께 광장에 서서 나누었던 공유된 기억은 곧 새 정부가 이루어줄 도덕적 사회에 대한 기대로 승화되었기에  '도덕적 결함'에 분노했다. 하지만 이건 '표면적'인 것이다. 그 기저에는 자신들의 기대를 모아 정권을 '맡겼는데', 어쩌면 이 정부도 애초에 '정의롭거나 공정하지 않고, 관심조차 없을 지도 모른다는 '소외감'이 '분노'로 표출되었다. 

학생들은 이런 '사태'를 그런 '불공정'한 일이 별 거 아니라고 하는 기성 세대가 보내는 사회적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런 ' 기성세대의 상식'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물론 그런 학생들이 들고 일어선 것에 대해 비판적 의견이 있었다. 이미 기득권인 서울대 학생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자한당의 손길이 어른거린다 등등. 

하지만 학생들은 반박한다. 자신들은 박근혜 탄핵 세대라고. 그때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었다고. 자신들이 나선건 어떤 정치적 사상이 따른 것이 아니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목소리를 내는데 또 지금 자신들의 목소리가 특정한 진영의 목소리로 치부되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진보 세력이나 보수 세력 모두 정치적으로 반응했다. 교육의 불평등이라는 제도의 문제로 받았다. 정부는 대입 제도 개선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입시 제도가 이상해서가 아니라고 한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 '단점'을 악용하는 것이 문제라고. 

자신들이 한 고생, 자신들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원하는 것, 하지만 그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일상에서 느낀 불공정에 대한 상처와 원망이 '조국 사태'를 빌미로 터진 것이라고 전문가는 분석한다. 학생들은 강변한다. 민주, 반민주의 구도가 아니라고, 거시적인 정치적 민주화의 문제가 아니라고. 자신들이 마주한 공정과 불공정의 문제라고. 

 

 

 

 


고용없는 저성장 시대를 맞닦뜨린 세대
1960년대생 대졸자는 100%는 물론 고졸자 35%까지 취업되었다. 이들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을 차지했다. 하지만 1990년대 대학을 나온 이들은 53.4%만이 취업을 했다. 

취업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등의 청년 1000명에게 청년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가라는 설문 조사를 했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미국, 중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재능과 노력을 우선 순위에 놓은 반면, 우리의 젊은이들은 부모의 재력을 첫 번째 조건으로 답했다. 두번 째 조건도 인맥이었다. 세번 째에 가서야 재능이라 답했다. 

심지어 '인맥'의 정의도 다르다. 홍콩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사회 관계망을 '인맥'이라 여기는 반면. 우리 사회에서 인맥이라 함은 당연히 부모의 인맥이다. 결국 우리 사회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성공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수'를 '부모'라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능력과 인맥이 자신들의 능력보다 성공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여기니 '조국 사태'에 '분노'가 폭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생각은 바로 우리 사회 이동성의 정체와 하락을 반증한다. 정체된 사회, 숙명론과 패배론이 팽배한 사회, 당연히 행복지수가 떨어진다. 그리하여 희망도 노력도 할 필요가 없는 사회, 출발선이 같지 않은 것 같다는 박탈감, 바뀔 수 없다는 좌절감이 만연한 사회, 촛불 이후에도 청년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촛불을 든 청년들은 바로 그런 사회, 그런 미래에 반대한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20~30대 직원이 2004년 60%였던 것이 2015년 45%, 외려 14%가 감소했다. 20~29년차 직장인의 연봉을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가 초봉에 비해 4배나 늘어난 반면, 유럽은 겨우 1.5배, 하는 일이 아니라 근속 연수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는 연공급제, 대기업 중심의 노조, 우리 사회 노동 구조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 청년를 통해 집약적으로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청년 노조 유니온은 '사다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다리 없이도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에 대해 '논의'가 되어야 할 시기라 주장한다. 

사회 진입만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청년 정책은 일부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문제에만 집중되어 왔던 점도 재고되어야 한다. 청년층 전반에 걸친 일상의 불공정이 만연되어 있다고 체감되는 상황에서 사회 구조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게 청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하지만 국회나, 정당의 관심은 '실업'에만 주목한다. 정작 왜 실업에 놓이는가라는 포괄적인 문제는 주목하지 못한 채, 그러다 보니 고용 정책 외에 청년들에게 별도 지원 정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누가 청년을 대변하는가
서복경 서강대 청년정책 센터장은 약간의 정보, 혹은 약간의 인센티브로 자동적으로 산업 구조에 편입될 것이라는 인식이나 방식은 전세계적으로 청년층이 사회 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날 세계에서 낡은 방식이라 일침을 가한다. 보다 구조적이고 글로벌한 이 문제에 대해 거시경제적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렵사리 이런 청년들의 고민에 대해  '청년 기본 법안'이란 결과가 도출되었다. 2017년 청년 미래 특별 위원회에서 발의한 청년 기본 법안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 보장을 내세우며 이를 국가와 지자체의 의무 조항으로 넣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기본 법안'조차 1257일 째 상정조차 되고 있지 않다.

말로는 청년 정책이 중요하다지만 언제나 중요하다는 정치적 사안에 밀려 뒷전이 되어버린 '청년 법안', 결국 당사자인 청년들이 '정치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의 한계가 지적된다. 

87년 민주화 세대는 2004년 총선을 통해 이인영, 오세훈, 원희룡 등이 30대의 나이에 국회에 진출했다. 40대 미만의 국회의원이 16대에는 5.7%, 17대에는 7.7%, 18대에는 2.3%, 19대에는 3%, 20대에는 1%로 외려 거꾸로 줄어들고 있다. 세계 평균 15.5%에는 한참 못미치는 전세계에서 끝에서 두 번째의 수치이다. 

19대 청년 비례 대표 국회의원을 역임한 장하나 씨는 오늘날 청년 문제는 청년이면서 동시에 가난하기에 생존을 위한 문제가 많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평균 수십 억의 재산가인 국회의원이 그런 국회의원의 자녀들이 이런 절박한 청년들의 문제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청년없는 국회에서 청년을 위한 정치는 상정조차 되지 못하는 청년 기본 법안으로 상징된다. 이에 전문가는 말한다. 기성 정치인 본인이 무얼 하겠다 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내려와 새로운 사람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 청년을 위하는 것이라고. 

 

 

이에 가장 바람직한 사례가 등장했다.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도시 부산, 20.8% 전국에서 가장 낮은 청년층, 하지만 그 두 배에 달하는 청년들이 이 늙은 도시를 빠져나간다. 이런 현실에 부산시와 부산 지하철 노조는 이 시대에 귀감이 될 만한 결정을 내렸다. 부산 최대의 공기업 부산 지하철, 통상 임금 소송에서 승소하여 얻은 돈을 신규 채용을 위한 비용으로 기꺼이 양보했다. 기존 직원들의 더 높은 임금대신, 노조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여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적정 인력 확보라는 결정을 내린 노조, 덕분에 사상 최대 670 명의 신규 채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음 세대 고용 확보를 위해 직원 1인당으로 치면 1000만원을 양보하여 세대간 연대 임금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조국 사태 어언 두 달 여, 광장에서도 소외된 청년, 그 불공정에 대한 문제 제기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이다. 

by meditator 2019. 11. 4. 03:56

취업 준비생 70만 시대다. 그중 31%가 공채를 준비하는 '공시생'이다. 그런데 웬걸 정작 그들이 두드리는 문이 사라져간다. 전체적으로 하반기 정기 공채가 11.2%나 줄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기업 공채가 폐지되거나 축소되고 있는 중이다. 2019년 하반기 신입 공채 중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45.6%, 하지만 20%는 미정이거나, 34%는 아예 신입사원 모집이 없다고 한다. 

 

 

공채 폐지를 선언한 현대 자동차, 최신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을 신속하게 확보하여 적재적소에 배치, 시장 변화에 빨리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더는 공채로 뽑은 인력으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춰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대 자동차의 결정에 '반대'를 표명한 사람들이 50%나 된다. 무엇보다 그간 공시를 꾸준하게 준비해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결정이다.  정해지지 않은 기준으로 신입 사원을 뽑는 '수시 채용' 자체가 불분명하며 시험의 안정성과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가장 컸다. 각자가 가진 문화 자본에 의해 차별받을 수 있다는 우려, 무엇보다 기업이 요구하는 트렌드에 맞는 경력은 또 어디서 어떻게 쌓아야 하느냐는 하소연이 나온다.

그러다 보니 공채에 취준생들은 더욱 공채에 몰릴 수 밖에 없다. 지난 9월 실시된 EBS공채 시험, PD 2명, 방송 기술직 2명, 기자 6명, 경력직 6명을 뽑는 시험에 2000명이 몰렸다. 평균 150대 1, 하지만 들여다 보면 신입직은 더 높고, 그중에서도 PD 부문은 무려 1000 명이 몰려 500대1이 되었다.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 나와 같은 꿈을 가진 또래 500명을 제쳐야 하는 현실, 2019년 상반기 구직자 1인당 평균 입사 지원 횟수 13회, 서류 합격 그 중 2회, 최종까지는 합격률 26%, '공채가 복권 당첨보다 어렵다'는 우스개 소리가 등장한다. 

공채가 뭐길래
<당선, 합격, 계급>의 장강명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문학 공모전이 한국 사회 채용 제도의 또 다른 버전이라 정의내리고 있다. 동일한 시험을 통해 적합한 사람을 뽑을 수 있다는 전제로 한 한국 사회 특유의 제도인  '공채'는 실제 전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만 실시되고 있는 신입 사원 채용 과정이다. 

1957년 삼성 물산에서 시작된 공채, 당시 27명 모집에 1200명이 지원 공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50년대 이후 빠른 성장을 이룬 우리나라 기업 환경에서 많은 사원이 필요했고 공채는 제 2의 수능, 취업 과거제로 우리 사회의 '계급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 

장강명 작가는 이런 공채를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든 벌판에 있는 대기업, 공기업, 전문직이라는 몇 채의 성으로 비유한다. 그나마 그 성에 들어가야 좀 살기가 났기에 1년에 한번 성문을 열 때 너도 나도 그 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가겠다고 아우성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러기에 구직자 입장에서 '공채의 종말'은 '사다리 걷어차기'라 여겨질 것이라는 것이다. 

공채의 종말, 그 시작은 IMF이다. IMF이후 노사정 3자가 구제 금융 한파와 급박한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고용 조정(정리 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의 법제화를 합의함으로써,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소수의 좋은 일자리와 다수의 질이 좋지 않은 비정규직 중심의 일자리라는 '이중 구조'가 구조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보장된 일자리를 향해 매진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제 2년차에 들어선 이인선 씨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른바 노량지 공시생인 그녀는 아침 6시에 눈을 떠서 밤 12시까지 공부, 공부, 또 공부로 이어진 일상, 끝이 없다는 절망감, 상실감에 헤매지만, 그 길의 끝에서 청춘을 다바친 보상이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 또한 놓지 않고 공채 성공의 그날을 기대해 본다. 

지방이라고 다를까,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취준을 하고 이쓴 세연 씨는 매일 자소서와 이력서를 넣으며 보낸다. 1년 6개월 지금까지 넣은 이력서만 100개가 넘는다. 면접도 15번이나 봤다. 그런데도 이제 그녀는 혹시나 도움이 될까 다시 기사 자격증 시험을 본다. 공채에 합격하기 위해 또 다른 시험을 봐야 하는 현실. 

인선 씨나 세연 씨에게 공채의 문이 좁아지는 현실은 쉽게 받아들여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 '직무 전문성'을 키워야 하는 건지, 좁지만 그래도 공정하고 가능한 통로가 생각되는 공채, 하지만 그 조차도 이젠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서 적절한 인재를 얻는 방법이 아니라고 '수시 채용'을 도모하는 기업, 안정적 구직과 변화하는 트렌드의 딜레마가 바로 2019년 청년들이 맞이하는 현실이다. 

 

 

변화하는 세상
청년 1144명에게 수시 채용에 대해 물었다. 찬성 측 36%는 일정에 구애받지 않는 걸 28%는 연중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17%는 채용 전형이 짧아 빠르게 취업할 수 있다는 걸 장점으로 꼽았다. 반면, 41%의 반대 의견은 무엇보다 수시 채용이 되면서 채용 규모가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29%는 일정 파악과 대비의 어려움을 들었다. 22%는 수시 채용이 된다면 수요가 있는 직무만 뽑히게 될 것이라 했다. 

이시한 교수는 일찌기 이런 상황을 예측, 공채가 아니더라도 취업의 문을 여는 열쇠에 대해 강의를 해왔다. 이 교수는 말한다. 대다수의 취준생들이 대기업에 몰리는 이유 중 하나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가 명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 반해 중소 기업의 경우에는 어떤 기업인지조차 잘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 

결국 수시 채용으로 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더 높은 차원의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발빠르게 기업 정보와 구직자 정보를 공유하는 비지니스 네트워킹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있다. 10년 뒤에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자신이 하던 업무가 없어질 수도 있는 변화의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 자신의 회사를 넘어 '인맥'의 네트워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취업에도 등장한 '수시'는 흡사,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타다'와 기존 택시 업계의 갈등과도 같다. 4차 산업 혁명과 함께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인력 조달'에 변화를 꾀하려는 산업, 그럼에도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 위해 전통적인 '시험'을 통해 정규직의 좁은 문을 향해 몰려드는 취준생들, '업무 능력 중심'의 사회로 변화해 가는 길목에서 '공시'는 점점 문이 좁아지고, 그 좁은 문을 향해 여전히 달려가는 취준생들의 뜀박질은 버겁다. 

 

 

업무 능력 중심의 사회로의 변화 
그렇다면 방법은 없을까? 이제는 가격 비교 플랫폼 커뮤니티 대리가 된 8년차 직장인 송기훈 씨의 방식은 어떨까? 그도 한때는 남들 다하는 언론사 공채를 준비했었다. 서류 전형조차도 쉽지 않자 스스로 현장을 찾아다니며 찍은 보도 사진 포트폴리오로 길을 뚫었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에서 매번 좌절, 사진 기자인데도 일반 신문 기자와 똑같은 방식을 통해 뽑는 언론 고시에 반발도 생겼다. 

그래서 한 회사의 사보를 시작으로 이직에 이직을 거듭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갔다. 콘텐츠 회사를 거쳐 지금 회사에서 이제 대리까지 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취준생들과 나눈다. 그가 정의한 '공채'는 제일 먼저 눈에 띈 통로이다. 하지만 그저 먼저 눈에 띄었을 뿐 가까이 가보니 들어가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신 옆에 있는 작은 통로를 통해 앞으로 전진하는 중이다. 그는 충고한다. '공채'를 준비한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 말고 진정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을까 '도모'할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하라고. 

 

 

아예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은 이혜인 씨도 있다.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 팀장, 하지만 겨우 입사 4개월차이다. 하지만 '직무 능력'에 맞춰 이곳에 들어온 그녀이기에 업무 순환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학을 나와 자신이 원하던 일을 하다보니 콘텐츠 기획 마케팅의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 혜인 씨에게 공채는 다른 세상이야기이다. 그녀 역시 회사보다 '직무'가 먼저다. 

다큐는 여전히 고단한 '공채'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수시 채용을 모색하는 변화하는 산업 환경을 짚는다. 그렇게 이미 와있는 새로운 세상에서 '공채'에 발이 묶이는 대신 다른 길의 모색을 고려해 보려 조심스레 조언한다. 

by meditator 2019. 11. 1. 20:12

광장이 홍해 바다처럼 갈라졌다. 뜨겁던 촛불의 열기로 타오르던 광장이 불과 몇 년 만에 서로 다른 목소리로 나뉜다. 입장의 차이라고 한다. 진보와 수구의 문제라고도 한다. 혹은 시대적 과제와 집권층의 부도덕의 문제라고도 한다. 그리고 세대와 세대의 갈증이라고도 한다. 모두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도무지 틀리지 않은 주장들이 서로 '합의'에 이를 길은 요원해 보인다.

이렇게 갈라진 세상에 1000회를 맞이한 <다큐 프라임>은 무려 6부작의 대장정을 통해 '진정성'을 이야기한다. 누가 더 '진정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진정성'의 시대가 변한 게 아니냐고. 

 

 

정의의 시대, 1980년대
 6부 <진정성이란 무엇인가>의 시작은 이제는 대통령상까지 받은 소목장이 된 586세대 양석주씨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석주씨, 1980년 휴교령이 떨어지자 6.25를 겪은 아버지는 아들을 산속 텐트로 보내고 한 발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휴교령이 풀리고 돌아간 학교,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을 기다리며 그의 마음 속 죄책감은 커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1983년 대학에 입학한 그를 자연스레 시위로 이끌었다. 

그렇게 586들이 자신을 내던졌던 1980년으로 부터 물꼬를 튼다. '학우여'의 '학'자만 외쳐도 교내 곳곳에 포진되어 있던 사복 경찰이 와서 잡아가던 시대, 그래서 학생들은 자신을 도서관 난간에 매달았다. 그 난간에서 '황정하' 열사가 세상을 떠났다. '산자여 따르라'며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자신이 몸에 불을 붙였고 이한열, 박종철 등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그런 동료 학생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박혜정 열사는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가 없어 부끄럽게 죽을 것'이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의 목숨을 거두었다. 

80년대를 살았던 학생들은 눈 앞에서 목도한 사회적 폭력 앞에 자신을 내던졌다. 폭력적 공권력은 저항의 극한적 수단으로 내가 어떻게 죽어서 살겠는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저항과 죽음으로 쌓아올린 정의의 시대였다. 1987년 거리로 나온 넥타이 부대는 이들 '선봉'에 섰던 청년 학우들의 외쳤던 주장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결과물을 얻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90년대 '후일담' 문학 등을 통해 '정의'에의 헌신은 그 시대의 '진정성'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달라진 시대, 삶의 가치가 변하다 
그러나, 시대는 멈추지 않았다. 1997년 우리 사회를 강타한 IMF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적 경험을 불러왔다. 불황, 대규모 구조 조정, 실업을 겪으며 80년대의 사회적 정의는 물질 체제에 기반을 둔 생존주의에 압도당한다. '서바이벌 생존 체제'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던 사람들은 20세기를 살아왔던 고통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통의 바다를 헤엄쳐가야만 했다. 

총학생회장이나 각종 단체의 대표적 위치에 있던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정치에 입문하며 우리 사회 정치의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매김되는 동안, 현장을 지키며  486, 586이 되어가던 사람들은 실존적 고민을 겪어 내야만 했다. 운동권 특채로 대기업에 들어갔던 양석중 씨 역시 이때 퇴직을 했다. 생계를 위해 일용직 노동을 전전했다. 그러다 만나게 된 '나무',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비로소 자신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 보게 되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가며 사는 삶, 뒤늦었다 싶었지만 비로소 자신의 방향을 찾은 듯했다.  

하지만 모두가 방향을 찾은 건 아니었다. 4부 <나는 잘 살아왔는가>의 윤남진 씨, 학생운동을 하고 이후 20여년간 시민 단체에서 일을 해왔다. 하나 뿐인 딸 윤서는 기특하게 사회 운동으로 바쁜 아빠가 제대로 돌봐주지도 않았는데 어느덧 대안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술에 취해 감옥 갔던 얘기며 지금까지의 상처를 부여안고 힘들어 하는 아빠를 보다 못한 윤서는 아빠가 가고 싶어하던 티벳 불교의 성지를 향한 길에 함께 오른다. 

몇 년 전 위 절제 수술을 받고 낙향한 윤남진 씨, 가정에 소홀했던 아빠는 막상 해발 6000 가 넘는 고갯길을 넘으면서도 딸과의 서먹함이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아빠는 뭐라고 말을 붙여 보려하지만 정작 딸은 그런 아빠를 더 어색해 한다. 딸뿐만이 아니다. 이곳 티벳에서는 길잡이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지만 그는 정작 고국에서 길을 잃었다.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정의'의 마음으로 시작했던 시민 단체 일, 이루고자 하는 일은 여전히 요원하고, 벗은 갈라지고 흩어졌다. 

오롯이 자신의 내면을 비춘다는 가파른 티벳의 고갯마루를 넘으며 겨우 23살, 30년전 영문도 모르게 학생운동의 총책으로 잡혀가 혹독한 취조를 받으며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결국은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던 이제는 가끔 되묻곤 하는 그 시간을 다시 꺼내본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나의 삶이 순탄했을까. 참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 것도 이룬게 없다는 남진 씨, 주변에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혼자라는 윤서의 아빠, 마음이 단단해지려면 겪어내야 한다는 고통의 산마루를 넘어서 남진씨를 안아준 건 유일한 혈육 윤서다. 

 

 

과정 중심의 진정성 
우리 사회에서 진정성이 언급되기 시작한 건 뜻밖에도 예능에서 부터 이다. '리얼'과 '날 것'의 탐하며 '진성성'을 추구하던 문화로 부터 '목표'만큼 '수단'과 '과정'이 중요하다는 방점이 찍혀진다. 제 아무리 미션을 먼저 달성했어도 '꼼수'를 쓴 출연자는 탈락되는 예능의 룰이 어느덧 사회로 확산되어갔고, 개인에 대한 도덕적 잣대도 점점 더 엄격해져만 갔다. 

미시간대 교수 로널드 잉글하트는 그의 책 <조용한 혁명>에서 이러한 변화를 '가치관의 변화'라는 흐름 속에서 정의내린다. 탈권위주의적이고, 문화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하게 되는 오늘날  환경 보호, 평등, 관용, 공존, 성적 소수주의 등 다양한 가치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진정성이란 무엇인가란 화두를 두고 수도권 남녀 700명의 사회 인식을 조사했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처럼, 사회 공헌 기업의 제품을 구입하려 하는가 , 대의를 위한 일에 동찬하는가 등의 사회 인식 조사를 통해 드러난 최상위 4.3%와 최하위 3.017%의 차이는 현격했다. 하지만 상위 22%, 중위권 35%의 사람들이 사회적 책임과 이타주의, 공존 의식, 생태주의에 대한 공감을 표시했다. 공유하고 나누고,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목표중심적인 정치 지향의 진정성도, 먹고사니즘도 극복해낸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이 도개하고 있음을 이 조사는 보여주고 있다. 

 

 

물론 생태적인 삶의 길이 쉽지만은 않다. 3부 <가고 또 가다보면>은 21세기의 라이프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긴 전직 회계사 김정연 씨의 사례를 다룬다. 31살의 정연씨는 지난 해 전남 영광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씨가 운영하는 <바우 다른 세상 연구소.에 들어갔다. 인생의 한 시기 불행하지 않고 재밌게 살아내기 위해 '생태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택했다. 

콩 3알을 넣고 100번을 돌려야 하는 맷돌처럼 느리게 가는 삶, 햇살보다 밝은 웃음으로 정연씨의 대안적 삶의 공동체의 장점을 소리높여 전한다. 그리고 도심 속 네트워크가 공허했던 강동하가 '해야'가 돼서, 상자에서 상자로 옮겨지는 도시의 삶을 견딜 수 없었던 김도희가 '자야'가 되어 공동체의 동료가 되었다. 척박한 산속 만 오천 그루의 가시오가피 나무로 보살피고, 직접 만든 캠핑카로 도시의 전통 시장에 커리를 팔러 나가던 그녀, 하지만 일년이 지난 후 정연 씨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정연씨 만이 아니다. 

그저 꾸준히 하고자 했지만 사소한 생각의 차이가 갈등을 쌓이게 만들어 결국 공동체를 허물었다. 처음이 아니다. 2013년 대안적 삶을 위해 황대권씨가 만들었던 이전의 공동체도 인건비도 안되는 수입을 가지고서는 살아낼 수 없어 사라져갔다. 생태주의적 삶의 현실은 그때도 지금도 가혹하다. 

의식은 변화하고 있지만 그 의식을 담보해낸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 대혼란은 또 변화하는 시대를 향한 거대한 용트림일지도.  수척해진 얼굴로 하지만 정연 씨는 다시 길을 떠난다. 남진 씨도 티벳의 설산을 고통스럽게 완주하며 살아낼 용기를 얻었다.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넓은 원을 그리며, 라이나 마리아 릴케 

by meditator 2019. 10. 10. 16:03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집안의 가장이 자신의 부인 외에 또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리는 일이 있었다. 바람직한 건 아니었지만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묵인된 '관습' 중 하나였다. 하지만 2019년에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이렇게 한 시대에 별로 문제되지 않았던 것들이 다음 시대로 오면 매우 지탄받을 만한 대상이 되곤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몸살'처럼 겪고 있는 문제도 어떻게 보면 바로 이 '변화된 시대'의 담론으로 부터 시작된 것일 지도 모른다. 바로 이 '변화된 시대의 담론'과 관련하여 ebs 다큐 프라임은 <진정성 시대> 6부작을 마련했다. 9월 23일부터 시작하여 10월 2일까지 무려 6부작에 걸친 대장정이다. 

 

 

'진정성', 그 시작은 진심어린 사과로부터 
진정성의 시작을 연 건 뜻밖에도 '사과'이다. 왜 '사과'일까?  지난 2003년 미국의 대표적 언론인 뉴욕 타임즈는 자신의 신문에 실린 조작 기사에 대한 사과문을 실었다. '잘못이 일어났을 때 바로 잡아라'라는 모토에 따라 독자에게 사과를 한 뉴욕 타임즈는 덕분에 '정론지'로서의 명성과 전통이라는 '진정성'을 더 강화시켜나갈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단 한 건의 왜곡된 기사 하나만으로도 뉴욕 타임즈의 전통은 무너질 수 있었다. 바로 여기서 '진정성'으로 통하는 '사과'의 중요성이 등장한다. 그런데 왜 지금 '사과'일까? 

텍사스대에서 'The science of saying sorry'를 연구하는 티머시 쿰스는 1994년에서 부터 2018년까지의 기간을 대상으로 '리서치'를 한 결과 꾸준히 사회적으로 '사과'의 중요성이 증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소셜 미디어의 증가와 함께 대중들 사이에서 각종 사안에 대한 의견들이 빠르게 전파되고 개진되며, 그런 대중들이 제시하는 요구와 요청에 대해 리더들이 대답을 해야 했고, 이는 곧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할 일이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성 있는 사과란 어떤 것일까? 각 나라마다 '사과'를 말하는 언어가 있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영어를 예를 들자면, 'I am sorry'와 'Apologize', 가 주는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다. 흔히 친근한 사이에서 쓰는 말로 알려진 'I am sorry', 그 의미에는 일어난 일을 안타깝게는 여기지는 거기엔 '책임 의식'이 없다. 반면 'apologize'는 더 잘할 수 있었고 더 잘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내가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바라는 '진정성'은 바로 이 '책임'에서 온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정성있는 사과를 잘 하지 못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오해하게 했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외려 반발을 샀고,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역시 '사과' 대신 '잘못된 판단'이었다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쫓겨났다. 

왜 이들은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원인 중 하나는 지나친 자기애에서 비롯된다. 내가 더 현명하고 똑똑하다는 헛된 자존심이 왜 사과를 해야하냐는 왜곡된 결과를 초래한다. 그 반대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자기애의 부족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과'를 끝까지 피하려 만들기도 한다. 

'사과'는 인간만이 가진 갈등 조정의 수단이다. 그리고 이는 개인을 넘어 국가와 국가 간의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해결 방식이 되기도 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희생자 박물관을 만들고 과거사를 가르치는 등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실천'적 모습을 보여줬다. 거기에 더해 당시 수상이었던 빌리 브란트는 무릎을 끓고 진정한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전범 국가'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졌다. 반면 그 반대의 지점에 일본이 있다.

 

 

일본은 여전히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정치인들이 참배하는가 하면,  '통석의 념' 등 애매한 외교적 수사로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려 애쓴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건, 바로 '피해자'이다. 피해자가 메시지의 중심에 놓여있는 진정성있는 행동을 하는가가 '관건'인 것이다. 여전히 '일본'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가 들끓게 되는 건 바로 그 '피해자'인 우리에게 '일본의 사과'가 '진정성있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과가 진정성있기 위해서는 사과의 수사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는 말에 덧붙여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재발 방지의 구체적인 대안과 자신이 피해를 입은 상대방에 대해 책임을 지는 '보상'의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 말뿐인 사과, 후회는 사과를 받는 상대방의 '냉소'와 반발을 부른다. 

진정성을 파는 사회
이렇게 소셜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진정성'이 더욱 중요시되는 것과 달리 , 서로 얼굴을 맞대는 일이 점점 더 드물어 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신뢰'는 더욱 쉽지 않은 일이 되어만 간다. 그러기에 물건을 파는 기업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 갈증을 느끼는 '진정성'을 마케팅의 '포인트'로 삼는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파자노, 그곳에 오래된 푸줏간 식당이 있다. 외진 곳에 있는 식당이라 얕보면 안된다. 전세계에서 이곳 식당의 고기를 맛보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든다. 8대째 250년, 이제 64세가 된 다리우 체케니 씨가 운영한 지만 44년된 이 식당의 메뉴는 특별할 것이 없다. 그저 소금을 뿌려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 고기가 다다. 그런데 그 고기가 피레네 산맥에서 방목한 소들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찌기 '희생된 동물에게 감사하라'는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동물이 행복한 삶을 살았느냐 화두 아래 최고의 재료로 만들어진 '진정성 있는 음식'이 바로 50유로나 되는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이 식당의 유일한 메뉴다. 

이렇게 21세기는 환경 오염이 심해질 수록, 음식을 먹는 자와 만드는 자의 거리가 멀어질 수록, '자연', '천연, 등의 '진정성'을 화두로 내세운 '마케팅'이 범람한다. <진정성의 힘>을 쓴 조셉 파인 교수는 바로 이런 '인공'에 대비되는 '자연스러운 진정성'이 바로 이 시대 진정성의 첫 번째 근원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진정성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발품을 판다. 경기도 여주의 한 목장, 지난 2006년 소비자와 밀착되는 체험 공간으로 목장을 연 조옥향 씨의 목장에 주말마다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대리 만족'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몰린다. 

거기에 가격까지 착하면 금상첨화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DIY가구의 대명사가 된 스웨덴의 가구 회사는 '합리적 가격'을 마케팅의 포인트로 하여 소비자가 직접 만드는 '플랙팩 시스템'으로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 스스로 부엌용 식탁을 영업용 책상으로 알뜰하게 살아왔던 잉바르 캄프라드 회장의 '가격은 진정하다'는 모토를 위해 오늘도 이 회사는 '합리적'인 소비를 위한 연구를 거듭한다. 

 

 

또한 '진정성'은 '시간'의 마력에 기댄다. 아직도 전통 방식이 오크통을 고집하고 처음 사용했던 샘물로 '단일적 영감'을 광고하는 스코틀랜드의 싱글 몰트 위스키라던가, 나폴레옹이 다녀가고, 헤밍웨이가 찾던 그 시절의 모습을 유지하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가장 오래된 까페의 '보수성'은 '진정성'의 또 다른 원천이 된다. 아니 라스베이거스에 재연된 베니스처럼 '오리지널리티'를 흉내라도 내야 한다. 

이렇게 '인스턴트'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진정성'을 갈구한다. '진정성'이 있는 물건을 소비하고, 자신들의 요구와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리더를 원한다. 그리고 그 '요구'에 맞추지 못했을 때 진솔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지도자를 기대한다. 멸종한 '진정성'에  대한 '노스텔지어'처럼 

by meditator 2019. 10. 3. 01:15

시대를 말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최근 '다큐'들의 화법이 달라졌다. 이전 정부에서  집중했던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비판적' 다큐들이 한결 줄어든 대신에,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는 '세대 갈등'의 요인 중 하나인 젊은 세대의 고민과 고충에 대한 '해법'과 '대안'에 대한 꾸준한 모색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mbc스페셜의 '요즘 것들' 시리즈, 그리고 sbs스페셜의 <체인져스-나도 돈벌고 싶다>, <297대1의 꿈, 그후 10년>, <간헐적 가족> 등이 그런 일련의 흐름 속에 있는 다큐이다. 그리고 9월 29일 방영된 <취미가 직업이 된 사람들  하비 프러너> 역시 동시대 젊은 층의 새로운 직업적 모색을 다룬다. 

 

 

진지한 여가 
한강 시민공원에서 열린 아마츄어 서핑대회, 이곳에 백예림씨도 참가했다. 하지만 이미 서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춤을 추며 웨이크 서핑을 하는 영상을 통해 예림씨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요즘 빠져있는 건 '서핑복'이다. 

셰프, 승무원, 공무원....지금까지 그녀가 도전했던 직업들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사로잡은 건 서핑, 그런데 서핑을 하다보니 갈아입기조차 불편한 서핑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저걸 좀 편하게 만들 수 없을까? 기왕이면 멋지고 이쁘게,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서핑복 쇼핑몰의 사장님이 되었다. 직접 맘에 드는 서핑복을 만들고, 스스로 모델이 되어 홍보하고, 판매까지 하는 예림씨, 이제 막 시작한 사업의 자금 마련을 위해 그녀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슬금슬금 중고 사이트로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비록 집은 점점 비어가지만 서핑복을 향한 그녀의 열정은 그와 반비례하여 불붙고 있는 중이다. 

이제 이십대 초반인 김슬기씨는 자신의 공방에서 독특하고도 이쁜 케익의 마무리가 한참이다. 마무리된 케잌은 주인을 찾아 배달이 되는데, 오늘 김슬기 씨가 만든 케잌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개'님이시다. 

바로 개들을 위한 독특하고도 예쁜 디저트를 만드는 일이 김슬기씨의 사업이다.  아버지와 둘이 사는 슬기씨, 그 허전한 가족의 공간을 위해 슬곰, 달곰 두 마리의 강아지들이 채웠다. 그러다 자신이 즐겨먹는 간식들을 애완 동물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 공부, 사람들이 먹는 초콜릿을 못먹는 강아지들을 위해 케롭 파우더를 사용하는 등 동물들만을 위한 마카롱, 초코파이, 초코 송이, 케잌이 탄생했다. 

나날이 번창하는 그녀의 사업을 돕기 위해 이삿짐 나르던 일을 하던 아버지가 배달에 나섰다. 이제는 자신의 애완 동물을 위해 간식을 만들고픈 사람들을 위한 수업도 하게 되었고, 제자들도 생겼다. 언젠가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로 강단에 서는 야무진 꿈을 키워가는 슬기씨, 그녀의 꿈을 이룰 날이 멀지 않을 듯하다. 

현재 캘거리 대학의 석좌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로버트 스테빈슨 교수는 '진지한 여가' 이론을 주장한다. '특수한 기술, 지식, 경험 등을 획득하고 표출하는 충분히 본질적이고 재미있고, 참여자가 경력을 쌓아가는 성취감있는 아마츄어, 취미 활동가, 자원봉사자의 체계적인 핵심활동'이라고 자신의 책 <진지한 여가>를 통해 정의한 이론이다. 크로스 컨트리, 산악 트레킹, 재즈 연주를 즐기는 스테빈슨 교수는 바나나 칵테일의 주재료는 '바나나'이지만, 거기에 '버터, 계피. 아이스크림' 등의 다양한 부재료가 들어감으로써 '풍미'를 더하듯, 진지한 여가 활동은 삶의 질을 더욱 고양시킬 것이라 주장한다. 

다큐는 이 '진지한 여가' 이론을 제시한다. 여기서 여가는 tv시청이나 낮잠 등과 같은 일상적 여가와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재현하는 과정으로서의 '여가'인 것이다. 

 

 

하비 프러너, 아직은 도전 중 
2009년 한 방송을 통해 '화장품 좋아하는 남자'로 소개되었던 김한균씨는 이제 어엿한 화장품 제조업체 사장님이 되었다. 비비 크림 등 당시만 해도 남자들에게는 낯설었던 화장품에 매료되었던 한균씨, 자신이 좋아하는 화장품을 사업으로 '런칭'했던 그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남성 화장품 사업에서 고배를 마셨다. 

남자라면 다 비비 크림을 좋아할 줄 알았던 그 초기의 사업 아이템은 아이를 낳고 아토피에 시달리는 아이를 위한 보습 화장품으로 아이템을 변화시키며 중국 시장에서 잘 나가는 '왕홍'이 되었다. 여기서 왕홍은 현재 중국 경제를 달구는 '현실이나 인터넷 생활에서 다양한 콘텐츠로 네티즌의 관심을 끌어 인기를 얻은  사람들'을 뜻하는 최신 경제 크리에이터로,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잘 하는 일이 된 일군의 사람들을 뜻한다. 

비행기 승무원이던 주이형씨는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다 허리를 다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다친 허리를 치료하기 위해 시작한 피트니스, 이제 그녀는 동양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2015년 머슬마니아 유니버스 대회에서 최고의 영예인 '프로카드'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좋아하는 일이 돈버는 수단이 되니 그만큼의 압박감이 커져가고, 그 돌파구를 그녀는 다시 머슬 마니아를 접목시킨 디제잉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운동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두려움을 '음악'을 통해 해소했던 경험을 새로운 일의 영역으로 개척해 운동 디제잉의 새로운 도전을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안정은 씨 역시 마찬가지다. 취업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했던 달리기가 이제 그녀를 달리기 전도사로 만들었다. 몽골 고비 사막 등 달리기를 하며 딴 80~90개의 메달은 달렸던 장소, 함께 뛴 사람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일기장과 같은 기록이 되었고, <나는 오늘 모르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라는 책의 결과물을 낳았다. 서울에서 달리기 좋은 코스 100개를 만드는 등 저자, 기획가, 강연자 등 이제 정은씨는 '직업 부자'가 되었다. 

 

 

이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니 잘 하게 되었고, 그게 그들의 직업이 된 사람들을 '하비 프러너'라 칭한다. 하비 프러너의 등장에는 무엇보다 더 이상 '인간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게 된 '산업 구조'의 변화가 기반이 된다. '인간 노동의 고용'을 넘어 '기계', '인공 지능' 등이 그 영역을 대변하게 되며 '노동 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든 사회, 거기에 우리 사회에서도 보여지듯이 수명의 증가로 인해 노후의 삶이 '노동'에 종사하는 만큼 늘어난 사회는 '여가'의 의미가 질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거기에 산업 고용 형태의 변화가 수반된다. 김한균씨가 중국의 왕홍이 되었듯이, 인터넷 등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직업군이 등장하는 산업의 새로운 조류 역시 '하비 프러너'의 등장을 촉진한다. 거기에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보여지듯이 젊은 층의 '취업 불황' 역시 새로운 직업군의 모색을 재촉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오프로드 달리기 기획자로 일하고 있느 이윤주 씨의 하소연처럼, 취미가 일이 되는 하비 프러너가 원하는 만큼의 수입을 벌어들이느냐라는 딜레마가 있다. 좋아서 시작한 서핑복 사업이지만 집의 값나가는 물건들을 팔아야만 그 일을 계속 지속시킬 수 있는 예림씨처럼, 아직 우리 사회에서 '취미'가 곧 돈 벌이가 되며 수입도 보장할 수 있는 영역은 '실험' 단계에 있다. 더구나 최근 우리 사회를 덮치고 있는 '장기적 불황'의 기운은 '취미'를 직업에 도전할 수 있는 삶의 여유마저 잠식시킬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이다. 

by meditator 2019. 9. 30. 1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