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의 제 1조 1항이다.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래서 헌법은 이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라고 밝힌다. 특히나 '혁명'에 비례할 만한 변화를 낳은 4.13 총선을 통해 '투표'를 통한 국민의 주권 행사는 더더욱 피부에 와닿는다. 바로 이런 시점, ebs는 야심차게 <민주주의> 5부작을 선보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잘 몰랐던 민주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규정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시대, 민주주의의 방향을 짚어보고자 한다. 




1부 시민의 권력 의지
경제가 정치를 규정하는 21세기, 다시 민주주의를 복기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데이비드 이스턴의 신선한 정의로 부터 시작된다. 즉 우리가 익히 알고 배워왔던 '민주주의'와 관련된 제 개념이 새롭게 해석 시도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민주주의 기원이 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병사로서 그 중요성을 부여받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힘을 배경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이 된다. 또한 애초에 재산에 따라 제한이 주어졌던 선거권이 성장하는 노동자 계층을 배경으로 '좋은 외투, 좋은 모자를 쓰고 온 가족이 번듯한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권리'로써의 '보통 선거권'이 재조명된다.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듯 삶과 분리된 슬로건인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자원 배분'과 관련된 국민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고 민주주의의 역사는 증명한다. 즉 똑같이 가뭄과 기근에 시달린 아프리카의 두 국가 에티오피아와 보츠와나의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가에 따라, 자원의 평등한 배분을 하는가에 따라 100만영이 굶어 죽느냐 마느냐로 귀결된다고 다큐는 설득한다. 

2부 민주주의의 엔진, 갈등
정치에 대해 회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맨날 지들끼지 치고 박고 싸움박질 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바로 이 '치고 박고 싸움박질 하는' 갈등, 이를 <민주주의> 2부에선 오히려 '민주주의의 엔진'이라 정의내리며 편견의 재해석하고자 한다. 

즉 민주주의란 지들끼리 싸움박질 하는 것이 아니라, 교실에서 학생들끼리 치고받는 식의 사적 갈등을 정부나 정치 지도자라는 공적 주체를 통해 공적으로 해결하는 갈등의 사회화 과정이라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정부는 갈등을 억압하지만, 민주주의적 질서는 갈등을 인정하고 드러내어 해결하려 애쓰며, 그 분화구가 되는 것이 바로 '선거'라고 다큐는 규정한다. 

그래서 정당은 수많은 갈등 중 대표적인 갈등을 묶거나, 기존의 갈등을 새로운 정치 쟁점으로 변화시켜 갈등을 조직하여 투표를 통해 그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1980년대 레이건은 뉴딜 정책의 상징적 장소인 미시시피 카운티에서 공식 선거 운동을 시작하며 '인종주의'와 기독교 원리 주의'를 활용하여 '퍼주기식 복지'에 반대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첫 발을 내딛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민주 vs. 반민주로 대립각을 이루었던 정치적 쟁점은 민주주의를 원치않는 집단이 의도적으로 프레이밍한 호남 vs. 비호남의 정치 갈등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호남 vs. 비호남의 갈등 구조에서도 보여지듯 오늘날 선거는 '계급 배반 투표'라는 새로운 양상에 도전을 받는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계급 이해와 다른 투표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 조사 결과 미국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 지지층을 살펴보니 계급 배반 투표는 없었다. 심지어 고소득층의 공화당 지지는 확고하여, 계급 이해에 더 충실했음이 드러났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드러나는 세대별 성향 차이는 세대 별 시대 경험과 맞물리며, 특히 신자유시대의 파고를 고스란히 겪어낸 유권자의 목소리가 세대 갈등으로 나타날 뿐 결국 1920년대 좌우 대결 이후 계층간의 분열은 여전히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정치적 갈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다큐는 증명해 낸다. 



3부 민주주의가 우선한다. 
헌법 119조 2항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 경제 및 안정과 적절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며, 시장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 를 위하여 경제 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누가 이 조항을 넣었는가를 둘러싸고 논란을 빚은 헌법의 이 조항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개정된 헌법의 내용이다. 하지만, 헌법의 조항과 달리, 현재 전 세계는 불평등이라는 세계적 현상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금전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된 옥스퍼드 법대생, 이는 영국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 명문대 재학생 중 상위층이 74%인 반면, 최하위층은 3%에 불과하다. 한국 역시 2009년 기준 역시 명문대 재학 생 중 하위층은 14%인 반면, 최상위층은 64%나 된다. 전 세계적으로 상위 1%의 부가 하위 99%의 부를 넘어서는 시대다. 교육 불평등은 다시 소득 불평등을 낳고 이는 정치, 사회적 문제와 적대감을 야기하며 민주 사회의 위협 요소가 된다. 

불평등의 세계적 현상을 토마 피케티는 자본 수익율을 통해 분석해 낸다. 즉 경제 성장률이 1700년대의 0.1%에서 2013년 3%로 성장하는 동안, 자본 수익율은 항상 4~5%를 넘나들었다. 즉 자본 수익율이 경제 성장률을 앞지르는 비율만큼 부는 편중된다는 것이다.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로 자본주의는 정착되게 되었다. 평균 4%의 성장을 보였던 1940년대에서 8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 전쟁을 경험한 인류는 경제적 불평등 앞에 정부라는 조직화된 권력에 힘을 부여하며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의 집권으로 시작된 신자유즈의 정부는 통제하지 않는 정부라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전세계적 불평등의 심화를 낳았다. 자본에 전적으로 특권을 부여하는, 민주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해방하려는 2차 자본주의 혁명의 시도는 결국 고삐풀린 자본과 정체된 경제 성장과 복지의 파괴로 실패했다. 결국, 그래서 다시 '민주주의'인 것이다. 

4부 기업과 민주주의 
그렇다면 오늘날 불평등의 주범이 된 자본주의, 그리고 그 주체인 기업, 그 존재는 민주주의에서 어떤 위상을 가질까? 2011년 미 대선에서 밋 롬니 후보가 내세운 슬로건 '기업이 곧 사람이다'는 기업의 위상과 관련된 논쟁을 낳았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토지와 노동의 주인이 되는 자영농 중심의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실제 당시 미국 시민의 60%가 자영업자여서 제퍼슨의 이상은 현실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사회는 변화되었다. 60%이던 자영업자는 12%로 줄었고, 대신 당시 임금 노예에 해당하는 노동자가 54%로 늘어난 것이다. 즉 기업에 소속된 노동자가 다수가 된 현대, 시민이 자본의 통제를 받는 사회, 과연 기업에게 사람처럼 '자유를 부여해야 할 것인가가 오늘날의 과제가 된다.

더구나 2010년 미 연방 대법원은 기업의 선거 자금 지원을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허용했지만 지난 30년간 최상위 계층 1%의 정치 자금이 15%에서 41%로 늘어나는 현실에서 과연 이런 자본의 막대한 돈을 지원받은 정부가 모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론이 지배적이다. 뿐만 아니라 기업의 존재 자체도 문제가 된다. 기업은 주주 자본주의라 하여 기업의 주식을 산 주주의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그 활동을 하는데, 실제 기업을 일구고 위기에 기업을 책임지는 직원의 이익에 배제하거나, 오히려 주주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복지와 고용에 반하는 방식으로 존재론적 이율 배반을 실현한다. 

즉 정치의 외부에서 정치 자금의 형태로 정치에 영향력을 끼치는가 하면, 정치의 단위인 시민을 고용을 통해 내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주는 기업에 대한 문제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가진 최대의 고민으로 귀결된다. 



5부 민주주의의 미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라는 막연한 경구로써의 민주주의를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춰 재해석 해냈던 5부작 민주주의, 결국 다큐는 오늘날 불평등을 낳은 압도적 자본의 힘에 맞서 국가와 시민의 힘을 재규정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과제가 귀착된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주의의 미래는 어떨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노엄 촘스키, 아마티아 센, 쉐보로브스키, 존 던, 토마스 프리그먼, 리처드 프리먼 등의 석학들의 고견을 인터뷰한다. 민주주의는 이제 쓸데없는 흔적 기관이라고도 평가되는 시대, 즉 무대 뒤편에서 기업과 부유층이 조정하는 시대 민주주의 무대는 현실감을 잃어가는데, 과연 여전히 민주주의는 유효할까? 소득의 재분재를 둘러싼 부의 재분배의 결정권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의 귀결점은? 뿐만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비민주적 권력으로 관료주의의 대두와 그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잠식, 그리고 선출된 권력 사이의 불평등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이 낳은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환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학들은 민주주의를 대체할 체제는 아직 없다고 입을 모은다. 유일하게 민주주의는 투표를 통해 정부를 해고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인 점을 강조한다. 인구의 증가와 함께 정치와 사람들의 연결 고리는 약화되고, 그래서 실제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는 설득력은 저하되며, 기업의 업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피해의 당사자인 더 많은 하층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그 결과 사유재산과 금융 시장을 정부가 규제하는 틀을 마련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선점해 버린 현재의 민주주의의 위기는 희망을 가진다고 당연하지만,  엄정한 결론이다. 결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다. 
by meditator 2016. 6. 5. 22:13

조선시대 도구 중에는 매화틀라는 것이 있다. 바로 임금님의 '똥'을 담아낸 기구이다. 이 기구에 담긴 똥은 바로 뒷간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의원들에게로 가져가 의원들이 똥의 모양과 냄새를 통해 임금님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대장 내시경의 조선시대 버전이랄까? 그러나 6월 첫 날 방영된 < ebs다큐 프라임-당신의 대변은 안녕하십니까>는 그런 '진단'의 수준을 넘어선다. 바로 현대 의학으로 치유할 수 없는 아토피, 알레르기에서부터 슈퍼 박테리아로 인한 크론병까지 치유의 방법을 '똥'으로부터 찾고, '똥;의 변화를 통해 고치고자 한다. '의원'이 된 '뒷간'이랄까?





불치의 현대병, 그 해법은 '똥"?
현대 의학으로 치료될 수 없는 불치병들 답게, 다큐에는 오랫동안 일상 생활을 못할 정도로 각종 병으로 고통 받아온 환자들이 등장한다.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대학 병원 30년째 슈퍼 박테리아 씨디피실리균으로 인한 크론 병으로 인한 설사와 복통으로 30여년 째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환자가 있다. 한국에는 역시나 크론병으로 학교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해 휴학을 하고만 16세 지원이가 있다. 각종 항생제와 약이 이들에게는 백약이 무효다. 
그런가하면 엄마들이라면 공감할 전신의 소아 아토피로 고생하는 소윤이가 있다. 온몸이 간지러워 단 몇 분도 잠을 못 자는 날도 있는 소윤이는 동시에 변비로 고생을 하고 있다. 과민성 대장 증상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려 사회 생활이 편치 않은 조진철씨가 있는가 하면 일주일이 되도 화장실에 가기 힘든 남유주씨도 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들의 '똥'을 검사해 봤다. 검사 결과, 이들의 똥에는 이른바 좋은 세균이 현저히 적거나, 나쁜 세균 천지였다. 



세균이 왜? 우리 몸 전체에는 100조의 미생물, 세균이 산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똥은 수분을 제외하고 나면 반 이상이 세균인 세균 덩어리이다. 한 마디로 똥은 세균에게는 아마존 밀림이다. 정상적인 인간의 몸이라면 500여 종의 세균이 똥에서 발견되어야 정상일 정도다. 

그런데 검사 결과 크론병을 앓고 있는 지원이는 좋은 세균은 없고 나쁜 균인 클로스트로늄이 장악을 했다. 아토피를 앓는 소윤이는 몸 속에 균이 거의 없다. 과민성 장 증후군 조민철씨나 남유주씨도 나쁜 균이 많다. 또한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대부분 장내 균의 생태계가 단조롭다는 것이다. 

그간 인류의 의학은 치유할 수 없는 병의 비밀을 풀기 위해 인간 유전자의 비밀 지도를 해독하는데 골몰했다. 하지만 나날이 급증하는 현대병들은 인간 유전자의 해독만으론 역부족이었다. 다큐에서는 한 사람으로 등장했지만, 현대병이라 지칭되는 이들 병의 증가는 폭발적이다. 

                                       2008년           2010년       
   크론 병과 같은 염증성 장질환   1만2334          1만 8332       30%증가
               만성 변비             48만              61만            30% 증가
        과민성 대장 질환자          149 만             155만         32% 증가 



현대인들은 '깨끗한 환경', 그리고 '결벽'에 가까운 습관, 거기에 더해 서구화된 식습관, 항생제 남용 등으로 인해 깨끗해진 장을 가지게 되었다. 즉 장내 생태계가 현대인의 생활 습관과 잘못된 약 남용으로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장내 세균이 급속하게 사라지고, 천식, 알레르기 등의 자가 면역 질환과 슈퍼 박테리아 감염증인 크론 병등이 범람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쁜 균의 압도적 점유는 그 어떤 '약'으로도 치유될 수 없다. 

심지어 장내 세균의 활약은 그저 난치병으로 여겨지는 각종 현대병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뇌의 분비물인  세로토닌의 95%가 장내 세균에 영향을 받는다고 결론이 나왔다. 즉 장내 면역 체계가 뇌에 정보로 전달되고, 그 결과에 따라 세로토닌이 분비된다는 것이다. 결국 건강한 정신 건강을 위해, 건강한 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내 생태계의 회복 프로젝트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다큐 프라임>은 '똥'과 그 안의 '세균'에 주목하고자 한다. 30년간 크론병에 시달린 미국의 환자는 타인의 건강한  똥을 장내 이식하는 '분변 이식술'을 통해 30년간 고질적으로 시달리던 복통과 설사에서 해방되었다. 그저 남의 똥을 좀 빌렸을 뿐인데, 건강한 세균이 우글우글한 타인의 똥이 환자의 대장으로 들어가 대장 생태계를 변화시킨 것이다. 

사례의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똥, 좋은 세균이 많은 똥을 만들기 위해 12주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유익한 균을 많이 만들어 나쁜 균을 제압하는 방식이다. 똥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가 되는 먹는 것을 변화시켰고, 락토바실러스, 비피스테리움같은 유익한 균들을 채워갔다. 그 결과는 놀랍다. 그 어떤 항생제와 치료로도 낫지 않던 사례자들의 악성 질환이 덜해지거나, 나아진 것이다. 



그저 똥만 변화시켰을 뿐인데! 하지만 이는 그저 외눈박이 현대 의학이 헛짚은 경로였을 뿐이다. 사실 순조로운 출산을 통해 엄마의 산도를 지나오는 신생아는 산도 내에 '충만한' 좋은 균 락토바실러스의 혜택을 입어 세상의 모든 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실제 제왕 절개를 통해 태어난 신생아와 정상 분만을 한 신생아의 태변을 검사하면 세균의 분포도가 현격히 차이가 난다. 즉, 면역력의 출발선이 달라지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엄마의 뱃솟 주머니에서 자라난 코알라는 6개월쯤이 되면 엄마의 똥을 먹는다. 보기에는 좀 '거시기'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아기 코알라는 엄마 똥에 들어이쓴 소량의 독성 물질을 통해 그냥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유칼리투스 잎을 소화시킬 미생물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간 우리 사회가, 우리 의학이 '더럽다', '위생적이지 않다'고 치부했던 '똥'과 그 안의 '세균', 즉 마이크로 바이움(microbiome)이 현대인의 불치병을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으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그 방식이 그간 의학이 했던 흑백 논리식의 약을 통해 병을 제압하는 식이 아니라, '스님들의 식습관'에서 그 해법을 찾듣 건강한 장내 생태계를 지향하는 균형과 조화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시도다. 
by meditator 2016. 6. 2. 14:42

20회 <동네 변호사 조들호>는 최고 시청률 17. 3%로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은 진짜 동네 변호사가 된 조들호(박신양 분)가 슈퍼마켓에서 단돈 8000원짜리 사탕 봉지를 훔쳤다는 이유로 법정에 온 할머니의 변호를 맡는 것이다. 


조들호의 딸은 아빠 조들호를 슈퍼맨에 빗댄다. 드라마 내내 조들호의 활약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슈퍼맨에 버금가는 활약을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회 조들호는 말한다. 자신이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자신의 딸이 믿는 것처럼 슈퍼맨도 아니라고. 하지만 '억울한 사람을 보면 그냥 못넘어 간다고. 우리 동네에 억울한 사람이 있는 한 슈퍼맨같은 동네 변호사의 활약은 계속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정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유망한 검사에서 노숙자로 전락한 조들호를 폐인 생활에서 건져낸 것은 눈앞에서 벌어진 '억울한 보육원 동생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 한 개인의 죽음에서 부터 비롯된 조들호의 활약은 슈퍼맨처럼 대한민국 법조계와 경제계에 거미줄처럼 쳐진 커넥션을 일망타진하는 화끈한 활약으로 마무리되었다. 

특히 최근 시끌벅적한  '네이처 리퍼블릭' 회장의 불법 도박 사건으로 부터 시작되어 홍만표 변호사의 부도덕한 행태와 그런 행태의 뒷배를 봐준 전관 예우라는 법조계의 관행으로 이어진 사건들은 <동네 변호사> 속 검은 커넥션과 맞물리면서 이 드라마의 현실감을 돋보이게 해준다. 

소박한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을 확인 
하지만 드라마적 장치의 현실감은 <동네 변호사 조들호>만의 전매 특허는 아니다. 이미 시청자들은 여러 드라마들을 통해 정, 재계 사이의 커넥션에 대해 신물이 나도록 학습해 온 터였다. 이제 드라마에서 악역하면 재벌이요, 그들의 뒷배를 봐주는 변호법인이나, 검찰은 더 이상 신선한 소재가 아니다. 

더구나 <동네 변호사 조들호>의 사건 해결 방식이 신선한 것도 아니다. 슈퍼맨 같은 조들호의 선전포고에도 언제나 정회장- 신영일 서울 지검 검사장(김갑수 분)- 법무법인 금산 커네션의 발걸기는 곳곳에서 조들호를 옭아매었다. 그 자신을 걸어 넘어뜨리는 올가미를 빠져나오는 조들호의 방식은 뜻밖에도 '사람'이었다. 



동네 변호사답게, 그가 만나는 사건에선 언제나 뜻밖의 곳에서 그의 편이 되줄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죽음을 밝힐 동영상을 남겨준 보육원 동생에서부터, 유치원의 선생님, 학부모들, 치매에 걸린 할머니, 노숙자 아버지를 외면했던 아들까지, 우리 사회의 갑남을녀라 할 수 있는 평범한 '동네' 사람들이 결국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는 정의감 하나로 배팅한 조들호의 편을 들어 주었다. 

또한 끝내 아버지의 편에 서지 못한 젊은 검사 신지욱(류수영 분)과 변호사 장해경(박솔미 분)과 비록 여주인공임에도 미미한 활약을 보였지만 당찬 선택을 한 이은조 변호사(강소라 분)가 있다. 그리고 결국은 끝내 스스로의 죄를 담백하게 실토하고 만 커넥션의 주인공들 정회장, 신영일, 장선우의 본의아닌 개과천선도 <동네 변호사 조들호>를 담백하게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환타지적이고 만화적인 드라마였고, 그 담백한 마무리를 통해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선한 의지'와 그에 대한 믿음을 되새겨보게 만들었다는 점이 <동네 변호사 조들호>가 남긴 흐뭇한 유산이다. 그간 정, 재계 커넥션을 다룬 드라마가 인간의 밑바닥까지 훑어내며, 악의 잔치와 그 악취로 진동했던 것과 달리, 슈퍼맨같은 조들호의 활약에 방점이 찍힌 <동네 변호사 조들호>는 그래서 같은 소재를 다룬 드라마에 비해 한결 속시원하게 다가왔다. 

소박한 주제 의식에의 개연성 박신양
그리고 바로 이 <동네 변호사 조들호>가 속시원한 개연성을 밀고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자타공인 배우 박신양의 존재에 있다. 대부분 이런 류의 드라마들은 드라마의 극적 방점을 악역의 개연성에 둔다. 그래서 새로운 드라마들이 만들어 질 때마다 주인공은 얼마나 더 나쁜 놈인가를 고심한다. 그래서 최근 이런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리멤버-아들의 전쟁> 속 남규만(남궁민 분)이나, <시그널>속 신영진(이기우 분)처럼 서로 누가 더 사이코패스스러운가 경연 대회를 벌인다. 그건 상당부분 제작진이 극의 추동 방식을 지배적 악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속칭 고구마를 잔뜩 먹여놓고 마지막에 속 시원한 사이다 한 잔이란 방식이란 평가처럼. 

물론 <동네 변호사 조들호>도 다르지 않다. 이 드라마에도 사이코패스같은 재벌 2세도 등장하고, 그를 싸고도는 아버지 재벌 회장과 법조계 인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런 기존 드라마와 같은 갈등 구조를 조들호란 만화적 캐릭터가 압도해 버린다. 그리고 그 압도하는 힘은 전적으로 박신양의 연기가 설득해 낸다. 



시청률 1위로 자족할 수 없는 제작 환경의 열악함 
20부작 <동네 변호사 조들호>는 비록 방영 내내 주중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 진행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사건은 심각하지만, 사건의 해결은 '실소'가 삐져나올 수 밖에 없는 어설프고, 소박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하지만, 그 순진해 마지않는 해결 방식조차, 박신양이라는 배우는 자신의 연기로 채워나가 드라마를 밀어 붙인다. 과연 박신양이 아니었다면 이 드라마가 동시간대 1위를 했겠으며, 마지막까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겠느냐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또한 주먹구구식으로 시간에 쫓겨 만들어진 드라마는 애초 여주인공이었던 강소라의 비중 축소와 김유신 역의 김동준의 역할 실종 등 씁쓸한 뒷맛을 낳는다. 

박신양이라는 드라마의 개연성은 동시에 다시 한번 현재 우리나라 드라마의 제작 방식에 대한 고민을 던져 준다. <쩐의 전쟁>을 작업한 이향희 작가와 박신양의 만남으로 화제가 되었던 <동네 변호사 조들호>지만, 이미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부터 등장한 표절 시비는 차치하고더라도, 이후 이향희 작가 대신 김영찬, 유미경이란 새로운 작가가 등장함으로써 드라마 제작 방식의 문제점을 노정했다. 또한 이런 열악한 제작 환경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동시간대 1위를 유지하자, 차기작 제작에 시간이 쫓긴 kbs측이 연장을 빌미로 기사를 띠우며 주연 박신양을 몰아가는 후진적인 행태를 되풀이했다.

비록 드라마는 박신양의 연기로 모든 개연성을 채워가지만, 극 중반부 드라마는 늘어지며 할 이야기가 없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등장할 정도로 20부작이라기엔 버거운 모양새를 보였다. '무사히 마친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박신양의 뼈있는 소감처럼.

<동네 변호사 조들호>는 박신양의 연기로 동시간대 1위를 수성하며 그간 드라마 제작 시장에서 마이더스의 손으로 통했던 smc&c에게 최초로 성공의 축배를 안겨 주었다. sm 소속 연기자들 중심으로 작품을 꾸렸던 smc&c는 최근 들어 자사 소속이 아닌 다양한 출연진 위주로 제작 방식에 변화를 주었고, <동네 변호사 조들호>는 그 첫 성과물이다. 엔터테인먼트계의 독과점 sm, 그 자회사 smc&c가 우리 사회의 검은 커넥션을 쳐부수는 슈퍼맨 조들호 변호사의 활약으로 고소원하던 시청률마저 얻었다는 점, 이 아이러니한 성과물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by meditator 2016. 6. 1. 16:45

sbs주말 드라마 <미녀 공심이>가 순항 중이다. <야왕(2013)>, <옥탑방 왕세자(2012)>, <냄새를 보는 소녀(2015)>로 sbs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바 있는 이희명 작가의 2016년작인 <미녀 공심이>는 주중 미니 시리즈의 자리를 꿰어차지 못한 아쉬움을 50부작 <옥중화>를 상대하여 10% 이상의 시청률을 올리며 선전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아니 성인 연기자의 등장 이후 지지부진한 <옥중화>에 비해 <또 오해영>에 버금가는 로코라는 평판으로 화제성 면에서는 선점하는 면도 있다. 비록 동시간대 1위는 쟁취하지 못했지만, <미세스 캅2>에 이어 10%를 넘나드는 안정적 시청층 확보로 주말 드라마라 하면 mbc, 거기에 '막장'이라는 등식을 벗어나, 침체기에 들었던 sbs 주말 드라마의 차별성을 정착하는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순항하고 있는 <미녀 공심이>를 보며 그저 웃고 즐기기엔 이 드라마의 여러 설정 등이 '껄쩍지근'한 면이 눈에 띤다. 그건 바로 작가 이희명의 전작과의 닮아도 너무 닮은 지점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닮아도 너무 닮은 작가의 전작
이희명 작가의 작품에서 전작은 다음 작품에서 '오마주'처럼 차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배우 박유천이 남자 주인공 이각으로 분했던 2012년의 <옥탑방 왕세자>의 여러 설정들은 역시나 박유천이 남자 주인공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차용된다. 심지어 <냄새를 보는 소녀> 남자 주인공 이름이 최무각인 점에서 부터, 전작의 향기가 느껴진다. <옥탑방 왕세자>에서 조선에서 온 왕세자가 빠져들었던 '달달한' 바나나 우유를 <냄새를 보는 소녀> 최무각이 초림이가 머무는 자신의오피스텔을 불침번을 스며 마시는 식이다. 마치 전작을 보았던 시청자들에게 '서비스'라도 하듯,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바나나 우유' 등이 등장하여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하지만 스토리와 상관없는 이런 설정들을 '자기 복제'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냄새를 보는 소녀>에 이어 다시 한번 작품을 같이 하게된 이희명 작가와 백수찬 연출이 <미녀 공심이>를 통해 보여주는 여러 설정 들은 <옥탑방 왕세자>에 등장했던 소품들이 <냄새를 보는 소녀>에 다시 등장하는 '재미'의 수준을 넘어선다. <미녀 공심이>는 마치 그간 <옥탑방 왕세자>와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시청자들이 좋아했던 모든 설정들을 모아놓은 종합 선물 세트와도 같다. 

<미녀 공심이>에서 공심이(민아 분)는 <옥탑방 왕세자>의 박하(한지민 분)처럼 옥탑방에 산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 안단태(남궁민 분)<옥탑방 왕세자>의 남자 주인공 이각의 현신인 용태용처럼 '재벌'의 자제이지만 어떤 사연(?)으로 인해 공심이와 함께 '옥탑방'에 살게 된다. 
그런데 <옥탑방 왕세자>와 비슷한 것이 주인공들만이 아니다. 알고보니 박하와 자매였던 <옥탑방 왕세자>의 세나(정유미 분)처럼 공심이에게는 언니 공미(서효림 분)가 있다. 그런데 이 언니, 여러모로 세나가 떠올려진다. 어려서부터 이쁘고 똑똑하기로 소문이 난 이 언니는 스스로의 힘으로 최대 로펌에 스카우트되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이루지 못한 '부'를 거머쥐기 위해 석준수(온주완 분)에게 접근한다. <옥탑방 왕세자>의 세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석준수도 만만치 않다. <옥탑방 왕세자>의 용태무처럼 석준수도 능력남이다. 하지만, 그가 제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한들, 할머니 남순천 회장은 할아버지가 외도를 해서 낳아온 아들의 손자인 그를 거들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할머니 눈에 들려 애쓰면 애쓸수록 실종된 친손자 준표에 대한 그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옥탑방 왕세자>의 용태무가 역시나 용태용에 대한 정통성에 대한 열등감으로 악인화되었던 설정이랑 똑같아도 너무 똑같다. 

이렇게 드라마의 틀에 있어서의 설정이 <옥탑방 왕세자>와 거의 흡사한 반면,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냄새를 보는 소녀>를 연상케 하는 지점이 있다. 무엇보다 <냄새를 보는 소녀> 남자 주인공 최무각의 헤어 스타일까지 유사한 <미녀 공심이>의 남자 주인공 안단태의 모습에서 부터, 만담 커플이라 칭해졌던 무각-초림 커플의 '개그맨' 못지 않은 연기 스타일이 고스란히 이어진다. 심지어 분명 다른 음악임에도 <냄새를 보는 소녀>가 연상되는 ost와 음향 효과까지. 



자기 복제도 능력이라기엔 정도가 있어야
<미녀 공심이>는 제목 공심이에서도 연상되듯이 어릴 적 보던 만화 <영심이>를 모티브로 삼은 듯이 보인다. 주인공 공심이는 바로 사춘기 소녀답게 풋풋한 몽상에 빠져들었던 그 주인공 영심이요, 남자 주인공 안단태는 이름에서부터 연상되듯 영심이만 쫓아다니는 맹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성실했던 왕경태를 떠올리면 된다. 드라마는 <영심이>처럼 공심이가 석준수를 대상으로 몽상에 빠지고, 안단태는 공심이 놀리는 재미로 쫓아다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식의 유사한 전개 과정을 보일 듯하다. 

그러나 정작 드라마는 <영심이>를 모티브로 삼았다 하지만, 정작 이 드라마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전작 <옥탑방 왕세자>와 <냄새를 보는 소녀>다. 아마도 앞으로의 전개도 이들 두 드라마처럼 밑도 끝도 없는 악역의 진기명기로 극을 이끌어 가는 식이 되지 않을까 예상되는데. 아직도 여운이 진한 결말로 회자되는 <옥탑방 왕세자>나, 3%의 전작의 딜레마를 딛고 동시간대 1위로 마무리한 <냄새를 보는 소녀>였지만, 좀 더 높은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작품들을 악역의 발흥에 의존한 안일한 전개로 스스로 '명작'의 반열을 되물렸던 전작에 대한 반성은 커녕, 전작의 '복제'까지 마다하지 않는 <미녀 공심이>를 그저 재밌다고 넘기기엔 어쩐지 껄끄럽다. 

김은숙 작가는 '자기 복제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스스로의 '자기 복제'에 대한 선언을 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전작에서 흥미로운 요소만 엑기스처럼 골라 모은 <미녀 공심이> 역시 이희명 작가와 백수찬 피디의 '능력'에 해당하는 것일까? 그래도 전작의 남자 주인공 머리 헤어스타일까지 고스란히 본따는 식이어서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은데. 
by meditator 2016. 5. 30. 06:06

5월 26일 방영된 <썰전> 168회에서는 <주간 떡밥>으로 강남역 살인 사건을 다뤘다. 패널인 유시민 작가와 전원책 변호사는 모두 이 사건에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두 사람의 해석은 달랐다. 전원책 변호사는 자신이 맡았던 이와 유사한 사건의 예를 들며 우리 사회가 방기한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가 '강남역 살인 사건'을 낳았고 주장했다. 그에 반해 유시민 변호사는 '여성'을 최후의 식민지로 여기는 '남성' 일반의 전근대적인 인식이 결국 강남역 살인 사건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유시민 변호사에 대해 전원책 변호사는 반대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인식들이 우리 사회 '남'과 '여'의 대립을 조장하며 본질을 왜곡한다고 뉘앙스의 입장을 밝혔다. 그런 전원책 변호사의 의견에 대해, 유시민 변호사는 짚는다. 그 '남성'은 여성이 들어올 때까지 여섯 명의 자신과 같은 '남성'들을 그냥 보냈다고. 물론 그 '남성'은 정신적 질환으로 인해 왜곡된 인식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병적 인식의 근저에는 바로 우리 사회 뿌리깊게 박혀있는 '여성'을 남성보다 낮잡아 보는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덧붙인다. 우리 남자들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이나, '차별'을 잘 모른다고. 




남자들은 모르는 최후의 식민지 여성
전원책 변호사도 그랬다. 세상이 이전과 달라졌다고. 요즘은 사회적으로 여성들이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는데 왜 새삼스레 '여혐'이니, 차별이냐고. 유시민 변호사의 '모른다'는 말 조차 선뜻 수긍하기 힘들어 하는 전원책 변호사의 표정은 어쩌면 바로 우리 사회 표준의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오히려 억울해 하며 강남역에 모여든 여성들에게 어떤 잣대를 들이대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원책 변호사의 수긍하기 힘든 표정에서부터, 최근 강남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갈등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 얼마나 뿌리깊게 여전히 '차별'이 박혀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5월 28일 <디어 마이 프렌즈>는 바로 그 오늘날 '여혐'으로 드러나고 있는 우리 사회 최후의 식민지 여성 차별의 역사를 짚는다. 

<꽃보다 청춘>의 네 할아버지 중 한 분으로 '구야 형'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새삼스레 노년의 인기를 회춘한 신구 선생이 <디어 마이 프렌즈> 정아 이모의 남편 김석균으로 분한다. 하지만, 넉넉한 웃음의 배려심이 넘치던 '구야 형'은 온데간데 없이, 동네방네 시끄럽게 아파트 현관 문을 발로 차며 마누라 이름을 불러 제끼는 김석균 씨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꼰대 할아버지다. '구야 형'을 좋아했던 시청자들조차 김석균 씨의 신구 선생을 쉽사리 수긍할 수 없는 가부장이다. 문을 제때 안 열어주는 아내, 밥을 제때 안 차려주는 아내, 이러저러한 그의 요구에 딱딱 맞춰 주지 않는 아내에게, 아니 요구를 제때 맞춰 주더라도 그저 집에서 하는 없이 밥만 축내는 여편네라고 입에 달고 산다. 말뿐이 아니다. 늦게 들어오는 아내 문도 안 열어주는 식으로 '실천'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미 드라마에서 드러나듯이 김석균 노인의 아내에 대한 태도는 그가 한평생 견뎌온 트라우마의 방출이다. 중졸 학력으로 고졸 아내와 결혼한 컴플렉스에서부터 사회적으로 늘 못배운 것으로 인해 겪은 수모 등이 자신의 '안사람'인 아내에게 쏟아부어지는 것이다. '내' 사람, 가장 만만한 사람, 바로 그의 아내가 그의 트라우마와 사회적 소외의 '배설지'가 된다. 

그런 남편을 아내 정아 이모(나문희 분)는 인내해왔다. 그리고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만 하다 이제는 요양 병원 신세가 된 친정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10억을 모은 남편이 자신을 세계 일주 시켜줄 것만을 고대하며 모든 모욕을 견뎌왔다. 



가부장, 그 '폭력'의 역사 
하지만 6회에 드디어 가족에게 드러난 정아 이모의 큰 딸의 가정 폭력으로 인해, 정아 이모 부부의 일이 그저 '부부'만의 일이 아닌, '내림'이 되는 역사였음을 드라마는 밝힌다. 즉 어린 시절 석균이 일하던 공장 사장 아들에게 추행을 당했던 순영은 사랑의 힘으로 그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남편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고, 그로 인해 결혼 생활 내내 '골병'이 들도록 '폭력'에 시달려 왔다. 

그러나 어린 시절 자신의 성추행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했을 때 아버지가 보였던 '기집애가' 라는 모멸적 반응, 거기에 자신 못지 않게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온갖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참아내는 어머니를 보며, '가부장적' 기제를 내재화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나 하나만 참으면'이라는 의식으로 십수년을 폭력으로 견뎌왔다. 

결국 딸의 가정 폭력으로 드러난 정아 이모네만이 아니다. 평생을 남편에게 얻어맞고 살다, 아들이 장애인이 되자, 그때서야 '폭력'에서 벗어난 난희 모 오쌍분 여사(김영옥 분)네도 만만치 않다. 엉뚱하게 절친인 영원(박원숙 분)에게 화풀이 하는 난희 남편의 '사랑'을 빙자한 집 안방에서 까지 마다하지 않은 외도는 어떤가. 남편을 벽장 속에 가둬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 쓴 희자(김혜자 분)가 평생 견뎌야 했던 남편의 바람끼는 또 어떻고. 

사실은 그 공장 사장 아들을 두드려 팼었고, 이제 또 사실을 알게 되어 사위를 찾아가 패악을 부렸다지만, 그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팔자 좋은 여편네와 딸들이 견뎌온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제는 산소통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오쌍분 여사 남편이 제 아무리 아내바라기를 해도 아내 오쌍분 여사의 시선은 쉬이 남편에게 돌아갈 수 없다. 남편의 그늘에서 살아온 김희자 여사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늘 위태롭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결론이 결국 아름다운 가족애로 마무리될 지는 몰라도, 그녀들이 지난 세월 견뎌야 했던 '가부장'이란 이름의 정신적, 육체적 폭력의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남편에게 맞은 아내가 겨우 경찰서에 찾아가면 '가정'내의 문제라고 되돌려 세우는 세태가 아직도 크게 바뀌지 않는 세상에서, 왜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여성으로 종종 위협을 느끼며, 모멸감을 견뎌야 하는 세상에서 거울 앞에선 할머니들의 얼굴에 새겨진 '가부장'이란 이름의 문신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여전히 '모르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세상이 이를 반증한다. 

by meditator 2016. 5. 29. 02:29

경찰이었던 아비가 이름모를 병에 걸려 다른 사람이 된 듯 행동하는 딸을 위해 굿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외지인의 도래에서 부터 시작된 마을에서 웅성거리는 소문은 자식에의 사랑에 미혹된 그를 다짜고짜 일본인의 산막으로 들이닥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마치 소문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굿당에 버금가는 기묘한 제단과 조우한다. 영화 <곡성(哭聲>의 이야기다.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에 주렁주렁 매달린 해골 모양으로 말라 들어가는 독초를 의심하는 대신, 마을에 들이닥친 불가지한 재앙을 해결하고자 무당을 불러 들인다. tv 속에서 보도된 독버섯에 대한 해명은 그저 '해명'일 뿐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과학의 세상에서 손쉽게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하던대로 '살'을 날려 자손을 보존하고자 한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에 따르면 아직 문명이 시작되기 이전의 시대 인류의 조상은 자신들이 해명할 수 없는,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자연의 갖가지 신묘한 현상에 '신'의 위치를 부여했다고 한다. 인간이 가진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로 '신'이 창조된 것이다. 그런 '신화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가독할 수 없었던 우주, 자연 만물에 대해 '신'을 매개로 '독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지프 캠벨은 과학의 시대 이래 인간이 과학의 확신과 달리 그다지 행복해 지지 않은 이유를 바로 '신화'의 실종으로부터 찾고 있다. 과학은 세상을 독해하려하지만, 그럴 수록 세상의 '불가지'한 영역은 확장되어 가고, 그 속에서 '신화'와 '신'을 잃은 인간은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소통하고 싶었던 나홍진 감독의 소망이 21세기에 곡성에서 벌어진 굿판을 통해 사람들을 쉽사리 흡인하듯이, '알파고'의 시대, 사람들은 '곡성'의 종구 일가처럼 불가지의 영역에서 쉽게 '신'의 도움에 손길을 내민다. 더구나 그 일이 나를 비롯한 내 일가의 일일때, 이성적인 판단을 촉구하는 신부보다, 당장 눈 앞에서 살을 날려 귀신을 쫓아주겠다는 무당의 호언장담이 더 솔깃한 건 인지상정이다. 



<곡성>에 이어 또 다시 미혹된 로맨스 드라마의 여주인공 
<곡성> 속 종구가 그랬듯이, <운빨 로맨스> 속 여주인공 심보늬(황정음 분)도 그랬다. 1회, '바하반야밀다 심경`'하고 낭랑하게 울려퍼지는 핸드폰 벨소리에, 자신이 가는 곳곳에 소금을 뿌려대는 이 여자, 겨우 스물 하고 몇 살인데, 말끝마다 '운수가 어때서', '방향이 흉해서', '오늘의 운세가' 어쩌고 하는 심보늬는 영화 속 종구 일가 못지 않은 중증이다. 이십대 처자가 할 행동이라기엔 '공감'하기 힘든 그녀의 행동들은 1회말에 가서야 이유가 드러난다. 그녀 역시 종구처럼,  불시에 가족을 잃고, 이제 또 남은 가족마저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젊은 세대조차 '앱'으로 오늘의 운세를 보고, 부적을 다운받는 세상에 니가 운수가 사나워서 가족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점술가의 서슬퍼런 단언에 과연 그걸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정의를 수호해야 하는 경찰도 대번에 일본인의 산막에 들이닥쳐 낫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겨우 스무 살을 넘긴 여성에게 벌어진 가족의 참사는 불가항력이다. 

어느새 '믿고 보는 황정음'이 된 황정음의 좌충우돌 해프닝으로 어수선했던 1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회 마지막 부분의 보늬의 '미혹'에 대한 설명으로 황당한 '운빨'에 기대어 살아가는 지지리도 운없는 보늬의 캐릭터를 대한민국 보편의 정서로 설득해 낸다. 심지어 '운빨'에 연연하는 여주인공이라, 들여다 보면 고군분투하는 가난한 여주인공 캐릭터야 황정음이 그녀를 세상에 알린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래 최근 <그녀는 예뻤다>까지 황정음의 전매특허 캐릭터이지만, 거기에 '운빨'을 곁들이니 싹뚝 자른 머리만큼이나 또 신선하게 다가온다. 



싸가지 ceo 제수호, 스테레오 타입 로코 남주 캐릭터
하지만 '운 나쁜' 보늬만으로 '로맨스' 드라마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언제나 로맨스 드라마가 그렇듯 '운'에 기대어 사는 여주인공의 맞은 편에, 전혀 그렇지 않은 남자 주인공이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주인공은 천재적인 두뇌, 거기에 모든 것을 '이성'의 잣대로 판단하는 게임 회사 ceo 제수호다. 

등장하자 마자 카지노에서 한껏 머리 좋은 척을 하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선 여주인공과 부딪쳐 오물을 뒤집어 쓰고, 게임 시연회장에서 불성실한 직원들에게 마구 대하다, 그의 자비없는 태도에 불만을 느낀 직원들로 인해 시연회를 망쳐버리게 된 ceo,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조명받느라 트라우마를 가진 내면의 상처를 가진 인물, 그가 바로 '호랑이 띠'로 여주인공과 얽힐 인연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제 아무리 류준열이 '잘 생김'을 연기할 수 있다지만, <운빨 로맨스>의 류준열이 연기하는 제수호는 딜레마다. 트렌드에 맞게 게임 회사 ceo에, 여주인공에 대적할 '이성'에 절대 의존하는 수학 천재라지만, 1,2회 속 싸가지스런 제수호의 캐릭터는 류준열이 연기할 꺼리를 그다지 주지않는 로맨스 드라마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잘 나가는 부자에, 싸가지에, 거기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까지. <운빨 로맨스>는 원작 만화의 짠돌이 집주인 제택후 대신, 일반적인 로맨스 드라마의 전형남 제수호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덕분에 <운빨 로맨스>는 황정음이 연기하는 심보늬라는 솔깃하게 만드는 신선한 여주인공의 캐릭터와 사연에, 기존의 로코의 공식과도 같은 제수호를 결합하여 나름 신선하지만 안전한 방식을 도모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2회를 보며 <운빨 로맨스>라는 드라마에 대해 안심하고 마음을 맡길 수 없는 이유는 이런 어정쩡한 결합에서 비롯된다. 심보늬의 사연과 캐릭터를 보면 궁금해 지는데, 심보늬와 엮이게 되는 제수호가 어쩐지 뻔해 보이는 것이다. 드라마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제수호를 심보늬가 찾아 헤매는 호랑이 띠 남자로 만들고, 심지어 그녀가 프로그래머로서 제수호의 제제 공채 1기였다는 사연까지 얹어준다. 물론 뻔한 여정을 알면서도 속아주며 가는 것이 로맨틱 드라마 독자의 몫이라지만, 1,2회 보여진 <운빨 로맨스>의 첫 여정은 아직 '활짝 두 팔 벌려 함께 하기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여지를 남긴다. '잘 생김'을 연기하는 류준열이 이 스테레오 타입 조차 극복한다면, 그는 '신원호'의 저주를 풀 주인공이 되겠지만, 1,2회로선 아직 미지수다. 

by meditator 2016. 5. 27. 05:50

5월 16, 17, 18일 밤 9시 50분, 이어 일요일 밤 8시 15분부터 연달아 ebs 다큐 프라임 3부작 <공부의 배신>이 방영되었다. 중고등학교에서부터 대입, 그리고 대학생, 취준생까지 우리 사회 공부하는 청춘의 적나라한 현실을 그린 이 다큐는 <결국 꿈 포기한 나, 꿈을 꾸는데 자격이 필요한가?>, <ebs <공부의 배신>의 배신>처럼 다양한 당사자들의 반응처럼 시의적이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의 입시 현실을 겪은 당사자들은 어쩌면 다 알고 이미 경험하고, 경험했던 현실이지만, 막상 이를 3부작으로 모아놓으니, 그 적나라함에 등골이 오싹해 질 정도다. 우리가 결국 이런 사회에서 공부를 한다고 발버둥치고, 내 자식을 그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가 싶은 마음에. 한 마디로 학교 선생님들이나 입시의 당사자들은 <ebs<공부의 배신>의 배신>처럼 아이러니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지만, 과연 3부작 전체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개천의 용은 개뿔!이다. 




3부작으로 완결된 <공부의 배신>은 중고등학교에서 부터 시작하여 취준생까지 '공부'로 승부수를 띠우고 있는 우리 사회 경쟁의 현실을 까발린다. 

명문대를 가는 아이들은 일찌감치 정해진다
1부 <명문대는 누가 가는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지방 소도시 익산의 전교 1등 중학생 예원이는 그다지 넉넉치 않은 형편에도 자사고를 가기 위해 불철주야 공부중이다. 하루 두 시간을 자면서 손이 부르트도록 공부를 해 학교에서 전교 1등은 따놓은 당상이지만 예원이는 늘 초조하다. 자사고 입시야 어떻게든 통과한다지만 과연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예원이의 불안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 죽도록 공부해서 자사고에 입학한 예원이가 받아든 성적표는 전교 300등 밖이다. 이른바 자사고의 바닥을 깔아주는 성적이다. 이미 초등학교 이전부터 온갖 사교육을 선점한 아이들에게 예원이가 당해낼 바가 없다. 

그런 예원이의 처지를 잘 아는 건 특목고에서 바닥을 깔아주는 민기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공부했던 민기, 하지만 과학고에서 민기의 공부는 도통 힘을 쓰지 못한다. 사교육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민기는 제 아무리 수학 등에 시간을 투자해도 따라잡을 수 없다. 그에게 공부는 따라잡을 수 없는 '경사진 계단'이다. 

그래도 민기나 예원이나 죽어라하고 특목고나 자사고를 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 사회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고등학교 별 입시 결과 때문이다. 일반고를 다니는 정민이는 집에 와서도 긴장이 풀릴까 교복을 벗지 않고 공부하지만 내신 한 등급 올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대학에 가기 위해 필요한 건 공부만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수상 실적이나 비교과 성적이 미흡한 정민이는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일반 학생일 뿐이다. 

특목고와 자사고와 일반고 사이에는 수학, 영어 평균 40점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건 바로 학부모의 소득 차이이다. 특목고 학부모와 기초수급 대상자 가계 소득은 월 500만원 차이가 나고, 실제 대학생들의 수능 성적은 소득에 따라 43점 이상 차이가 났다. 부모의 소득이 높을 수록 명문대 진학율이 높은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경쟁과 계급을 내재화시키는 대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걸로 되지 않는다고? 그 이유를 2부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가 들려준다. 이미 고등학교에서부터 서열이 정해진 아이들의 현실은 대학에 와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수시 전형 200여 개의 대학 입시, 그 다양한 전형의 통과는 곧 정보력이고, 정보력은 부모의 소득과 맞물려 얻어진다. 같은 대학을 다니지만, 학생들은 서로의 입시 성적에 따라 벌레 충자를 붙이며 서로의 서열을 매긴다.  특목고, 자사고 출신들은 자신들의 출신을 학교 점퍼에 새기며 떵떵거리는 반면, 기회균등 입학생은 곱지않은 시선 속에 수그러든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다른 시스템 속에서 많은 것들을 선행 학습한 동기들에게 일반고 출신들은 주눅들 수 밖에 없다. 거기에 그저 공부만 해서 대학에 온 학생들은 자신들은 듣도보도 못한 갖가지 특혜를로 손쉽게 입학한 동기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박탈감은 시작일 뿐이다. 출신고별, 그리고 취직이 잘 되는 과별, 심지어 강의로 인해 끊임없이 재단되는 차별들이 입시 전쟁을 치루고 한숨 놓을 사이도 없이 학생들을 휘몰아친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 잘 하는 아이들과 못하는 아이들을 좋은 환경과 갖가지 특혜로 나누던 그 차별의 관습은 대학 사회에서 보다 확대 재생산될 뿐이다. 



꿈조차 버거운 대한민국
집값이 차이가 나는 서울의 두 지역 초등학생들에게 장래의 꿈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 결과, 강남의 학생들은 대부분이 의사, 검사 등 전문직종을 대답한 반면, 그 보다 소득이 낮은 지역 학생들은 요리사, 미용사 등 기술직을 선호했다. 뿐만 아니라 강남의 초등학생들은 자신의 꿈을 향한 행로에 대한 구체적 시뮬레이션조차 제시한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꿈조차 달라지는 대한민국. 

그나마 꿈이라도 꾸면 다행일까? 10대들은 이미 안다. 배신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공부'나 '노력'이 성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재력', 부모님빨'이 미래의 성공, 혹은 꿈을 보장하는 전제 조건이라 답한다. 그리고 3부작의 다큐는 입시생들로부터 대학생 취준생들까지 학생들의 대답이 빈말이 아님을 낱낱이 그려낸다. 

대학, 그것도 스카이나 그에 버금가는 대학에 갔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성균관대 사회학과를 다니는 선혜, 하지만 지금은 휴학생이다. 그나마 고등학교까지는 잠이라도 줄여 입시관문을 통과했지만, 대학에 와서는 그런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대학원에 가서 사회학자가 되고싶지만, 당장 학비 마련도 못해 휴학을 거듭하는 현실에서 그런 미래는 요원할 뿐만 아니라 불투명하다. 서강대 졸업생 만길이의 현실도 퍽퍽하긴 마찬가지다. 피디가 되고 싶지만 하루 서너 시간 자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생활을 견딘 만길에게 기업들이 요구하는 스펙은 무리이다. 하루 30만원이라도 있으면 취업 준비에 매진할테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다. 



3부작 <공부의 배신>이 증명한 것은 '미움을 넘어 '증오'를 배태하는 경쟁 사회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그 경쟁 사회의 현실이 처연한 것은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그것이 '경사진 계단'이라 칭해지고, '포기'를 부르는 고착화된 계급 자본주의 사회이다. '금수저'라는 말이 일상화된 표현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내가 경주한 노력이, 누군가의 가진 것으로 인해 쉽게 버림받아지는 상처의 경험이 일반화된 사회, 애초에 경주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사회에서, 공부는 어느 학교 선생님 표현처럼 그럼에도 유일하게 배팅할 수 있는 칩이지만, 점점 더 그 배팅의 결과가 보장되지 않거나 희박한 승률을 보여주는 무모한 도전이 되는 사회를 다큐는 증명한다. 

역사를 배우며, 고려 시대 귀족 사회의 자제로 아버지의 벼슬에 따라 자연스레 관직에 나가는 '음서' 제도를 배우며 쯧쯧거렸다. 그러나, <공부의 배신>이 증명해 낸 것은, '경쟁'과 '노력'이라는 말로 포장된 또 다른 계급 사회 대한민국이다. 결국 말로는 '노력'이라하고, '경쟁'이라 하지만 애초에 서로의 출발선이 다른 불공정한 레이스에서 수많은 학생들은 자신을 '노력'으로 가학하다 배신당하고 증오에 치떨게 만들고 낙오자로 스스로를 낙인찍도록 만드는 귀족 사회 고려보다도 더한 서열 사회의 민낯이다. 결국 고려는 그 불공정한 '음서'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 내지 못한 채 무너져 갔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공부의 배신>을 보고, 그러니 너희들은 낙오되지 않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선생님과 우리 공부 열심히 하자는 학생들이 있는 한 아직 이 견고한 계급 사회는 쩡쩡하게 버틸 듯하다. 
by meditator 2016. 5. 23. 19:23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다. '더 살믄 뭐 하누. 그저 오늘 밤이라도 자다가 조용히 가면 좋겠다'고. 하지만, 당신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만큼, 아이러니하게도 당신들의 삶에 대한 집착은 커져 가는 듯 보인다. 매 끼니마다 밥 보다 더 많은 양의 약을 한 움큼씩 드시고, 혹여라도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다싶으면 득달같이 병원, 그것도 종합 병원을 내 집 드나들듯 하신다. 그렇게 말씀과 다르게 '건강 염려증'으로 삶에 대한 열렬한 욕구를 표출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나이듦이 무서워진다. 그리고 그 무서워짐의 내면에는 '뭐 저 나이 돼서도 저렇게 삶에 연연하나?'라는 선입견이 있다. 


완의 나레이션을 통해 사회적 선입견을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가 노인들을 주인공으로 삼았음에도 극의 나레이션을 난희(고두심 분)의 딸 완이(고현정 분)에게 맡긴 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노인들을 보는 바로 저 선입견으로 부터 비롯한다. 

급격한 노인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초고속 노령 사회로 진입하는 우리 사회의 변화와 달리, 우리는 '노인'에 대한 사회적 개념을 정립하지 못했다. 농경 사회 속 '어르신'이었던 노인은 어느 틈에 산업 사회 '뒷방 늙은이'가 되었다가, 이즈음에는 빈곤 노인과 어버이 연합으로 상징되는 소통 불능의 꼰대들로 취급받을 뿐이다. 

그래서 드라마 속 노인들은 누군가의 엄마로, 혹은 집안 어른으로 주로 맡는 역할이 '하드 캐리'한 '안티'캐릭터들이 대부분이다. 언제나 목소리 높은 악독 시어머니의 대명사였던 박원숙씨처럼 말이다. 그런 그들을 노희경 작가는 '인생'이 있는 노년으로 불러온다. 그래서 박원숙씨는 경우없는 시어머니에서 돌아온 거울 앞의 국화같은 노년의, 배포있고 그 배포만큼이나 아량도 넓은 동창생 영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악독한 시어머니가 넉넉한 마음을 가진 노년의 멋쟁이로 되살아나는 이 이질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희경 작가는 난희의 골치덩어리 노처녀 딸 완이를 개입시켜, 노인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감정을 마음껏 풀어댄다. 그래서 그녀는 엄마 난희를 비롯하여, 엄마의 동창생 이모들이 갖가지 해프닝을 벌일 때마다 시청자, 그리고 우리 사회 속 시선에 따라 한껏 '욕'을 해댄다. 

그렇게 완은 외진 시골 도로에서 더 이상 운전을 못하겠다며 자신을 불러댄 희자(김혜자 분) 이모와 정아(나문희 분)이모에게 노인네들이 집에나 있을 것이지, 오밤중에 운전을 하느냐 부터 시작하여 온갖 할 소리 못할 소리를 다해댄다. 말은 완이의 입에서 나오지만, 사실 그들을 보는 시청자의 입장도 그리 다른 건 아닐 터이다. 

아직은 끝나지 않은 노년의 삶
죽기에 좋은 날이라며 빌딩 옥상에 올라간 희자의 처지가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에서 그럴만도 하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쓸쓸한 노년의 삶이다. 그들의 여전한 악다구니와 해프닝이 '뭐 나이 들어 저렇게 까지'라는 생각이 들어 더 씁쓸해 지는 상황들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희자와 정아의 교통 사고가 있다. 한밤중 고속도로에서 <델마와 루이스> 기분을 내던 정아와 희자는 운전 미숙으로 교통사고를 내고만다. 그리고 너무 놀라 뺑소니를 친다. 운전도 못하는 노인네들의 주책맞은 한밤중 드라이브라는 상황을 뛰어넘은 이 사고를 통해 작가 노희경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삶으로서의 '노년'을 역설적으로 정의해 낸다. 

빌딩 옥상에 올라 떨어져 죽으려다 떨어지는 자신 때문에 거리의 행인이 다칠까 한강 다리로 자리를 옮겼다가 경찰에 잡혀간 희자는 여전히 삶에 미련이 없다. 하지만, 정작 정아와 함께 사고를 낸 순간 그녀는 아직 자신이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경험한다. 정아의 역설은 다른 지점에서 온다. 뺑소니를 친 사실을 안 완이 자수를 권하자 자신이 친 피해자가 늙어서 다행이라며 어깃장을 놓던 그녀, 하지만, 완의 차 백미러에 비친 역시나 늙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신으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진 피해자의 아직 끝나지 않은 노년의 삶에 감정 이입을 한다. 

<디어 마이 프렌즈>가, 그리고 노희경 작가는 이런 죽음의 역설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징그러워해 마지 않는 노년의 끝나지 않은 삶에 대한 공감을 제시한다. 하지만 공감에서 그치지 않는다. 삶에 대한 여전한 열망을 깨닳은 두 노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으로 인해 시청자들을 감동시킨다. 

아직은 죽고 싶지 않은 자신을 깨달은 희자, 그녀가 선택한 다음 행보는 자신이 친구 정아 대신 교통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로 자수를 하려는 것이다. 아직 죽지 않은 남편과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세 딸이 있는 정아와 달리, 막상 자식들에게 유서 한 장을 적으려 해도 딱히 할 말이 없을 정도의 걸리적거릴 것이 없는 자신의 삶을 핑계 대며 친구를 대신하여 감옥에 가려는 것이다. 정아 역시 다르지 않다. 늙은 두 친구가 손을 꼭 잡고 함께 한 경찰서 행은 끝나지 않은 삶을 '욕구'와 욕망'이 아닌 나이가 들어도 여전한 '이타적'일수 있고, '도덕적'인 존재로서의 어른으로 그들의 여전한 삶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의 편견과 선입관을 후회하며 쫓아온 완이를 통해, 우리 역시 '선입관'과 '편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만든다. 

이제 4회이지만 <디어 마이 프렌즈>의 노년은 '훈계'나 하며 자신의 존재를 위해 '인정 투쟁'을 하는 뒷방 세대가 아니다. 얼굴의 주름은 자글자글할 지언정, '내일 밭 농사가 더 걱정인' 오쌍분(김영옥 분) 여사처럼 오늘의 삶에 펄떡이는 당대성이다. 완이의 사랑 이야기보다 더 귀추가 주목되는. 
by meditator 2016. 5. 22. 17:21

선생님을 하는 친구가 전해준 말이다. 초등학교 1학년인 학생은 자기 집 식구를 소개할 때 꼭 다섯이라고 한단다. 친구가 기억하기엔 분명 부모님과 1학년 학생, 그리고 동생, 이렇게 네 식구가 다인 걸로 아는데, 알고보니, 학생이 꼽은 가족에는 그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제 애완견이 '가족'인게 하등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미래의 언젠가는 그 '가족'의 자리에 애완견처럼 '로봇'이 차지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5월 15일 방영된 sbs의 2015 sdf(서울 디지털 포럼) 특집 다큐 <알파고와 어린 왕자>는 '알파고'의 시대, 그저 알파고의 공습으로 인한 공포 대신, '인공 지능 ai(auto intelligence)에 대한 새로운 관계 모색을 시도한다. 




'알파고'가 결국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서 내리 세 판을 이겨 버리자, 사람들은 충격에 빠져 버렸다. '알파고 쇼크'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세상은 인간을 상대로 스스로 진화하여 승리를 이끌어낸 저 무시무시한 인공 지능에게 조만간 '지배'당할 것 같은 위기에 빠져 버렸다. 심지어 일부러 져준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조차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알파고 쇼크는 우리 사회 빠르게 변화하는 화제의 아이템에게 곧 자리를 빼앗겼지만, 여전히 '인간조차 이겨버리는 인공 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굳게 자리잡았다. 

인공 지능과의 관계 모색
이런 우리 사회 저변에 깔린 인공 지능에 대한 두려움을 전제로, 다큐는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는 ai에 대한 보다 진전된 '관계'를 모색하고자 한다. '인공 지능'과의 새로운 관계라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다큐에서도 등장하다시피, 2014년 개봉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her>가 '알파고 쇼크'의 대척점에 놓여있다. '인공 지능과의 사랑'이라? 이 또한 사랑의 쇼크일까?

하지만 영화에서 등장했던 이 인공 지능 운영 체제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분)'와의 사랑에 빠졌던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가 그저 가상의 이야기가 아님을 다큐는 보여준다. 일본에서는 이미 여자 친구 노릇을 하는 인공 지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다큐에 등장한 일본 남자는 인공 지능 여친과 함께(?) 밥을 먹고 데이트도 한다. 여자 친구는 아니더라도, 낡은 기계의 부분조차 마치 '늙어가는' 모습으로 받아들이며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일본처럼 시제품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가족'이 미처 하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는 인공 지능이 등장했다. 로봇 동아리 경험이 있는 부부는 자라나는 아이를 위해 부부의 여력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인공 지능 로봇을 만들었다. 물론, 우리가 상상하듯, 영화 <AI>의 데이빗같은 모양새가 아니라 그저 아이의 걸음마 보조용 손잡이와 바퀴가 달린 단순한 모양이지만, 아이의 성장에 따라 걸음마에서부터, '나 잡아봐라'까지 함께 하며 자란 로봇은 이 가족의 생각을 담은 '플랫폼'으로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심리학 연구는 인간이 로봇과 교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로 증명한다. 

이렇듯, 현실의 인공 지능은 알파고처럼 '인간'과 대결을 하며 '인간'의 영역을 호시탐탐 엿보는 또 하나의 세력이 아니라, 인간 삶의 빈틈을 채워주는 '조력자'의 형태로 등장한다고 다큐는 밝힌다. 

삶의 조력자로서의 로봇
전신마비 환자의 눈을 통해 그의 목소리와 발이 되어 세상과 소통시켜 주는 로봇, 반신불수 장애인의 발이 되기 위해 개발 중인 로봇,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아이의 일정을 보살펴 주고 외국어까지 가르쳐 주는 학습 도우미 로봇, 그리고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무인 자동차', 그리고 시판 중인 vr(virtual reality)까지, 현실의 로봇은 인간과 힘 겨루기를 하기 보다, 마치 서로가 길들여가며 '친구'가 되어가는 어린 왕자와 '사막 여우'처럼 인간 생활의 '벗'으로 자리 매김할 것이라며 '관계'를 재정립한다. 



이세돌 9단을 이기는 '알파고'는 무시무시해 보였고, '소설'까지 써내는 인공 지능이 잠재력은 그 한계의 가능성에 '인간'을 넘어선 듯 보였다. 언젠가 인공 지능이 써낸 소설이 자신의 소설보다 더 베스트 셀러가 될 그날이 올 지 몰라도, 그래도 자신의 소설이 가진 '인간의 향취'는 독보적일 것이라는 소설가 박범신의 소견은 '자족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의 예견처럼 언젠가 사람대신 로봇 친구와 로봇 아내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생길 그날이 올지라도, 여전히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인간이라는 류적 존재의 dna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학자들은 예견한다. 오히려 그런 위기보다는, 인공 다리 로봇을 장착하고 십 여년만에 일어선 장애인이 두 발로 서서 맡는 공기가 다르다고 감동하듯, 로봇의 미래는 새로운 '관계'로서 가능성을 연다. 

물론, 미래의 언젠가 진화한 로봇에게 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로봇을 상대로 '러다이트 운동(기계 파괴 운동)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로봇이 사막 여우와 같은 길들인 벗이 될지, 위기의 '적'이 될지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sbs 스페셜  <알파고 쇼크, 그 실체는 무엇인가?> 와 <sdf 특집 다큐 알파고와 어린 왕자>는 우리 손에 놓인 양 날의 검이다. 
by meditator 2016. 5. 16. 06:29
2008년 출간 즉시 붐을 이루었던 <엄마를 부탁해>는 자식의 집에 가려고 서울로 상경했다 남편의 손을 놓친 채 실종된 '엄마'의 삶을 복원한 이야기다. 그저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엄마의 실존적 삶을 복원해 내려 애썼던 이 소설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 '붐'은 '붐'으로서 흘러가고, 여전히 우리 문화 속 '엄마', '어머니'는 여전히 누군가의 어머니, 아내다.

tv도 다르지 않다. tv 속 '엄마'들은 주말 드라마나, 일일 드라마 속에서 누군가의 결혼과 사랑의 매개자나, 반대자 등의 '갈등' 혹은 '감초' 요소로서 등장한다. 그나마 '가족'을 '주제'로 내건 주말, 일일 드라마에서는 존재감이라도 있지만, 제작비와 출연료의 문제로 언제부터인가 주중 드라마 속 주인공들에게 '부모님'의 존재감은 '희박'해지고 있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의욕적으로 중, 노년의 이야기를 선보이겠다고 한 김수현 작가의 <그래 그런거야>에서도 중, 노년의 삶은 등장하지만, 여전히 거기서 중년의, 노년의 여성들은 종종 '자아'에 대한 결핍증을 호소하다, 결국은 '가족'이라는 구심력 속에 자신을 '실종'시키고 만다. 오죽했으면 늘 막장 드라마의 악역을 도맡았던 박정수, 이휘향 등이 역시나 비슷한 캐릭터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개연성있게 전개시켰던 <결혼 계약>이라는 드라마에 반가움을 표명했을까.

디어 마이 프렌즈ⓒ tvn
노년, 풍성한 삶의 속내를 열다 
그런 중에 5월 14일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가 등장했다. tv 속 어머니들이 '막장' 속 악다구니의 담당자가 되자 우리 곁에서 슬그머니 사라져갔던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누구누구의 엄마 대신, 정아(나문희 분), 희자(김혜자 분), 난희(고두심 분), 충남(윤여정 분), 영원(박원숙 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름만이 아니다. 누구누구의 어머니나 아내라는 이름표 대신, 그 어떤 통속극보다도 적나라한 삶의 속내를 내보이며 '사람'의 모습으로.

시끌벅적 첫 회를 연 것은 바로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동창회다. 충남의 야외 까페에서 열린 동창회, 하고 많은 설정 중에 동창회는 바로 누군가의 엄마, 아내로 살아온 노년의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부여하는 절묘한 장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들이 가족 속 이름표를 내던진 채 '누구야' 라고 불리워지는 이 세월의 역회전 순간, 드라마는 '노년'이라는 단절된 세대에게 생생한 삶의 가치를 부여한다.

등장한 배우들의 면모가 쟁쟁한 만큼, 그 배우들이 연기하는 <디어 마이 프렌즈> 속 삶도 제 각각이다. 72살의 정아는 중졸 출신 컴플렉스를 가진 남편의 비위를 맞추며 세계 여행의 꿈에 부풀어 세 딸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오늘도 분주하게 산다. 그런가 하면 그녀의 오랜 친구 희자의 삶은 바쁜 정아와 정반대다. 오죽하면 그녀의 남편이 돌아가셨을 때 자식들이 차라리 어머니가 먼저 가시는 게 낫다하며 걱정할 만큼, 홀로 갈아가는 하루하루가 그녀에겐 버겁다. 결국 홀로 남겨진 집은 공허하고, 시간은 깃털처럼 휘날리는데 정작 그녀는 그걸 주체할 수 없다. 유학까지 뒷바라지한 딸에게 조차 열심히 살아온 삶을 쉬이 이해받지 못하는 난희의 열혈 노년도, 65세의 나이에도 '처녀'임을 자부하는 충남의 부질없는 예술혼 치닥거리도, 그리고 이제는 돌아온 거울 앞의 국화가 되고 싶지만, 우정조차 용인받지 못하는 영원의 노년도, 그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다.

디어 마이 프렌즈 인물 관계도 ⓒ tvn
나이듦, 꼰대, 그 이상 
1,2회를 통해 보여준 것은, 세상에서 쉽게 단절적으로 정의 내리는 '노년'에 대한 거부이다. 나이듦이란 시간의 경과로 한 세대를 동질의 그 무엇으로 정의내리지만, 드라마는 '나이가 들었다는 것' 그 이상 들여다 보면 동일하다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와 다른 세대는 쉬이, '꼰대'라고 치부해 버리는 그 '나이듦'의 진부함 속에 사실은 풍성하고도 생생한 삶의 풍경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단 2회만에 드러낸다. 희자의 삶이 하루 아침에 독거노인의 고독을 절실하게 보여준다면, 그녀의 친구인 정아는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한 '엄마'와 '아내'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그저 '꼰대'라고 치부했던 그들의 요지부동 고집스러움의 속내도 살짝 드러낸다. 고졸인 정아가 자신의 고졸이 부끄러울 줄 몰랐다는 토로처럼 중졸 그녀의 남편 석균의 열등감은 그의 자수성가에 힘입어 '본투비 꼰대'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딸과의 소통이 안된 엄마 난희의 '꼰대스러움'에는 사랑받아보지 못한 결핍의 잔재가 역력하다. 죽음을 결심한 희자에게 꼰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렇게 <디어 마이 프렌즈>는 oecd 국가 중 가장 급격하게 노령 사회가 되어가는, 하지만 그런 사회적 지표에 반대급부로 급격하게 사회적 신뢰감을 잃어가는 노년층을 '삶'을 가진 풍성한 존재로 불러온다. 그리고 '단절'되고 '처치곤란'한 노년을 넘어, 삶의 지속적이면 '완성'을 앞둔 존재로서 노년에 대한 '상념'을 풀어놓는다.

무엇보다 <디어 마이 프렌즈>가 반가운 것은 제목에서부터 '프렌즈'이듯, 노년의 삶을 엄숙하지 않은 어조로 다가서려는 점이 반갑다. 더구나 그 작가가 노희경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간 <꽃보다 아름다워(2004)>, <기적(2006)>, <유행가가 되리(2005)> 등 노년의 삶을 진솔하게 감동적으로 그려왔던 작가였기에 기대가 크다. 
by meditator 2016. 5. 15. 15:39